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남 선생님으로부터 석우가 반성문과 보길도의 검은 조약돌 16개가 든 봉투를 받은 것은 <함께사는 길>이 지난 봄에 정기독자 확대를 위해 만든 4쪽짜리 인쇄물을 드린 다음 주였다. 그 광고지와 함께 김 선생님은 곧바로 정기독자가 되었고 정기독자가 되자 처음 받은 책에서 선생님은 자연스레 "섬으로 돌아간 검은 돌" 이야기를 만난 모양이다.
"선생님, 이건 반성문이고요, 그리고 이건 그 섬의 검은 돌이에요.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그쪽 분들과 연락이 쉬울 것 같아서..."
1933년생인 김 선생님은 이제 마흔 다섯밖에 안 되는 아들내미뻘의 석우를 '선생님'이라 불렀는데, 그 까닭은 김 선생님이 석우가 문학강의를 나가는 한 문화센터의 '할머니 수강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관계야 어찌되었건 석우 또한 김 선생님의 인품에 내심 존경심을 품어오던 터였다.
"웬 반성문을, 김 선생님?"
"이렇게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너무나 부끄럽게도 그런 짓을......"
김 선생님은 말끝을 잇지 못하고 그 연세에 소녀처럼 발갛게 얼굴을 붉혔다.
200자 원고지에 심이 굵은 볼펜으로 또박또박 쓴 6장짜리 반성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 반성합니다.
많이 찾아드는 잡지의 홍수 속에서도 유난히 반가워 단숨에 읽었습니다. <함께사는 길> 4월호 말입니다. 이렇게 4월호를 반기며 읽을 얼굴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이 반성문과 함께 꼭 돌려보내야 할 것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심정은 좀 비통하기까지 합니다. 부끄럽고, 염치없고, 바보스럽고... 나는 아니야. 하면서 멀쩡하니 자연파괴의 대열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당신이 분수 없고 자연을 파괴할 것 같다고 내게 말하지 않는 것을 잘 이용한 것이지요.
그 아름다운 섬 보길도(청별항)에서 6월의 기막힌 해돋이와 저녁바다와 밤바다를 보았고 그리고 그 예송리 해변에서 신비한 검은 돌들과 만났었습니다. 그 돌들과의 만남에서 나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바보였습니다. 아침 산보길에 끌리듯 주워올린 조약돌들을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넣었고 해변 출구에서 지키고 있는 이의 앞을 망설임과 당황속에서도 시선을 돌린 채 지나쳐버렸습니다. 조금도 의구심을 갖지 않는 그의 앞을 그냥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을 이제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려옵니다.
한 여름철엔 30만명씩이나 다녀간다니 그들의 반이 나와 같다고 해도 수십만 개의 돌이 해변에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아찔해집니다. 작은 바구니에 고이 담아놓고 매일 아침 때로는 저녁에도 꼭 들여다보며 그곳 갯내음과 보길도의 추억을 되살리던 나의 어리석음을 빨리 되돌려야겠습니다. 기나긴 시간 바다 우짖음과 맑은 햇살과 또 온갖 바람 속에서 검은 돌이 된 이 돌들. 참으로 귀한 이 자연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향수에 젖고 안정을 그곳에서 찾으려 하듯 이 돌들도 그곳에 있어 비로소 귀하고 아름다우며 우리 다 함께 즐거이 살 수 있음이지요. 자연을 그대로 그곳에 두는 것이 바로 함께 사는 것임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멀쩡히 우를 범하고 있던 내게 '섬으로 돌아간 검은 돌'의 일깨움이 있었음을 마음으로부터 감사합니다. 긴 세월 살아 온 내게 이렇게 뒤끝이 개운한 반성문을 쓰게 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을 거기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이요, 우리가 함께 사는 당연한 길목입니다. 이 돌들을 빨리 고향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그곳을 지키시는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꼭 다시 가고 싶습니다. 고향에 돌아가 있을 이 돌들을 만나러 다시 가겠습니다.
1999년 4월 서울, 김옥남
문맥에 다소 문제가 있는 글이었지만, 그보다는 돌과 관련한 반성과 감사가 더 중요하게 읽히는 글이므로 상관없었다.
놀랍고도 놀라운 일은 석우가 소리내서 김 선생님의 반성문을 다 읽고 난 뒤의 일이었다.
한 수강생이 "이런 분과 같이 공부한다는 데에 큰 기쁨을 느껴요"라고 하며 거의 울 것같은 감동의 얼굴을 지었고,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다른 좌석의 수강생이 "사실은 저도 거기에서 돌을 한 바가지 가량 갖고 왔는데... 이 일을 어떡해요" 하며 얼굴이 화로처럼 새빨개졌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