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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주야의 홍수
창 7:1-12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7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9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10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창 7:1-12 / [배 안으로 들어가거라]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셨다. `너는 네 식솔들을 거느리고 배 안으로 들어가거라. 이 세상에서 오직 너만이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내가 분명히 알게 되었다. 2) 또한 깨끗한 짐승은 암컷과 수컷을 각각 일곱 쌍씩 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거라. 그러나 깨끗지 못한 짐승, 다시 말해서 제물로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이 먹을 수도 없는 부정한 짐승은 암컷과 수컷 각각 한 쌍씩만 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거라. 3)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도 암컷과 수컷 각각 일곱 쌍씩 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거라. 그래서 온갖 짐승과 새까지라도 그 씨가 땅위에서 마르지 않고 다시 불어 날 수 있도록 하여라. 4) 이제 이레 뒤부터는 내가 이 땅 위에 비를 내릴 것이다. 40일 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비를 내려 내가 지어낸 모든 것들, 곧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지간에 땅 위에서 쓸어버리리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없애 버리리라.' 5) 노아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시행하였다. 6) [대홍수가 나다] 땅 위에 홍수가 난 때는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였다. 7) 노아는 홍수가 시작되기 전에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함께 배 안으로 들어갔다. 8) 또한 제물로 드리기에 적합하고 사람이 먹기에도 괜찮은 깨끗한 짐승과 그렇지 못한 부정한 짐승과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와 땅위에 기어다니는 길짐승을 9) 각각 암컷과 수컷 한 쌍씩 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따랐다. 10) 이레가 지나자 엄청난 홍수가 나 온 땅 위에 물이 뒤덮였다. 11) 노아가 600세 되던 해 두 번째 달 열이렛 날 하늘에서는 수문이 열리고 땅 밑에서는 깊은 샘물이 터졌다. 12) 40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죄악이 가득하게 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기에 앞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구별된 짐승들을 안전한 방주 속으로 대피시키는 장면입니다. 그러자 대홍수 심판이 시작됩니다. 대홍수의 심판은 노아의 가족과 구별된 짐승들이 방주로 들어간 이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치밀한 계획을 보이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1-5)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1). 하나님은 심판의 때가 임하자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으로 초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청에 위임을 받은 노아가 사람들에게 초대를 권했지만 사람들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초청에 순종한 노아와 그의 가족만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그 초청에 응해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아의 홍수처럼 곧 임할 심판에서 멸망하지 않고 노아처럼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다(6-12)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짐승들이 스스로 방주로 들어갑니다(7-9). 이에 9절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라”라고 명시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노아가 짐승들을 암수 둘씩 잡아와 방주에 넣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노아가 각종 짐승들을 잡으러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고 해봅시다.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니 바다도 순종하고, 동물도 순종해서 스스로 방주 안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도 우주의 운행자요 만물의 창조주가 되어 주시는 그 분께서 우리의 삶도 지키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고 나아갑시다.
적용: 당신은 당신 삶의 주인을 하나님임을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사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입니다. 생각은 하나의 씨앗과도 같으며, 결과는 하나의 열매와도 같습니다. 어떤 생각을 심느냐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올지 달라집니다. 노아의 의로움을 보시고 가족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은 노아의 윤리적 선한 삶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되게 살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의 방주에 참여한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창 7장 6~24절 / 지용수목사
우리가 노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 눈으로 그 방주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하늘의 새들과 땅에 기는 것들이 모두 다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노아가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방주로 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하늘에 나는 새들을 잡아서 들였겠습니까? 또 어떻게 사자를, 코끼리를, 뱀을 잡아서 들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니 쉽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하려면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하시면 아주 쉽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산불로 온 나라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하니 비가 내려 문제가 삽시간에 해결되었습니다. 서울에 황사가 심하여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니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짐승들과 새들이 방주로 몰려오듯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여러분 가게로 손님들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우리 양곡교회가 수십만 명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아들딸에게 은혜를 주시면 그들이 세계를 이끌어 가는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그 방주에 들어간 사람과 짐승, 새나 땅에 기는 것들은 다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새들이 방주로 날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새들만 암수 둘씩 들어왔습니다. 모든 돼지들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돼지만 들어왔습니다. 고양이도 그렇고 토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대상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1장 3, 4절에 말씀하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열심히 전도해도 결국 택함 받은 사람만 오늘의 방주인 교회에 와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웬 은혜입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믿고, 가 보지도 못한 천국을 확신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고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똑같습니다. 제가 작년에 일본의 100개 교회 연합 성회를 섬길 때 보니 일본 사람들도 똑같았습니다. 한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 성령을 받고 천국을 믿고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게 됩니다. 할렐루야!
우리를 택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쁘게 믿음 생활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는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시골 처녀지만 아하수에로가 왕후로 삼으니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존귀하게 되었으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해야 됩니다.
시편 49편 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 순종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방주를 짓고 하나님께서 들어가라시면 들어갔습니다.
그런 노아가 넉넉한 복을 받습니다. 그가 얼마나 건강했는지, 홍수 때 600세였는데 홍수 이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습니다. 창세기 9장 28, 29절에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것은 큰 복입니다. 건강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모릅니다. 꿈을 이루고 모든 것을 가져도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건강을 잃어 병원에 입원하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가족 중 한 사람만 아파도, 한 사람만 병원에 입원해도 그 가정에 그늘이 집니다. 노아 가족은 모두 다 건강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건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면 애굽의 질병이 우리에게 하나도 오지 않는다고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훈련시키시기 위해 병을 주시는 경우는 10% 정도라고 합니다. 대개의 병은 죄 값으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하려면 ‘1무(無) 2소(少) 3다(多)’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먼저 없어야 할 한 가지는 담배랍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피우지 않는 사람보다 폐암 발생 확률이 11배나 높다고 합니다. 담배를 피우면 폐암뿐 아니라 다른 질병에 걸릴 확률도 그만큼 높다고 합니다. 그러니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건강의 1조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적게 해야 하는 두 가지 중 하나는 음식이고 또 하나는 술이랍니다. 음식은 자기 양의 70, 80%를 먹어야 소화도 잘 되고 우리 몸에 가장 좋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데, 자기 양의 100%, 120%를 먹는 것은 죽으려고 먹는 것과 같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와인 같은 것은 적게 먹으면 약이 되지만 많이 마시면 독이 되는 것이니 절대로 많이 마셔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많이 해야 할 세 가지는 많이 움직이고 사람을 많이 만나고 많이 웃는 것이랍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일을 많이 해야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이 웃어야 하는데, 특히 10분 웃는 것이 두 시간 운동하는 것만큼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이것을 거의 다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니 도둑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도 결국엔 다 끊게 됩니다. 술도 마시지 않습니다. 또 얼마나 많이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새벽에, 낮에, 밤에 교회에 오면서, 교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운동합니다. 또 교회에서 청소도 합니다.
여러분, “나는 교회 청소 못해.”라고 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대통령이든 록펠러 같은 재벌이든 예수님을 믿으면 교회 청소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궁궐에서 빗자루를 들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 아버지 전에서는 빗자루를 들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흙덩어리 주제에, 먼지로 만들어진 주제에”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종입니다.
물론 대통령이 청소하시면 우리는 말려야 하겠지만 대통령이라도 청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늘 “나는 주의 종입니다. 주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링컨도 하나님 앞에 늘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좌우간 교인들은 많이 움직입니다. 또 많이 웃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1무 2소 3다’가 교회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생활을 잘 하면 건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고 교회생활을 잘 하면 모두가 건강의 복을 누리게 되는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 모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만일 그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홍수로 인해 죽었다면 노아와 나머지 가족들이 얼마나 가슴 아팠겠습니까?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you and your household.)』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예수님을 믿으면 네 집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이 말씀은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내 집도 택함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내 가족 중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가족이 있다면 그도 곧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가족 중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은 예비 신자다.”
유치원을 프리스쿨(preschool)이라고 합니다. 유치원을 졸업하면 학교에 들어가듯이 가족 중 교회에 나오지 않는 식구가 있어도 그는 벌써 교회의 영향을 받고 있는 예비 신자이니 결국은 믿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착실하고 귀한 한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17년 전, 권사님이 관절염으로 온 몸이 아파 고생하다가 양곡교회에 가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을 듣고 새신자로 등록을 했습니다. 1년간 교회에 다녀도 병은 낫지 않고 믿음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년이 된 어느 주일, ‘여호수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설교를 들을 때 믿음이 확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 병은 의사도 못 고칩니다. 매일 진통제를 한줌씩 먹고 겨우 버티며 사니 너무 힘이 듭니다. 하나님, 저를 고쳐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데 발판에서 훈훈한 바람이 올라왔습니다. 차 바닥을 보니 거기에 성경이 있고 그 성경에서 훈훈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권사님이 ‘아! 성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은혜의 바람, 좋은 바람이니 이 바람으로 내 병을 고치자.’라고 깨닫고 ‘하나님! 이 성령의 바람으로 제 병을 고쳐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가슴이 뜨거워져서 “하나님!” 하고 크게 소리쳐 부르짖고 싶었지만, 그러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편이 미쳤다고 할까 봐 조그만 소리로 “주여! 주여!” 했습니다. 그런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너무 뜨거워지니 자신도 모르게 소리쳐 부르짖었습니다. 그 순간 성령의 불이 권사님을 감싸서 권사님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온 몸이 아프지 않고 날아갈 듯이 가벼웠습니다. 병이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권사님이 너무 기뻐서 새벽 두시 반인데도 남편을 깨웠습니다.
“여보! 여보! 하나님께서 저를 고쳐 주셨어요. 꿈에 내가 성령의 불로 깨끗하게 되었는데 께어보니 정말 이렇게 날아갈 듯이 몸이 가벼워요.”
그 남편이 희한한 분입니다. 아내를 꼭 교회까지 태워주고 또 예배 마치는 시간에 맞추어 태워가면서도 교회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치료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기도를 드렸소?” 하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권사님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니 아들과 딸을 깨워 “축복받은 여인에게 차 한 잔 얻어 마시자.”라고 하시더랍니다. 새벽 3시에 식구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좋아했다고 합니다. 7년 정도 관절염으로 고통당하던 우리 권사님이 깨끗하게 나아 거의 10년 이상 매주 그 약값만큼 감사 헌금을 하셨습니다. 권사님의 병이 나은 후 아들딸은 교회에 나오는데 남편은 아내가 그렇게 기적적으로 나은 것을 보고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수 년 전부터 나오시는데 지금은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으십니다.
집안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결국 다른 식구들도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가족은 예비 신자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면 반드시 다 믿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그 집은 복 받은 집인 것입니다.
노아의 가문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에 보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의호식하며 살던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죽어서 지옥에 갑니다. 자기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데 자기 집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희희낙락하니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겨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다가 내 혀를 좀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안 된다. 여기에서 거기로 갈 수도 없고 거기에서 여기로 올 수도 없다.”
“아브라함이여! 그러면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어 내 형제 다섯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여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땅에는 전도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자는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간다 해도 믿지 않는다.”
지옥에 간 부자도 자기 형제가 그 곳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가슴 아파하는데 하물며 우리 가족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우리가 부지런히 전도하고 애써서 온 집안이 몽땅 구원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니 그의 생활이 넉넉했습니다.
방주 안에는 사만 오천 마리나 되는 짐승의 먹이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니 노아는 얼마나 잘 먹었겠습니까? 알만 해도 달걀, 오리 알, 거위 알, 메추리 알…… 등 종류대로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새들이 종류대로 낳은 알을 노아가 다 맛보지 않았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으면 부요하게 됩니다. 넉넉하게 되는 것입니다.
K도시의 한 집사님은 처남과 함께 작은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회사가 작으니 수입이 적었지만 그래도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내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자 처남이 말했습니다.
“형님, 나도 예수를 믿지만 참 어리석고 답답하네요. 넉넉할 때 말이지, 이렇게 어려운데 무슨 십일조 떼고 감사 떼고 그래요? 우리는 넉넉할 때까지 십일조 안 해요. 하나님이 우리 사정 알 거예요.”
그래도 집사님은 부요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손대면 안 된다고 하면서 계속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회사는 점점 더 어려워져서 5년간 더 내리막길을 걸어 결국은 두 사람이 갈라섰습니다. 갈라서자마자 집사님의 사업이 기적적으로 잘 되어 큰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처남은 망해서 집사님이 처남 가족을 다 돌보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낙하산을 메고 떨어지면 죽지 않습니다. 만약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보조 낙하산이 또 펴져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낙하산보다 더 확실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하나님 말씀은 안 되는 것 같아도 생각할 필요도, 판단할 필요도, 분별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순종해야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의 말이라도 분별해야 됩니다.
기차를 처음 만들려 할 때 많은 과학자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독일의 과학자들은 만일 기차가 24km로 달리면 기차를 탄 모든 사람들의 코피가 터지고, 터널에 들어가면 모두가 질식해서 죽게 된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만일 그 쇳덩어리인 기차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겁에 질려서 정신병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기차를 만들어 잘 타고 있습니다. 과학자의 말이라고 다 맞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실한 사람의 말이라도 사람의 말은 생각해서 들어야 됩니다.
여호사밧은 아합의 말을 생각 없이 따라가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 집이 기울어집니다. 사람의 말을 듣고 망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당시 노아처럼 존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 노아 시대 사람은 다 쓰러져 멸망하는 짐승같았지만 노아는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물건 값은 사람이 매겨도 사람의 값은 자신이 만들어갑니다. 노아는 농사꾼이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니 당대에 최고로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노아도 우리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사니 존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 도적질하면 도적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 내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면 더러운, 음란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우리가 방탕하면 방탕한 사람, 썩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 나가면 말씀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고, 말씀이 존귀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잘 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을 망하게 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대단히 조심스러운 말씀을 드리니 이해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학자들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가 모든 면에 좋은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밑에서만 자란 아이는 시험 성적과 학업 성취 속도가 떨어지고 가난하게 될 확률이 5배나 더 높다고 합니다. 특별히 여자 아이들은 성적(性的)으로 방탕하여 미혼모가 될 확률이 70%나 더 높다고 합니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아이는 약점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없어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교인은 이 약점을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없어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승리했습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그 말씀을 듣는 자는 이기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전에 신문에서 스크랩해 두었던 기사인데 다시 읽어도 또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 아이가 생일을 맞이했지만 집이 너무 가난해 생일 파티는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받은 것이라고는 돈 백 원뿐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형과 함께 시장에 가서 빵 한 개를 사 와 둘이서 생일 파티를 했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노래보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이 험한 세상에 왜 태어났니?”라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백 원짜리 빵 하나를 놓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 다음, 형은 자기가 형이니 더 많이 먹어야 된다고 하고, 동생은 자기 생일이니 자기가 많이 먹어야 된다고 서로 싸웠습니다. 그것을 보고 스트레스를 받은 어머니가 빗자루로 두 아이를 막 때렸습니다. 그러니 동생이 ‘이게 생일이야? 생일에 형제끼리 백 원짜리 빵 하나 때문에 싸우고, 생일 선물이 빗자루로 맞는 것이고, 이런 세상에 살아서 무엇 하나?’하고 목매어 죽었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너무나 어렵게 사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한 달 내내 길에서 종이를 주워 팔면 36,000원을 받는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풀어야 됩니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생일파티를 하다 죽은 그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 아이가 예수님만 믿었으면, 교회에 다녔으면, 하나님 아버지를 불렀으면 절대로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울 시장 이명박 장로님도 어릴 때 많이 굶었다고 합니다. 술지게미를 먹고 학교에 간 날은 술 취했다고 조롱을 당하고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서울 시장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신앙은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 택함 받고 구원 받은 노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니 건강의 복과 부요의 복을 받았습니다. 온 가족도 구원을 받고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말씀 안에 이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따라 합시다.
“인생은 쉬운 것이다.”
“잘 되는 것은 쉬운 것이다.”
“부자 되는 길은 쉬운 것이다”
내가 그냥 줄을 그으면 어려워도 자막대기를 대고 그으면 직선도 쉽게 그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나 혼자 건강하고 행복하게 구원의 생활을, 잘 되는 생활을, 존귀한 생활을 하기는 힘들어도 하나님 말씀에 맞추어 놓고 살면 쉽습니다. 할렐루야!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사이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라고들 말합니다. 시어머니 섬기기와 며느리 다루기가 제일 어렵다고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랑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섬기면 좋은 관계가 될 줄 믿습니다.
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사이가 너무나 심각하게 되어서 누구 한 사람이 죽어야 문제가 해결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아들이 감을 잡고 자기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에게는 어머니도 귀하지만 당신이 더 귀해요.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소. 어머니는 이제 살 만큼 사셨지만 당신은 살아야 할 날이 많으니 어머니를 일찍 돌아가시게 합시다.”
“어떻게 일찍 돌아가시게 해요?”
“내가 한의사에게 물어 보았더니 효도하면서 돌아가시게 하는 법이 있대요.”
“그게 뭐예요?”
“달걀을 하루에 한 개씩 하루도 빠짐없이 먹으면 달걀 독 때문에 100일이 되면 돌아가신다고 해요. 그런데 어머니가 눈치 채면 안 되니 절대 눈치 못 채시도록 아양을 떨면서 드리시오. ‘어머니, 달걀 드시고 건강하세요.’라고 하면서, 좌우간 잘 대접해 보시오.”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남편이 고마워서 눈물이 났습니다. 달걀이 귀한 때이지만 며느리는 매일같이 웃으며 시어머니께 달걀을 한 개씩 대접했습니다. 말할 수 없이 상냥해진 며느리를 보고 시어머니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며느리 옷도 사 오고 동네방네 다니며 며느리 자랑을 했습니다. 그리고 며느리에게 “아가, 내가 설거지 해 줄까? 쉬어가며 일해라. 이렇게 착한 너에게 그동안 내가 너무 심하게 대했지?”라고 했습니다.
시어머니께 달걀을 드린 지 99일째 되는 날, 며느리가 남편 앞에서 막 흐느껴 울었습니다.
“여보, 이제 어떻게 하지요? 알고 보니 어머니는 독한 분이 아니에요. 너무 선량하고 귀한 분이신데 제가 나빴어요. 어머니께서 오래 사셔야 하는데 내일이면 100일째 되는 날이니 어떻게 하지요? 해독제가 없을까요?”
그때 남편이 바른 대로 실토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도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계란을 계속 드리며 시어머니와 ‘짝자꿍 짝자꿍’ 하며 잘 살았다고 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잘 하면 상대방도 내게 잘 합니다. 내가 엎드리면 상대방도 엎드리고 내가 웃으면 상대방도 웃습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면 됩니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모든 인생살이는 쉬운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인생살이는 자막대기를 대고 줄을 긋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택함을 받았으니 다 구원을 받았고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살이는 말씀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서 직장에서도 성실히 일하고, 사업장에서도 바르고 의롭게 열심히 살아서 축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쳐야 한다?
창 7장 6~12절 / 조상호목사
어느 유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정신병자가 “나는 왕이다. 하나님이 나를 세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정신병자가 그의 뒤통수를 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세운 적이 없다.” 여러분, 미친 사람의 특징을 아십니까? 예정교회의 문방현장로님은 오랫동안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다가 1년에 300명 이상을 전도하는 전도왕이 된 후 지금은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전도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전도를 잘 하려면 미친 사람처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미친 사람에게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미친 사람은 아무에게나 말을 건다고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조건, 저 조건 따지지 않고 말을 건다고 합니다. 둘째로 미친 사람은 절이든, 교회든, 장사하는 곳이든, 가정집이든 아무 곳에나 들어간다고 합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셋째로 미친 사람은 아무나 보고 웃는다고 합니다. 어느 택시기사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사람을 자주 태우다보니 미친 사람과 정상인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웃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고, 화가 나 있는 사람은 보호자라고 합니다. 정신병원에서 나오는 사람도 계속 웃고 있으면 외출하는 것이지만, 화가 나 있으면 정신병을 고침 받고 퇴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친 사람은 화를 내지 않고 항상 웃습니다. 넷째로 미친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조그만 것에도 상처를 받지만, 미친 사람은 단순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해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상담이나 내적치료 같은 것들이 필요해도, 미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미쳤다’는 말이 꼭 나쁜 말은 아닙니다. 언뜻 들으면 ‘미쳤다’ ‘미친 사람‘이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다가오지만, 때때로 이 말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물론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미친 사람’은 정신병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미친 사람이 뭔가 이뤄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목표에 몰입할 만큼 미친 사람이 뭔가 이뤄도 이룹니다. 세상에 크게 이름을 날린 사람들은 무언가에 미쳤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에디슨이 실험에 미쳤기 때문에 발명왕이 되었고, 모차르트가 음악에 미쳤기 때문에 천재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박지성선수가 작은 키와 평발 등의 신체적인 핸디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축구에 미쳤기 때문에 세계 최고 구단인 Manchester United에서 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미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변했고, 지금도 미친 사람에 의해서 변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미친 듯이 무엇인가에 몰입한 사람은 그것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시간도 돈도 친구도 가족도 심지어는 먹는 것과 잠자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쟤, 미쳤나봐! 저 친구, OO에 미쳤어! 미치지 않았으면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어”라고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미쳤다‘는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꽤 많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27장 24절에 보면,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는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헬라인인 베스도 총독은 사도바울을 재판하다가 바울이 열정적으로 복음을 설명하자, 그가 보기에 바울은 미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향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베스도 총독으로부터 미쳤다는 말까지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의학적으로 미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께 집중한 사람이었고, 세상 학문에 미친 것이 아니라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베스도총독으로부터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과 21절을 보면, 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도 사도 바울처럼 많은 사람들과 친척들로부터 미쳤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조롱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변치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노아입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에 세상에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실 정도로 사람들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기로 작정하시고 그 계획을 노아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준비로서 큰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는데, 그가 방주를 지은 것을 보면 많은 특징이 있지만, 그 주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첫째로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배의 길이는 135미터(300규빗), 너비는 22.5미터(50규빗), 높이는 13.5미터(30규빗)로,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용적량이 무려 14,000 톤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 배를 노아에게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배를 다 지은 후 그 배 안으로 각종 짐승들을 종류대로 데리고 오되, 그 짐승들과 가족들이 한 동안 먹을 양식까지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학자들이 지상에 있는 짐승들을 조사해보았더니 그 숫자가 무려 45,000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방주를 지은 후에 비가 와서 세상이 물로 덮인 기간이 1년 이상 되었기 때문에 노아를 비롯한 7명의 가족과 45,000마리의 짐승이 그동안 먹을 양식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방주를 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방주에 짐승들을 암수 종류대로 집어넣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이 먹어야 하는 양식을 골고루 싣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6장 22절에 보면 그가 어떻게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NIV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해놓았습니다. “Noah did everything just as God commanded him.”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just as God commanded him'입니다. 그가 행하되 어떻게 행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대로 행한 줄로 믿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가지고 방주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방주를 지은 줄로 믿습니다. 그가 짐승들을 방주로 데리고 오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많은 짐승들을 데리고 들어간 줄로 믿습니다. 그가 양식을 준비하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많은 짐승들과 8명의 가족들이 1년 이상 먹을 양식을 준비한 줄로 믿습니다.
전에 몇 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성 프란시스가 수도원을 설립하고 유명해졌을 때 두 젊은이가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 성 프란시스에게 찾아왔습니다. “우리도 이 수도원에서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마침 그때 성 프란시스가 밭에서 채소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을 털털 털면서 “두 사람이 내 대신 채소를 좀 옮기거라. 그리고 옮긴 채소를 심되 뿌리를 전부 하늘로 향하게 하고 잎사귀는 땅으로 들어가게 심어라. 내가 저녁에 와서 볼 것이다.”하고 갔습니다. 그 중 한 젊은이는 ‘채소 뿌리를 하늘로 향하게 하면 말라 죽을 것 아니야. 뿌리를 땅으로 심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뿌리를 땅으로 향하게 해서 심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젊은이는 ‘선생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 생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선생님 말씀대로 하자.’라고 생각하고, 채소 뿌리를 전부 하늘을 향하게 하고 잎사귀를 땅으로 들어가게 심었습니다. 한 사람은 정상적으로 심어 놓은 반면, 다른 사람은 비정상적으로 심어 놓은 것입니다. 저녁이 되어 성 프란시스가 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뿌리를 땅으로 심은 젊은이를 불러서 “너는 참 지혜롭고 총명하다. 상식적으로 봐서 채소는 뿌리를 땅으로 심어야 자라지 뿌리를 하늘로 하면 죽지 않느냐. 너는 꾀가 많고 지혜가 있고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네 밑에 있지 말고 따로 가서 살아라.”고 말한 반면, 뿌리를 하늘로 심은 제자에게는 “너는 우직스럽고 바보같이 보이지만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니까 너는 내 제자가 되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본 훼퍼 목사님은 “믿는 자들만이 순종할 것이며 순종하는 자들만이 믿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믿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이었던 지 맥도날드는 ‘순종은 모든 문의 열쇠’라고 말했습니다. 순종이 기도 응답의 문을 열고, 순종이 은혜의 문을 열고, 순종이 축복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그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7절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 등 모든 것을 준비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온 가족이 홍수 심판 속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의 상속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온 땅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같이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과 23절에 보면, “야훼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예배를 잘 드리고 예물을 많이 드린다고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아처럼 말씀을 청종하며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던 노아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방주를 짓고 지은 방주에 짐승들을 암수 종류대로 집어넣고, 또 그들이 먹어야 하는 양식을 골고루 싣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순종했던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랫동안 인내하며
둘째로 노아는 오랫동안 인내하며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가 얼마동안 방주를 지은 줄 아십니까? 창세기 6장 3절에서 “야훼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년이 되리라 하시고”라는 말씀을 기준으로 우리는 주일학교 때부터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여러 책들에도 보면, 노아는 120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주를 지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앞뒤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20년은 당시 세상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신 시점일 뿐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은 아닙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기간을 파악하려면 노아가 세 아들을 낳은 때와 비교해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6장 10절에 보면,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이어서 창세기 6장 14절에 보면, “너는 고페르 나무(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 아들을 다 낳았을 때, 하나님께서 홍수심판을 하겠다고 작정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세 아들을 다 낳았을 때는 언제일까요? 창세기 5장 32절에 보면 언제 세 아들을 낳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노아가 몇 살 때 세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까? 500살이 넘어서 세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다. 500살 때 샘을 낳고, 1년 후에 함을 낳고, 또 1년 후에 야벳을 낳아서 502살 때 세 아들을 두게 되었는지, 아니면 세 아들을 두게 되었을 때의 나이가 500살이 막 지났을 때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 아들을 두었던 즈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을 들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창세기 7장에 보면 언제 홍수심판이 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창세기 7장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이 말씀에 의하면 그가 600살이 되었을 때 노아와 가족들이 홍수 심판을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방주는 600살이 되기 전에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방주를 짓기 시작했는지, 방주를 완성한 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후에 비가 내렸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방주를 짓는데 걸린 기간은 120년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500살 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을 들었고, 600살 때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노아는 최대 100년 동안 배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100년이 아니라 120년 동안 방주가 만들어졌다고 가정한다해도, 노아는 오랜 세월동안 인내하며 방주를 지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노아가 어디에서 방주를 지은 줄 아십니까? 바닷가에서 방주를 지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강가에서 방주를 지었을까요? 아닙니다. 상식적으로는 바닷가나 강가에서 배를 만들어야 하지만 노아는 그곳에서 방주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방주를 지었을까요? 창세기 7장 17절과 18절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같이 창세기 7장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홍수가 땅에 사십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40일 동안 내린 비로 세상이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산꼭대기에 있던 방주가 물 위로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바닷가나 강가에서 배를 만든 것이 아니라, 높은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비난을 했겠습니까? “배를 만들려면 바닷가나 강가에서 만들어야지 산꼭대기에서 만들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행동을 해! 저 혼자 의인인 척 하더니 꼴 좋구만.” 배가 완성된 후에 수많은 동물들을 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미쳤다고 했겠습니까? “도대체 수많은 동물들을 배에 싣는 이유가 뭐야? 미스터 노아씨가 동물원 차리려고 하나!” 또 짐승들이 먹을 양식을 배안으로 들일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조롱을 했겠습니까? '저 아저씨 좋은 분인데, 정신이 살짝 갔나 봐. 배에다 건초를 쌓다니! 저 친구, 배가 창고인 줄 아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정신 나갔다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베스도총독으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노아도 수많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이 컸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은 돈만 생기면 양과 소와 낙타 등을 구입하고 집을 짓고 논밭을 사는데, 노아는 시간과 땀을 배 만드는데 다 쏟았고, 돈만 생기면 배를 만들고 짐승들이 먹을 양식을 장만하는데 썼습니다. 오랫동안 허리띠 졸라매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것도 1,2년이 아니라, 10,20년이 아니라, 무려 100년 가깝게 비웃음과 조롱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 때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후 25년을 아들을 기다리며 인내했지만, 노아는 아브라함보다 4배나 더 길게 인내한 것입니다.
이처럼 노아는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방주를 지을 때만 인내한 것이 아닙니다. 방주를 짓고 나서도 인내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노아의 나이 600세에 그는 7명의 가족들을 데리고 방주에 들어갔습니다(창 7:6~7). 그런데 그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간 후 곧바로 비가 내렸으면 좋았을 텐데, 곧바로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에 들어갔지만, 비가 오지 않자 그 안에서 무작정 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얼마동안 기다린 줄 아십니까? 창세기 7장 11절을 보겠습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그의 나이 600세 되던 해의 둘째 달 17일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600살 때 배에 들어갔으니까 최대로 1개월 17일, 즉 47일 동안 그 안에서 비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아마 성질 급한 사람은 그 기간을 기다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몇 번씩이나 밖으로 나갈까를 고민하다가,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보고 배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배안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결국 47일이 되었을 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 동안 쏟아진 줄 아십니까? 40일 동안 쉬지 않고 엄청나게 계속 쏟아졌습니다(창 7:17). 그리고 40일 만에 비는 멈추었지만, 땅은 물로 뒤덮였습니다. 홍수가 시작된 지 150일째에 최고 수위에 달했던 물은 그날 이후부터는 현저하게 감소되기 시작했습니다(창 8:3). 16일 동안 물이 더 빠진 후 노아의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0일간 물이 더 빠지자, 드디어 산봉우리들이 물 위에 드러났습니다. 그로부터 40일 후 노아는 바깥 상태를 알기 위해서 까마귀를 내보냈더니 주변을 배회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두 번째로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젖은 땅에는 절대로 앉지 않고 마른 땅에만 앉는 비둘기는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배회하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7일이 지난 후 다시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저녁때 입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또 다시 7일이 지난 후 비둘기를 내보냈지만 그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자, 드디어 방주의 뚜껑을 열고 밖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창세기 8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그 때는 노아 나이 601년 1월1일이었습니다. 1년이 넘는 지루한 시간 동안 배안에 머물러야 했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지면에서 물이 걷힌 장면을 볼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속에는 빨리 지면을 밟아보고 싶은 마음이 불처럼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물이 걷힌 것을 보았음에도 곧바로 배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 그의 아내가 이렇게 바가지를 긁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보, 우리가 이 배안에 머문 시간이 어느새 1년이나 되었어요. 이제 밖으로 나갑시다. 방주 뚜껑을 열고 지면에 물이 걷힌 것을 보았잖아요. 왜 망설이세요?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어요.” 또 아들들도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참 답답하십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며느리들도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님, 이제 나가시지요. 어머님도 나가자고 하시잖아요.” 그러나 노아는 배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그가 배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Sign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면이 말랐음에도 그는 여전히 배 안에 머무른 것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께서 Sign을 주십니다.
다같이 창세기 8장 14절부터 19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그는 물이 걷히고 땅이 마른 것을 알고도 방주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까지 방주 안에서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601년 2월27일이 되었을 때, 가족들과 모든 짐승들을 데리고 방주에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미쳤다, 이상하다, 어리석다, 웃긴다, 정신 나갔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등의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Sign이 있을 때가지 인내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인내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노아의 인내를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 노아처럼, 하나님의 Sign을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노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방주를 짓고 지은 방주에 짐승들을 암수 종류대로 집어넣고, 또 그들이 먹어야 하는 양식을 골고루 실었습니다.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인내하며 방주를 지었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Sign이 있을 때까지 인내했습니다. 창세기 8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노아와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있는 노아와 그 가정을 기억하셨고, 홍수 가운데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린 노아와 그 가정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순종과 인내를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순종과 인내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되 끝까지 인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순종과 인내를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노아 홍수의 기적
창 7장 6~12절 / 김영수목사(늘찬양교회)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2천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류는 장수(長壽)와 다산(多産)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이 급속히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급속한 인구의 증가 못지 않게, 죄악(罪惡)도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창세기 6장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罪惡)이 세상에 관영(貫盈)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살인자 가인 계통의 후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순교자 아벨 대신에 주어진 셋 계통의 후손들까지 한 가지로 타락하여, 그야말로 온 땅에는 죄악(罪惡)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을 그래도 불쌍히 여겨 책망도 하고 권면도 하면서 기다려주셨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죄 위에 죄만을 더 쌓을 뿐 회개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패괴(敗壞)와 강포(强暴)'(창6:11)로 가득한 인간 세상을 정결케 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놓으셨습니다. 그 계획은 다름 아닌 홍수를 보내어 지구를 물로 심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인류전체를 멸하시지 아니하시고 그 중에서 노아의 가정을 택하여 방주를 예비케 하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은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왜 인간 세상을 물로 심판하셔야만 했을까? 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그리고 노아의 가정이 그런 가운데서도 구원함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이 시대에 노아의 방주 역할을 감당하는 늘찬양교회와 성도들이 되어 가는 귀한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Ⅰ. 인류의 타락과 물 심판
아담 이후로 1656년이 지나는 동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한 풍성한 대자연의 축복을 맛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죄만 지으면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사고 팔고 하는 일에만 치우쳤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 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창6:7)하셨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침해받음이 아니고 오히려 반역하는 인간들 곧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부당하게 하실 때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의분이십니다.(사43:24)
저는 노아란 인물을 기억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송명희 시인이 뇌성마비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부자유한 몸을 힘들게 움직여가며 잘 되지도 않는 발음을 가지고 말하는 호소 아닌 경고 성을 발언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가 말한 경고는 "여러분 ! 노아의 때 사람들이 어떻게 하다가 멸망을 당했습니까?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먹고 마시고 장가 가다가 멸망을 당하였다>(창6: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는 것이 죄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홍수의 재앙을 가져왔을까요?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창조하시고 하나뿐인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자신들이 왕이 되어 제멋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취해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기억치 아니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한 죄 때문입니다."(마24:38-39) 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떻습니까? 노아의 때보다도 더 음란하고 타락한 시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탄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음란과 살인을 밥먹듯 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며칠 전에도 카드 빛에 쫓긴 젊은이들이 살인강도행각을 벌이고 5명의 시체를 차에다 싣고 다닐 정도로 ' 패괴(敗壞)와 강포(强暴)' (창6:11)가 가득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국민소득 10만 불 이후 몰아닥친 마이카 붐 시대, 거기다 주 5일 근무제로 인한 쉼의 연장은 없는 사람에게는 죽을 맛이지만 있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자유로운 시간이 되어 주말여행으로 전국의 고속도로가 몸살을 앓고 있으며, IMF 이후 해외여행 객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시대, 오직 나 하나만의, 내 가족만의 세계를 그리며, 내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대,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는 식의 극도의 이기주의로 인하여 강퍅하기만 우리들의 이웃들, 이런 시대 속에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자라" 칭함을 받고 홍수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노아와 그의 가족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과 감동을 던져줍니다.
Ⅱ. 노아의 방주
창세기 6장 22절과 7장 5절에 기록한 대로 노아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遵行)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노아의 방주
노아는 이 땅에 '패괴(敗壞)와 강포(强暴)'(창6:11)가 가득함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땅과 함께 이들을 모두 멸하리라"하시고 '방주'를 만들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노아는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짓는 방주는 지금처럼 조선소(造船所)가 있어 배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무려 12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말이 120년이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 결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듯 노아는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고 방주 만드는 일에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도 인간인지라 얼마간의 의심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인생 전부를 걸고 방주를 지었는데 만약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때 가서는 누구에게 내 인생을 보상받나? 사탄은 노아에게 끊임없이 의심의 마귀를 통해 순종하지 못하도록 많은 방해공작을 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그 모든 의심과 불안과 염려를 다 이겨내고 멋지게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노아의 방주'를 완성하였습니다.
노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승리의 비결은 자신의 인생가치를 세상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음란과 살인과 각종 범죄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서는 오직 내가 살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 안에서 행동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 인생의 가치를 영적인 것에 둘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영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미래와 행복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주님 안에서 누리는 참 평안과 기쁨을 통해 날마다 늘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해주실 것입니다.
2. 배에 들어가는 기적
창세기 7장6-7절의 말씀을 보면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은 아직 비가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 8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로 들어가는 상황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입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은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여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교회로 들어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살 길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 보이고 여기에 들어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현실이 아니라 말씀을 굳게 믿은 노아처럼, 우리 속에 어두운 그늘과 답답한 현실이 있을지라도 주의 말씀을 굳게 믿고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미래와 축복으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3. 짐승을 배에 태우는 기적
게다가 8-9절 말씀을 보면 짐승들이 배에 들어가는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짐승을 하나 하나 배에 태우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야생동물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잡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배에 태우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짐승을 배에 태우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셨다는 사실입니다.
짐승들이 스스로 알아서 배에 찾아왔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짐승들에게 명령하심으로 암수로 짝을 이뤄 방주 안으로 정확히 움직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짐승도 움직이고 땅과 바다도 움직이는 것입니다.
노아는 이 모습을 보면서 아! 이 일은 하나님이 진행시키시는 일이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배를 만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배 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배 안에서 짐승들끼리 싸우지 않고 질서를 지킬 수 있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배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 배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세워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뱀과 독수리, 사자와 양이, 이리와 사슴이 싸우지 않고 배 안에서 함께 지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이 서로 어울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가 타고 있는 이 행복한 배(가정과 교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이 안에 있는 우리들이 질서 가운데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 안에도 각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도 있는 반면에 비성숙한 사람도 있고, 교만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겸손한 사람이 있고, 과격하고 거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부드러운 사람이 있고, 사랑과 용서와 이해의 사람이 있는 반면에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나운 짐승들이 배 안에서 온순하게 변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이 배 안에 있기만 하면 온순한 어린 양으로 바뀌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눈이 바뀌고 삶이 바뀌는 것처럼 주의 전에서 그런 역사들이 일어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뛰노는 천국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전에는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홍수의 기적
1. 방주의 문을 닫아거심
'노아의 방주'가 완성되어지고 노아의 식구와 각종 짐승들이 짝을 이루어 방주 안에 다 들어가자 창세기 7장 16절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노아와 그의 가족 8명이 온 힘을 다해 방주의 문을 닫은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닫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를 입안(立案)하시고 방주의 문까지 걷어 닫으심으로 처음부터 마지막 마무리까지 깔끔하고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구원받는데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1656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지으시고 일주일을 기다리시고 이제 방주 문을 닫은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의 심판 날이 다가 온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구원의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요, 은혜 받을 만한 때인 줄 알고 우리 가족과 이웃 죽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합니다.
둘째: 또한 방주는 가장 안전한 장소요 피난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방주는 물 한 방울 들어올 수 없는 튼튼한 배였고 비바람 폭풍우가 휘몰아치며 우박으로 뱃머리를 치기도 하며 벼락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려도 방주는 끄덕도 하지 않는 견고한 배였습니다. 세상은 온통 물에 잠겨 파멸했지만 이 방주 하나만은 유유히 물결 위에 두둥실 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IMF와 같은 환난과 시련의 바람이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괴롭혀도 예수 안에 있는 한 결코 좌초(坐礁)하거나 파선(破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한 우리는 영원한 보호와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안전한 방주가 되시고 영원한 안식처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2. 사십 주야를 쏟아지는 큰 비
여호와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신 후 7일 후에 창세기 7장 11-12절에 있는 대로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홍수입니다. 단순한 홍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중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면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는데, 궁창 위의 물이 완전히 쏟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뭍이 드러나라 명하셔서 육지가 생긴 것인데, 이제는 땅이 완전히 꺼져 버린 것입니다. 완전한 창조질서의 중단입니다.
창세기 7장 20절의 말씀을 보면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5규빗이면 약 7미터 정도 되는 깊이입니다. 7미터면 엄청난 물의 양입니다. 홍수가 나고 물이 불어 1미터만 차 올라도 온 세상이 물난리인데, 7미터 정도면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물입니다.
그런데 이 물이 산을 덮었다고 했습니다. 7미터면 산을 덮을 정도의 물은 아닌데, 하나님이 말씀을 거두시는 순간 산이 한 순간에 내려앉고 평지는 갈라져서 꺼져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온전히 살 수 있는 것,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질서 있게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것 자체가 엄청난 기적이요. 이 기적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거두시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해도, 하나님이 붙잡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데도 자기의 의지와 지식과 경험만 믿고 세상 힘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말씀을 굳게 부여잡고 기도의 깊이와 성령의 인도함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Ⅳ. 노아의 구원
40주야로 비가 내려서 150일간 물이 땅에 창일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 8명이 모두 안전하게 방주를 통하여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방주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하심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홍수의 기적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최대 교훈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은 "방주"에 있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참 구원함과 영생함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살아있을 때 구원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배에 올라타야 합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이 말씀은 철저히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번 문이 닫히면 아무리 두들겨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에서도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마25:1-13) 말씀을 믿고 배 안에 들어온 사람과 짐승들만이 오직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은혜 받은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임을 믿고 하루속히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며 구원의 주님을 널리 전하기를 원합니다.
2.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제는 물의 심판이 아니라 불의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 그 날까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그 분을 경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하나님은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우리를 감화 감동시키시고 훈련시키자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도록 만들고 계십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일에 순종하였듯이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부름 받은 전도인의 사명을 다 감당해야 합니다. 주위 사람이 뭐라고 하든 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결과가 하루속히 나타나지 않고 더디 열려도 인내하며 기도함 속에 믿음으로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노아의 순종을 배웁시다.
배 안으로 들어갑시다.
대홍수를 견딜 수 있는 곳은 이 곳 뿐입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하나님은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도록 우리를 통해 역사하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심장과 비전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오기 전에 아니, 그 날이 이루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을 위해 우리 모두가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이한규목사 / 창세기 7장 1-7절
1. 말씀 중심적인 믿음
창세기 6장 14-16절을 보면 하나님은 대 홍수 때 노아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구체적인 설계도까지 그려주셨다. 그 방주는 배 모양을 했지만 평소에는 전혀 쓸모없는 상자 모양의 배였다. 그런 이상한 방주를 땅에서 오랫동안 만들고 있으니 사람들이 한심하게 보고 놀렸을 것이다. “저 친구 도대체 뭐하는 거야. 돌았어.” 그래도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5절).
노아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초월해서 하나님이 하라면 그대로 했다. 그런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그를 당대에 완전한 자로 여겼고 그와 그의 가족에게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은 “다 준행하였더라.”는 표현에 있다. 철저한 순종은 신앙의 척도이고 앞으로 얻을 은혜의 척도다. 순종이 없으면 참된 믿음이나 축복도 있을 수 없다. 믿음의 축복은 순종이 있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2. 교회 중심적인 믿음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1절). “방주로 들어가라.”는 말은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는 암시다. 시련이 있다고 구원의 방주에서 이탈하면 세상 물에 빠져 죽는다.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 늘 있으면 아무리 세상의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쳐도 안심할 수 있다. 방주에서 내려 유람선을 타거나 고깃배를 타면 잠시 즐거울 수는 있지만 고난의 비바람이 닥칠 때 큰 위험에 빠진다.
요새 ‘열린 교회, 열린 예배’란 표현이 많이 들린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열린 마음을 가질 필요는 있지만 세상 풍조가 교회 안에 쉽게 들어올 정도로 교회를 열면 안 된다.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너무 열려 있을 때 타락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 열어야 할 때는 열고 닫아야 할 때는 닫아야 한다. 어떤 시련과 유혹과 있어도 구원의 방주 밖으로 나가지 말라.
3. 가정 중심적인 믿음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다(7절). 가장으로서 노아의 가정 목회는 성공적인 목회였다. 아마 노아 가족들은 노아의 방주 짓는 일에도 적극 동참했을 것이다. 결국 가족 전체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가정에서 믿음으로 하나 되는 일이다. 쉽지 않아도 그 일에 최우선의 관심을 두라.
어떤 사람은 교회는 잘 섬겨도 가정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 모습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가정은 작은 교회다. 작은 교회에서 작은 승리를 거둬야 큰 교회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고 세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성도는 세상적인 불신자보다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가족 중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4. 예배 중심적인 믿음
하나님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방주에 타게 했지만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 방주에 타게 했다(2절). 부정한 짐승들까지 암수 둘씩 타게 한 것은 모든 종의 보존을 위해서였다. 왜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씩 타게 했는가? 제사에 사용할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정결한 짐승이 필요한데 노아는 1년 이상 방주에 있으면서 제사도 드렸을 것이다. 그 제사에 쓰려고 정결한 짐승을 많이 들였을 것이다. 그것은 제사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를 뜻한다. 노아가 방주에서 1년 이상 있으면서 무엇을 했겠는가? 그 안에서는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또한 폭풍우가 치고 물이 넘실대었기에 즐겁게 유람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아와 가족들은 영과 진리로 수시로 예배드리면서 홍수가 끝나고 물이 지면에서 빠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힘든 상황에서도 예배의 자리만 잃지 않으면 그 인생은 결코 잃어버린 인생이 되지 않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창 7장 1~16절 / 배영진목사(하늘문교회)
오늘은 ‘문이 닫히기 전에!’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문이란 노아가 만든 방주의 문을 말합니다. 오늘 16절 마지막에 보면, 중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노아가 들어가니 주님께서 몸소 문을 닫으셨다! 방주 문이 닫힙니다. 그날 노아와 노아가족 여덟명이 방주 안에 들어갑니다. 방주바깥에는 당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주 안에 있거나, 아님 방주 바깥에 있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대한 메시지를 줍니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 방주안에 있거나, 방주밖에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노아의 물심판을, 세상 마지막 날 불심판의 싸인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물로 한번 심판하셨다! 이건 하나님이 불로 한번 심판하신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흐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고 죄가 들어온 이래, 죄성이 깊숙이 박힙니다. 죄성이란 죄의 본성, 죄의 성품을 말하는데, 이 죄성이 가인에게 박혀버립니다. 죄성의 특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 파괴입니다.인간성, 휴머니티! 이것이 없어요. 그러면 인간이지만 짐승성 폭력성을 가집니다. 가학성이라고 하죠. 누군가를 학대하죠. 강자가 힘으로 약자를 짓밟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고 가인자손은 놀랍게 철로 무기를 만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천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창세기6장에 오면, 이 가인자손의 가학성 폭력성이 온 세상을 점유합니다. 하나님이 아벨 대신 셋을 주셨고, 셋 자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득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서로 사랑, 공동체로 삽니다. 휴머니티가 있습니다. 셋자손은 가인자손과 구별되게 살았어요. 그런데 그 땅에 돌발상황이 벌어집니다. 셋자손이 구별됨을 싫어하면서, 하나님 안믿는 저 가인자손처럼 살고싶어 합니다! 그래서 셋자손이 가인자손 여인들과 결혼을 하기 시작합니다. 두 자손이 뒤섞여요. 그레샴의 법칙을 아시나요? 나쁜 것은 좋은 것을 잡아먹는 법칙, 나쁜 친구와 좋은 친구 어울리면 같이 나빠집니다. 온 세상이 가인자손의 난폭함, 잔혹함, 가학성으로 치닫게 됩니다. 성경은 온 세상을 두가지 특징으로 규정합니다. 부패와 폭력! 썩어져가요. 난폭해져요. 그때 네피림, 거대한 강자들의 시대! 인간성이 사라져요. 하나님이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십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안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노아를 불러 명하십니다. 이 땅이 온통 썩어 이 땅을 심판한다! 세상 그 끝날이 이르렀다, 그런데 노아야 너는 달랐다, 너는 구원의 길을 만들라. 120년간 방주 한척을 만들어라. 여러분 놀라운 것은 세상끝날 한 가정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120년이 끝나고 오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뭔가? 두가지입니다. 노아가 할 일, 하나님이 하실 일, 너는 방주로 들어가라, 내가 방주문을 닫으리라.
첫째, 너는 방주로 들어가라.
1절을 봅니다. 다같이 읽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에 들어가라 명하십니다. 방주가 다 완성이 되었고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 120년이 흘렀습니다. 때가 됐어요. 누가 방주에 들어가는가? 의로운 사람이 들어갑니다. 1절을 정확히 풀면 이래요. 너와 너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가라, 내가 너의 의로움을 보았느니라. 개역성경에 너와 네 온 집! 저는 이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저는 노아와 그 아내를 상상해요. 두사람이 방주를 만드는 120년간 얼마나 하나님말씀을 갖고 얼마나 쉐어링을 자주 했을까 상상해봅니다. 방주에 대하여 흔들렸을까요? 저는 흔들렸을 거라고 봅니다. 당시 120년동안 대부분 99.9% 주변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만드는 일을 비웃었어요. 그 상황에 그 시대를 거슬러가려면 부부간에 믿음의 대화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크리스챤들이 살면서, 부부의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노아부부의 대화를 생각해보세요. 믿음의 말을 나눌 사람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쉐어링이죠! 여보 우리 방주 만드는 이거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겠지? 여보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심판이 정말 올까요? 그렇지.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셨으면 반드시 하시지! 그날까지 이 방주안에 한 영혼이라도 더 넣었으면 좋겠는데! 내일 누구 만나볼까?
이것이 방주완성 120년, 노아가 480세때, 하나님이 노아를 찾아오십니다. 택함을 받은 거죠. 노아야 내가 이땅을 보니 부패와 폭력이 극심히다. 네가 할 일이 있다. 방주를 지으라! 노아가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노아의 마음속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6장-7장 사이에 120년이 흐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는 우리 인생 120년, 또 70년 흘러가는 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노아가 그 120년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걸어갔을까 생각해봅니다. 노아 가정 외는 그때 아무도 하나님말씀을 붙들고 살지않았던 시대였는데! 예수님이 누가복음 17장 노아시대를 말씀하실 때, 노아의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120년간 잘 살았다 그랬어요. 누가 잘살았을까요? 고대에 힘있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썩었고 폭력이 난무했어요. 힘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피눈물나게 하고, 요즘말로 하면 엄청난 양극화현상이 있었어요. 요즘 아주 잘 나가는 사람들 건배할 때, 하는 건배사가, 이대로! 라고 합니다. 홍수가 오던 날까지, 사람들의 주된 관심이 먹고마시는 것이예요. 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구별되이 사는 문제는 영 관심이 없었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이 문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120년후 홍수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노아의 가족, 먹고사는 것과 방주 만들기, 무엇이 중요한가요? 생계와 방주! 생계 중요합니다. 질문입니다. 방주는 생계보다 우선이다. 생계, 먹고사는 것이 방주보다 우선이다! 전제가 있어요. 하나님이 심판의 날을 정해놓지 않으셨다면, 방주는 필요없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뭘 믿었는가? 이제 하나님은 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면 물론 먹고사는 것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어요. 홍수에서 구원받을 방주를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방주를 만들라, 구원의 통로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믿으라, 이것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예요. 질문입니다. 먹고사는 것과 예수믿는 것, 뭐가 더 중요한가? 우선순위문제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갈 사람은 방주가 더 중요합니다. 방주 바깥의 사람에게 방주는 조롱의 대상입니다.
4절입니다. 이제 7일 후면 이땅에 40일간 밤낮으로 비를 내릴 것이다! 노아가족이 홍수시작 며칠 전에 방주에 들어갑니까? 7일 전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길과, 구원의 방법과 구원의 타이밍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노아의 태도입니다. 무슨 태도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명하신 것, 하나님 말씀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다같이 5절을 한번 읽습니다. 주님께서 명하신대로 다 하였다! 개역성경은 준행하였더라 라고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6장 22절,7장 9절, 7장 16절도 똑같아요. 노아의 태도에서 반복되고 강조된 표현이 뭔가? 주님이 명하신대로 준행하였더라! 준행이란 준수하여 행동으로 옮겼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켰다는 뜻입니다. 왜 그래요? 믿음입니다. 온땅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는 길이 거기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살길 있는 줄 믿습니다!
4절 다시 봅니다. 노아가족이 방주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레가 지나면 이 땅에 비가 시작되고, 그때 내가 모든 생물을 없애버리겠다! 두가지를 하십니다. 하나님이 비를 보내시면 하나님이 모든 생물들을 없애버립니다. I will wipe. 쓸어버리리라. wipe라는 것은 자동차 빗물닦을 때 앞유리에 왔다갔다 하는 것입니다. 홍수를 보내 쓸어버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120년동안입니다. 기회를 주시고 방주를 만드는 기간동안 사람들이 방주에 관심을 갖고 방주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충분한 기회가 있습니다. 그 시간이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끝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명하시는 말씀에 준행하고 계신가요? 여러분 방주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십니다. 노아야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이것은 우리에게 예수 안으로 들어오라,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도 찾아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방주로 들어가라! 그래서 예수믿으셨습니다. 만약 노아가, 하나님 지금 방주로 들어가라구요? 지금 제가 할 일이 남았는데요, 이 프로젝트가 2년짜린데, 그거 끝나고 방주 들어가면 안되나요? 그랬으면 뭘까요? 그날이 홍수 며칠 전이라구요? 7일 전입니다. 노아 비즈니스 프로젝트 몇 년짜리? 2년짜리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여러분이 예수 안으로 들어오셨다면, 적어도, 하나님말씀하신 대로, 심판이 온다! 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 하실 때, 아뇨, 전 아직 할 일이 많은데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해야 되는데요, 그러면 너무 늦습니다.
둘째, 내가 방주 문을 닫으리라!
16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노아와 노아의 전 가족 8명과, 노아가 선택한 모든 짐승들이 짝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노아까지 다 들어갔고, 그것을 다 확인하신 후에, 주님께서 몸소 문을 닫으셨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번 닫힌 구원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13절로 가볼까요? 바로 그날, 그날이 어떤 날일까요?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입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7장에서, 그날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그날, 사람들이 무엇을 열심히 했는가 말씀하셨어요.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고 방주문이 닫히고나면 방주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홍수, 물심판, 멸망, 심판입니다. 그런데 그날까지 뭐했는가? 사람들은 결혼식 피로연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렇게 했어요. 그날 방주문이 닫히는 장면이 16절, 방주 문은 노아가 닫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으십니다. 방주 문이 닫히기 전에 방주 바깥에 사람들에게 뭐가 가장 중요한가요? 뭣이 중헌디?가 아주 유행했었죠. 내가 오늘 망할 수 있다! 이걸 생각했어여 합니다. 그런데 생각이 안나요. 노아에게 뭘 들은 것 같긴 한데!
11절을 봅니다. 이것을 잘 보십시오. 세상 마지막날의 심판도 이와 같다 했습니다. 노아가 6백살 둘쨋달, 열이렛날, 2월 12일 홍수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11절 13절, 두 번, 바로 그날!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날이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의 날, 왜 바로 그날인가?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연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하나님말씀에 대하여 어떤 마음자세, 태도를 가졌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홍수는 생각보다 컸고 갑자기 터졌습니다. 11절에 땅에서는 큰 샘들이 터졌습니다. 하늘에서 홍수문들이 열렸습니다. 그날 방주 바깥은 아무 대비가 없습니다. 방주바깥 사람들은 혼비백산, 좌충우돌했을 것입니다. 재난은 통보가 없습니다. 홍수나면 사람들 여기저기 대피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 홍수가 아닙니다. 하늘에서만 비가 온 게 아니예요. 땅속 큰샘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여러분 땅속에는 상상할 수 없는 지하수가 있습니다. 물폭탄처럼 솟구쳐 한꺼번에 터지면 사람이 오갈 데가 없습니다. 피할 데가 없어요. 하늘에서 터지고 땅에서 터집니다. 어디로 갑니까?
17절 봅니다. 홍수는 40일 밤낮으로 계속됐습니다. 물이 삽시간에 불어나고 높은 산이 물에 잠기고 20절, 물이 불어나 가장 높은 산의 높이를 훌쩍 뛰어넘어버립니다. 온 땅이 잠겨버립니다. 살아있는 어떤 생물도 살아남지못해요. 21절 다 죽었다, 22절, 모두 죽었다, 23절, 모든 생물을 없애버리셨다고 했습니다. 다만 노아와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 짐승들만이 살아남았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일은 말씀하신 대로 일어납니다. 4절 모든 생물을 다 쓸어없애리라 말씀하셨고 말씀대로 다 쓸어 없애셨습니다. 어떤 사람만 살아남았습니까? 오직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 만입니다. 심판을 피하고 면하는 유일한 피난처는 방주입니다!
홍수가 터지던 날 사람들이 그제야 노아가 산위에 짓던 방주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홍수가 터지던 그날까지 사람들은 아무 대비가 없어요. 혹시 노아가 말한대로, 홍수가 나서 우리가 멸망할지 모른다 이런 생각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온다 라고 들을 때 그들은 조롱했습니다. 노아의 얘기를 듣지 않았어요. 노아가 방주 120년간을 지었는데 홍수 얘기, 심판, 경고, 방주 이야기를 했을까요 안했을까요? 심판의 날이 온다! 이 말을 들었나요 안들었나요? 다 들었어요. 믿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을 거다! 예요. 그런 엄청난 홍수가 올 것 같지 않은 거예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런 홍수가 한번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날 심판의 날에 쏟아지는 홍수는 어땠을까요? 이제까지 그들이 한번도 경험해보지못한 엄청난 양이었어요. 그래서 그날 노아방주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아 방주로 가자! 비를 피해 방주가 있는 산위로 올라가자! 너도나도 산위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방주까지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주의 문은 닫혀있었습니다. 이미 7일 전에 방주 문은 닫혔습니다.
오늘 저는 이 설교제목을 문이 닫히기 전에! 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심판은 딱 한번 남았습니다. 베드로후서 하나님이 노아때 물로 한번 심판하셨는데, 이제 불로 이 땅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하늘과 땅은 한번 불살라지는 불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메시지입니다. 노아 때 방주를 유일한 구원의 길로 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다음에 뭐죠?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아직 예수믿을 기회가 있는 동안에, 노아가 방주를 짓고있는 시간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짓고있는 방주는 목장입니다. VIP들을 이 목장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거기가 방주입니다. 그때 노아가 방주를 지으며 방주로 사람들 초청했을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 뭐했죠? 조롱하며 거부했습니다. 방주문 닫히는 날까지 초대했습니다. 문이 닫히면 그날은 아무도 못들어갑니다. 그리고 물심판이 왔습니다. 갑자기 내려왔을 때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오직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가족이 구원받았습니다. 예수 바깥에 있는 자는 마지막날 심판입니다. 예수안에 들어온 자만 구원받습니다. 베드로후서에 마지막때가 되면 심판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소돔성이 멸망하던 날 롯의 사위들이 심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노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방주 안으로 그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들을 우리와 함께 방주 안에 있게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예수안에 있을 때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방주 문은 아직 열렸지만 문은 곧 닫힐 것입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문이 닫히면 그날은 너무 늦습니다.
노아가 주님 앞에서 보여준 의로움은 무엇인가?
창 7:1~16 / 구원으로 인도하는(521장)
들어가는 글
오늘은 오월 셋째 주일이며,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입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가족이 모두 예수님을 잘 믿고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들은 모두 방주로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습니다(13절). 하나님이 노아의 가정을 구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기자는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니라”고 합니다(1절).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보여준 의로움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노아가 보여준 의로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 가족도 모두 구원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 노아가 보여준 의로움은 무엇입니까?(1절)
첫째로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심없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오백세가 되던 해에 나타나 홍수 심판을 고지합니다(창6:13). 또한 노아의 가족과 언약을 맺으며 방주를 지어라고 말씀합니다(창6:18). 그리고 언제 하나님이 노아에게 다시 나타납니까? 하나님은 홍수로 심판하기 일주일 전에 나타났습니다(4절). 하나님이 다시 나타날 때 그의 나이가 몇 살입니까? 오늘 본문은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고 합니다(6절). 그러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어라고 말씀하신 후에 백년 만에 다시 나타나서 방주에 들어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보여준 의로움은 백년 동안 의심없이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노아 당시에는 기록된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말씀을 한번 듣고 의심없이 백년 동안 믿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의로운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의심없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보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합니다(5절). 여기서 ‘다 순종하였더라’고 기록할 수 있는데, 굳이 ‘다 준행하였더라’고 기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준행하다’의 ‘아사’는 ‘이루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 준행하였더라’는 노아의 가족이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을 끝까지 해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보인 것도 주님이 명하신 대로 다 이루는 준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아가 방주 짓는 일을 끝까지 다 이루는 준행을 했기 때문에 노아의 가족이 홍수를 피하여 방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7절). 성도들이 순종을 했다고 하는데 열매가 없다면 끝까지 다 이루는 준행이 있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 이루는 준행을 통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노아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였기 때문입니다(창6:9). 여기서 ‘완전하다’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완전하다’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부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고 합니다(창6:12). 여기서 ‘부패하다’에는 세상을 파멸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부패할수록 세상을 파멸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는 것은 부패한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휩쓸려 부패하지 않고 완전한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부패하여 세상을 파멸시키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패하여 세상을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믿음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창6:9). 여기서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동행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히브리기 기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고 합니다(히11:7). 성도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가장 먼저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없이는 주님과 함께 걷는 동행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아직 보이지 않는 일’을 백년 동안 의심 없이 믿으며 구원의 방주를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받아서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을 믿음으로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동행하면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을 의심 없이 믿으며 구원의 방주를 준비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 노아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받도록 인도하시는 주관자가 누구인가요?
첫째로 노아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이 누구신가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고 합니다(16절). 하나님이 노아 가족을 방주에 들여보내고 직접 문을 닫으면서 구원의 주관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기 전에 들어갔기 때문에 세상의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면서 홍수가 내리기 시작할 때 방주의 문을 다시 열러 달라고 매달리는 세상 사람들이 정말 많았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주님”이라고 소개합니다(계3:7절). 우리는 구원의 주관자 되신 주님이 천국의 문을 닫기 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노아의 방주가 떠오르도록 하신 분이 누구신가요? 오늘 본문은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다”고 합니다(17절). 구원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를 떠오르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창세기 기자는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합니다(창6:8). 노아가 방주를 짓고 홍수로 물이 많아져 방주가 떠오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백년 동안 아무리 방주를 완벽하게 만들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떠오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으로 부패하여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떠올라서 구원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군목이 죽어가는 병사의 손을 붙잡고 “무엇을 해드릴까요?”라고 물었는데, “주님께 감사를 드려주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군목은 죽어가는 병사가 감사해달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무엇을 감사하라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죽어가는 병사는 “내가 구원의 은혜를 받지 아니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머니가 내게 귀한 믿음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 천국에 올라가는 것을 감사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군목은 죽어가면서도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는 병사에게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감사 속에 죽어간 병사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자식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식을 믿음으로 양육하여 천국에 먼저 올려보낸 것을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월 가정의 달에 우리도 부모에게 믿음을 물려받아서 구원의 은혜를 입고 천국에 올라가는 것이 최고의 감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말씀 다지기 (함께 되새김질 하는 시간입니다.)
1.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보여준 두 가지 의로움은 무엇인가요?(5,6절)
2. 노아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창6:9)
3. 노아 방주의 문을 마지막으로 닫으신 분이 누구신가요?(16절)
4. 노아 방주가 홍수로 심판할 때에 떠오르게 하신 분이 누구신가요?(17절)
□ 말씀 적용하기 (서로 삶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1. 우리가 순종을 마무리하여 다 준행했던 경험은 무엇이 있나요?
2. 우리가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하여 회개할 것은 무엇이 있나요?
3.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드려야 하는 기도는 무엇이 있나요?
4. 우리 가족이 모두 구원의 은혜를 입기 위하여 전도해야 하는 영혼은 누가 있나요?
노아 홍수 D-7
창 7장 1~12절 / 홍문수목사
지금 이 시대는 인류 역사 상 가장 풍요롭고 화려한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편리하고 신기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의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날로 연장되고 있습니다. 잘 하면 120세까지도 너끈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면들만 보면 “사람들이 굳이 천국에 가고 싶어 할까?” 그런 생각마저 듭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 ” 모두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보면, 이런 번영의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확산 일로에 있는 핵무기로 인한 세계 전쟁의 위험,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테러,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 쓰나미 같은 자연 재앙, 듣도 보도 못한 신종 전염병의 출현,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 인터넷 시스템을 위협하는 웜바이러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위험 요소들이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인류의 장래에 관해 뭐라고 언급하고 있을까요? 불행하게도 인류의 미래는 결국 멸망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각 사람이 최후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인류의 멸망이니 최후의 심판이니 하는 주제는 금기 사항 비슷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성도들조차 꺼리는 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근거 없이 지어낸 신화로 취급하거나 지적으로 모자라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미신으로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많은 지면에서, 특히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복음서에서 심판이나 멸망에 관한 메시지를 너무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제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마땅한 자세요, 진리를 추구하는 인생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최후의 심판이 있음을 누누이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임을 천명하기 위해 역사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사례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창세기 6~8장),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창세기 19장),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마 24:1~2) 등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례들은 장차 있을 최후의 심판 즉 인류의 종말에 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그리고 그 때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겁니다. 이러한 미래사를 미리 예고편으로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로 본문에 노아 홍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소홀히 하기 쉬운 종말론에 관해 살펴봄으로 영적인 각성을 다지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1] 노아 시대와 이 시대 : 종말이 가까운 말세지말
먼저 노아 시대와 오늘 이 시대의 모습을 비교해 봅니다. 왜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시대상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창6:5~6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grieved) 마음에 근심하시고(filled with pain)”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적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성적 존재에게는 의로움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죄에 빠졌습니다. 그것도 심각하게 빠졌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심히 괴로워하시다 마침내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그때보다 나아졌나요? 인지도 발달하고 문명이 발전했으니까 나아졌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하신 대로 인간 세상은 갈수록 죄로 관영해지고 있습니다. 눅17:26~27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여기서 예수님은 재림의 때와 노아 시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안자(人子)는 예수님의 자기 칭호입니다. 그러니까 ‘인자의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종말의 때를 가리킵니다. 종말이 임박한 말세지말(末世之末)에도 노아 시대처럼 인간이 죄 가운데 먹고 마시고 향락에 젖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얼마나 음란하고 폭력적인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한 모습이지만, 속은 죄로 말미암아 다 썩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 맞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가득한 인간도 오래 참아 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래 참으시되 영원히 참으시지 않습니다. 죄악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국가, 시대, 인류 역사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고, 심판 아래 있습니다. 롬6:23 말씀대로 죄의 삯은 영원한 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노아 시대에는 홍수로 심판했지만,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주면서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심판받을까요? ‘불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심판의 필연성에 대해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로 믿고 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 심판의 날 시계(Doomsday Clock)를 아시죠?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발행하는 과학 잡지(The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매호 표지에 게재되는, 이른 바 지구 종말의 날까지 남은 시간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시계입니다. 1947년부터 시각을 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의 각종 위기 요소를 시각 변경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주로 핵무기나 테러의 확산을 기준으로 하는데, 북한의 핵실험도 변수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몇 시쯤 됐을까요? 오후11시 55분까지 앞당겨졌다고 합니다. 최후의 심판 5분전이라는 겁니다. 그만큼 종말이 임박했다는 경고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경고도 경고지만 과학자들이 분석하고 전망하는 바로도 인류의 미래가 마냥 핑크 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이를 새까맣게 잊고 삽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 먹고 마시고 죄짓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믿는 성도들조차 영적인 잠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향하여 성경은 끊임없이 영적 각성을 촉구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대비하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이를 대비하기 위해 연구도 하고 회의도 하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종말의 시기를 늦출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2] 유일한 구원의 길 :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대비책은 구원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주신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노아 시대의 방주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노아 시대에 인간은 더 이상 스스로 심판을 극복할 방법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대로 멸망을 향해 흘러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1절.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 ” 하나님의 심판이 대홍수를 통해 임하게 되는데, 방주를 통해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방주로 들어가라! 이게 바로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입니다.
여러분, 방주는 어떤 겁니까? 배가 아닙니다. 직육면체 상자 같은 겁니다. 창세기 6장에 그 제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창6:14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고페르 나무는 잣나무 종류인데, 목질이 단단하고 물에 붇지 않아 내구성이 뛰어납니다. 이 나무로 여러 칸(방)들을 만들고, 인간과 동물들을 대피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역청입니다. 일종의 아스팔트 같은 것인데, 방수재입니다. 칸과 칸 사이에 칠해서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흥미롭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역청’이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코페르’(rp,Ko')인데 ‘속죄 제물’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칠하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카파르’(כפר)인데 ‘덮다’ ‘가리다’(cover)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속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속죄는 죄를 가리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수치와 두려움으로 무화과 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었죠. 죄를 가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겁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벗기고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창3:21)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죄 없는 짐승이 피 흘려 죽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대속의 원리’ 혹은 ‘속죄의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역청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속죄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구약 시대에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었던 것처럼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그 모든 것(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십자가 대속)이 사실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에 대홍수로 인해 모든 인간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때, 방주로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주에 대해 홍수 사건에 대해 의심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의견은 둘로 갈립니다. 창조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과 진화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일일이 그들의 주장하는 이론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동일한 수준의 과학자들의 주장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이미 그것은 과학의 치원을 넘어서는 사안이라는 겁니다. 결국 성경의 진리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신앙의 차원입니다.
어쨌든 성경의 진리를 믿어야 구원의 길이 있기에 이를 알려주려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를 변증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에 「한국창조과학회」가 결성되어 활동 중입니다. 과학 교과서에 진화론과 창조론이 함께 실리도록 노력하는데 아직 열매를 맺지는 못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었고 실제로 교과서에 반영된 사례가 많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이 실현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노아의 방주는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만, 방주의 성능에 관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40일 동안 비가 내려 온 땅이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방주가 난파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실험을 통해 알아보니 가장 안전하고 견고한 구조라는 겁니다. 1993년「한국창조과학회」의 요청으로 해군사관학교 선박기술연구소에서 방주 모형(축척 1/50)을 제작해서 실험해본 적이 있습니다. 인공 파도를 일으켜 실험을 했더니 무려 40m 파도에서도 끄떡없었다는 겁니다. 반면에 다른 형태의 선박들은 여지없이 난파되었습니다. 인류 역사 상 30m 넘는 파도가 없었다고 하니까 노아의 방주는 가장 안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절묘한 형태의 방주로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들과 동물들을 홍수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노아 시대에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방주였습니다. 방주는 한 척만 제작되었습니다. 구원의 유일성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except through me)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 행4:12 보면, 초대 교회 박해 상황 가운데 사도들은 당당히 외쳤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을 만나는 길도,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는 길도 천국에 가는 길도 “오직 예수!” 라는 겁니다.
맑은 하늘 아래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던 노아!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했을까! 그러나 이 방주가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 될 줄이야!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찮게 생각합니다. 교회를 조롱합니다. 그러나 심판 날에는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귀중한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의 축복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노아 홍수 D-7 : 하나님의 최후 통첩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신 하나님이 홍수 심판 7일 전에 최후의 통첩을 하십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정말 홍수가 임할 것임을 마지막으로 다시 경고하신 겁니다. 4절.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D-7일에 또다시 말씀하셨을까?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으니까 그냥 심판하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의 발로입니다. 벧후3:9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기대하고 소원하신 겁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 엄마가 야단칩니다. 잘못을 시인하고 빌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면서 셋을 셉니다. “셋, 둘, ... ” 그래도 아이가 버티면 이때부터 엄마가 오히려 긴장합니다. “하나 반, 하나 반의 반, ... ” 왜 그런가요? 때릴 수밖에 없는데 때리고 싶은 않은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결국 7일이 지나고 홍수가 임했습니다. 그 상황을 벧전3:20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래참고 최후의 통첩까지 하며 기다려주셨건만 겨우 8명만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말세지말(末世之末)로 마치 홍수 심판 D-7일과 같이 종말이 임박한 시기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개인적 종말(죽음)은 언제 어디서나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대비해야 합니다. 남의 인생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생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4] 말세를 사는 성도의 의무 : 믿음 지키기, 복음 전하기
그러면 구체적으로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나 어떤 의미를 감당하며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40일간의 비가 내리기 직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나요? 창7:16 “ ... 하나님이 그(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노아)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구원의 보장을 의미합니다. 굳게 닫으셨습니다.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한 겁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요? 두 가지를 명심하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①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킬 것 :
첫째,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 본문 5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이 방주를 만들라고 하실 때 노아가 100% 순종했습니다. 흔들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주위 사람들은 청천 하늘에 무슨 짓이냐고 조롱하고 야단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방주를 지었습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히11:7은 노아의 이런 행위가 믿음의 증거였음을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
노아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왕따 당한 겁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게 참 힘든 겁니다. 120년 내내 그랬습니다. 특히 마지막 7일 동안은 시험 기간이었습니다. 마귀는 마지막으로 그의 마음을 흔들어보려고 온갖 짓을 다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이 그의 모습을 보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성경 진리를 믿는 것,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복음 진리를 믿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불신자들이 믿는 성도를 가리켜 무식하다고 비난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세계적인 석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라고까지 모욕적인 말을 합니다. 그는 진화론을 주장하는 생물학자입니다. 그의 책「만들어진 신」이 출판되어 수백만 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한글로 번역된 책도 많이 팔렸을 겁니다. 사실 이런 책은 돈도 시간도 아까운데, 변증을 해야 되니까 저도 사서 대충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매사에 창조론자들과 대적합니다.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안경의 문제입니다. 무신론의 안경을 쓰고 보면 하나에서 열까지 진화론이 맞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면 하나에서 열까지 창조론이 맞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과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겁니다. 인간의 수준에서는 네가 맞네, 내가 맞네 하고 싸우지만 결론이 안 납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단이 중요한 겁니다. 진화론자들은 무식하다고 비난하지만, 차라리 무식하다고 조롱당하고 구원받는 게 훨씬 낫습니다. 사실은 무식한 것도 아닙니다. 성경대로 창조론을 믿는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도 나름대로 상당한 학문의 경지에 있는 분들인데 감히 무식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존재 유무, 하나님의 역사의 진위 들은 사실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스스로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인데 무슨 증명이 필요합니까?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 증명 절차 같은 것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처음부터 선포해 버립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믿으려면 믿고 아니면 말고, 안 믿으면 자기만 손해라는 겁니다. 노아의 방주도 그렇잖아요. 결국 믿지 않고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만 손해를 본 겁니다.
화장실에 가끔 낙서를 하는 아이들이 있죠. 한 아이가 벽에다 이런 낙서를 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 니체” 이 낙서를 보고 교회 다니는 아이가 화가 나서 그 밑에 이렇게 썼습니다. “니체야! 네가 죽었다 - 하나님” 이 낙서들을 보고 관리인이 화가 나서 그 밑에 이렇게 썼습니다. “낙서한 놈들 니네 둘 다 죽었다 - 관리인” 우스개소리 같지만, 비진리에 대해 의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합니까?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부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소리를 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구원의 복음을 전파할 것 :
둘째로, 구원의 복음을 열심히 전파해야 됩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특히 7일 동안 한 일이 무엇일까요? 벧전2:5 “ ...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 ... ” 120년은 방주 하나 만들기에는 너무 깁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긴 기간을 주셨을까요? 심판의 유예 기간입니다. 마지막 7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 주신 것입니다. 안타깝게 노아 식구 8명만 구원 받았지만 노아의 전도는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이었고, 아름다운 모델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외칩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in season and out of season) 항상 힘쓰라 ... ” 종말이 가까울수록 복음 전하기 어렵습니다. 이 시대는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복음의 대목(시즌)이 아닙니다. 그래도 사명을 감당하라는 겁니다.
금년 여름에도 우리교회 여러 사역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는 일이 있었고, 교회 외적으로 지역 사회 전도, 농어촌 단기선교, 해외단기선교 등에 힘썼습니다. 이 일에 들어간 돈과 시간을 대충 계산해 보니까 정말 “억!” 소리가 나더라고요. 이렇게 많은 투자를 했는데 과연 얼마나 열매가 있나? 하는 의구심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고 우리는 힘써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일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구원하십니다. 행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노아는 다행히 그 가족들이 모두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도 가족 구원을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영적인 이산가족이 되는 겁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도 복음을 열심히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말세에 더욱 요구되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노아 시대처럼 종말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시기입니다. 특히 임박한 D-7일입니다. 아무쪼록 유일한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세상의 풍조에 흔들리지 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의로운 지도자 노아
창 7장 1~12절 / 이종윤목사
노아는 죄악이 가득한 시대에 살았던 분입니다. 하지만 단절될 뻔한 역사를 이어간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이러한 노아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I. 은혜를 입어 의인된 노아(6:8)
노아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어 의인으로 인정된 분입니다.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먼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의인이 된 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에 선행합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먼저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노아는 성경에 기록된 첫번째 의인입니다. 의인이라는 것은 지도자의 첫번째 덕목으로 지도자는 의인이지 호인이 아닙니다. 또한 노아는 의를 밖으로 전하는 이였으며,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는 완전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분이었습니다.
II. 언약을 받아 비젼을 따라 산 지도자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장차 홍수를 일으켜 모든 것이 다 죽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시며, 노아의 8식구(3아들 부부 + 노아 부부)와 혈육있는 생물 암,수 한쌍씩을 위하여 방주를 짖고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행위의 언약이 아니라 은혜의 언약이었습니다.
노아는 120년간 방주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7일후 홍수가 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비젼에 노아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고통과 멸시와 거절이 있어도 비젼 따라 달려가야 합니다.
III. 믿음을 갖고 희망을 보여준 지도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는 누구든 들어올 수 있었지만 마침내 문은 닫쳤습니다. 그 후 40일간 밤낮으로 비가 왔고, 150일간 물은 땅을 덮었습니다. 노아는 375일간 방주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잊으신 것입니까?
그러나 8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기억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하나님께서는 물을 감해 주셨으며,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8:17)고 하셨으며, 여호와를 위하여 노아가 단을 쌓았을 때 새언약의 무지개를 주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치유의 싸인으로, 고독한 자에게 위로의 싸인으로, 절망한 자에게 용기의 싸인으로, 지친 자에게 안식의 싸인으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지도자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비젼을 따라 추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또한 희망의 무지개를 보고 백성을 위로하고 구원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 우리는 모두 지도자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다 노아와 같은 지도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노아의 홍수
창 7장 1~16절 / 이종윤목사
지난 21일 서울 한복판에 시간당 100mm 집중호우가 쏟아져 293mm의 비 피해로 재산피해를 본 15,000가구가 침수와 인명피해까지 있었다.
노아 홍수는 40주야를 내린 비로 천하가 물로 덮였다.
I. 노아 홍수는 마지막 심판의 예표
메소포타미아 강 근처에만 있었던 지역적 홍수인지 세계를 뒤덮은 우주적 심판인지 물어야 한다.
1. 지역적 홍수설
가)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으며 불가능하다
나) 기식 있는 동물들이 방주에 어떻게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나
다) 지구 표면을 덮으려면 그것도 산까지 덮으려면 지구상 모든 물 용량의 8배가 있어야 한다
라) 그 8배 가량 물이 그 후 어디로 빠져나갔나
마) 물의 양이 불어나면 지구 무게가 증가되어 태양계 궤도가 수정되어야(홍수보다 더 큰 재앙)
바) 바닷물과 민물이 혼합됨으로 식수 문제가 생긴다
사) 모든 동물이 산 넘고 물 건너 어떻게 한 곳으로 모일 수 있나
2. 우주적 홍수설
가) 방주(길이 135m, 넓이 23m, 높이 14m, 면적 937평(3097.52㎡), 3층건평 2812평(9295.87㎡))의 건축 모양이나 크기로 보아 우주적 홍수로 본다.
그러나 동물의 종류가 100만종 이상인데 어떻게 들어갔나?
어거스틴은 각 종류 대로를 위한 크기지 전체 방주는 아니라 해석(하나님이 하신 방법?)
나)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무지개 약속(파키스탄 홍수로 90%가 수해)
다) 노아 홍수 후 다른 사람의 족보는 보이지 않는다
라) 50개 이상의 성경적 근거(우주심판)
`그 터는 하수로 인하여 침몰되었느니라`(욥 22:16)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 위에 섰느니라`(시 104:5-6)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니라...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 24:37-41)
II. 노아 홍수를 막고 있는 므두셀라
므두셀라 이름의 계시성.
1. 므드(죽는다) + 셀라(보낸다) -> 죽었을 때 올 것이다
2. 므드(인간, 남자) + 셀라(무기, 미사일) -> 무기의 사람, 투창의 사람(직역)
므두셀라가 969세 장수한 이유가 있다.
그가 죽어야 홍수가 온다.(사명)
III. 심판 중에도 은혜를 입은 노아
1. 경건한 가문의 신앙 유산을 받은 이
노아 출생시 6명(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므두셀라, 라멕)의 조상이 살아있었다.
셋의 후손으로 신앙유산을 받았다.
(신앙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 때 성공한 사람)
2. 백성의 위인이 된 노아
라멕은 자기 아들을 노아(쉼, 위로, 안위)로 불렀다.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조롱감이었으나 의인이었다.(첫 번째 의인 칭호, 창6:9)
자기 의로운 행실로 의인된 것 아니고 8절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의인이기 때문에 은혜 입은 것 아니고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셨다.
은혜에는 조건이 없다.(롬5:8, 죄인 되었을 때...)
3.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가) 하나님 심판이 올 것을 안 사람
나) 불경죄로 심판이 올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았다
다) 언약을 받은 이
`창 6:18 그러나 너와는 새 언약을 세우리니...`
아담 언약은 시작(창조), 노아 언약은 보전 언약, 아브라함은 약속, 모세는 율법, 다윗은 왕국, 그리스도에게는 이 모든 것이 종합된다.
구약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방주로 불러들일 구원받을 대상은 이미 선정되었다.
하나님 은혜로 택함 받은 이가 구원받는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구원받을 공로가 없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구원이 온다.
IV. 문을 닫으신 여호와
홍수란 궁창 위의 하늘 바다와 궁창 아래 바다의 두 원천의 물들이 합쳐져서 세계를 혼돈 속으로 빠뜨린다.
노아 600세 때 `2월 그 달 십칠일에` 날짜가 명기된 것은 역사성을 보여준다.
1. 조롱과 반대에 부딪혔지만 하나님 명령을 끝까지 겸손히 순종하는 믿음을 지켰다
120년 동안 순종한 노아는 암수 둘씩, 그리고 정결한 짐승(후일 제물로 쓰려고) 암수 7씩 데려와 그 씨를 지면에 보전하라(창7:2-3) 명을 받았다.
비오지 않는데 방주로 들어가 7일간 기약 없이 기다렸다.
깜깜한 궤짝 속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노아는 비웃음, 미련한자, 정신병자 취급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문을 닫으셨고 비가 40일 동안 계속 쏟아졌다.(창7:16)
믿음은 어리석고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다.
2. 신학적 문제가 있다 (창세기 7장에 하나님과 여호와가 둘로 나와 있다)
소위 비평주의자들은(문학비평, 역사비평, 자료비평, 양식비평...) 모세 5경의 모세 기록 사실을 부인한다.
예수님께서 막 1:44에서 레 14:2 인용하며 모세의 글이라 했다.
창 7:16에는 여호와와 하나님(엘로힘)이 한 문장에서 나온다.
창조주 하나님은 엘로힘, 구원주 하나님은 여호와로 주로 쓰였다.
3. 본문이 주는 교훈
가) 방주에 들어간 이들은 안전보장을 받았다
노아 홍수 사건은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구원사도 역사로서의 계시, 계시로서의 역사를 보라.
그리스도 예수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한데 의심하거나 흔들리면 성령께서 근심하신다.(엡4:30)
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여준다
7일 동안 아직도 문은 열려 있다.
하나님은 끝까지 기다리신다.
다) 은혜의 때는 끝나는 때가 있다
10처녀 비유 - 신랑은 반드시 온다, 참고 기다리자.
지금이 바로 올 때다.
하나님 앞에 자기 헌신을 확실히 할 때다.
라) 노아의 믿음과 순종이 그를 구원함에 이르게 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처럼 확실하다.
신앙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약속)을 믿는 것이다.
말씀대로 순종하다보면 곤고, 손해가 오기도 한다.
그러나 신실하게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백성 되라.
맺는 말
1. 하나님의 기억하심이 있어야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기억하사`(창8:1)
375일간 갇혀 있던 노아와 그 일행을 하나님이 기억하셨다.
2. 새 언약을 받아야
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8:20-22)
나)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벌하신다(9:1-7)
다) 무지개로 구원을 약속해 주셨다(9:13, 16)
방주로 들어가라
창 7장 1~5절 / 김 조목사
사단이 최후의 발악을 하며 마지막 때를 고하기에 악이 성행하여 한 치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고 있는 성도이기에 세상을 따라 흘러가는 존재가 아니라 작은 빛이라도 비추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심판이 아니라 창조 때에 심히 좋았던 그대로 보존되기를 더욱 귀하게 여기십니다.(요3:17)
그러기에 120년간에 회개의 기간을 연장하시고 홍수 심판을 예고하시고 방주를 건조하게 하시고 기다리셨으나 끝내 방조하고 불법과 불의와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당을 새롭게 하시려고 최후에 통첩을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앞으로 7일후에 홍수가 시작될 것이니 “너와 네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참으로 안타까운 하나님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 역시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마24:37-39, 벧후 2:5) 그러나 햇빛 쨍쨍한 날에 방주로 들어가는 노아의 식구를 비웃고 조롱하는 그들의 결과는 멸망이요, 심판이었고 방주 안에 있는 모든 동물들과 노아의 식구는 살아서 온전한 보호와 보존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방주로 들어가라” 명령하심은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방주에 들어감으로 생명이 보존되는 복을 받습니다.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하라”(3)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 방주는 온 인류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주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새 삶과 풍성한 삶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되어지기 바라서 “방주로 들어가라”는 말씀 제목삼고 어떤 자가 방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입니다. (1절)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을”이라고 지명하며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배려요,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노아의 행위를 전혀 보지 않은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한다”고(롬3:10,23) 했으니 사람의 의로는 구원 받을 자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하신 것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느니라”(요15:16) 하셨으니 우리가 지금 예배하려 이 곳에 온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은 것 같지만 실상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엡2:8) 하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 사도가 죽기까지 복음 전파하신 것이 “모태에서 창세전에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갈1:15, 엡1:4) 감사와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이여!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여 이곳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인물, 학벌, 재능 보지 아니하시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방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주시어 지키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 사랑 앞에 감사 감격하며 더욱 진실하게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되시기 원합니다.
2. 믿음 있는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1절하)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노아 가족의 의는 절대적인 행위 온전한 의가 아닙니다. 어려운 시대에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뜻대로 살려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해준 것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긴바 된(롬 4:22) 것이니 방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믿음 있는 자입니다. 심판을 예고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방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방주를 건축할 때부터 그 믿음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요 3:16,17)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고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종의 형체를 빚어 오시어 죄 값으로 죽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의 산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질병도 고통도 우리의 슬픔도 주님이 다 져주셨습니다(사 53:4). 믿음으로 불가능이 가능하게 됩니다. 믿음의 기도 병든 자 고칩니다(약 5:15). 믿음으로 구하는 것 다 받습니다(마 21:22). 주 안에 평강 누리시기 원합니다.
3. 순종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5절)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2, 3절에 정결한 짐승, 부정한 짐승에서 공중의 새까지 방주에 다 들여놓고 자기 온 가족이 방주로 들어갔다는 것으로 순종함으로 믿음의 역사를 보인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약 2:7) 하셨는데 노아도 행동적으로 순종함으로 온전한 믿음을 나타내어 방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방주로 들어간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 순조함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복 다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이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삼상 15:22) 하셨습니다. 형식과 의식적이요, 지식적인 믿음으로 책망 받지 말고 설교, 성경 공부 또한 성경을 읽고 묵상 중에 깨달아지는 말씀 순종하며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전파, 기도, 성수주일, 십일조 알면서도 못한다는 것 순종치 못하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처럼(창 12:1-4) 본토 아비 집 떠나라 할 때 떠나야지요, 100세 되어 얻은 아들 드려라 할 때 순종함으로(창 22:)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순종함으로 주 안에서 복 받으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노아의 때보다 더 악해진 시대 말의 모습(마 24:37)을 보며 불안해하고 불신하며 살 것이 아니라 “방주로 들어가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생명도 보존 받고 풍성한 삶도 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받으면서 기뻐하며 참 평안을 얻는 성도되어야 합니다. 방주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있기에 되었으니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며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믿음으로 주 안에 약속하신 평강을 누리시고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릴 복을 다 누리는 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방주로 들어가라
창 7장 1~5절 / 이정선목사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 인간은 늘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규모적인 심판이 처음으로 시행된 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입니다. 특별히 이 심판은 당시의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한 우주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대홍수라는 자연재해의 형태로 다가왔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노아의 홍수는 최초의 자연재해입니다. 그 전에도 태풍이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성경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자연재해가 노아의 홍수입니다. 하나님은 이 자연재해를 사용하셔서 인간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삽니다. 해마다 태풍 앞에 대책없이 당하기도 하고, 지구촌 곳곳에서 지진이 도시와 사람들을 삼켜버립니다. 최근에는 쓰나미의 공포가 지구인들의 커다란 공포로 자리잡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연재해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번에 어떤 분이 쓰나미를 이교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다가 크게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합니다만,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그런 근본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면서 악한 언행을 일삼고 있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쨌든 모든 자연재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런 자연재해들은 역시 인간의 타락과 죄악의 결과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자연재해들이 하나님의 큰 심판의 수단들로 사용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때에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본격적인 재난을 알리는 신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시고 큰 홍수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현대의 첨단문명은 과거에 꿈에 불과하던 수많은 일들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불가능의 영역들이 점점 정복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기술이 진보한다 해도 자연재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현대문명의 부작용으로 더 심한 자연재해를 불러오는 추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능력과 재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셨는데 기지를 발휘해서 모면한다거나 운이 좋아서 피했다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마련해 주시는 대피소로 피하는 것입니다. 소돔 성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을 때, 그 심판을 피했던 사람들은 천사를 따라 나선 롯의 식구들뿐이었습니다. 그나마 롯의 아내는 심판을 피하는 안내를 잘 따르지 않다가 그만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대홍수를 마련하셔서 세상을 심판하기로 하신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을 보존하시려고 대피소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주입니다. 임박한 심판 앞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방주는 지붕이 있는 큰 배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한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은 홍수로 인한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주가 얼마나 고맙고 귀중한 것입니까? 노아가 하는 말을 믿지 않고 그를 미친 영감이라고 놀려댔던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방주 밖에서 허우적대다가 모두 죽었습니다. 아무리 수영을 잘 하고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그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방주라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구원을 준비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방주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글쎄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방주 문을 열어주면서 들어오라고 하면 안 들어올 사람이 없겠지요. 그러나 방주에 들어가는 일은 홍수가 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날씨가 화창하지만, 곧 먹구름이 뒤덮이고 폭우가 쏟아져서 큰 홍수가 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만 방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방주에 들어가는 열쇠는 믿음이었습니다.
방주에는 사람만 탄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물에서 사는 것들은 탈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사슴도 있었고 사자도 있었을 것이고, 독수리나 참새 같은 새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방주는 세계 최초의 동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렇게 많은 짐승들과 새들을 어떻게 다 잡아왔을까요? 성경에 보면 짐승들이 암수 두 마리씩 노아에게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고 했어요.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았는데, 짐승들은 질서정연하게 잘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를 않아요. 사람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지 따르지 않을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가지고 사람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쪽을 선택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지요. 사실 아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선악과를 먹지 않을 수도 있었고 순종하지 않고 먹을 수도 있었는데, 순종하지 않는 쪽을 선택해서 인류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실 때 들어가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방주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구원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교회가 방주라고 말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마련해 두신 기관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합니다(행 20:28).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 이외의 어떤 제도나 기관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방주에 비유됩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은 심판을 면했지만, 방주 밖에서는 아무리 힘이 세고 지혜가 있어도 심판을 피할 방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밖에서는 어떠한 도덕이나 선행, 또는 학문이나 종교로도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즉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여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어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아직 방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거나 주저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설득하든지 억지로 끌고 오든지 해서 이 구원의 방주 안으로 데려오는 것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먼저 방주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가 들어와 있으면서 함께 섬기는 이 교회가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크고 튼튼한 방주가 될 수 있도록 함께 수고하며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교회로 인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크신 은혜가 감격이 늘 충만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
창 7장 1~5절 / 지용수목사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 영원 영원하시도다 영원 영원 영원하시도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계획하심이 놀랍고 놀랍다 놀라우시도다
놀랍고 놀랍다 놀라우시도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보호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베드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설교를 한다면 어떤 말씀을 전하겠습니까? 자기 말을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제 이야기를 합니까? 성령으로 주의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바울이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하며 설교를 들어도 괜찮습니다. 성령님께서 저를 통하여 말씀하시니 설교를 하는 저도 설교를 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이나 세계 도처의 관광지, 특별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아이의 허리에 줄을 묶어 그것을 잡고 다니는 부모들을 때때로 볼 수 있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나 자녀를 잃어버릴까 봐 조심하는 부모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자녀를 잃어버리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잃어버린 후 찾기도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해서 아픈 가슴을 간직하고 사는 부모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기도도 해야 하지만 조심도 해야 합니다.
저도 부산 송도 해수욕장에서 큰아들을 잃어버려 놀란 적이 있습니다. 수영복 차림으로 미친 듯이 바닷가를 뛰어다니며 아이를 찾았습니다. 혹 아이가 바다에 빠져 죽었으면 시체라도 건지려고 바다 밑을 발로 헤집기도 했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나요? 하나님!”
그러자 부모님께 잘못한 죄가 생각나고 동시에 바다 방송국에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끝내고 그곳으로 달려가 아나운서에게 “여기 지성이라는 아이가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으니, 성은 모르고 이름은 지성이라는 아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니 장교 부인들이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저를 보더니 “아빠!” 하며 달려와 매달렸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다 쉬어 있는 그 아이를 안는 순간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만일 그때 큰아들을 찾지 못했으면 저의 가족이 지금도 얼마나 아픈 가슴으로 살겠습니까? 그리고 제 큰아들은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서울의 한 목사님은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가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어린 딸을 잃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공원 어딘가에 있겠지.’하며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서울의 모든 경찰서와 파출소를 다 뒤졌지만 아이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양해를 구하고 기도하면서 서울에 있는 모든 고아원과 어린이 보호소를 다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딸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경기도 주변의 모든 고아원과 어린이 보호소를 찾아다니다 삼 개월만에 한 고아원에서 어린 딸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만일 그 딸을 찾지 못했다면 그 아빠와 엄마는 지금도 아픈 가슴으로 살 것이고, 그 아이는 고아원에서 아빠 엄마를 그리워하며 살 것입니다.
자식을 잃은 아빠와 엄마는 미친 듯이 자식을 찾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자식을 잃은 아빠 엄마처럼, 목이 말라 시냇물을 찾아 뛰어다니는 사슴처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대상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하나님께서 의인을 얼마나 찾으시는지 모릅니다.
본문 1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노아 당시에 노아 외의 모든 사람이 방탕하고 음란하고 막 살아서 그것이 하나님께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의롭게 사니 하나님께서 노아를 보시고 “노아야, 네가 의롭구나.” 하시며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시편 15편에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할렐루야!
정직하고, 공의를 행하며 의롭게 사는 자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 시대에 너의 의로움을 보았노라.”
“내가 이 시대에 지용수 목사의 의로움을 보았노라.”
“내가 이 시대에 ○○○ 집사의 의로움을 보았노라.”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 앞에 이렇게 칭찬 받는 의로움이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세계 교회를 다녀 봐도 우리 교회의 장로님, 우리 교회의 교인들 같은 분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 교우들처럼 착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드뭅니다. 그러나 더욱더 빛나는 의인, 더욱더 빛나는 우리 양곡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여기에 우리 이름을 넣어 봅시다.
“○○○는 의인이요, 이 시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했다.”
우리는 의로워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매력 있게 보이려고 옷도 챙겨 입고 몸도 다듬고 얼굴에 화장도 합니다. 그런데 옷은 나만 위해 입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도 입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지금 잠옷을 입고 나와서 설교한다면 여러분이 얼마나 불쾌하겠습니까? 그러니 옷을 입을 때는 나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배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 사람의 눈에 들었다 해도 그것은 별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 들어야 최고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눈에 들려면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의로운 사람이 됩니까?
그것은 아주 쉽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빛을 받는 것입니다.
공부하기는 어렵고 몸의 체중을 줄이는 것도 어렵고 계속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맞추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맞추기는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장난감을 좋아합니다. 한 권사님이 제 손자에게 이만 원을 주었더니 그냥 버리더랍니다. 그 아이에게 십억 원짜리 수표를 주어도 버릴 것입니다. 아이들은 장난감이나 과자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나이에 따라 장난감의 수준도 달라지다가 더 자라면 장난감을 좋아하지 않는 때가 옵니다. 사람의 취향,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태양 빛을 받아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의롭게 됩니다.
노아가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빛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 멋대로 살았다면 의로워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회개하면, 요한일서 1장 7절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다 씻어서 의롭게 됩니다. 동시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듯이 우리도 성령 하나님과 동행할 때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지 40일 만에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으니 약속을 어기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은 내가 너희와 함께 걸어다니지만 그 날에는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과 짝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님, 예수님과 항상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8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가 죄를 지으려 할 때는 ‘그건 죄야.’라며 책망하셔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가 악을 행하려 할 때는 ‘그 악을 행하면 심판을 받는다.’라고 하시며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다. 의를 행해라.’ 하시며 의를 행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은 악이야. 그것은 심판을 받을 일이야. 이것이 의야.’라고 알려 주시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생각나게 하셔서 우리 모두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속에서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언제나 부딪칩니다. 마치 전쟁터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살면 육신의 본능이 억제되고 의인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세상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그대로 살면 우리가 아주 부끄럽고 초라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령을 좇아 살면 예수님처럼, 천사처럼 거룩한 의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늘 함께 계십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언제 어디에서나 자꾸 대화를 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성령님은 탁월한 상담자(The wonderful counselor)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살이, 사업, 직장생활 등 모든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 인도대로 살면 의롭게 됩니다. 의인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어떤 복을 주십니까?
날마다 대화를 하십니다.
“노아야, 방주를 만들어라. 저 산에 잣나무가 많지? 저 산에서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어라.”
“하나님, 물이 새면 어떻게 합니까?”
“방주 안팎을 역청으로 칠해라.”
“노아야, 방주 안으로 동물들을 들여라.”
“아이고, 4만 5천 마리 정도나 되는 동물을 어떻게 방주에 집어넣습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가 보내 줄게. 그리고 370일간 먹을 양식을 준비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노아가 다 준비했습니다.
“이제 너와 네 식구들이 다 방주로 들어가라. 그리고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두 쌍씩, 하늘의 새도 일곱 쌍씩 방주로 들어가게 해라.”
정결한 짐승은 왜 일곱 쌍입니까?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짐승을 잡아 예배를 드리면 정결한 짐승의 씨가 보존되지 않기 때문에 그 씨를 보존하기 위해서 일곱 쌍씩 방주로 들인 것입니다. 또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다음부터 하나님께서 동물도 사람들의 음식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것도 이유가 될지 모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항상 영적인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그래, 왜?”
이런 대화가 자꾸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이 받는 복입니다. 의인은 혼자 걷지 않고 늘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의인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십니다.
모든 사람이 홍수로 망할 때도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이 방주로 들어간 칠 일 후부터 사십 일간 홍수가 내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노아와 그 가족은 살았습니다.
의인이 천국에 가는 것은 과거에 이미 받은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는 다 가지만,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비롭게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 교회의 한 집사님이 제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집사님이 지난 금요일에 점심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허리에 통증이 와서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요로결석이라고 하더랍니다. 결석 통증은 아기를 낳는 것보다 더 괴롭다고 하는데 집사님의 통증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수술을 빨리 받고 싶었지만 다음 날이 주말이라 월요일에 수술을 하기로 하고 진통제만 받아 왔답니다. 주일날 집사님이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면서도 고통을 참느라 혼났는데 하필 그날 집사님의 남선교회가 식당 봉사를 하는 날이더랍니다. 식당 봉사를 못하고 쉬고 있는데 그 날 따라 남선교회원들의 숫자가 부족하여 할 수 없이 한 손으로는 허리를 잡고 한 손으로 설거지를 했답니다. 집으로 가면서 ‘오늘은 저녁 예배에 도저히 못 오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달란트 기도 시간에 기도해 보자. 부르짖어 기도하여 치료 받아야지.’하는 감동이 왔답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달란트 기도 시간에 허리를 붙잡고 소리쳐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가 수술 받지 않고 낫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 직접 치료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한 후 통증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팠답니다. 그런데 월요일에 수술을 받으러 가서 사진을 찍으니 결석은 다 없어졌고 결석이 있었던 자리만 부어 있다고 하더랍니다. 할렐루야!
이런 일을 겪는 것은 없었던 일보다 더 좋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증거가 있으니 그 집사님의 믿음이 더 강해진 줄로 믿습니다.
「너 가는 길을 누가 비웃거든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어라」 할렐루야!
우리가 병이 났거나 집안에 어려움이 왔을 때, ‘이러다 나 죽겠네.’ 하는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구하여 구원 받기를 바랍니다.
사냥을 좋아하는 한 분이 함께 회사를 경영하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회사는 부도나고 친구는 떠나갔습니다. 그분은 여차하면 자살을 하려고 사냥할 때 쓰던 엽총을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다녔답니다. 그러다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매달렸답니다.
“하나님! 구원해 주세요. 하나님! 구원해 주세요.”
그 후 사업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모릅니다. 큰 경영주가 된 그분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친구가 떠나간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구원해 주십니다.
시편 118편 15절, 16절에 말씀하십니다.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제가 이 말씀을 읽는 동안에 다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손이 한 번 권능을 베푸신 후 떠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집 위에 계셔서 어려움을 당하면 또 권능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일생 하나님의 손이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집에는 하나님의 좌편 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좌편 손은 심판하는 손이요, 채찍질하는 손입니다. 그 좌편 손이 아니라 구원해 주시는 의로운 복된 손이 의인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집에 하나님의 의로운 손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의로운 손이 있는 줄 믿습니다.
지난번 경산에서 열차 사고가 났을 때의 일입니다. 모 권사님이 딸네 집에 다녀오시면서 손녀를 데리고 기차에 타셨는데 손녀가 갑자기 칭얼대며 “할머니, 할머니. 앞으로 가요.”라고 했습니다. 권사님이 “얘야, 여기가 우리 자리다.”라고 하는데도 손녀가 막무가내로 권사님을 끌고 앞으로 갔습니다. 아이에게 못 이겨 앞차로 옮기자마자 열차가 탈선하여 처박혔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앞 칸으로 옮긴 덕분에 무사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압니까? 하나님께서 아이를 통하여 그 권사님을 구원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그런 구원이 많습니다.
저희 딸애가 성지여고 다닐 때 겪은 사건입니다. 집으로 오는 36번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경아!”하고 중학교 동창생이 부르더랍니다.
“○○야, 얼마나 오랜만이냐? 반갑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느라 그 차를 보내고 다음 차를 타고 오다가 그 앞차가 사고 나서 아이들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았답니다. 경이가 집에 오더니 “아빠,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주셨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섬세하십니다.
우리가 의의 길을 걸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형통하게 하십니다.
노아가 얼마나 형통했습니까?
농부가 방주를 짓는데도 형통했습니다. 잣나무와 역청이 부족하지 않았고, 방주를 만들다가 사고도 없었고, 양식을 다 구할 수 있었고, 방주에는 물 한 방울 새지 않았고……, 이렇게 노아가 하는 일은 다 형통했습니다.
이사야 26장 7절에 말씀하십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하나님은 정직하신 분으로 정직한 자의 길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정직한 마음을 품고 살면 우리 앞길에 대로를 열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언 16장 17절에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니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의로운 길을 가면 대로가 열립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 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의로운 길로 잘 달려가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길로 가도 혹 오해를 받아 다니엘처럼 사자 굴에 들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건져 주시고 오히려 그 일로 우리의 정적을 다 없애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24장 16절에 말씀하십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의인은 형통하게 되지만 혹 불통한 일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의의 길로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한 것은 의인은 가족도 구원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지만 노아의 세 아들 중 한 아들은 악인입니다. 그래도 아버지 때문에 모든 아들이 다 살았습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
노아의 아들들이 멸망당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내가 의로우면 내 아들딸이 복을 누린다.”
명심해야 됩니다. 내가 악하게 살면 내 아들이 병들고 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간음하니 아들이 죽었습니다. 죄는 아버지가 지었는데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어린 핏덩이 아기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데려가셨을까요? 부모인 우리는 자식이 아프면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없나?’ 하고 살펴야 됩니다. 내가 악하게 살면 내 자식이 하나님의 채찍을 맞고 내가 의롭게 살면 내 자녀도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시편 112편 2절에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의로우면 자녀가 강성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녀를 위해서도 우리가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18장 22절에서 33절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성에 의인 열 사람만 있으면 그 성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도 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성을 사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결국 나라가 잘 되는 길은 의인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고,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서 그들도 의로운 백성이 되면 우리 나라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신명기 30장 15절에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따라 합시다.
“내 앞에는 항상 두 길이 있다.”
우리 앞에는 항상 두 길이 있습니다. 한 길은 성령을 따라 의롭게 사는 길이고, 다른 길은 본능을 따라 죄를 지으며 사는 길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길로 가면 내가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형통하게 되고 내 자녀도 잘 되고 내 도시와 나라도 잘 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인과 프랑스인과 유태인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감옥의 법은 죄수가 원하는 것을 하나만 그 안에 넣어주게 되어 있답니다. 그래서 담배를 원하는 미국 사람에게는 담배를, 예쁜 여자를 원하는 프랑스 사람에게는 예쁜 여자를 그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유대인은 전화기를 원하니 그것을 주고 외부와 통화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삼년이 지나 그들이 출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은 양 귀와 코에 담배를 끼워 넣고 입에는 담배를 물고 뛰쳐나오면서 “불불불불” 했습니다. 담배만 주고 불은 넣어주지 않아 삼년 간 담배를 보면서도 피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사람은 미인과 함께 아이를 안고 나왔습니다. 그 남자와 여자가 각각 아이를 한 명씩 안고 나왔는데 보니 그 여자의 뱃속에 또 아이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나오면서 간수에게 “전화기를 설치해 주어서 고맙소. 내가 회사와 전화로 통화할 수 있어서 그 동안에 우리 회사가 200%나 성장했소. 고맙소. 내가 그 보답으로 당신에게 롤스로이스를 선물하겠소.”라며 그 비싼 자동차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담배를 선택한 결과, 여자를 선택한 결과, 전화기를 선택한 결과가 이렇게 달랐습니다.
선택은 내가 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 결과가 이렇게 달라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죄의 길을 택하면 심판을, 저주를 받습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함께 고생하게 되고, 내가 사는 도시와 나라도 화를 입게 됩니다. 내가 의로운 길로 가면 내가 잘 되고 내 자녀가 잘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또 내가 사는 도시가, 세상이 잘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좇아 의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이 저와 여러분 집에 항상 머물러 있기를 축원합니다.
구원받은 가정
창 7장 1~16절 / 박조준목사
가정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선물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육신과 정신의 안식처입니다. 세 상의 보이는 어떤 조건과 환경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가정이 행복할 때에만 그것이 축복 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단위입니다. 가정이 건전할 때 사회가 건전하게 되고 가정이 파괴될 때 사회는 그만큼 불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불화한 가정에서 나간 사람 이 자기가 일하는 데서 바로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대 개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옛 글에 가화만사성(家和万事成)이란 말은 퍽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이 화평헤야 무엇이든지 잘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한 잠언에도 비슷한 뜻을 가진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 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가정은 화목의 상징입니다. 이 화목이 깨어질 때 가정에서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 대로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에덴 동산 낙원에서 쫓겨난 후 제일 먼저 당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아들 가인과 아벨 사이가 좋지 않아서 구체 적으로 말하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하여 쳐죽였습니다. 부모로서 가슴에 못을 박는 쓰라 림은 자식이 부모보다 세상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오래 사는 수(壽)가 오복(五 福) 가운데 첫째 복에 들지마는 수즉다욕(壽卽多辱)이란 말이 있는 것이 사람이 오래 살다 보 면 자식을 앞세우는 욕을 당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하물며 미워하여 형이 동생을 쳐 죽였으니 그 부모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자녀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여기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셨는데 여러분이 부모에 게 효를 다하는 것은 잘 대접하고 공경하는 것도 필요하지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 앞에 서 형제지간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모범적인 가정, 구원받은 가정, 노아의 가정에 대 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을 만드신 세상이 처음 만드실 때에는 아주 좋았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점점 나빠졌습니다. 처음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였고 만물을 다 지으시고 나중에 인간을 지으신 다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인간이 그만 타락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 어 세상은 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고 자기의 본분을 다할 때는 아름답고 좋으나 그 본분을 다하지 못할 때 더러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꽃이 아름다우나 꽃이 피어 아름답고 향기를 발할 때 좋은 것이지 꽃이 지면 썩어지고 냄새를 내는 것입니다. 짐승도 살아서 움직일 때 요긴하고 귀엽지 병들고 죽어지면 썩은 냄새 밖에 날 것이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더욱 그러합니다. 살았을 때 아름답지 병들고 죽으면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사람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시체입 니다. 그래서 멀리 묘지에 깊이깊이 묻어버리고 맙니다. 짐승이 죽은 것은 거름이라도 하지만 사람이 죽은 것은 아무데도 못씁니다.
육체 뿐만 아닙니다. 영혼이 있기에 사람은 귀한 것인데 이 심령이 살아 있을 때에야 사람답게 살고 사람으로서 의 고귀한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데 그 심령이 죽어 놓으면 세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입니 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 인간의 심령이 타락해 놓으니까 만물이 탄식할 정도로 악해졌습니 다.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 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인간이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할 때 그때에는 하나님에게 큰 근심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가는 길이란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입니다. 아무 리 그 지혜가 비상하고 문화를 발전시킨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길로 걸어가 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 위에서 모든 인간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새들까지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이 소위 물의 심판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아 때 홍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이 악해서 하나님에게 근심이 될 지경이요,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 할 지경에 이르렀지마는 전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세상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였습니다. 악인들이 세상 을 잡고 흔드는 세상이었지만 의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거역하는 사람이 땅에 가득 했으나 그래도 그런 중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노아였습니다. 이 얼 마나 귀한 일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대로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시면서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 주를 만들되 그 안에는 칸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하시고 그 방주의 규격까지 그 모양을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행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의 믿음이 아닙니까?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믿었습니다. 노아가 500살이 되었을 때인데 이제 이 땅을 홍수로 멸하시겠다고 하시니 생각해보면 과거 수 천년 동안 이런 일이 없었는데, 더구나 내가 500년을 살 때까지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하며 이 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믿은 것 뿐입니다. 믿을 뿐만 아닙니다. 그대로 행했습니다. 큰 배를 지었습니다. 산에서 잣나무를 가져다가 짓는 큰 공사였습니다. 그것도 1년, 2년 정도의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120년이란 기간이 걸렸 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큰 방주를 바닷가에서 짓는다면 몰라도 바다와는 먼 육지에 배를 짓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노아가 하는 일에 함께 시키는 대로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 은 하루에 얼마씩 품값을 받기 위해서 일한 것 뿐이고 그들에게 믿음이 있어서 노아처럼 하나 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우리 짐작이지만 노아의 지시에 의해서 품삯을 받고 일을 하면서도 노아가 잠시 떠나 기만 하면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노아를 흉보았을 것입니다. 흔히 젊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 영감님 망 령이셔, 저 할머니 노망이셔 합니다. 아마 노아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만 앉으면 노아는 듣지 못하게 저희들끼리 저 영감 이 아마 이젠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 같아 그까짓 것 우리는 일하는 자리가 생겼으니 상관할 것 없지마는 아니 이런 큰 배는 무엇하러 이렇게 만들지? 더구나 이런 배를 어떻게 바다에 끌 고 가지? 뭐 이제 얼마 있으면 그 영감님 말대로 하면 큰 홍수가 난다고 하는데 홍수나면 산 으로 올라가면 될테지 무엇 때문에 이런 물질과 시간의 낭비를 하는가 말이야. 아 그러기에 망령이라잖아. 우리야 굿이나 보다 떡이나 먹으면 될 것 아니야, 글쎄 그건 그렇고, 저 노아 영감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하는데 우리가 어쨌다는 거야. 아 그러면 우리도 자기처 럼 이런 미친 노릇하며 살라는 건가? 이런 대화 끊이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이건 제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 보면 노아의 날에, 노아가 방주를 예비 하는 날에 오래 참고 기다렸으나 순종치 아니하다가 멸망하였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그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 지 아니하였습니다. 망령으로만 여겼습니다. 노아와 그 당시의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노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노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처럼 섬기며 살 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는 것만 위해 살았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을 애써서 하나님 을 위해 일했으나 그의 여덟 가족 외에는 모두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예나 지금이 나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작은 무리(minority)입니다. 노아는 그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 장차 멸망당할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불 쌍히 여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노아의 가정을 동정하였습니다. 그 당 시의 모든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헛소리로 들었습니다. 그저 늙은이의 망령으로 여겼습니다. 악한 세대의 특징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습니다. 왜요?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요, 비과학적이니까요. 전에 소돔성에 있던 롯의 가정을 하나님의 사자가 건져낼 때 네 식구 그러니까 롯의 처와 두 딸 그리고 정혼한 두 사위를 빨리 데리고 소알까지 피하라고 하였으며 이제 곧 하늘에서 불이 내려 이 소돔성이 망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이 사실을 롯이 자기 사위감 될 사람 들에게 말했더니 그 사위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어요? 창세기 19장 14절에 롯이 나가서 그 딸들 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 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고 하였습니다. 진리를 말하나 농담으로 여기는 세대는 악한 세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떻 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롯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던 두 사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교역자들이 생활비를 받아가며 농담이나 하고 쓸데 없는 공갈이나 하는 것입 니까? 그것을 위해 있습니까? 롯의 말이 농담이었습니까? 노아의 말이 공갈이었습니다. 더구 나 롯의 아내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사자가 소돔성을 떠나갈 때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돌아보다가 어떻게 되었어요? 소금기둥이!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하라면 하고, 가라면 가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서라면 서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 문에서 행복한 가정, 축복받은 가정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가정입니다. 본 문 7절에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600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 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노아의 가정이 홍수가 나서 집에 물이 들어 올 때 방주에 들어갔습니까? 아닙니 다. 비도 오기 전에 날이 흐리지도 않을 때 그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시므로 들어갔습 니다. 아마 사람들은 비웃었을 것입니다. 저거 미친 것들 좀 보게. 저 큰 배 속에 들어가는 것 좀 보게. 뭣하러 저러지, 늙은이는 망령이라 하더라도 그 자식들은 왜 저러지? 젊은 것들 이 이성(理性)도 없나? 그것도 부전자전(父傳子傳)인가? 아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어떤 사람은 말했을는지 모릅니다. 아 이게 정말 노아 영 감님이 말하던 홍수인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사람이 살다보면 맑은 날도 있고 비오는 날도 있지, 오늘이 처음인가? 사흘, 나흘 계속되니, 이거 정말 장마가 오나 하고 말했 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 나서 집에까지 들어오니까 이번엔 큰 장마라고 하면서 언덕에 피했습 니다. 물이 언덕을 넘으니까 큰 홍수라고 하면서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노아 의 경고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노아의 가정은 어떠하였습니까? 온 가족이 믿었습니다. 말씀대로 따라 순종 했습니다. 온 식구가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 이상 큰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 가정에 서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아직 그리스도 밖에 살며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은 안계십니 까? 이것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어떤 자매님은 믿음으로 살면서 그의 자녀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남편이 아직 주님의 약속에 대하여 외인이므로 가슴 아파 합니다. 어떤 형제는 그 부모님이 아직 하 나님 없이 그리스도도 모르고 살므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말 고 계속 기도합시다. 반드시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도할 제목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긴급한 것이 무엇입니 까? 내 가정이 먼저 다 함께 구원의 반열에 참여하기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노아의 가정 은 축복받은 가정이었습니다. 온 식구가 다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이 노아의 가정 처럼 되기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사는 내 남편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내 자녀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내 부모를 위해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