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조도 저녁놀
정기고사 오후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유유자적하게 보낸다. 어쩌면 퇴직 이후 보내게 될 시간을 앞당겨 누려보는 일종의 사회 적응 연수에 해당하는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이틀은 외포 망월산과 구조라 수정봉에 올랐다. 날씨가 쾌청해 쪽빛 바다 수평선 대한해협에는 대마도가 뚜렷하게 보이기도 했다. 서이말등대의 공곶이와 해금강과 외도의 남녘 해안 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기고사가 진행 중인 시월 셋째 월요일이다. 오전에 고사 감독을 끝내고 급식소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아이들은 통학버스로 하교를 하고 동료들은 각자 흩어졌다. 학교에 남아 서술형 답안을 채점하거나 아기를 돌보느라 일찍 집으로 돌아간 동료도 있었다. 출장을 가거나 은행 창구 일을 보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아도 나름의 소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오후는 교정을 나서 와실로 들어 옷차림과 신발을 바꾸어 신었다. 연사삼거리로 나가니 뒤늦게 시내버스로 하교하는 몇몇 아이들을 만났다. 주로 수월의 아파트에 사는 학생들이었다. 나는 고현 터미널까지 나가 가조도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거제도는 본섬에 딸린 유인도가 10여 개 된다. 그 가운데 칠천도와 가조도와 산달도엔 연도교가 놓였다. 섬에서 섬을 잇는 다리가 연도교다.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 거제도다. 거제에 딸린 섬 가운데 면적으로는 칠천도가 가조도보다 크나 사람은 가조도가 많이 사는 듯했다. 농사보다 고기잡이나 양식업에 종사하는 어민이 많았다. 두 섬은 진동만 내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면사무소 출장소와 보건진료소가 있었다. 섬 한복판에 산봉우리 이름이 같은 옥녀봉과 아직 폐교되지 않은 초등학교가 남아 있다.
시내버스는 고현 재래시장을 거쳐 장평에서 사곡을 지났다. 사등면 소재지 성포항을 둘러 가조도 다리를 건너니 신전이었다. 구한말 우리나라에서 어촌에서 자발적인 상부상조 조직인 수협이 최초로 발생한 곳을 기념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가조도는 표주박을 엎어둔 모양으로 섬 가운데 봉긋한 산봉우리가 옥녀봉이다. 버스는 해안을 일주하는 도로를 따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가조도 출장소와 창촌마을을 지난 계도마을에서 내렸다. 당국에서 어촌 체험 마을로 선정한 계도에는 낚시터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 앞에 지척인 무인도는 배를 타고 건너가도록 했다. 어촌계에서 마을 회관을 겸한 펜션과 식당도 운영했다. 수심이 얕은 바다에는 낚시 콘도가 여러 채 떠 있었다. 평일이지만 방파제에는 외지에서 차를 몰아온 낚시꾼들이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진동만은 내해라 수심이 얕고 파도가 거세지 않아 양식장으로 적합했다. 주로 홍합과 굴을 양식하는 바다 목장이었다. 미더덕과 오만둥이 양식도 많이 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해안선을 따라 시계 방향으로 트레킹을 했다. 양식장 하얀 부표가 뜬 바다 건너편은 고성 동해와 창원 진동으로 짐작되었다. 내가 즐겨 찾아가는 서북산 산등선도 보였고 더 돌아가니 구산 바닷가가 가까웠다.
신교마을과 유교마을에 이르니 진해 일대와 거제의 칠천도에 딸린 황덕도 등대와 앵산이 드러났다. 고현만의 삼성조선소 크레인과 계룡산이 지척이었다. 유교항에는 조업을 나가지 않은 어선들이 여러 척 묶여 있었다. 실전마을로 나가면 가조도 출장소가 멀지 않았으나 2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시내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낙조의 아름답기로 알려진 신전이나 성포까지 걷기는 무리였다.
아까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버스가 와서 탔다. 계도마을을 돌아 가조도 출장소를 지난 차창 밖 진동만과 견내량으로는 저녁놀이 붉게 물들었다. 석양을 완상하기 좋은 곳이 가조도 연안이었다. 저녁놀은 엷은 구름이 낀 서녘 하늘로 순식간에 번져 해수면에도 비쳤다. 서녘으로 기울던 해는 어둠을 낳기 전 마지막 임무로 저녁놀을 붉게 물들였다. 내 인생에도 저녁놀이 있으려나. 21.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