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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 숙종(肅宗) 7년(1681) 11월 24일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과 증 영의정(贈領議政) 송준길(宋浚吉)을 흥현서원(興賢書院)에 추향(追享)할 것을 청하는 상소의 사연을 시행하지 않는 건
1.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생원(生員) 진후박(陳後搏) 등의 상소에, ‘선정신(先正臣)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과 증 영의정(贈領議政) 송준길(宋浚吉)은 학문과 행실이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빛나서, 변방의 학사(學士)들도 존경하고 사모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본 고을에는 흥현서원(興賢書院)이 있으니, 바로 고려조〔前朝〕의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와 아조(我朝)의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를 병향(並享)한 곳입니다. 이에 두 현신(賢臣)을 사우 한 곳에 추향(追享)하여 존경하고 높이 받드는 곳으로 삼고자 상소를 올려 호소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현신의 도덕과 학문은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먼 변방 지역의 유생들도 존경하고 사모할 줄을 알아서 천 리 먼 길을 와서 상소를 올려 존경하고 받들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많은 선비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두 신하의 서원은 이미 다른 고을에 많이 있으며, 지금 추향할 것을 청하는 먼 변방 지역의 고을은 두 신하가 평소에 왕래하던 곳이 아니니, 지금 중첩해서 사전(祀典)을 시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따라서 상소의 사연을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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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함경도(咸鏡道)
영흥(永興) 흥현서원(興賢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계손(李繼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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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48권 / 함경도(咸鏡道)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흥현서원(興賢書院) 광해주(光海主) 임자년에 세웠으며, 정사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 모두 문묘(文廟) 편을 보라. 이계손(李繼孫) 함흥(咸興) 편을 보라. ○ 정충사(精忠祠) 숙종(肅宗) 을묘년에 세웠으며, 정종(正宗) 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경복(金慶福) 벼슬은 종성 부사(鐘城府使)이며,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증직하였다. 이몽서(李夢瑞) 벼슬은 장간 현감이며, 군자첨정(軍資僉正)을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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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예전(禮典) 6조 / 제6조 과예(課藝)
과예(課藝)를 부지런히 하여 급제(及第)가 속출(續出)하여 문명(文明)의 고장이 되는 것도 수령의 지극한 영광이다.
경헌공(敬憲公) 이계손(李繼孫)이 앞서 함흥 부윤(咸興府尹)이 되었을 때와 뒤에 북도 관찰사(北道觀察使)가 되었을 때, 모두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人材) 기르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이 성종(成宗)께 아뢰기를,
“이모(李某)가 함흥 부윤으로 있을 때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길렀으므로 지금까지도 과거에 급제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였다. 최립(崔岦)은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감사(監司)들은 생각이 군사를 다스리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공만은 학교로써 우선을 삼아 조정에 청하여 경적(經籍)을 나누어 주고, 학문이 있는 자를 골라 교관(敎官)으로 삼고, 자제 중에 총명한 자가 있으면 친히 가르치기도 하고, 또 도회(都會)의 법을 만들어 사시(四時)로 시험을 보이니, 1년만에 온 도(道)가 크게 교화되어 사람들이 공을 부모처럼 사랑하여 오래도록 쇠하지 않았으니, 왕좌(王佐)의 재목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과 영흥(永興)의 흥현서원(興賢書院)과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에 모두 공을 주벽(主壁)으로 모시었다.
[주-D009] 이계손(李繼孫) : 자는 인지(引之)이다. 세조(世祖) 때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나 부임하기를 꺼려하다가 웅천진(熊川鎭)으로 충군(充軍)되었다. 그 뒤 곧 풀려 여러 요직을 거쳤고, 성종(成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 경헌은 그의 시호이다.[주-D010] 김종직(金宗直) : 성종(成宗) 때의 대학자이다.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여러 고을의 군수와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문간은 그의 시호이다.[주-D011] 도회(都會) : 계회(契會)ㆍ종회(宗會)ㆍ유림(儒林) 회합 등의 총칭인데, 여기서는 유림의 회합만을 말한다.[주-D012] 주벽(主壁) : 사원(祠院)에 모신 여러 위패(位牌) 가운데서 으뜸되는 위패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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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집(陶菴集) 이재(李縡)생년1680년(숙종 6)몰년1746년(영조 22)자희경(熙卿)호도암(陶菴), 한천(寒泉)본관우봉(牛峯)시호문정(文正)특기사항노론(老論)의 낙론(洛論)을 대표하는 학자(學者)
陶菴先生集卷二十一 / 書[十三] / 答興賢院儒 戊午
영조 | 13 | 1737 | 정사 | 乾隆 | 2 | 58 | 4월, 예문 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7월, 忠烈書院과 深谷書院의 學規를 정하다. |
영조 | 14 | 1738 | 무오 | 乾隆 | 3 | 59 | 4월, 대사헌이 되다. ○ 대신과 옥당에서 소환을 청하다. |
伏蒙僉賢。不以僕卑鄙。屬以山長之任。自知陋劣。萬萬不堪。而重違千里勤意。亦未敢自疎於先賢崇奉之地。謹已幷盛幣拜承。不勝惶愧之至。仍念
書院之設。不徒爲先賢春秋俎豆之饗而已。蓋將肄習于斯。藏修于斯。以之
闡明儒敎。丕變俗習。况我兩先正先生。實東方理學之宗。仁鄕崇奉之意。其亦以此乎。苟僉賢不徒區區于科學。而有意於兩先生之道。則僕雖孤陋。亦將樂與之同事。至於虛縻院任。坐辱膰儀。非私義之所敢出者。竊願僉賢。更存商量而進退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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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菴先生集卷二十一 / 書[十三] / 答興賢院儒 甲子
영조 | 20 | 1744 | 갑자 | 乾隆 | 9 | 65 | 1월, 東宮 嘉禮의 불참으로 請罪疏를 올리다. ○ 諸生과 兩宋先生의 太廟 從享 位次를 논하다. ○ 〈童子朝夕歌〉, 〈心經集詿抄節〉이 완성되다. |
膰儀已具狀上謝矣。便中又辱書問。何慰如之。至如朱講長。雖未有一日之雅。而聞名則蓋久。不面而先書。此古道也。荷意誠厚。愧無以堪之。生一疾經年。轉益沉痼。舊業全荒。雖有朝聞之願而恐莫之遂也。昨冬諭文。諒出相愛。而終是未信而言。不謂一言相契。講事之行。若是其神速也。嘗謂貴道風氣剛勁。類漢之關中。其勇於爲善。果如此也。况六十六講員。此外似無。而下於此者亦多四五十人。此豈他路之所能及者哉。感歎不能自已。書中非知之難行之難一語誠切至。循此而交相勉焉。則豈無實效耶。尤可幸也。講堂之役。聞未完畢。新倅略有面分。故作書以付。試傳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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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菴先生集卷二十一 / 書[十三] / 答灆溪院儒 癸亥
영조 | 19 | 1743 | 계해 | 乾隆 | 8 | 64 | 4월, 朴弼周에게 편지하여 出處를 논하다. ○ 8월, 영남 유생 成憲柱 등이 상소하여 소환을 청하다. ○ 9월, 別諭가 내렸으나 상소, 사양하다. ○ 이해에「朱子語類抄節」이 완성되고, 〈尊攘編〉 편찬이 시작되다. |
竊以文獻先生懿德正學。實爲百世宗師。後生顓蒙。夙所欽仰。而嶺嶠脩絶。無由一訪遺躅於灆溪岳城之間。乃蒙僉尊不鄙。遠辱章甫。請以山長之名。自顧菲劣。無以堪此。而亦未敢仰孤多士之勤意。謹以奉許。而抑又有可復於齋中者。夫書院之設。正爲藏修讀書之所。而今則有其名而無其實。此爲遠近公患。僉尊居先生之院。苟不讀其書而明其道。則其將何顔拜先生於芬苾如在之際耶。往雖不諫。來猶可追。果能從事於斯學否。如其不然。鄙人不敢以山長自居矣。金生之回。已及此意。而猶慮其不詳。更憑邸便付謝。願明示尊意。俾决其辭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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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菴先生集卷二十一 / 書[十三] / 答灆溪院儒 乙丑
영조 | 21 | 1745 | 을축 | 乾隆 | 10 | 66 | 〈中庸講說〉, 「檢身錄」이 완성되다. ○ 7월, 대사헌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六德如書之言九德。就其目而論先後之次。則分別是非。在所當先。故以知爲首。與四德全體。本自不同。且此知字。視中庸三達之知。大學格致之知。淺深自別。不可一例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