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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 사명과 축복 사이 (마28:16-20)
예전에 아는 권사님 남편분이 간암으로 임종하시게 됐는데 저를 증인으로 세우시더니 믿지 않던 아들 삼 형제에게 “아버지 유언이다. 니들 꼭 교회 다니라.”며 일일이 약속을 받으시는 데, 둘째와 막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예”라고 하는데 큰아들만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힘겹게 세 번 네 번을 말해도 묵묵부답이기에 보다 못한 제가 뒤로 끌어내서 “나중이야 어찌 됐든 임종 전에 편히 눈을 감으시도록 예라고 하세요.”라고 했더니 큰아들이 그럽니다 “저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안 합니다.”
그렇게 장례를 치렀고 1년이 지난 어느 주일날 그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교회엘 왔습니다. 그리고는 후회막심한 표정으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때 ‘예’라고 할 걸 그랬어요.”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예”라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앞에서와 하나님의 권고와 명령 앞에서 ‘예! 제가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믿음은 발동되는 겁니다.
일상적으로도 보면 대부분의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은 자식 잘되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듯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나 잘되게 하시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온전한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구나!”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구나!”라고 고백하는 것이 ‘축복받는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그걸로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면 우릴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사명을 감당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사명과 축복’은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이자 당부의 말씀을 주고 계시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뭘 하라셨는지나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보다는 그 모든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주고 계시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명은 능력이나 재주가 아닌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사명의 내용보다 약속의 말씀에 더 집중해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우리의 믿음이 확고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때 ‘함께’라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한데 섞여 어우러져’라는 뜻인데, 이는 단지 ‘섞였다’는 차원을 넘어 ‘분리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비비다’는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밥에 각종 재료를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추가하여 비빔밥을 만들었다고 할 때, 이후 각각의 재료들을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어렵다 못해 불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함께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내가 섞이는 것.’ 또는 ‘나와 예수님이 분리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삶에 있어서는 예수님 믿을 때가 따로 있고 내 일할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얼 하든 그것이 ‘예수님 믿는 것’이고 그게 ‘내 일 하는 것’이 되어야 무얼 하든 거기에 예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고 하나님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라면 일상에서 예수님과 내가 따로 살지 마시고 언제든 예수님과 내가 섞여 사는 삶을 살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이 믿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역사 하시는 것이 축복이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명과 축복하심이 예수님과 나 사이에서 언제나 소위 ‘주거니 받거니’가 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우리에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한다.’라는 약속에 근거할 때 예수님은 약속을 철저히 이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함께하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능력과 감당할 힘부터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함께한다.’라는 약속에 근거할 때 내 쪽에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그간 우린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잊고 살고 있었는지요?
이제라도 알아야 할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방법은 무엇이며? 이제라도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능력을 받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두 질문의 답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주시는 방법이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셔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받는 방법이 ‘내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에서도 보면,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말씀만 놓고 보면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에서 자칫하면 권세는 예수님이 다 가지셨으면서 정작 세상에서 할 일은 우리에게만 시키신다고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가서’라는 말씀 앞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붙어 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 내용이 뒤 내용의 원인이나 근거가 될 때 쓰여서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접속사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18절과 19절을 이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권세를 주셨다. 그리고 그 권세를 가진 내가 너희와 함께할 거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가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예를 하나 들자면 손흥민 선수가 많은 이들에게 칭찬받는 것 중에 특히 팀 동료에게서 칭찬받는 이유는 자기가 골을 넣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공을 동료에게 패스해 준다는 겁니다.
자기가 골을 넣을 수 있음에도 굳이 동료에게 공을 넘기는 이유는 동료에게 골 넣는 기쁨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손 선수에게서 공을 넘겨받은 사람은 공이 자기에게 왔다는 부담감이 아니라 골을 넣게 되어 고마움을 느낀다는 겁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지상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명하시는 것도 실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실제로 사역을 완수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신 거고 우리는 다만 그런 예수님을 모시고 내가 사는 곳곳으로 가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내가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까지가 사명입니다. 그다음. 그곳에서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은 그곳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젠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사명은 대단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디 있든 거기에 예수님이 계심을 기억한다면,
거기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거기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사명인 거고, 그 자리가 우리의 복음 현장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는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믿음이 충만해야 전도하러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만을 기다린다며 소중한 시간 다 보내고 현장 근처엔 가보지도 못하고 맙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쯤에서 우린 우리가 나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드러낼 방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절 초반부를 보세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는 전도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니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과연 우리에게 안 되는 일을 하라고 하셨을까요?
되니까 하라고 하셨을 겁니다.
이게 매 순간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되니까 믿으라고 하실 것이다!”
“되니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되니까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이다!”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어려운 일을 되게 할 수 있을까요?
본문 16절을 보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즉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일반 대중을 향해 말씀하셨던 산상수훈과는 달리 본문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만을 향해서 하신 말씀인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수준을 넘어, 나 자신이 먼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데, 문제는. 그러자니 또 따라오는 질문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간혹 어떤 분들은 믿음을 위해 “저는 직장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가족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물질을 포기했습니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훌륭한 믿음이지만 약간의 잘못 생각하시는 부분도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물질 등등은 믿는다는 이유로 포기해야 할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받아야 할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참 제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라 ‘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포기하면 뭐 합니까? 내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하는데.
가정을 포기하면 뭐 합니까? 내 고집과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는데.
물질을 포기하면 뭐 합니까? 내 분노와 내 미움을 포기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마태복음 16:24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살면서 우리의 복된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문제는 ‘남들’이나 ‘환경’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정도 직장도 친구도 물질도 다 포기했다고 해서 우리까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이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때는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부활도 승천도 아직 없었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그들도 있어야만 했고 그러자니 세상 것들을 다 버리고서라도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도, 부활도, 승천도 있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도 계시기에 우리가 굳이 세상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예수님이 찾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다른 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가기 위해’ 다 버렸어야 했지만, 우린 ‘예수님이 와 주시기에’ 다 버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다만 하나. ‘나만’ 버리면 되는 겁니다.
다 버리고 따른 듯 해도 나를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게 된 겁니다.
다 버리고 따랐다 해도 나를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겁니다.
나를 버리지 못한 채 예수님을 따랐기에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가고 만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나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면 언제, 어디, 어떤 때라도 우린 이 한마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믿습니다!”
사실이지 내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한 때에 맞닥뜨리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할 일은 이 말 한마디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마디가 우리로 하여금 나를 버리게 하고 나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린 어떤 순간에 자존심이 꿈틀거릴 때면 “그래도 믿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순간 고집과 욕심이 솟구칠 때도 “그래도 믿습니다.”라고 하려고 해야 합니다.
언제든 분노와 미움과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과 염려가 나를 사로잡을 때라도 우린 “그래도 믿는” 하나님의 성도요 예수님의 제자로 세상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고백과 믿음이 쉽게 나오고 쉽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에 어느 때라도 “그래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믿음의 연습과 훈련을 거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론 우리가 피하고 싶은 인생의 시험과 고난도 이런 연습과 훈련의 기회가 될 것이기에 간혹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과 시험의 때에도 잠시 침묵하실 때도 있으신 겁니다.
그렇더라도 그 모든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그래도 믿습니다.”라고 할 때면,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그래도 축복하노라.”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듯 “그래도 믿습니다.”가 우리의 사명이라면, “그래도 축복하노라.”가 우릴 위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성도 된 우리에게서 ‘사명과 축복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말씀 제목을 ‘사명과 축복 사이’라고 했습니다만, 실은 사명과 축복 간에 ‘사이’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섞여 있고 어우러져 있는 한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내가 하는 일이 사명이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축복입니다. 그렇기에 사명과 축복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순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으신다면 이제부턴 축복에만 너무 연연하지 말고 오히려 사명에 더욱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은 같은 것이기에 사명이 있는 곳에 축복은 반드시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걱정이나 고민할 일들 앞에서라도 이렇게 생각하세요. 지금 이 순간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인가를.
마침내 축복은 하나님이 주실 터이니 지금은 오직 사명에만 열심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명령이지만 단지 전도나 선교만을 강조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지상 명령을 감당함에 있어 우리가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 있기에 그와 관련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즉 본문에서의 핵심 주제는 어떤 경우에도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축복을 받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기에 내게 있는 믿음을 훗날에 천국 입성을 위한 자격증 정도나 당장의 기도 응답의 청구서쯤으로만 여기지 말고 항상 지금의 내 자리와 위치에서 하나님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 즉 나의 사명을 위해 지금 나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하는 가를 늘 생각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설 때면 하나님도 그런 믿음을 보시고 우릴 축복하십니다.
앞으론 지상 명령이다. 사명이다. 하는 말들로 인해 믿는 걸 어렵다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라’고만 하셨다면 고민이 좀 되겠으나 예수님은 ‘너희가 하라’시면서 곧이어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세상 사는 일이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어렵고 힘들지 몰라도 예수님과 함께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매 순간 어려움을 보는 대신 오직 예수님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그래도 믿습니다!’입니다.
이 한마디가 사명의 시작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심으로 나도 예수님과 함께 살며 매 순간 내게 주신 믿음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고 누리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