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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발발 직전 히틀러는 거의 모든 독일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랑받는 지도자였습니다.
1차대전 패전국으로 승전국들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한 독일에게는 제3제국의 망상을 펼쳐놓고
희망을 불어넣어준 히틀러에게 현혹된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사랑했던 지도자는 그들과 그들의 형제들,
자식들을 끔찍한 전쟁터로 끌고가서 죽음을 강요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오늘 소개해드릴 끔찍한 이야기
"스탈린그라드 전투"입니다.)
1942년 11월 2일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엘 알라메인 2차 전투가 독일을 중심으로한 추축군의 참담한 패배로 막을 내린지 불과 6일만에 아프리카 동쪽 해안으로 상륙한 미-영 연합군은 "횃불 작전"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군사 작전으로 추축군을 압박해오기 시작합니다. 서쪽에서 추격하는 몽고메리의 영연방군의 공격으로 이미 치명타를 입은 추축군은 그들이 믿고 따랐던 "사막의 여우" 롬멜조차 히틀러의 호출로 독일로 보내고 난 후에 6개월 후인 읻음해 5월 13일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게 됩니다.
자! 이제 북아프리카 전역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이번에는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며 소련 국경을 넘어 침공을 시작한 동부전선 이야기로 되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도와 친해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2차대전의 전체 그림이 보입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지도 입니다.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1941년 6월 히틀러는
소련 북쪽, 가운데 그리고 남쪽 세방향으로 진격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전혀
독일의 침공으 예상 못한 스탈린의 오판으로 제대로 준비가 안된 소려군들이
무력하게 무너져버리고 후퇴의 후퇴를 거듭합니다.)
히틀러가 소련을 점령하기로 작정한 이유는 그가 꿈꿔온 제3제국이라는 망상에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나오는 풍족한 곡창지대과 석유자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소련이라는 독일과 가장 근접해있으면서 가장 무서운 상대를 제거하지 않으면 프랑스 점령만으로는 언제 반격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인 것입니다.
(히틀러 만큼이나 "미친 독재자"였던 스탈린이 지배하던
소련은 미국 참전 이전까지 히틀러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상대였습니다.)
처음에는 절대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 자만했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전체 장교와 하사관의 절반에 가까운 수를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반역자로 몰아 총살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립니다. 독일은 이미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술로 폴란드 침공에서 이미 효과를 보았듯이 당시 세계 최고의 공군력을 자랑하던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선공과 함께 최강의 기갑부대와 지상군들이 긴밀히 협력하여 진행하는 "양익 포위" 전술로 점령하는 지역을 신속하게 점령하게 됩니다.
("양익 포위" 전술 - 설명할 내용은 많고해서 간단히 이해하시라고 장표로 설명해드렸습니다.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던 그리이스
마라톤 전쟁때부터 이 전술은 사용되었고, 후에 카르카고의 명장 한니발 장군도 이 전술로 승리합니다. 물론 그때는 기갑부대
대신 기병부대가 양익을 포위합니다.)
러시아 공방전
독일군은 중앙 공격 부대 6월 작전 개시 후에 4개월만인 10월에 모스크바까지 밀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겨울이 시작되면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살인적인 추위와 지나치게 빠른 진격으로 보급선이 늘어지다 보니 더 이상 강력한 공격을 지속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련 지도에 좀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이 무척 큰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 모스크바와 가장 끔찍한 시가전이 벌어졌던 스탈린그라드의 위치름 보시면 의외로 독일과 그리 멀지 않은 위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는 1,832km 떨어져있습니다. 감이 잘 안오시면,
요즘에 자동차를 몰고 쉬지않고 달려가면 약 20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시속
100km 가까운 속도로 밟아서 달려간다는 가정하에서 그러니 시속 40km
정도의 기갑부대라면 엄청 먼 거리입니다.)
(베를린에서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는 2,715km 떨어져 있어서
차로 무려 30시간 이상 쉬지않고 달려야 도착하는 거리입니다. 마찬가지로
기갑부대의 이동 속도를 고려하면 당시의 운송 수단으로 이렇게 먼 거리의
보급선을 늘어놓고 전쟁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결정이었습니다.)
초기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들은 그동안 스탈린 독재로 인해서 중앙 정부에 대해서 강한 충성심이나 애국심이 없었던 군인들과 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도리어 독일군의 점령을 환영하거나 크게 저항을 하지 않고 투항하는 병력들도 상당수였습니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독일군들에게 소련군 포로들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을 뿐이고 대부분 총살되어버립니다. 또한 인종차별 주의가 팽배하던 독일군은 점령지의 소수민족들에게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게 되었고 이런 소식들이 미점령지의 소련군과 주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자 전력이 열세인 상황에서도 소련군들의 거센 항전으로 이어지게 되며, 심지어 주민들조차 레지스탕스가 되어서 뜻밖에 큰 타격을 주면서 진격하는 독일군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소련 레지스탕스 여성 대원, 대부분의 러시아 양민들은 독일군들에게 학살되었으므로
어차피 죽을 바에야 저항을 한다는 각오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독일군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게 됩니다.)
원래 바바로사 작전의 원안은 6월에 작전 개시하여 3~4개월 이내에 모스크바를 점령한다는 지나치게 의욕적인 계획이었지만 10월에 도착한 모스크바 근방 지역에서 진입로가 진흙탕이 되었다가 겨울이 시작되면서 꽁꽁 얼어버리자 독일 정예 기갑부대의 3호전차, 4호전차의 캐터필터와 운송 차량들의 바퀴들이 진흙 속에 파묻힌 채로 얼어버려서 꼼짝을 못하는 진퇴양난으 상황의 되어버립니다. 게다가 매서운 겨울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동절기 군복과 장비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독일 군복은 러시아의 살인적인 추위의 겨울을 견뎌내기에 많이 부족한 보온 기능으로 제대로 공급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동계 복장의 소련군들에 비해서 훨씬 춥고, 기능성도 떨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점은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면서 수많은 독일군들이 끔찍한 동상으로 고통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원인이 됩니다.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의 동계 복장. 기본적으로 소련군 복장들에
비해서 훨씬 떨어지는 보온 능력이었으나 이나마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아서 많은 독일군들은 동부전선에서 동사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추위에 떠는 독일군들은 예전에 강력한 전격전의 용사들이 아니라 갑작스런 추위에 어쩔 줄 모르는 패닉 상태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12월 7일 소련군은 시베리아로부터 보충 병력까지 합해지자 일제히 반격을 시작하여 불과 1달만에 독일군을 무려 100km 밖으로 후퇴시키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10월부터 1월 7일까지 약 3개월 동안 양쪽 합해서 무려 100만명의 전사자를 발생시키는 끔찍한 대살육전이 진행된 후였습니다. (3개월 동안 100만명의 사망자를 낸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소전쟁의 매우 중요한 전환점 중에 하나입니다만 단 1개월 만에 100만명 넘는 사망자를 낸 쿠르스크 전투는 훨씬 짧은 시간 동안에 비슷한 규모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는 점에서 끔찍한 전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쿠르스크 전투 얘기는 다음 번으로 미루고.....)
(진흙탕이 된 소련의 도로는 겨울이 닥치자 꽁꽁 얼어버려서
독일 전차와 운송 차량들의 발을 묶어버립니다.)
결과적으로 독소전쟁의 시작인 "바바로사 작전" 개시(1941년 6월) 이후 4개월 동안 모스크바 초입까지 진격했던 독일군은 모스크바 점령은 눈 앞에 두고 뒤돌아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마냥 밀리기만 했던 소련군측이 승기를 잡는 전환점이 됩니다. 애시당초 속전속결로 끝내지 못하면 반대로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던 독일은 약 100년 전에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겪었던 패배와 비슷한 역사를 되풀이하게 됩니다.
(19세기 초 모스크바를 점령하고도 매서운 추위와 식량의 고갈로
후퇴를 해야했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히틀러가 반복하게 됩니다.)
자! 이제 드디어 두 독재자들의 광기로 인해 저질러진 살육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정말 두 인간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광기를 부린 덕분에 또다시 무려 140만명이 넘는 군인들과 시민들이 죽어야 했던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잠깐만!
스탈린그라드는 왜 독재자 스탈린의 이름이 붙어있는가?
(스탈린의 이름이 붙혀졌다는 이유로 스탈린그라드는 처참하게 폐허가 되었습니다.)
원래 제정 러시아 시절 (즉, 러시아 제국이 공산화되기 이전) 이도시의 이름은 "짜리친"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스탈린은 공산주의(볼셰비키) 진영의 군대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하면서 짜리친을 반혁명파 세력인 백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후 스탈린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자신이 방어했던 이도시에 각종 산업시설을 건설하고, 급속도로 개발하였고 1925년 스탈린 밑에 충복이었던 공산당 간부들이 스탈린에게 선물하는 형식으로 그의 이름을 도시에 붙히게 됩니다.
그러니 히틀러가 만약 스탈린의 이름이 붙혀진 이 도시를 접수한다면? 히틀러는 얼마나 귀중한 선전의 소재를 얻게 되었을까요? 한편 스탈린이 자신의 이름이 붙혀진 이 도시를 히틀러에게 빼앗긴다면 얼마나 곤혹스러워지고, 그의 위신에 재를 뿌리는 결과가 될 것인가?
즉, 실제로 이 도시가 갖는 의미와는 상관없이 두 독재자들이 각자의 자존심을 걸고 스탈린그라드를 놓고 한판 승부를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로 인해서 너무나 많은 군인들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이 미친 독재자들의 자존심 싸움의 재물로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미쳐 돌아간 전쟁,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상징이 된 악어를 가운데 두고 어린이들이 춤을 추는 모습의 분수대. 그 뒤로
독일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건물들이 보입니다......)
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러시아 공방전이 끝나고 나서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당황하고 다음과 같은 작전을 수립하게 됩니다. (왜 히틀러는 자기가 일일이 모든 군사작전에 참견하고, 이래라 저래라 했는지 모르겠네요. 그 덕분에 얼마나 많은 잘못들이 저질러지고 그 오류들이 독일의 패배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는지............그는 1차대전때 일개 하사관으로 참전한 것 이외에는 군인 경력이 전무한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스탈린그라드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밑에 지도에서 보듯이 스탈린그라드 밑은 코카서스 유전 지대로써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무기 중에 하나인 전차들을 움직이려면 풍족한 유전 지대의 확보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전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지도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요. 위에 지도를 보시면 스탈린
그라드를 점령하면 그밑에 코카서스 유전지대가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스크바 공방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히틀러는 재차 강력한 공세를 하여 모스크바 점령하기보다는 남부에 스탈린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산업도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고 바로 도시 남쪽에 위치한 코카서스 유전지대를 점령하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모스크바보다는 덜 중요한 산업도시지만 만약 이 도시를 점령한다면 그 사실만으로 모스크바에서 버티고 있는 스탈린에게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주고, 소련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의도습니다.
1942년 4월 5일 히틀러는 "청색 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위에 지도에 다 있는 지명들입니다.)
1.보르네쥐(Voronezh)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돈(Don)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여 철도를 점거한다.
2.동시에 코카서스(Caucasus) 유전지대로 진격하여 점령한 후 중동지역(이란)으로 계속 전진한다.
5월 28일에 "청색 작전"은 시작되었는데 초반에 독일군은 무력한 소련군 방어선을 뚫고 철저하게 파괴하여 7월 2일 하르코프(Kharkov)를 점령하고, 3일 후에는 보로네쥐를 점령하여 성공적으로 첫번째 목표를 달성합니다. 드디어 스탈린그라드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여기서 히틀러의 병적인 집착과 독선으로 인해서 엄청난 병력을 비극적인 죽음으로 몰아넣는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의 독특한 지형을 먼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매우 중요!!!)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는 볼가 강변에 길게 형성된 도시입니다.이제 동쪽에서 서쪽으로 밀려
들어오는 독일군과 스탈린그라드에서 등뒤로 볼가 강을 놓고 방어하는 소련군들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매번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고 후퇴를 거듭하던 소련군들은 이제 어느 정도 독일군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넓은 평원에서 독일군을 상대하는 경우 강력한 기갑부대를 동원한 "양익 포위" 전술로 자신들이 매우 불리하게 되며, 독일군의 강점은 바로 기갑부대라는 것입니다. 전차를 무력하게 만들려면 전쟁의 무대를 넓은 평원이 아니라 좁은 골목이 복잡하게 얽힌 도심 한복판이어야 하며 그런 목적에서 안성맞춤인 곳이 바로 스탈린그라드인 것입니다. 스탈린그라드 시를 사수하기 위해 편성된 소련군 62군은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이 맡게 됩니다. 여기서 스탈린이라는 미치광이의 엄청난 광기가 가득한 명령이 떨어지게 되는데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진격하는 독일군을 보면서도 시민들이 절대 피난을 못가고 도시에 남아있도록 합니다. 이유는 그곳을 지키는 소련군들이 폐허가 될 도시뿐만 아니라 바로 그곳에 시민들이 있다면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손쉽게 후퇴를 결정할 것이라는 잔인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시민들이 피난 행렬을 이루게 되면 소련군의 보급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황당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즉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여 자신의 자존심과 권력의 안위만 얻을 수 있다면 전쟁으로 인해서 죽어갈 수만명의 시민들의 생명은 하찮게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바실리 추이코프(1900~1982)는 스탈린그라드
방어를 맡은 소련군 62군 사령관으로써 전투의
승리를 이룬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승리에는
수많은 군인과 시민들의 죽음이 요구되었습니다.)
독일 지상군의 스탈린그라드 공격에 앞서서 루프트바페의 스투가 급강하 전폭기와 폭격기들은 무자비한 폭격으로 도시를 처참한 폐허를 만들었습니다. 8월 23일 단 하루동안 600대의 독일 폭격기들이 동원된 공습으로 시민만 약 4만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또한 시내의 거의 모든 건물들이 잿더미로 변했고 엄청난 돌무더기를 이루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독일군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이 거대한 폐허 더미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어갈 운명이라는 것을 그때는 상상도 못합니다.
(독일군의 잔인한 공습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스탈린그라드에 아이들)
(볼가 강이 보이는 스탈린그라드 상공에서 공습을 하고 있는 루프트바페 스투카 편대)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은 스탈린그라드의 대부분의 목조 건물들을 형체도 없이 날려버렸습니다.)
(공습 후에 시내로 진입한 독일군들의 눈앞에는 산산히 찣겨지고, 부서진 거대한 돌무더기와 철근 덩어리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독일군 지상군의 스탈린그라드 진입이 시작되었을 때 초기 방어 임무는 엉뚱하게 소련군 방공 연대가 맡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여성 지원병들로 구성되었고 대공포 사수들인 탓에 지상에서 공격해오는 적들에 대한 교전 훈련은 제대로 받지 못한 병력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공격하는 독일군의 정예 지상군과 전차들의 공격을 상대로 자신들이 보유한 37개의 고사포로 공격하였습니다. 게다가 생산에 투입되지 않은 공장 노동자들까지 대거 도시의 방어에 동원되었습니다. 심지어 공장에서 생산된 도색도 되지 않고, 조준경도 장착되지 않은 탱크를 공장 노동자들 중에 지원자가 몰고 전투하러 나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중에 소련군 병사들)
공격 개시 후 불과 몇주만에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남쪽이 독일군에 의해 봉쇄되면서 소련군의 유일한 보급로는 볼가강 강을 건너오는 경로였습니다. 하지만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의 첫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이영화 아직 못보신 모델러들이 있으시면 꼭 보시길 추천합니다.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당시 참혹한 상황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볼가 강을 배로 건너서 보급과 병력 보충을 하는 것은 독일 전투기들의 기관총 사격으로 엄청나게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제대로 강을 건너기도 전에 강 속에서 물귀신이 되어버린 수많은 젊은 병사들의 시체들로 볼가 강은 시뻘겋게 물들어버립니다.
(볼가 강을 건너오던 배가 독일 전투기의 공격으로 파괴되자 스탈린그라드 강변으로 헤엄쳐
오는 소련군 병사들)
(마침 영화 "애너미 앳 더 케이트"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강 도하 장면만 잘라내서
보여주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있네요. 영화 한편을 전부 보실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영상이라도
보시면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실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시내로 진입하게 된 독일군들은 소련군과 시민들의 치열한 항전을 물리치면서 진격을 계속합니다. 이미 철저히 파괴되버린 폐허를 방어진지로 소련군들은 눈 앞에 독일군외에 또 하나의 무서운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스탈린이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인 7월 27일에 내린 227호 명령 "상부의 명령 없이 위치를 이탈하는 자는 즉결 처분에 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 위치를 사수하든가 아니면 독일군의 공격으로 죽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후퇴병과 탈주병들은 이 즉결처분으로 사살되었습니다.
(시가전 중에 수류탄 투척을 준비하는 소련군)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한 독일군들에 의해서 발견된 지하실에 피신 중이던 노파)
피해는 독일군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그들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전투와는 전혀 다른 엉망진창의 돌더미 속에서 벌어지는 혼란 속의 전투였다는 것입니다. 즉, 독일군이 자랑하는 3호전차와 4호전차들은 비좁은 폐허 골목 속에서는 기동력이나 파괴력을 기대할 수 없는 고철 덩어리로 꼼작 달싹 못하게 되었습니다. 건물 위에 숨어서 소련군이 대전차 소총 PTRS41로 전차의 얇은 철갑 부위를 겨냥해서 사격을 하면 전차 내부로 들어온 탄환은 벽으로 이리 저리 튕겨 다니면서 그 안에 전차병들의 몸을 뚫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거대한 철갑으로 무장한 주력 전차들이 소련군 병사의 14.5mm 대전차 소총으로 멈춰버리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소련군 대전차 소총 PTRS41)
또한 좁아 터진 폐허 건물 속에서 벌어지는 근접전은 중세시대 총검으로 전투를 하던 병사들과 별 차이 없는 잔인한 상황을 연출하게 되는데 추이코프 사령관은 이런 전투 방법을 "껴안기"라고 불렀습니다. 즉 모든 거리와 공장의 폐허. 주택, 지하실, 계단 할 것 없이 독일군과 소련군이 마주치게 되면 총으로 쏠 시간도 없이 각자 자기가 들고 있는 단검, 총검, 야전삽등으로 상대를 내리치고 찔러서 죽여야 했고, 만약 조금 거리가 주어진다면 수류탄을 던지곤 하였습니다. 독일군들은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건물 하나 하나를 샅샅이 뒤지면서 이렇게 잔혹한 살상 행위를 하면서 점령해났고 그런 자신들의 야만적인 전투를 "생쥐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부얶에서 쥐(소련군)을 발견하여 잡으려 하다가 거실로 도망가면 다시 거실로 쫓아가 잡는 식의 전투였다는 것입니다.
(승승장구 해왔던 히틀러의 독일군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혹독한 공포와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야코프 파블로프라는 이름의 장교가 지휘하던 소련군 소대는 시내의 한 아파트 빌딩을 요새화하여 방어하였는데 이 빌딩에서 중앙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략상 유리한 위치였습니다. 그들은 이 건물을 주위에 잔뜩 지뢰를 매설하고 지하실 벽에 구멍을 뚫어서 서로 육성으로 상황을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기도 했습니다. 후에 이빌딩은 "파블로프의 집"으로 불리게 됩니다. 당시에 볼가 강을 독일군 공습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살아서 건너와 시가전에 투입된 소련군 보충병의 평균 생존 시간이 24시간 이내였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자는 계속 발생하고 보충 병력은 끝없이 투입되었습니다. 심지어 시베리아에서 동원된 병력이 시가전에 투입되었다가 중앙역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전원 전사하는 일도 있었으며, 나중에는 병력이 부족하자 해군 수병들까지 끌고 왔습니다.
("파블로프의 집", 수많은 인명이 이집을 사수하기 위해서 사라져갔습니다.)
(건물 속에서 사격을 하고 있는 소련군들...)
여기서 독일군들을 괴롭힌 무서운 존재가 등장하는데 바로 소련군 저격수들입니다. 앞에 글에서 소개했던 바실리 자이체프(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주인공) 같은 뛰어난 사격 실력을 가진 저격수들은 대개 시베리아 평원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하던 자들이 많았는데 자이체프의 경우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간에만 242명의 독일군을 사살했고 그 중에는 독일군 저격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항복때까지 400명이 넘는 독일군을 사살했는데 사실 그보다 더 대단한 인물은 이반 시도렌코로 무려 500명을 사살하였습니다. 독일군은 이 저격수들이 폐허 속에 숨어있는 탓에 찾아내는 것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해결 방법 중에 하나로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여 폐허 더미를 향해 발사하면 작은 틈새만 있어도 불길이 들어가서 그 뒤에 숨어있는 저격수들을 태워죽이거나 밖으로 뛰어나와 독일군의 총격으로 쓰러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독소전쟁 때 사용한 독일군 화염 방사기)
또한 폐허는 비교적 큰 대전차포조차 독일군의 전차가 미쳐 발견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감춰줄 수 있었는데 덕분에 많은 숫자의 독일 전차들은 소련군 대전차포에 노출되어 공격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마냥 계속되자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전략적인 효과는 제껴놓고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를 최우선 목표로 삼게 되었습니다.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준비해두었던 예비군들조차 스탈린그라드로 이동 시켰고 독일 공군에게 압도 당했던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소련 공군 전투기들이 급히 스탈린그라드로 투입됩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1890~1957)은 프러시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엘리트였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인해서 온갖 불명예와
불행을 한 몸으로 겪은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던 것은 그를 따르던 수많은 독일병사들이 스탈린그라드 폐허
속에서 혹은 소련군의 포로과 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한 자책감이었을 것입니다.)
양쪽 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심신의 극심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서 독일측 공격부대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은 눈가에 심한 경련이 생겼고, 소련측 사령관 추이코프 장군은 습진 때문에 양손을 붕대로 완전히 감싸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양쪽 병사들은 언제 어디서 적을 만나서 대검과 야전삽이 난무하는 피비린내 나는 근접전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엄청난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독일군 측은 루마니아, 이태리, 크로아티아, 헝가리 군들까지 동원하여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중에 촬영된 소련군들)
독일군이 8월에 공격을 시작하고 끔찍한 살육전을 벌이면서 엄청난 댓가를 치룬 끝에 11월에 드디어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가로질러 볼가 강 강둑에 도착하게 됩니다. 스탈리그라드 시내의 90%를 점령하고, 시내에 남은 소련군들은 두개의 지역에 고립된 상태였고 겨울에 접어들자 볼가 강 수면 위를 떠다니는 유빙들로 인해서 소련군의 강을 이용한 물자 보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됩니다.
(스탈린그라드 보급을 준비 중인 독일 공군 수송기)
소련군 사령부는 애초에 3개월간에 시가전으로 큰 타격을 입은 독일군들을 스탈린그라드 속에 가둬놓고 궤멸시키려는 작전을 입안하였는데 즉 도시 북쪽과 남쪽 양측면을 공격하여 시가전에 정신이 팔려있던 독일군들을 포위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이름하여 "천왕성 작전"이라고 불린 대규모 반격 작전은 독일군 본진이 아닌 크로아티아군, 루마니아군, 헝가리군들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독일군 본진을 공격하는 것보다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는 판단이었고 이런 전술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이 독일군의 동맹군인 이태리군을 주로 목표로 공격하여 승리를 얻어낸 것과 같은 발상이었습니다. 이런 포위 작전은 사실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이 성공해온 "양익 포위" 전술과 큰 차이 없었다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소련군에게 포로가 된 루마니아 병사들의 행렬, 독일에게 점령당한 루마니아는 약소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원치않은 전쟁에 동원되어 원치않는 고통과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독일군측도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남쪽에서 대규모의 소련군 병력이 공격을 가해올 경우 순식간에 무너지고 포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냥 간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울루스 사령관은 히틀러에게 지속적으로 병력과 무기 지원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독일군 주력부대가 공격하는 시내의 점령에만 집착했지 정작 양 측면을 보강하려는 지원 요청은 거부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측면에 소련군들의 병력이 증강하고 있음을 독일군도 포로가 된 소련군 장교들을 심문하면서 알게 됩니다. 독일군 총참모장이었던 프란츠 할더 장군에게 이정보가 전달되자 그는 히틀러에게 직접 보고하면서 다시 한번 측면의 지원을 요구하며 히틀러의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집착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였는데 총통은 이런 그의 보고를 묵살하고, 허무맹랑한 생각이라 일축하면서 도리어 총참모장은 할더 장군에서 쿠르트 차이출러 장군으로 교체되게 됩니다.
(앳되 보이는 독일군 병사들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추위와 공포를 겪으면서도
얼마 안 있으면 만슈타인 장군이 지휘하는 구출부대가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있어서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비참한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1월 19일 개시한 천왕성 작전은 단 이틀만에 양측을 방어했던 非독일 공격 부대들(특히 루마니아군)을 분쇄하고 거대한 포위망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에워싸게 됩니다. 포위된 독일군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러시아의 겨울을 황량한 폐허 속에서 웅크리고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포위된 상황에서 유일한 보급 방법인 항공 보급은 그들이 필요한 물자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거대한 포위망 속에서 25만명의 독일군과 소수의 루마니아군을 포함한 非독일군 병력들뿐만 아니라 1만명의 스탈린그라드 시민들과 독일군이 전투 중에 잡은 수천명의 소련군 포로들까지 고립되게 됩니다. 한편 5만명의 독일군 병력들은 포위망 밖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포위 중인 소련군은 내부 봉쇄와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시도하는 공격에 대비하여야 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독일군측 사령관 파울루스 장군(우측)은 우수한 참모로써 히틀러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야전 지휘관으로써는 융통성 없는 성격과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그와 그의 부하들에게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히틀러는 그동안 독일군은 절대로 스탈린그라드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독일 국민들에게 호언장담을 해왔습니다. 막상 천왕성 작전의 성공으로 포위가 되자 당시 바바리아 지방에 별장에 가있던 히틀러는 그 소식을 듣고 함께 별장에 와있던 한스 예숀네크 공군 총참모장에게 공중 보급으로 고립된 병력들이 방어해낼 수 있겠냐고 물어봤는데 예숀네크가 가능하다고 무책임한 답변을 한 것을 믿고 수송기의 보급으로 충분히 보급 물자를 공급할테니 절대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며칠 후에 괴링 역시 예숀네크와 동일하게 자신의 공군 수송기만으로 보급이 충분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고립된 병력들이 하루에 필요한 공급 물자가 최소 500톤이었으나 공중 보급은 고작 300톤에도 미치지 못하는 물량을 공급했습니다. 그나마도 착오로 20톤에 달하는 보트카와 여름 군복이 공급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소련군의 대공포를 똟고 스탈린그라드로 오는 수송기들 중에는 격추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였고 결국 이륙한다고 무사히 착륙해서 공급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 스탈린그라드 항공기 보급 기간동안 무려 488대의 수송기와 1,000명이 넘는 조종사들이 사망하며 독일 공군에게도 큰 손실을 입힙니다.)
(보급은 턱없이 부족하고 굶주리게 된 독일군들은 주위에 말들을 잡아서 먹기 시작합니다. 사진은 독일군들이
먹어치운 말들에서 잘라낸 말굽들이 쌓여있는 모습입니다.)
항공기 보급이 실제 이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히틀러는 여전히 "항복 절대 불가"를 거듭 명령하면서 다만 무사히 착륙한 수송기들에는 고립된 병력들 중에서 향후 사령부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재능을 가진 지휘관들이나 기술 전문가들 그리고 부상병들을 실어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수송기 조종사들은 자신들이 실어온 물자들을 나르는 병사들이 오랜 굶주림 그리고 동상과 질병등으로 인해서 제대로 음식을 옮길 힘조차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베를린의 군 수뇌부들은 물론 히틀러조차도 스탈린그라드의 끔찍한 상황을 정확히 알게 되자 결국 독일군은 천왕성 작전 후에 소련군이 만들어놓은 포위망에서 벗어나 시 외곽에 있던 병력들을 주축으로 새롭게 편성하여 포위된 병력들을 구출하기 위한 "겨울 폭풍 작전"을 12월에 개시하게 되는데 이 작전의 지휘는 히틀러 휘하에 최고의 명장 중에 한명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이 맡게 됩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더이상 독소전쟁 초기에 쉽게 무너지던 오합지돌들이 아니었습니. 또한 독일군 역시 승승장구로 소련군을 물리치던 몇개월 전에 강병들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하게 정비되고 보충된 소련군 친위군 정예 병력에 의해서 독일군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스탈린그라드로부터 수십 킬로미터까지 접근한 후에 무력하게 후퇴를 하면서 "겨울 폭풍 작전"은 실패하게 됩니다. 게다가 소련군은 한번 승기를 잡은 기세를 몰아 만슈타인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군 부대들을 스탈린그라드로부터 무려 250km 뒤로 후퇴시키면서 더이상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군들을 구출한다는 희망은 사라져버립니다.
(포위된 독일군 부상병들은 제대로 치료도 못받는 상태에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특히 볼가강의 결빙으로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던 소련군들은 보급이 훨씬 용이해졌고, 반대로 시내에 철저히 포위되어 고립된 독일군들은 12월 말까지 혹독해질대로 혹독해진 러시아의 겨울로 수많은 병사들이 동상과 영양 실조에 심지어 이질과 같은 질병으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독일 최고 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들에게 이런 사실을 올바르게 알려주지 않고 헛된 희망을 계속 주면서 절대 항복을 하지말고 현재의 위치를 사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광기로 이성을 잃은 히틀러의 명령이었고 그런 그의 광기를 말릴 장군들은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독일군 공항을 목표로 한 타친스키야 공습이 성공하여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은 급격히 약화되게 되어 그 결과로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던 보급 수송 물량이 급속히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기존의 보급 물량도 턱없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더욱 감소하게 됨에 따라 실제로 폐허 속을 배회하는 고양이들이나 쥐들을 잡아 먹는 독일군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극한 상황이 되어갔습니다.
(끝없이 계속되는 공포와 고통 속에서 육신이 피폐해진 독일군들)
이를 보다 못한 베를린에 일부 장군들은 비공식 채널을 통해 스탈린그라드에 파울루스 사령관에게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남은 병력들을 이끌고 포위망을 똟고 스탈린그라드에서 탈출하도록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프러시아 귀족 집안에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엘리트 장군 파울루스는 총통의 명령을 무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하고 거부합니다. 결국 폐허 속에서 이 답답한 사령관으로 인해서 엄청난 숫자의 독일군들과 소수의 루마니아, 이태리, 헝가리, 크로아티아 군들은 항복도 못하고, 그렇다고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무기도 충분하지 않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망적인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반면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던 소련군들은 풍족한 식량과 무기를 보급 받으면서
따뜻한 동계 복장을 지원받아서 느긋하게 폐허 속에서 얼어 죽어가고 있는 적들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상황이 더 악화된 것은 소련군이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맹공세를 한 결과로 스탈린그라드 시외곽에 형성되었던 방어선은 점점 더 시내 중심 쪽으로 좁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항공기 보급을 받아왔던 피툼닉 공항과 굼락크 공항 두곳은 시 외곽에 있었던 탓에 방어선의 후퇴는 결국 소련군에게 보급을 받을 수 있었던 두 귀중한 공항들을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과 실탄은 공항을 잃어버림으로 인해서 이제 더 이상 부족한 물량이나마 보급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군들은 만약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즉시 처형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악착같이 저항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실제 이곳까지 진격해오면서 그렇게 소련군 포로들을 처치했기 때문에 그들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습니다. 게다가 "히비"라고 불리는 소련군 출신으로 독일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은 소련군들에게 넘어가는 순간 그 즉시 처형될 것이 뻔하므로 더욱 결사적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항복한 후에 약 11만명의 포로들은 소련군에 의해 포로 수용서까지
죽음의 행진을 강요당했습니다. 이런 행렬은 이미 심각한 건강 악화 상태의 대부분의 포로들에게는
사형 집행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 11만명 중에 항복 후 단 3개월만에 75,000명이 사망했고
실제 전쟁이 끝난 후에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생존자는 고작 6천명이었습니다.)
포위망을 완성한 "천왕성 작전"과 시내에 독일 주력 부대를 공격했던 "토성 작전"은 불과 한달 전에 스탈린그라드 시내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격하던 독일군을 볼가 강을 등뒤에 놓고 방어하던 소련군의 위치가 뒤바뀌게 됩니다. 즉 서쪽에서 동쪽으로 소련군이 밀어붙히고 독일군은 볼가 강 강둑까지 밀려나가는 신세가 됩니다.
(볼가 강 스탈린그라드 쪽의 강변 지역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강 건너편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로켓 발사기
"카츄샤"의 공격은 강둑까지 몰린 독일군들을 순식간에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
("카츄샤"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소련 로켓 발사기 M-13)
(파괴력과 끔찍한 굉음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에 독일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실제 단 한번의 공격으로 시내에 독일군 3개 대대 병력을 몰살시킬 정도로 무서운 파괴력을 가졌습니다.)
1943년 1월 소련군은 (1)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 보장, (2) 독일군 환자와 부상병에 대한 의료 지원, (3) 포로의 개인 소지품 소지 허가, (4) 정규 식량 지급, (5) 전쟁이 끝난 후 송환 등의 조건을 내걸고 파울루스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냅니다. 이는 심리전 차원에서 선전 삐라로 만들어져 포위된 독일군에게도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다시 처절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는 파울루스 장군을 자신의 집권 10주년 기념일인 1월 30일에 원수로 지급시키는 결정을 합니다. 이제 항복을 하지 않으면 전원 죽음을 맞이할 상황에 몰린 파울루스에게 원수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명예를 위해서 자살을 해라"라고 명령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제까지 독일의 원수가 적에게 포로가 된 적은 없으므로 절대 항복을 하지말고 자살을 하여 명예를 지키라는 의미였습니다.
(1939년 히틀러의 측근 참모로써 인정을 받던 시절의 파울루스 장군, 불과 4년만에
히틀러는 그에게 "자살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여기서 파울루스는 진작에 결정했어야 하는 항복을 결정합니다. 히틀러의 기대를 저버리고 2월 2일 (원수로 진급한지 3일만에) 22명의 장성급과 91,000명의 병사들과 함께 파울루스는 비참한 몰골로 소련군에게 항복을 하였습니다. 원래 25만명의 독일군이 천왕성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에 포위가 된 후에 불과 2개월 남짓한 기간동안 16만명이 사망했던 것입니다.
(소련군에게 항복하는 파울루스 사령관, 그는 포로가 되었지만 선전도구로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소련이 1944년 독일에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하자 소련군의 선전기관의 우두머리가 되어 선전 도구로 사용
됩니다. 1953년 독일로 돌아오지만 운동신경 마비 증세로 1957년 비참한
몰골로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파울루스의 항복에 대해 히틀러는 “그는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앞두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택했다.”라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을 전쟁 한복판에서 몰살시키고, 끝도 없이 병사들을 시가전으로 투입해서 엄청난 사망자를 냈던 스탈린과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파울루스 사령관과 그의 부하들을 끔찍한 겨울 폐허 속에서 얼어죽게 내버려두었고 심지어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파울루스에게 자살을 강요했던 히틀러의 광기가 어우러졌던 "미쳐 돌아간 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한편 2월 2일 대부분의 추축군 병사들이 항복했다는 공식적인 소련군의 발표와는 달리, 독일 측의 기록 영화 《스탈린그라드》에 따르면 11,000명이 넘는 독일군과 추축국 병사는 항복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했다고 합니다. 싸우다 죽는 것이 소련의 포로가 되기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그랬을 것입니다. 이들은 파울루스의 항복 이후 약 한 달이 지난 1943년 3월까지 지하실이나 하수도에 은신하며 저항했습니다. 소련군의 소탕 작전으로 이들의 수는 계속 줄어들었고, 3월까지 거의 소탕되거나 항복하게 됩니다. 이 기록 영화에 나온 소련군 기록에 따르면 이렇게 저항한 2,418명이 사살되었고 8,646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스탈린그라드에 거대한 곡물 사일로 앞을 지나가는 독일군 포로 행렬, 이 건물은 시간전 중에 양진영이
수십번을 빼앗고 뺏겼던 격전의 장소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었는데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 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 한 소련 정부의 금지 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습니다. 많은 학자는 이 전투에서 추축국의 병력 손실(전상 및 전사, 포로 등 포함)이 85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독일이 40만 명, 루마니아가 20만 명, 이탈리아가 13만 명, 헝가리가 12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9만 명도 1943년 봄에 대부분 티푸스에 걸려서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소련에 억류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강제 동원되다가 최종적으로 1955년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6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독일도 소련군 포로를 가혹하게 다루긴 마찬가지였습니다. 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히비(Hiwi))들도 소련군에 사살되거나 잡혀 처형되었습니다.각종 문헌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의 손실은 총 1,129,619명이라고 합니다. 478,741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650,878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 수는 작전의 범위를 넓게 잡아 추산한 것입니다. 또한, 독일 제6군과 제4기갑군이 시내로 진격해 온 첫 주의 공습에서 4만여 명의 소련 민간인이 시내나 교외에서 사망했습니다. 시 이외의 민간인의 총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소련과 추축국의 전체 인명 피해는 170만에서 200만으로 추정되고있습니다.
이정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서 이해하셨다면 다음 동영상을 아주 재밌게 즐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보석 같은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추가합니다. ebs 방송에서 방영했던 2차세계대전사에서 스탈린그라드의 패장 파울루스를 집중 조명하였더군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연결해서 보시면 매우 흥미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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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쟁사 다시한번 보게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