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 홍일표
나는 부풀어 무명의 신에게 닿는다
얼굴 없는 나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여
달의 종족이거나
오리알쯤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몸을 떼어 몇 개의 알을 더 낳기도 한다
이미 죽어서 지워진 몸
용서라는 말은 하지 말자
당신을 만나는 동안 작은 속삭임으로 신의 귀를 간질인다
시간의 악몽을 통과하는 잠
어둠으로 빚은
세계의 모퉁이에 부딪힌 빛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길이 없으니
나는 아직 까막눈이고
하느님도 보지 못한
희고 둥근 시간의 덩어리들
꽉꽉 눌러 사라진 꽃의 표정을 찾는다
여기저기 귀들이 펄럭인다
입이 돋는다
목련이 오래 감추어둔 혀를 내밀어 종알거리듯
곳곳에서 부풀어오르는
환한 살풍선들
제 말이 들리나요
밀가루 반죽 속에서 동글동글 태어나는 목소리들
나는 여전히 뜨겁고 캄캄한 살이어서
거듭 달의 종족이라고 불러본다
그래야 오늘도 말랑말랑한 하느님인 것
빵이라 부를 때 당신은 영영 보이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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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종족이 되기 위한 저편의 언어들 - 마경덕
달처럼 부푸는 둥근 빵들, 빵을 빚는 제빵사의 손, 빵을 빚듯
‘시’를 빚는 시인의 손이 동시에 오버랩 된다. 책상에 앉아서
‘시’를 쓰는 시인들, 생각을 덜어내고 보태며 덩이덩이 만들어진
문장은 시인이 “몸을 덜어 쓴” 결과물이다. ‘시’를 밥처럼 먹고
살아야 시인이 된다. 아니 ‘시’가 시인을 밥으로 삼고 있는 줄도
모른다. 시인의 피를 야금야금 말리며 ‘시’는 살아남는 것이다.
다양한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홍일표 시인의 ‘빵’은 새로운
발상과 “다각적인 시선”으로 시의 문을 열고 있다.
밀가루 “반죽덩이”는 둥글고 흰 ‘오리알’이다. ‘오리알’ 크기의
반죽들이 ‘빵’이 되기 위해 부푸는 중이라서 아직 이름이 없는
“무명의 신”이며 노련한 제빵사의 손, 역시 ‘빵’을 빚어내는
“신의 손”이다. 또한 “시인의 손”에서 빚어지는 ‘시’도 아직
‘얼굴’이 없다. 무엇이 될지 모르는 발효 중인 “둥근 빵”과
어떤 ‘시’가 될지 아직 모르는 숙성 중인 ‘시’가 한자리에 있다.
다층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둥근 반죽”으로
완성된다.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우리가 시라는 단어를 말하거나
들을 때 머릿속에 떠올리는 시에서 가장 먼 곳을 향해, 언어의
반대극점을 향해 날아가는 구름의 문장이며, 시는 미지의
시간을 불러들여 현재의 시간을 탐구시키고, 언어 바깥의
비언어적 경험을 통해 관습화 된 언어를 해체 구성하는 행위
이다.” 라고 하였다. 관습적인 생각을 벗어나 가장 먼 곳을
향해, 언어의 반대극점을 향해 날아가는 “구름의 문장”은
홍일표 시인이 지향하는 근간의 언어들과 유사한 맥락을
이루고 있다. 저편의 언어들은 저편으로 넘어가야만 보인다.
달의 종족이 되기 위해 어느 임계점을 넘어야만 반대극점인
저편이 될까. (중략)
발효 ‘빵’을 처음 만들어낸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이다.
출애굽 당시(기원전 1250년 경) 히브리 민족은 효모를 갖고
나오지 못했고, 발효하지 않은 ‘무교병’을 먹으며 홍해를 건너
탈출한 출애굽 당시의 고난을 기리는 유대교 전통이 생겨났다고
한다. 발효가 빠진 딱딱하고 맛없는 ‘무교병’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고난의 상징”이다. 이 작품에서도 ‘발효’는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발효’는 놀라운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시 쓰기 역시 숙성을 거쳐 달처럼 부풀어야 작품이 완성된다.
친숙함은 “인식의 장애”라고 하듯이 시를 짓기 위해선 관념화된
언어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 홍일표 시인의 ‘빵’은 상투성을
파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의식을 환기시키며 시적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출처] 빵 / 홍일표|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