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김영주 선생님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멍했다. 찾아뵌 지가 지난해 겨울이었다.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 시인과 두 분 내외를 만나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요즘 옛날에 같이 다니던 사람들 자주 찾아와요”
“아뇨? 아무도 연락조차 안해요”
김지하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않으셨고
김영주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쓸쓸하고 허전했다.
그때 고인은 허리 수술을 한 뒤끝이라서 거동이 불편하셨고 김지하 선생님도 투병중이었다.
그 불편을 참으시며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
두분들이 잘 가시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면서 곧 찾아뵙겠다고 돌아왔다.
"선생님 뵈러 자주 찾아와요."
그게 고인이 나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그 뒤로 지인들을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다시 갈 수가 없었는데,
돌아가셨다니,
이 지상에서의 약속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현세의 인연 탓이었을까?
1994년 5월 목동의 파리공원에서 우연처럼 김지하 선생님을 만난 뒤
1990년대 중반 두 분과 함께 여기저기를 다녔다.
”신형. (동학에서는 누구다 존중하는 의미로 나이에 상관없이 형이라고 부름.) 나 어디 가는데, 나랑 가지 않겠소,“
느닷없이 전화가 오면 만나 가지고,
김지하선생님도, 나도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사모님(김영주)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던 추억,
대전으로, 해남으로, 고창으로, 금산사, 선운사로 많이도 같이 다녔다.
언젠가, 대젅 한의대에서 김지하 선생님이 강연을 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선생님, 나 세 남자(아들 둘과 남편)들 때문에 힘들어서
원주에 있는 어머니에게 가야겠어요“
하시면서 힘든 삶의 편린을 펼쳐 놓으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2008년 오월 어머니인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셔서
조문을 갔을 때도 그랬다.
전주에서 서울 그리 먼 거리는 아니면서도 조금은 먼 곳
빈소에 도착하자
당신의 둘째 아들과 함께 서 있다가, 나를 끌어안으시며
“신정일 선생님 나 이제 고아가 되었어요.”
하면서 설음에 겨운 눈물을 쏟으셨었다.
할 말을 잃어서 “사모님 이제 더 잘 사셔야 해요.” 하고
나오면서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고아가 된 것 같다는 말씀
그것은 나를 이 지상에 있게 한 첫 사람이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다시
수줍은 듯 세상에 펼쳐 놓으시던 김영주 선생님의 미소를
볼 수 없다는 사실,
그런데 몸이 불편하신 남편인 김지하 선생님을 두고 어떻게 가셨을까?
“자네가 내 딸 데려가게,”
어머니 박경리 선생님의 말 한 마디에 인연이 되어
온갖 풍상을 다 겪으셨는데,
김지하 시인만 남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셨다.
생각해보면 인연이란 신기한 것이다.
1994년 김개님 장군 추모비를 세우던 중,
김남주 시인을 통해 신영복 선생님을 만났고,
신영복 선생님이 김지하 시인의 안부를 물은 뒤
10여 분 뒤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기이한 인연으로
목동의 파리공원에서 김지하 시인을 만나
그날 저녁에 박경리 선생님과 긴 통화를 하였고,
그 뒤 이렇게 저렇게 이어졌던 인연의 끈이었다.
그 인연의 끈을 놓으시고, 김영주 선생님이
먼 곳으로 가셨다는 소식에
잠은 멀리 달아나고 밤은 길기만 하다.
"죽음이란 없어? 그러나 나는 또 죽고 말지?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의 말과 같이
우리 모두는 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데,
김영주 선생님,
부디 돌아간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길,
마음 다해 기원합니다.
2019년 11월 26일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