|
□ 病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 나무공
가까이 가보니
소년은 작은 나무공을 들고
서있다. 두 명의 취한 노동자들, 큰 소리로 노래부르며 비틀 비틀
이봐,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죽어 있는 것뿐, 이젠 자네 소원대로 되었네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주위의 공기가 약간 흔들린다.
훨씬 독한 술이 있었더라면
좀더 슬펐을 텐데, 오오, 그에 관한 한 한 치의 변화도
용서 못해
소년이 내게 묻는다.
公園은 어두운 대기 속으로 조금씩 몸을 숨긴다.
그 사내는 무엇을
슬퍼하는 것일까요, 오래 앓던 가족 때문일까요
나의 이 작은 나무공
밖은 너무 어두워, 둥근 것은 참 단순하죠
나는 입을 열 수 없다.
말이 되는 순간, 어떠한 대답도 또 다른 질문이 된다.
네가 내 눈빛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차라리 저녁에 너를 만난 것을 감사하자.
어느 교회의 검고 은은한 종소리
행인들 호주머니 속의 명랑한 동전소리
모든 젖은 정신을 꾸짖는
건조한 저녁에 대해 감사하자, 소년이여
저 초라한 街燈들을 바라보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대낮까지도 고정시키려 덤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이지.
나의 꿈은 위대한 律士, 모든 판례에 따라
이 세상을 재고 싶어요, 나는 매일같이 일기를 쓰죠
내가 아저씨만한 나이라면 이미 나는 법칙의 司祭
움직이면 안돼, 나는 딱딱한 과자를 좋아해
이건 나무
소년은 공을 튕겨본다. 나무공은 가볍게
튀어오른다, 엄청나게 커지는 눈, 이건 뜻밖이야
그러나 소년이 놀라는 순간
나무공은 얘야, 벌써 얌전한 고양이처럼
한 번 놀란 것에 더 이상 놀라면 안돼
그건 이미 나무공이 아니니까
그 취한 사내들은 어디로 갔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던
소년도 재빨리 사라진다. 아저씨는
쓸모없는 구름같아요, 공원은 이미 완전한 어둠
한 개 둥근 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서로 다른, 수백 개 율동의 가능성으로 들려오는
이곳. 견고하게 솟아오르는, 소년이 버린 저
나무공.
□ 沙江里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간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바람이 비탈길을 깎아 흙먼지를 풀풀 날리었다.
하늘을 깎고 어둠을 깎고 雪의 살을 깎는 소리가 떨어졌다.
산도 숲속에 숨어 있었다.
얼음도 깎인 벼의 밑둥을 붙잡고 좋지 않았다.
매 한 마리가 산까치를 움켜잡고 하늘 깊숙이 파묻혔다.
얼음장 위로 얼굴을 내밀었던 은빛 햇살도 사라졌다.
묘지에 서로 모여 갈대가 울었다. 그 속으로 눈발이 힘없이 쓰러졌다.
어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위어 있었다.
뒤엉켜 죽은 망초꽃들이 휘익휘익 공중에서 말하고 지나갔다.
'그것봐' '그것봐'
황토빛 자갈이 주르르 넘어졌다. 구르고 지난 자리마다 사정없이 雪이 꽂혔다.
□ 廢鑛村
쉽사리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우리는 젖은 이마 몇 개 불빛으로 분별하였다.
밤은 기나긴 정적의 숯으로 우리를 속이려 들었지만
탐조등으로 빗발을 쑤시면
언제든지 두서너 개 은칼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후에 빗물을 털어버린 시간이
허기의 바람을 펄럭이며 다가오고
우리는 낄낄거리며
쉽사리 틈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잔 등에
시뻘건 불의 구멍을 뚫곤 하였다.
누군가 불타는 머리 끝에서 물방울 몇 알을 훅훅 털며
낮은 소리로 군가를 불렀다. 후렴처럼
누군가 불더미에 무연탄 한 삽을 끼얹었고
녹슬은 기적 몇 마디를 부러뜨렸다.
우리들 이미 가득
불길은 무수한 암호를 날리었으나
우리는 누구도 눈을 뜨지 않았다.
번들거리는 무개화차 그림자 속을 일렁이며
아아, 고인 채 부릅뜬 몇 개 물의 눈들이
빛나며 또 사라져갔다.
우리도 한 때는 아름다운 불씨였다.
적막이 어둠보다 더욱 짙은 공포임을
흰 뼈만 남은 驛舍까지도 알고 있었다.
깊은 잠 한가운데 폭풍이 일어 우리가 식은땀을 꺼낼 때마다
어둠의 깃 한쪽을 허물고
예리하게 잘린 철로의 허리가 하얗게 일어섰다.
그럴 때면 밤의 절벽에 이마를 깨뜨리면서
우리는 지게의 멜빵을 달았다. 애초부터
우리에게 화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화강암 같은 시간의 호각소리가 우리를 재촉하고
새벽은 화차 속의 쓸쓸한 파도를 한 삽씩 퍼올렸다.
땅 속 깊이 불을 저장하고 우리는 일어섰다.
날음식처럼 축축한 톱밥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바람으로 불려갈 석탄에 삽날을 꽂으며 이제는
각자의 생을 퍼담아야 할 차례였다.
탐조등을 들고 일어서면 끓어오르는
피에 놀라 우리는
가만히 서로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욕망은
우리를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역사를 걸어나올 때
무개화차 위에서 타는 불꽃을
잠 깬 등뒤로 얼핏 우리는 빼앗았다.
아아, 그곳에는
아직도 남겨져야 할 것이 있었다.
폐광촌 역사에는
아직도 쿵쿵 타올라야 할 것이 있었다.
□ 비가 2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 세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있을 그대.
잘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이 적시던 헝겊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
턱턱, 짧은 숨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 폭풍의 언덕
이튿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유리같은 밤을 지났다.
그날 우리들의 언덕에는 몇 백개 칼자국을 그으며 미친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누이는 긴 팽이모자를 쓰고 언덕을 넘어갔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 어머니 왜 나는 왼손잡이여요. 부엌은 거대한 한 개 스푼이다. 하루종일 나는 문지방 위에 앉아서 지붕 위에서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있는 유지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 조용히 골동품 속으로 낙하하는 폭풍의 하오.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런닝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 공중에서 휙휙 솟구치는 수천 개 주사바늘. 그리고 나서 저녁 무렵 땅거미 한 겹의 무게를 데리고 누이는 뽀쁠린 치마 가득 삘기의 푸른 즙액을 물들인 채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것이다.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암흑 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집. 이 불끈거리는 예감은 무엇일까. 나는 헝겊같은 배를 접으며 이 악물고 언덕에 섰다. 그리하여 풀더미의 칼집 속에 하체를 담그고 자정 가까이 걸어갔을 때 나는 성냥개비같은 내 오른팔 끝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무서운 섬광을 보았다. 바람이여, 언덕 가득 이 수천 장 손수건을 찢어날리는 광포한 바람이여. 이제야 나는 어디에서 네가 불어오는지 알 것 같으다. 오, 그리하여 수염투성이의 바람에 피투성이가 되어 내려오는 언덕에서 보았던 나의 어머니가 왜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는지를.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 도시의 눈
- 겨울 版畵 2
도시에 전쟁처럼 눈이 내린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가로등 아래 모여서 눈을 털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서 내 나이를 털어야 할까? 지나간 봄 화창한 기억의 꽃밭 가득 아직도 무우꽃이 흔들리고 있을까? 사방으로 인적 끊어진 꽃밭, 새끼줄 따라 뛰어가며 썩은 꽃잎들끼리 모여 울고 있을까.
우리는 새벽 안개 속에 뜬 철교 위에 서 있다. 눈발은 수천 장 흰 손수건을 흔들며 河口(하구)로 뛰어가고 너는 말했다. 물이 보여. 얼음장 밑으로 수상한 푸른 빛.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은빛으로 반짝이며 떨어지는 그대 소중한 웃음. 안개속으로 물빛이 되어 새떼가 녹아드는 게 보여? 우리가.
□ 쥐불놀이
- 겨울 版畵 5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 걸요?
돌리세요,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 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
□ 램프와 빵
- 겨울 版畵 6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 종이달
1
과거는 끝났다.
송곳으로 서류를 뚫으며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는 金을 본다.
자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수백 개 명함들을 읽으며
일일이 얼굴들을 기억할 순 없지.
또한 우리는 미혼이니까, 오늘도
분명한 일은 없었으니까
아직은 쓸모 있겠지. 몇 장 얄팍한 믿음으로
남아 있는 하루치의 욕망을 綴하면서.
2
그들이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한두 시간 차이났을 뿐. 내가 아는 것을
그들이 믿지 않을 뿐.
나에게도 중대한 사건은 아니었어.
큐대에 흰 가루를 바르면서
김은 정확하게 시간의 각을 재어본다.
각자의 소유만큼씩 가늠해보는 가치의 면적.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지.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좀 복잡한 타산이니까.
똑바로 말한 적이 자네는
한번도 없어.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와이셔츠 단추 한 개를 풀면서
날 선 칼라가 힘없이 늘어질 때까지
어쨌든 우리는 살아온 것이니.
오늘의 뉴스는 이미 상식으로 챙겨들고.
3
믿어주게.
나도 몇 개의 동작을 배웠지.
변화 중에서도 튕겨져 나가지 않으려고
고무풀처럼 욕망을 단순화하고
그렇게 하나의 과정이 되어갔었네. 그는
층계 밑에 서서 가스라이터 불빛 끝에 손목을 매달고
무엇인가 찾는 김을 본다. 무엇을 잃어버렸나.
잃어버린 것은 찾지 않네. 그럴 만큼 시간은 여유가 없어.
잃어 버려야 할 것들을 점검중이지. 그럴 만큼의 시간만 있으니까.
아무리 조그만 나프탈렌처럼 조직의 서랍 속에 숨어 있어도
언제나 나는 자네를 믿어왔네. 믿어주게.
로터리를 회전하면서 그것도 길의 중간에서
날씨야 어떻든 상관없으니까.
4
사람들은 조금씩 빨라진다.
속도가 두려움을 만날 때까지. 그러나
의사의 기술처럼 간단히 필라멘트는
가열되고 기계적으로 느슨히
되살아나는 습관에 취할 때까지 적어도
복잡한 반성 따위는 알코올 탓이거니 아마
시간이 승부의 문제였던 때는 지났겠지.
신중한 수술이 아니어도 흰색 가운을 입듯이
누구나 평범한 秒針(초침)으로 손을 닦는 나이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여주게. 휴식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주 사무적인 착상이군. 여기와 지금이 별개이듯이
내가 집착한 것은 단순한 것이었어. 그래서
더욱 붙어 있어야 함을 알아두게. 일이 끝나면
굳게 뚜껑을 닫는 만년필처럼.
5
소리나는 것만이 아름다울 테지.
소리만이 새로운 것이니까 쉽게 죽으니까.
소리만이 변화를 신고 다니니까.
그러나 무엇을 예약할 것인가. 방이 모두
차 있거나 모두 비어 있는데. 무관심만이
우리를 수게 한다면 더 이상 기억할 필요는
없어진다. 과거는 끝났다. 즐거움도
버릇 같은 것. 넥타이를 고쳐매면서 거울 속의 키를
확인하고 안심하듯이 우리는 미혼이니까.
속성으로 떠오르는 달을 보면서 휘파람불며
각자의 가치는 포켓 속에서 짤랑거리며
똑바로 말한 적이 자네는
한번도 없어. 제발
그만두게. 자네를 위해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다 토해냈네. 또한
무엇이든 분명한 일이 없었고
아직도 오늘은 조금 남아 있으니까. 그럼.
굿바이.
□ 소리 1
아주 작았지만 무슨 소리가 들린 듯도 하여 내가 무심코 커튼을 걷었을 때, 맞은편 3층 건물의 어느 창문이 열리고 하얀 손목이 하나 튀어나와 시들은 푸른 꽃 서너 송이를 거리로 집어던지는 것이 보였다. 이파리들은 잠시 공중에 떠있어나볼까 하는 듯 나풀거리다가 제각기 다른 속도로 아래를 향해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나는 테이블로 돌아와 묵은 신문들을 뒤적였다. 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 있었다. 스위치를 내릴까 하고 팔목시계를 보았을 때 바늘은 이미 멈춰 있었다. 나는 헛일삼아 바늘을 하루만큼 뒤로 돌렸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내가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을 때 그는 소란하게 웃었다. '그냥 거리로요' 출입구 쪽 계단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 명함꽃이, 만년필, 재떨이 등 모든 형체를 갖춘 것들마다 제각기 엷은 그늘이 바싹 붙어 있는 게 보였고 무심결 나는 의자 뒤로 고개를 꺾었다. 아주 작았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다시 창가로 다가갔을 때 늘상 보아왔던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거리의 아주 작은 빈곳까지 들추며 지나갔다. '빈틈이 없는 사물들은 어디 있을려구요' 맞은 편 옆 건물 2층 창문 밖으로 길게 삐져나온 더러운 분홍빛 커튼이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버려두세요. 뭐든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까?' 먹다 버린 굳은 빵쪼가리가 엄숙한 표정으로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듯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둠과 거리는 늘상 보던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천정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압핀처럼 꽂혀 있답니다' 그가 조금전까지 서있던 자리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는 발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는 법이죠' 스위치를 내릴 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 가슴 알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그 소리는 분명히 내게 들렸다.
□ 소리의 뼈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熱風에 말려 둥글 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時着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들의 자손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宿醉는 몇 장 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 나의 플래시 속으로 들어온 개
그날
너무 캄캄한 길모퉁이를 돌아서다가
익숙한 장애물을 찾고 있던
나의 감각이, 딱딱한 소스라침 속에서
최초로 만난 事象, 불현 듯
존재의 비밀을 알아버린
그날, 나의 플래시 속으로 갑자기, 흰
□ 엄마걱정
열무 삽심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