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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편무당(毋偏毋黨)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패거리를 짓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이념이나 어떤 편이나 어떤 무리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 입장을 지킨다는 의미의 말이다.
毋 : 말 무(毋/0)
偏 : 치우칠 편(亻/9)
毋 : 말 무(毋/0)
黨 : 무리 당(黑/8)
(유의어)
불편부당(不偏不黨)
출전 : 사기(史記) 卷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第8
이 성어는 중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무너뜨리고 주(周)나라를 세우고서, 은(殷)나라의 왕족이며 충신이었던 기자(箕子)를 찾아가 백성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경영(통치)하는 방법을 물으니, 기자가 대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 송의 건국
微子開者, 殷帝乙之首子而帝紂之庶兄也. 紂既立, 不明, 淫亂於政, 微子數諫, 紂不聴.
미자(微子) 개(開)는 은(殷)나라 제을(帝乙)의 큰 아들이자, 주왕(紂王)의 배다른 형이다. 주왕이 즉위하였으나, 현명하지 못한데다 정치도 음란했다. 미자가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다.
及祖伊以周西伯昌之修徳, 滅仇国, 懼禍至, 以告紂. 紂曰: 我生不有命在天乎? 是何能為?
주(周)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덕을 닦고 구(仇)라는 나라를 멸망시키자 조이(祖伊)는 그 화가 미칠까 겁이 나서 이를 주왕에게 일러바쳤다. 주왕은 "내가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천명 아닌가? 그가 무얼 어쩌겠는가?" 라고 했다.
於是微子度紂終不可諫, 欲死之, 及去, 未能自決, 乃問於太師少師曰: 殷不有治政, 不治四方. 我祖遂陳於上, 紂沈湎於酒, 婦人是用, 亂敗湯徳於下.
미자는 주왕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죽이려 하다가, 떠나려고 마음을 먹은 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태사(太師)와 소사(少師)에게 가서 말했다. "은나라는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해 사방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우리 선조들께서는 세상에 공업을 이루었지만 주왕은 술에 빠져 부인 말만 듣다가 탕(湯)의 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렸습니다.
殷既小大好草窃姦宄, 卿士師師非度, 皆有罪辜, 乃無維獲, 小民乃並興, 相為敵讎. 今殷其典喪! 若渉水無津涯. 殷遂喪, 越至于今.
은나라는 높거나 낮거나 할 것 없이 도적질을 하고 법을 어기며 난을 일으키기 좋아했습니다. 왕실의 경사들은 서로를 본받으며 법도를 지키기 않으니 모두가 죄를 짓고도 누구 하나 응분의 대가인 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 모두 서로를 적이나 원수처럼 여깁니다. 지금 은나라는 나라의 법과 제도를 상실하여 마치 나루터도 없이 물을 건너려는 것 같습니다. 은나라가 마침내 망할 것 같으니 지금이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曰: 太師, 少師, 我其発出往? 吾家保于喪? 今女無故告予, 顛躋, 如之何其?
그리고는 묻기를, "태사, 소사! 내가 도망쳐야겠소? 아니면 조상제사를 지며야겠소? 남아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겠소? 지금 그대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아 잘못된다면 어찌할 셈이오?" 라고 했다.
太師若曰: 王子, 天篤下菑亡殷国, 乃毋畏畏, 不用老長. 今殷民乃陋淫神祇之祀. 今誠得治国, 国治身死不恨. 為死, 終不得治, 不如去. 遂亡.
태사는 이렇게 말했다. "왕자시여! 하늘이 엄중한 재앙을 내려 은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는데도 (주왕은)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늙은이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지금 은나라는 인민들조차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실로 나라를 다스려 잘 다스려진다면 몸이 죽어도 여한이 없겠으나, 죽어도 끝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떠나는 것만 못합니다." (미자는) 마침내 도망쳤다.
箕子者, 紂親戚也. 紂始為象箸, 箕子歎曰: 彼為象箸, 必為玉桮; 為桮, 則必思遠方珍怪之物而御之矣. 輿馬宮室之漸自此始, 不可振也.
기자(箕子)는 주왕의 친척이다.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쓰기 시작하자 기자는 "그가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사용했으니 틀림없이 옥으로 만든 잔을 사용할 것이고, 옥으로 만든 잔을 사용한다면 틀림없이 먼 곳의 진기하고 괴이한 물건들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수레와 말 그리고 궁실의 사치가 이리 시작되어 되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고 탄식했다.
紂為淫泆, 箕子諫, 不聴. 人或曰: 可以去矣.
주왕이 제멋대로 굴자, 기자가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누군가가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箕子曰: 為人臣諫不聴而去, 是彰君之悪而自説於民, 吾不忍為也. 乃被髪詳狂而為奴.
기자는 "신하된 자가 간언했는데도 듣지 않는다고 떠나면 이는 군주의 잘못은 드러내고 자신은 인민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니 나로서는 차마 그렇게 못하겠소"라 하고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 하며 노예가 되었다.
遂隠而鼓琴以自悲, 故傳之曰箕子操.
드디어 숨어서 스스로 슬퍼하면서 거문고를 연주하니, '기자조(箕子操)'로 전해지고 있다.
王子比干者, 亦紂之親戚也. 見箕子諫不聴而為奴, 則曰: 君有過而不以死争, 則百姓何辜! 乃直言諫紂.
왕자 비간(比干) 역시 주왕의 친척이다. 기자가 간언해도 듣지 않고, 기자가 노예가 되는 것을 보고는 "군주에게 허물이 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따지지 않는다면 무고한 백성들만 피해를 입지 않겠는가?"라 하고는 주왕에게 바른말로 충고했다.
紂怒曰: 吾聞聖人之心有七竅, 信有諸乎? 乃遂殺王子比干, 刳視其心.
주왕이 노하여 "내가 듣기에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던데 정말 그런가?"라며 왕자 비간을 죽여 그 가슴을 열고 심장을 보았다.
微子曰: 父子有骨肉, 而臣主以義属. 故父有過, 子三諫不聴, 則随而号之. 人臣三諫不聴, 則其義可以去矣.
미자가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골육의 정이 있고, 군주와 신하는 의리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아비에게 잘못이 있으면 자식은 세 번을 간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자식은 계속 통곡할 따름이다. 신하된 자가 세 번을 충고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 의리상 떠나도 된다"고 했다.
於是太師少師乃勧微子去, 遂行.
이에 태사와 소사가 미자에게 떠날 것을 권하니 마침내 떠났다.
周武王伐紂克殷, 微子乃持其祭器造於軍門, 肉袒面縛, 左牽羊, 右把茅, 膝行而前以告. 於是武王乃釈微子, 复其位如故.
주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여 은나라를 물리치자 미자는 바로 제기를 들고 군문(軍門)으로 가서는 웃통을 벗고 등 뒤로 손을 묶는 다음 (사람을 시켜) 왼편으로는 양을 끌고 오른편으로는 소꼬리로 장식한 깃발을 쥐게 했다. 그리고는 무릎으로 기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이에 무왕은 미자를 석방하고 전과 같이 자리를 회복시켰다.
武王封紂子武庚祿父以続殷祀, 使管叔蔡叔傅相之.
무왕은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에게 은나라 왕조의 제사를 잇게 하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시켜 그를 가르치도록 했다.
◼ 기자와 '홍범구등'
武王既克殷, 訪問箕子.
무왕이 은을 물리친 다음 기자를 방문했다.
武王曰: 於乎! 維天陰定下民, 相和其居,我不知其常倫所序.
무왕이 "오호! 하늘은 조용히 천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서로 화목하게 살게 하는데 내 그 이치의 순서도 몰랐다니"
箕子対曰:在昔鯀陻鴻水, 汨陳其五行, 帝乃震怒, 不従鴻範九等, 常倫所斁. 鯀則殛死, 禹乃嗣興. 天乃錫禹鴻範九等, 常倫所序.
기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 곤(鯀)이 홍수를 막으면서 '홍범구등(鴻範九等)'을 따르지 않고 오행의 질서를 어지럽히자 상제께서 크게 노하여 곤이 죽임을 당하고 우가 그 일을 이어받으니 하늘이 우에게 홍범구등을 내려 주어 일상의 이치가 순서를 찾게 된 것입니다.
初一曰五行, 二曰五事,
三曰八政, 四曰五紀,
五曰皇極, 六曰三徳,
七曰稽疑, 八曰庶徴,
九曰嚮用五福, 畏用六極.
(홍범구등의) 그 처음을 오행(五行)이라 하고, 두 번째를 오사(五事)라 하며, 세 번째를 팔정(八政), 네 번째를 오기(五紀), 다섯 번째를 황극(皇極)이고, 여섯 번째를 삼덕(三德), 일곱 번째를 계의(稽疑), 여덟 번째를 서징(庶徵), 아홉 번째를 향용오복(嚮用五福)과 외용육극(畏用六極)이라 합니다.
五行: 一曰水, 二曰火, 三曰木, 四曰金, 五曰土. 水曰潤下, 火曰炎上, 木曰曲直, 金曰従革, 土曰稼穡. 潤下作鹹, 炎上作苦, 曲直作酸, 従革作辛, 稼穡作甘.
오행(五行)은 물, 불, 나무, 쇠, 흙입니다. 물은 아래로 젖어들며, 불은 위로 타오릅니다. 나무는 굽거나 곧으며, 쇠는 모양을 바꿉니다. 흙은 뿌리고 거둘 수 있습니다. 아래로 젖어들면 짠 맛을 내고, 위로 타오르면 쓴맛을 냅니다. 굽거나 곧으면 신맛을 내고, 모양을 바꾸면 매운맛을 내며, 뿌리고 거두면 단맛을 냅니다.
五事: 一曰貌, 二曰言, 三曰視, 四曰聴, 五曰思. 貌曰恭, 言曰従, 視曰明, 聴曰聡,思曰睿. 恭作粛, 従作治, 明作智, 聡作謀,睿作聖. 八政:一曰食, 二曰貨, 三曰祀, 四曰司空, 五曰司徒, 六曰司冦, 七曰賓, 八曰師.
오사(五事)란 몸가짐, 말, 보기, 듣기, 생각을 말합니다. 몸가짐은 공손해야 하고, 말은 (이치에) 맞아야 합니다. 보는 것은 밝아야 하고, 듣는 것은 총명해야 하고, 생각은 (사리를) 통달해야 합니다. 공손하면 엄숙해지고, 이치에 맞으면 다스릴 수 있고, 밝으면 지혜로워지고, 총명하면 일을 꾀할 수 있고, 통달하면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팔정이란 식(食), 화(貨), 사(祀),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 빈(賓), 사(師)를 말합니다.
五紀: 一曰歳, 二曰月, 三曰日, 四曰星辰, 五曰暦數.
다섯 개의 벼리는 세(歲), 월(月), 일(日), 성신(星辰), 역수(曆數)요.
皇極: 皇建其有極, 斂時五福, 用傅錫其庶民, 維時其庶民于女極,錫女保極. 凡厥庶民, 毋有淫朋, 人毋有比徳, 維皇作極.
황극은 제왕이 추구해야 할 지극한 법칙으로, 오복을 추려 서민들에게 가르치고 베풀게 될 때 서민들도 그 극진함을 따라 제왕에게 극진하게 대하게 된다. 무릇 모든 백성들이 극진하면 사악한 패거리를 짓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 덕을 비교하지 않게 되므로 제왕의 극진함과 통하게 됩니다.
凡厥庶民, 有猷有為有守, 女則念之. 不協于極, 不離于咎, 皇則受之. 而安而色, 曰予所好徳, 女則錫之福. 時人斯其維皇之極. 毋侮鰥寡而畏高明.
무릇 백성들 중 꾀도 있고, 실행력도 있고, 지조도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제왕의 극진함을 따르지도 않고 허물이 있더라도 제왕은 거둘 줄 알아야 합니다. 안색이 평안해야 왕이 덕이 있다 보이고 왕이 복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제왕의 극진함과 통하여 홀아비나 과부를 모욕하지 않으며 높은 지위나 현명한 자를 두려워 않습니다.
人之有能有為, 使羞其行, 而国其昌. 凡厥正人, 既富方谷. 女不能使有好于而家, 時人斯其辜. 于其毋好, 女雖錫之福, 其作女用咎.
능력있고 실천력있는 사람들에게 그 처신을 살피게 하면 그 무리가 번창하고, 바른 사람들이 재능을 펼치게 하면 나라는 번창 할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들이 개인의 부를 천하에 베풀어야 합니다. 왕이 장점이 있는 이들을 부리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허물을 지을 것이며 선한 이들에게 선히 대해 주어도 그를 빌미로 허물을 지을 것 입니다.
毋偏毋頗, 遵王之義.
毋有作好, 遵王之道.
毋有作悪, 遵王之路.
毋偏毋党, 王道蕩蕩.
毋党毋偏, 王道平平.
毋反毋側, 王道正直.
편향되어 분열시키지 말고 왕의 올바름을 지키고, 좋고 나쁨을 가려 미움을 쌓지 않는 왕의 길을 걷고, 편갈라 파당을 짓지 않아야 왕도가 풍성해집니다. 당파가 없는 것이야 말로 왕도가 고르다는 걸 의미하며 반대나 편향됨이 없는 것이 왕의 정직함입니다.
会其有極, 帰其有極. 曰王極之傅言, 是夷是訓, 于帝其順.
극진함에 합해야 극진함으로 돌아가는 법이니 말하자면 왕의 말에 극진함이 있는 것이니 이를 큰 가르침이라 하며 선대 임금들이 따르던 것입니다.
凡厥庶民, 極之傅言, 是順是行, 以近天子之光. 曰天子作民父母, 以為天下王.
백성들이 가르침에 극진하면 순조로이 실행되며 천자의 덕에 가까워 지는 겁니다. 이를 다른 말로 천자가 백성들의 부모가 된다는 말이요, 이를 천하왕이라 하는 겁니다.
三徳: 一曰正直, 二曰剛克, 三曰柔克. 平康正直, 彊不友剛克, 内友柔克, 沈漸剛克, 高明柔克.
삼덕(三德)이란 정직, 굳세게 이겨냄, 부드럽게 이겨냄으로 정직함은 고르고 건강한 고집이 아니어야 하며, 강한 것과 굳건한 것과는 다른 것이며, 안으로 유연하게 상대를 이기며 점점 굳건해지는 것이며 왕보다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꺾으려 들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維辟作福, 維辟作威, 維辟玉食. 臣無有作福作威玉食. 臣有作福作威玉食, 其害于而家, 凶于而国, 人用側頗辟, 民用僭忒.
왕의 역할은 선을 베푸는(복) 것이며 왕만이 권위를 세울 수 있으며, 제왕 만이 진귀한 음식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신하에게는 복을 지을 권리도 권위를 내세울 권리도 진귀한 음식을 맛 볼 자격이 없습니다. 신하가 그리 된다면 집안 나아가 나라에 해악이요 흉조이니 사람들이 파당과 이간을 제왕의 권리로 생각하면 백성들도 복을 내릴 권한과 죄를 다스릴 위엄과 좋은 음식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면, 그 피해는 집안에 미치고 나라에 해를 가져다 줄 것이며 사람들도 그리 서로 헐뜯고 싸울 것입니다. (신하들이 사치해선 안됩니다)
稽疑: 択建立卜筮人. 乃命卜筮, 曰雨, 曰済, 曰涕, 曰霧, 曰克, 曰貞, 曰悔, 凡七.
계의(稽疑)란 점복에 능한 사람을 뽑아 점복을 하도록 명하는 것인데 비, 갬, 구름, 안개, 상극, 내괘, 외괘의 일곱 가지를 봅니다.
卜五, 占之用二, 衍貣. 立時人為卜筮, 三人占則従二人之言. 女則有大疑, 謀及女心, 謀及卿士, 謀及庶人, 謀及卜筮.
복(거북점)은 다섯 가지, 점(산가지점)은 두 가지로 점괘를 살핍니다. 점복을 행하는데는 세 사람이 점을 쳤을 경우 결과가 같은 두 사람의 말을 따르고 왕께서 의심이 든다면 먼저 자신을 깊이 생각하시고 그 다음에 대신들의 마음을 살피고 민의를 살피고 맨 나중 점사나 무당의 의견을 듣습니다.
女則従, 亀従, 筮従, 卿士従, 庶民従, 是之謂大同, 而身其康彊, 而子孫其逢吉.
왕의 마음도 합하고 점복도, 대신들도, 백성들의 마음에도 합하면 이를 대동(大同)이라 부릅니다. 그러면 몸도 건강해지고 자손들도 크게 길할 것입니다.
女則従, 亀従, 筮従, 卿士逆, 庶民逆, 吉. 卿士従, 亀従, 筮従, 女則逆, 庶民逆, 吉. 庶民従, 亀従, 筮従, 女則逆, 卿士逆, 吉.
왕과 점복이 같고 대신과 백성들의 반대가 있어도 길상으로 보고, 대신들과 점복의 결과가 같다면 왕이나 백성들이 반대해도 길상으로 보고, 백성의 뜻과 점복이 같다면 왕과 대신들이 반대해도 길합니다.
女則従, 亀従, 筮逆, 卿士逆, 庶民逆, 作内吉, 作外凶. 亀筮共違于人, 用静吉, 用作凶.
왕께서 하려는 일에 거북점은 좋다고 나왔는데 산가지 점과 대신들, 관리들, 백성들이 반대하면 내부 일은 길하지만 외부 일은 흉합니다. 점복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어긋난다면 가만히 있으면 길하지만 뭔가 하려고 하면 흉합니다.
庶徴: 曰雨, 曰陽, 曰奥, 曰寒, 曰風, 曰時. 五者來備, 各以其序, 庶草繁廡. 一極備, 凶. 一極亡, 凶.
서징(庶徴)이란 비, 태양, 따스함 추움, 바람 그리고 시기로서 이 다섯 가지가 잘 맞아 떨어지면 만물이 무성하고 그중 하나라도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길흉이 갈립니다.
曰休徴: 曰粛, 時雨若, 曰治, 時暘若; 曰知, 時奥若; 曰謀, 時寒若; 曰聖, 時風若.
좋은 징조란 이렇습니다. 비올 때처럼 정숙하고, 다스림이란 태양이 비치듯 해야 하며, 지식이나 베풂은 따스해야 하며, 뭔가 도모할 때에는 냉정해야 하고, 거룩함이란 바람처럼 모두를 보듬는 것입니다.
曰咎徴: 曰狂, 常雨若; 曰僭, 常暘若; 曰舒, 常奥若; 曰急, 常寒若; 曰霧, 常風若.
나쁜 징조란 이런 것들입니다. 비가 멈추지 않듯 하면 미친 것이요, 너무 해처럼 비추기만 하면 참람한 것이요, 따스하기만 하면 느슨해지고 늘 냉랭하면 성급한 것이요, 바람이 그치지 않으면 아리송해지는 법입니다.
王眚維歳, 卿士維月, 師尹維日.
제왕이 잘못 판단하면 1년이, 대신들이 잘못 판단하면 한 달이, 하급 관리들 잘못 판단하면 하루가 갑니다.
歳月日時毋易, 百谷用成, 治用明, 畯民用章, 家用平康. 日月歳時既易, 百谷用不成, 治用昏不明, 畯民用微, 家用不寧.
한 해, 한 달, 하루에 거스름이 없으면 백곡이 풍성해지고 정치가 현명하게 되고 가정이 평안하고, 그렇듯 판단이 자주 바뀌면 백곡이 익지 않고 정치력도 미미해지고 가정도 편치 못합니다.
庶民維星, 星有好風, 星有好雨. 日月之行, 有冬有夏. 月之従星, 則以風雨.
어떤 별은 바람을, 어떤 별은 비를 좋아하듯 백성들은 뭇별들 같습니다. 해와 달의 운행에 따라 겨울이 있고 여름이 있습니다. (계절이 변합니다) 달(재상)이 별(백성)을 좇으면 시절없이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립니다.
五福: 一曰寿, 二曰富, 三曰康寧, 四曰攸好徳, 五曰考終命.
오복(五福)이란 목숨, 부귀, 건강,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함, 제명대로 편히 죽는 것을 말합니다.
六極: 一曰凶短折,二曰疾, 三曰憂, 四曰貧, 五曰悪, 六曰弱.
육극(六極)은 요절, 질병, 근심, 가난, 추함, 허약함을 말합니다.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朝鮮) 제후에 봉하되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
其後箕子朝周, 過故殷虚, 感宮室毀壊, 生禾黍, 箕子傷之, 欲哭則不可.
그 뒤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를 드리러 은나라의 폐허 은허(殷墟)를 지나다가 궁실이 무너진 자리에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는 것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기자는 상심하여 통곡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欲泣為其近婦人, 乃作麦秀之詩以歌詠之.
울고도 싶으나 아녀자 같을까봐 '맥수(麥秀)의 시'를 지어 노래를 부르니,
其詩曰:
麦秀漸漸兮, 禾黍油油.
彼狡僮兮, 不與我好兮!
그 시는 이랬다. '보리 이삭은 패고, 벼와 기장은 무성하구나! 저 악동아, 나와 가까이 지내긴 글렀구나!'
所謂狡童者, 紂也.
殷民聞之, 皆為流涕.
이른바 악동이란 주왕을 말한다. 은나라의 유민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史記/卷38 宋微子世家)
⏹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붕당(朋黨)
탕평(蕩平)의 교지(敎旨)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동생인 금(昑)이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영조(英祖)이다. 영조가 즉위한 초기에는 소론파(少論派)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왕은 붕당의 폐해를 깊이 느껴 붕당의 대립을 중지하고 융화시키려는 뜻이 있었다.
원년 정월에 빛나는 탕평(蕩平)의 교시를 내려, 마땅히 붕당의 습성을 버리고 공평함에 힘쓰며 불편부당하게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와 왕실을 보전해야 한다고 유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인무옥(壬寅誣獄)의 진상이 폭로되어 왕은 그 수괴 소론인 김일경(金一鏡) 및 목호룡(睦虎龍)을 주살하고 소론 무리들을 귀양 보내고 노론 사람들을 채용하였다.
그렇지만 원래 왕은 당파의 조정과 융화를 주요한 것으로 삼았으므로, 한 당파에 오랫동안 정권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즉위 3년에 다시 소론의 우두머리인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등을 등용하고 노론의 무리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김일경의 잔당인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켰다가 평정 되었으며, 이후 그 당파들이 여전히 여러 차례 준동을 부렸으므로, 왕은 점차 소론의 불평한 무리들을 주살하여 제거하고 많은 노론 인사들을 채용하였다.
31년에 소론 윤지(尹志), 김일경의 당파인 윤취상(尹就商)의 아들 이하징(李夏徵) 등이 반역을 꾀하자 그들을 모두 주살하였으며, 아울러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켰다고 주장되는 소론의 우두머리 및 소론 이광조, 조태억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국은 대체로 노론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조의 치세 중에도 붕당의 해악은 그칠 때가 없었으며, 그의 탕평의 교지에도 "붕당의 폐해가 근래에 더욱 심해지고 있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또한 일찍이 영조는 국가의 처지를 송나라 말기에 비유하면서 세손(世孫; 정조)을 훈계하였다. 무릇 송나라는 붕당 때문에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정조가 뒤를 이어 즉위하자, 전 왕의 뜻을 계승하여 당파를 조정하는 데 힘을 다하였으며,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도 대부분 그들의 재능에 의거하였고, 결코 당파가 무엇인가에는 관계하지 않았다.
스스로 침실의 명칭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탕탕평평(蕩蕩平平)이란 상서대전(尙書大傳) 홍범(洪範) 가운데에 말한 무편무당 무당무편 왕도평평(毋偏毋黨 毋黨毋偏 王道平平)에서 나왔으며,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뜻이다. 혹은 탕평(蕩平)이라고도 한다.
붕당의 다툼은 이전과 같이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그 재앙은 이미 오랫동안 국가의 고질(痼疾)이 되어 쉽게 뿌리 뽑을 수 없었다.
이들 당파는 최근 이 태왕(李太王) 때에 이르러 크게 타격을 받아, 정치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지금도 여전히 사색(四色;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을 말한다)이라고 부르면서 그 구별은 엄연히 존재한다.
⏹ 탕평정치(蕩平政治)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 때 나타난 정치형태로 당파의 구분없이 모든 사람을 고루 등용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한 정치를 말한다.
탕평(蕩平)이란 용어는 '서경' 홍범조(洪範條)의 '왕도탕탕(王道蕩蕩) 왕도평평(王道平平)'에서 따온 합성어로서 임금의 지켜야 할 법도요 정치의 기본 준칙이었다.
즉 임금은 항상 치우침이 없이 공평무사 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여서 감싸서도 안 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서 물리쳐서도 안 되니 그것이 임금의 도리라는 것이다.
정치의 바탕은 임금이 도(道)와 의(義)를 솔선 수범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 이어야 하며, 그 왕도정치의 요체는 '무편무당(毋偏毋黨) 무당무편(毋黨毋偏)'에 있으니 그렇게 되면 탕탕평평(蕩蕩平平) 해진다는 것이다.
탕평에 의한 정치는 숙종부터 경종 때까지 나타난 일당 전제의 추세속에서 왕권이 악화되자 새로운 정치형태와 이념을 모색한 영조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처음으로 탕평정치의 필요성을 제기한 사람은 숙종 때 박세채(朴世采)이다. 탕평의 근본 정신은 왕권의 절대성을 회복하고 집권관료체제를 재정비 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는데 있었다.
경종 때 신임옥사의 와중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는 교서를 내려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의 필요를 역설하였다.
영조는 1730년 노론의 강경파 영수인 민진원(閔鎭遠)과 소론의 거두 이광좌(李光佐)를 불러 양당의 화목을 권하였고, 노론과 소론의 인물을 고르게 관료로 등용하였다.
나아가 자신의 탕평책에 호응하지 않는 관료는 파면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론과 관련된 유생들의 상소를 금지시키는 등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742년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워 자신의 의지를 내외에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당파의 대립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사도세자 죽음 이후에 시파(時派)와 벽파(辟派)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도 탕평정치를 계승하여 노론과 소론 뿐만 아니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채제공과 같은 남인을 영의정에 임명하는가 하면 학문이 뛰어난 서얼 출신들도 적극적으로 관료로 등용하였다.
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 제도를 활용하여 서얼과 청류의 진출을 활성화 하였는데 이때 등용된 인물이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와 같은 신진 학자들이었다.
영조와 정조 때 펼쳐진 탕평정치는 근본 목적은 같았지만 방법론에서는 약간 달랐다. 영조가 비교적 온건계열을 중심으로 한 완론 탕평인데 반하여 정조는 특권 정치세력을 배제하고 급진계열을 중심으로 한 준론 탕평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탕평정치는 정조가 죽은 후 19세기 세도정치로 변질되어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