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벧후 1:1~2
엔도슈사코의 침묵이란 소설에 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온갖 고문에도 배교를 하지 않는 신부에게 예수님의 성화를 땅바닥에 던져 놓은 후
그것을 밟지 않으면 네가 전도한 성도들도 모두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끌려온 성도들은 이 상황을 보며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왜 침묵만 하고 계십니까?
왜 내가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배교를 해야 합니까?"
그순간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됩니다
"밟아라 밟아도 좋다 나는 어차피 밟기 위해 태어났으니깐
너희가 나를 밟는 그 발의 고통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나를 밟고 그 사람들을 살려라 그래서 네 할 일을 하라"
이제껏 침묵만 하고 계시는 줄 알아 당신을 원망했다는 신부님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침묵한게 아니고 너희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역사적인 실화를 근거로 쓴 소설가의 창작품이지만 언제 들어도 들을 때마다 그 울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울림은 내 마음 속 깊은 곳에만 머물지 않고 내 발끝까지 이르게 합니다
특히 "밟아라 밟아도 좋다 나는 어차피 밟히기 위해서 태어났으니깐"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자기 낮추심(비하)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 자기 비하의 뿌리인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뿌리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말하지 않았던 베드로가
두 번째 편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밝히는 것을 봅니다
만왕의 왕이시요,만유의 주이신 존귀와 위엄과 모든 영광과 능력과
부요함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입은 사도로는 무언가 부족한 것이였던가요?
이제와서 왜 그는 자신을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할까요?
물론 그전부터 알았겠지만 성령님께서는 왜 필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밝히도록 한 것일까요?
베드로는 자신을 성전삼아 거처하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으로 인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 가고 있는 중입니다
마치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이 때 성령님께서 모든 진리로 인도한다함은 결국 무엇을 뜻할까요?
가장 알기 쉽게 풀어 본다면 그것은 모든 진리의 육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다면 이 장성한 분량의 정점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모든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로 그 낮아짐은 결코 우리가 측량할 수 있는 낮아짐이 아니십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경험 밖, 심지여 상상 밖에 있는 비하입니다
그런데 그게 진리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편협하거나 천만년 세월의 흐름따라 혹은 다양한 공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이면서도 집합체입니다
때문에 단편적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여 우리의 한계로 인해 단편적인 진리만 알았다도 그 단편적인 편린은 모든 진리에 결코 위배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진리의 장엄함과 광활함과 무한성을 공유하기엔 우리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모든 진리가운데로 한 걸음씩 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도라는 말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생각하면 모든 성도들은 모든 진리이신 주님으로부터 각각 분량만큼 진리의 분신,
진리의 파편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혹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 소개하며 시몬이란 이름과 베드로란 이름을 모두 다 기록합니다
나는 묵상할 때 어떨땐 예수로,어떨땐 그리스도로,
어떨땐 주 예수 그리스도로 쓰기도 하는데 괜히 그리 쓰지 않습니다
꼭 그럴만한 묵상의 내용때문에 그리 씁니다
시몬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속에 이 땅에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깊은 자각을 그대로 표현해 놓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받게 되었는데
그 선물의 분량속에는 놀랍게도 혹은 한없이 슬프게도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됨도
선물로 받아 종의 분신으로도 살게 되었는데 그게 은혜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고 한없이 나를 낮추지 않으면 아니되는
자리로 내려가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분량입니다
그러나 이것인 진리입니다
진리이기에 은혜로 받습니다
진리는 어떠한 위치나 어떠한 상황이나 어떠한 선악간의 시시비비속에서나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닌걸 은혜로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리와 은혜는 결코 따로 따로 일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 심령이 떨리고 두려운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 입니다
우리의 대표격인 시몬 베드로가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으면서
알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으로 오셨다는 것이고 따라서 자기는
종된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종)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그들이 받은 보배로운 믿음을 동일하게 받은 자라면 나의 비하는 어디까지일까?
겨우 제로 선상이거나 아니면 적자는 싫고 더 더욱 지하는 싫어서 더이상 내려가지 못하는 나는 아닐까?
그렇지도 못하다면 나는 그들이 받은 보배로운 믿음을 동일하게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허리에 진리의 띠를 메고 산다는 것은 한 순간이거나, 한 때가 아닙니다
내가 주께로 가는 그 날까지 지속적인 자기 죽음,자기 비하, 자기 낮춤, 자기 부인을
행동양식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시몬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을 동일하게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진리)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찌어다라고 인사합니다
은혜와 평강의 출처는 진리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그분들을 알 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알아갈 때 그 앎에 비례하여 은혜와 평강도 증가하는 것입니다
진리되신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하여 날마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에게
그분은 멸시치 않고 말씀속에 감추인 만나로 먹어주십니다
이 진리는 결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진리 없이는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
그리스도 예수의 종됨을 묵상하면서
당신의 선물이신 아들 예수님의 땅아랫 곳까지의 비하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함께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 4:7~9
첫댓글 큐티본문(10/18)-베드로후서1: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