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면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진다.
이 계절은 기차여행의 낭만과 문학의 향기 짙은 여행과 잘 어울린다.
거기에 논 밭 시골길을 걷는 코스가 있다면 금상첨화. 경춘선 기차를 타고
[봄봄] 등 주옥같은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이자 작품 배경무대가 있는 춘천 실레마을로 가을 여행을 떠났다.
논두렁 같은 골목길에서 발견한 주막집 터
넓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손등에 내려앉는다.
김유정 소설집을 읽다가 잠시 눈을 돌린다. 덜컹거리는 기차바퀴 소리를
들으며 먼 곳 산줄기를 바라본다. 북한강을 거슬러 가는 기차에 앉아
젊은 날 추억 가득한 몇 개의 역을 지나고 목적지인 김유정역에 도착했다.
김유정역은 2004년까지만 해도 이름이 신남역이었다.
그해 12월 1일 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 역이 있는 실레마을에서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랐다. 그래서 김유정역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간이역 역사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오래된 역사와 푸른 소나무가 가을하늘 아래 잘 어울린다.
역을 빠져 나와 도로를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여느 시골마을과
다를 것 없는 풍경 그대로다. 관광지처럼 개발된 곳 하나 없는 순박한
시골풍경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김유정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실레마을 문학기행의 출발점을 그의 생가로 잡았다.
실레마을 입석. 돌에는
‘실내마을’로 적혔는데 사람들은 ‘실레마을’이라고 말한다.
그는 1908년 1월11일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김유정 생가는 2002년에 복원했다. 기념관과 동상, 생가와 정자마당,
장독대 등이 있다. 생가는 ‘ㅁ’자 형태다. 벽이 울이고 방이
집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다. 마당은 갇힌 것 같으면서도 열렸다.
네모반듯한 마당 그 모양으로 지붕 사이에도 하늘을 담은 마당이 있다.
툇마루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을 담은 마당 속에는
늘 푸른 나무가 서 있고, 구름이 박혀 있고, 해와 달이 시간을 바꿔가며
금빛 은빛 가루를 뿌린다.
실레마을 전체가 김유정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생가 옆에 있는 전시관에서 실레마을 지도를 얻고
소설의 배경무대 위치를 확인한 뒤 발길을 옮겼다. 마을 앞 금병산에도
소설의 배경무대가 있지만 이번 걷기여행 코스에서는 산길을 제외했기 때문에
마을길로 나서기로 했다. 김유정 생가 앞 터는 김유정이 금병의숙을 만들어
야학을 열기 전에 움막을 짓고 야학을 하던 곳이다.
그 앞을 지나 논길로 접어들었다.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벼가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난다.
마을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돌담이 집 안팎을 나누고 있지만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높이에 안과 밖이 하나다. 호박넝쿨이 굴뚝까지
타고 오른 오래된 집은 사람 발길 떠난 지 오래다.
그곳에는 작은 표지판이 있었다. 김유정이 드나들었던 주막집이라는
안내판이었다.
이곳은 김유정이 자주 들러 코다리찌개 안주로 술을 먹던 곳이다.
읍내 학생들이 시비를 걸어와 싸움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읍내 학생들이 버리고 도망친 자전거가 50여 대나 되었다고 한다.
그의 소설 [솥]에 나오는
들병이(술병을 들고 다니며 술을 팔던 사람을 일컫는 말)와 근식이가
장래를 약속하던 주막집이기도 하다.
농로와 논둑길을 따라가며 찾아야 하는 소설의 배경무대는 숨바꼭질하듯
꼭꼭 숨어 있었다. 지도를 보고 있지만 헛갈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주막집터를 발견한 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서 찾아간 곳이 소설 [봄봄]의 봉필영감 집터다.
소설 [봄봄]의 봉필영감 집터에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김봉필은 실레마을에서 욕필이로 통했던 실존인물이다.
그는 당시 딸만 여럿 낳아 데릴사위를 들여 부려먹기도 하고,
금병산 산림감시원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두루 인심을 잃었다.
점순이와 성례는 시켜주지 않고 일만 부리는 장인과 주인공이
드잡이 하던 곳이다. 김유정이 한들 주막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백두고개(박두고개)를 넘어오다가 그 장면을 보고 메모해 두었다가
[봄봄]의 한 장면에 이용했던 것이다.
그 다음 찾은 곳이 ‘금병의숙 터’다.
김유정은 현재 금병복지회관 자리에 ‘금병의숙’이라는 야학을 열었다.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우회와 부녀회, 노인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현재 금병의숙 터에는
김유정 기적비와 금병의숙을 세운 기념으로 심은 느티나무가 있다.
한들주막에서 박두고개 넘어 실레마을로 오는 길
실레마을 옆은 한들마을이다. 논이 넓어 이름이 ‘한들’이다.
그곳에는 팔미천이 흐른다. 김유정은 실레마을에서 백두고개(박두고개)를
넘어 팔미천에서 멱을 감고 주막에서 술을 즐겼다고 한다.
백두고개를 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경춘선 기찻길 옆 도로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가기로 했다. 한들마을은 누렇게 익은 벼가 바람에
넘실대며 일렁이는 모습이 이름 그대로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황금색 논이 풍요롭다. 논 옆 흙길이 정겹다.
논길 골목길을 잘 찾아다니면 김유정 소설의 배경무대를 알리는 푯말을
찾을 수 있다. 보물찾기 하는 기분도 든다.
경운기를 고치고 있는 아저씨께 김유정에 대해 여쭤봤더니 팔미천에서
목욕도 하고 이곳 주막에서 술도 먹었다고 대답한다.
한들마을 주막에서 술을 먹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 주막은 [산골 나그네]에
나오는 덕돌네 주막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한 대목,
“처음 보는 아낙네가 마루 끝에 와 섰다.
달빛에 비끼어 검붉은 얼굴이 해쓱하다. 추운 모양이다.
그는 한손으로 머리에 둘렀던 왜수건을 벗어들고는 다른 손으로 흩어진
머리칼을 씨담어 올리며 수집은 듯이 주뼛주뼛한다. /
저어 하룻밤만 드새고 가게 해주세유. /
남정네도 아닌데 이 밤중에 웬일인가, 맨발에 짚신짝으로…”
작은 다리(대평교)에 앉아 팔미천 흐르는 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옛날 김유정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돌아 나오는 길 어느 집 처마
아래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겨울방학 때 올 손자 손녀 주려고 곶감을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바라만 봐도 죄가 씻길 것 같은 시골마을 풍경
속을 걷는다. 그렇게 다시 김유정 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로수 단풍 아래 빨간 우체통
김유정은 죽었지만 그의 고향 실레마을에서 그는 살아 있었다.
김유정 문학기행을 마치고 실레마을에서 돌아 나오는 길,
가로수 갈잎 단풍 아래 빨간 우체통이 보였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엽서를 쓰고 싶어졌다.
보내는 사람을 쓰는 줄에는 ‘여행자’라고만 적었다.
그리고는 받는 사람 란에 누구의 이름을 쓸까 고민했다.
한때 문학을 나누던 친구들도 생각나고, 사랑하는 여인도 스쳐지나갔다.
아이들에게 쓸까도 생각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받는 사람을
쓰는 줄을 빈 칸으로 남겨 놓고 실레마을 여행기를 간단히 적었다.
부치지 못한 엽서는 김유정역 어디쯤에서
가을이면 낙엽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가는 길
*자가용
서울 - 청평 - 가평 - 강촌 -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역 - 김유정 문학촌
*기차
청량리역에서 출발 경춘선 김유정역에서 내리면 된다.
역에서 김유정문학촌까지 걸어서 약 5분 정도 걸린다.
*현지 교통
춘천시내에 도착한 사람이라면 춘천시내(중앙로 등지)에서 운행하는 1번,
67번 시내버스를 타고 김유정역에서 내려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춘천시청 주변에서 김유정문학촌까지 약 8km 안팎 거리다.(택시 이용객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