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메일
  • |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THIS IS TOTAL WAR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동양사 명대 물가는 어느 정도였을까?
오로쿠트 추천 0 조회 1,162 10.01.30 16:29 댓글 33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10.01.30 16:40

    첫댓글 와~ 연구 많이 하셨네요~~~

  • 10.01.30 16:45

    명나라의 1년 재정부분은 오타아닌가요? 1년재정이 1500~2000냥이면... -_-

  • 10.01.30 16:46

    오로쿠트님 글 쓴건 처음 보네요 ㅋ 그런데 좀 띄워서 써주셨으면 합니다

  • 작성자 10.01.30 17:15

    1500만냥입니다. 정정하겠습니다;; 명나라 재정이 좀 개판이었더라도 저정돈 아니었죠;; 젤레돈//감사합니다. 약간 수정했습니다.

  • 10.01.30 17:24

    명말기에는 재정수입이 거의 6천만냥에 육박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말기의 환관인 유근은 뇌물로 은 8050t 가량을 받았다고 하네요.
    8050톤이니 냥으로 환산하면 24억냥... -_-

  • 작성자 10.01.30 18:18

    청 건륭연간의 화신이 받아 챙긴 뇌물이 은 8억냥 가량이었다고 하는데, 청대의 경제가 명대보다 현저히 확대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24억냥을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군요;; 재정부분은 정확하게 계산하긴 어렵지만 조운을 통해 중앙으로 보내지는 쌀이나 기타 근거를 살펴보면 6000만냥보단 2000만냥 즈음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보입니다만....

  • 10.01.31 18:42

    명말 이자성의 반란기때 수입이 6천만냥으로 나와있고
    만력제 시기엔 턱도 못미치는군요. 어떻게 반란기에
    6천만냥을 끌어모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기에
    재정의 관리가 제대로 안된건 확실한 사실인듯

  • 10.01.30 21:15

    오로쿠트님, 일반소농말고 당시 일용노동자들의 수입도 알 수 있을까요? 청 옹정때 강남 지방에서 비단을 펴는 롤러를 굴리는 노동자가 보통 11~12문, 약 1/100냥 정도를 하루 수입으로 벌었는데 명나라도 이와 비슷한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명나라 일년 재정치고는 1500~2000만냥은 적은게 아닌지요? 청 옹정제 때 5000만냥, 건륭제때 약 8000만냥 정도가 일년 재정이었는데 인구면에서나 행정면에서나 명 말과 별로 차이가 없었던 때에 갑자기 2~4배정도로 재정이 팍 늘어난 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10.01.30 21:41

    북경의 일용직 노동자의 임금이 동전 20~30문이라고 기록이 있더군요. 물론 이 역시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명과 청의 차이는 아무래도 세제의 차이도 약간 있겠지만 역시 은의 대량 유입에 따른 인플레가 아닌가 합니다. 16~18세기동안 일시적 감소는 있었지만 아메리카와 일본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었죠. 은 2000냥의 재정은 아마 가정, 만력 연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무래도 1세기 후인 청의 통치하에 경제적 팽창이 더 컸죠. 더군다나 가정연간까지는 멕시코 은이 다음세기만큼 본격적으로 유입되지 않아 은의 유통규모도 그만큼 더 작았으리라 추측합니다. 건륭제때 양렴은이란 명목으로 적게는 1500냥에서 많게는 만냥이 넘

  • 작성자 10.01.31 17:22

    게 지방관료에게 녹봉을 지급할 수 있었던 것도 대규모의 은이 유입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그리고 6000만냥보다 2000만냥에 가깝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만력연간의 이른바 '만력 3대정'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에 있습니다. 만력 3대정의 총 소요비용이 은 1300만냥 가량이었는데, 연 수입 6000만냥이었다면 그정도 지출로 재정'파탄'에 이르진 않았을 거라 사료됩니다. 그리고 청 입관후 일시적 인구, 토지감소가 있었지만 신속하게 회복되었고 건륭제 후반에는 이미 인구가 명의 2배인 3억가까이 증가했었습니다. 단위면적당 토지생산성도 평균 30%이상 상승했고 상업 역시 현저하게 증가했죠. 참고로 불산진 한곳의 철

  • 작성자 10.01.30 21:47

    생산량이 공업화 전의 영국 총 철생산량을 압도했었죠;;; 이런 상업의 진보는 역시 은의 유통으로 인한 경제의 활성화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명대에도 견직업등에 메뉴팩쳐가 형성되었지만 청대에는 이것이 견직, 면직, 철, 광산등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공장제 수공업이라 할 만한 것이 형성되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2세기 정도 차이지만 그만큼 대규모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는 방증이죠

  • 작성자 10.01.30 21:49

    아, 그런데 청대 일용직 노동자가 11~12문을 받은건 인구의 증가로 인해 실질임금이 낮아진 탓도 있겠지만(명대에는 더 높았을 겁니다) 은의 유통량 증가로 인해 상대적으로 구리의 값이 올랐습니다. 그것도 염두에 두시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할듯 합니다.

  • 10.01.30 21:56

    그러니까 왜구들과 밀무역하거나 에스파냐를 통한 무역으로 벌어들인 은으로는 후대의 청나라 같은 규모로 경제를 돌리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이군요. 청나라가 명의 2~4배정도로 재정을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은 1.강희~건륭제의 선정에 의한 농촌경제의 급격한 회복, 2. 개간 사업을 통한 농경지 및 인구증가 3. 천계령 폐지, 4. 서양, 특히 영국과의 교역 및 조선의 중계무역(중국-조선-일본)으로 인한 막대한 은의 유입으로 인한 인플레현상. 이정도로 볼 수있을까요??

  • 작성자 10.01.31 09:31

    예 그렇다고 볼 수 있죠. . 또 지정은제로, 순장일편(여러군데 땅을 가진 지주의 세금을 원적지에서 원큐에 받는것)등의 세제의 개혁, 이로 인해 이전까지 신사층의 남면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었죠. 명대에는 초기의 원적지발환주의로 인해 객호의 개간지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런 점이 정복왕조인 청에선 한큐에 해결되었겠죠. 하지만 간과해선 안될 것은 청의 산업발전은 어디까지나 명대의 연장선이라는 것이죠. 그 점에서 '명, 청 시대'라고 흔히들 병칭하는 것이고요

  • 작성자 10.01.31 09:35

    아 위에서 실수. 명대에 발견되는 메뉴팩처는 견직업 외에도 불산진에서 보이는 제철업, 철광등 더 많았고, 청대에 이르면 31가지 산업에서 자본주의 맹아가 보입니다;;' 그리고 청대에 상업에 더 자유롭게 접근했다는 증거중 하나로, 내무부에서 염상들에게 자금을 대출해 주어 그 이자가 100만냥이 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내무부 한곳 뿐 아니라 다른 몇몇 부서에서도 대출해 주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근대 중앙은행체제는 아니어도 일정한 금융업의 발전을 예상해 볼 수 있죠.(민간부문에선 산서상인을 중심으로 송금업도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 10.01.31 18:50

    명말때와 옹정-건륭때와는 호적수의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하죠... 실제 인구가 얼마나 늘었을런지는 모르지만
    호적에 등록된 인구의 증가는 폭발적이었으니까요.
    재정수입면에서도 명말의 개판5분전 수준의
    재정관리상태를 감안한다면 2~4배차이는 충분할거라 생각

  • 10.01.31 00:03

    뭐야.. 이분들 무서워....

  • 10.01.31 00:48

    뭐야.. 이분들 무서워....2

  • 10.01.31 12:04

    뭐야... 이분들 무서워....3

  • 10.01.31 12:12

    교수님들인가...?

  • 10.01.31 13:36

    4444444444

  • 작성자 10.01.31 17:17

    책 몇권 부분부분 조립한 내용에 불과한데 고수님들이 왜 이러십니까 ㅡ,.ㅡ;;;;;;

  • 작성자 10.01.31 17:34

    그리고 위의 미소년이 미소녀보다 비싼건 명나라 말기에 남색풍조가 유행해서 ㅡ,.ㅡ;;;; 마테오 리치도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외국인+신부라는 특이 캐릭터라;;;

  • 10.01.31 18:18

    서양에서만 동성애가 심한줄 알았는데, 명나라까지......

  • 10.01.31 20:04

    임용관// 오히려 서양에서는 동성애를 "신을 거역하는 악마적 죄악"으로 간주했고, 이를 들어 중국의 지식인들을 엄청 까댑니다. 지식인의 대부분을 점하는 향신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창'을 너도 나도 들이는 상황이었거든요...ㅡㅡ; 때문어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포교하여 중국인들을 신도로 개종시키면서 받았던 서약 중의 하나가~ "첩실을 들이지 말고, 남색을 금할 것"이었습니다. 어떤 유학자는 개종하면서 첩실을 본가로 돌려보내기까지 했다고 하네요...^^;

  • 10.01.31 20:36

    의외로 중국은 동성애에 대해서 관대합니다. 제가 <<유림외사>>나 <<요재지이>>, <<금병매>>를 보고 놀란 것이 동성애에 대한 매우 관대한 태도였습니다.<<유림외사>>에서는 아예 '남녀사랑<<<<<< 동성애'를 주장하더군요. 또한 그 당시에 쓰여진 반 백화문 소설들을 보아도 한 훌륭한 선비와 미소년 배우들과의 사랑이 그려진 것(당시의 BL물) 들이 많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도 미동에 관한 이야기나 단수지애 같은 고사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동성애는 이성애와는 다른, 또 하나의 영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 10.01.31 23:13

    그 유명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묘사되던 묘한 관계들이 사실 그렇고 그런 얘기라는건 저도 얼마전에 알았습니다(....)

  • 10.02.01 00:13

    뭐 금병매나 홍루몽 슬쩍슬쩍 보면 현대인이봐도
    깜짝깜짝 놀래긴하죠.

  • 작성자 10.02.01 11:51

    서양에서도 그리스인들은 동성애를 찬양하거나, 심지어 '더'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이라 찬양했죠 ㅡ,.ㅡ;(물론 레즈는 엄금이었습니다;;) 로마도 딱히 동성애에 후대와 같은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하진 않은 것 같았고. 역시 기독교 윤리의 영향이 강한거 같습니다. 그런데 동성애 한다고 까일 이유가 있나?

  • 10.02.01 11:58

    중국이 그 정도였다니 정말 놀라운 이야기네요...

  • 작성자 10.02.01 18:30

    그런데 중국 전 시대를 거쳐 동성애가 항상 유행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유독 명 말기에 심해졌다고는 들었습니다만...정확하진 않군요. 더구나 여기서 동성애가 같은 계급간의 동성애라기 보단 권력의 표현이란 측면에서 대부분 권력자나 부자가 어린 소년을 탐하는 형식이라 ㅡ,.ㅡ;;

  • 10.02.01 20:03

    서양이건 동양이건 시대와 상황을 구별해야지 모든 상황과 시대는 아니죠 ㅡ.,ㅡ

  • 10.02.02 19:32

    이젠 물가는 기억도 안난다 OTL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