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김문홍 영화 속을 걷다(65)
인생이 버거워도 삶은 계속된다
플로리앙 젤러의 <더 썬>
가족의 해체가 주는 비극
가족은 사회 구조의 최소 단위이다. 유사 가족도 있기는 하지만 가족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가족도 일종의 사회관계이기 때문에 대립과 갈등이 존재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갈등의 심화로 인한 트라우마가 시간이라는 장치로 인해 쉽게 잊고 치유될 수 있지만,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생기는 트라우마는 그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 상흔이 오래 남는다.
가족의 상흔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부모의 결별에서 오는 후유증이 가장 크다. 자식이 없는 경우에는 새로운 상대로 아픔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자식이 있을 경우는 양육권 문제로 많은 고역을 치를 수밖에 없다.
플로리앙 젤러 감독의 ‘가족 3부작’ 중의 두 번째 작품인 <더 썬 The son>(2023, 122분)이 바로 그런 갈등과 상처로 인한 비극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아버지 피터(휴 잭맨 분)가 어머니 케이트(로라 던 분)를 버리고 새로운 여자 베스(바네사 커비 분)와 살게 되면서 생기는 후유증 때문에 아들 니콜라스(젠 멕그라스 분)가 자살하게 되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극작가이며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영화감독인 플로리앙 젤러의 기족 3부작 중의 두 번째 영화로 잔잔한 일상적 풍경을 통해 비극이 심화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 피터가 어머니와 헤어져 새로운 여자와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게 되는 고등학생인 니콜라스가 겪게 되는 인생의 버거움이 주된 서사구조이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그것을 하나의 위안으로 삼는다. 니콜라스는 너무 고통스러울 때 자신의 몸에 상처 내면, 그것이 하나의 위안이 되어 괜찮아진다는 자기만의 논리를 정당화시키면서 고통의 강도를 더해 간다.
니콜라스의 자기 학대는 어머니를 두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반항이며, 가족의 붕괴와 탄생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가족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며, 어느 한쪽의 행복이 어느 한쪽의 불행을 야기시키는 개인주의적인 이기적 욕망에 대한 냉소적 저항이기도 하다. 니콜라스는 어머니를 떠나 아버지와 잠시 생활하게 되면서도 가족의 해체에 따른 절망감을 극복하려 안간힘을 써 보지만, 원천적인 가족의 복원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니콜라스가 택할 수 유일한 길은 새로운 가족의 해체이다. 그것마저 어렵게 되자 그가 택할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은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영원히 분리시키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
너무 버거운 인생이라는 무게
SAT 시험이 코앞인데도 니콜라스는 한 달간 학교를 나가지 않고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등 삶 자체를 버거워한다. 전처 케이트의 부탁으로 피터는 아들 니콜라스와 함께 살아보지만 행복한 순간 역시 한때뿐이다. 니콜라스는 여전히 학교를 빼 먹으며 공원을 배회하고, 침대 매트리스 밑에 칼을 숨겨두고 아버지 피터를 괴롭힌다. 그는 새엄마 베스에게 느닷없이 처음 사귈 때 아빠가 유부남인 것을 알았느냐, 유부남인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만났느냐, 아빠가 떠난 뒤에 엄마가 무척 힘들어했다고 토로한다. 때로는 왜 이렇게 엇나가느냐며 아버지가 추궁하자 정색을 하며, 인생이 대단한 것처럼 떠들지만 아빠는 우릴 버렸다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니콜라스가 엇나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피터의 훈육 태도에 문제가 있다. 그는 아들을 위하는 척하지만, 거기에는 자신의 기준에 따른 요구만 있을 뿐 인간의 온기가 가득한 사랑이 부재하고 있다. 피터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변호사이고 아버지 노릇을 잘한다고 자처하지만 니콜라스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는 자신만의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그와 어머니를 버린 나쁜 사람에 불과하다.
피터와 그의 아버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장면에서 아버지(안소니 홉킨스 분)가 아들인 피터에게 빈정거리는 장면은 아버지 되기에 대한 역설적 은유이다. 아버지는 네가 지금 좋은 아빠 노릇한다며 내게 자랑하러 왔느냐, 스스로 모범 아빠라고 자랑하는 꼴이라니, 이제 오십 줄에 들어서 옛일을 들먹이고 그러는데 제발 좀 극복하라며 힐책한다. 여기서 ‘옛일’이란 가정과 어머니에게 무관심한 피터 아버지의 과거를 의미한다. 아버지의 피터에 대한 이런 빈정거림과 힐책은, 그가 니콜라스에게 온기 가득한 사랑보다는 아버지로서의 모범적 훈육만 일삼는, 피터에 대한 반어적 역설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즉, 니콜라스에 대한 압박과 재촉의 훈육이 잘못된 방식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치라는 의미에 가깝다. 아들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니콜라스의 내면적 항변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피터가 아내와 헤어지기 이전에 코르시카로 가족여행 갔을 때의 장면들이 플레시백 기법으로 자주 삽입되고 있다. 어린 니콜라스에게 피터가 용기를 복돋우며 수영을 가르치고, 니콜라스가 드디어 수영을 배운 환희의 장면이 그것이다. 아들을 힐책하기보다는 사랑의 훈육으로 가능성의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이 니콜라스의 상실감에 대한 진정한 치유라는 것을 반어적으로 은유하기 위한 장면이다. 피터가 갓 태어난 아기에게 쏟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진정한 해답이라고 제시한다.
니콜라스가 파티에 참석해 춤을 출 수 있게 도와주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피터의 엉덩이춤에 합류해 베스와 니콜라스가 춤을 추는 장면에서, 니콜라스가 문득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이처럼 가족이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 곧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득 그 즐거움에서 빠져나와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니 지금 자신이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니콜라스의 황량한 내면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니콜라스는 어머니 케이트를 찾아가 심경을 토로한다. 왜 행복한 표정이 아니냐고 묻는 케이트의 말에, 니콜라스는 자신이 좀 아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생이란 것이 자신한테는 버겁고,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지긋지긋하다고 울먹인다. 결국 니콜라스는 욕조 안에서 동맥을 끊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베스에게 발견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병원 측에서는 강력하게 입원 치료를 권유한다. 한 번 자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두 번째 역시 자살 시도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처음에는 의사의 권유를 따르지만, 결국은 부정에 못이겨 니콜라스를 퇴원시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지금은 니콜라스 옆에 있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불행의 그림자는 이미 니콜라스의 영혼을 잠식하고 난 뒤였다. 결국 퇴원을 통해 니콜라스는 피터의 엽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겠다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사랑을 줄 수 있을 때 마음껏 주어라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태풍 전의 고요처럼 은밀하게 진행된다. 피터와 케이트, 그리고 니콜라스가 평화를 즐긴다. 니콜라스가 준비해 온 커피를 마시면서 케이트의 집에 모인 부부는 자신들이 젊은 시절 연애할 때의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기도 한다. 피터는 케이트에게 자신 때문에 힘들었다며 용서해 달라,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는 말을 남긴다. 그때 갑자기 욕실에서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총소리가 들리며 한순간의 평화와 행복이 산산조각 나버리고 만다. 니콜라스의 자살은 해체된 가족과 닫혀진 가족의 친밀성에 대한 절망적 상황을 은유한다.
반전적 결말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니콜라스가 토론토 여행을 끝내고 피터와 베스의 집을 방문한다. 니콜라스는 두 달 뒤에 출간된다는 자신의 소설 『죽음을 뒤로 미루고』를 피터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지금 사귀고 있는 연인 라나와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는 말까지 덤으로 주면서 아버지를 행복하게 한다. 이 장면은 실제가 아니고 니콜라스의 환상이었음이 곧 밝혀진다. 곁에 있던 니콜라스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베스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장면으로 관객은 그것이 피터만의 한순간 환상이었음을 허망하게 깨닫는다.
“뭐하고 있어? 니콜라스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걘 영특하고 감수성이 있었어.”
“당신도 할 만큼 했어.”
“아니야 사랑을 더 쏟았어야 했어.”
피터가 무너져 내리며 오열을 쏟아낸다. 베스가 그를 부축하며 “아무리 어렵더라도 삶은 계속되어야 해.”라고 말하자, 피터는 “아냐. 계속돼선 안 돼.”라고 응수한다. 베스는 연신 피터의 슬픔과 절망을 추스르며 그에게는 자신과 아들 테오가 있다는 것을 연신 환기시킨다. 베스의 이 말은 또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그들 부부의 또 다른 아들인 테오에게 만큼은 사랑을 쏟아 제대로 된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성 발언에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는 아귀가 맞는 하나의 상징적 은유이다. 오프닝 시퀀스는 베스가 그들의 아기 테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면이고, 엔딩 시퀀스는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은유로 아귀가 묘하게 들어맞는다. 관객은 극장 밖을 나서면서 저마다 진정한 아버지가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곰곰 곱씹어 볼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줄 수 있을 때 마음껏 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주제의식이고 메시지일 것이다.
플로리앙 젤러의 <떠 썬>은 묵직하고 실천이 어려운 과제를 우리에게 던지지 않는다. 그대들에게 만약 자식이 있다면 사회적 성공이나 희망적 미래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줄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을 주라고 가르친다. 처음부터 사랑을 주지 못하면 그 이후에는 주고 싶어도 사랑을 줄 수 없다. 아이들에게 이성적으로 다가가지 말고 친구처럼 함께 얘기하며 부딪치고 쓰다듬으며 사랑을 주라고, 한 가정의 비극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을 주는 것이 아버지 되기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얘기하고 있다. (계간 『문장』 2023년 가을호)
첫댓글 이 영화를 <영화의 전당>에서 보았어요.
제가 느낀 감정선이 그대로 살아있는 영화평 잘 보았습니다.
부모되기도 쉽지 않아요.
자기의 본이 아버지인데 주인공 피터 또한 그 아버지 행태를
못 벗어난 듯.
많은 깨우침을 주는 영화였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