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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삽관(蘆花揷冠)
갈대꽃을 관에 꽂다는 뜻으로, 비밀리에 찬성 여부를 확인한다는 말이다.
蘆 : 갈대 로(艹/16)
花 : 꽃 화(艹/4)
揷 : 꽂을 삽(扌/9)
冠 : 갓 관(冖/7)
비밀리에 모여 어떤 결의를 할 때 자신들의 편인지 반대하는 측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럴 때 동의 반대를 알아보는 행위로 좌단(左袒)이란 말이 있다. 왼쪽 소매를 걷는다는 뜻이다.
중국 전한(前漢)때 여후(呂后)의 국정농단을 뿌리 뽑기 위해 공신 주발(周勃)이 내린 지령에서 나왔다.
군대를 모아놓고 왕실 바로잡기에 찬성하는 사람에게 왼쪽 소매를 벗으라고 하자 모두 호응하여 거사에 성공했다.
이와 유사한 고구려(高句麗) 때의 이야기도 있다. 갈대꽃(蘆花)을 모자에 꽂으라(揷冠)는 말로 어떤 일에 찬성 여부를 비밀리에 확인하는 일을 뜻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정사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7에 실린 고구려 15대 미천왕(美川王)의 옹립 이야기는 손에 땀을 쥘 만큼 흥미진진하다.
서기 280년 13대 서천왕(西川王, 재위 270~292) 때 만주의 숙신(肅愼)족이 변경을 침략해 백성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여러 신하의 추천으로 서천왕은 아우 달고(達賈)를 대장으로 삼아 퇴치하도록 했다. 달고는 뛰어난 지략으로 이들을 물리치고 그 지역의 여러 고을을 평정하자 백성들은 침이 마르도록 그의 공을 칭송했다.
서천왕이 죽고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봉상왕(烽上王, 재위 292~300)은 평판 좋은 숙부 달고와 왕의 아우 돌고(咄固)를 누명을 씌워 처단했다.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화를 피해 피신하여 고용살이와 소급장수 등 온갖 고생을 다했다.
봉상왕이 사치와 향락으로 인심을 잃자 국상(國相)으로 있던 창조리(倉租利)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왕손 을불을 찾게 했다.
뱃사공으로 변신한 을불을 찾아 도성에 숨겨놓고 왕의 사냥 때 창조리는 거사를 선언했다. "나와 뜻을 같이 할 사람은 따르라고 하며 갈대 잎을 관에 꽂았다(與我同心者 効我 乃以蘆葉揷冠)."
학정에 지친 군사와 백성들이 너도나도 갈대 잎을 꽂으니 창조리 이하 중신들은 바로 왕을 폐하고 을불을 모셔 와 옥새와 인수를 바쳤다.
15대 왕이 된 미천왕(재위 300~331)은 현도군(玄菟郡), 낙랑군(樂浪郡) 등 한사군(漢四郡)을 빼앗아 국토확장에 큰 업적을 남겼다.
민심과 동떨어진 악정을 펼치던 왕은 백성들에 의해 쫓겨났다. 고구려 때의 이런 교훈을 잊었던 오늘의 우리나라도 경험한 일이다.
⏹ 미천왕(美川王, 300〜331)
소금장수 을불, 고구려 15대 왕이 되다
고구려 15대 미천왕(美川王)은 매우 특별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 그는 왕이 되기 전 소금장수였다. 어떻게 임금의 손자가 소금장수가 되었다가,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1. 큰아버지를 피해 궁궐에서 도망치다
초기 고구려에는 힘센 5부족이 있었다. 왕위는 소노부에서 배출되다가, 계루부로 교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차츰 계루부의 힘이 커져, 다른 부족에서 넘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제 왕위는 계루부 왕실 내에서 다투게 되었다.
248년 12대 중천왕의 두 동생 예물과 사구가 반란을 일으키다가 죽임을 당한 일이 벌어졌다. 임금에게 동생이란 언제든지 자신의 왕위를 넘볼 수 있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왕이 자신의 동생을 죽인 사건은 세계 역사에서 자주 있던 일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중천왕 시기만이 아니라, 그 아들인 서천왕 시기인 286년에도 왕의 동생인 일우와 소발의 반란 모의 사건이 벌어졌다.
서천왕은 이 계획을 미리 알고, 동생들을 잡아 죽여 버렸다. 연이어 터진 반란 사건은 서천왕의 아들인 상부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은 인물로 성장했다.
292년 서천왕이 죽자, 상부가 왕위를 계승하여 14대 봉상왕이 되었다. 봉상왕은 가장 먼저 작은 아버지인 안국군 달가를 의심했다. 달가는 280년 숙신족과 전쟁에서 승리한 명장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왕실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인 만큼 그에게는 두려운 정치적 라이벌인 셈이었다. 봉상왕은 즉위 후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아 사람을 시켜 달가를 죽여 버렸다.
봉상왕은 한 걸음 더 나가 자신의 동생인 돌고가 반역의 마음을 품었다고 죽였다. 왕의 동생이 연이어 3대째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돌고의 아들인 을불은 살아남기 위해 몰래 궁궐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2.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한 을불
궁궐을 나와 갈 곳이 없던 을불은 수실촌에 사는 음모란 자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음모는 을불이 왕의 조카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그에게 심한 일을 시켰다.
음모가 “을불아, 연못에서 개구리가 몹시 요란하게 울어서 잠을 청할 수가 없구나. 네가 연못에 돌을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도록 해라.”
을불은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 등 열심히 일을 하고, 밤에도 돌을 연못에 던지어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해야 했으므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개인적인 자유도 없는 노예생활과 다름없는 머슴살이가 너무 괴로워 을불은 1년 만에 그 집에서 나오고 말았다.
을불은 동촌 출신 재모와 함께 소금장수를 했다. 소금은 해안가나 내륙의 소금 연못 등지에서만 나는 것이지만, 누구나 먹어야만 하는 것이기에 내륙에 사는 사람들은 소금을 소금장수에게 사야만 했다.
을불은 서해안에 있는 염전에서 소금을 받아다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소금을 팔러 다녔다.
3. 도둑으로 몰린 을불
그러던 어느 날 을불은 배를 타고 압록강변에 이르러, 사수촌의 한 노파의 집에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노파는 을불에게 하룻밤을 재워주는 대가로 소금을 요구하였다. 을불은 노파에게 소금 한 말을 주었다.
그런데 노파는 욕심을 내었다. “이봐 젊은이, 소금을 좀 더 줄 수 없겠나.”
을불이 “숙박비로 소금 한 말을 드린 것은 많이 드린 것입니다. 더 달라시면 저는 어떻게 장사를 합니까.”
소금을 더 주지 않자, 노파는 화가 나서 을불 몰래 자신의 신발을 소금 속에 넣어두었다. 을불은 이를 알지 못하고, 다음날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노파가 쫓아와 소리를 쳤다. “이놈의 도둑놈. 거기 서라. 남의 신발을 왜 훔쳐 가는 것이냐. 내 신발 내놔라.”
을불은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노파는 을불의 소금 속에서 신발을 찾아내었다. 노파는 을불을 압록태수에게 고소했다.
압록태수는 을불이 도둑질을 했다고 판결하고, 신발 값으로 소금을 받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는 몽둥이로 매를 맞는 벌을 주고 풀어 주었다.
소금장수를 할 수 없게 된 을불은 이후 거지처럼 살아야 했다. 누가 보더라도 왕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4. 폭군 봉상왕을 몰아낸 창조리
한편, 봉상왕은 사치를 즐겨 궁궐 짓기를 좋아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을 때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성들을 불러다 궁궐 짓는 일을 시켰다.
국상(국무총리에 해당)인 창조리가 공사 중지를 간청했지만, 왕은 국상인 백성의 인기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핀잔을 주며 듣지 않았다. 봉상왕은 한편으로는 사람을 시켜 자신의 왕위를 넘볼 경쟁자인 조카 을불을 찾아내 죽이려고도 했다.
거듭된 흉년에도 왕이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정책을 지속하자 창조리는 여러 대신들과 상의하고 난 후 봉상왕을 몰아내겠다는 결심을 했다.
창조리는 다음 왕으로 을불을 모시기로 하고, 조불과 숙우 두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았다. 이들은 비류하에서 배를 타고 있던 을불을 만났다. 을불은 거지와 다름없는 몰골을 했지만, 행동은 의젓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조불과 숙우는 을불에게 나가 절을 하며 물었다. “지금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여, 국상을 비롯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을불님은 인자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심성을 지니셨으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만하시니, 저희들이 모시고자 합니다.”
을불은 봉상왕이 보낸 무리에게 쫓긴 바도 있었으므로, 그들을 쉽게 믿지 못했다. “저는 시골 촌부에 불과하오. 왕손이 아니니 다시 자세히 보시오.”
하지만, 숙우 등은 을불의 행동과 말이 왕실의 자손임을 분명하게 알았다. “지금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간절히 이 나라 백성들을 위하여 을불님이 나서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니 저희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마침내 을불은 이들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였다.
서기 300년 9월 봉상왕은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 창조리는 사냥에 따라나온 여러 대신들에게 말했다.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나처럼 갈댓잎을 모자 위에 꽂아 주시오.”
창조리는 여러 대신들이 자기와 같은 뜻을 가졌음을 알고 마침내 봉상왕을 왕위에서 몰아냈다. 봉상왕을 별실에 가두어 두었고 군사들로 그 주위를 지키게 했다.
봉상왕은 신하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봉상왕의 두 아들도 따라 죽었다.
창조리는 을불을 모셔다가 옥새를 바치고 왕으로 즉위하도록 하였다. 소금장수였던 을불은 마침내 고구려 15대 미천왕이 되었다.
5. 고구려 영토를 넓힌 미천왕
미천왕은 왕위에 오른 후, 영토를 넓히는 일에 열심이었다. 당시 고구려의 상대는 진나라였다. 진나라는 사마염이 세운 나라로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280년 오나라마저 멸망시켜 중국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다.
하지만, 불과 20년이 지나지 않아 8왕자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미천왕을 이를 놓치지 않고 302년 직접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진나라의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인을 잡아서 평양으로 데려왔다.
또 313년과 314년에 각각 진나라의 낙랑군과 대방군을 쫓아버렸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차지했던 진나라와 동방의 여러 국가와의 중계무역의 이익을 뺏을 수 있었다. 아울러 평양주변과 황해도 일대의 넓은 평야 지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당시 고구려에는 철제 농기구와 소를 이용한 농사방법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새로운 농경지에서 보다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고구려는 미천왕 시기에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미천왕은 더욱 영토를 넓히고자 했지만, 이때 방해자가 등장했다. 그것은 요서 지역에서 성장한 모용선비였다. 이들은 봉상왕 시기에도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해 온 적이 있고, 심지어 몰래 병사를 보내 서천왕의 무덤 속에 있는 보물을 훔치려다가 실패하고 도망간 적도 있었다.
미천왕은 모용선비를 미워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모용선비는 317년 진나라(서진)가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는(동진) 과정에서 혼란에 빠진 한족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크게 키우고 있었다.
새로 진나라에서 임명된 평주자사 최비는 모용선비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불만을 갖고 319년 미천왕에게 사신을 보내왔다. 최비는 고구려가 우문선비, 단선비와 함께 모용선비를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모용선비를 멸망시킨 후 그 땅을 나누어 가지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미천왕은 최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천왕은 이 기회에 요하를 건너 영토를 넓힐 수 있고, 서쪽 국경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곧 군대를 보냈다.
고구려군은 요하를 건너 대릉하 주변에 위치한 모용선비의 수도인 극성을 공격했다. 단선비와 우문선비도 군대를 보내어 연합공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연합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모용선비의 계략에 빠져 고구려와 단선비는 우문선비가 모용선비와 비밀리에 협조하는 것이라고 의심하고 군대를 철수하고 말았던 것이다.
모용선비는 홀로 남은 우문선비를 공격해 물리치고, 이 작전을 계획한 당사자인 평주자사 최비를 붙잡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서 공격했다. 최비는 두려워서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로 도망쳐왔다. 그 결과 진나라의 평주지역은 모용선비가 차지하고 말았다.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연합작전이 실패하는 바람에 모용선비를 격파하지 못했고, 요하를 건너 서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고구려 역사에서 아쉬운 순간이었다.
당시 북중국 지역에는 5호 16국 시대가 막 개막되고 있었다. 진나라는 강남으로 쫓겨난 상태라 어떤 세력이라도 이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모용선비가 가로막아 서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미천왕은 이후 자주 모용선비를 공격했지만, 이미 힘이 커진 이들을 압도할 수가 없었다.
6. 미천왕과 고구려
미천왕은 거지처럼 살 때에도 왕실의 자손이라는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숙우와 조불이 그가 남루한 옷차림을 했어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미천왕의 이러한 당당함은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고구려를 더욱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한 왕이었기에 백성들에게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농업과 상업이 앞선 시기보다 발전하고, 영토도 커져 장차 고구려가 크게 성장할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비록 방해자를 만나 그의 원대한 계획은 미완성에 그쳤지만, 그는 4세기 초 고구려를 크게 발전시킨 뛰어난 임금이었다.
▶️ 蘆(갈대 노/로)는 형성문자로 芦(로/노)와 통자(통자), 芦(로/노)는 간자(簡字), 芐와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盧(로)가 합(合)하여 '갈대'를 뜻한다. 그래서 蘆(노/로)는 ①갈대(볏과의 여러해살이풀) ②호리병박(조롱박) ③꼭두서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갈대 위(葦)이다. 용례로는 수수를 달리 이르는 말을 노제(蘆穄), 갈대잎을 말아서 만든 피리를 노적(蘆笛), 갈대가 뒤덮인 물가를 노정(蘆汀), 갈대로 만든 키를 노기(蘆箕), 갈대로 결어 만든 그릇을 노기(蘆器), 인삼이나 더덕이나 도라지 따위의 뿌리 대가리에 붙은 싹이 나는 부분을 노두(蘆頭), 갈대를 기르는 땅을 노장(蘆場), 눈처럼 흰 갈대의 목을 노설(蘆雪), 갈대밭을 달리 이르는 말을 노전(蘆田), 갈대꽃을 달리 이르는 말을 노화(蘆花), 갈대가 우거진 물가의 언덕을 노안(蘆岸), 갈대가 우거진 곳에 내려앉은 기러기를 노안(蘆雁), 갈대가 많이 자란 물가를 노주(蘆洲),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노점(蘆簟), 갈대를 엮어서 만든 발을 노렴(蘆簾), 쪼갠 갈대로 결어 만든 삿갓을 노립(蘆笠), 갈대로 엮은 울타리를 노번(蘆藩), 심어서 기른 산삼을 장로(長蘆), 갈대를 달리 이르는 말을 가로(葭蘆), 호리병박 모양으로 만든 병을 호로병(葫蘆瓶), 소의 뿔로 호로병박처럼 만든 물건을 우골호로(牛骨葫蘆), 호로를 들고 노래 부르며 추는 춤이라는 뜻으로 향악 정재의 한 가지인 무애무를 이르는 말을 호로가무(葫蘆歌舞), 총이나 활을 쏘기 위하여 보루나 성벽 같은 데에 호리병박 형상으로 뚫어 놓은 구멍을 이르는 말을 호로전안(葫蘆箭眼), 부들과 갈대가 빨리 자라듯이 정치의 효력이 빨리 나타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정여포로(政如蒲蘆), 양식에 따라 호로를 그리듯이 남을 본떠 그대로 흉내 낸다는 말을 의양화호로(依樣畫葫蘆) 등에 쓰인다.
▶️ 花(꽃 화)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化(화)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초두머리(艹)部는 식물, 花(화)는 후세에 생긴 글자로 본래는 華(화)로 쓰였다. 음(音)이 같은 化(화)를 써서 쉬운 자형(字形)으로 한 것이다. ❷형성문자로 花자는 '꽃'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花자는 艹(풀 초)자와 化(될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化자는 '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는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본래 소전에서는 땅속에 뿌리를 박고 꽃을 피운 모습을 그린 芲(꽃 화)자가 '꽃'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花자가 모든 '꽃'을 통칭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花(화)는 성(姓)의 하나로 ①꽃 ②꽃 모양의 물건 ③꽃이 피는 초목 ④아름다운 것의 비유 ⑤기생(妓生) ⑥비녀(여자의 쪽 찐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 ⑦비용(費用) ⑧얽은 자국 ⑨꽃이 피다 ⑩꽃답다, 아름답다 ⑪흐려지다, 어두워지다 ⑫소비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꽃구경을 하는 사람을 화객(花客), 꽃을 꽂는 그릇을 화기(花器), 뜰 한쪽에 조금 높게 하여 꽃을 심기 위해 꾸며 놓은 터 꽃밭을 화단(花壇), 꽃 이름을 화명(花名), 꽃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화용(花容), 환갑날에 베푸는 잔치를 화연(花宴), 화초를 심은 동산을 화원(花園), 꽃과 열매를 화과(花果), 꽃을 파는 곳을 화방(花房), 꽃병 또는 꽃을 꽂는 병을 화병(花甁), 꽃놀이 또는 꽃을 구경하며 즐기는 놀이를 화유(花遊), 비가 오듯이 흩어져 날리는 꽃잎을 화우(花雨), 온갖 꽃을 백화(百花), 많은 꽃들을 군화(群花), 꽃이 핌으로 사람의 지혜가 열리고 사상이나 풍속이 발달함을 개화(開花), 떨어진 꽃이나 꽃이 떨어짐을 낙화(落花), 한 나라의 상징으로 삼는 가장 사랑하고 가장 중하게 여기는 꽃을 국화(國花), 암술만이 있는 꽃을 자화(雌花), 소나무의 꽃 또는 그 꽃가루를 송화(松花), 시들어 말라 가는 꽃을 고화(枯花), 살아 있는 나무나 풀에서 꺾은 꽃을 생화(生花), 종이나 헝겊 따위로 만든 꽃을 조화(造花),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 번 성한 것이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짐을 이르는 말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무늬가 같지 않음 또는 문장이 남과 같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화양부동(花樣不同), 꽃다운 얼굴과 달 같은 자태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여자의 고운 자태를 이르는 말을 화용월태(花容月態), 꽃이 핀 아침과 달 밝은 저녁이란 뜻으로 경치가 가장 좋은 때를 이르는 말을 화조월석(花朝月夕), 비단 위에 꽃을 더한다는 뜻으로 좋은 일에 또 좋은 일이 더하여짐을 이르는 말을 금상첨화(錦上添花), 말을 아는 꽃이라는 뜻으로 미녀를 일컫는 말 또는 기생을 달리 이르는 말을 해어화(解語花), 눈처럼 흰 살결과 꽃처럼 고운 얼굴이란 뜻으로 미인의 용모를 일컫는 말을 설부화용(雪膚花容), 마른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뜻으로 곤궁한 처지의 사람이 행운을 만나 신기하게도 잘 됨을 이르는 말을 고목생화(枯木生花), 달이 숨고 꽃이 부끄러워 한다는 뜻으로 절세의 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폐월수화(閉月羞花) 등에 쓰인다.
▶️ 揷(꽂을 삽)은 형성문자로 插(삽)은 본자(本字), 挿(삽)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臿(삽)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揷(삽)은 ①꽂다 ②끼우다 ③삽입하다 ④찌르다 ⑤개입(介入)하다 ⑥끼어들다 ⑦가래(흙을 파헤치거나 떠서 던지는 기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꽂을 진(搢)이다. 용례로는 주로 신문이나 잡지나 서적의 문장 속에서 문장의 내용을 보완하거나 이해를 돕도록 장면을 묘사하여 그린 그림을 삽화(揷畫), 꽃이 핀 가지나 줄기를 꽃병 따위에 보기 좋게 꽂음을 삽화(揷花), 산가지를 꽂음을 삽주(揷籌), 꺾꽂이로 식물의 가지나 줄기나 잎 따위를 자르거나 꺾어 흙 속에 꽂아 뿌리 내리게 하는 일을 삽목(揷木), 꺾꽂이를 하려고 일정한 길이로 잘라 낸 나뭇가지를 삽수(揷樹), 에피소드로 어떤 이야기나 사건의 줄거리에 끼인 짤막한 토막 이야기를 삽화(揷話), 끼워 넣음을 삽입(揷入), 총기에 탄알을 삽입함을 삽탄(揷彈), 인쇄할 때에 기계에 종이를 먹임을 삽지(揷紙), 제사 지낼 때에 숟가락을 밥그릇에 꽂는 의식을 삽시(揷匙), 논에 볏모를 심음을 삽앙(揷秧), 논에 모를 모종하여 심는 일을 삽종(揷種), 사모나 복두 따위의 뒤 쪽에 뿔을 꽂음을 삽각(揷角), 힘차고 굳센 모양을 삽랄(揷辣), 말뚝을 박음을 삽말(揷抹), 쓸데없이 말참견을 함을 삽취(揷嘴), 비스듬히 비껴서 꽂음을 사삽(斜揷), 대나무를 꽂고 소금을 뿌린다는 뜻으로 황제가 타고 다니는 양이 좋아하는 대나무와 소금을 뿌려 황제를 맞이했다는 말을 삽죽살염(揷竹撒鹽), 패랭이에 숟가락 꽂고 산다는 뜻으로 살림이 결딴나서 떠돌뱅이가 된 신세를 이르는 속담을 평양삽시(平陽揷匙), 무른 땅에 말뚝 박기라는 뜻으로 만만한 대상은 누르기 쉽다 또는 매우 하기 쉬운 일이라는 말을 연지삽익(軟地揷杙) 등에 쓰인다.
▶️ 冠(갓 관)은 ❶회의문자로 쓰는 것을 뜻하는 민갓머리(冖; 덮개, 덮다)部와 머리를 뜻하는 元(원)과 손을 뜻하는 寸(촌)으로 이루어졌다. 머리에 쓰는 것을 쓰는 일, 또 그 관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冠자는 '갓'이나 '관', '쓰다', '관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冠자는 冖(덮을 멱)자와 元(으뜸 원)자, 寸(마디 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冠자는 머리에 모자를 씌우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자'란 관직에 오른 사람이 쓰던 '감투'를 뜻한다. 옛날에는 관직에 있지 않더라도 감투를 쓸 기회가 한 번쯤은 있었다. 바로 결혼식이었다. 그래서 冠자는 '관'이나 '관례'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冠(관)은 (1)머리에 쓰던 쓰개의 한 가지. 검은 머리카락이나 말총 따위로 정교(精巧)하게 엮어 만드는데, 방형(方形), 복익형(複翼形), 편형(扁形) 따위 여러 가지 모양이 있음 (2)족보에서 결혼(結婚)한 남자를 이르는 말 등의 뜻으로 ①갓, 관(冠) ②닭의 볏 ③관례(冠禮) ④관례(冠禮)를 올린 성인(成人) ⑤성년(成年), 나이 스무 살을 이르는 말 ⑥으뜸, 우두머리 ⑦(갓을)쓰다 ⑧(무리에서)뛰어나다 ⑨덮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스무살이 되어 남자는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찌고 어른이 되던 예식을 관례(冠禮), 관례와 혼례를 관혼(冠婚), 어른과 아이를 관동(冠童), 갓과 의복을 관복(冠服), 예전의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를 관모(冠帽), 땅속줄기에서 나는 뿌리를 관근(冠根), 관을 꾸미는 데 쓰던 물건을 관식(冠飾), 가장 뛰어나 견줄 사람이 없음을 관절(冠絶), 남자가 스무 살에 관례를 한다는 데서 남자의 스무 살 된 때를 일컫는 말을 약관(弱冠), 갓을 벗어 건다는 뜻으로 관직을 버리고 사퇴하는 것을 의미함을 괘관(掛冠), 수레 덮개를 서로 바라본다는 뜻으로 앞뒤의 차가 서로 잇달아 왕래가 그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관개상망(冠蓋相望), 관과 신발을 놓는 장소를 바꾼다는 뜻으로 상하의 순서가 거꾸로 됨을 두고 이르는 말을 관리전도(冠履顚倒), 수탉을 관모로, 멧돼지를 허리에 찼다는 뜻으로 용맹하고 마음이 곧음을 이르는 말을 관계패가(冠鷄佩猳), 우맹이 의관을 입었다라는 뜻으로 사람의 겉모양만 같고 그 실지는 다르다는 말로 사이비한 것을 이르는 말을 우맹의관(優孟衣冠), 노한 머리털이 관을 추켜 올린다는 뜻으로 몹시 성낸 모양을 이르는 말을 노발충관(怒髮衝冠), 원숭이가 관을 썼다는 뜻으로 옷은 훌륭하나 마음은 사람답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목후이관(沐猴而冠), 용모의 아름다움이 관에 달린 옥과 같다는 뜻으로 겉만 번지르르하고 알맹이가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미여관옥(美如冠玉)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