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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희곡 톺아보기〛
다양한 스펙트럼의 주제를 형식적 실험에 담다
- 김지숙 두 번째 희곡집 <나비> 작품 해설
김 문 홍 극작가, 연극평론가
연극성보다 문학성을 우위에 두는 작가
극작가는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희곡만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군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연출과 희곡 창작을 겸하는 작가군이다. 희곡의 예술적 완성도를 두고 볼 때 이 두 부류에는 조금씩이 차이가 난다. 결론적으로 말할 때 희곡만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들의 작품이, 연출과 희곡 창작을 겸하는 작가들의 작품보다 문학적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희곡은 연극 공연의 텍스트가 되기 때문에 애초부터 ‘연극성’과 ‘문학성’의 두 가지 특성을 가진 채 태어난다고 볼 수 있다. 흔히들 연출가가 작품을 선택할 때는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이 작품은 문학성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연극성이 약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연극성은 제법인데 문학성이 약하다‘라는 생각이다. 여기에 하나의 걸림돌이 생긴다. 그렇다면 연극성과 문학성, 이 두 가지 특성 중에 하나만을 선택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 연극성이 약한 희곡은 작품을 분석하고 표현해야 하는 연출가의 극적 상상력으로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다. 연극성은 괜찮은데 문학성이 약한 희곡은 연출가로서도 어쩔 수 없다. 작품의 주제를 비롯한 세상과 세계에 대한 비전으로서의 현실 인식, 그리고 대사의 상징과 은유적 함축 등의 문학성은 연출가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극작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희곡은 연극성과 문학성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그런데 이런 작품을 쓰기가 어디 쉬운가?
극작가 김지숙은 희곡의 연극성보다 문학성을 우위에 두고 있는 전문 작가이다. 그렇다고 연극성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대학 시절 한때 연희단거리패에서 「오구」를 비롯한 몇몇 작품에서 활동하며 연극적 기량을 쌓은 바가 있다. 그 뒤로 제1회 김문홍 희곡창작교실(2010)에 참가하여 희곡창작 실기론을 배웠다. 극작가로 얼굴을 내밀면서부터는 부산의 젊은 극단 《더블 스테이지》 소속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연극의 본질과 매체적 특성, 그리고 메카니즘을 터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희곡의 문학성과 연극성에 대한 기량을 탄탄하게 닦은 셈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16편 정도의 창작희곡을 써서 공연했을 뿐만 아니라, 제34회 부산연극제에서는 <달빛 소나타>라는 작품으로 희곡상을 수상했다. 연이어 같은 작품으로 제3회 김문홍 희곡상까지 수상한 바가 있다. 『줄무늬 팬티를 입은 남자의 고백』(해성)이라는 첫 희곡집도 수년 전에 이미 상재한 바가 있다.
그 여세를 몰아 극작가 김지숙은 이번에 두 번째 희곡집 『나비』(2023, 연극과 인간)를 발간했다. 이 희곡집에는 장막희곡 6편이 수록되어 있다. 6편의 희곡은 특정하게 하나의 주제로 꿸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비」는 역사극이고 「거룩한 양복」은 민주화 운동을 다룬 시대극으로, 지나간 시대의 아픈 역사에 대한 작가의 현실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라랄라 흥신소」와 「달빛 소나타」는 부조리극 형식의 무거운 서사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이다. 「클로즈업」과 「백산 안희제」는 극중극 형식을 차용한 일종의 메타드라마로 형식적 새로움이 돋보이는 희곡이다. 필자는 이렇게 형식적 새로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 역사에 대한 현실 인식이라는 세 가지 꼭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메타드라마라는 중층구조의 새로움
「라랄라 흥신소」와 「달빛 소나타」는 외적인 형식에 있어서는 유사한 점은 없으나, 서사 내용과 주제에 있어서는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라랄라 흥신소」는 일종의 엎치락뒤치락의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인간관계가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고 논리적 이성의 틀을 벗어나는 부조리한 형식의 극이다. 「달빛 소나타」 는 가족 간의 근친상간을 다룬 작품으로 음악의 ’소나타‘ 형식을 서사적 구성 형식으로 취하고 있으며, 인간 본성의 악마적 행태를 다루고 있다.
「라랄라 흥신소」는 겉으로는 엎치락뒤치락하는 한 편의 블랙 코미를 취하고 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현대인의 어두운 심연을 들려다 보는 듯 끔찍하고 비정적이다.
선량한시민 이제 다 기억나. 푸른들이, 초롱이, 정팔이, 미친 영감탱이. 그날 이렇게 한 자리에서 죽었어.
하얀노인 뭐야?
선량한시민(동정의 눈길로) 그래도 외롭진 않겠지?
하얀노인 (혀를 차며) 기억력이 저래서야.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라라가 당당히 걸어온다.
라라가 선량한시민을 돈가방으로 후려친다.
선량한시민 악!
라라 24개월 할부는 비양심적이야.
선량한시민 (붕대감은 머리를 매만지며) 나도 죽은 거네. 살아남은 자는 누구 지?
라라 (손을 들며) 저요.
인국 (손을 들며) 저도요.
선량한시민이 죽은 사람들 무리에 허탈하게 섞여 앉는다.
라라 커피가 너무 헤픈 것 같아.
인국 신경 쓰지 마. 아무려면 어때. 커피일 뿐이잖아.
라라 현판은 어떻게 할 거야? 일 년째 먼지만 쌓여가고 있어
인국 현판을 들어 보인다.
‘라랄라 흥신소’다
위 인용문은 이 작품의 마지막인 에필로그의 제일 마지막 부분이다. 이 작품 속에는 ‘하얀노인’이 등장하는데, 그의 가장 큰 적수이다. 하얀노인은 아주 반어적인 명칭인데,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무소불위의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라라가 버렸지만 인국이 거두워 키운 ‘김푸른들이’이라는 아이는 첫 장면에서 하얀노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돌발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그 아이는 핫도그에 빨간 케첩을 뿌려 먹다가 잘못해 하연노인의 흰옷에 케찹을 묻혀 버리고 만다. 그것은 곧 하얀노인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자본에 대한 도전이다. 온갖 악행과 비리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적인 인물이 하얀 옷을 입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가 아이의 단순한 잘못과 행동에 권위가 추락한 것을 감지하고 흥신소에 그 아이를 죽여달라고 의뢰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적인 해프닝에 가깝다.
하얀노인은 전직 다방 마담 출신이 운영하고 있는 ‘라랄라 흥신소’를 찾아와 그 아이를 죽여달라고 의뢰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무런 이유와 동기도 없이 라라와 인국은 직원인 정팔과 초롱 부부를 죽이게 되고 하얀노인까지 죽인다. 그 과정에서 캐비닛 속에 갇혀 있던 김푸른들이까지 죽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인국과 라라가 흥신소 간판을 달며 희망을 품는다. 이 작품은 이처럼 모든 사건과 장면들이 서로 연관성이 없고, 연쇄적인 살인에서도 아무런 이유나 동기가 존재하지 않은 채 한바탕 엎치락뒤치락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달빛 소나타」는 아주 어둡지만 가족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34회 부산연극제 희곡상과 제3회 김문홍 희곡상을 연달아 수상한 작품으로,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의 소재로, 가족 내의 성폭력이 끼치는 후유증과 트라우마, 그리고 살인이라는 깊은 상처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음악의 ‘소나타’ 형식을 플롯 구조의 시사적 형식으로 가져오고 있다. 소나타 형식이란 같은 형식이 계속 연주되면서 그사이에 변주 음악이 다시 끼어들면서 완성되는 형식을 말한다.
이 작품은 가족 내 성폭력을 주제로 하고 있다. 아버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딸에게 집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본 엄마가 자살하게 되면서, 서사는 딸의 환상 속에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아홉 살 때 맹장이 터져 죽은 오빠가 여동생 옥선의 환상 속으로 소환되어 조력자가 된다. 아버지와 이웃 사람, 그리고 택배기사가 차례로 연쇄 살해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옥선의 단독 범행이다. 그녀는 오빠의 환상에 힘을 얻어 여러 사람을 죽이는 괴력을 발휘하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살인 행각으로 관객(독자)에게 불편함을 끼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무의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에 대한 어두운 열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표면적인 구조로는 그녀 속에 또 다른 괴물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러한 서사구조가 음악의 소나타 형식을 빌려 전개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의 무의식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의 열망과, 살인을 통해서라도 가족을 복원하려는 절절한 열망이 침전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옥선 왜?
광재 세 식구라고 했니?
옥선 또 왜 그래 오빠? 오빠, 나, 아빠. 우리 세 식구 맞잖아. 이제 그만 아빠하고 화해 해.
광재 넌 아빠하고 계속 식구가 하고 싶은 거니?
옥선 식구가 하고 싶고 말고가 어디 있어? 가족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정해준 운명 같 은 거잖아.
광재 정해주는 건 하늘에서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잘라내는 건 우리가 할 수 있어.
옥선 운명을 어떻게 잘라낸다고 그래?
광재 잘라 낼 수 있어. 하나도 안 어려워. 잘 드는 식칼로 쓱쓱 잘라내면 되는 거야. 내가 하루 종일 집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알아? (칼 가는 시늉을 하며) 칼을 갈고 있어. 옥선아 칼 가는 방법 가르쳐줄까? 잘 들어 봐.
위 인용문은 옥선이 자신을 성폭행한 아버지를 죽이고 난 뒤 어릴 때 죽은 오빠의 환상을 불러내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는 장면이다. 아버지가 살해되어 부재하고 있는 데에도 옥선은 자신의 존속 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오빠라는 존재를 자신의 환상 속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옥선 자신은 가족의 혈연이라는 운명을 내세우며 아버지를 보호하면서 살인의 부당성을 내세운다. 그런 데도 오빠는 가족의 운명을 칼로 잘라내려고 한다. 옥선이 오빠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있다. 오빠라는 존재를 통해 살인을 행하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해서 풍비박산된 가족을 복원하려는 열망을 잠재적으로 실현하려는 열망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은 가족 내의 성폭력을 주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가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웃 사람과 택배기사까지 끌어들여 살인의 희생물로 삼고 있다. 이웃 사람은 썩는 냄새가 난다고 하니 자칫 잘못하면 범행이 탄로 날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살해 대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 내력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택배기사를 살해하는 까닭은, 택배 기사에 의해 그녀의 가족 복원에 대한 순수한 열망의 감정이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집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녀의 가족 복원에 대한 그녀의 순수한 열망을 저지하고 훼손하는 방해자적 요소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작품의 심층 구조는 가족의 복원에 대한 열망을 담은 작품이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예리한 현실 인식
역사극 「나비」 와 독재권력에 대한 민주 항쟁을 다룬 시대극 「거룩한 양복」 은 작가의 예리한 현실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왜 이런 작품을 ‘지금 이곳’의 관객에게 선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필연적 당위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그러한 역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연관성의 필연성이 요구된다.
역사극 「나비」는 인조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9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환향녀’에 관한 내용이 서사 내용의 핵심이다. 여인들이 정절을 잃었다 하여 지아비와 시부모로부터 내치자, 조정에서는 교지를 내려 극약 처방을 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임금이 지정한 장소인 강에서 환향녀들이 몸을 씻으면 정절을 다시 회복한 것으로 여긴다는 일종의 면죄부인 셈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사대부 집안에 속한 여인 세 명이 인조의 꿈속으로 들어와 임금에게 하소연하다 못해 힐책까지 하는 것이 서사구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환향녀들과 함께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 역시 인조의 꿈속으로 들어와 여인들과 아픔을 함께 해 인조를 겁박하기도 한다.
인조 갈아입고 가시게. 저승 가는 길, 옷 한 벌은 마련해야하지 않겠나?
여인들이 소현세자의 기색을 살핀다.
소현세자가 단호하게 가로젓는다.
인조 (다급하게) 소현아! 세자야! 아비의 부탁을 들어다오. 여인들에게 옷 한 벌만 허락해 다오.
소현세자의 서늘한 눈길.
인조 소현아, 아비를 왜 그리 노려보는 거니? 소현아, 소현아.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달려들려고 한다.
여인들이 황급히 소현세자를 말린다.
여인들이 소현세자를 품는다.
위 인용문은 이 작품의 후반부로 집안에서 내쳐지거나 모욕감에 자결한 여인들이 인조의 꿈속으로 들어와 저승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그녀들에게 옷 한 벌 마련해주려는 아버지 인조의 애원에도 소현세자는 그녀들을 함께 데리고 저승으로 떠난다.
작가가 ‘지금 이곳’의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수난의 역사 속에서 희생당한 그들의 수모와 억울함을 잊지 않아야함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짐승처럼 끌려갔다가 천하에 몹쓸 죄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 이들의 창자가 끊어지는 한과 처참한 사연들을 이야기하는 것에 어떠한 복잡한 해석이 필요하겠느냐며 작가는 소현세자와 여인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치욕의 역사에 휘말린 운이 없었던 여인들이었다고 감히 낭만적인 어조로 말하는 자는 없어야 할 것이라고, 작가는 작품 속 조정 대신들의 희화적인 모습을 통해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희곡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 중에 작가의 현실 인식이 가장 강력하고 돋보이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나비」가 국가 권력의 나약함에 희생된 민초들의 아픔과 수모를 그리고 있다면, 「거룩한 양복」은 1979년 부마항쟁을 통해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국가 권력의 부당한 처사에 시민들이 분연히 일어나 이를 저지하는 투쟁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당시 어린 나이로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지 못한 자신을 되돌아보며, 당시 그날의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의 불굴의 투지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작품은 1979년 10월, 선량했지만 위대한 항쟁을 실천하였던 부마 시민에게 보내는 작가의 수줍은 고백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불온한 시대의 폭력과 독재자의 악정에 분노한 당시의 선량한 부마 시민들의 항쟁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하나의 다짐이기도 하다. 잊고 잊히는 것 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최정호 잘 오셨습니다. 저...제가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유치진 부탁이오? 제가 뭐 해줄 수 있는 게 없을 건데.
최정호 택배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치진 택배요?
마침, 아내가 양복을 들고 나온다.
최정호 타이밍 기가 막히네.
아내 손님 왔어요? 누구하고 이야기하는 소리 들리던데.
최정호 이야기하고 있던 거 맞아요.
최정호가 양복을 유치진에게 건넨다.
최정호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대신에, 빌려주는 게 아니고 선물 로 드리는 거라고. 사양하지 마시라고 꼭 좀 전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치진이 최정호를 이해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최정호는 유치진을 정성스럽게 배웅한다.
부부만 고즈넉하게 남았다..
「거룩한 양복」은 부산시와 경상남도에서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학생들과 선량한 시민들이 합세하여 박정희의 제4공화국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이 민주항쟁이 바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이 작품은 선량한 시민 중의 한 사람인 최정호가 현재의 시점에서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관련자 명예회복을 위한 심의위원회에 참석하여 상담을 받으면서,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서로 교차되면서 서사가 진행되고 있다.
최정호가 진압대를 피해 골목으로 숨어들었다가 거기서 노동자를 만난다. 작품 제목이 암시하는 ‘거룩한 양복’은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노동자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양복을 빌려주기로 한 것을 은유적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최정호가 만난 소위 ‘공돌이’라 비하되고 있던 노동자는 부마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끈 보통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당시 민주항쟁을 했던 그런 선량한 시민들에 대한 일종의 헌사이며, 그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에 대해 보내는 작가의 일종의 레퀴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민주화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최루탄을 뒤집어쓴 최정호는 뒷골목으로 숨어들었고. 맨 앞줄에서 물결을 이끌던 노동자도 피 흘리며 숨어들었고, 순결한 대학생도 숨어든다. 골목길에 모인 세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이해하고, 격려하며 연대의식을 느낀다. 최정호는 피 흘리는 노동자를 부축했고, 노동자는 최정호의 양복을 부러워했고, 대학생은 폭력적이고 불의한 시대에 대한 투쟁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들은 골목길에서 헤어졌는데 서로의 생사를 알 길이 없다.
위 인용문은 마산 민주항쟁 시위에서 희생된 혼령인 유치진에게 그때의 그 ‘거룩한 양복’을 역시 불귀의 객이 된 그 노동자에게 선물로 드리고 싶다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작가가 제명으로 쓰고 있는 거룩한 양복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당시의 그들에게 드리는 장엄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결코 과거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과거의 연장 선상에서 현재를 파악해야 하고, 미래 역시 그런 과거의 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민주화된 세상에서 살며 행복을 누리는 것은, 과거 민주화 투쟁에서 상처받고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으로 이룩된 것이다. 작가는 과거 자체만을 회고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의 연대와 동질감 속에서 존재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극중극 메타드라마와 서사적 기법의 형식 실험
「클로즈업」은 인간 욕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도자기의 명인 토곡 선생과 다섯 명의 제자라는 서사, 그 서사를 촬영하는 현장의 배우들과 감독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그러한 이중 구조의 영화를 촬영하고 시나리오를 쓰는 감독의 3중의 중층 구조를 인간의 심층 구조 속에 자리 잡은 욕망을 해부하고 있다. 토곡 선생과 다섯 명의 제자들은 영화 촬영 현장의 구조에서는 극중극의 형식을, 영화 촬영 현장은 다시 이 모든 것을 다시 극중극으로 감싸고 있는 서사극 형식으로 전개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전략)
짧은 적막.
변태가 홀연히 그 방을 나가버린다.
‘그 사람’은 안간힘으로 시나리오에 열중한다.
교미가 말간 얼굴을 하고 ‘그 사람’에게 다가온다.
교미는 말간얼굴과 달리 폭력적인 몸짓으로 ‘그 사람’을 위협한다.
교미가 제법 긴 시간 동안 ‘그 사람’을 폭행한다.
아사 직전인 ‘그 사람’은 속절없이 교미의 폭행을 견뎌낸다.
폭행을 끝낸 교미는 ‘그 사람’을 총총 떠나간다.
감독이 ‘보통 사람’처럼 ‘그 사람’에게 다가온다.
감독은 굶주림과 폭력과 외로움에 지쳐버린 ‘그 사람’을 감싸 안는다.
기분 좋은 노곤함에 스르르 눈을 감는 ‘그 사람’이 클로즈업된다.
감독은 커터칼을 꺼내 스르르 ‘그 사람’의 목을 긋는다.
감독은 기어이 ‘그 사람’의 목을 따고는 홀연히 떠나간다.
‘그 사람’의 검붉은 피가 레드카펫처럼 바닥을 적신다.
클로즈업되는 흥건한 피.
막.
위 인용 장면은 이 작품의 결미 부분으로, 이 장면 속의 “그 사람‘은 토곡 선생과 다섯 명의 제자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또 다른 감독이다. 그 사람의 목을 딴 뒤에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감독은 영화 속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배역으로서의 감독을 지칭하고 있다. 토곡 선생과 다섯 명의 제자는 영화 속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구조에 내포되고, 그리고 영화 촬영 현장의 감독과 배우들은 다시 그것을 촬영하는 서사극 형식의 구조에 내포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은 그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감독의 장면에 내포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토곡 선생과 다섯 명이 제자‘라는 허구 속 인물들의 욕망이 그 배역을 맡아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의 욕망으로 전이되고, 그러한 욕망들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배역들이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감독을 찾아와 불만을 토로하고 결국은 시나리오라는 허구를 창작하는 ’그 사람‘의 목을 딴 뒤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인간 욕망의 끝없는 순환을 3중의 중층 구조와 서사극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결국 그들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동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칸트의 정언대로 토곡 선생과 다섯 제자들은 욕망으로 인해, 욕망이 주는 행동들로 인해 서로를 옭아매고 서로를 뒤엉키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들 모두는 결국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시대극 「백산 안희제」는 부산의 독립 운동가로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군의 후원 자금을 댄 백산 안희제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10여 년 동안 연극을 함께 만들어온 극작가 서경과 연출가 정무가 만나 새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연출가 정무가 ‘백산 안희제’ 이야기를 제안하자, 서경은 그리 탐탁해 하지 않는다. 정무는 극작가 서경의 부정적인 반응에 당황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연극 ‘백산 안희제’는 연습을 시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첫 장면부터 희곡의 표현과 해석 차이로 부딪힌다. 하지만 연습을 진행하면서 연극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인간 ‘백산 안희제’에게 깊은 경외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더불어 서경과 정무 두 사람도 지금 여기, 지금 이 시대에 왜 ‘백산 안희제’여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서사 구조이다.
이 작품은 단짝인 연출과 작가가 희곡 ‘백산 안희제’의 연습 과정을 지켜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연습 장면과 두 사람의 대립과 갈등이 주축을 이루는 의견 교환의 현실 장면이 서로 교차되면서 진행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은 이러한 연습 과정을 지켜보면서 역사의식에 눈뜨게 되면서 작품에 동화되어 나간다. 연극 속에 자신을 투명하게 되면서 작품 속 인물들과 정서적 일치를 하게 된다.
서경과 정무가 들어온다.
서경 울었어?
정무 아뇨.
서경 눈이...
정무 아니에요. 무조건 안 울었어요.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서경 알았어.
정무 백산 선생이 운명하시는 장면으로 마무리를 하면 좋겠는데...어떻게 생각하세요?
서경 관객에게도 백산선생을 애도하는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았어. 경교장 장면은 백산에게 바치는 추모식 같은 거야. 최 준 선생이 백산선생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꺼이 꺼이 울음을 토해내고 있을 때 관객들도 최준의 울음 위에 국화 꽃를 올리고 슬픔을 얹으며 백산을 추도하는 거야. 그런 추모의 시간을 관객에게 주고 싶어.
정무 연극이 끝난 뒤에 관객석 불을 잠시 꺼두는 건 어때요? 백산 선생님과 독립운동가 분들을 기리는 의미 있는 순간이 될 것 같아요.
서경 좋은 생각이야. (문득) 그럼 커튼콜은 어떻게 해?
정무 (생각 끝에) 커튼콜은 생략할 거예요.
무대 뒤 저쪽에서 백산이 말한다.
백산 (백산의 목소리로) 커튼콜이 없다니! 커튼콜이야말로 공연의 꽃이거늘. 연출 님은 각 성하시오. 각성하시오.
위 인용 장면은 이 작품의 후반부 한 장면으로, 연극 속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관객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역사 속 인물들에게 동화되게 하기 위해서 커튼콜을 생략하지고 작가와 연출이 서로 합의하는 대목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작가와 연출이 서로 의견을 나누거나 대립과 갈등하는 장면은 현실이 되고, 연극 속의 장면들은 극중극으로 보여지는 서사극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관객들은 이러한 서사극적 형식의 진행 과정을 통해 어느 때는 작품 속에 몰입하여 등장인물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사실주의의 극적 환상 기법, 그리고 작가와 연출가의 현실 장면을 통해서는 서사극적 소외 기법을 통해 무대를 냉철한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이번 희곡집에는 모두 여섯 편의 희곡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형식과 내용이 모두 다르다. 앞으로는 희곡의 대사가 보다 더 시적으로 압축되고 상징적 은유로 번뜩이기를 바란다. 또한 내용으로서의 전복성과 형식으로서의 파격성이 조화를 이루는 정제된 희곡이 탄생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극작가 김지숙은 부산지역에서 창작희곡만을 전문적으로 쓰고 있는 여류 극작가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희곡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그녀의 희곡 스펙트럼은 아주 다양하고 독창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라랄라 흥신소」, 「클로즈업」, 「백산 안희제」 같은 개성적인 형식 실험을 하는가 하면, 소재와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시대와 인간을 보는 예리한 현실인식으로 연극의 사회적 기능에 충실한 작품을 빚어오고 있다. 이처럼 그녀의 희곡적 스펙트럼은 다양하고 개성적이고 전복적이다. 이번 두 번째 희곡집 발간을 계기로 작품의 주제의식과 현실 인식이 더욱 더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바란다. 앞으로 그녀의 희곡적 지평이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기대된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문학성과 연극성.
둘다 수준이 높다면 최고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극작가는 문학성을 극대화해야 하고
연출가는 연극의 효과를 생각해야 하고.
최고의 예술은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끝나고 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니 더 그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