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누구나 예상했듯 이겼다. 경기 주도권을 틀어쥐고 완전히 경기를 지배한 것은 미얀마와의 전력 차를 고려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이기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가 이번 경기에서 집중해야할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2차 예선에서는 상대적 약팀을 상대해서 여유를 갖고 실전을 치를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플레이를 가다듬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번 경기에서도 잘한 점은 많지만 당연히 우리가 보여야 할 강점들이었기에, 부족한 점을 지적해보려고 한다. 미리 말하지만 2:0으로 승리하면서 월드컵을 향한 첫 단추를 괜찮게 끼웠다.
(△ 최근 주전으로 맹활약 중인 이재성. 구자철과의 대결 구도가 기대된다. 출처:KFA홈페이지)
미얀마는 예상했듯 수비적인 전술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높이의 우위를 의식한 듯 골대 앞에 진을 치지는 않았고, 다소 전진해서 장신 공격수 이정협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공격을 앞에서 막아내는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배후 공간에서 약점을 드러냈고, 우리로서는 지공 상황에서 이를 노려 공격을 살릴 수 있었다.
2줄로 수비를 세운 상황에서 공격을 풀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측면 수비수의 오버래핑이다. 좌우측면의 김창수(그리고 정동호)와 김진수는 좋은 타이밍을 맞춰 좌우측면에서 배후 공간을 침투하면서 결정적인 크로스 찬스를 여러 번 잡았다. 측면 침투를 준비한 모습이었다. 다만 크로스의 정확도가 아쉬웠다. 오버래핑을 통해 스피드를 붙인 상황에서 발등을 이용한 강한 크로스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잘 돌파해놓고도 뒤늦게 동료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공의 밑둥을 차는 크로스로 공격 속도를 늦출 필요는 없다. 더불어 중앙에서 해결해줘야 할 공격수들의 침투가 느리거나 적극적이지 못한 게 더욱 아쉬웠다. 크로스가 정확히 자신에게 떨어지면 해결하겠다는 소극적인 자세보다, 크로스를 받기 좋은 위치로 먼저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해결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이정협도, 염기훈도 크로스 해결에 있어서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마찬가지로 공격수들 역시 적극적으로 수비 배후를 노리는 움직임을 가져갔다. 이정협이 좌우측면으로 돌아나가면서 배후 공간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정협이 좌우로 빠지면서 흔드는 움직임에 호응하는 동료의 움직임이 부족했다. 2선 공격수들은 전방으로 전진하고 접근해주면서, 이정협이 돌아나가면서 균열이 생긴 상대 수비진에게 지속적인 어려움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이정협이 돌아나가서 공을 받은 이후에도 전진과 접근이 늦다보니 미얀마는 수비전열을 이내 정비했으며, 이정협은 측면에서 고립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왔다.
(△ 침투는 환상적이다. 그러나 크로스 타이밍이 늦어 중앙 공격수들은 이미 공을 받기에 좋은 위치를 지나친 상태였다. 킥 방식도 적절하지 못해 수비수에게 차단당했다.)
공격수들이 보여준 또다른 문제는 바로 결정력의 문제였다. 염기훈, 손흥민, 이용재가 놓친 찬스들은 모두 마무리 했어야 하는 찬스였다. 완벽한 찬스를 놓친다면 비슷한 수준의 상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좀 더 수준이 높은 팀을 만났다면 더 제한적인 기회를 얻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집중력을 더 높일 필요가 있다.
미드필더들의 전체적인 경기 장악력은 무난한 것 처럼 보인다. 한국영과 정우영은 지난 UAE전에서 보였던 것처럼 1차 저지선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고, 침착하게 공을 돌리면서 주도권을 유지했다. 외형적으론 2:0으로 승리하고 큰 문제를 노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한 문제를 노출했다. 특히 지난 경기와 달리 정우영은 좋지 않은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다.
정우영은 백패스에선 크게 문제를 노출하지 않았지만, 2선 공격수들이나 측면 수비수에게 연결하는 과정에서 어이없는 패스미스를 반복했다. 오늘 경기 자체가 밀집한 상대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공을 받기 위해 위치 변화가 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얀마의 개인 능력이 떨어지고 수비적으로 나섰으며 역습이 위협적이지 않았기에 큰 문제를 노출하지 않았을 뿐, 비슷한 수준의 팀들을 상대로 했더라면 역습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문제다. 빌드업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공격 지역에서 결정적인 패스를 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위해 팀의 무게 중심이 전방으로 향해 있는 상황에서 공을 빼앗기는 것이다.
(△ 쉬운 상황에서의 패스 미스는 역습으로 연결될 수 있다. 상대가 미얀마가 아니었다면?!)
전체적으로 보아도 패스미스가 많았던 경기였다. 공격에서 이재성, 염기훈, 손흥민, 이정협까지 쉽사리 공이 돌지 않았다. 하지만 원터치 패스 등 간결한 움직임을 통해 상대의 밀집수비를 상대하려고 한 것은 좋았다. 다만 손발이 맞지 않는 듯 서로의 움직임을 읽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슈틸리케 감독이 여러 선수를 실험하곤 있지만, 이제 슬슬 원하는 선수들을 추려가고 있는 만큼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 예상한다.
세트피스를 통해 경기 물꼬를 튼 것은 좋았다. 세트피스 역시 밀집 수비를 공략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최근 약속된 플레이를 통해 좋은 세트피스를 보이고 있다는 것 역시 고무할만한 일이다. 놓치긴 했지만 곽태휘의 헤딩 역시 골과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골 모두 세트피스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미얀마를 상대로라면 더 많은 득점을, 다양한 루트를 통해 해냈어야 했다. 다음 경기들에선 확실히 나아져야 한다.
'아시아 축구의 맹주'를 자처하는 우리로선 아시아에서만큼은 절대적 강함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수비'가 가장 중요하다. 맹수는 작은 토끼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있다. 수비야말로 그런 맹수의 자세로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미얀마의 공격은 전진한 우리 수비수의 뒤를 노린 패스로 '속도 경쟁'을 붙이는 모습이었는데 우리가 여유있게 잘 막아냈다. 하지만 서로 공을 미루다가 불안한 장면을 노출 하기도 했고, 단번에 공을 빼앗으려고 달려들다가 한 번에 돌파를 허용하기도 했다. 약팀의 입장에서 본인들이 계획한 플레이들이 몇 가지 통한다면 정신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의식이 생긴다. '아, 이 팀은 확실히 강하구나. 안 되겠다.'라고 정신적으로 굴복시키려면 강하고 치밀한 수비가 필요하다. 단번에 공을 빼앗으려하는 '쉬운 수비'를 할 것이 아니라 유럽이나 남미의 강팀을 상대할 때처럼 차근차근 압박하는 수비를 해야 한다. 개인 기량에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기에 실점하지는 않았지만 탄탄한 수비라고 하기엔 부족했다. 정신적으로 약간의 방심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적절한 수비 이후에 나오는 역습 역시 가다듬어야 한다. 아시아 무대에서 만날 팀들은 이번 경기처럼 수비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를 부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상대가 공격을 하고 정리되기 전에 가하는 역습이다. 하지만 오늘 보여준 역습은 완성도가 너무 떨어졌다. 공을 탈취한 후 선수들이 너무 느리게 전진하면서 충분한 공격 숫자를 확보하지 못했고, 공간을 향하지 못하고 선수의 발 밑으로 연결되면서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패스 자체도 속도가 느렸다. 어차피 공을 탈취한 후 수비라인부터 적극적으로 전진하면 상대 공격수들은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게 되어 우리 수비라인에 맞춰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수비적으로도 우리 선수들의 뒤에서 쫓아가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부담이다. 역습 시에 수비진부터 적극적인 모습으로 전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환상적인 프리킥을 성공시킨 손흥민. 골키퍼의 실수도 얼마간 따랐다고 보이긴 한다. 출처:KFA홈페이지)
약체와의 경기에서 오히려 아쉬운 모습을 더 보이는 것 같다. 약팀을 상대로 2:0 승리에 만족해서는 곤란하다. 약팀을 상대로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플레이를 맘껏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팀이 필요하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팀이라야 비슷한 수준의 팀 혹은 우리보다 개인 기량이 좋은 팀을 상대로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다. 그러려면 약팀을 상대로는 우리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더욱 집중력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다. 승리라는 결과 자체는 만족할만하지만, 오늘 보여준 선수들의 모습엔 아쉬움이 남았다. 약간의 방심은 제2의 오만쇼크, 베트남쇼크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사냥에 나서는 맹수의 마음으로 승리에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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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이네요! 저도 님처럼 전문적인 수준이었으면 좋겠습니다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