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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상파울로, 리오데자네이루, 이과수
이과수 폭포(브라질) 관광
- 폭 2.7KM의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브라질 쪽 이과수 폭포 감상
- 마꾸꼬 투어 (오픈카로 정글 탐험과 이과수 폭포 주위를 보트를 타고 돌며 자연의
웅대함과 신비함을 경험한 후 토속품점 견학)
23일차
리오데자네이로 관광
- 리오의 세계적 명물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 그리스도상
-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가 장식된 원뿔형 모양의 메트로 폴리탄 대성당
24일차
리오데자네이로 시내관광
- 슈가로프 산 케이블 카를 타고 세계3대 미항의 하나인 리오의 전경 감상
- 보석 채취 및 가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H.STERN 보석박물관
- 삼바 공연 퍼레이드 장소인 삼보 드로모
- 세계 3대 미항으로 불리는 꼬파카바나 해변, 이빠네마 해변
★★★ 리오 카니발 쌈바 축제 - 앵콜 공연 관람 ★★★
흥겨운 쌈바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춤추는 화려한 의상의 무희들과,
휘황찬란한 각종 퍼레이드!! 정렬의 쌈바 축제를 직접 보실 수 있는 기회!!!
25일차
상파울로 관광
- 한인상가 밀집지역인 봉헤찌로 거리
- 이비라뿌에라 공원 및 이삐랑가 박물관
- 동양인의 거리, 축구박물관 등
브라질(Brazil)
브라질은 남아메리카 중동부 대서양 연앆에 있는 국가로, 정식 명칭은 브라질 연방 공화국 (Federative Republic of Brazil)이다. 면적은 남미대륙의 47%인 851만 1965㎢로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큰 영토이다. 인구는 1억 8000만정도이며, 수도는 브라질리아(Brazilia)이다.
개관
정식 명칭은 브라질연방공화국(Federative Republic of Brazil)으로, 해안선의 길이가 7491㎞에 달한다. 면적은 남미대륙의 47%인 851만 4877㎢로 세계 제5위이며, 인구는 2억 425만 9812명(2015년 현재), 수도는 브라질리아(Brasilia)이다.
주민은 유럽계 백인 52.1%, 혼혈인종 41.4%, 흑인 5.9%, 인디안 1%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며,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교 신자이다.
기후는 북부 아마존강 유역의 열대우림기후로부터 아열대와 남부의 온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국토의 60% 이상이 정글 또는 산림으로 덮여 있어 임산자원이 무한하고, 철광석·보크사이트·망간·석면 등 30여 종에 이르는 막대한 양의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커피·대두·사탕수수 등의 농산물 생산도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어 경제적 잠재력이 매우 큰 국가이다. 또한 제1차세계대전을 전후해서 군수산업이 발달하여 제3세계국가 중 가장 두드러진 군수품생산국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무리한 고도성장정책과 석유의 과도한 대외의존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외채가 누증되는 등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하였다. 이후 1990년대 들어 대외개방·민영화추진과 더불어 고금리·달러연동제정책을 병행 물가안정과 경제성장을 실현하고 있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1조 77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8,650달러이다.
브라질의 정치체제는 왕정에서 1889년 합중국으로, 다시 1964년 연방공화국으로 바뀌어왔다. 현재는 임기 4년의 대통령 중심제의 연방공화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8년의 상원(81석)과 임기 4년의 하원(513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은 노동자당(PT), 민주운동당(PMDB), 사회민주당(PSDB), 자유전선당(PFL) 등이다.
브라질은 1500년 포르투갈의 까브랄(Cabral, P. A.)이 발견하면서 식민지로서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개척 초기 포르투갈의 주요 관심은 당시 동양에서 수입하던 직물용 붉은 염료를 대신하는 염료용 나무(빠우 브라질)를 채취하는 데 있었다. 브라질이라는 국명도 이 염료용 나무를 칭하는 말로부터 온 것이다.
이후 사탕수수붐(16∼17세기), 금광발견(17세기 말∼18세기), 커피수요 증대(19세기)가 브라질의 개척과 근대화를 촉진시킨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개척 초기에 포르투갈의 인구는 200만 명을 밑돌았으며 아프리카와 인도의 경영에 노력이 경주되었기 때문에 브라질의 초기 개척은 매우 더딘 것이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사탕수수붐이 일면서 본격적인 식민이 이루어지고, 원주민 노예에 더하여 아프리카 흑인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노예로 팔렸다.
초기 식민은 대부분 남자로만 구성된 까닭에 백인과 원주민·흑인 사이의 혼혈이 널리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은 1807년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게 되자 왕실을 브라질로 천도하였다.
이 천도는 브라질에 유럽문화를 유입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브라질의 경제는 금의 산출량은 격감하고 커피의 수요가 증대하기 전이었으며, 인구는 300만 명 가량이었으나 그 가운데 100만 명이 노예였고, 자유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렇다 할 산업이 없었으므로 반영구적 실업빈민의 수가 많았다.
이에 포르투갈 왕실은 산업진흥을 위해 중상주의정책을 완화하였다. 1821년 포르투갈 왕실은 황태자 돈 페드로(Dom Pedro)를 섭정으로 남겨 두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국왕을 맞은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대하여 중상주의정책을 다시 강화하였다. 여기에 맞서 브라질의 대지주와 보수주의자들은 돈 페드로 황태자를 옹립하여 1822년 9월 7일 독립을 선언하고, 1824년 3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1850년 국내외의 압력에 따라 노예수입이 금지되었으며 1888년 노예해방령이 선포되었다. 다음해에 노예해방으로 타격을 받은 대토지 소유자의 지지를 받은 군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의 브라질에는 쿠데타와 독재정치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는데 특히 1930년부터 1955년까지의 바르가스(Vargas, G.)에 의한 독재는 유명하다. 1964년에는 다시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여 대통령에 브랑꼬(Branco, C.) 대장이 취임한 뒤 군장성의 권력승계로 군사정권이 지속되었다.
그 뒤 1985년 1월, 1964년에 제정된 헌법의 대통령간선제 규정에 따라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어, 야당인 브라질민주운동당의 네베스(Neves, T.)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21년간의 군정이 막을 내렸다. 1985년 4월 네베스가 죽고 싸르네이(Sarney,J.)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이후 까르도조(Cardoso) 대통령이 1995년 1월 1일 취임하였고, 2003년 1월 취임한 룰라(Luiz Inacio Lula da Silva) 대통령이 2007년 1월 재선에 성공하여 집권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종래 친미적인 외교정책을 견지하고 있었으나, 룰라 대통령 취임 후 중도좌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4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한편, 우리나라는 1959년 10월 31일 국교를 수립하고, 1962년 7월 주 브라질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여 2006년 현재 존속하고 있다. 1970년 10월에는 상파울루총영사관을 설치하였으며, 브라질은 1965년 5월 주한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였다.
우리나라의 대 브라질 이민사는 1950년대에 시작되었다. 6·25전쟁 후에 50명의 반공포로가 인도를 거쳐 브라질에 이주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가 브라질 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1962년 보건사회부차관을 단장으로 한 우리나라 이민관계 시찰단이 브라질을 방문하여 브라질정부로부터 우리나라의 이민 30세대를 접수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에 따라 1963년 2월 이민 17세대 92명이 제1차 이민단으로 산투스항에 도착한 후 상파울루 근교농장에 정착하였고, 1964년 5월 제2차 이민 68세대 350명이 브라질에 건너갔다.
그러나 이들은 농지와 환경에 대한 사전지식의 결여로 대부분 상파울루 등 대도시에 집결하여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브라질정부는 우리 나라의 농업이민 접수를 중단하고 기술계 이민만을 접수하였다. 브라질 이민이 사실상 중단되자 국내 이주희망자들은 개인초청, 직계초청 등을 남용했으며, 한편으로는 파라과이 등 제3국을 통해 불법으로 이주하여 브라질정부에서 입국사증을 거부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뒤 1981년 1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브라질내 불법체류자에 대한 임시등록이 실시되어 약 4,800여 명의 교민이 임시거주허가를 취득하였다.
또한 브라질정부는 이들 임시거주자에 대해 영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1983년 12월 제정하였고, 이에 따라 임시거주허가자들은 영주권을 발급받았다.
기술협력 분야에서는 1978년 이후 6명의 브라질 연수생을 초청하여 훈련시켰고, 우리나라의 전문가 2명을 브라질에 파견한 바 있다. 1982년 4월에는 하여 우리나라 과학기술처장관과 양국 간 과학·기술협력을 증진시키기로 합의하였으며, 그 후속조처로 1984년 12월 브라질 수산청장을 단장으로 한 5명의 과학기술협력사절단이 방한한 바 있고 1992년 12월 과학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앞서 1976년 9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대한상공회의소와 브라질상의연합회 간에 경제협력의정서가 교환되었으며, 1978년 5월 가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1979년 10월리우데자네이루에서 제2차 합동회의가 개최되었다.
1997년에는 9월과 11월에 한·브라질 21세기위원회가 개최된 바 있고, 제1차 고위정책협의회가 같은 해 11월에 개최되었다.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대한우호정책을 취해왔으며 최근 양국간 통상증진 및 자원협력 등 실질관계가 긴밀해지고 있다.
양국은 1963년 5월 무역 협정, 1966년 2월 문화 협정, 1991년 8월 과학기술협력 협정, 1991년 9월 항공 협정, 1991년 11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93년 12월 상몽투자 및 취재복수사증 협정, 1995년 9월 범죄인인도 협정, 1996년 9월 관광협력 협정, 상용복수사증발급 협정, 2002년 5월 사증면제 협정을 체결하였다. 또한, 2002년 2월에는 범죄인 인도 조약이 발효되고, 2006년 2월 형사사법공조조약이 발효되었다.
친한단체로는 한·브라질문화협회 외에, 1977년 7월 양국 의회간 친선도모를 목적으로 결성된 한·브라질 의원친선협회가 있으며, 양국 간 의원교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1977년 4월에는 서울특별시와 상파울루시 간에 자매결연이 맺어졌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브라질 수출액은 54억 9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승용차 및 부품·핸드폰부품·LCD·칼라 TV 부품·건설중장비 등이고, 수입액은 40억 6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철광석·펄프·천연섬유·금속광물·농산물 등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242명의 브라질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2007년 현재 브라질에는 KOTRA를 비롯하여 외환은행, 대한항공, 포스코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4만 9424 명의 한국민 교민과 826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2001년 3월 9일 외교관계를 체결하고,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다.
이에 앞서 1995년 10월 브라질·북한 의원친선협회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으며, 1995년에 출범한 브라질의 까르도조 정부는 대외개방·안정화, 공기업민영화, 긴축정책에 진력하는 한편, 대외정책에서 실리추구 외교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2007년 현재 북한의 대 브라질 수출액은 6980만 달러로 주종목은 제작기계·제어장치 등이고, 수입액은 1억 6993만 달러로 주종목은 철강석·사탕수수·강판 등이다.
1963년 8월 발족한 한·브라질 문화협회는 매년 강연회·영화상영 등으로 양국간 문화교류에 힘쓰고 있다. 1966년 2월 우리나라는 브라질과 문화 협정을 체결하였고 그동안 문화단체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국립무용단이 1995년과 1996년에 브라질에서 공연하였다.
브라질 이과수 폭포(Iguazu Falls)
- 폭 2.7KM의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브라질 쪽 이과수 폭포 감상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국경에 있는 폭포. 파라나 고원의 남쪽 가장 자리를 흘러 말발굽 모양의 협곡에 너비 4.5km, 평균낙차 70m로, 초당 5만 8000톤의 물을 쏟아 붓는 폭포로, 협곡으로 떨어지는 물은 여기저기 잇는 섬과 튀어나온 바위 때문에 다시 275개의 작은 폭포들로 나뉘어져 떨어진다. 고막을 찢을 것 같은 폭포의 굉음은 멀리서도 들릴 정도이며, 물보라가 하늘높이 솟아오른다. 가장 높은 폭포는 유니언 폭포로 ‘악마의 목구멍’ 이라고 분리는 깊은 틈으로 떨어진다. 관광객은 고무 보트를 타고 폭포에 접근 할 수 있다.
이과수 폭포는 이과수 강이 서쪽으로 굽이치며, 파라나 고원의 가장자리를 흐르다가 협곡으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에서 생긴다. 폭포와 관련된 섬 가운데 폭포 바로 위에 있는 산마르틴 섬과 그란데 섬이 가장 유명하다.
그란데 섬을 중심으로 2개의 지류로 갈라진 이과수 강이 다시 합류해 현무암 및 용암층을 지나 가르간타델디아블루('악마의 목구멍')로 불리는 깊은 틈으로 낙하하며, 그 모습은 '심연으로 뛰어드는 대양'이라는 말로 묘사된다. 이과수 강은 협곡을 지나 계속 흐르다가 파라나 강과 합류한다. 각각의 많은 폭포 줄기들은 돌출한 암붕으로 인해 중간에서 부서진다. 이때 생기는 물보라와 물의 굴절로 인해 생긴 무지개가 장관을 이룬다. 한 층의 안개가 폭포의 아래 지점에서부터 위로 150m되는 곳까지 드리워져 웅장하고 수려한 경관에 한몫을 한다.
아르헨티나 영토에 속한 이과수 강 절반 지역에 있는 산마르틴 섬에서 아르헨티나 영토에 해당하는 폭포의 장관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에서 산마르틴·보세티·도스에르마나스('두 자매')·미트레·트레스모스케테로스('삼총사') 폭포 등을 볼 수 있다. 폭포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아르헨티나 쪽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폭포 안쪽을 오를 수 있다. 브라질 해변에서는 폭포 전체를 볼 수 있다. 브라질 쪽에 있는 폭포들로는 벤자민콘스탄트·데오도루·플로리아누 등이 있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주요 관광명소이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국경지역, 파라나 강과의 합류점에서 상류 쪽으로 23㎞ 지점에 있다.
편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82m이고 너비는 나이애가라 폭포의 4배인 4㎞이다. 낙차지점에 있는 절벽 가장자리의 숲으로 뒤덮인 바위섬들로 인해 높이 60~82m 정도의 크고 작은 폭포 275개로 형성되어 있다.
폭포를 방문한 최초의 스페인 탐험가는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였다. 1541년 그는 폭포 이름을 '살토데산타마리아'라고 지었으나 곧 이과수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18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폭포 탐사를 시작했지만, 이 탐사는 1767년 남아메리카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들의 제지로 중단되었다. 폭포의 지형도는 1892년에 최초로 만들어졌다.
1897년 브라질의 장교 에드문두 데 바루스는 미국에 있는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필적할 만한 국립공원을 이과수 폭포에 세울 것을 구상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국경이 조정된 후에 각 나라에 별도의 국립공원이 세워졌다. 두 공원 모두 폭포와 관련된 식물, 야생동물, 아름다운 풍경 등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관광객들을 위한 정부 소유의 호텔이 있다. 공원에서 사냥은 금지되어 있으나 낚시는 허용된다. 아르헨티나 쪽의 공원에는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반낙엽성 식물에서 열대식물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고 다양한 식물이 분포하고 있어서 식물학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어왔다. 세차게 흐르는 물 속에서만 자라는 포도스테뭄과(科)의 수생식물이 폭포의 암붕에서 발견된다. 소나무 옆에서 자라는 난초, 야자나무 옆에서 자라는 대나무, '리아나'라 불리는 열대산 칡과 화려한 베고니아 옆에서 자라는 이끼 등의 경우처럼 서로 대조되는 식물이 함께 자라는 경우도 흔하다.
동물 또한 다양한 종이 풍부하게 서식하나,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하다. 오실롯과 재규어 등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류를 비롯해 사슴·맥 등이 있으며, 작은 동물도 수없이 많다. 조류도 다양한 종들이 분포한다. 어류로는 만새기·만디·카스쿠도 등이 있다.
이구아수(이과수) 폭포
20%는 브라질 영토, 80%는 아르헨티나 영토
파라나 강 합류점에서 이구아수 강 상류로 23㎞ 지점
150~300여 개-이구아수 강물 물줄기 |
이구아수 폭포는 이구아수 강이 파라나 고원(Paraná Plateau)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점은 이구아수 강이 파라나 강(Río Paraná)과 합류하는 곳에서 상류 방향으로 23㎞ 되는 곳이다. 이구아수 강은 브라질의 쿠리치바(Curitiba) 시 인근에서 발원하며, 유로의 대부분을 브라질 영토에서 흐르다가 하류에 들어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흐른다. 이구아수 폭포는 브라질의 파라나(Paraná) 주와 아르헨티나의 미시오네스(Misiones) 주의 경계선에 발달하였는데, 폭포의 20% 정도는 브라질 영토에 속하고 나머지 부분은 아르헨티나 영토에 속한다. 이구아수 강은 이구아수 폭포를 기준으로 상류와 하류로 구분된다.
이구아수는 이 지역 원주민인 과라니(Guaraní) 족의 언어로 ‘큰 물’ 혹은 ‘위대한 물’이라는 뜻이다. 원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이 폭포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1541년에 에스파냐의 정복자이자 탐험가였던 알바로 누녜스 카베사 데바카(Álvaro Núñez Cabeza de Vaca)가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구아수 폭포가 자리 잡은 지역은 강수량이 풍부한 아열대 기후대로, 폭포로 흘러 들어오는 유량이 풍부하다. 폭포의 좌우 폭은 2.7㎞에 달하며, 높이는 60~82m에 이른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하천 수위에 따라 떨어지는 물줄기의 수는 150~300여 개로 변동을 보인다. 폭포를 통해 쏟아져 내리는 물의 양은 초당 1,000톤에 달한다. 이구아수 강물의 절반가량이 ‘악마의 목구멍(에스파냐 어로는 Garganta del Diablo in Spanish, 포르투갈 어로는 Garganta do Diabo)’이라고 불리는 길이 700m, 폭 150m의 U자형 폭호(폭포 아래 형성된 호수나 웅덩이)로 쏟아져 내린다. 이구아수 폭포는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보다 낙차가 더 크고 폭은 약 2배에 이른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너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가 이구아수 폭포를 보고서 “아, 나이아가라 폭포는 어쩌면 좋아!(Poor Niagara)”라고 탄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구아수 폭포를 구성하는 작은 물줄기들도 각각 별도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브라질 쪽 구간에서는 벤자민콘스탄트(Benjamin Constant) 폭포, 데오도루(Deodoro) 폭포, 플로리아누(Floriano) 폭포 등이 유명하다.
이구아수 폭포의 상류에 해당하는 파라나 고원은 현무암 용암대지이다. 이 거대한 용암대지에 단층운동이 일어나고, 이 단층에 의해 고도가 급변하는 지점에 폭포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과 함께 엄청난 유량으로 인해 폭포는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고 있다. 약한 부분이 쉽게 부서지고 침식되면서 폭포가 점차 상류 쪽으로 이동하는 두부침식(혹은 역행침식)이 진행되고 있는데, 100년간 약 30㎝씩 상류 방향으로 후퇴하고 있다.
이구아수 폭포의 경이로운 경관은 영화의 배경으로도 종종 사용되고 있다. 롤랑 조페(Roland Joffé) 감독의 ‘미션(The Mission, 1986)’에서 노예상인이었던 멘도사(로버트 드니로 분)가 가브리엘 신부를 따라 등에 돌짐을 지고 절벽을 오르는 고행을 하던 중에 자신의 돌짐을 끊어 버리는 과라니 원주민 앞에서 통곡을 하는 장면이라든지,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스 분)가 오보에로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를 연주하는 장면 등은 이구아수 폭포로 인해 더욱 인상 깊은 장면이 되었다. 2008년 개봉된 ‘인디아나 존스와 크리스탈 해골 왕국(Indiana Jones and the Kingdom of the Crystal Skull)’에서도 이구아수 폭포는 중요한 배경으로 활용된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각각 1984년과 1987년에 이구아수 폭포를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였고, 두 나라 모두 이구아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2011년에는 이 지역이 전 세계 7대 자연 경이(New Seven Wonders of Nature)에 선정되었다.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는 세계적 관광지로서 아르헨티나의 푸에르토이구아수(Puerto Iguazú), 브라질의 포스두아구아수(Foz do Iguaçu), 파라과이의 시우다드델에스테(Ciudad del Este) 등에서 모두 접근이 가능하다. 이 지역은 여름에는 덥고 습하고 겨울에는 물 수위가 낮아져, 사계절 중 봄철과 가을철에 방문하기 좋다. 브라질 방향에서는 환경 보호를 고려한 통로를 만들어 걸어서 폭포 인근으로 들어가거나 헬리콥터를 타고 폭포 경관 관찰이 가능하다. 아르헨티나 방향에서는 열대우림 생태 기차(Tren Ecológico de la Selva)나 폭포 기차(Tren de las Cataratas)를 타고 숲을 가로질러 폭포 인근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아르헨티나 방향에서는 배를 타고 산마르틴 섬(Isla San Martín) 등 폭포를 여러 줄기로 만들고 있는 일부 섬에도 갈 수 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국경에 걸쳐 있는 이구아수 폭포 일대 국립공원이다. 공원 내에 있는 이구아수 폭포는 나이아가라 폭포, 빅토리아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로 꼽힌다. 이구아수 폭포는 나이아가라, 빅토리아 두 폭포를 합한 것보다 규모가 크다. 274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말굽 모양으로 굽이치며 거대한 폭포군을 이룬다. 길이는 총 4km에 이르며, 우기에는 초당 1만 3천 톤의 물이 쏟아진다. '이구아수'라는 표현은 원주민어인 과라니어로 '물'이라는 뜻의 ‘이’와 경탄할 만큼 크다는 뜻의 ‘구아수’가 합쳐진 말로 '엄청나게 큰 물'이라는 뜻이다. 폭포 주변에서는 언제나 폭발하는 활화산처럼 물이 만드는 굉음과 물보라, 사나운 바람이 일어난다.
이구아수 폭포의 규모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용한 밤이면 20km 밖까지 폭포의 굉음이 들린다는 말로 그 위용을 짐작한다. 폭포가 빚어내는 엄청난 양의 수증기 때문에 이 일대는 일년 내내 습도가 80~90%에 이르고 폭포수 속에서는 종일 무지개가 피어 오른다. 274개의 폭포 중에 백미로 꼽히는 것은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 서면 우비를 입고 있어도 온 몸이 젖어 거의 꼼짝할 수 없다.
폭포 주변, 아직 원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인근 밀림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두 나라가 공동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인파로 북적대는 폭포 앞이 싫은 이에게 양치류가 풍성한 습윤 아열대 삼림은 폭포보다 더 매력적이다.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수풀 속에서 큰 수달, 재규어, 왕개미핥기, 퓨마, 큰부리새 등 다양한 열대 동물들이 살고 있다.
이구아수폭포 관광은 브라질 쪽 도시 포스 두 이구아수(Foz do Iguazu)와 아르헨티나 푸에르토 이구아수(Puerto Iguacu)에서 시작된다. 보통 오전에는 브라질 쪽에서, 오후에는 아르헨티나 쪽에서 더 좋은 경관을 볼 수 있다. 연간 1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이 폭포는 관광객의 증가와 인근 도시의 급속한 성장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폭포 인근 생태에 가장 큰 위협은 1991년에 폭포 아래쪽에 세워진 이타이푸댐이다. 이 댐은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전력 사용량 40%를 생산하지만 인근 지형과 기후에 불균형을 일으키는 위험 요소다.
이과수 국립공원(브라질)
이구아수 국립공원(포르투갈어: Parque Nacional do Iguaçu)은 브라질 파라나 주의 국립공원이다. 멸종 위기의 희귀종들을 포함한 야생동물, 특히 조류로 유명하기도 한데, 한 장소에 5종류의 삼림과 생태계를 지닌 세계에서 희귀한 지역이다. 1986년에 유네스코로부터 브라질의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과수 국립공원(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스페인어: Parque nacional Iguazú)은 아르헨티나 북부에 있는 국립공원이며, 크기는 약 550제곱킬로미터이다. 브라질과 이과수 강을 경계로 하며, 두 나라에 걸쳐 있으나 아르헨티나 영내의 면적이 더 넓다. 서구에서 이 곳을 처음 발견한 것은 1542년이지만 이 부근엔 그 전까지 약 10,000여년간 과라니족이 살고 있었다. 1609년에는 예수회 전도사들이 이 곳에 들어왔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다양한 생태환경의 보전 중요성을 인정받아 1984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에 등록되었으며, 브라질의 동명 국립공원은 1986년에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외국인들은 아르헨티나 페소로 $60(미국 달러로는 약 $15 정도)을 내면 그 날 관광이 가능하며, 열대우림 생태 열차를 타고 여러 길을 통해 다양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페소만 받으며, 4월에서 9월 사이는 08시에서 18시까지, 10월에서 다음 해 3월 까지는 07시 30분에서 18시 30분까지 개장한다.
마꾸꼬 투어 (오픈카로 정글 탐험)
이과수 폭포 주위를 보트를 타고 돌며 자연의 웅대함과 신비함을 경험한 후 토속품점 견학)
■ 마꾸꼬와 함께 스릴 넘치는 이과수 체험
아르헨티나 편에서 폭포를 내려다보며 다소 정적인 웅장함에 매료됐다면 브라질 쪽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폭포를 올려다보는 역동적인 웅장함에 빠져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 편 이과주가 폭포 전경을 배경으로(물론 ‘절대로’ 폭포의 전경을 담아낼 수는 없지만) 사진을 찍는다면 브라질에서는 동일선상에, 혹은 위쪽에 폭포의 배경을 두고 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는 만큼 브라질에서 감상하는 이과수는 더욱 역동적인 포인트들이 많다. 또 멀리서 바라보던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포를 하나하나 바라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 포인트다. 그렇다고 전체적인 모습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반대편 높은 곳에 힐튼호텔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과수의 전경을 바라보는 데 유리하다. 특히 호텔의 상층에서는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탁 트여 있어 아름다운 절경을 더한다.
브라질 편에서는 무엇보다 보트를 타고 이과수를 달리는 재미가 하이라이트다. ‘마꾸꼬 사파리’라 불리는 이과수 보트체험은 신나는 스피드와 물보라가 이과수의 스릴을 선사한다. 또 사파리측에서 촬영기사를 함께 동승시켜 출발부터 도착까지 탐험대 팀들의 모습을 동영상에 담아 판매하기도 한다. 주요 포인트에서는 사진촬영 시간도 별도로 제공해 아름다운 폭포의 모습을 고이 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여기저기서 물보라가 튀기 때문에 비옷은 필수다. 특히 보트를 조종하는 현지인이 이리저리 보트를 뒤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물이 내 몸을 적실지 모른다. 비옷을 부여잡고 ‘앗싸~ 안 젖었다’고 방심한 순간 어느새 한 무더기의 물폭탄이 온몸을 적신다. 이렇게 물에 젖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조심해야 할 것은 사진기 관리. 미리 나눠준 비닐봉지에 겹겹이 쌓아 방수를 해야 한다.
여기서 재미를 더할 수 있는 한가지 노하우를 준다면 보트를 타고 있는 동안 비옷의 모자를 거꾸로 써 보는 것. 모자의 터진 부분을 뒤로 돌리면 얼굴로 들이닥치는 물살에서 눈을 보호할 수 있다. 때문에 더 자세한 폭포의 물줄기를 볼 수 있게 된다. 호흡 조절과 거리 유지가 적절히 이뤄져야 하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과수 폭포를 가장 가까이서 볼수 있는 마꾸꼬 사파리
마꾸고 사파리(Macuco Safari)는 20분 동안 통나무로 만든 오픈 자동차를 타고 아열대의 숲을 통과하는 사파리 투어 이다. 이곳에서는 야생 식물, 나비, 앵무새, 도마뱀등을 볼수 있으며, 다양한 종의 야생 동식물을 사진에 담을수 있다. 마꾸꼬 트레일을 타고 가다가 아과수 강의 하류에 이르면 이때부터는 배를 갈아타고 아과수 폭포의 상류로 향한다. 눈앞에 폭포수가 그대로 떨어지는 모습을 볼수 있으며, 눈을 뜨고 볼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폭포수의 장관이 넋을 잃게 한다. 그리 위험하지는 않지만, 옷이 다 젖기 때문에 겨울에는 좀 추워지므로 여분의 옷을 준비하는게 좋다.
리오 데 자네이로 (Rio de Janeiro)
리우데자네이루(포르투갈어: Rio de Janeiro 히우지자네이루[ˈʁi.u d(ʒi) ʒaˈnejɾu][*], 문화어: 리오드쟈네이로, '1월의 강')는 브라질 남동부 대서양 연안에 자리한 도시로 리우데자네이루 주의 주도이다. 줄여서 히우(Rio, 리우, 리오)라고도 불린다. 포르투갈 왕국(1808년-1821년)과 브라질(1763년-1960년)의 수도이기도 했다. 쇼로, 삼바, 보사노바와 같은 음악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하다.
1502년 1월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자가 상륙했을 때 구아나바라 만을 강의 하구로 잘못 알고 "1월의 강"이라는 뜻을 가진 히우지자네이루(리우데자네이루)라 이름지었다. 이것이 후에 주와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1565년에 식민지 지배를 위하여 유럽에서 건너온 포르투갈인에 의해서 건설되었으며, 17세기까지의 리우데자네이루는 설탕의 재배와 설탕 공장이 있는 작은 항구 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18세기 전반에 내륙에 위치한 미나스제라이스 주 주변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이후 리우는 금을 포르투갈 본국으로 실고가는 항구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Rio de Janeiro"는 포르투갈어로 "1월의 강"이라는 뜻이다. 브라질식 포르투갈어 발음은 "히우지자네이루"[ˈʁi.u d(ʒi) ʒaˈnejɾu]이다.
일반적으로 포르투갈어로 도시 이름을 읽고 쓰는 경우에는 단어 앞에 성별(남성형·여성형)을 구별할 수 있는 표식을 붙인다. 따라서, 일반 명사와 구별하기 위해 리우데자네이루는 반드시 남성형의 정관사인 "o"를 붙이게 되며, 보통 "o Rio de Janeiro"라는 남성형으로 불린다. 하지만, 도시 이름이 긴 편에 속하기 때문에, 보통 약칭으로 장거리 버스나 항공기의 목적지 표시 등에서 단순히 "리우"(Rio)로 단축된 표기를 사용한다.
브라질의 대표적 대도시로, 1763~1960년까지 브라질의 수도였으며, 약칭 리우 라고도 한다.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로 세계 3대 미항 중의 하나이며 대서양 연안에 면해 있다. 코파카바나, 이파네마 등 아름다운 해변이 해안을 따라 좁고 길게 뻗어 있으며, 케이블카를 타고 슈가로프 산(빵산)에 올라가 시내 전경을 감상 하는 것도 일품이다. 리오의 상징인 고르꼬바도 언덕의 예수상은 높이 39md에 무게는 무려 700톤에 달하며, 예수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2014년 월드컵이 열리는 도시로, 도시 정비가 한창이며, 예전보다 치안이 많이 좋아지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주도는 리우데자네이루시다. 16세기초부터 1834년까지 주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였다. 브라질 공화국이 선포된 1889년 리우데자네이루 군은 주가 되었고 1890년 테레소풀리스가 주도로 정해졌다. 지역의 경제는 노예노동력을 이용한 사탕수수 생산에 바탕을 둔다. 19세기에 커피가 중요한 상업작물이 되었다. 현재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며 대부분이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주산업은 야금술·인쇄업·조선업·정유업이다. 기후는 대체로 덥고 습하다.
북쪽으로 에스피리투산투 주와 미나스제라이스 주, 서쪽으로 상파울루 주, 남쪽으로 대서양을 경계로 한다.
리우데자네이루라는 이름은 주가 만들어지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리우데자네이루 시에서 유래했다. 전체면적 가운데 해안 석호(潟湖)와 내륙 호수 같은 곳이 960㎢를 차지한다. 주도는 리우데자네이루 시이다. 이 주의 역사는 리우데자네이루 시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 시는 16세기초부터 최초로 분리 독립체가 된 1834년까지 주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였다. 1835년 니테로이가 리우데자네이루 군(郡)의 군청소재지가 되었다.
브라질 공화국이 선포된 1889년 리우데자네이루 군은 주가 되었고 1890년 테레소풀리스가 주도로 정해졌다. 그러나 1902년 행정중심지는 다시 니테로이로 옮겨졌다. 1960년 브라질의 수도가 새로 건설된 브라질리아로 이전했을 때, 연방구(聯邦區)였던 영토는 과나바라 주로 신설되어 리우데자네이루 주 안에 고립된 채 남아 있게 되었다. 1975년 이 두 주는 합병되어 리우데자네이루 주로 재편되었고 리우데자네이루 시가 주도로 지정되었다.
군 단위의 영토가 형성될 때부터 이 지역의 경제는 노예노동력을 이용한 사탕수수 생산에 바탕을 두었다.
19세기에는 커피가 가장 중요한 상업작물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파라이바 계곡의 지주들은 큰 부를 축적했다. 이들은 1888년 노예제가 폐지되고 1889년 공화국이 선포될 때까지 브라질 제국의 지배집단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리우데자네이루 주는 평야 및 해안 저지대, 산이 많은 고지대, 내륙 고원 등 세 지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해안의 저지대 곳곳은 그란데 섬 앞바다 맞은편에 있는 해안줄기를 따라 프리우 곶과 사쿠아레마에서 볼 수 있듯이 바다까지 뻗어 있는 단층지괴나 암석으로 단절되어 있다.
이곳은 바다 쪽으로 뻗은 마르 산맥이 가까운 서쪽으로 갈수록 좁아진다. 기후는 대체로 덥고 습하다. 여름에는 소나기가 많이 내리며 겨울에는 남쪽에서 접근해오는 차가운 기단의 영향을 받는다. 1일평균기온은 보통 22℃ 이상이다.
산이 많은 고지대는 남서에서 북동방향으로 해안과 평행하게 뻗은 마르 산맥의 일부와 내륙 쪽으로 멀리 있는 만티케이라 산맥 일부를 포함한다.
페트로풀리스·테레소풀리스·노바프리부르구 같은 몇몇 주요 관광지 및 휴양지가 자리잡은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고도가 높기 때문에 평균기온 20℃ 이하의 온화한 날씨가 계속되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높은 곳은 오르강스 산맥과 이타티아이아 지괴인데 최고봉인 아구야스네그라스 산의 고도는 2,787m나 된다.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은 파라이바두술 강 유역으로 19세기에 처음으로 커피농장이 발달했던 곳이다.
정상 부분은 기온이 온화하지만 파라이바두술 강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더워진다. 이 강은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북동부에 있는 대서양으로 흘러나간다. 파라이바두술 강의 수평면에 해당하는 지역은 열대기후로 기온이 상당히 높다.
원래 열대림으로 뒤덮인 습윤지역이었으나 16세기 인디언과 유럽인 거주자들이 임시 농경지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고 불을 지르는 케이마다스 농법으로 넓은 토지를 개간하면서 열대림은 파괴되었다(화전농법). 플랜테이션 농경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면서 삼림개간은 계속되었다.
커피재배가 늘면서 더욱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삼림은 거의 소실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20세기 중반 브라질 정부는 넓은 언덕 중턱과 지괴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다시 나무를 심고 남아 있는 원시림을 보존하는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식물과 동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티주카 삼림(3,300㏊)으로 널리 알려진 지역을 196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오르강스 산맥의 3만㏊에 걸친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만들었고, 미나스제라이스 주 경계에 있는 만티케이라 산맥의 이타티아이아 지괴에도 1만 1,900㏊에 이르는 이타티아이아 국립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는 홍두(紅豆)·페로바스·임부이아스·양치류 및 종려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이런 국립공원을 제외하면 숲지대는 리우데자네이루 시 근처에 있는 구릉 사면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고 그나마 도시권이 점차 넓어지면서 사라지고 있다. 산타크루스·캄푸그란데·자카레파과 평원에는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반면 진흙이 많은 해안지대에는 여러 수종으로 된 울창한 홍수림(紅樹林)이 붉고 노랗거나 흰빛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삼림에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지만 초기 거주민들의 약탈과 계속된 도시반경의 확장 때문에 아주 깊은 보안림(保安林)이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들어가 사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 지역에서는 아직도 검은 꼬리와 부드러운 털을 가진 발톱원숭이를 비롯하여 '카신겔레'(Sciurus ingrami)라고 하는 다람쥐, '마쿠루'(Tinamus solitarius)라고 하는 도요타조가 발견된다. 오셀롯·앵무새·개미핥기·아르마딜로·아메리카너구리·덤불개·주머니쥐·뱀 등이 흔하다.
리우데자네이루 주는 브라질에서 가장 많이 도시화된 곳으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주민 대부분은 리우데자네이루 시를 비롯한 도심에 몰려 살고 있는데 로마 가톨릭교도가 대다수이지만 일부는 개신교와 심령술을 믿는다. 20세기 후반에 상당수의 병원과 의료 센터가 생겼다. 공립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및 대학교가 있으며 사립 고등교육 기관도 있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며 노동인구의 대부분이 제조업과 서비스업 계통에 종사한다.
농업은 주수입의 약 1/6, 제조업 생산은 약 1/3을 차지하며 서비스업은 절반 남짓한 비중을 차지한다. 주산업은 야금술·인쇄업·조선업·정유업이다. 섬유·식료품·화학제품 등을 많이 생산하며 사탕수수·오렌지·바나나 같은 농산물도 재배한다.
도로포장률은 20% 미만이며 센트랄두브라질 철도와 레오풀디나 철도를 통해 브라질 국립 철도망과 연결된다. 길이 14.5㎞의 리우-니테로이 다리는 리우데자네이루 시와 과나바라 만(灣) 동쪽에 있는 니테로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두 도시 사이에는 연락선과 수중익선(水中翼船)도 운항된다.
리우데자네이루 시에 속한 과나바라 만의 산투스두몬트와 고베르나도르 섬의 갈레앙에는 공항이 있다. 1977년 개설된 갈레앙 공항은 국내항공뿐 아니라 국제항공도 담당한다.
20세기 후반 들어 박물관·영화관·극장 및 방송국 등이 많이 생겼다. 일간신문도 상당수 발행되고 있다.
♣ 리오 데 자네이로
안내 ♣
브라질 리오 데 자네이로주(州)의 주도(州都)이자 1763~1960년까지 브라질의 수도였으며,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로 세계 3대 미항(美港)의 하나입니다. 시가지 뒤에 있는 약 700m의 코르코바도 암봉(岩峰) 꼭대기에는 리오의 상징인
그리스도상(像)이 세워져 있습니다. 연평균기온이 23.1℃이며 습도는 높으나 무역풍의 영향으로 서늘하며 코파카바나는 세계적 해변
휴양지입니다.
◈ 리오 데 자네이로
시내관광 ◈
☞ 리오의 명물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 그리스도상
☞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가 장식된
원뿔형 모양의 메트로 폴리탄 대성당 관광
리오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 그리스도상Statue of Christ the Redeemer in Rio, Brazil
세계적 명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코르코바도산(corcovado Mt.704m) 정상에 있는 그리스도상.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으로서 관광객들의 세계적인 명소이다.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지 10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규모는 높이 38m, 양팔의 길이 28m, 무게 1,145톤이다. 설계는 브라질인 에이토르 다 실바 코스타(Heitor da Silva Costa)와 폴란드계 프랑스 조각가 폴 란도프스키(Paul Landowski)가 담당하였으며, 자금은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 1926년부터 1931년에 걸쳐 공사가 이루어졌는데, 그리스도가 두 팔을 한일자(一) 모양으로 넓게 벌리고 서 있는 모습으로, 신체 부분을 각각 따로 조각하여 결합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외관은 하얀 빛깔의 납석을 발라 마감하였으며, 기단 내부에는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이 있다.
2000년 새롭게 보수하였으며 주변에서는 코파카바나 해안, 이파네마(Ipanema) 해변, 슈가로프산(Sugarloaf Mt.) 등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2007년 7월 만리장성, 페트라 등과 함께 신(新) 7대 불가사의로 지정되었다.
◈ 리오 데 자네이로
시내관광 ◈
☞ 슈가로프 산 케이블 카를 타고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리오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
☞ 보석 채취 및 가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H.STERN 보석 박물관
☞ 세계 3대 미항이라고 불리는 꼬파카바나 해별, 이빠네마 해변 감상 (차창 관광)
코르도바 언덕과 예수상Morro do Corcovado
초대형 예수 그리스도상이 여기에
코르코바도 언덕에는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었다는 거대한 그리스도 석상이 있다. 이 석상은 리우데자네이루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조물이다. 이 석상은 리우데자네이루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조물이다. 코르코바도 언덕은 자동차를 타거나 도보로 올라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관광객은 보조 톱니 레일이 달린 산악 관광 열차를 타고 올라간다. 우리가 산 아래의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을 운행하는 관광 열차는 모두 3칸으로 되어 있으며 20분 간격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산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열대 원시림과 그 숲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리우데자네이루의 도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랜 옛날부터 현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히우 지 자네이루의 중심은 바로 코르코바도 언덕이었다. 이곳에는 1931년 브라질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초대형 예수 그리스도상이 있다. 높이 38m, 양팔 너비 28m, 무게 1,145톤에 이르는 이 예수상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며 감싸 안고 있다. 언덕 위에서는 이 거대한 예수상의 전체 모습을 온전히 카메라에 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크다. 예수상의 내부에는 시내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15명 정원의 전망대가 있다. 날씨 좋은 날 오후에 방문하면 세계 3대 미항 도시에 내려앉는 붉은 황혼을 바라보며 생애 최고의 노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위치 : 코즈메 베료(Cosme Velho) 케이블식 등산 열차를 타고 30분간 올라가면 된다. 이파네마, 코파카바나에서 583번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는 584번을 탄다.
팡데아수카르에서 본 보타포고 해안과 코르코바도 언덕-보타포고 해안은 과나바라 만 안에 형성된 또 다른만의 모래 해안으로 이와 같은 모래 해안을 포켓비치라고 한다. 왼쪽 끝에 보이는 돔형의 바위산이 코르코바도 언덕이며 흰 구름으로 가려진 자리에 그리스도 석상이 있다.
코르코바도 언덕의 관광 열차-스위스의 산악 열차를 도입하여 산 정상까지 관광객을 수송한다.
산 정상의 그리스도 상-양팔을 벌린 거대한 그리스도 상이 있는 산 정상에서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리스도 상은 리우데자네이루의 기원이 되는 동쪽의 과나바라 만 입구를 바라보며 남북 방향으로 팔을 벌리고 있다. 왼팔이 가리키는 방향이 리우데자네이루의 중심가인 ‘센트로(중심부)’이며, 오른팔이 가리키는 방향이 ‘조나술(남부 지역)’인 코파카바나, 이파네마 해안이다. 따라서 코르코바도 언덕 정상에서 가장 쉽게 리우데자네이루의 시가지 배치를 파악할 수 있다. 결국 리우데자네이루의 시가지 어디에서든 이 그리스도 상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코르도바 언덕과 예수상-코르코바도 언덕의 그리스도 상과 더불어 리우데자네이루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자연물이 팡데아수카르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팡데아수카르의 모습도 장관이지만, 이 산에서 바라보는 리우데자네이루의 모습도 정말 아름다웠다. 케이블카를 두 번 갈아타고 395m의 가파른 암벽을 올라가면 리우데자네이루와 과나바라 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거기서 리우데자네이루의 해안과 도시 전경을 바라보니 과연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라는 명성이 무색하지 않았다.
리우 그리스도 상
그리스도 상은 처음에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구상되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코르코바도 정상에 있는 그리스도 상. 리우의 상징으로 리우시와 대서양을 품에 가득안고 있는 이 그리스도 상을 세우기 위해 리우의 시민들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았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국토를 갖고 있으며 인구가 1억 8000만 명이나 되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이하 리우)는 여러 가지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 리우는 ‘1월의 강’이라는 뜻인데 16세기 초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가 처음 이곳에 상륙한 것이 1월이었고 파도 없이 깊숙이 들어온 만을 강이라 생각하고 붙인 이름이다.
리우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와 함께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힌다. 대서양에 면해 있고 1년 내내 따뜻하고 온화한 기후이다. 코르코바도, 팡데아수카르(까끌까끌한 작은 섬), 킨타다보아비스타 공원, 티주가 공원, 세계적인 휴양지인 코파카바나 해변 등이 유명하다.
팡데아수카르는 해발 400미터가 채 안 되는, 달걀처럼 묘하게 생긴 화강암 산인데 바다로 돌출해 있기 때문에 정상에 오르면 리우의 아름다운 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로 알려진 ‘리우-니테로이’ 다리도 보이는데 길이가 장장 12킬로미터를 넘는다.
리우의 해변은 유명한 코파카바나를 비롯해 10여 곳의 해변이 각기 특색을 자랑한다. 백사장 길이를 모두 합하면 80킬로미터에 달하며 특히 5킬로미터에 달하는 백사장이 있는 코파카바나 해변은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다. 코파카바나 해변 인근의 메이오 해변도 시선을 끈다. 이곳엔 누드족만 들어갈 수 있다.
코르코바도 정상에서 리우시를 품에 안고 있는 그리스도 상
하단부의 소규모 성당 위에 조각상을 설치했는데 산 정상에 세워지는 것을 감안해 머리의 면류관과 두 팔이 피뢰침 역할을 하도록 했으며 양 손바닥에 예수의 고난을 의미하는 못 자국을 조각했다. 기본 재료는 콘크리트지만 그 위에 연마한 녹색 동석(凍石)으로 된 작은 삼각형 타일을 덮어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 거상은 프랑스에서 제작된 다음 리우로 옮겨 조립한 것이다.
그리스도 상의 의상 안에 든 네 기둥은 조상 전체를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기둥들은 가로 버팀대로 묶여 있어 조상이 바람에 견딜 수 있게 해주며 아래로는 기단의 토대에 연결되어 있다. 또한 바닥에서 조상의 어깨가지 올라가는 기둥 중간 중간에 적당한 간격으로 단을 끼워 묶었다. 그 기둥들은 조상의 외부 형태에 따라 구부러져 있다. 목 부분의 안에는 가로 들보로 연결한 캔틸레버(cantilever)식 지지대를 설치해 머리의 무게를 지탱토록 했다. 두 팔은 철근 콘크리트로 된 격자 들보로 지탱했고 손 부분은 강철 격자 들보로 떠받쳤다. 세월이 흐르면서 해풍 등으로 풍화가 계속되자 1990년 실리콘계 방수 석재 처리제를 이용해 보존처리 과정을 거쳤다.
그리스도 상의 뒤 모습
머리 윗부분을 뒤에서 자세히 보면 가시 면류관을 상징하는 침이 있는데 피뢰침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 상의 손바닥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못 자국이 있다.
그리스도 상의 기단 안에는 작은 성당이 있다.-주름진 성의(聖衣) 자락 위로 활짝 펼쳐 든 팔은 하늘을 향하지도 땅을 향하지도 않는다. 백인과 인디오의 풍모가 묘하게 융합된 조상의 얼굴은 리우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조상 내부에는 15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돼 있지만 현재는 사전에 브라질 산림청(IBAMA)으로부터 촬영허가를 받은 사람에 한해 공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시내의 경관뿐만 아니라 코파카바나 해변, 이파네마 해변까지 볼 수 있다. 2003년 1월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200여 개의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서 주변의 경관을 보는 것도 일품이다.
리우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역시 세계 신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된 코르코바도(곱사등이)의 그리스도 상이다. 그리스도 상은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931년 코파카바나 해변 맞은편에 위치한 해발 710미터의 코르코바도 언덕 정상에 건설되었다. 브라질인 에이토르 다 실바 코스타가 설계를 마무리했다.
원래 십자가를 들고 있는 청동상으로 설계되었으나 금속 골조는, 당시 브라질 정황을 감안할 때, 정권이 바뀌면 철거하고 녹여버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철근 콘크리트 골조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수차례의 설계 변경을 거치면서 결국 프랑스의 조각가 폴 란도프스키가 디자인한 높이 38미터, 양팔을 벌린 길이 28미터, 손바닥 크기 3미터, 무게 1145톤의 거대한 조각상으로 확정되었다.
코르코바도산 멀리로 보이는 바다 풍경
리우의 상징 거대 그리스도 상이 세계 신 7대 불가사의의 후보 명단에 포함되자 인간이 만든 가장 경이로운 작품을 뽑는다는 세계 신 7대 불가사의 선정의 본래 목적과는 달리 민족성에 의지하는 졸작들이 선정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그리스도 상은 19세기 말에 건설된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이나, 20세기 중반에 건설된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만큼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에펠탑과 오페라하우스는 건설 시기는 늦지만 당대의 과학기술이 총동원된 역작이지만 리우의 그리스도 상은 단순한 콘크리트 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우 그리스도 상은 당당하게 세계 신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되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된 것이었다. 그리스도 상이 세계 신 7대 불가사의 최종 후보에 포함되었다고 알려지자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1억 8000만 국민에게 세계 신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될 수 있도록 투표에 적극 참여해 줄 것을 촉구했다. 심지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브라질인은 브라질인이 아니라고까지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리우 그리스도 상이 세계 신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되자 브라질인들은 그리스도 상의 가치와 선정의 정당성에 대해 당당히 밝혔다.
이번 선정 프로젝트는 인간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믿기 어려운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는 불가사의한 작품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일곱 개의 걸작품을 선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리우 그리스도 상이 다른 후보들에 비해 역사성이나 건축적 의미에 있어 다소 떨어진다 하더라도 프로젝트의 20개 후보군에 선정될 정도라면 그리스도 상이 선정되도록 자신들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신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된 기념물을 가진 중국 · 인도 · 요르단 등의 나라에서도 국민들에게 투표에 적극 참여하라고 호소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스도 상을 만들게 한 브라질의 역사는 유럽인들의 상륙으로부터 시작한다. 1500년 인도를 향해 리스본에서 항해를 나선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 1467~1520)이 우연히 브라질 해안가에 도착한 뒤 1531년 포르투갈 왕은 브라질에 정착민들을 보냈다. 당시 포르투갈은 해양국으로 매우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냐 등 다른 나라의 정복자들이 접근하지 않았다. 브라질이 남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이유이다.
브라질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은 브라질의 토지와 기후가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하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고 많은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1690년대에는 미나스 제래스(Minas Gerais)에서 황금이 발견되자 브라질인과 포르투갈인은 물론 아프리카 노예들이 광산에 투입되었다.
1807년 나폴레옹 군대가 리스본으로 진격하자 포르투갈 왕 주앙 6세와 왕족 일가가 브라질로 피신하여 리우데자네이루를 포르투갈브라질연합공화국의 수도로 정했다. 그런데 1822년 국왕 주앙 6세가 귀국한 후 왕자 돔 페드루는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페드루 1세라 칭했다. 1831년 페드루 1세가 전제(專制)를 이유로 물러난 후 페드루 2세가 뒤를 이었다. 1888년 브라질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페드로 2세는 요양 여행이 잦아 딸 이사벨 공주에게 국내 정치를 위임했는데 그녀가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노예들을 해방시켜버린 것이었다. 이 사건은 브라질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어이없이 노예들을 빼앗기게 된 당시의 기득권자인 지주와 권력자(일명 콜로네레스)들은 곧바로 왕정에 반격을 가했고 1889년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출범시켰다. 그 후 40년 동안, 19세기 말 세계 커피 총생산의 4분의 3을 차지한 커피 생산 경제를 바탕으로, ‘콜로네레스’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그리스도 상을 건립하겠다는 아이디어는 1850년대부터 있었지만 1889년 브라질이 공화국이 되면서 정교(政敎) 분리가 이루어져 성사되지 못하다가 1921년 시의 상징적 차원에서 그리스도 상 건립 필요성이 다시 한 번 제기되어 추진됐다. 1926년 공사가 시작되어 브라질 독립 100주년 되는 해인 1931년 10월 12일 오후 7시 불꽃이 펑펑 터지는 가운데 거대한 그리스도 상은 온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화와 사랑의 상징인 그리스도 상이 계획되고 건설된 시기에 브라질에서는 봉기와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콜로네레스’의 지배에 대항해 19세기 말 바이아주 농민들이 대봉기를 일으켰고 1912~1915년에는 남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922년 ‘테니엔테스(청년장교)’의 반란을 지휘한 프레스테스는 1924~1926년에 부대를 이끌고 정부군과 싸우면서 2만 4000킬로미터나 행군했지만 정권을 타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30년 세계대공황 하에서 커피 생산이 타격을 받게 된 것을 기회로 리우그란데두술주 목축 · 공업자본을 대표한 바르가스가 청년장교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으킨 쿠데타를 통해 ‘콜로네레스’의 지배는 무너졌다.
코르도바 산
과나바라 만에 위치한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수많은 아름다운 봉우리들처럼 코르코바도 산도 약 3억 년 전에 형성된 고대 화산의 중심부이다. 화산의 핵이나 다름없었던 화산의 용암은 매우 서서히 식어서 매우 작은 알갱이모양의 암석이 되었다. 이 암석은 매우 단단해서 주변의 지형이 침식작용으로 평지가 되어갈 때도 살아남았다. '곱사등이'라는 뜻의 코르코바도 산은 이제 정상에 세워진 '그리스도 상'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38미터 높이의 조각상은 브라질의 공학가인 헤이토 실바 코스타가 디자인을 했고 코스타와 프랑스의 조각가인 폴 랜도우스키에 의해 5년 만에 세워졌다. 1931년 완공되던 당시 조각상은 손 하나만 3.2미터에 달할 정도였다. 리우를 처음 방문한 페드로 마리아 보스라는 신부가 코르코바도 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리스도 상을 세우자고 제안을 한 때가 1859년이었다. 710미터 높이의 코르코바도 산은 세계 최대의 도시 삼림인 티주카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정상 부근에는 커피 농장이 많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정도로 삼림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 공원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브라질의 해안 우림을 보존하는 노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코르코바도 언덕에서 본 로드리고데프레이타스 호와 이파네마 해안-
바깥쪽의 이파네마 해안 사주가 성장하여 석호를 만들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가깝고 해발 고도가 높은 급경사의 산지인 까닭에 코르코바도 언덕 정상은 기류의 변화가 매우 심하다. 따가운 햇살이 비치다가도 이내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짙은 구름이 끼고, 어느 틈엔가 다시 맑아진다. 일단 해가 나면 뜨거운 햇살에 그늘을 찾게 되지만, 구름이 하늘을 덮으면 서늘하다 못해 춥다. 산 정상에 오른 우리 일행은 수많은 인파의 틈을 비집고 리우데자네이루의 도시 조망과 촬영을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런데 막상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카메라를 들이대려고 하니 짙은 구름이 앞을 막았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를 한꺼번에 보여 주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세계 3대 미항으로 불리는 꼬파카바나 해변, 이빠네마 해변
코파카바나 해변Copacabana ,Praia de Copacabana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남동쪽 대서양에 면한 해변 지구.
리우데자네이루의 세계적인 관광지·휴양지로, 코파카바나 해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활처럼 완만하게 굽은 약 5㎞의 백사장에는 희고 검은 모자이크 모양으로 치장한 산책길을 따라 고급 호텔·아파트 등이 늘어서 있다. 또 동서쪽 거리에는 상점·나이트클럽·바·극장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1년 내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특히 카니발이 열리는 2월에 관광은 절정을 이룬다.
하얗게 빛나는 고운 모래가 약 5km에 걸쳐 펼쳐져 있는 이 해안은 1년 내내 따뜻한 기후를 가진 곳이기 때문에 관광객이 끊이는 날이 없다. 대담하고 시원한 차림의 젊은 남녀들이 해안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해안 옆의 대로에는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이 도시의 가장 훌륭한 관광과 유흥의 장소로 역할하고 있다. 주변 편의 시설을 이용할 때도 수영복 차림인 사람들을 꽤 볼 수 있는데 버스 안에서도 수영복을 입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으니 너무 놀라지 말자. 코파카바나 해안은 사람이 많은 만큼 범죄도 자주 발생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고가의 제품을 휴대하지 않도록 하고 항상 여러 명의 일행과 같이 다니도록 하자. 밤중에 해안을 서성이는 행위는 스스로 표적이 되는 일이므로 밤에는 숙소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
위치 : 지하철 1호선 아르코베르데(Arcoverde) 역에서 걸어서 약 5분이 소요된다. 프레스콘 공항 버스를 타도 코파카바나 해안에서 내릴 수 있다. 시내에서 119번, 121번 버스가 코파카바나 해안 근처를 지나간다.
이파네마 해변Ipanema Beach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남쪽에 있는 세계적인 바닷가 휴양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빙(Antônio Carlos Jobim)이 작곡한 명곡 <이파네마의 처녀>로도 유명하다.
바닷가 서쪽 끝에‘두 형제’라는 의미를 지닌2개의 산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해안가에는 고급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해변에는 브라질에서 생성된 축구와 배구가 결합된 풋벨리(Footvolley), 배구, 축구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곳곳에서 브라질의 전통맥주 ‘카샤사(Cachaça)’를 판매한다.
겨울에는 파도가 미치는 범위가 3~4.5m에 달하고, 밝은 푸른빛에서 어두운 초록빛까지 다양한 물빛을 지니고 있다.‘게이비치’라고 불리는 지역이 유명한데, 이곳은 동성애자들에게 우호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하늘에는 무지개 깃발(rainbow flag)이 떠 있다. 이곳의 서쪽, 부유층이 사는 레블롱(Leblon) 지역 쪽에는‘포스토 노베(Posto Nove)’라고 하는 유명한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리오 메트로 폴리탄 대성당Metropolitan Cathedral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가 장식된 원뿔형 모양
상세바스티안관구 메트로폴리탄대성당-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1976년에 건립되었으며, 미술관이나 영화관처럼 보이는 건물로 바닥 지름이 106m, 높이 68m이다.
원추형으로 생긴 독특한 건물 디자인으로 얼핏 보면 성당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름 104m, 내부높이 68m, 수용인원 2만 5000명이다. 천장까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위쪽에 매달아놓은 그리스도의 상이 매우 독특하다.
상세바스티안관구 메트로폴리탄대성당 내부-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정식명칭은 'Catedral Metropolitana da Arquidiocese de Sao Sebastian de Rio de Janeiro'이다. 1964년 1월 20일 건립되어 돈하이메데바로 신부가 축성하였다. 1997년 10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여 성채대회를 열었다.
쉬라스코Churrasco(슈하스코), 브라질 전통 바비큐 요리
고기와 야채, 과일을 꼬치에 꿰어 숯불에 구운 브라질의 전통 음식
쇠고기·돼지고기·파인애플 등 여러 가지 재료를 꼬챙이에 꽂아 숯불에 구운 브라질의 전통요리.
쇠고기 · 돼지고기 · 닭고기 등의 고기와 양파, 파인애플, 감자 등의 채소 또는 과일을 꽂아 숯불에 구운 브라질의 전통 요리다. 수 세기 동안 브라질 남부의 카우보이나 가우쵸들이 즐겨 먹은 음식으로 현재도 브라질의 대표 요리다. 브라질은 육식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로 고기를 주재료로 하는 요리가 많은데, 슈하스코는 특히 생일이나 결혼 등 큰 행사에 빠지지 않고 올려지고 있다.
슈하스코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고기를 두툼하게 썰어서 1m 정도 길이의 쇠꼬챙이에 꽂는다. 이후 굵은 소금을 뿌려가며 천천히 돌리면서 숯불에서 굽는데, 익은 부분은 먼저 베어내어 먹고 익지 않은 부분에 소금을 뿌려 굽는 과정을 반복한다. 기름기가 제거되고 소금으로만 간을 해 담백한 맛이 특징으로, 다 구워지면 보통 토마토 소스와 양파 소스와 함께 먹는다.
페이조아다와 함께 브라질의 대표적인 전통음식이다. 영어로는 ‘츄라스코’또는 ‘츄라스꼬’라고 하는데,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브라질에서는 ‘슈하스코(churrasco)’라고 하며, 슈하스코전문점을 ‘슈하스까리아(churrascaria)’ 라고 한다.
육식을 주식으로 하는 브라질은 쇠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등을 주재료로 한 음식이 많이 발달하였는데, 생일이나 결혼식 등 잔치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바로 슈하스코이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부위별로 맛볼 수 있으며, 파인애플· 양파· 호박 등의 채소를 곁들여서 만들기도 한다. 만드는 방법은 고기를 두툼하게 썰어서 1m 정도 길이의 쇠꼬챙이에 꽂는다. 굵은 소금을 뿌려가며 천천히 돌리면서 숯불에서 굽는다. 익은 부분만 먼저 베어내어 먹고 익지 않은 부분은 소금을 뿌려 굽는 과정을 반복한다. 기름기가 충분히 제거되어 고기 맛이 담백하다. 다 구워지면 토마토소스와 양파소스에 곁들여 먹는다. 쇠고기의 경우 각 부위별로 고기를 자르는데, 최소한 3-4년의 경력이 필요할 정도로 숙련된 전문성이 요구된다.
페이조아다-콩, 돼지고기, 소시지, 햄, 양파, 마늘. 콩과 고기를 함께 끓인 것으로 대표적인 브라질요리이다. 과거에 브라질의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 먹던 음식에서 유래하였다. 노예들은 먹을 것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농장주인들이 먹지 않고 버린 돼지꼬리·귀·족발 등을 페이조(feijo)라고 하는 검은콩과 함께 삶아 먹었다고 한다. 요즘은 여러 가지 고기·소시지·베이컨 등과 야채를 넣어 다양한 맛을 낸다. 보통 수요일과 토요일 점심에 먹는데, 칼로리가 높고 소화되는데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만드는 방법은 우선 검은콩을 하루 저녁 정도 불린다. 다음 날 검은콩과 함께 쇠고기 또는 돼지고기·돼지꼬리·족발·돼지귀·햄·소시지 등을 넣고 하루종일 푹 삶는다. 삶아낸 고기를 썰어 부위별로 그릇에 담고, 볶은 양파·마늘 등을 월계수잎·콩과 섞어 다시 끓인다. 쌀밥이나 감자의 일종인 마니옥 가루와 함께 먹기도 한다.
슈가로프 산Sugar Loaf Mountain( 팡데아수카르산 Pao de Acucar)
케이블 카를 타고 세계3대 미항의 하나인 리오의 전경 감상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주(Rio de Janeiro)에 있는 산.
한 편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절경
팡데아수카르산-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리우항 입구에 있는 높이 501m의 바위산.
영어로는 슈거로프산(Sugarloaf Mountain)이라고 부른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주의 구아나바라만(Guanabara Bay) 어귀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396m이다. 슈거로프라는 명칭은 정제하여 농축시킨 제빵용 설탕 덩어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것이다. 일설에는 원주민인 타모이오스족(Tamoios)이 사용하는 투피구아라니어(Tupi-Guarani)로 '높은 구릉'을 뜻하는 '파우-엔-아쿠쿠아(Pau-nh-acuqua)'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리우데자네이루주 주변의 물가에서 여러 개의 화강암과 석영이 합쳐 하나의 원구(圓丘)를 이루어 수직으로 솟은 유일한 산이다. 포르투갈어로 본디노(bondinho) 또는 텔레페리코(teleférico)라고 부르는 75인승 케이블카가 바빌로니아(Babilônia)와 우르카(Urca) 사이의 1,400m 구간을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이 케이블카는 1912년 가설되었으며, 영화 촬영장소로도 이용되어 잘 알려져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또 다른 랜드마크는 슈거로프 산이다. 16~17세기 때 브라질에서는 사탕수수를 끓이고 정제한 후 '슈거로프'라고 부르는 원뿔 모양의 진흙 용기에 보관했는데 이 산의 모양이 꼭 그 용기를 닮았다고 해서 슈거로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도시와 과나바라 만을 당당하게 내려다보는 슈거로프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산의 하나일 것이다. 이 산은 약 6억 년 전 용암 상태로 관입된 거대한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약한 부분은 침식작용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황량한 바위산만 남았다.
풍화작용으로 박리 현상이 일어나 가장자리가 부드러워지면서 지금처럼 완만한 화강암 산이 되었다. 산의 정상에서 보면 해안을 따라 거대한 화강암 바위산이 늘어서 있다. 한때 이 지역을 울창하게 뒤덮었을 대서양 연안 우림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다. 현재 이 산의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 혈기 왕성한 등산객들은 험준한 바위산을 직접 타기도 하는데 정말이지 도전할 가치가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최고봉은 슈거로프도 코르코바도도 아닌 페드라다가베아 혹은 톱세일락이라고 부르는 봉우리로 행글라이더 애호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아름다운 해안을 자랑하는 이 도시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다면 바로 팡 지 아수카르다. 달걀 모양을 한 이 기괴한 형상의 화강암과 수정으로 이루어진 언덕은 마치 바다의 위협으로부터 대륙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내륙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는 약 400m밖에 되지 않지만, 바다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마치 바다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팡 지 아수카르는 ‘설탕으로 만든 빵’이라는 의미의 포르투갈 어다. 바닷가에서 이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어떻게 찍더라도 한 편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을 남길 수 있을 정도로 환상적인 배경을 제공해 준다. 또한 코르코바도 언덕에서 바라보는 팡 지 아수카르, 그리고 팡 지 아수카르에서 바라보는 코르코바도 언덕은 각각 독특한 즐거움을 주는 절경이다.
위치 : 시내에서 107번 버스, 해안 지구에서는 511번 혹은 512번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팡 지 아수카르로 가는 로프웨이 탑승장으로 가야 한다. 두 번에 걸쳐 로프웨이를 타고 올라가게 되는데 우선 탑승장에서 우르카 언덕까지 올라간 다음 팡 지 아수카르로 가는 로프웨이로 갈아탄다.
팡데아수카르
케이블카를 타고 이 거대한 바위 위에 오르면 코르코바도의 그리스도 상은 물론 리우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베니스 · 니스와 함께 카니발(Carnaval)로도 유명하다. 원래 카니발은 금욕 기간인 사순절을 앞두고 즐기는 축제를 말하는데 리우 카니발은 매년 2월 말부터 3월 초 토요일 밤에서 수요일 새벽 4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축제가 열린다. 전체 브라질 관광객의 3분의 1이 이 기간에 브라질을 찾는다.
리우 카니발
리우 카니발은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건너온 사람들의 사순절 축제와, 아프리카 노예들의 전통 타악기 연주와 춤이 합쳐져서 생겨났다.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20세기 초에 지금과 같은 형식의 카니발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까지는 보통의 거리축제에 지나지 않았는데 카니발을 위한 삼바학교들이 설립되고 학교별로 퍼레이드를 펼치면서 지금과 같은 대규모의 축제로 발전했다. 리우 카니발이 세계적인 축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삼바 퍼레이드 덕분이다. 삼바 무용수들이 퍼레이드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된 거리를 ‘삼바드로모’라고 하는데 총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타악기를 연주하는 대규모 밴드를 ‘바테리아’라고 한다.
브라질인들은 리우 카니발이 끝나자마자 다음해의 카니발을 준비한다. 과거 브라질에서는 리우 카니발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우승팀에게 거액의 상금을 부상으로 주었지만 현재는 상금을 주지 않는다.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각 단체에서 지원하는 지원금과 자비로 경비를 부담해야 하는데 보통 지원금은 총 경비의 10퍼센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거의 전부를 참가자들이 부담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화려한 의상과 독창적인 장식, 춤과 율동을 선보이는 것을 보면 브라질인들의 축제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브라질인들이 카니발을 기다리며 1년을 산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보석박물관
보석 채취 및 가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H.STERN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주 |
상파울로를 중심으로 리오데자네이로와 함께 경제적으로 삼각벨트를 형성하는 브라질 경제·산업·유통의 중심지이다. 광업·기계·군수·섬유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금·철·보석·알루미늄·석탄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도시로 바로크양식의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삼바 공연 퍼레이드 장소인 삼보 드로모
삼바드로모에서 화려한 의상과 역동적인 춤을 추며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삼바 무용수들
리우 카니발은 브라질, 아니 지구촌을 대표하는 축제 중의 하나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카니발을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라카낭 축구장
리우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장(Estadio Maracana)이 있다. 1950년 월드컵을 위해 건립된 이 경기장은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 하나도 없으며 자동차가 관중석까지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 경기장에서 열린 195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20만 명의 관객이 보는 가운데 우루과이에게 패했다. 일반 축구 경기에도 10만 명 정도의 관객이 모인다니 축구에 대한 브라질인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다. 평일에는 축구장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데 리프트를 타고 귀빈석에 가볼 수 있고 잔디도 밟아 볼 수 있다. 축구장에는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승자와 패자의 눈물이라는 동상이다. 승자는 기쁨에, 패자는 슬픔에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로, 축구의 결과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짐작케 한다.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리우의 마라카나 축구장
마라카낭 스타디움은 브라질 축구팬들에게는 비극의 장소로 기억돼 왔다. 지난 1950년 월드컵을 개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경기장은 브라질 축구의 성지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당시 마라카낭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 우루과이와 경기에서 브라질은 통한의 역전패를 당하며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알려진 당시의 기억은 지금까지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았다.
상파울루의 축구박물관에는 줄리메컵 등 빛나는 브라질 축구의 역사와 함께 ‘마라카낭의 비극’을 소개하는 코너가 따로 마련돼있을 정도다. 지난 2014 브라질월드컵 당시에는 브라질이 이곳에서 치른 경기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준결승전을 비롯해 결승전도 ‘축구의 성지’ 마라카낭에서 열린다.
과거 20만명 까지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브라질월드컵 등을 위해 개보수 공사가 진행되면서 현재는 8만석 정도로 관중석의 규모가 줄어들었다. 도너츠 모양의 형태에 관중들의 머리위로는 지붕이 둘러쳐져 있다. 완만한 각도의 좌석배치는 안정적인 시야를 제공함과 더불어 열정적인 응원을 그라운드 위로 모아주는 역할을 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브라질 팬들은 선수들 움직임 하나하나에 격하게 반응하며 마치 한 몸처럼 경기를 치렀다. 응원을 주도하는 ‘서포터스’도, 북이나 나팔같은 보조도구도 없었지만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노래는 일사분란했다 . 브라질이 공격을 전개할 때마다 기립해 함성을 지르는 팬들의 모습은 마치 상대 진영으로 노란색 파도가 몰려가는듯 했다. 선수들도 힘이 난 듯 6골 맹폭으로 화답했다.
리오 카니발 쌈바 축제 - 앵콜 공연 관람
흥겨운 쌈바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춤추는 화려한 의상의 무희들과,
휘황찬란한 각종 퍼레이드!! 정렬의 쌈바 축제를 직접 보실 수 있는 기회
리우 카니발(Carnaval do Rio de Janeiro)은 남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축제 중에 하나로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삼바 축제다.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일본의 삿포로 눈축제와 함께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축제 기간은 금욕기간인 사순절을 앞둔 매년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인 여름에 4~5일 동안 개최된다.
상파울로 (Saopaulo)
해발고도 약 800m의 고원에 위치한 남아메리카 최대의 도시이다. 여름은 서늘하고 쾌적한 기후로 연평균 기옦이 18도로, 연중 기온의 변화가 적은것이 특색이다. 브라질에서 개발이 가장 잘 된 곳으로, 커피 생산은 세계 총 생산액의 40%를 차지핚다. 봉헤찌로 거리에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의류상점이 많아 우리나라 명동을 연상케 한다.
브라질은 세계적인 관광자원국가이나 국토가 광대하여 관광자원이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 이구아수(Iguaçu), 오루 뿌레뚜(Ouro Preto), 살바도르(Salvador), 마나우스 (Manaus) 등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다. 상파울루는 브라질 최대 상공업 도시로서 유적지는 많지 않다.
상파울로 한인상가 밀집지역인 봉헤찌로Bom Retiro 거리.봉헤찌로 한인타운(코리아타운)
브라질 상파울로의 한인 마을. 해외 한인마을
개설
봉헤찌로 한인타운은 상파울로 시(市)정부가 2010년 1월 조례에 의해 한인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모여 경제활동을 하는 봉헤찌로(Bom Retiro) 구(區)를 “상파울로 한인구역(Bairro Coreano em São Paulo)"으로 지정하자, 브라질 사회가 이곳을 ‘봉헤찌로 한인타운(Korea Town)’으로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브라질 한인교포의 수는 약 5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중 98%가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도시 상파울로에 집중되어 있다. 한인들 중 약 60%인 약 3만 명은 여성의류제품의 생산과 도·소매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그들이 주로 활동하는 지역은 한국의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에 해당하는 봉헤찌로(Bom Retiro) 구(區)와 브라스(Brás) 구(區)이다. 최근 이들 지역에서 한인상인들의 소유 상점의 수는 각각 약 1,500개와 약 1,800여로 추정되고 있다.
브라질은 세계 제2위의 데님생산국, 세계 제3위의 니트 생산국, 세계 제5위의 섬유 생산국 그리고 면을 자급자족하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이다. 의류 잡화 액세사리를 포함한 브라질 의류산업의 총매출은 740억 달러에 이르는데, 그 중 국내생산은 220억 달러에 해당한다(국내 총 생산의 약 4% 해당). 브라질은 년 90억 장의 의류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약 170만 명(그 중 75%는 여성)을 고용하여, 브라질 산업에서 두 번째로 큰 고용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빈부의 차가 큰 브라질 시장은, 명품시장의 매출(총 76억 달러)은 세계 매출의 1%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빈약하다. 중저가의 여성의류 생산에 초점을 맞춘 재브라질 한인사회의 의류생산 활동은, 한국의 동대문시장과 같이 값싸고 질이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봉헤찌로(Bom Retiro)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진작부터 브라질 의류업계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유럽에서 유행하는 모델과 색상을 재빨리 받아들여, 가장 많은 원단을 소비하는 시장 중의 하나로 직물업계와 패션업계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따라서 하루 유동인구 7만 명인봉헤찌로區는 브라질 지방의 소매상인, 파라과이나 볼리비아와 같은 남미국가들의 도매상인들, 중앙아메리카의 도미니카공화국, 북미 미국의 자바시장, 그리고 아프리카의 앙골라 도매상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2010년 상파울로 市정부가 시조례를 바꾸어 봉헤찌로를 문화특구로 지정하게 된 근본 배경은 2006년 상파울로 주정부의 한국총영사관에 대한 “한국의 문화의 날” 행사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인사회에서는 2008년 11월 당시 한인회의 박동수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브라질 방문시 있었던 동포와의 간담회 때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째든 당시 총영사였던 김순태가 2008년 12월부터 상파울로 시의회와 접촉하고, 그 결과 상파울로 시(市)정부가 시조례를 바꾸어 봉헤찌로를 문화특구로 지정하게 되었다.
상파울로 시(市)정부가 봉헤찌로(Bom Retiro) 구(區)를 “상파울로 한인구역(Bairro Coreano em São Paulo)"으로 지정한 것은 루스역(Estação da Luz) 주변의 노바 루스(Nova Luz) 재개발계획 등으로 날로 악화되고 있는 봉헤찌로 지역의 상권약화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봉헤찌로(Bom Retiro) 구(區)의 재개발에 대한 정당성은 그것의 지정학적 위치 - 시내와 가까워 전철역과 기차역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과률료스(Guarulhos) 국제공항과 티에테 시외버스터미널(Tieté Terminal de Rodovidária)과도 가까운 곳 - 때문이다. 게다가 향후 고속철 및 공항철도 건설이 계획된, 미래 교통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봉헤찌로에는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1930년대 이곳에 진출한 유대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단 곳이다. 1990년 브라질 정부의 시장개방 정책으로, 이곳은 새로은 한인들의 생활터전이 되었다.
상파울로 시(市)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그동안의 한인들의 공로 ― 봉헤찌로 활성화와 성장 ― 를 인정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봉헤찌로 재개발에 대한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파울로 市정부는 봉헤찌로의 일부를 “문화보호지역”으로 지정하며,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과정에서 한인타운으로 명명했기 때문이다. 리베르다지 구(區)가 1950년대 ‘일본인 촌’으로 명명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상파울로 시(市)정부는 도시 확장사업의 일환으로 일본계 이민자들에게 그곳의 땅을 무상공급하며 그곳의 개발비용과 개발방식을 전적으로 그들에게 부담시킨 바 있다. 따라서 재브라질 인본인 사회는 시정부가 닦아놓은 길옆에 가로등을 설치하며, 그곳을 일본식 건물을 세웠다.
상파울로 시정부가 봉헤찌로를 “상파울로 한인구역(Bairro Coreano em São Paulo)"으로 명명했지만, 실질적으로 이곳 건물의 소유주는 대부분 유대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인회를 비롯한 브라질 한인사회는 이곳에 한국을 대표할 만한 기념상징물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상파울로 이비라뿌에라 공원 및 이삐랑가 박물관
이비라푸에라 공원(Parque do Ibirapuera)는 브라질 상파울루에 위치한 공원이다. 상파울루 시의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954년 8월 21일에 개장하였다. 공원의 면적은 1,584㎢이며 도보, 산책로 및 자전거 도로 등이 있다.
상파울루가 시(市)로 지정된 지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4년 이 공원을 설립하였다. 보통 주중에는 자동차편을 이용하여 출입이 가능하나 주말에는 자동차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2000년에는 브라질 발견 500주년 행사가 성대하게 벌어져, 지금도 500주년 기념 행사관련 전시회가 계속되고 있다. 이 공원의 면적은 15만 평 정도이며, 주말에는 해변 가를 찾지 못한 상파울루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삐랑가 공원
1822년에 만들어진 공원으로 독립기념 공원이라고도 불린다.
포르투갈 황태자 동뻬드로 1세(Dom Pedro Ⅰ)가 말 위에서 칼을 빼 들고 '독립이냐, 죽음이냐'라고 외치며 브라질 독립선언을 선언한 자리에 1922년에 독립기념상이 세워졌있다.
공원 안에는 독립 기념상 외에도 기하학적 무늬로 만들어진 정원 등이 있다.
이삐랑가 공원 내에 있는 빠울리스따 박물관은 인디오의 생활용품 및 근대 상파울로의 역사적 유품과 자료들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귀족의 생활용품이나 구식 총 등이 볼 만하다.
상파울로 동양인의 거리, 축구박물관
동양인의 거리(Liberdade)-1974년 상파울루 시 정부에서 이 거리를 동양인의 거리라고 명명하였다. 이 거리에서는 일본 사람들의 가장 큰 문화 행사인 꽃 축제 "하나마쯔리"를 비롯하여 중국 북경사자 탈춤, 음력설 맞이 축제 등 아시아 국가들의 행사가 다수 열리고 있다. 사실상 이 거리를 가보면 동양인 들을 많이 볼 수 있고, 가게 간판들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으로 써 있으며, 대표적으로 이 세 나라 사람들의 음식문화를 가장 손쉽게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상파울루 축구 박물관-상파울루의 축구박물관에는 줄리메컵 등 빛나는 브라질 축구의 역사와 함께 ‘마라카낭의 비극’을 소개하는 코너가 따로 마련돼있을 정도다. 지난 2014 브라질월드컵 당시에는 브라질이 이곳에서 치른 경기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준결승전을 비롯해 결승전도 ‘축구의 성지’ 마라카낭에서 열린다.
브라질 상파울루 축구 박물관(Museu do Futebol)이 있는 파켐부 경기장. 이 경기장의 별칭은 파울루 마차도 데 카르발류다.
축구 박물관 변천사-브라질 상파울루 축구 박물관(Museu do Futebol)에 전시된 축구공 변천사.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축구공 이미지는 1970년에 만들어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있는 공이다.
'축구의 모든 것' 볼 수 있는 브라질 축구 박물관-브라질 월드컵 축구 대회가 한창 진행 중인 26일(한국시간) 상파울루에 있는 축구 박물관(Museu do Futebol) 앞에는 오전부터 여러 대의 관광버스가 관람객을 실어나르기 바쁜 모습이었다.
'축구의 나라'로 불리는 브라질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이어서 이곳 축구 박물관은 월드컵 관광객들의 방문 목적지 1순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축구 박물관은 시립 파켐부 경기장에 자리 잡고 있다. 약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1940년 개장했으며 지금까지도 브라질
프로축구 경기가 이곳에서 열린다.
축구 박물관이 문을 연 것은 2008년 9월로 약 6천900 ㎡ 크기의 3층 건물로 지어졌다.
1층에는 1930년 제1회 월드컵부터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이르기까지 브라질이 거둔 성적을 정리해놓은 공간이 마련됐다.
브라질이 우승을 차지한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축구 박물관은 2002년 대회에 대해 "우리는 모든 경기를 압도적으로 승리했다"며 "다만 대회 최우수선수에게 주는 골든볼 수상자는 결승전이 끝나고 선정돼야 한다는 사실도 전 세계에 일깨우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당시 브라질은 결승에서 독일을 2-0으로 꺾고 우승했으나 골든볼은 독일의 골키퍼 올리버 칸이 가져간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또 이 박물관은 2002년 대회 공식 명칭인 '2002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KOREA JAPAN' 대신 한결같이 '2002 JAPAN and SOUTH KOREA'를 사용하고 있었다.
2층에는 어두운 조명 속에 펠레, 호나우두 등 브라질이 낳은 전설적인 선수들의 이미지를 볼 수 있게 해놨고 영상 자료를 통해서는 브라질 국내 리그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장면들을 기자들의 해설과 함께 제공하고 있다.
3층에는 다양한 사진 자료들과 역대 월드컵 주요 장면, 축구공과 축구화, 전술의 시대별 발전 양상 등이 정리돼 있다.
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영상 속의 네이마르가 공을 차주면 그 공을 넘겨받아 직접 슛을 하거나, 슈팅 속도를 재주는 등의 체험 코너도 눈에 띄었다.
화장실에는 역대 월드컵을 빛낸 주요 선수들의 얼굴 모양을 거울에 붙여놓아 거울을 통해 자신이 직접 그 선수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다.
브라질 축구를 주제로 한 박물관이다 보니 한국에 관한 자료는 찾기 어려웠다.
역대 월드컵 공인구를 전시해놓은 코너에 2002년 한일월드컵 공인구였던 피버노바가 있는 정도다. 또 기념품 판매점에서는 'KOREA'가 새겨진 축구공과 열쇠고리 등을 팔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전시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 최종전 영상을 볼 수 있게 해 놓은 곳이었다.
당시 4강 결선리그에서 브라질은 2승을 먼저 거둔 가운데 우루과이(1승1무)와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돼 있었다.
브라질은 비기기만 해도 우승할 수 있었지만 우루과이에 1-2로 역전패를 당해 우승컵을 우루과이에 내줬다.
박물관 안내원은 역전 골을 내주는 영상을 함께 보며 "이때 브라질 사람들의 심장이 무너져내렸다"고 설명했다.
그 느낌이 잘 전해지도록 이 좁은 공간은 벽면이 스피커로 구성됐고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를 큰 소리로 틀어주며 당시 브라질 사람들이 느껴야 했던 실망감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자국에서 64년 만에 다시 열리는 올해 월드컵이 끝나고 나면 브라질의 통산 6번째 우승 소식이 어떤 형태로 이 박물관에 표현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2014년 보도자료-브라질 상파울루의 축구 박물관이 6번째 기념일을 맞이해 모든 관람객들에게 27일, 28일 양일 간 무료 입장 이벤트를 실시했다. 관람객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축구 역사뿐만 아니라 6주년 기념 특별 프로그램을 관람했다. 나만의 축구 셔츠 만들기 등 다채로운 활동들도 마련됐다.
축구 박물관은 상파울루 중심부 파카잉부 출구 경기장 안에 위치해 있으며 정보 사이트 TripAdvisor가 선정한 브라질 관광 명소 5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입장권 가격은 6헤알(약 2700원)이다.
한편 축구 박물관에는 2008년 개관일 이래 총 250만 명의 관람객들이 방문했으며 특히 월드컵 시즌에는 7500명 이상의 방문객 수를 기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