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을 표류하던 고래 천상에 오르다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더 웨일>
김 문 홍
가족의 균열과 트라우마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더 많은 상처를 준다. 타인과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쉽게 아물지만, 가족 관계에서 생긴 트라우마의 그늘은 짙고 어둡다. 상처를 준 타인은 만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져 있어서 그 상처가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한다. 그러다가 때때로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의식의 수면을 뚫고 올라와 상처를 더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기억도 상처도 쉽게 사라지거나 아물지 않는다. 가족은 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내가 보기 싫다 해도, 그 관계를 끊어 버리고 싶어도 쉽사리 기억 저편으로 내던져버릴 수 없다. 상처를 준 이와 상처를 받은 사람이 기억 속에서 사라져도, 그 아픈 상처와 트라우마의 기억은 남아 있는 다른 이의 기억 속에 기생하게 된다. 관계되는 모든 사람이 사라져 버리지 않는 한 그 아픈 기억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그 상처라는 것은 마치 자가면역 질환의 면역 세포와 닮았다.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세균이나 박테리아, 그리고 이물질은 몸속에 있는 세포들이 막아낸다. 그러나 자가면역 질환은 우리 몸속의 세포들이 밖에서 들어오는 세균들을 막아내야 하는데도, 그 책임을 방기한 채 우리 몸속의 장기와 기관을 공격하는 병이다. 상처의 기억도 이와 마찬가지다. 타인에 의한 상처는 연대와 사랑으로 가족이라는 세포가 이를 막아주지만, 가족 관계에서 생긴 트라우마라는 이물질은 가족 중의 그 어느 누구도 쉽게 헤결해 주지 못한다. 아픈 기억을 공격해서 막아주어야 하지만 그 곪은 상처가 가족이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가족은 가족 구성원과 어느 정도의 연대감과 사랑, 그리고 책임의식을 지닌다. 그런데 그 책임을 지니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의무를 방기했을 경우에는 그 상처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가족을 팽개치고 자신만의 방향만을 좇으려고 할 때에는 그 트라우마는 남아 있는 이들에게 큰 상처를 준다.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믿음에 아주 큰 균열을 일으켜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 특히 지금까지 사랑해 왔던 가족 구성원들을 내팽개지고, 자신만의 이기적 사랑에 안존할 경우에는 그 파장이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다.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더 웨일> (2023, 미국, 117분)은 바로 그런 영화이다.
지상을 표류하던 고래, 죽음을 대면하다
이 작품은 사무엘 헌터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한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전도사토마스(타이 심킨스 분)가 버스에서 내리는 장면, 그리고 클로징 시퀀스에서 주인공 찰리(브렌든 플레이저 분)의 가족이 바닷가로 소풍 나온 장면의 판타지 외에는 거의 모든 장면의 서사가 찰리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연극의 무대 표현처럼 모든 장면이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관객의 인물에 대한 정서적 일치와 화면에의 흡인력이 강하고 직접적이다. 주인공 찰리 역을 맡은 브렌든 프레이저의 연기가 202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만큼 빛나 보이는 것 역시 원작 희곡의 텍스트인 연극의 힘이 주는 집중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 장면에서 찰리를 간호하는 리즈(홍 차우 분)가 찰리에게 허먼 멜빌의 <모비딕>의 한 장면을 들려주는 모습, 그리고 찰리와 그녀가 나누는 몇 마디의 대화에서 관객은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절박한 상황, 또한 그녀가 찰리의 죽은 동성 애인의 여동생이라는 인물의 기본적 관계를 알게 된다. 또한 찰리의 집을 방문한 ‘새생명교회’ 전도사 토마스와 리즈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도, 관객은 전혀 알지 못한 전사(前史)의 기본적 서사를 들려준다. 그녀의 오빠가 교회의 종말론에 빠졌고, 그 교회를 통해서 유부남인 찰리와 그녀의 오빠가 사랑이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관객은 알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서사의 핵심적인 상황을 초반 장면에서 관객에게 인식시킨 다음,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의 일주일 동안 찰리가 가족과 화해하고 죽기까지의 과정을 한한정된 공간에서 미세한 프리즘으로 전달하고 보여준다.
동성 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찰리는 자신을 집안이라는 유폐된 공간에 가두고, 폭식이라는 기이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죽음과 대면하게 된다. 그는 이제 와 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죽음을 준비한다. 찰리가 음식을 먹고 있는데 창가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든다. 그는 목욕을 하고 수염을 깎은 뒤 새에게 먹이를 가져다 준다. 이 장면은 곧 그가 자신의 죽음을 경건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 그리고 지금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설렘을 은유하고 있다. 곧이어 찰리의 무남독녀인 엘리(세이디 싱크)가 등장하는데 아버지인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다음의 대화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졸업반이니?
-신경 쓰긴 써?
-고등학교는 가야지.
-8살에 날 버린 쓰레기. 역겹다.
-에세이를 쓰면 12만 달러를 주겠다. 넌 작가가 될 소질이 있어.
딸 엘리는 아버지를 비아냥거린다. 심지어는 찰리가 보조기 없이 자신에게로 걸어오라고 요구하지만, 찰리는 몇 걸음 발을 떼다 말고 쓰러진다. 간호를 하고 있는 리즈는 엘리의 불손한 태도가 못마땅해 오면 안 된다고 하지만, 엘리의 과제인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그녀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리즈는 이제 오지 않겠다고 뛰쳐나가고, 이때부터 찰리와 엘리의 티격태격 실랑이가 벌어진다. 찰리는 딸에게 솔직하게 네 생각을 쓰라고 충고하지만, 엘리는 막무가내로 오클리 대학에서 원격강의로 수필쓰기를 강의하는 찰리에게 대신 써 줄 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찰리는 애절한 부성으로 딸을 대하지만, 엘리는 엄마와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다. 찰리는 에세이 쓰기를 거부하는 딸에게 “세상에 화내지 말고 나한테 화내. 네가 얼마나 멋진지 알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면서 마지막 관심과 사랑을 쏟는다.
사랑의 힘이 고래를 하늘로 치솟게 하다
찰리는 죽기 전에 딸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고자 한다. 그러한 사랑은 사랑 때문에 사랑을 버린 자신의 과거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며 회개이기도 하다. 그러나 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지만, 딸은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지 않는다. 찰 리가 죽음을 대면하는 태도는 성스럽기조차 하다. 창가의 새에게 먹이를 주는가 하면, 피자 배달부에게도 은근한 사랑의 온기를 전한다. 지금까지는 피자를 받고 돈을 계산하는 거래의 과정이었지만, 지금은 피자 배달부와 찰리는 서로의 진심을 전한다, 서로가 자신의 이름을 건네면서 소통하는가 하면, 피자 배달부는 찰리의 이름을 부르고 찰리는 돈은 우편함에 있다고 대화 속에 서로의 관심을 띄워 보낼 정도로 아주 가까워진 상태이다.
금요일은 찰리가 죽음을 맞는 날이다. 그의 마지막 원격강의가 보여진다. 영화가 처음 시작될 때에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지만, 마지막 강의에서는 고래처럼 거대한 자신의 모습을 공개하자 학생들은 놀란다. 찰리는 “대학은 중요하지 않다. 진솔한 글이 중요하다”라고 격한 발언을 내쏟은 뒤 노트북을 내던져 버린다. 리즈가 퉁퉁 부은 그의 몸을 보면서 병원에 가 보자고 채근하지만 찰리는 이를 거부한다.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죽음으로 용서받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엘리는 자신이 에세이 쓰기에서 낙제했다며 푸념하지만 찰리는 그 에세이는 자신이 쓰지 않았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그 에세이는 엘리가 쓴 거라고 얘기해 준다. 그러면서 엘리는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작품이라며 추켜세우며 행복해질 거라고 얘기한다. 엘리가 자신의 에세이를 낭독하기 시작하자 영화는 지금까지의 고난을 벗어나 한 폭의 아름다운 판타지를 보여준다. 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거대한 찰리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치기 시작한다. 그 아래로 한때 행복했던 바닷가에서의 가족의 나들이 모습이 펼쳐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사랑의 힘이 지상을 표류하던 한 마리 거대한 고래를 하늘로 치솟게 한 것이다. 그들은 사랑 때문에 헤어졌지만, 다시 사랑 때문에 상처를 회복하고 결합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빗나간 사랑의 상처로 생긴 트라우마가 결국은 사랑의 힘으로 회복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의 제명인 ‘더 웨일’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빗나간 사랑으로 고래처럼 거대한 몸집으로 유폐된 체 지상을 표류하는 찰리의 삶, 다른 하나는 ‘고래’라는 에세이로 사랑의 상처가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지상에서 표류하는 거대한 고래는 찰리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하늘로 치솟는 가벼워진 고래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진심으로 사랑을 쏟아 트라우마를 극복한 찰리의 진심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족의 사랑으로 생긴 상처는 역시 가족의 사랑으로 극복하고 치유해야 한다. 자승자박이란 말이 있다. 제 줄로 제 몸을 옭아 묵는다는 뜻으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구속되어 괴로움을 당하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스스로 묶어 옭아맸으니 스스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 생긴 상처는 가족 스스로의 노력으로 풀어야지, 가족 밖의 누가 풀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영화 속의 찰 리가 잘못된 행동으로 스스로를 옭아맸지만, 결국 스스로 쏟은 진심의 사랑으로 옭아맨 것을 푼 것처럼 말이다. 사랑은 힘이 될 수 있지만, 상처와 독이 될 수도 있다. 상처가 되느냐 아니면 독이냐는 사람의 진심에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들려주고 있다. 그 열쇠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있음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 사랑으로 생긴 상처는 사랑으로 아물게 해야 한다. 사랑은 풀지 못한 숙제 같은 것이다.
(계간『문장』202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