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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었더라
창 7:13-24
13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14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15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17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9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20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24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창 7:13-24 / 홍수가 시작되던 날 노아는 아내와 셈, 함, 야벳 세 아들과 세 며느리와 함께 배 안으로 들어갔다. 14) 또한 모든 짐승들도 각각 암컷과 수컷 한 쌍씩 배 안으로 들어갔다. 들짐승, 집짐승, 땅에 기어다니는 길짐승, 또 하늘에 날아다나는 날짐승 등, 15) 살아 있어 숨쉬고 있는 것은 모두 다 한 쌍씩 노아에게로 나아와 배 안으로 들어갔다. 16) 이렇게 배 안으로 들어간 것이 모두 암컷과 수컷 한 쌍씩이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그대로였다. 여호와께서는 노아가 배 안으로 들어간 뒤에 배의 문을 닫으셨다. 17) 40일 동안 쉴 새 없이 비가 내려 대홍수가 났고, 물이 불어 노아 일행이 탄 배가 물 위에 떠올랐다. 18) 계속해서 내린 비로 물이 점점 더 불어 이제는 배가 이리저리 떠다닐 정도까지 되었다. 19) 마침내 엄청나게 내리는 비로 인해 땅위에 솟아 있는 높은 산봉우리까지도 물 속에 잠겼다. 20) 물이 계속해서 불어나 급기야는 산봉우리 위로 물이 7미터 가량이나 넘쳐 오르게 되었다. 21) 땅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던 모든 것들은 이렇게 엄청나게 내린 비로 인해 물에 잠겨 죽고 말았다. 하늘에 날아다니던 날짐승과 집짐승과 들짐승과 땅 위에 기어다니던 길짐승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하나도 남지 않고 모조리 죽었다. 22) 무릇 뭍에서 살아 숨쉬던 것들은 모두 숨을 거두었다. 23) 하나님께서 땅위에 살아 움직이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짐승과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와 땅위에 기어다니는 길짐승까지 모조리 쓸어 버리셨다. 땅 위에서 모든 것이 죽고 말았으나 노아와 함께 배에 탄 식솔들과 짐승들은 살아 남았다. 24) [살아 남은 이들을 생각하시다] 물은 150일 동안 땅을 뒤덮고 있었다.
노아의 가족들과 모든 짐승들이 방주에 들어가자 방주의 문은 굳게 닫힙니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40일간 장대비가 지속됩니다. 세상은 물로 창일하게 되었고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멸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지 그 하나님의 엄정함과 죄에 대한 단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히 구원을 잃지 않습니다(13-16) 본 단락은 어떻게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한 짐승들을 구원하시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40일간 쉬지 않고 내리는 비가 온 지면을 덮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방주의 문을 친히 닫아주시고, 그 생명들을 방주 안에서 꼭 보호하고 계십니다. 어떤 세찬 비바람과 풍랑이 일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지금 이 땅의 자기 백성을 지키십니다. 그들을 놓치지 않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셔서 견디게 하시고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성취된다(17-24) 40일 동안 쏟아진 비는 모든 생명을 멸절했습니다. 그리고 한번 닫힌 방주의 문은 누구도 열 수 없는 문이 되었습니다(16). 이 홍수는 심판에 대한 경고가 예고된 그 때로부터 무려 120년이 지난 후에 성취된 것입니다. 지연된 심판에 사람들의 마음은 불신과 불순종의 팽배 속에 살아갔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성취되었습니다. 그 120년 동안 노아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반드시 성취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심판도 그렇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지연되어 보이지만, 이 기간은 하나님이 게으르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사랑 때문에 연기되고 또 연기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오래참으시는 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나니” 때문입니다(벧후 3:9).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성취될 것입니다.
적용: 오늘 하루의 삶을 살면서, 이 세상의 무도함과 무정함 속에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실지 기대하며 일어나 봅시다.
잘 짖는다고 좋은 개가 아닌 것처럼 말을 잘한다고 현명한 사람은 아니다.-장자. 그럴듯한 말은 누구나 꾸며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말에 넘어가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신 것처럼 구원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말로 현혹시키지 않습니다. 일부러 떠들지 않아도 그의 우직한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것이 알아서 드러날 것입니다. 구원의 문을 열어두고 보여주실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지혜로운 성도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 설 교 >
생명의 방주를 띄워라
창 7장 11~16절 / 윤태성목사
오늘 우리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하버드 대학교 석좌교수인 “존 갤브레이”는 “새로운 불확실성의 시대” 라고 합니다. 이제까지의 달리 미래의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실감이 나는 것은 과학도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변합니다. 역사도 새로운 유적이 발굴되면 기원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새로운 발명품이 나오면 구버전이 됩니다. 음악도 새로운 노래 끝에 흘러간 노래가 됩니다. 이세상에서 변화되지 않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고, 이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실 때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순종을 통해서 역사를 움직여 가십니다. 이러한 사람을 통해서 인류의 역사와 성경의 말씀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말씀은 홍수심판 사건입니다. 인류 최초의 심판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세상의 한사람 노아만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방주를 예비합니다. ‘말씀을 따르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일들을 이루어가신다’ 과거적인 사건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임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들을 생각하시며 우리시대, 꿈이 있는 교회가 나갈 바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의인을 찾으신다
창세기 6장에 보시면 아담 이후의 역사가 나옵니다. 그때 중요한 사건이 결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보고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을 말합니다.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로서 하나님 없이 사는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결혼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그 당시의 세계관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갈 수도 있지만 신앙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한 대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2-3대가 바로 살아야 명문가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결혼은 한번이면 가지고 있는 신앙 마져도 잃어버립니다.
홍수 심판의 비극은 신앙을 지키지 못한데서 출발이 됩니다. 신앙인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시대는 무질서의 시간입니다. 그 당시 노아의 시대는 어느 부분만을 도려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철저하게 썩었기에 심판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 시대 가운데 찾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빛을 찾는 그런 시대입니다. 이때 아담의 10대손 노아가 등장합니다. 노아는 6장 8절에 소개가 되는데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의인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속에서 사는 사람’을 말하고, 완전하다는 것은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노아도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죄를 회개함으로 늘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속에서 살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의인이요, 당대 완전한 자였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저는 이런 의인을 오늘 우리시대의 용어로 “스타 플레이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12장에 나오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ex)스타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한국축구를 보시더라도 월드컵 본선 7회 진출이라는 쾌거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한국 축구가 도약을 하는 데는 2002년 월드컵을 꼽습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히딩크라는 탁월한 명장이 선수를 조련합니다. 그런데 히딩크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 얼마입니까? 많아 봐야 국가대표 20여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를 통한 파급효과가 얼마나 큽니까. 박지성, 이영표, 이운재 선수를 통하여 한국 축구가 한 단계 도약을 합니다. 이번에 세상을 뜬 마이클 잭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글로벌 스타였습니다. 이 사람의 등장으로 흑인들의 자부심을 일깨웠고 오바마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 사건을 보시면 예수님께 나타나서 말씀을 나누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를 상징하기도 하는 두 사람 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엘리야를 부르셔서 북이스라엘의 영적인 흐름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교회사 가운데 영광의 역사도 있지만 암흑기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준비하시고 시대를 이끌어 가게 하십니다. 초대교회 바울, 기독론을 바로세운 어거스틴,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칼빈, 독일교회의 본회퍼 칼 바르트, 어두운 시대를 비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여러분 속에서 희망적으로 봅니다. 그 희망은 여러분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이 되시면 이 교회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한사람의 헌신이면 이교회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동해하는 의인으로 살면 나와 교회가 복을 받게 됩니다. 의인되실 여러분을 통해 가문과 이 세상을 살리십니다. 그런 의미로 나 스스로를 축복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스타 플레이어입니다.” “나로 인해 이 교회는 창대해진다.”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2. 노아의 외침
그럼, 의인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체적인 은혜는 무엇입니까? 6장 13-14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하나님은 노아에게 ‘심판’의 계획을 알려주시고, 설계도를 주시면 큰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정을 보시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시대 지구가 따뜻하여 울창한 수목으로 인해 나무를 구하기가 쉬웠다고는 하지만, 한 가족이 어마 어마한 방주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쓸 데 없는 일에 돈을 쓴다고 사회적 분위기도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아 시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시대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은 중요한일 입니다. 이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회계하고 깨어 있어야 할 때에, 이를 외면하고 탐욕스럽게 먹고 마시고 세상적인 방법대로 살아갑니다. 즉 사람들이 세상적인 일에 취해서 영적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시대를 말합니다. 그 시대가운데 노아의 다른 점은 그 당시 잘못된 결혼관을 가지지 않고, 그들의 아들들을 일부일처의 바른 결혼을 시켰다는 점입니다. 저는 노아의 생각해보며 노아의 백년은 어땟을까? 사명은 있었지만 그에게도 일상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 때 물론 노아도 방주를 지으면서 친구 아들들의 결혼식 누군가의 회갑집 이런 애경사에 함께 참여했을 겁니다. 그들은 노아에게 “자네 요즘 무엇 하는가” “방주를 짓네”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로 받은 그 심판의 말씀을 전했겠습니까 안전했겠습니까? 저는 분명히 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변사람의 반응은 차갑고 냉담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홍수심판? 노아 영감,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구먼!’ 하면서 놀렸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시대 처럼 안티 기독교와 같은 핍박이 강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핍박도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다가오는 멸시도 믿음으로 극복해갑니다. 노아는 방주 만드는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순종합니다. 마침내 시간이 지나고 방주는 완성이 됩니다.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이 한마디 말씀 속에는 밀려드는 의심과 싸운 노아의 눈물, 방주에 쏟아 부은 그의 피와 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절대적인 순종의 자세가 깊이 서려 있습니다. 방주를 짓는 노아의 힘찬 망치질 소리는, 그의 외침은 친구들에게 이웃들에게 어서 빨리 방주로 들어와 구원을 받으라는 ‘구원의 메시지’인 동시에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저는 이런 노아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시대의 일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믿음의 방주에 승선했습니다. 고기를 잡기위해서 이시대의 많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그물을 던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모습을 보시면, 부르신 사명과는 거리가 멀어진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선장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사람들 인력을 잘 관리하고 방향을 잘 잡아가며 돼, 그 배에는 요리하시는 분이 있고 시설을 보수 공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나는 이곳에서 요리하고 배의 하자만 보수하면 돼, 고기 잡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야’ 그런데 정작 어부들도 고기를 잡지 않고 ‘이곳은 어족 자원이 고갈이 돼서 던질 수가 없어’ ‘그물을 던져도 한 마리도 잡지 못 할거야 고기를 잡기는 커녕 그물을 망칠찌도 몰라’ ‘더 좋은 물때를 만나면 그물을 던져야지’ 모두가 고기를 잡는 사명이 있음에도 스스로 체념해버리고 맙니다. 그물을 던지지 않고 일손을 놓아버린 것이 오늘 교회의 문제이고 우리 교회의 문제 일수도 잇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일이 전도인데 어떤 사람은 과장되게 말하면 한 번도 그물을 던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자녀들에게도 ‘신앙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피곤하니까 일요일에 참을 푹 자라’ 방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어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방주에는 어부가 필요한데 관광객 더 많아 집니다.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우리는 사람 낚는 어부 입니다. 이 시대를 위해서 외쳐야하고 주변의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여러분의 이웃과 친구 가족들에게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복음의 소식을 전하실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다음세대를 준비하심.
노아의 방주에서 우리가 깨닫는 중요한 의미 또 하나는 “다음세대를 준비하라” 주님께서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그래서 노아와 그의 아내 셈, 함, 야벳 세 아들과 자부들이 방부로 들어갑니다.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 그리고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방주에 넣으심으로 그 씨를 유전케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리신 하나님께서는 노아시대 사람들에게 4절 “지금부터 7일이면” 마지막 7일, 최후선택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7일 동안 아무도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칠 일이 지나자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기서 노아의 아들들과 자부와 암수 한쌍 씩을 들어가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홍수 이후를 준비하고 계신느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ex) 최근에 숭실대 기독교 교육과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걱정하는 것이 요즘 대학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 학교는 미션스쿨이기에 학교에서 종교교육과 예배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 말씀이 이전에 수업을 해보면 교회를 다녔던 학생들 손들어 보라면 제법 있었는데 최근 학생들이 교회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채플에서도 변화가 생겨서 이전과 같이 우리가 드리는 설교와 같이 드리지 않고, 윤리를 강조해서 말씀을 전한다. 제가 그분의 말씀이 다른 말로 들리지 않는 것이 제가 체험하는 것도 소년원에서 아이들을 만나보아도 교회를 다녔던 아이들이 적습니다.
홍수 심판의 네 동사
창 7장 13~24절 / 피영민목사
서론
창세기 7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사건은 인류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주 평이하고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과장도 찾아볼 수가 없고 격양된 감정이나 장황한 설명도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사도 베드로도 몇 글자로 홍수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6). 홍수 이전의 세상을 옛 세상이라고 하는데 아담이 창조된 이후 1656년 동안을 말합니다. 당시 인구를 학자들이 계산해보니까 약 10억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홍수로 인해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의 홍수가 앞으로 다가올 최후 심판인 불심판의 예표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노아의 홍수를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것인데 각각 한 가지씩 중요한 동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홍수 심판의 네 동사’로 하였습니다.
Ⅰ. 노아의 여덟 식구와 노아에게 나아온 짐승들은 방주에 들어갔다(Enter)
노아의 여덟 식구와 노아에게 나아온 짐승들은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주에 들어가야 살지 밖에서 구경만하면 죽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과 짐승들이 방주에 들어간 것은 그들이 세운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명령하신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시켜 준비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창 7:1). 홍수가 아무리 와도 죽지 않는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를 마련해놓으시고 그곳으로 들어가라는 이 명령은 사랑과 긍휼이 가득한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구원의 방주를 마련해놓으시고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은혜로운 구원의 초청인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앞으로 다가올 불심판에 대해 유일하게 안전한 구원의 처소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시고 그에게 나와 그를 구주로 믿고 그 안에 거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은 불심판에도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에 들어가야 될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창 7:4). 7일이 지나면 40일 동안 계속해서 비가 온다는 것입니다. 3시간만 집중해서 비가 내려도 홍수가 나는데 40일을 계속해서 비가 온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7일 전에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학자들이 노아 홍수 이전의 세상에는 비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 2:6). 홍수 이전에는 ‘비’라는 것이 없고 땅에서 물이 올라와 지면을 적셔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를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홍수로 세상이 망할 것이라고 노아가 말해도 믿지 않고 오히려 노아를 미친 사람 취급했던 것입니다. 홍수가 나기 7일 전에도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아무도 노아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의 여덟 식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만약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놓고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도 죽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방주의 구조를 다 알고 열심히 방주를 만들었다고 해도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대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바쁘다고 해서 친구를 대신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어머니가 예수님을 잘 믿으니까 본인도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방주에 각자가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예수님도 각자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실 때 노아는 순종하였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6:22).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7:5).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창 7:9).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창 7:16). 성경은 네 번씩이나 노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비를 본적도 없었지만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간 것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히 11:7).
노아의 여덟 식구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암수 7쌍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2쌍씩 노아에게 나아왔습니다. 왜 정결한 짐승이 더 많습니까? 홍수가 끝난 다음 정결한 짐승을 번제로 드려 제사를 지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짐승들은 노아가 사냥을 해서 모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 모으신 것입니다. 짐승 중에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짐승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짐승 중에 사자도 있고 토끼도 있었을 것인데 사자와 토끼가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사건은 다니엘서에서도 나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유로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자들의 입을 봉하시니까 다니엘이 앞에 있어도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방주 속에 있었던 짐승들도 1년 이상의 세월을 방주 안에서 평안하게 지낸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50m, 넓이가 25m, 높이가 15m 그리고 3층으로 되어있습니다. 100m 달리기를 해도 50m가 남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입니다. 거기서 노아의 여덟 식구와 짐승들이 1년 17일을 살았습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에 홍수가 시작되었고 이듬해 2월 27일에 방주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나기 7일 전에 미리 들어가서 기다렸으니까 1년 17일을 방주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앞으로 이 세상이 지금과 같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앞으로 세상은 불로 심판을 받고 망할 것이다. 내가 준비한 구원의 유일한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듯이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네 개인의 구주로 믿겠느냐?” 여러분 모두 이 질문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시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방주 밖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멸망할 것입니다.
Ⅱ. 하나님은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Shut)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창 7:16).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노아가 닫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닫으셨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성경뿐만이 아니라 옛날 고대 서사시에도 많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갈그미스 서사시’가 있는데 총 12편 중 11편이 홍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갈그미스 서사시에서는 노아에 해당되는 인물인 ‘우타 나피쉬팀’이 직접 방주의 문을 닫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방주의 문은 코끼리도 들어갈 만큼 큰 문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닫아주셨으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방주의 문이 닫힘으로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이나 짐승은 방주가 아무리 흔들려도 밖으로 빠져나갈 염려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밖의 홍수가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사람과 짐승은 아무리 홍수가 나서 요동을 쳐도 안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십니다. 성도의 능력으로 구원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우리의 노력으로 어떻게 영원히 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내일도 망할 수 있고 모레도 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업이 조금 안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이 망한다고 해서 진짜로 망한 것입니까? 방주 밖에 있다가 죽는 것이 진짜 망하는 것이지 방주 안에서 한 끼 굶는 것은 망한 것이 아닙니다. 방주 안으로 기회가 있을 때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방주의 문이 닫혔다는 것은 방주 밖에 있는 죄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면서 계속해서 홍수로 세상이 망한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 25:10). 신랑이 올 것을 대비하여 등을 들고 간 열 처녀 중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고 다섯 처녀는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온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던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해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는 그제야 기름을 사러 다녀오니까 문이 닫혀있는 것입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해보지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차가운 대답만 듣게 됩니다. 구원의 문이 영원히 열려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가 강대상에서 영원히 복음을 설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원의 문이 닫히고 복음을 들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이 열려있을 때, 하나님이 닫으시기 전에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물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땅에 창일했다(Flood)
창일(Flood)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올라왔다(Rise)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창 7:4). 하나님만이 비를 내릴 수 있습니다. 일기예보관이 비가 올 것을 예측하여 말할 수는 있지만 비가 오도록 명령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자연을 향해서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창세기 7장 17절에서 20절까지 4단계로 물이 늘어납니다. “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 올랐고” (창 7:17).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창 7:18).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창 7:19).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창 7:20). 백두산이나 한라산은 덮인지 이미 오래되었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보다 십오 규빗 더 물이 차올랐다는 것입니다. 천하의 모든 산이 다 덮였다는 것은 노아 홍수가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물이 어디서 나와 땅을 덮었습니까?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 1:7).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창 7:11). 큰 깊음의 샘은 궁창 아래의 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궁창 아래의 물이 다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창들이 열렸습니다. 궁창 위에 있던 물들도 쏟아져 내린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에서 물이 나와 대홍수가 난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지금의 지구가 원래의 지구와 똑같다는 균일설(uniformitarianism)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노아의 홍수는 지구가 대격변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격변설(Catastrophism)이 옳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뉴스를 보면 과학자들이 산 위에서 물고기 화석을 찾아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어떻게 산 위에 올라갔겠습니까? 미국의 ‘FOX News’라는 방송이 있는데 아라랏 산에서 발견된 방주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터키 말로 방송을 해서 말은 못알아 들었지만 크고 굵은 나무들이 배의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배가 어떻게 산꼭대기까지 올라갔겠습니까? 이것은 노아의 홍수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Ⅳ. 방주 밖에 있던 모든 사람과 육축은 다 죽었다(Perish)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창 7:22). 약 10억 명의 사람이 다 죽었으니 누가 장례를 치러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학자, 예술가, 연예인, 정치가, 군인 모두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8~39). 노아가 일주일 후에 비가 오니 함께 방주에 들어가자고 해도 사람들은 내일이 결혼식이어서 안 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못 간다고 하면서 일상생활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자 사람들은 계속해서 시끄럽게 떠들던 노아가 사라졌다며 좋아하고 있는데 일주일 뒤에 비가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비가 오는 줄 알았는데 점점 차올라 발목을 덮고 계속해서 가슴까지 덮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붕 위로 올라갔는데 지붕도 덮여버렸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잘못했다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결론
홍수 심판은 앞으로 다가올 최후의 불심판에 비하면 작은 심판에 불과합니다. 불심판으로 수십억, 수백억 사람들이 죽을 것입니다. 그때의 모습을 요한계시록 6장 12~1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계 6:12~14). 저는 이 말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별들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러시아에 15m 정도의 운석 하나가 떨어졌는데 대기권으로 들어오면서 불이 붙고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서 천이백 명이 부상을 입고 도시 하나가 박살이 났습니다. 15m짜리 운석 하나가 떨어져도 그런데 별들이 떨어지면 어떻겠습니까? 원자폭탄을 다 합쳐도 운석 몇 개 떨어진 것만 못할 것입니다. 별들이 땅으로 떨어지고 해가 검게 변하고 달이 피같이 변하여 큰 지진이 난다고 했습니다. 하늘은 종이처럼 말려버리고 산과 섬들은 옮겨갈 것입니다. 백두산이 전라도 광주로 옮겨가고 한라산은 함경도로 옮겨가고 에베레스트 산은 충청도로 옮겨갈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 6:15~17).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때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바위가 내 머리 위에 떨어져서 머리가 박살나면 이 무서운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될텐데...”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출세하셨습니까?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그것도 별 볼일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버셨습니까?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가올 내세를 준비해야 됩니다.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내세가 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왜 없다고 우기십니까?
이제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여기 오셔서 강대상에 서서 오늘 이 세상을 다 불로 심판할 것인데 여러분 중에서 한 사람만 빼고 다 천국에 보내줄 것이니 한 사람만 고르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수결로 투표해서 뽑으시겠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뽑힌 사람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스스로를 멸망시켜달라고 하는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구원의 문이 열려있는 동안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안전장치
창 7장 13~16절 / 조남신목사
요한복음5:24
예배로 부름 : "믿음이 없이는(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느니라"(히브리서 11:6,7).
개회기도 : 창조절 다섯째주일을 맞아 예배드립니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니, 주님 받아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설교
> 우리 교회는 지난주까지 수재민을 위한 헌금을 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헌금을 해 주셔서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헌금 총액이 197만원 이었습니다. 그래서 당회에서 이 헌금 총액을 김천의 구성교회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오후 예배 후 이 헌금을 가지고 구성교회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함께 가고 싶으신 분은 가셔도 좋겠습니다.
> 해마다 겪는 재난입니다만, 올해는 그전과 달리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더 큰 피해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강릉에는 875㎜의 폭우가 한꺼번에 쏟아졌다는 거예요. 이렇게 많은 비가 한꺼번에 쏟아진 적이 없는데, ... 창세기 오늘 본문 바로 앞에 11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공동번역에는 "땅 밑에 있는 큰 물줄기가 모두 터지고 하늘은 구멍이 뚫렸다"고 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실감케 했습니다.
> 수요일마다 창세기 강해를 하는데, 오늘 주일예배에도 7장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창세기 6장에서 8장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후 이 세상에 급격하게 불어난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대홍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요일마다 창세기를 공부할 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숨고를 겨를도 없이 그 다음 이 노아의 대 홍수 사건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세상 죄악의 홍수"였습니다. 아담 때도 나타났고, 가인 때도 나타났던 죄와 악이 이번에는 온 세상에 홍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일하고, 관영하고, ... 그 때를 성경은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창세기 6:1)라고 하고, 더 자세히는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이월 십 칠일이라"(창세기 7:11)고 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벌써 죄악이 관영 했었던가 봅니다.
>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해라"고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번성해지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번성해졌으면 더더욱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았어야 할텐데, 오히려 죄악이 땅에 차고 넘쳤었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지요. 하나님이 사람들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관찰하시던 그 어느 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내가 사람과 육축, 공중의 새까지 지면에서 쓸어버리라고 하십니다(창세기 6:5-7). 그래서 땅에 물줄기가 터지고 하늘에 구멍이 뚫려 사십일 주야동안 비가 쏟아지게 되었습니다(창세기 7:11,12).
> 노아의 대홍수 사건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물, 홍수, 그에 따른 산천초목의 초토화!! 그러나 이 사건은 결코 하나의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홍수를 말하는 게 아니지요. 자연재해도 중요하지만, 자연재해로서의 홍수야 지나가면, 그만이고...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죄악의 홍수이지요. 이 홍수는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전혀 예측할 수가 없고, 계획대로 되는 것도 없고, 무섭게 몰아닥치고, 그래서 휩쓸리고, 휘말리고, ... 어차피 인간의 생애는 대홍수 속에 있습니다.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예외도 없습니다. 다들 당할 때는 why me?하고 억울해하지만, 명쾌하게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노아의 홍수이야기를 어찌 예사롭게 들어 넘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람직해야 됨을 말해주는 깊이 있는 진리입니다!!
> 우리는 나름대로 우리 나름의 배를 만듭니다. 인생의 홍수에 대비한 안전장치지요. 그래서 건강관리도하고... X -ray, 조직검사, 내시경검사.... 보험도 들고, 생명보험, 암 보험, ..... 저축도하고..... 자녀도 낳고, 가정도 이루고, ... 조직도 만들고, 제도도 만들고, ...
> 그러나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하나님의 안전장치였지요. 하나님이 지시하셨어요. "배를 만들어라."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이 대홍수와 방주제조가 진짜 있었던 일이냐에 관심을 가지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또 한편에선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산지대에서 발견되는 화석 등을 통해서 증명하기도 하고 합니다.
> 그러나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겐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노아는 다른 사람들관 달리,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방주를 만들어요. 당시의 사람들은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날씨가 좋은데 무슨 비냐고 그랬겠지요. 지금이 아니라 먼 훗날이라고 하면, 그때는 어차피 내가 죽은 후니까, 그것까지 내 어찌 상관하리 ...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노아는 120년 동안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열심히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는 참 고독한, 그러나 꿋꿋한 의인이었어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었어요. 사람들은 모두들 나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노아는 하나님의 안전장치를 위해 쓰임 받고 있었어요. 하나님과 동행했어요(창세기 6:9).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했어요.
> 그런데 여기 보면, 노아가 배를 지으니까, 아내도, 아들들도 - 3형제를 두었지요. 셈과 함과 야벳 - 자부들도....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방주 짓는 일에 동참하였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어렸을때 배웠던 노아에 관한 노래가 생각이 나네요."노아 할아버지 배를 짓는다. 노아 할아버지 배를 짓는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배를 짓는다. 앞집에 김첨지, 뒷집에 박첨지 모두가 반대하여도 높은 산꼭대기에서 배를 짓는다".... 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삶을 사는데 아들이 안 따라 주겠습니까? 자부들이라 해서 감명 안 받겠습니까? 그들의 이름도 다 사람인데.... 노아 할아버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노아 같은 아버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홍수에 잘 대비하고, ...
>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이 창세기 6:9에 나오지요. "그는 의인이고 당세에 완전한 자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 누가 그래요.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요즈음엔 나는 사람 위에 붙어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했더니, 하나님과 붙어 다니면, 하나님과 동행하면, 최고라는 것입니다. 뛰고 날고 해 봤자 별 것 아니라는 거예요, 다 소용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최고이더라는 거예요. ...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방법이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여요. 미련하게 보여요. 그래서 동행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어제 신문에 어떤 책(야생초 편지) 소개에 보니까 그 저자는 배교가 순교보다 더 어렵더라, 그런데도 배교 했다고 그러더라구요. 카톨릭에서 노자장자로 바꿨다고, ... 얼마나 모진 삶을 살았으면, - 시국사건으로 13년을 감방에 살다 나왔다는데, - 얼마나 시련고초가 심했으면 그랬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
> 구원의 방주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은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여기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6:16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님은 그 어떤 사나운 파도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문을 하나만 내도록 지시하셨어요. 이 문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안전장치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이 방주를 평생작업으로 아주 든든하게 정성 들여 완성을 합니다. 특히 문은 더 신경을 써서 아들들에게 시키지 않고 자기가 손수 작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하나님의 명령대로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갑니다(7,13절). 다 합쳐 8명이지요. 그리고 짐승들도 정결한 것은 암수 일곱씩, 그리고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 취하여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닫지요. 그런데 누가 문을 닫으셨습니까? 공동번역으로 창세기 7:16에 보면, "여호와께서 문을 닫으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 우리는 열심히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잠그겠지요. 노아도 문을 열심히 만들고, 안전하게 문을 안으로 열심히 잠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장치는 성난 파도와 물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문은 하나님이 닫아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문을 닫으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안전장치에서 "확실함"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확실함을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장받을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확실함을 보장받는 길은 주님의 진실함과 사랑의 손에 나를 의탁하는 그런 믿음을 가질 때에야 가능할 수 있습니다. ... 나의 확실함에 머무시겠습니까? 주님의 확실함을 신뢰하시겠습니까? 결국 이 결정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확실함에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 끝으로 노아의 가족 8명이 방주에 들어가서 한 1년을 살아야만 했을텐데, 그 속에서 무엇을 했을까? 어떤 분은 중국한자와 성경말씀을 연결시켜서 이런 주장도 하더군요. 배를 나타내는 한자 선(船)이라는 글자는 노아의 방주를 뜻한다는 거예요. 한자는 합의 문자인데, 뜻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문자인데, 이 선(船)자를 보면, 배 주(舟)자와.... 여덞이라는 숫자를 나타내는 여덟 팔(八)자, 사람을 의미하는 입 구(口)자가 합쳐져서 배라고 하는 선(船)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8명의 노아 가족이 배를 타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그런 글자라고 하던데, 억지 같기는 하지만, 참 재미있는 해석이지요.
> 하여간 1년 동안 그들은 배 안에서 살면서 무엇을 했을까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삶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바빴을 거예요!! 예배보고, 또 동물들 돌보고... 물론 1년 양식과 모든 것을 다 준비했지만, 수만 마리 동물을 먹이고 돌보고... 열심히 해야지요. 이것이 또한 다음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안전장치였지요. 그래서 그 이후에도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그래서 구원을 받고... 이 땅에 충만하고, 번성하고....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안전장치로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의 이러한 초청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파도를 보지 말라
창 7장 13~22절 / 김홍도목사
몇해전 부흥회를 마치고 경춘선 기차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며 오는 중이었습니다. 마침 홍수가 범람하여 시뻘건 물이 개천마다 소용돌이 치면서 흘러가는 때인데 개천 둑 위에서 열 살 미만의 소녀가 흘러가는 그 개천 물을 한참 내려다 보고 서 있더니 그대로 물 속에 빠져 그 거센 물결 과 함께 떠내려 가는 것이었습니다. 기차가 가는 도중이라 뛰어내려서 건져 주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마 음으로 돌아오던 생각이 납니다.
파도와 물결을 자꾸 쳐다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어느날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 오라" 명령하시니까 베드로가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그 예수님을 쳐다보던 촛점을 밀려 오는 파도와 바람을 바라보게 될 때 무서움이 들어오면서 그만 물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기억할 때는 물 위로 걸어갈 수가 있었는데 파도와 물결을 바라볼 때는 물 속으로 빠져들어갔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이 고해(苦海)와 같은 세 상을 갈 때 언제나 고요하고 잔잔한 항해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환난과 시험의 풍파가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시험의 파도가 밀려올 때에 여러분은 그 것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그 무섭게 다가오는 파도와 물결을 자꾸 쳐다보면 마침내 거기에 휩싸여 빠져 버리고 맙니다.
풍랑을 이기려면 풍랑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홍수를 이기려면 홍수를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 신에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을 때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잣나무로 방주를 짓고 그 안에 문을 닫고 들어가서 홍수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배가 3층으로 지어졌는데, 창문이 1층이나 2층에 있는 것이 아니 라 3층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3층에 있는 창문으로 하늘만 바라보았지 시뻘건 홍수물은 쳐다보지 않았습 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실상 홍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에 문을 닫고 들어가서는 다 끝난 다음에 나왔습니다. 그랬기에 육지가 드러났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낸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소용돌이치며 빙글빙글 무섭게 돌며 흘러가는 강의 다리를 지나다가 그 물을 내 려다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빠질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옆에 있던 친구가 그 모습을 보고 "Look up!" "Look up!" "위를 쳐다 보라" "위를 쳐다 보라"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얼른 고개를 쳐들어 다시 소 용돌이치는 물을 보지 않고 무사히 그 강을 건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 마귀를 이기는 방법 중에 중요한 것은 그 마귀의 역 사를 쳐다보지 말아야 하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섭게 공포를 주고 달콤한 유혹을 주 어도 못본 체 하면 마귀는 물러가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자꾸 바라보았더니 그 다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 스럽게 생각되어서 결국 마귀의 유혹에 말려들어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풍파와 환난이 우리에게 무섭게 밀려온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쳐다보지 마십 시오! 파도보다도 더 능력많으신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무서운 파도와 홍수의 시험과 무서운 고난이 올 때 여러분 부디 그것을 쳐다보지 말고 주님의 약속과 구원을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결국 승리하고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갔다가 두 명은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정복할 수 있다고 바라보고 왔는데 여덟 명은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고 그 강한 성벽과 기골이 장대한 아낙자손들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공포에 떨고 좌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면만 보았기 때문에 공포에 떨고 좌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면만 보았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리 기골이 장대한 원수들이라도 메뚜기 새끼만도 못하다는 것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어떤 때는 무서운 공포와 시험과 근심의 물결이 우리를 사로잡 으려고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 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파도와 홍수가 밀려올 때 어떻게 하면 될까요?
<1. 마음의 문을 굳게 닫으십시오>
노아는 홍수가 나기 전에 미리 문을 닫고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으셨습니다. 빗방울이 떨어 질 때부터 들어가서 문을 닫았습니다. 시험의 풍파와 근심의 물결이 밀려올 때에 마음과 생각의 문을 굳게 닫아서 근심과 불안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원래 "노아"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평안" "위로"라는 뜻입니다. 불안과 근심과 공포의 배후에는 반 드시 마귀가 도사리고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과 말씀과 기도로 몰아내고 내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노아는 홍수와 파도 때문에 배가 흔들림을 느끼면서도 결코 파도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또 내다볼 수도 없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홍수가 밀려오고 파도가 밀려올 때 그걸 내다보지 말고 공포와 불안이 못들어 오도록 문을 꼭 닫으십시오. 어떠한 풍랑이 밀어 닥쳐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 신앙 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불안이 오고 근심이 오고 미움이 오는 것은 벌써 신앙 생활에 병이 들고 시험이 들어 온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이 들어올 때는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으로 이를 물리쳐야 합니다. 노이로제나 불 면증, 공포증에 걸려서 정신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평생토록 먹고도 남을 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유식한 지식인들이라고 합니 다. 그것은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걸 어떻게 하면 내가 지킬까" "도둑 맞지 나 않을까" "혹시 실패하지나 않을까" 하는 자기 안전만을 생각하고 자기 방어에 급급한 나머지 이러한 정신병에 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서 근심과 불안과 공포의 마귀시험을 물리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기도의 창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노아는 3층 창문을 통해서 하늘만 쳐다 보았습니다. 근심거리가 생기고 불안거리가 생기게 되면 이건 기도하라는 신호인 줄 알고 무릎꿇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무서운 홍수와 거센 파도만 자꾸 바라보면서 "아이고 큰일 났구나"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점점 살 소망까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 란 놈이 우리 생각 속에 들어와서 "다 됐다 너는 물 속에 빠져 죽어라!" "물에 빠져 자살해라"하고 속삭 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파도와 바람을 바라보다가 물에 빠졌지만 그러나 주님께 부르짖으므로 건지움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시험과 불안과 근심이 몰려올 때 하나님만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했습니다. 환 난 날에 하나님 앞에 더 부르짖어 기도해야 됩니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뇌성의 은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시 81:7). 무서운 물결 앞에서 우리를 시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구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 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고 하였습니다. 고통과 시험의 물결 이 올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 그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1층에서 육신의 눈으로 홍수를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2층에서 혼의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았습 니다. 3층에서 영혼의 눈으로 기도의 창문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여러분 무릎으로 환난 시험을 이기십시오. 그러면 그 다음엔 큰 축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홍수가 지난 뒤에 옥토가 되어 농사가 잘 되는 것처럼 시험 풍파를 이기고 난 다음엔 반드시 축복이 오는 것 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사철나무인 잣나무로 짓고 역청을 칠한 방주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히 13:8). 노아가 방주 안의 문을 닫고 들어가 앉아 있듯이 우리는 홍수와 시험과 풍파 가 올 때 어느 때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 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며 이루리라"(요 15:4-7) 했습니다. 마태복음 11:28에 보면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안심입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가 거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기둥을 의지했다가 기둥이 무너지면 같이 쓰러지는 것처럼 세상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을 의지하면 실망할 때가 옵니다.
물질이나 권세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 는 우리 주님만 의지하고 그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 세상 것은 아무리 재산이 있고 명예, 권세가 있어 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주님만 의지하십시오. 시험이 오고 파도와 같은 불안과 공포가 와도 우리가 주님 안에만 거하면 안심입니다. 그 약속만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이 목회하다가 너무 큰 시험이 오고 불안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등에는 큰 지구덩어리를 걸머지시고 빙그레 웃고 계시더랍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은 깨달았습니다.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붙들어 주 시는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랴"하고 일어섰답니다.
골로새서 3:1-3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 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 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위었음이니라" 했습니다. 위엣 것을 바라보고 땅엣 것을 바라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 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어떠한 무서운 시험이 와도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시험은 하나님이 안 주시는 법입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시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9:15-16에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있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그리스도 안에 평안히 거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파도가 밀려올 때, 무서운 홍수와 같은 환난과 시험이 올 때 내 힘으로 막아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피난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아닙니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것임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 평안히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죄를 씻어 버리십시오>
홍수가 밀려오고 파도가 밀려오는 것은 우리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노아 홍 수도 당시 사람들이 음란하고 죄악이 관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5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 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했습니다. 홍수 심판이 온 것은 죄악이 관영했으므로 왔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 더럽고 추악한 죄악들이 들어왔을 때, 성령의 감동이 와도 회개치 않고 말씀으로 깨우쳐도 듣지 않을 때, 환난과 실패와 고통의 홍수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홍수가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 붙어있는 죄악을 씻어버리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에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 씀을 지키나이다" 그랬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했습니다. 회개하 고 죄를 씻어 버리면 홍수가 나를 침몰치 못하고 깨끗하게 한 뒤 축복을 실어 줍니다. 시편 32:6에 보면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 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서운 홍수가 밀려올 때 우리는 파도를 바라보지 말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불안과 공포와 근심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의 창문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 리고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 다음엔 죄를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 과 축복을 주십니다. -아멘-
명심해야 할 일
창 7장 17~8장 22절 / 임덕순목사
노아홍수는 노아의 600세 되던 해 2월10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7:10). 그리고 일주일 후인 2월17일 비가오기 시작했습니다(7:11). 40일후인 3월 27일에 방주가 떠올랐고 천하의 높은 산이 다 덮였습니다(7:19). 그리고 나서 150일간 배가 물위에 떠 있었습니다 (7:24). 150일후인 7월17일부터 물이 감하기 시작했고, 방주가 아라랏 산에 정박했습니다(8:4). 10월1일에는 물이 감해서 다른 산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8:5) 산이 보인 후 40일후에 까마귀를 내 보냈으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4일후에 다시 비둘기를 보내었더니 새잎을 물고 왔습니다(8:11). 그리고 601년 1월1일 지면에 물이 걷히고 해발이 정상수위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1개월26일 후인 2월27일 땅이 말랐습니다(8:14). 그래서 노아의 온 가족과 짐승들이 방주에서 나왔습니다(8:18).
실제로 비가 내린 기간은 600.2.17 - 600.3.27, 40일간이었습니다. 땅위에 물이 창궐했던 기간은 600. 2.17- 601.1.1, 9개월13일 간이었고, 방주에 있은 기간은 600.2.10- 601.2.27 = 1년 17일이었습니다. 이 40일간의 홍수로 인하여 땅위에 코로 숨을 쉬는 모든 생물이 다 죽었습니다. 이 엄청난 저주와 죽음의 기간동안에 유일하고 확실한 구원처는 노아가 만든 방주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방주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는 그 1년17일 동안, 땅위에는 비참한 멸망이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갑자기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 비웃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그동안 노아를 비웃으면서 자기들이 번 돈을 가지고 더 좋은 집을 짓고 더 좋은 가구를 사고, 더 좋은 옷 사 입고, 더 좋은 음식을 사 먹으러 다니며, 끼리끼리 여행 다니며 신나게 살았습니다. 좋은 일을 위해서 돈을 좀 기부해 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들만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남들 험담하고 사회를 망치던 사람들입니다. 뇌물을 주어서 권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여기 저기 투기해서 돈 더 끌어 모았고, 새로 지었다는 엄청나게 비싼 집으로 이사하며 가구를 몽땅 새것으로 바꾸고 그렇게 폼 나게 살았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노아가 말하는 홍수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혀 믿지 않았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이 구멍 뚤린 듯, 비가 쏟아지고 땅이 모두 샘이 된듯, 물이 솟았습니다. 그렇게 대 홍수가 시작되자 그렇게 정성들여 가꾼 집과 가구와 비싼 물건들이 시뻘건 홍수로 다 젖어 망가지며 몽땅 떠내려가고, 그것으로 자랑과 행복을 삼던 사람들 자신도 물에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자랑하던 물건들이 떠내려가고, 남들 앞에 자랑거리였던 자식들이 홍수에 떠내려가고, 결국 자기 목에 물이 차오를 때 이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그 미친영감이 하던 말이 미친말이 아니었네? 이제라도 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일제히 노아의 방주가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밀려드는 물살 때문에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노아의 방주가 있는 곳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방주 문을 두드렸으나, 하나님이 닫아 넣으신 문은 열리지 않았고 천둥소리와 세찬 비바람소리에 그들의 아우성은 들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비극은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길 때 까지 4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40일 후, 세상은 완전하게 잠잠해졌습니다. 아우성칠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부자도 없어졌고 왕들도 없어 졌고 정치가도 없어졌고 군인도 장사꾼도 소매치기도 깡패도 간신배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결혼할 처녀도 총각도 없어졌고 중매쟁이도 없어졌습니다. 모두 퉁퉁 불어 썩은 시체들만 물위에 둥둥 떠 다녔고 세상은 참으로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후로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가족 8인은 그것을 다 알지도 못한 채 찬송과 감사의 소리만 드높아 갔습니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 선택받은 짐승과 그렇지 못한 짐승들의 차이가 이렇게 심각한 줄은 이날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더 모으고 더 올라가고 더 만족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열심했던 모든 것도 다 허사요 모아놓은 물질과 이룩한 업적과 축적한 지식도 모두 허사였습니다. 다만 제 살림 제쳐놓고 하나님의 일에만 몰두했던 바보 멍청이요, 미친 사람 취급당했던 그 노아와, 그의 말을 거역 하지 못하고 순종했던 그 가족들만 구원받았고 그들만 지혜 있는 자 임이 드러났습니다. 천하를 제 것으로 만든다 해도 하나님이 흩으시면 모든 것이 다 허사임이 드러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녀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가르치고 전할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인간에게 당신의 형상을 주입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들이 범죄하고 망하게 되었을 지라도 구원하고 싶어서 방주를 예비하라고 하시고 그리로 들어가라고 하신분도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큰 배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큰 배는 천국이 모든 인간을 수용하기에 충분함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배를 만드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충분히 참고 기다리심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신실하고 정직한 노아를 시켜서 그들에게 말씀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다리기만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국 심판의 비를 내리셨고 그 심판은 갑작스런 것이 결코 아님이 확실합니다. 돌이킬 가망이 없는 것을 보시고는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돌이키기를 기다리시지만 돌이킬 가망이 없는 사람은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인정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저 사람은 틀렸다. 이제 문을 닫아라, 이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그러나 끝내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의인을 끝가지 책임지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의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의롭지 못하고 죄만 가득합니다. 죄를 벗어야 의인인데 인간은 자력으로 죄를 지을 뿐이지 벗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 해 주셨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예비하시고 누구든지 그냥 방주로 들어오면 구원받게 했듯이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 안에 들어오면 죄 사함과 함께 내 자식이라는 칭호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오늘의 삶과 내일과 영원한 장래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염려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천부께서 이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이미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자도 장사도 미인도 학자도 빽 있는 자도 지혜 있는 자도 모두 거절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를 믿어 죄사함 받은 사람들을 의인이라 부르며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3.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들이 1년17일 만에 방주에서 나와 보니 세상은 완전히 변하여 있었습니다. 집도 가구도 간데없고 친구도 이웃도 없었습니다. 지형도 물결로 인하여 바뀌었고 그렇게 비난하며 조롱하던 사람들도 간데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부여받은 첫 번째 사명은 문화적 사명입니다. 새 땅을 아름답게 만들 사명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사람들을 다시 번성하게 하되, 자녀를 바로 가르쳐서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로 세상을 채우는 일이 그들의 사명이요, 이 세상이 악하고 살벌하고 위험한 것들로 채워지지 않도록 아름다운 문화를 발전시킬 책임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교회라는 방주에 들어온 우리들 역시 문화적인 사명을 세상에서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서로 사랑하는 사회가 되게 하는 것, 공해와 비리와 사회악들이 번성하지 못하도록 예방하고 치료하는 사명이 교회가 맡은 문화적 사명들입니다. 자녀를 말씀으로 길러서 의사다운 의사, 교사다운 교사, 법관다운 법관, 인류에 책임을 가지는 발명가, 과학자, 자녀를 바로 키워야 하고, 이를 가정에서 책임져 가는 훌륭한 어머니들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이 땅을 의로운 사람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음이 새롭게 된 사람들이 사랑 넘치는 사회로 만들어갈 사명이 구원받은 자에게 있습니다. 교회는 그 운동을 주도할 주님의 몸이요 기관입니다.
그들이 받은 둘째 사명은, 구속의 사명입니다.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버리라고 요구하십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자 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구원 하시며, 불의한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전파할 사명을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맡겨 주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엄하신 심판을 깨닫고 체험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 하나님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합니다. 돈만 알고 출세와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전도요 선교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구속의 사명입니다.
4. 구원받은 자는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창8:20- 22
노아의 가족은 방주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해서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오늘로 말하면 구원받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 제사가 번제였습니다. 번제는 짐승을 전부 태워드리는 것인데, 전체로 드린다. 전부 드린다 는 뜻으로 “나 자신을 주께 온전히 드립니다” 하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아가 드린 제사는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노아가 드린 제물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짐승과 새 였는데, 그것은 노아가 산에서 사냥해서 잡은 것이 아니고 방주에서 함께 살아난 짐승입니다. 그것들이 방주에 들어온 것은 홍수가 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몰아 보내셔서 노아가 맞아들여 태운 짐승입니다. 그것을 노아가 제물로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지 노아가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정한짐승은 암수 일곱 쌍씩 방주에 몰아 보내셨는데, 일곱쌍 씩을 보내신 것은, 나중에 노아에게 번제로 드릴 수 있도록 제물로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제사이고, 헌신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헌신했다고 자랑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물질, 시간, 재능, 다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선언해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몰수하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만물의 주인이며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리기를 좋아하는 삶, 십일조와 선교헌금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드리기를 기뻐한다면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노아는 결코 노아의 것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새와 짐승은 노아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며, 그 번제를 드리는 노아도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살리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노아도, 노아의 제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나도, 내 재산도, 내 시간도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구원 받은 자의 봉헌생활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 것을 내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하나님의 사람인 내가 받으실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참된 성도의 봉헌관입니다. 물질을, 나의 재산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내 육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주시어 누리게 하시고, 하나님께 드릴 것을 준비해 주셨다는 그런 물질 인식이 참 신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참된 헌신이란, 구원 받은 자가 자기의 생명이고 재산이고 시간이고 건강이고 무엇이든지 내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헌신이란 자기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앞에 예배하러 올라올 때 마다, “하나님의 것인 제가 하나님께 왔습니다” 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헌신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도가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천지의 주재 하나님
창 7장 17~24절 / 이수영목사
TV뉴스나 신문을 통해서 다 보셨을 터이지만 초강력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 시는 지금 미국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재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도시는 한 순간에 수중도시로 변했고 35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사망자는 만 명이 넘을지 모른다는 예측이 나오는 가운데 시체들이 물에 둥둥 떠다니며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구호물자를 기다리다가 사망하는 이재민들이 속속 늘고 있습니다. 시체들이 부패하면서 전염병이 퍼지면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은 "역사상 최악의 국가 재난 중 하나"라고 규정했으며 피해 복구에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내다보았습니다. 이번 이 사태는 천재에 더해 인재가 겹침으로써 가히 대재앙이라고 할 만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폭도로 돌변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주로 식품이나 약품을 얻기 위한 "생존형" 약탈로 시작되었지만 점차로 보석류, 무기류, 자동차를 탈취하는 "범죄형" 강도행위로 변모해가고 있습니다. 애나 어른이나 크고 작은 전자제품 박스를 탈취해가면서 싱글벙글하는 모습을 TV에서 직접 보았습니다. 약탈과함께 총격전이 난무하는 가운데 10대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을 성폭행하며 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대혼란상태에서 경찰의 치안업무는 사실상 포기되었고 약탈과 성폭행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하는 뉴올리언스는 그야말로 생지옥이 된 것입니다. 35만 명의 이재민 중 구호물자를 제대로 공급받고 있는 사람은 10만 명도 안 된다고 합니다. 물과 식량을 기다리다 못해 악에 받친 이재민 중에는 구호물자를 실은 군 헬리콥터를 향해 총을 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뉴스전문 TV인 CNN은 현재 뉴올리언스의 상황을 "시가전상황"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정부에서는 5만 명이 넘는 방위군병력을 투입하기에 이르렀으며 경찰과 방위군에게 폭도들을 사살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미국의 자연재해 평가기관에서는 현재 [카트리나]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1000억 달라, 우리 돈으로 약 100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카트리나]의 여파는 유가를 배럴 당 100달러까지 상승시킬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으며 미국경제의 침체로 말미암아 수출주력국가인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경제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울 것으로 전망됩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자연재해 앞에서 먼저 모든 이재민과 미국 시민들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와 최대한의 원조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무서운 힘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라고 여겨졌었습니다. 풍요로울 뿐 아니라 법과 질서가 확립되어있고 모든 것이 합리적이어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소련의 붕괴 이후 군사적으로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없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의 국민들은 그래서 세계 어디에 가서도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년 전 우리의 기억에도 아직 생생한 9.11 테러를 당하고는 갑자기 미국이 그다지 안전하지 않은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 정부와 시민들은 자국 안에서조차 테러의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이렌 소리나 무슨 굉음을 듣기만 해도, 이상한 우편물만 받아도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을 주 타겟으로 삼을 만한 지구상의 모든 세력에 대해 무한전쟁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뜻대로 그들이 평화와 안전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테러의 위협을 받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찾는 외국인 여행자나 방문객들이 강한 불쾌감을 갖는 것을 무릅쓰고 공항의 보안검색을 강화했어도 미국을 증오하는 세력들에 의한 테러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불안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몇몇 나라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그 나라들에 대한 전쟁이나 외교적, 경제적 봉쇄정책에 매달리고 [알 카이다] 같은 테러조직에 대응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테러단체들이 강화된 미국의 방위와 안보체제의 허를 찌르며 9.11과 같은 또 한 차례의 기상천외의 테러를 감행하느라 머리를 짜내고 있을 것에 맞서 온갖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는 이 때에 미국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나게 강력한 테러세력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카트리나]라는 허리케인이었습니다. 이번에 루이지애나를 강타한 이 자연현상은 9.11 테러보다도 더 무서운 피해를 미국에 안겨준 것입니다.
미국이 이번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주목거리입니다. 미국 국민들이 이것을 단순히 우발적인 자연재해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메시지로 받아들인 것인가가 궁금한 것입니다. 허리케인이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폭우와 홍수로 한 도시나 어떤 지역이 일시적으로 물에 잠기는 일도 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에게로 우리의 생각을 돌리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람과 사람의 꾀만을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 아니며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이는 하나님이심을 새삼 깨우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적대적 국가나 테러세력 앞에서 얼마나 확고하고 단호한 대응태세를 갖추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국이 그 이상으로 힘써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진실하고 충성스러운지를 살피는 것임을 미국의 대통령을 비롯해 국민이 자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이었던 사건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역사상 첫 번째이고 가장 큰 재앙이었던 노아 시대의 대홍수에 관한 기록의 일부입니다.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되었고(17절) 그래서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으며(19-20절)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다(24절) 했습니다. 그 결과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21-22절) 했습니다. 그런데 23절은 그것이 우발적인 사태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신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작정하셨는지는 보다 앞선 창6:5-7에 드러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불로 한 넓은 지역을 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사건입니다. 창19:24-25는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전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이렇게 예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서 역사하시는 도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현상을 인간을 벌하시는 데에만 사용하시지 않고 구원하시는 데에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 놓인 홍해가 갈라지고 물이 물러가 마른 땅이 드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다 건너게 하시고 다시 물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해온 이집트 군대 위에 덮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강물이 흐르기를 멈추고 물벽을 이루며 솟구쳤다가 상류로 다시 역행하게 하셔서 강바닥이 마르게 하시고 온 이스라엘이 안전히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가나안 다섯 나라 연합군과 싸울 때에는 중천에 뜬 해가 이스라엘이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지지 않고 머물러 있게 하시기도 했습니다(수10:12-14 참조). 히스기야 왕에게는 죽을병에서 살려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시키시기 위해서 해시계의 그림자를 10도나 뒤로 물러가게도 하신 하나님이십니다(왕하20:1-11 참조). 사도 바울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서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라"(행17:24) 외쳤습니다. 이 하나님은 두려워할 줄 모르고 어떤 인간집단과 그 광기와 폭력만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번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재난이 미국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이런 끔찍한 일 앞에서 그 자연과 자연의 거대한 힘을 다스리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늘 쉽게 잊어버리곤 하는 우리의 생각을 다시 만유의 창조주요 섭리주이신 하나님께로 돌려야 함을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의 뉴올리언스 일대를 덮친 것과 같은 태풍과 해수가 언제든 우리에게도 덮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인간은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우리의 사고를 바로잡아야 함을 말하고자 할 뿐입니다. 뉴올리언스가 [카트리나]에 유린되던 그 시점에 미국과 맞설 수 있는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에도 태풍이 들이닥쳤습니다.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태풍 [탈림]이 상륙하자 복강성과 절강성 등 동부의 해안 저지대 주민이 100만 명이나 긴급대피를 해야 했습니다. 여러 도시가 침수되었고 국제공항과 그 인근 고속도로가 모두 폐쇄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아무리 초강대국이라 해도 자연을 일으켜서 쓸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입김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음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를 움직이는 열강들이라 할지라도 땅과 바다를 뒤집어 흔드시는 하나님의 손길 앞에서는 속수무책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얼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돌아설 줄 아는 나라와 민족은 살 것이며, 끝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나라와 민족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옆 나라 일본은 영토는 크지 않아도 기술강국이고 경제대국이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하기 이를 데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도 빈발하는 지진으로 큰 인명과 경제적 손실을 입곤 합니다. 우리는 더 많은 일본 국민들이 하루 속히 만유의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깨닫고 미신과 오만에서 벗어나 살 길을 찾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정은 우리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결코 지진안전지대에 속해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역대 태풍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재산피해를 가져온 태풍 [매미]와 비슷한 위력의 태풍 [나비]가 한반도를 향해 북상 중에 있습니다. 이 태풍이 빨리 약화되거나 비켜가거나 큰 피해를 주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러시아 같은 주변열강들을 두려워하거나 북한의 핵만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자연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을 포함하여 천지의 모든 생물을 다 쓸어버리실 수 있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또 한 사람을 위하여 태양계의 움직임을 뒤로 돌아가게 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 어떤 자연의 위협이나 인간의 광기와 폭력 앞에서도 진정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방주 안의 삶
창 7장 17~24절 / 지용수목사
노아는 120년간 하나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노아야!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어라. 방주 안팎을 역청으로 칠하여 물이 새지 않게 하라……. 이런 규모로 이렇게 이렇게 만들어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배가 완성되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야, 너와 방주 안에 들어갈 생물들을 위해서 양식을 저축하라.”
노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4만 5천 마리로 추측되는 생물들의 먹이를 방주 안에 쌓아두었습니다.
“노아야,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노아가 순종해서 그의 처, 세 아들, 그리고 세 며느리와 함께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하늘의 모든 새들과 땅의 짐승들과 기는 것들도 한 쌍씩, 정결한 것은 일곱 쌍씩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신비롭습니다. 새도, 늑대도, 호랑이도, 사자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그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그릿 시냇가에 있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시키셔서 아침저녁으로 고기와 떡을 배달해 주어 먹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베드로가 밤새 수고했으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보아라.”
“주여! 밤새 수고했으나 잡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어부의 상식으로는 깊은 곳에서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는데, 예수님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껏 그물을 내렸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아침이 밝아옵니다. 그 때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무엇을 좀 잡았느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그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내려 보아라.”
그들이 밤새도록 그물을 배 앞, 오른편, 왼편으로 내렸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대로 다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내리니 아주 큰 물고기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물고기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제가 꾸었던 꿈 중에서 때때로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제가 강에서 반두를 갖고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보통 반두는 그물이 1m에서 3m 정도인데 제가 잡고 있는 반두는 40m나 되는 큰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제가 그 큰 반두를 잡고 있는데 그 안으로 큰 물고기가 수없이 들어와 가득 찼습니다.
“어머니, 들어 올립시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어머니께서 그것을 번쩍 드셨습니다. 그것을 들고 강가로 나왔습니다. 물고기가 얼마나 많던지 “야!”하고 외치다 깨니 꿈이었습니다.
물고기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자동차에 물고기 마크를 붙이는 것은 ‘이 차는 그리스도인의 차’라는 뜻입니다.
제가 그 꿈을 꾸고 난 다음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설교하는 것은 그물을 내리는 것인데 내가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을 구원해 주시는구나. 그리고 나 혼자 이 일을 하는 줄 알았더니 어머니께서 나와 동업하고 계시는구나.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니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구나.’
그래서 사례비의 절반은 어머니께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드리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많은 영혼을 구원해 주셨고 제가 가는 곳곳마다 수많은 영혼들이 와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실패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내 마음대로, 내 지혜대로, 내 생각대로 그물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밤이 새도록 수고하여도 물고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곳에서 그물을 내려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내리면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여러분의 지혜대로 하지 마시고 말씀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사업을 할 때도 여러분의 아이디어로 하지 마시고 말씀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목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그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빈 그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하는 일마다 번성하기를 축원합니다.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모든 동물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오자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이제 그 문을 열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방주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도 방주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7절에서 8절에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닫을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양곡교회에도 열린 문을 두신 줄 믿습니다. 이제 수년이 지나면 우리 교회로 들어와 구원 받을 영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문을 닫을 자가 없을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린 문으로 들어와 구원 받게 되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정에 성공의 문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잘 되는 문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면 닫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 큰 인물들이 나올 줄 믿습니다. 거목들이 많이 나올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기 원합니다.
야곱은 19년간 사기만 당했어도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니 한 해만에 거부가 됩니다.
그런데 문은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구원의 문이 닫힙니다. 지금은 구원의 문이 열려 있어서 누구라도 오면 구원 받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구원의 문이 닫힙니다. 그 때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그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셨을 때 나와서 믿고 구원 받아야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17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For God so loved the world) 독생자를 주셨으니(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that whoever believes in him) 멸망치 않고(shall not perish)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but have eternal life.)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구원의 문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도 닫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러 가시면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문이 닫히는 것입니다.
부자가 자색 옷을 입으며 날마다 호화롭게 살았는데 죽어서 음부에 들어가니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이 죽으면 그에게는 구원의 문이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죽기 전에,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서 그들도 구원받게 해야 됩니다.
이번 어린이날 아까운 한 공군 대위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이 결혼기념일이라 어린이날 행사 에어쇼를 한 다음 아내와 결혼기념일 파티를 하기로 되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날 아이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 공군 대위가 예수님을 믿었으면 천당에 갔겠지만 만일 믿지 않았으면 그에게는 구원의 문이 닫힌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구원할 자를 구원해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야 이루어집니다.
방주의 문이 닫혔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삼일……, 육일이 지나도 비가 리지 않습니다. 급하게 방주에 들어왔는데 칠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칠일이 지날 때 하늘 문이 열려 비가 쏟아지고, 땅의 샘이 터져 물을 뿜어내니 이 세상이 물바다가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니 금방 물고기가 잡히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도 금방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네게 아들을 주겠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려서야 나이 백 세에 아들을 얻은 것처럼 어떤 것은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차야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에 순종하다가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리고 성을 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여리고 성을 육일간 돌았지만 성이 조금도 기울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조그만 금도 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여섯 바퀴를 돌아도 성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 군인들이 배를 잡고 웃으며 조롱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곱 바퀴를 다 돌고 나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외칠 때 성이 와르르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때가 차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가 하루만 퍼부어도 물바다가 되는데 40일간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땅의 샘이 열렸으니 얼마나 굉장했겠습니까? 혹 ‘40일간 계속해서 비가 올 정도로 구름이 많았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태양을 거꾸로도 가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물을 만들어 떨어뜨리실 수도 있고 구름을 저축해 두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온 천하가 물에 잠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일 높은 산꼭대기로부터 7m 높이에까지 물이 차서 150일간 창일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있었다는 증거가 세계 도처에 270가지나 됩니다. 산꼭대기에서 바다의 큰 물고기 화석이 나옵니다. 어떻게 산꼭대기에서 물고기 화석이 나옵니까? 노아 홍수 때는 바다, 강, 저수지 경계선이 없이 바닷물이 온 지구를 덮었습니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 화석이 산꼭대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서운 홍수로 인해 세상이 다 멸망하고 노아의 방주에 든 사람과 생물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서 베드로후서 2장 5절에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는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불경건한 세대에 홍수를 내리셨습니다.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가족만 보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37절에서 39절에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먹고 마시는 것은 그냥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방탕하게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성적으로 문란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9절에서 31절에도 말씀하십니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할렐루야!
마지막에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때 택함 받아 예수님의 방주로 들어온 하나님의 사람들은 천사들이 모아서 하늘로 옮겨 주십니다. 할렐루야!
그 날, 불 속에서 멸망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천사에게 이끌려 하늘로 올라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홍수로 이 세상이 망한다고? 그런 일은 없어.”라고 했지만 홍수로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불의 심판? 무슨 소리!”라고 하지만 마지막 때 불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주 안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이 물로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 받았지만 370일간 방주 안에서 살았습니다. 돼지는 꿀꿀거리고, 거위는 꽥꽥거리고, 사자와 호랑이는 으르렁거리고, 개구리는 팔딱거리며 뛰어다니고, 고양이는 야옹야옹 울고……, 그들의 배설물에서는 냄새가 나고, 방주 안에서 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며칠간 장마가 계속되어 밖에 나가지 못해도 답답한데, 370일간 밖에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었으니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인내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방주에서 영원히 살게 하지 않으시고 다시 밝은 세상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만일 방주가 태평양이나 대서양에 떠 있었다면 노아와 그 가족들이 망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밝은 세상에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방주의 생활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생활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천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깨닫게 되는 교훈이 너무 많지만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따라 합시다.
“내 자녀의 미래는 내게 달렸다.”
무서운 교훈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큰 종을 울리며 “들어라! 네 자녀의 흥망성쇠는 부모인 네게 달렸다.”라고 하는 것 같은 큰 교훈이고 무서운 교훈입니다.
노아 당시, 방주 밖에 있다가 죽은 사람들이 어른들뿐이었습니까?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핏덩이 아기들이 뱃속에서 죽고, 갓난아기들이 방실방실 웃다가 죽고, 철없이 뛰어놀던 아이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부모의 방탕한 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내가 죄를 짓고 방탕하면 내 아들딸도 불행하게 되고, 내 아들딸이 낳은 손자도 불행하게 되고, 내 손자가 낳은 아들딸도 불행하게 됩니다.
아간은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와 은 이백 세겔,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눈이 멀어 그것을 훔쳤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아내, 아들들과 딸들은 물론 소들, 양들, 나귀들, 심지어 그의 장막까지 다 끌려가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고 불태움을 당하여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아간의 아들들과 딸들은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아간의 부인도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아간이 죄를 지었는데 온 집이 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가장이 죄를 지으니 온 집이 다 죽었습니다. 사울 왕이 악하니 그 착한 아들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의로우니 그의 아내도 살고 세 아들도 살고 며느리들도 살았습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할렐루야!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사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십니다.
창세기 25장 11절에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창세기 26장 1절에서 5절에도 보십시오. 이삭이 사는 땅에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이민 가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삭, 이민 가지 마라. 이민 가면 안 된다. 여기에 있으면 내가 네게 복을 주고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천하 만민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이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이 내 말에 순종하고 내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이다.”
이삭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 땅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심히 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창세기 26:12~14)
이삭이 얼마나 복을 많이 받았는지,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질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한 해에 백배나 잘 되었다.”
십일조를 한 달에 백만 원 하는 사람이 백배나 잘 되면 십일조를 얼마나 해야 되는지 계산해 보십시오. 일억 원입니다.
애굽의 감옥에 있던 요셉이 꿈 해몽을 잘 하여 하루아침에 총리가 된 것은 백배나 승진한 일인 줄 믿습니다. 요셉이 공무원이 되어 정상적으로 승진하면 언제 총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니 하루아침에 백배나 승진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말하고 해석해 준 자리에서 총리가 된 것은 백배나 잘 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백배나 잘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백배나 잘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양곡교회에도 백배나 잘 되는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초라했던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될 줄을 이십 몇 년 전에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면 우리 교회가 세계 최고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백배나 잘 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 교회가 백배나 잘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이삭이 그렇게 잘 된 것은, 그렇게 복을 입은 것은 이삭 자신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그의 아들 이삭이 복을 받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이 복을 받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복을 받습니다. 그 자손 다윗 왕도 복을 받습니다.
창세기 19장 29절에는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그의 아들들뿐 아니라 조카도 복을 받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미주 양곡교회 지용덕 목사님의 아들 훈이가 콜롬비아 대학의 학생회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떠올랐습니다. 한국인이 그 명문 대학에서 학생회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누구의 조카입니까? 물론 저도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지만 저의 어머니의 기도로 그 아이가 복을 받는 줄 믿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실 때 에누리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에게 ‘예수쟁이 깍쟁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을까 봐 에누리도 하지 않고 속아도 그냥 사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니 저도 손자도 복을 받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아무리 명문대학에 보내도,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도 그것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방탕하게 살면 우리의 자녀가 꺾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롭고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바로 살면 우리 자녀들이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메이커 옷을 입지 못해도 잘 됩니다. 우리가 바로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을 이삭처럼, 노아의 자녀들처럼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의 미래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두 번째 교훈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도 교회 일을 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자기 혼자 방주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의 영화를 보면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함께 짓습니다. 아들들이 잣나무를 베어 와서 함께 방주를 짓습니다.
방주는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면, 여러분도 교회 일을 하시고 여러분의 자녀들도 교회 일을 하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일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사랑하게, 교회 청소를 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찬양대원을 하든지 오케스트라 단원을 하든지, 무슨 일이든 교회 일을 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도 교회 일을 해야 하지만, 노아가 아들들에게 일을 시킨 것처럼 아이들도 교회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시간의 첫 이삭을 바치게 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마태복음 6:33)
“공부해라. 공부해라. 공부해라. 공부해라. 교회에 있지 말고 공부해라.”라고 하면 자식이 망합니다. “예배하고 공부해라. 교회에 충성하고 공부해라.”라고 하면 안 되는 것 같아도 됩니다.
2부 예배 찬양대원으로 충성하시는 미국 영사(領事)이신 집사님은 주일마다 TV를 끄고 아이들에게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섬기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집사님이 미국에서도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집사님의 큰딸이 미국 명문 대학 두 군데나 합격하여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지난번 미국에 가서 섬긴 교회의 목사님의 두 자녀도 초등학교 때부터 고3 때까지 교회에서 오케스트라단원으로 봉사했는데 명문 고등학교에서 수석을 하여 졸업식 때 연설을 했답니다. 스탠퍼드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서로 오라고 하여 고민하다 스탠퍼드로 갔는데 4년간 특별 장학생이 되어 등록금 한 번 내지 않았답니다. 스탠퍼드나 하버드는 교회에서 봉사한 것에 많은 점수를 준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망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사무실장인 박 집사님은 요셉 같은 귀한 일꾼입니다. 이렇게 귀한 직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집사님의 딸 고은이가 예술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고3 때까지 주일마다 교회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봉사했습니다. 그 학교의 다른 학생들은 주일에도 레슨을 받고 공부했지만 고은이는 주일마다 빠짐없이 교회에 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봉사하며 주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고은이가 그 어렵다는 학교에 합격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옵니다.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주의 은혜 감사해 나는 무엇 드리리
사랑하는 예수님 나의 향기 받으소서」
“교회에서 시간 보내지 말고 공부해라.”라고 한다고 아이들이 공부하는 줄 아십니까? 억지로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됩니다. 우리 교회의 한 분이 하루는 재수하는 아들을 태우러 11시 반에 학원 앞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학원에서 나오지 않고 극장 골목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열을 받았겠습니까?
“야! 너 지금 어디에서 나오는 거야?”
“극장에서…….”
“너 정신이 있어? 없어?”
“아빠, 항상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야. 어떻게 공부만 해?”
여러분의 아이가 교회에서 시간 보내는 것이 아깝다고 교회에 있지 못하게 하면 집에 가서 공부하는 줄 아십니까? 인터넷에 들어가서 딴 것 보고 딴 짓 다 합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에 열심히 공부하고 주일에 교회에서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비를 내려 주셔서 더 잘 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교회의 일을 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방주 안의 삶에서 얻어지는 또 하나의 교훈은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 자녀들은 방주 안의 시끄러운 소리, 냄새, 그 어려움을 다 이겼습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에 말씀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
따라 합시다.
“인내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구원 받은 새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만 구원 받은 교인들에게도 육체의 본능이 있기 때문에 때때로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방주 안의 사자와 호랑이가 서로 으르렁거리듯이 구원 받은 장로님과 집사님이 서로 싸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일이 없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교회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이겨야 승리합니다.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 “교회에 못 있겠어.” 하며 방주인 교회 밖으로 나가면 죽습니다. 교회가 시끌시끌해도 교회 안에 있어야 삽니다. 사는 길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영원히 교회 안에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교회 생활뿐 아니라 모든 생활에서 이겨야 됩니다.
미국의 풋볼 스타 하인즈 워드는 어릴 때 ‘한국의 피를 받은 사람’이라고 다른 학생들로부터 얼마나 조롱을 당하고 왕따를 당했는지 모른답니다. 그가 힘들어 할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정신으로 하면 못 할 일이 없다.”
그래서 그가 그 어려움을 이기고 세계적인 스타가 된 것입니다. 그에게 이명박 서울 시장이 성공 비결을 물으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머니의 희생과 어머니의 노력,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 때문입니다. ‘하나님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믿는 정신으로 어려움을 이기고 노력하면 된다.’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대로 살아서 오늘의 제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직장 생활, 결혼 생활, 우리의 모든 생활에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을 이기는 것이 매력입니다.
이제 말씀의 막을 내립니다.
노아가 의로우니 노아와 그의 처, 그의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다 살았습니다. 우리가 의로울 때 우리의 자식이 삽니다.
그리고 노아는 가족과 함께 방주를 세웠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교회 일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저의 어머니와 저, 그리고 저의 누나가 함께 교회 청소하며 살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교회 청소를 하십니다. 저도 오늘 새벽 5시에 우리 교회를 청소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대통령이라도 교회 청소를 해야 합니다. 자기 집 청소는 가정부가 해도 교회에 와서는 청소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궁전을 청소하지 못할 정도로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도 교회 청소를 합니다. 새 성전을 지으면 이제 우리가 청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청소하지 못할 때가 옵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이기는 강인한 자녀로 길러야 됩니다.
따라 합시다.
“나도 이기고 자녀도 이기게 하자.”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 기도하는 일입니다.
방탕한 세상, 유혹 많은 세상을 볼 때마다 노아는 아들들이 얼마나 걱정되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우리 아들들이 이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의롭게 살게 해 주세요.”하고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은 자녀를 위한 기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제 아들딸을 사랑하지만 어떻게 곁에서 그 아이들을 지켜주겠습니까? 그 아이들을 지켜주는 것은 기도하는 길뿐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왜 자식을 훌륭하게 기르지 못합니까? 방법이 틀려서입니다. 자기 방법으로 자식을 기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잘 기르려면 하나님의 방법대로 내가 먼저 의롭게 살아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교회 일을 하게 하고, 자녀를 강인하게 기르고, 자녀를 위해 손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훌륭한 자녀가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을 위해 하루 다섯 번씩 손을 듭니다. 제가 아이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드는지 모릅니다. 부모가 기도하면 그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의 말씀대로 귀한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도 부모 때문에 귀하게 되어서 세계를 이끌어 갈 인물들이 우리 교회에서 수없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그와 함께 방주에 있었던 자만 남았더라
창 7장 17~24절 / 박용래목사
강원도 인제에 수해를 당한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보기에는 수해를 당할 만한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 계곡에 집중 폭우가 쏟아지면서 그 폭우로 인하여 산사태가 발생했고 나무들이 뽑혀 떠밀려 내려오다가 그것들이 막혀 큰 둑을 이루어 물을 가두어 놓았다가 그것들이 터짐으로 엄청난 물과 바위가 마을을 덮쳐 집이 파손되고 사람들이 실종되는 수해를 입었습니다. 수해모금이 언론기관을 통하여 모금되었지만 아직까지 수해현장까지 전달되지 못하여 복구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피곤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직접 수해헌금을 전달할 때 주민들이 반가와 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노아의 시대에 홍수가 났는데 땅에서는 둑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고 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장대비가 쏟아져도 물로 인한 엄청난 피해를 입는데 노아의 홍수 때는 40주야 장대비가 쏟아졌으니 땅위의 높은 산과 봉우리가 다 물에 잠겼고 모든 생명이 이 홍수로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홍수에도 구원받은 생명들이 있었습니다. 노아와 함께 방주에 들어간 자들은 생명만 보호받았습니다. 오늘 아침 구원받은 사람들의 신앙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알고자 합니다. 노아의 대홍수 심판 사건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대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노아시대 이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끝없는 타락과 죄악으로 세상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죄악 된 세상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교훈을 통해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방주를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치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로 사람들은 타락하고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타락했습니다. 끝없는 타락과 끝없는 방종과 죄악 된 세상에 하나님은 심판을 작정하셨습니다. 물론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당대의 하나님께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120년에 걸쳐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여 놓으셨습니다. 죄악된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임할 때에도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나님은 미리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여 놓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방주를 예비하여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120년에 걸쳐 노아를 통하여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여 놓으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여 놓으셨습니다.
2)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1절에서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예비하기까지 하나님은 심판을 알리면서 기다리셨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초청에 순종하여 배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하나님은 7일 동안을 더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했습니다. 끝까지 먹고 마시고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만들어 놓으신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여 주셨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어라”(사55:3)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55:7) 예언자들을 통하여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여 주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라. 주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라 누구든지 주의 성전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 들어오기만 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구원받으리라. 끝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전도자들의 입술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땅 끝까지 방송을 통하여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라고 복음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편히 쉼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초청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땅위에는 수많은 전도지, 수많은 전도자들, 수많은 방송을 통하여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고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엄청난 사랑과 희생을 쏟아 부어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죄를 용서함 받고 구원받게 한다고 복음이 전파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끝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하고 범죄한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오늘의 세상은 노아의 시대보다 더욱 무섭게 타락하고 범죄하여 죄악이 만연한 세상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과학자들도 지구의 종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의 심판보다 몇천배 무서운 재앙이 세상에 임할 수 있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주신 지구에 오존층이 태양의 유해 광선을 차단해주고 있습니다. 지구촌 안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가스나 매연이나 오염으로 인하여 오존층이 파괴됨으로 각종 암과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고 합니다. 햇빛을 직접 받으면 피부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물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불심판입니다. 물은 남은 물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은 남기는 것이 없습니다. 다 녹이고 태우고 부셔버리고 있습니다. 핵전쟁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한순간에 불로 세상이 산산조각 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 주셨고 누구든지 들어오면 살리라 초청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사람들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을 열기만 하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 회개하고 믿기만 하라시며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지 아니하십니다. 밖에서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문 안에만 문고리가 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예수님에게 문을 열어주어야 주님이 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의 방주를 만드셔서 들어오기만 하면 산다고 기다리십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죄사함 받고 구원 받으리라 약속하셨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노아의 시대처럼 사람들은 끝없는 반항 끝없는 배신, 끝없는 방종과 타락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은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진리 가운데 들어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가족, 친척, 이웃들이 구원의 방주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3)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방주의 문이 항상 끝없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고 나오고 싶으면 나올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시면 아무도 다시 열자가 없습니다. 슬기로운 열 처녀 비유 가운데 잔치의 문이 한번 닫힌 후에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슬퍼하며 울부짖어도 다시는 열리지 아니했습니다. 노아의 방주의 문을 하나님께서 닫으신 후에는 아무리 세상이 아우성치고 멸망 받아도 다시 열리지 아니했습니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 받을 때가 있고 구원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한번 임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인생은 한번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임하면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시는 때가 오면 인간에게 주어졌던 기회는 끝장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닫기 전에는 방주 안에 있는 자나 밖에 있는 자나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방주의 문을 하나님이 닫으신 후에는 방주 안과 밖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졌습니다. 우리 인생에 문이 닫히는 날도 아무도 모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예비하지 못한 자들이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마25:30).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한 세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인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복을 누리는 신앙의 승리자가 되셔야 합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구원의 방주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