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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9월 8일 이동휘가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위해 상하이에 도착함으로써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이 성사되었다.[1]
한성정부와 상해 임시정부의 통합은 수월한 편이었는데, 한성정부를 주도한 인사들이 일찍이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가지며 의사를 반영해왔기 때문이다. 한성정부를 주도한 인사들은 한성정부를 서울에 수립하였지만 활동은 해외에서 해야 된다는 뜻에서 처음부터 해외인사를 망라한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정부를 상하이에 둔다는 점에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1]
1919년 9월 11일 상하이를 거점으로 상해 임시정부,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 등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들을 개헌형식으로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되었다.[16] 이때 4월 11일 제정된 임시 헌장의 내용을 대폭 보강하여 9월 11일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하였다.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5][6]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이후 김구, 이승만, 이동녕, 박은식 등이 임정의 수반을 거쳤다.[7]
상해 임시정부로 통폐합된 것은 지리적인 이점을 안고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정부(의정부와 행정부)를 구성하여 의원정치의 본령을 발휘하였고, 행정부를 구성하여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경우 가장 유연하게 대처했던 정부였기 때문이었다. 국내를 비롯하여 일본군이 주둔해 있는 중국 동삼성이나 러시아령 또는 본토와는 너무 떨어진 미주 일대보다는 상해가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다.[24] 국호를 상해 임시정부의 것으로 정한 것은 다른 두 곳의 경우는 국호의 명시가 없었으므로 당연하였다. 그리고 각료구성을 한성정부의 것으로 따른 것은 한성정부가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수립되었으므로 정통성의 명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워싱턴 D.C.에 이미 집정관총재사무소가 설치, 운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6]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을 임시정부 수립일로 하여 공식적으로 기념하였다.[25][26][27][28][29]
임시정부 수립의 주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한 대한제국 의친왕 이강
1919년 4월 11일부터 9월 11일까지의 각료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국무총리 이승만, 국무총리대리 이동녕, 국무총리대리 안창호,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南亨祐, 법무총장(겸임) 안창호, 재무총장 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비서장 조소앙[7]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을 때의 각료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국무총리임시대리 이동녕, 국무총리대리(겸임) 신규식,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외무총장대리차장 鄭仁果, 외무총장(겸임) 이동휘, 외무총장대리차장 신익희, 외무총장대리차장 李喜儆, 외무총장(겸임) 신규식, 군무총장 노백린, 군무총장대리차장 金羲善, 군무총장(겸임) 이동휘, 군무총장 노백린,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학무총장대리차장 金仁全, 재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교통총장대리 차장 김철, 교통총장 南亨祐, 교통총장 孫貞道, 노동국 총판 안창호, 노동국 총판(겸임) 이시영[7]
이 외에 신한청년당의 김규식, 여운형, 김구,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김동삼 등 30인도 참여하였다.
구 대한제국 인사들도 참여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황해도 관찰사와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낸 김가진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 작위를 받은 고위직 관료였다. 그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대동단이라는 비밀 독립 조직을 결성하고 총재를 맡았다. 그는 1919년 10월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고문 겸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았다. 김가진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한때 황태자 후보로 거론되었던 의친왕(이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우고 실무 준비를 하였다. 의친왕은 밀서를 보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의사를 표시하였다. 의친왕은 1919년 11월 중국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 차림으로 변복하고 만주 안동현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체포된 후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의친왕이 임시정부에 보낸 밀서 내용은 1919년 11월 20일자 독립신문에 실렸다.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였다.
대한제국의 계승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고종이 창안한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의 첫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결정되었다.[30] 국호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할 때 대한민국·조선공화국·고려공화국 등이 제안되었고[31] 신석우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하니, 여운형이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또 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부연 설명을 하며 대한제국에서 황제의 나라를 뜻하는 '제국(帝國)'을 공화국을 뜻하는 '민국(民國)'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을 국호로 제안하였고, 다수가 공감함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32]
1919년 4월 11일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8조와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헌법 제7조에 공히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밝혔고, 제3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구한국(대한제국)의 판도로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함을 다시 확인하였다.
주요 활동
상하이 시기 (1919~1932)
초기 활동 (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1919년 9월 1일, 집정관 총재인 이승만의 이름으로 발행된 100달러 대한민국 공채표.
초기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국내의 비밀행정조직망)와 임시정부 통신 기관인 교통국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애국공채 발행과 국민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1919년 7월 임시정부는 국제연맹 등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을 편찬하기로 하고, 7월 7일 정부령으로 국무원 내에 '임시사료편찬회'를 설치하였다. 임시사료편찬회는 총재 안창호, 주임 이광수, 간사 김홍서와 위원 8명 및 조역 22명 등 총 3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9월 23일 4편 4책으로 된 사료집을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총 100질을 출판하였는데, 이 중 1질이 미국 콜롬비아대학 극동도서관에 완질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33]
한성정부 승인-개조 논란 (1919~1920)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통합 직후부터 이동휘의 함경도 계열, 안창호의 평안도 계열, 이동녕·이시영의 경기도 계열 간의 주도권 경쟁이 심각했다. 이동휘와 문창범은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성정부 형태로 개조한 것을 두고 안창호에게 대한국민의회 측을 무시하고 사기친 거냐며 항의했다.[34][35] 이 한성정부 승인-개조 논란의 불똥은 이승만에게도 튀어서 집정관총재-대통령 직함 논란까지 생겼다.
집정관-대통령 칭호 논란 (1919~1920)
1919년 8월 25일, 상해에서 안창호는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36]
| “ | 워싱턴 구미위원부 이승만 각하. 처음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 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금은 각하가 집정관 총재 직명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하실 것이요,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ㅡ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36] | ” |
1919년 8월 26일,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안창호의 명의로 된 임시정부의 항의 전보를 받고 그 이튿날 즉시 그의 입장을 설명하는 전문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36]
| “ |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 씨, 우리가 정부 승인을 얻으려고 전력하는데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고 대통령 명의로 한국 사정을 발표한 까닭에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36] | ” |
1919년 11월 29일, 이동휘가 이승만에게 보낸 서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각하, 혹칭 집정관 혹칭 대통령 不一한 명의를 다시는 대통령으로 확정하시고 헌법을 존중히 알으시고 공식상 문독에도 확적한 명의표현하시여야 大綱이 立하여 시정이 순행하리라 사유하나이다."[37]
1919년 12월 3일 안현경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중에는 이동휘, 안창호, 이동녕·이시영 3파벌 싸움의 경과가 적혀 있으며, 이승만에게 집정관이란 칭호를 쓰지 말고 대통령이란 칭호를 쓰는 게 좋겠다는 조언이 있다.[38]
1919년 12월 24일, 현순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는 '임시정부의 재정이 곤란한 가운데 대한인국민회가 안창호만 신뢰하고 그에게만 자금을 지원하여 안창호만 풍요롭게 지내고 있다', '서북파가 연결하여 기호파에 대항한다던지, 서북파가 또 스스로 분립하여 서로 대치한다던지 하여 임시정부가 단합치 못하고 있는데, 그 원인은 안창호나 이동휘가 러시아와 미주 등지에서 우민들에게 지방열을 고취하기 때문이다' 등의 내용이 있다.[39]
1920년 1월 17일, 현순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안창호와 이동휘는 서로 싸우다가도 이승만이 집정관총재 직함을 써서 상하이에 공문이나 전보를 보냈다하면 바로 합세하여 이승만을 모욕하였다. 집정관총재 직함 사용에 대해 이동휘는 "대가리가 썩엇다"고 했고 안창호는 "정신병 들인 자"라고 욕했다.[40] 집정관총재-대통령 직함 논란에 처음엔 어리둥절한 반응만 보이던 이승만은 이런 소식을 듣자 적극적으로 논란을 해명하기 시작했다.
1920년 1월 22일, 이승만이 안현경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 | 만약 지금 내가 선언하길 '나는 대통령이요 집정관이 아니라'하면 국내에 충의지사의 희생한 목적을 배반하는 뜻도 없지 않거니와 혹자는 응당 평론하기를 '내가 대통령의 명호를 집정관보다 낫게 여긴다', '사실보다 명칭을 중히 여기는 자'가 될 것이오. 만약 '집정관으로 행할 것이요 대통령은 아니라'하면 이는 당초에 선거한 인원들의 실정도 아니오, 겸하여 각국에 통첩한 바와도 모순이 됨이라.고로 내가 희망하는 바는 상해와 내지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 각처 인원을 의하여 대부분 합동한 양으로 집정관이나 대통령이라 하는 것을 통용하여 준행함이 좋을 것 같소이다. 또한 나는 당초부터 집정관이 대통령으로 알았고 또한 이것이 사실인 바 증거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자기기만인이리요. 국한문으로는 '집정관'이라 하였고 영문으로는 'President'라 하였으니 이는 곧 대통령이라는 뜻이외다. 이것을 재미 한인 일부는 평하길 '이승만 박사는 명호를 혹차 혹피로 불일기단(不一其端)'이라 하나 사실은 아니외다. 상해에 각원 제씨와 임시 의정원 첨원이 동일히 원하시면 나는 어차 어피에 고집지 않고 응종할 터이나 이와 같은 사정은 상세히 알리고자 함이외다."[41] | ” |
1920년 1월 28일, 이승만이 이동휘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다음과 말하고 있다. "헌법을 존중히 하라 하심은 주의하도록 하기 어렵지 않으오나 이 정부 헌법은 고미득견(姑未得見)[42]이외다."[43]
1920년 2월 15일, 대한국민의회는 정식으로 복설을 선언하였다.[15]
1920년 2월 18일, 이승만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에는 더 이상 집정관 총재 직함을 사용하지 않고 대통령 직함을 사용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정부 제공의 권고하신대로 대통령으로 행하오리다."[44]
1920년 2월 26일, 안현경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 | ⋯ 집정관-대통령 사건은 이번에 하신 전보로 해결이 된 모양인 바 다시 말 없을듯 하외다. ⋯ 내지 인심에 이 박사 대통령을 변경한다 말이 들어가면 모든 일이 와해될듯 하며 본국에서 바라기는 대통령 외교만 믿는다는 말 뿐인 고로 안창호 씨가 본국에 세력을 확장하려던 일은 실패되게 되며 본국에서 안창호 씨 행동과 이동휘 행동을 대공격이라고 합니다. ⋯ 아령에서는 임시정부를 반대하여 임시 의정원도 파송치 않고 시방 위임통치 문제로 시비가 분분한 모양이외다."[45] | ” |
1920년 3월 23일, 임시 의정원에서 안창호는 한성정부 승인-개조 논란의 경과를 설명한 다음 이동휘 측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 사실 이러한즉 내가 생각하는 선후책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우리를 무시하고 우리를 사기하였다'하니 그 무시하고 사기하던 각원을 없애버리고 당신네[46]의 신임하는 정부를 조직하라 하는 외에 방책이 없다. 현금 세계는 한국 문제를 극히 주목하는 중이오, 각국 통신원들은 어떤 작은 일이든지 빼지 않고 자국에 보도한다.일전에도 모 외신 기자가 나에게 말하기를 '국토가 있어도 이와같이 불통일하면 안될 터인데 하물며 일촌의 국토가 없으면서 이같이 갈라지는 너희가 무엇으로 독립을 하겠다 하느냐'하고 '애당초에 독립전쟁이란 소리는 하지도 마라' 할 때에 나의 등에 땀이 흘렀노라. 안창호가 죽어서 한국이 통일된다 하면 죽으리라. 이 문제의 원인을 색하면 말을 잘못하였거나 마음을 잘못 먹었거나 하여간 책임있는 나를 처치하는 외에 다른 방책이 없다. 혹 의원 중에 '임시 의정원 해산을 단행하면 통일이 될 터인대 왜 못하느냐'하여 정부의 무능력을 책하지마는 임시 의정원 해산이란 말은 정부되여서는 입 밖에 내지도 못할 말이라. 선후책은 오직 책임자 물러가는 외에 없나니 무능력이니 무성의니 하여 악졸로 간다 표하지 말기를 희망하노라.[35] | ” |
1921년 1월 24일, 이동휘는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문책을 받다가 임시정부를 떠났다. 1921년 5월 11일, 안창호는 노동국총판 직을 사임하고 그 이후로 임시정부 각료를 맡지 않았다.[47] 이에 대해 안창호는 스스로 평민으로 독립운동하는 것이 독립운동계에 더욱 유익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이 한성정부 승인-개조 논란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야기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 논란 (1919~1920)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이승만은 미국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전승국의 추인하 독립을 추진하였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임정 대통령 현지 취임을 위해 상하이에 도착한 후, 러시아 연해주 동포 사회를 이끌고 있던 이동휘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동휘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에 반대하다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이승만 수반론에 반대의사를 갖고 있었던 신채호도 외교독립론자들의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에 대해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고 성토하며 임시정부에서 이탈했다.
신채호는 분명히 위임 통치안이 정한경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정식 결의를 얻었으며, 이승만 뿐 아니라 김규식도 같은 문서를 각국에 발송되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즉, 그는 거짓 모함을 한 것이거나 아니면 잘 모르면서 저런 발언을 한 셈이다. 그러나 현순의 자서전인 현순자사(玄楯自史)를 보면 대강 왜 신채호가 저런 발언을 했는지 알 수 있는데, 임시정부에서 자신이 조소와 조롱거리로 놀림을 받은 것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있던걸로 보인다.[48]
| “ | 현안인 임시정부를 조직할새 2종의 숨겨진 흥미로운 일(逸事)이 있으니, 하나는 유위(有爲)의 청년들이 권총 목봉(木棒)들을 가지고 와서 한쪽은 회중을 보호하며 또 한쪽은 회중을 위협하여 공정한 조직을 개최한 것이오, 다른 하나는 신채호가 총리로 추천된 인사 즉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등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천하니 그때 청년 중에서 현창운이 웃기려고 신채호를 추천하매 회중이 큰 소리로 웃자(齊聲大笑) 신씨가 노하여 자리를 떴다. 신씨가 이승만을 반대한 것은, 그 이유가 박용만이 신성에게 이승만이 위임 통치를 미국 정부에 청원하였다고 전보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촉향이 오직 이승만에게 폭주하였었다. | ” |
1921년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과 자유시 참변 등으로 인해 임시정부에서 공산진영이 쫓겨나고, 비슷한 시기에 이승만이 위임통치 청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기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통령제 제4기 내각까지 대통령직에 유임되었다.[7]
1921년 3월 26일,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과의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 “ | ⋯ 그후 나는 신병으로 인하여 병원에 있을 때에 하루는 정한경 군이 일문을 초하여 왔는데 그 글의 뜻은 즉 한국이 더 불법 포악한 일본의 통치하에는 절대로 있기를 원치 않고 나중 독립할 목적으로 미국의 위임 통치를 받고자 한다는 의미이었소. 거기 양인이 서명한 후 한 건은 미국 외무부에 보내고 한 건은 신문사에 보낸 일이외다. 그런고로 이는 우리 독립 선언전의 구차하나마 시험하였던 일시 외교적 선전책에 불과한 것이오. 진정히 위임통치를 희구함은 아니외다.[49] | ” |
오늘날 이승만·안창호·정한경 등의 위임통치 청원은 민족의 독립을 외세의 손에 맡겼다는 평가와 1910년대 말, 국내외 정세를 고려한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다는 평가가 상존한다.[50]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상해 밀항 (1920~1921)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아래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가 이승만, 맨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구.
임시정부 내부가 여러 문제로 소란을 일게되자, 임시정부 주요 간부들은 대통령 이승만에게 상해에 와서 정리정돈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36] 하와이에서 상조회사를 운영하던 윌리엄 보스윅(William Borthwick)의 주선으로 일본을 거치지 않고 상해로 직행하는 배[51]를 타고 비서인 임병직과 동행하여 마침내 상해에 도착하였다.[36] 노백린의 안내로 맹연관에서 이틀을 지낸 후 보창로 32호에 있는 3층으로 된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였다.[36] 그가 상해에 도착하자 수많은 망명 지사들과 정부 각원은 일찍이 그의 명성을 추앙하던 사람이나 반대하던 사람이나 논쟁을 일단 보류하고 많은 기대와 기쁨으로 그를 환영하였다.[36]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1년 1월 1일자 사설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36]
| “ | 국민아 우리 임시 대통령 이승만 각하 상해에 오시도다. ⋯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수하기에 일심하자. ⋯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진실로 우리 대통령을 환영할 때에 우리가 그에 바칠 것은 화관도 아니오, 송가도 아니라, 오직 우리의 생명이니 ⋯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하고 전장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히 '네'하고 나서자.[36] | ” |
1920년 12월 28일, 열린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환영회. 단상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장붕.
1921년 1월 15일, 대통령의 상해 방문을 환영하는 환영식이 열렸다.[36] 환영식은 식순에 따라 일동의 애국가 봉창에 이어 개회사가 있은 다음, 여학생 둘이 화환을 받을어 이승만의 목에 걸어주었다.[36] 또한 남녀 찬양대의 환영가가 있고나서 박은식, 안창호, 이일림의 환영사가 있었고 사진 촬영이 있은 후, 이승만의 연설이 시작되었다.[36]
| “ | 나는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조그마한 공로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영석을 당할 때마다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나의 자랑할 것은 나라에 유익한 일이라면 불계이해(不計利害)하고 시험해 보는 것과 또는 끝까지 끌어 나아가며 불변하는 것은 자랑하며, 청년들에게 표준이 되리라 믿습니다.독립협회 때부터 맹세한 결심이 오늘까지 쉬지 아니한 몇몇 친구도 지금까지 산재해 있습니다. 이 자리에도 안 총장, 이 총리 양씨의 만각풍상(萬却風霜)으로 지금까지 나옴을 보았습니다. 일찍이 내무총장 이동녕 씨와 더불어 동옥할 때[52]에 오늘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많은 금전이나 대정략(大政略)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재미 동포의 이곳에서 일하시는 여러분에게 감사하고자 하는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36] | ” |
그러나 이러한 단합의 분위기는 독립 운동의 방향에 대한 의견 차이로 오래가지 못하였다.[36] 이동휘를 비롯한 세력은 소련 공산당의 힘을 빌려 독립 운동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일부는 중국의 배일 정당과 제휴하여 공동 전선을 펼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36] 뿐만 아니라 군사를 키워서 일본과 전쟁을 시도하는 행동파도 있었다. 이후 이승만은 임시 의정원에 연두교서를 보내어 행정 쇄신, 예산 절약, 외교 강화, 민병제의 채용, 행정 기구의 간소화 등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였으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혼란과 분파적 대립 속에서 임시정부는 그 이전보다 더 심한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36] 의견과 주장이 엇갈려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하자, 불만을 품은 이동휘는 사직하고 뒤따라 안창호, 김규식 등도 사임하였다.[36]
워싱턴 군축 회담에 대표단 파견 (1921)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태평양회의(對太平洋會議)' 외교 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태평양 회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16] 당시 이승만은 밀항하여 상해에 와 있었는데 1921년 5월 20일, 많은 임시정부 요인과 교포들의 환송을 받으며 미국 기선 컬럼비아 호를 타고 필리핀의 마닐라를 거쳐 워싱턴으로 향하였다.[16] 임시정부는 파견된 대표단의 활동을 뒤에서 후원하였으며, 뉴욕에서도 후원회가 조직되어 대표단의 외교 경비를 뒷받침해 주었다.[16] 특히 뉴욕서 유학하던 조병옥, 허정 등의 청년 유학생들이 함께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16]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의 교섭을 위한 구미위원부 팀 단체 사진. 앞줄 왼쪽 끝이 이승만, 타이피스트 메이본 여사[53], 법률 자문관 프레드 돌프[54].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국 대표가 공식적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꾸리기 시작하였다.[16] 임시정부 대표단이 공식적이라는 인상을 가능한 띄기 위하여 이승만의 평생의 독립운동 동지인 국제 통신사인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젊은 기자 J. 제롬 윌리암스 주선으로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기자 회견을 열고 억압에 눌린 한국인들의 투쟁사를 설파하며 기자들을 통해 먼저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도록 노력하였다.[16] 그러나 이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임시정부가 과연 한국민의 전체를 대표한 것인지 의문을 품는 자들도 상당하였다.[16] 이에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공식 신임장을 전보로 요청하였고 1921년 9월 29일, 다음과 같은 신임장을 받게 되었다.[16]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9월 25일, 정식으로 전 각료의 특별 회의를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음을 이에 밝히는 바이다. 즉,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군비 축소회의에 전권을 가질 한국 대표단을 다음과 같이 선정 임명한다.
"전권대사 이승만, 전권부사 서재필, 비서관 정한경, 고문관 프레드 A. 돌프"
전권 대사에게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며 대표 1명을 더 추가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대표단의 전 인원은 5명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본 군축 회의에 한국 문제에 관한 주장을 제의할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군축 회의에서 제기되는 모든 협정, 의정서, 조약 일체에 대한 협정 및 체결을 할 권한을 부여하는 바이다.[16]
이 신임장을 미국 대표단의 단장인 허그스 미 국무장관과 군축 회의 사무국에 직접 제출하고 한국 대표단이 이 회의에 정식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렇다할 아무런 회답도 얻지 못하였다.[16] 그래서 한국 대표부는 옵저버로서라도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16] 그러나 끝내 목표한 바는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법률 고문이었던 프레드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논설이 1921년 12월 1일자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결과만을 달성했다. 애초에 제국주의 열강간의 과도한 군비경쟁 해소 및 이권 조정이 회의의 목적이였던만큼 그들의 식민지에 대한 독립 등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7] 이 때 그는 이 회의가 끝나자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였다.[7]
| “ |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탈취할 수 있는대로 탈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통용될 때, 강대국은 이해가 상반되는 다른 강대국으로부터 정치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 결과가 전쟁을 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오직 이러한 현실에서 외면당한 약소 국민만이 그들의 정당한 주장조차 펴지 못하고 주권을 유린당하게 되는 것이다.[7] | ” |
이 회의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서구 열강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고, 마침 소련 주도로 공산주의 운동이 커지면서 좌익과 우익 분화를 촉진하는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