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7일 자살한 金正憲(김정헌·67) 前 육군사관학교 교장의 죽음은 쉬 잊혀졌다. 사고 당시 가족들과 접촉했지만, 가족들은 『돌아가신 분께 累가 된다』며 언론 접촉을 피했다. 육사 동기생들도 마찬가지였다.
金장군이 왜 죽음으로써 憲裁 결정에 항변했는지, 그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를 찾기가 어려웠다.
金장군이 남긴 유서가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짐작케 해줄 뿐이었다. 그는 탄핵이 기각된 지 3일 만에 자결로써 항의했다.
유서는 간략했다.
<이 나라가 어떻게 해서 이룩해 놓은 나라인데, 최근 대통령 3명이 나라를 희망이 없는 나라로 망쳐 놓았고, 헌법을 유린해도 헌법을 지켜내지 못하는 얼빠진 법관들을 보고는 항의의 표시로 얼마 남지 않았을 나의 목숨을 국가에 바친다>
金장군은 지난 5월11일부터 3일 동안 세 통의 이메일을 평소 친분이 있던 후배 權陽(권양·60)씨에게 보냈다.
5월11일자 金장군의 이메일이다.
<오늘도 선교활동에 여념이 없으시겠지요? 세상사 잊어버리고 하느님 사업에 전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신문과 뉴스를 보지 않을 수는 없고, 나라 돌아가는 꼴이 답답하기만 하군요.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심상치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일순 대장 구속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어서 그것을 보는 나의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이냐시오 드림>
이냐시오는 金正憲 장군의 세례명이다. 그는 1981년 세례를 받았다.
5월12일 金장군은 어느 선교사가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을 權陽씨에게 보냈다.
글의 제목은 「좌익이나 친북이 아니라 金正日의 졸개들」이었다.
<좀 섬뜩하겠지만 선교사가 우국충정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썼다고 생각되어서 보내 드리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탄핵 결정 하루 전인 5월13일 金장군은 마지막 이메일을 보냈다.
<또 시국사항에 관한 글 한 편 더 보냅니다.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도 마음이 답답해서 알퐁소(權陽씨의 세례명) 아우님한테 보내는 것입니다. PC가 고장 났습니까. 왜 메일을 보지 않습니까?>
말미에 첨부한 편지는 시사평론가 池萬元씨 글이었다. 제목은 「탄핵은 반드시 가결될 것입니다」란 것이었다.
池萬元씨는 『헌재 판사들도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읽고 나라의 운명을 누구 못지않게 염려하는 애국자들일 것』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헌재 판사들을 믿는다』고 썼다.
신일순 대장 구속을 우려하다
權陽씨는 탄핵이 기각된 다음날인 5월15일 金장군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金장군은 權씨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신일순 韓美연합사 부사령관(육군 대장) 구속에 대해 이렇게 걱정했다고 한다.
『韓美연합사 부사령관인 신일순 대장을 구속한 것은 우리의 제일 중요한 방위라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軍에서 지휘관을 해 본 사람이라면 그가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안다. 오히려 賞을 줘야 할 사람인데 구속을 하다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金正憲 장군은 2001년 10월 「다발성 골수종」이란 진단을 받은 후 자살하기 직전까지 3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했다. 국가 보훈처는 金장군의 질병이 「고엽제 후유증」이라고 판정했다.
그는 자신의 투병일지를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 「입원일지」에는 金장군이 다발성 골수종이란 진단을 받아 입원한 2001년 10월13일부터 퇴원한 날인 10월25일까지의 기록이 A4용지 10장에 걸쳐 적혀 있다.
입원일지에 첨부된 병원 위문자 명단에는 병문안을 온 사람들과 그들이 사온 과자·음료수·화분·과일 바구니뿐 아니라 그 가격도 기록돼 있어 그의 꼼꼼한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金장군은 병원에서 받은 항암치료의 부작용이 심해 입원한 지 12일 만에 퇴원했다.
金正憲 장군의 부인 李炳俊(이병준·64)씨는 『남편은 퇴원 후 2002년 1월부터 집에서 한방 치료인 「쑥뜸 치료」를 받았다. 약 70일간 몸에 약 1300개의 쑥뜸을 놓았다』고 했다.
『복부 두 군데와 다리 허벅지 부근 좌우에 밤톨만 한 쑥뜸을 놓았는데, 시술을 한 한의사가 살이 타는 쑥뜸을 70일간 견딘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옆에서 보는 것도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쑥뜸을 뜨고 나면 그 자리가 짓무르기 때문에 고약을 붙였어요』
큰아들 金亨眞(김형진·35)씨는 『아버지는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시다가도 약을 복용할 시간이 되면 갓길에 차를 대놓고 약을 드실 정도였다』며 『고통스러운 뜸 치료를 70일간 하실 정도로 건강을 위한 노력이 초인적이셨는데,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가족들이 믿지 못했다』고 말했다.
金장군은 쑥뜸 치료 후 6개월간은 몸상태가 좋았는데 2002년 6월 다시 상태가 좋지 않아 국군 보훈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부인 李씨는 『그 후 남편은 숨지기 전까지 정상적인 일상 생활을 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잘했고, 몸무게도 정상이었다. 매일 산책을 했고, 무엇보다 몸이 쑤시거나 통증이 없어서 다행이었다』라고 했다.
「國泰民安을 비는 절을 부처님께 했다」
金正憲 장군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가 즐겨한 운동은 골프, 산악 자전거, 스키, 윈드서핑 등 격렬한 운동이었다. 병이 난 후 과격한 운동을 피하고, 방에서 체조를 하거나 컴퓨터로 바둑을 두고, 하루에 한 번씩 산책을 했다.
2003년 9월15일부터 12일간 金장군은 속초 회암사에서 요양을 했다.
이때 기록한 요양일지의 한 부분이다.
「오늘도 불전함에 돈을 넣고 國泰民安(국태민안)을 비는 절을 부처님께 하였다」, 「이 나라를 보호하여 주시고 가난과 병으로 고통받고 신음하는 중생들을 제도하여 주시옵기를 빌면서 부처님께 절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기록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金장군은 2003년 10월 말부터 한 달 동안 원주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요양을 했다. 이때 그는 「몸이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고 기록했다.
부인 李炳俊씨는 『남편이 평소 나라를 걱정하는 말씀을 많이 했지만 군인 출신이라면 그 정도 말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는 속이 상해서 뉴스를 안 볼 정도였지만, 그렇게까지 속으로 걱정할 줄은 몰랐어요. 나중에 후배인 權陽씨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탄핵이 기각되자 무척 상심했구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金장군은 1937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39년으로 되어 있어 학교를 늦게 들어갔다고 한다.
울산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8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金장군과 육사 18기 동기인 趙鏞洙(조용수) 장군은 『육사 시절부터 金장군은 무엇이든 무섭게 집중했다』며 『태권도를 하는데 밤낮없이 연습하고, 토요일·일요일까지 연습에 매달리더니 결국 공인 6단을 획득했다』고 전했다.
1962년 소위에 임관, 33경비단장과 보병 22사단장, 육군 3사관학교 교장, 7군단장에 이어 1993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軍생활을 마쳤다.
부인 李炳俊씨는 『남편이 육사를 나와서 육사교장을 했으니 군인으로서 더 이상의 명예는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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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마당 원문보기 글쓴이: STAREX
첫댓글 자살도 진정한 의미가 있어야 인정받는 것입니다. 노무현과 김장군의 차이는 하늘만큼이나 크네요...고개숙여 사죄합니다. 어쩌다 나라가 여기까지 와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