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하고 쓰는 첫글이네요. 명대의 경제상황에 대해 궁금해 하다 제가 나름대로 알아본 바이니 신뢰도는 매우 떨어집니다;;; 어설픈 글이지만 처녀(?)작이니 봐주세요;
명중기 이후 국가의 기축통화는 은이었습니다. 초기엔 일본, 이후엔 스페인등지에서 중국의 도자기, 차, 비단등과 교역하며 대량의 은이 들어왔고 정부에선 '인플레나 나는 지폐따윈 버려버려!!' 라며 동전만 주조, 나머진 은의 중량에 따라 민간에서 알아서 거래하도록 방임했습니다;;;(원나라 교초의 실패나 송대 지폐의 실패를 보면 당대 상황에서 안정적인 지폐운용은 힘들듯. 홍무제때도 무려 태환지폐를 운용했지만 역시 망함.)
그러므로 무협지등의 배경이 되는 명의 기본 통화는 은과 동으로 만든 동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은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보통 1킬로그램의 은이 300냥정도 한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역산하면 대략 3.3그램 내외의 은덩이가 1냥. 당시 상인들은 이런 은을 말발굽 모양으로 주조했는데 그래도 통상 마제은이라 부릅니다. (정부에서 주조한게 아닙니다)
이 은 1냥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시기와 장소에 따라 차이는 상당히 나지만 대략 명대에는 쌀 1석이 0.5냥. 즉 은자 한냥이면 쌀 두 석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한석은 대두말로 10두. 무게로는 대략 80킬로그램 정도로 추정됩니다.
80킬로그램이면 성인 1인이 족히 3달 이상은 먹을 수 있는 양이죠(하루에 0.9킬로그램씩 먹어도).
그렇다면 하위 통화단위인 동전의 가치는? 은과 동의 가치비례에 따라 바뀌었지만 명대에는 보통 은 1냥에 동전 1000~2000문정도 했다고 합니다. 청대에는 은의 유입이 더 많아져서 은 1냥에 동전 1000문 이하라고 하니 명대에는 1000문~1200문정도 하지 않을까 싶군요.
이 동전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화폐였습니다. 16세기 말 북경의 날품팔이, 일용직 노무자가 버는 일당이 동전 20~30문 가량입니다.
비슷한 시기 지역별, 시기별 차이는 있겠지만 쌀 한말이 대략 동전 25문. 즉 일용직 노무자는 일당으로 쌀 한말을 살 수 있죠. 쌀 한말은 약 10리터인데, 쌀만 보면 상당히 많은 것 같지만 사람이 쌀만으로 살 수 없는게 당연지사. 즉 입에 풀칠하기 바쁜 일당입니다.
종합적으로 계산해 보면 일용직 노무자가 한달을 뼈빠지게 일하면 은자 한냥정도가 들어옵니다;;;;(쌀 10두=1석=은 0.5냥) 1년 12달 꼬박꼬박 일해도 은 12냥(...) 이정도가 아마 명대 하층민의 실수입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물론 부인이 부업을 하겠지만 자릿세 보호세 등으로 무뢰배들이 뜯어가는 양이나 정세(인두세)를 생각하면....ㅜㅜ
그렇다면 당대 소농들이나 지주들은 얼마를 생산하고 얼마나 남길까요?
송대의 자료긴 하지만 당시 분익제로 소작을 놓을때, 소작농 1가구에 보통 30~40무畝를 경작한다고 합니다. 송의 인구가 명보다 작긴 해도 경작지의 증가분을 생각하면 일단 그대로 둡시다.
그렇다면 명대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은 얼마일까? (1무는 690제곱미터 정도입니다. 즉 한변이 26미터인 정사각형 보다 약간 더 큰 땅이 1무인거죠 100무=1경입니다)
물론 이 역시 기후나 토질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강서성의 경우 1무당 2석가량이 평균적이었고, 호북은 약간 더 적은 정도. 광동 지방은 1무에 3석정도(남방이라 그런가 봅니다)...전국 평균은 대략 1무당 2석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40무의 땅을 소작으로 경영하는 소농민은 1년에 쌀 80석을 평균적으로 수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작농이니 병작반수법으로 지주에게 절반을 지대로 내면 남는것은 약 40석. 은자로 20냥 가량이 손에 들어옵니다.
1년에 40석의 쌀이면 4인가정으로 가정한다면 1인당 쌀 1석씩이 돌아가니, 와, 1년동안 쌀밥만 먹을수도 있겠네요?
하지만....그렇게 농민이 살기 좋으면 반란은 왜 일어나겠습니까;; 당연히 세금 내야지요. 소작농이니 지세는 내지 않아도 되겠지만 요역에는 나가야 합니다;; 명 초기에는 이갑제로 순번으로 요역에 나갔지만, 점차 상품경제가 발달한 명 중후기에는 이 역시 돈으로 때우는게 많죠.
(세금제도는 워낙 복잡하고 변화도 심해서 대충 넘어갑니다)
따라서 적어도 은 1~2냥. 혹은 2~3냥은 세금으로 내야 할 겁니다. 결국 이 세금은 쌀을 팔아서 얻을 수 밖에 없고, 세금과 운송비, 서리에게 뜯기는 걸 생각하면 몇섬은 팔아서 은으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거기다 사람이 쌀만 있음 살 수 있나요? 중국에는 개문칠사(開門七奢)라고 하여 일곱가지 생활필수품으로 땔감(薪),쌀(米),기름(油),소금(鹽),간장(醬),식초(酸)와 더불어 차(茶)를 꼽았습니다. 물이 더러우니 차로 끓여 마셔야 하고, 기름이 있어야 등잔에 불도 밝히고, 땔감이 있어야 난방을 하고, 소금 못먹으면 사람이 죽죠. 간장 없으면 안그래도 없는 반찬 뭘로 때우겠습니까.
거기다 사람이 옷도 사 입어야 하고, 신도 사신어야 하고, 농기구도 수리하거나 사야 하고, 동네 사람들끼리 부조도 해야 하고, 가끔 윗사람에게 뇌물도 줘야하고, 병나면 의사한테 가야하고.....등등
결국 대부분의 쌀은 돈으로 바꿔 물건을 구입하는데 썼을 겁니다. 물론 강남지방에는 1년 2모작이 일반화되어서 쌀을 추수한 뒤 보리나 콩을 심었으니 30~40무의 땅이면 근근히 먹고살 정도는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평년작이 계속될 경우고, 일부 풍년이 든 해에 위에 기름칠좀 한다 쳐도 흉작이 들면 잉여재산이 없는 상황에서 소농들은 망하기 딱 좋습니다. 그래서 명대에 유민의 발생이 많은 문제가 되었고요. 이런 소농경제의 영세성 때문에 이들 소농가는 상품작물-차나 뽕나무, 면화등을 부업으로 많이 재배했고 이것이 상품경제를 더욱 촉진시켰습니다.
결국 은 20냥 정도면 소농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하층서민의 1년치 생활비라고 환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당시의 지주는 얼마나 벌까요? 역시 송대의 자료긴 하지만 꽤 위세를 부리는 형세호의 경우 30~40경의 땅을 가졌다고 합니다. (1경 내외의 땅을 가지면 그냥 대농, 즉 중소 자영농정도 됩니다) 이정도면 동네에서 방구깨나 끼는, 지주집안으로 행세할 수 있었겠죠(1경=100무. 고로 한변이 260미터인 정사각형 토지 정도)
1경(=100무)의 땅에서 평균 200석의 쌀이 수확되는데, 물론 이걸 지주가 혼자 경작할 수 없으니 병작반수로 계약한다 해도 100석의 쌀이 들어옵니다. 은으로 치면 50냥. 그런데 여기서 운반비(보통은 부재지주가 많았습니다)나, 마름같이 소작농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때먹히는 양이 있을 것이고, 더군다나 소작농은 내지 않는 지세(보통 1/10선입니다), 지주라 해도 피할 수 없는 무서운 요역등을 져야 합니다. 이것저것 윗선에 때먹히고 아래것들에게 때먹히고 나면 1경당 대략 30냥 정도가 남지 않을까요?
10경을 가진 지주는 고로 약 300냥 정도. 이 정도면 중소 지주로 행세하는 정도일 것이고, 30경정도를 가진 중~대형 지주라면 1년에 900냥 정도를 버는 셈입니다. 물론 그 정도 되는 가문이면 노복들 밥값, 옷값에 자녀 교육비, 다른 유지들과의 교류비, 지현이나 지주, 지부대인같은 상전들과 그 아래의 서리, 아역들에게 이것저것 돈을 찔러 줘야 합니다.
부자니 위세를 부리자면 질 좋은 비단옷 정돈 입어야 할 것이고, 먹는 것도 비싸지겠지요.
즉 1년에 900냥 정도를 벌면 중간정도의 지주로 지역사회에서 상당히 위세를 떠는 입장이 되겠군요.
참고로 명나라의 1년 재정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은 1500만~2000만냥정도라고 합니다. 중국의 국가권력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물론 이정도 예산으로도 부족해서 여러가지 병패가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물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더 넣자면..
대운하의 운임-주요 거점도시간의 이동에 동전 2문. 짐꾼을 쓰는데 10문정도였습니다. 상당히 싼 임금이죠.
티모시 브룩의 '쾌락의 혼돈'이란 명대 경제사 책에서 인용하자면, 명대의 편지 교환에 대해서 나오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편지를 부치는 사람에게 수고료는 은 5/10~2/10냥이 적절하다. 라고 나옵니다. (편지 배달부는 보통 친구댁 하인으로 나오더군요) 참고로 북경에서 절강성까지 편지 배달하는데 29~36일 가량이 걸리더군요. 이 정도 수고를 하는데 무협지에서 쉽게 쉽게 쓰는 은자 한냥이 안들다니 ㅡ,.ㅡ
물론 신사층의 물품 거래에 이르면 좀 단위가 커집니다. 책의 한 일화에선 한 신사가 가진 골동품 술잔을 은자 백냥에 팔고는 '너무 비싸게 산 상인을 비웃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졸부 근성을 비웃는 내용이데, 어찌 되었건 은자 백냥이란 거금을 턱하니 낼 정도로 돈 많은 상인이란건 확실하군요.
대형 불상을 시주하는데 은 수백냥. 상당히 비싼 물건입니다. 왜냐하면 동으로 만든 불상은 그 자체로 돈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ㅡ,.ㅡ. 그래서 옛 불상중에 남은게 별로 없습니다.
명대 후기에 미소년을 사는 유행이 상류층 사이에서 퍼졌는데, 美童 한명이 보통 50냥 정도라고 합니다. 물론 미소년은 미소녀보다 훨씬 비쌉니다. (왜!!!! 남자 주제에ㅜㅜ)
여러 군데 책에서 짜 맞춘 내용이라 많이 엉성하고 부족하군요. 더 많은 자료 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서적은 명청시대 사회경제사, 티모시 브룩의 쾌락의 혼돈, 강좌중국사 등입니다.
첫댓글 와~ 연구 많이 하셨네요~~~
명나라의 1년 재정부분은 오타아닌가요? 1년재정이 1500~2000냥이면... -_-
오로쿠트님 글 쓴건 처음 보네요 ㅋ 그런데 좀 띄워서 써주셨으면 합니다
1500만냥입니다. 정정하겠습니다;; 명나라 재정이 좀 개판이었더라도 저정돈 아니었죠;; 젤레돈//감사합니다. 약간 수정했습니다.
명말기에는 재정수입이 거의 6천만냥에 육박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말기의 환관인 유근은 뇌물로 은 8050t 가량을 받았다고 하네요.
8050톤이니 냥으로 환산하면 24억냥... -_-
청 건륭연간의 화신이 받아 챙긴 뇌물이 은 8억냥 가량이었다고 하는데, 청대의 경제가 명대보다 현저히 확대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24억냥을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군요;; 재정부분은 정확하게 계산하긴 어렵지만 조운을 통해 중앙으로 보내지는 쌀이나 기타 근거를 살펴보면 6000만냥보단 2000만냥 즈음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보입니다만....
명말 이자성의 반란기때 수입이 6천만냥으로 나와있고
만력제 시기엔 턱도 못미치는군요. 어떻게 반란기에
6천만냥을 끌어모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기에
재정의 관리가 제대로 안된건 확실한 사실인듯
오로쿠트님, 일반소농말고 당시 일용노동자들의 수입도 알 수 있을까요? 청 옹정때 강남 지방에서 비단을 펴는 롤러를 굴리는 노동자가 보통 11~12문, 약 1/100냥 정도를 하루 수입으로 벌었는데 명나라도 이와 비슷한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명나라 일년 재정치고는 1500~2000만냥은 적은게 아닌지요? 청 옹정제 때 5000만냥, 건륭제때 약 8000만냥 정도가 일년 재정이었는데 인구면에서나 행정면에서나 명 말과 별로 차이가 없었던 때에 갑자기 2~4배정도로 재정이 팍 늘어난 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북경의 일용직 노동자의 임금이 동전 20~30문이라고 기록이 있더군요. 물론 이 역시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명과 청의 차이는 아무래도 세제의 차이도 약간 있겠지만 역시 은의 대량 유입에 따른 인플레가 아닌가 합니다. 16~18세기동안 일시적 감소는 있었지만 아메리카와 일본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었죠. 은 2000냥의 재정은 아마 가정, 만력 연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무래도 1세기 후인 청의 통치하에 경제적 팽창이 더 컸죠. 더군다나 가정연간까지는 멕시코 은이 다음세기만큼 본격적으로 유입되지 않아 은의 유통규모도 그만큼 더 작았으리라 추측합니다. 건륭제때 양렴은이란 명목으로 적게는 1500냥에서 많게는 만냥이 넘
게 지방관료에게 녹봉을 지급할 수 있었던 것도 대규모의 은이 유입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그리고 6000만냥보다 2000만냥에 가깝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만력연간의 이른바 '만력 3대정'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에 있습니다. 만력 3대정의 총 소요비용이 은 1300만냥 가량이었는데, 연 수입 6000만냥이었다면 그정도 지출로 재정'파탄'에 이르진 않았을 거라 사료됩니다. 그리고 청 입관후 일시적 인구, 토지감소가 있었지만 신속하게 회복되었고 건륭제 후반에는 이미 인구가 명의 2배인 3억가까이 증가했었습니다. 단위면적당 토지생산성도 평균 30%이상 상승했고 상업 역시 현저하게 증가했죠. 참고로 불산진 한곳의 철
생산량이 공업화 전의 영국 총 철생산량을 압도했었죠;;; 이런 상업의 진보는 역시 은의 유통으로 인한 경제의 활성화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명대에도 견직업등에 메뉴팩쳐가 형성되었지만 청대에는 이것이 견직, 면직, 철, 광산등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공장제 수공업이라 할 만한 것이 형성되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2세기 정도 차이지만 그만큼 대규모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는 방증이죠
아, 그런데 청대 일용직 노동자가 11~12문을 받은건 인구의 증가로 인해 실질임금이 낮아진 탓도 있겠지만(명대에는 더 높았을 겁니다) 은의 유통량 증가로 인해 상대적으로 구리의 값이 올랐습니다. 그것도 염두에 두시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할듯 합니다.
그러니까 왜구들과 밀무역하거나 에스파냐를 통한 무역으로 벌어들인 은으로는 후대의 청나라 같은 규모로 경제를 돌리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이군요. 청나라가 명의 2~4배정도로 재정을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은 1.강희~건륭제의 선정에 의한 농촌경제의 급격한 회복, 2. 개간 사업을 통한 농경지 및 인구증가 3. 천계령 폐지, 4. 서양, 특히 영국과의 교역 및 조선의 중계무역(중국-조선-일본)으로 인한 막대한 은의 유입으로 인한 인플레현상. 이정도로 볼 수있을까요??
예 그렇다고 볼 수 있죠. . 또 지정은제로, 순장일편(여러군데 땅을 가진 지주의 세금을 원적지에서 원큐에 받는것)등의 세제의 개혁, 이로 인해 이전까지 신사층의 남면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었죠. 명대에는 초기의 원적지발환주의로 인해 객호의 개간지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런 점이 정복왕조인 청에선 한큐에 해결되었겠죠. 하지만 간과해선 안될 것은 청의 산업발전은 어디까지나 명대의 연장선이라는 것이죠. 그 점에서 '명, 청 시대'라고 흔히들 병칭하는 것이고요
아 위에서 실수. 명대에 발견되는 메뉴팩처는 견직업 외에도 불산진에서 보이는 제철업, 철광등 더 많았고, 청대에 이르면 31가지 산업에서 자본주의 맹아가 보입니다;;' 그리고 청대에 상업에 더 자유롭게 접근했다는 증거중 하나로, 내무부에서 염상들에게 자금을 대출해 주어 그 이자가 100만냥이 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내무부 한곳 뿐 아니라 다른 몇몇 부서에서도 대출해 주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근대 중앙은행체제는 아니어도 일정한 금융업의 발전을 예상해 볼 수 있죠.(민간부문에선 산서상인을 중심으로 송금업도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명말때와 옹정-건륭때와는 호적수의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하죠... 실제 인구가 얼마나 늘었을런지는 모르지만
호적에 등록된 인구의 증가는 폭발적이었으니까요.
재정수입면에서도 명말의 개판5분전 수준의
재정관리상태를 감안한다면 2~4배차이는 충분할거라 생각
뭐야.. 이분들 무서워....
뭐야.. 이분들 무서워....2
뭐야... 이분들 무서워....3
교수님들인가...?
4444444444
책 몇권 부분부분 조립한 내용에 불과한데 고수님들이 왜 이러십니까 ㅡ,.ㅡ;;;;;;
그리고 위의 미소년이 미소녀보다 비싼건 명나라 말기에 남색풍조가 유행해서 ㅡ,.ㅡ;;;; 마테오 리치도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외국인+신부라는 특이 캐릭터라;;;
서양에서만 동성애가 심한줄 알았는데, 명나라까지......
임용관// 오히려 서양에서는 동성애를 "신을 거역하는 악마적 죄악"으로 간주했고, 이를 들어 중국의 지식인들을 엄청 까댑니다. 지식인의 대부분을 점하는 향신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창'을 너도 나도 들이는 상황이었거든요...ㅡㅡ; 때문어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포교하여 중국인들을 신도로 개종시키면서 받았던 서약 중의 하나가~ "첩실을 들이지 말고, 남색을 금할 것"이었습니다. 어떤 유학자는 개종하면서 첩실을 본가로 돌려보내기까지 했다고 하네요...^^;
의외로 중국은 동성애에 대해서 관대합니다. 제가 <<유림외사>>나 <<요재지이>>, <<금병매>>를 보고 놀란 것이 동성애에 대한 매우 관대한 태도였습니다.<<유림외사>>에서는 아예 '남녀사랑<<<<<< 동성애'를 주장하더군요. 또한 그 당시에 쓰여진 반 백화문 소설들을 보아도 한 훌륭한 선비와 미소년 배우들과의 사랑이 그려진 것(당시의 BL물) 들이 많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도 미동에 관한 이야기나 단수지애 같은 고사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동성애는 이성애와는 다른, 또 하나의 영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유명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묘사되던 묘한 관계들이 사실 그렇고 그런 얘기라는건 저도 얼마전에 알았습니다(....)
뭐 금병매나 홍루몽 슬쩍슬쩍 보면 현대인이봐도
깜짝깜짝 놀래긴하죠.
서양에서도 그리스인들은 동성애를 찬양하거나, 심지어 '더'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이라 찬양했죠 ㅡ,.ㅡ;(물론 레즈는 엄금이었습니다;;) 로마도 딱히 동성애에 후대와 같은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하진 않은 것 같았고. 역시 기독교 윤리의 영향이 강한거 같습니다. 그런데 동성애 한다고 까일 이유가 있나?
중국이 그 정도였다니 정말 놀라운 이야기네요...
그런데 중국 전 시대를 거쳐 동성애가 항상 유행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유독 명 말기에 심해졌다고는 들었습니다만...정확하진 않군요. 더구나 여기서 동성애가 같은 계급간의 동성애라기 보단 권력의 표현이란 측면에서 대부분 권력자나 부자가 어린 소년을 탐하는 형식이라 ㅡ,.ㅡ;;
서양이건 동양이건 시대와 상황을 구별해야지 모든 상황과 시대는 아니죠 ㅡ.,ㅡ
이젠 물가는 기억도 안난다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