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9장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성경은 요셉이 종으로
팔려왔음에도 형통했다고 말씀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는데 형통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보고
형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형통’은 히브리어로 ‘찰라흐’(tsalach)인데,
이 말의 원뜻은 이렇다.
‘모든 막힌 것들을 뚫고 나가는 것(go through),
강을 건너는 것(cross over), 산을 넘어가는 것
(go over), 앞으로 나아가는 것(go forward),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 돌진하는 것(rush),
돌파하는 것(break out), 공격하는 것(attack),
잘 마치는 것 (to finish well)
강으로 가로막혀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로막혀 있는 강을
건너가는 것이 형통이라는 것이다.
요셉은 모든 난관을 돌파해 나갔다.
이런 요셉을
성경에서는 형통했다고 말씀한다.
형통은 막힘이 없고, 장애물이 없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계속 파란 신호등이 들어오며, 금수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고난이나 고통 또는
어려운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역경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장애물이 있어도
그것을 잘 뚫고
헤쳐 나가고 있다면 형통한 것이다.
광야를 지나고 있어도
잘 버티고 있다면 형통한 것이다.
누가 봐도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 아니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 있는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 형통함 가운데 있었다.
다 잘되는 가운데 있었다.
구덩이(pit)에서 시작해서
왕궁(palace)으로 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잘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잘되고 있는 중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롬 8:28) 이루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형통이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다.
루스 우스터만(Ruth Oosterman)
이라는 화가가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하면 혼내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
마음대로 낙서를 하게 한다.
그러고는 아이가 낙서해 놓은 것에 색을 입힌다.
그러면 아름답고 멋있는
한 폭의 그림이 탄생하게 된다.
화가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요셉의 그림을 망쳐 놓았다.
요셉의 형제들, 미디안 상인들,
보디발과 그의 아내 등, 이들로 인해
요셉의 인생 그림이 엉망이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가 우리 인생의
그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하나님은 그 사람 때문에 망쳐진
우리 인생의 그림을 멋있는 그림이 되도록
바꿀 수 있는 분이시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한나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다.
요셉의 인생과 그의 꿈이
형제들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그의 꿈을 산산조각 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삶의 조각들을 다 모아서
그의 삶을 아름답고 영롱하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되게 하셨다.
거기에 하나님이 은혜의 빛을 비쳐 주시니
요셉의 생애가 아름답게 빛나게 된 것이다.
세상적인 형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형통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셉은 13년간 깊은
광야에 들어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 광야와 고난을 통해서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광야에 들어가 있다면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광야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목적이 있다면
오히려 광야에 들어간 것이 축복이다.
우리가 광야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그곳을 지나는 동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형통한 사람이다.
꼭 가나안에 들어가고, 풍요한 삶을 살고,
인생의 정상의 자리에 올라가고
성공해야 형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셉은 계속
막다른 것처럼 보이는 길로만 갔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
보디발의 집으로 가는 길, 감옥으로 가는 길….
요셉이 갔던 길은
8차선 고속도로가 아니라 골목길이었다.
그러나 그의 길은 막히지 않았다.
통했다. 어디로 통하는 길이었는가?
바로의 궁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다.
이런 것을 바로 형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가?
성공, 형통, 부귀, 건강, 풍요, 명예인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도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헐벗음과 위험과
죽음의 위협이 가해질 수 있다고 말씀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항상 성공하고, 형통하고,
잘되고, 건강하고,
풍요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고난을 견뎌 내고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결단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형통의 복음을 외치는 이들은
믿음으로 축복받고, 믿음으로 형통하고,
믿음으로 성공하고, 믿음으로 인생의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를 이야기하며
그들의 믿음의 삶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히 11:13).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고
이 땅에서 잘 살도록 복을 주셨는가?
형통케 하셨는가? 풍요한 삶을 살게 하셨는가?
아니다.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다(히 11:10, 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고
축복해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는 것이다.
자녀들을 믿음으로 키웠더니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삼 남매가 모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대학에 갔다는 식의 간증들이 많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는 그런 간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형통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을 견디며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샬 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