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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이과수,푸에르토마드린,포크랜드제도,우수아이아
13일차
우수아이아
[ 기항지 추천 선택관광 ] - 선사 프로그램 이용 (US$ 59.95)
▷ 비글해협 야생동물 관광 크루즈 (Beagle Channel Wildliffe Cruise)
- 눈 덮힌 산과 폭포가 많은 강, 침엽수 등이 인상적인 야생동식물 서식지를 보트로 탐험
(소요시간 : 약 2시간 30분)
15일차
포클랜드 제도(스탠리)
포클랜드 제도 기항 / 선내 조식 후 기항지 선택관광 또는 선내 자유일정
◐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Islas Malvinas)’라고 부르는 포클랜드제도는
아르헨티나 동쪽으로 480km 떨어진 남대서양 상에 동서로 나누어진 두 개의 큰 섬과 77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입니다.
[ 기항지 추천 선택관광 ] - 선사 프로그램 이용 (US$ 189.95)
▷ 펭귄 서식지 투어 (Bluff Cove Penguin Rookery)
- 짚차를 타고 1,000여 쌍의 젠투펭귄 서식지 방문, 하얀모래 해변과 박물관 투어 등
(소요시간 : 약 3시간, 스낵 제공)
관광 후 항구로 이동 및 재승선
17일차
푸에르토 마드린
푸에르토 마드린 기항 / 선내 조식 후 기항지 선택관광 또는 선내 자유일정
[ 기항지 추천 선택관광 ] - 선사 프로그램 이용 (US$ 289.95)
▷ 페닌슐라 발데스 관광 (Peninsula Valdes)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지역 발데즈 반도
- 파타고니아 탐방, 펭귄과 바다표범 관광 등 (소요시간 : 약 8시간, 식사 포함)
20일차
부에노스 아이레스
부에노스 아이레스 기항
▷ 부에노스 아이레스 관광
- 대통령궁, 시청, 국립은행, 대성당, 5월의 광장
- 까빌도(시의회 박물관), 국회의사당
- 7월9일의 대로, 탱고의 발상지 보카지구 등
21일차
이과수 폭포(아르헨티나) 관광
- 최대 낙차 100M가 넘는 세계 최대의 아름답고 장엄한 폭포로 영화 미션의
촬영지이자, 일명 “악마의 목구멍”이라 불리우는 폭포 등
아르헨티나(Argentina)
정식 국가명은 아르헨티나 공화국(Argentine Republic)이며, 총 인구는 약 4,100만이다. 수도는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로 수도에만 3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약 1,500만이 거주한다. 남극대륙 및 남부 도서지역을 제외한 국가의 면적은 2,791,810㎢로 한반도의 약 12배에 달핚다. 동쪽으로는 브라질과 우루과이, 서쪽으로는 칠레, 북쪽으로는 볼리비아, 파라과이와 경계를 맺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대서양과 면하고 있다.
우수아이아 (Ushuaia) – 지구의 끝
비글해협 야생동물 관광 크루즈 (Beagle Channel Wildliffe Cruise)
아르헨티나 티에라델푸에고 주, 비글 해협 연안
세계 최남단, 세상의 끝에 있는 마을
- 눈 덮힌 산과 폭포가 많은 강, 침엽수 등이 인상적인 야생동식물 서식지를 보트로 탐험
아르헨티나 티아라델푸에고 주의 주도. 남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에 있는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서 가장 큰 섬에 있으며, 세계 최남단의 항구도시로 상징적으로 지구의 끝이라 분리우며, 비글해협과 닿아있다. 비글해협은 1832년 찰스 다윈이 비글호로 이 해협을 통과한 데에서 명명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해군기지가 있는 도시로 카타마란호를 타고 비글해협을 다녀오는 투어가 인기이다. 땅끝 박물관, 감옥 박물관 등도 이 도시의 볼거리이다.
비글 해협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에 있는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서 가장 큰 섬에 위치하며, 아르헨티나 본토와는 마젤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1870년 영국의 선교사인 와스티 H. 스털링이 이곳에 처음 정착했다.
1884년에는 아르헨티나 해군기지가 세워졌고, 티에라델푸에고 제도가 아르헨티나령과 칠레령으로 나누어진 뒤 1893년 시가 되었다. 경제활동으로는 제재·목양·어업·덫사냥을 주로 한다.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우수아이아(Ushuaia)는 아르헨티나의 티에라델푸에고 주의 주도로,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푸에고 섬의 남안에 있으며, 인구는 약 5만 명이다.
현지 사람들은 이곳을 ‘핀 델 문도(Fin del Mundo)’, 즉 ‘세계의 끝’이라고 부른다. 남극을 제외한 세계 최남단,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남쪽에 설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항구 마을, 그곳에 바로 세계의 끝 우수아이아가 자리 잡고 있다. 먼 옛날 대항해 시대 당시에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는 많은 배들이 대자연의 재앙 앞에 침몰했다. 좁고 거친 파도를 가진 해협을 바라보며 경사진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마을은 1년 내내 세계의 끝을 느끼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곳은 남극 여행의 전초 기지로도 유명하다. 남극으로부터 불과 1,00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사람들이 머무는 베이스 캠프로도 유명하다. 궂은 날씨로 늘 회색빛을 띠는 이 마을의 거리를 거닐며 세계 최남단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껴 보자.
아르헨티나의 최남단 티에라델푸에고 주의 주도이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남쪽 끝에 위치하여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남극 지방의 해상 교통 거점이다.
아르헨티나 최남단 티에라델푸에고의 주도이다. 티에라델푸에고 주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세상의 끝’이라는 별칭을 가진 항구 도시이다. 이 도시의 우수아이아 항구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비글 해협에 위치한 남극 항로의 기점으로, 해상 교통의 요지이다. 위치와 기후적 특성이 만들어 낸 특별한 자연환경, 티에라델푸에고 국립공원 등 관광 자원도 풍부하다. 원격지라는 특성 때문에 19세기 중엽 이후에야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 우수아이아 (Tierra del Fuego) 안내 ♣
남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에 있는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서 가장 큰 섬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계 최남단의 항구도시이며 비글 해협 (1832년 찰스 로버트 다윈이 비글호로 통과한 데에서 명명)과 닿아 있습니다. 부근에는 눈 덮인 산과 폭포가 많은 강, 침엽수 등 인상적인 풍경들이 펼쳐져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합니다.
1) 우수아이아 기항지 선택 관광 안내 (선사 프로그램)
비글해협 생태 크루즈 관광 (Beagle
Channel Wildlife Cruise)
비글 해협 운하를 운하 전용 크루즈로 더 자세히 가까이에서 보실 수 있는
상품입니다. 바다사자 섬, 새들의 섬 주변을 크루징하며 엽서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과 생태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포클랜드 제도Falkland Islands
남대서양에 있는 영국의 자치식민지. Islas Malvinas라고도 함.
◐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Islas Malvinas)’라고 부르는 포클랜드제도는
아르헨티나 동쪽으로 480km 떨어진 남대서양 상에 동서로 나누어진 두 개의 큰 섬과 77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입니다.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에서 북동쪽으로 480km 떨어져 있으며, 마젤란 해협 동쪽으로도 비슷한 거리 만큼 떨어져 있다.
자연환경
포클랜드 제도는 주요섬인 이스트포클랜드·웨스트포클랜드 섬과 200여 개의 조그만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스트포클랜드 섬에는 수도이며 유일한 도시인 스탠리 항이 있다.
포클랜드 제도 정부는 영국의 부속령인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섀그클러크 암초 등을 관할하는데, 섀그클러크 암초는 포클랜드 제도 동쪽과 남동쪽으로 1,100∼3,200km 지점에 있다. 1690년 영국인 선장 존 스트롱이 처음으로 포클랜드 제도에 상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2개의 주요섬 사이의 해협을 영국의 해군 장군 포클랜드 백작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고, 나중에 그 이름이 주위 섬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남아메리카 현지에서는 주로 말비나스 제도로 불리는데 이는 초기 프랑스 탐험가들이 탐험을 시작한 지점인 생말로(St. Malo) 항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구릉지대가 주요한 2개의 섬의 북부를 가로질러 동서로 뻗어 있는데 이스트포클랜드 섬의 어즈번 산에서는 그 높이가 705m에 달한다. 해안에는 익곡이 많이 형성되어 보호항이 발달했으며, 작은 강들이 이탄으로 덮인 넓은 계곡을 지난다. 서늘하고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극한 온도를 나타내는 경우는 거의 없고 약간의 계절 변화가 있을 뿐이다. 강한 서풍이 늘 평균 시속 31㎞로 부는 반면 연평균기온은 약 5℃이며 평균최고기온은 9℃, 평균최저기온은 3℃이다. 연평균강수량은 635㎜이다.
키 작은 초본 및 관목류가 빽빽하며, 교목은 자라지 않는다. 초원지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화이트그래스(Cortaderia pilosa)와 디들디(Empet-rum rubrum)이다. 방목이 불가능한 앞바다 섬들은 터속그라스(Parodiochloa flabellata)로 뒤덮여 있다. 서늘하고 습기가 많은 기후로 인해 식물의 완전 분해가 억제되어 현지에서 연료로 사용되는 이탄층이 두껍게 형성된다.
원산지 포유동물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포클랜드 고유종인 여우는 멸종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검은눈썹알바트로스, 매, 가는 줄무늬의 카라카라 등을 비롯해 약 65종(種)의 조류가 서식한다. 또한 수백만 마리나 되는 펭귄의 서식지로 대부분이 바위날기펭귄, 마젤란펭귄, 젠투펭귄이고, 왕펭귄, 마카로니 펭귄도 소수 있다. 돌고래류와 작은 곱등어류도 흔히 볼 수 있으며 오타리아 비로니아, 코끼리물범류도 풍부하다. 물개아과 동물들은 몇몇 외딴 곳에서만 볼 수 있다.
국민과 경제
포클랜드 제도의 주민은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계 포클랜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활방식은 목양을 키우는 고립된 소규모 공동체생활과 수도인 스탠리에서의 생활 2가지 방식으로 명백히 나뉜다. 스탠리에는 영국의 과학자와 군인을 포함하여 인구의 2/3가 거주한다.
2개의 주요섬에서 스탠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대부분은 목양지이다.
규모가 다양한 양목장은 개인이나 영국에 본사를 둔 회사의 소유이다. 약 70만 마리의 양이 있는데 매년 수천t의 양모와 약간의 양고기가 생산된다. 모는 섬의 주요자원으로 주로 영국으로 수출되며, 1851년 왕의 칙허장을 받은 포클랜드아일랜즈사는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여전히 제도에서 유일한 최대 목양주이다. 인접한 바다에서 행해지는 수산업이 목양업을 지원해준다.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 왕이 임명한 총독을 행정부의 수반으로 한다. 총독은 의회의 의장을 겸하며 선임사무관들과 선출된 의회의원들로 이루어진 행정위원회의 조언을 듣는다. 포클랜드에는 실업자가 없으나 주택난이 심각해 유입인구가 적다.
사회복지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15세까지의 아동은 무상으로 의무교육을 받게 되어 있다. 스탠리에서는 중등과정까지 무상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스탠리에 있는 병원에서 무료 의료 서비스가 제공된다.
내륙교통은 자동차와 국영항공이 담당한다. 해안의 화물선은 보급품을 운반하고 영국으로 수송할 연간 양모 생산량을 모으기 위해 주요섬인 이스트포클랜드·웨스트포클랜드 섬을 돈다. 포클랜드의 마운트 플레전트 공항을 출발, 어센션 섬을 경유해 영국으로 가는 정기 여객기가 있다. 인공위성을 통해 섬 외부와의 통신도 원활한 편이다.
〈욕망 Desire〉지에 따르면 이 섬은 1592년 영국인 항해가 존 데이비스가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뚜렷한 역사적 사실로서 확인되는 것은 1600년경 네덜란드인 세발다 데 웨르트에 의한 발견이다.
최초의 주거지는 1764년 프랑스 항해가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이 이스트포클랜드 섬에 정착하면서 이루어졌다. 1765년 영국인이 웨스트포클랜드 섬에 처음 정착했으나 1767년에 이미 프랑스의 정착지를 사들였던 스페인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1770).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자 1771년 웨스트포클랜드 섬의 영국인 전초기지가 복구되었으나, 1774년 영국은 영토권을 포기하지 않은 채 경제적인 이유로 섬에서 철수했다.
스페인은 1811년까지 이스트포클랜드 섬(당시의 이름은 솔레다드 섬)에 정착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영제국).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는 1820년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다. 1831년 미국 군함 USS 렉싱턴호는 아르헨티나가 그 지역 내에서 물범류를 사냥하던 미국의 배 3척을 불법 포획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트포클랜드 섬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정착지를 파괴했다.
1833년초 영국군은 섬에 잔류해 있던 몇 안 되는 아르헨티나 장교들을 추방했다. 1841년 포클랜드 제도에는 영국인 민간인 부총독이 임명되었고, 1885년에는 1,800명 정도로 이루어진 영국인 지역사회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1892년에 포클랜드는 식민지가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정기적으로 영국의 섬 점령에 항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포클랜드 제도를 둘러싼 영토권 문제는 1964년 국제연합(UN) 식민지 해방위원회가 포클랜드 제도의 지리적 위치를 문제삼으면서 UN으로까지 넘어갔다.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신대륙 분할기준이 되었던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에 의해 수정된 1493년의 교황칙서, 스페인을 계승했다는 점, 포클랜드 제도가 남아메리카 대륙에 가깝다는 점, 식민지 상황을 종식시켜야 하는 필요성 등을 근거로 삼았다.
영국은 1833년 이래 '개방적이고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소유·점유·행정'과 UN 헌장에 명시된 자결원칙 적용 등을 근거로 자국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통치는 식민지 상황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포클랜드인의 소망에 반대되는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어낼 뿐이라고 했다. 1965년 UN 총회는 이 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소환하여 검토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형태의 분쟁들은 1982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그 직후인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의 군사정부는 곧 포클랜드를 침공했다. 이 침공으로 시작된 포클랜드 전쟁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 제도의 수도인 스탠리에서 제도를 강제로 재점령한 영국군에게 항복함으로써 10주 만에 끝났다. 영국은 섬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켰고, 군사제한지역과 어획금지구역을 상당히 먼 거리까지 확대했다. 인구 2,564(1996).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영토 분쟁 지역이다. 현재는 주로 영국의 해외영토로 간주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및 스페인어권에서는 말비나스 제도(스페인어: Islas Malvinas 이슬라스 말비나스[*])라 부른다.
영국-아르헨티나 간의 영토 분쟁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의 불씨가 되어 아르헨티나 군이 침공해 몇 달 동안 포클랜드 제도를 점유하기도 했다. 말비나스라고 하는 것은 이 곳에 처음으로 도착한 이들이 프랑스의 생말로 주민이었기에, 프랑스어로 '생말로'의 혹은 '생말로 주민'을 뜻하는 말루인 섬(프랑스어: Ile Malouines 일 말루인[*])이라고 부른 것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것이다. 포클랜드 제도에는 포클랜드 늑대가 서식하였으나, 지금은 멸종되었다.
포클랜드 제도의 최초의 발견자에 대한 것부터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쪽 주장은 엇갈린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6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으로 구성된 마젤란 탐험대가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니 그 연장선 상에서 역사를 풀어보려는 의도다.
영국에서는 또 그들 나름대로 16세기 말 영국의 항해사 존 데이비스가 최초라고 주장한다.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그래서 존 데이비스를 이 제도의 최초 발견자로 올려놓고 있다. 그러나, 사실 양측의 주장 모두 다 문서로 확인된 기록은 없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오스만 제국의 피리 레이스가 제작한 지도에도 이 섬으로 추정되는 섬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경에 발견된 것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반면, 포클랜드 제도에 발을 디딘 최초의 상륙자는 17세기 말 영국 탐험대라는 것에는 논란이 없다. 포클랜드라는 이름도 이 탐험대가 포클랜드 자작이라는 당시 해군관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아무튼 영국이 먼저 포클랜드 제도에 발자국을 남긴 '기록'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1]
처음으로 포클랜드 제도에 정착한 것은 1764년 프랑스인들이다. 그러나 1766년, 프랑스 정착민들은 보상을 받고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권리를 스페인에게 양도 한다. 그러나 이와는 상관 없이, 1766년부터 영국인들이 포클랜드 제도에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때 양측이 서로의 존재를 인지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4년 뒤 앞서 세운 영국의 기지를 발견한 스페인인이 침공해서 점령했으나, 다음해 영국에 반환했다. 그러다가 1774년 경제적인 문제로 퇴거하면서 영유권을 표시하는 명판을 남겨두었다. 스페인 역시 죄수 캠프로 섬을 이용하다가 중도에 철수했다.
1816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독립 당시에는 포클랜드 제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1826년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이 아르헨티나에 귀속된다고 공식 선언한다. 1828년에 아르헨티나는 독일 상인을 파견해서 관리한다. 그런데 독일 상인이 불법적으로 어선을 나포하고 해적질하자 자국 어선에 대한 해적질을 처단하고자 미해군이 독일 상인의 기지를 포격해서 파괴한다. 1833년 영국은 해적 행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변 해역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전함을 보내서 포클랜드 제도를 군사력으로 점유한다.
이때 영국이 아르헨티나 식민자들을 내쫓았다는 주장이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측 소스에서 영국 측이 오히려 식민자들에게 남을 것을 권유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부정되고 있다. [2]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권리도 같이 승계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으로서는 자신들이 최초로 상륙하고 자국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영토를 되찾았다는 입장이었다. 영국에 접수된 이후, 이 제도는 100여년간 영국에 의해 평화적으로 점유된다. 영국에 의한 점령기간 중, 약소국 아르헨티나는 최강국 대영제국을 상대할 수 없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후 전 세계적인 탈식민지화 추세에 따라 1946년 아르헨티나가 다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1965년 유엔총회는 식민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결의 2065/XX)를 채택했다. 영국계 주민들이 대다수였던 포클랜드 제도의 주민들은 아르헨티나에 의한 지배를 반대했다. 1973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한다. 유엔총회는 양국이 분쟁해결을 위한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할 것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회담을 시작하였다. 이후 1982년 2월까지 꾸준히 협상이 지속됐으나, 영국으로서는 이 협상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고, 1982년 3월, 아르헨티나 외무부는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 않고 있다며, 협상이 신속히 진행되지 않으면 더 이상 협상할 수 없고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이라고 공식 선언한다. 이후 양국간에 긴장감이 높아지게 된다. 중남미의 모든 국가들은 포클랜드 제도에 대해 아르헨티나의 영토로 인정하고 이를 반대하는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상태에서 미주지역 국제기구를 창설하는 것에 최종 합의를 했다.[3]
포클랜드 전쟁은 1982년 4월 2일에 발발하였다. 아르헨티나는 영국이 이 섬을 불법점거하고 있다며, 말비나스 제도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침공하였다. 침공의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영유권 협상을 진행해봤자 이익이 없으며 또 더 이상 진행하고 싶지 않았던 영국의 소극적인 협상태도라는 설도 있고, 아르헨티나의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의 추락하던 경제 상황을 타개하고 국제적 주목을 받고자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영국군의 포클랜드 제도 주둔군이 줄어들었던 요인도 아르헨티나의 침공을 일으키게 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국제연합 상임이사회는 결의안을 발표하고 아르헨티나가 제도 전체에서 군병력을 철수할 것과 외교적 대안을 양국이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칠레, 콜롬비아를 제외한 전 국가가 아르헨티나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한편 영연방과 아일랜드는 영국 정부를 지원하고 나섰다. 결국 미국까지 가세하게 되고 영국은 구원병을 포클랜드 제도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여 포클랜드 전쟁이 본격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영국 해공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영국군은 5월 21일 산 카를로스 해안에 이르렀고 6월 14일 아르헨티나 군은 결국 항복하였다. 아르헨티나 군의 패배의 원인은 전투기의 성능상의 문제였는데 아르헨티나 공군 주력기 미라쥬는 영국 공군 주력기인 해리어보다 성능상에서는 훨씬 뛰어났지만 문제는 미라쥬를 띄우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길고 넓은 활주로가 필요한 반면 해리어는 수직 이착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공군전에서 영국에 밀려 항복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군은 즉각 포클랜드 제도에 병력을 증강하였다. 아르헨티나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갈티에리 정부는 실각(失脚)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와 영국 당국은 1989년 외교적 협상을 게시하였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진전도 없고 협상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에 사는 주민들의 '자결권'에 따라, 주민들의 의사에 의해 포클랜드 제도의 귀속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고,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의 역사적 승계성을 주장하며, 스페인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당시 스페인의 영토였던 포클랜드 제도도 같이 승계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의 귀속여부는 거주민의 의사(意思)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대영제국이 1833년 군사력을 써서 이 섬의 아르헨티나계 주민들을 축출하고 영국계 주민들로 채웠기 때문에, 자결권 주장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의 여지는 남아있다. 현재 이 섬은 거의 영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아르헨티나에 의한 지배를 반대하고 있다.
영국에서 포클랜드 제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는 이유가 대서양과 남극에 있는 무궁무진한 지하 자원과 특히 얼음 상태로 잔존해 있는 물을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실제 남극에서 얼음 상태로 존재하는 물은 전 지구에 존재하는 담수(淡水: 바닷물을 제외한 물)의 90%에 달한다. 이후 1995년에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상호 협약을 통해 포클랜드 전쟁으로 악화된 양국간의 외교를 회복하기도 했다. 그 협약의 내용 중에는 아르헨티나와 영국 간의 상호 자원개발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영국은 아르헨티나와의 협약을 무시하고 포클랜드 제도 일대의 대서양에 매장된 석유를 일방적으로 불법 채취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5]
포클랜드/말비나스 제도에 대한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에 국제사회는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중립을 지키고 있다.
영연방 국가들은 이 제도에 대한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들 중 카리브 공동체 국가들은 최근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함을 밝혔다. 유럽연합은 이 곳을 회원국의 특수해외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페루는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포클랜드 전쟁 중 물자지원을 하기도 했다. 이외 브라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우루과이 등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과 해당 지역기구인 메르코수르(MERCOSUR), 남아메리카 국가 연합등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칠레는 포클랜드 전쟁 중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퇴임 이후에는 아르헨티나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유럽연합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주장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또한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미합중국은 1940년대 이래 공식적으로 이 제도의 영유권주장에 대해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 중에는 영국에 대해 물자 및 정보지원을 실시했다
이 제도에 대한 국제연합(UN)의 수십 년 된 입장은, 중립적 관점에 의거하여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측이 이 문제에 대해 협상을 시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섬으로, 12,173㎢의 면적에 서(西)포클랜드와 동(東)포클랜드 섬 및 주위 776개 섬으로 이루어졌다. 중심지인 스탠리와 영국군 기지는 동포클랜드에 있어,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다. 해양성 아남극(亞南極) 기후로 비교적 냉량(冷凉)한 편이다. 여름인 1월의 평균기온은 13 °C (55 °F), 겨울인 7월의 평균기온은 4 °C (39 °F) 가량이다. 평균 연간강수량은 573.6mm로 동포클랜드가 서포클랜드보다 습윤한 편이다. 습도가 높고 바람도 비교적 강한 편이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나, 많이 쌓이지는 않는다. 강풍은 흔한데, 특히 겨울에 많다. 이 제도의 기후는 영국의 셰틀랜드 제도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강수량은 더 적고 겨울에 좀 더 춥다.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으로부터는 12,173km이나 이격되어 있는 반면 아르헨티나로부터는 아르헨티나의 티에라델푸에고 섬의 북동쪽으로 400km정도 이격되어 있다.
영국령 섬무리. 마젤란 해협 동쪽 760km, 남대서양에 있음. [다른 이름] 말비나스 제도 Malvinas, Islas(스페인). 주도는 동포클랜드 East Falkland 섬, 서포클랜드 West Falkland 섬. 넓이 1만 2173km2. 인구 2100명. 기후가 차고 습기가 많은 황량한 곳으로 소・말・양 등의 목축과 어업이 행해지며 양모・피혁・냉동육을 수출함. 중심 도시는 동포클랜드 섬의 스탠리. 1592년 영국의 존 데이비스가 도착, 1764년 프랑스인이 처음으로 이 주, 이어 영국인도 이주했으나 1770년 스페인이 이들을 추방, 양국 간에 전쟁이 일어날 뻔했음. 아르헨티나가 독립하고 나서 자국령을 주장했으나 1833년 영국이 점령, 1982년 양국 간에 영유권을 둘러싼 무력충돌이 일어나 양쪽 다 상당한 손실을 입은 끝에 영국이 승리했음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Islas Malvinas)’라고 부르는 포클랜드제도는 아르헨티나 동쪽으로 480km 떨어진 남대서양 상에 동서로 나누어진 두 개의 큰 섬과 77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群島)이다. 면적은 약 1만 2000km2으로, 인구는 3000여 명이다. 수도는 동포클랜드에 위치한 스탠리(Stanley)다. 현재 영국령에 속해 있지만, 아르헨티나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1690년 영국 탐험대였던 존 스트롱 선장이 처음 이곳에 상륙했고, 무인도였던 이곳을 당시 영국 해군 관료의 이름을 따 이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최초 발견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측의 입장에 따라, 영국은 1592년 항해사 존 데이비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는 1520년경 에스파냐(스페인) 국왕의 후원을 받고 원정을 나선 마젤란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1600년경 네덜란드인 세발다 데 웨르트(Sebald de Weert)가 이곳을 탐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764년 프랑스인들이 동포클랜드에 정착하면서부터였고, 이후 1765년 영국인 존 바이런이 서포클랜드에 상륙하여 1766년부터 영국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 정착촌에 대한 존재를 모른 채 당시 전 세계에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스페인에 이곳을 양도하고 이곳을 떠났다. 하지만 영국과 스페인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지리적으로 관리가 어려운 점 등 경제적ㆍ정치적 이유로 영국은 1774년, 스페인은 1811년 차례로 철수하였다.
이후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을 선언하였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아르헨티나가 1820년에 프클랜드의 영유권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1832년 영국은 포클랜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영국인이므로 포클랜드는 영국 땅이라고 주장하며, 이곳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착민을 추방하고, 1833년 이곳을 무력 점령한 뒤 자국민을 이주시켜 자치령으로 삼고 계속 점유하였다. 이때부터 양국은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전 세계 패권을 지고 있던 대영제국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반환 요청만 할 뿐 해결점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50년의 세월이 지난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이곳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레오폴도 갈티에리 군사평의회 의장 겸 대통령 직무대행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선전포고없이 포클랜드제도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면서 전쟁을 일으켰으나 아르헨티나군이 제도를 점령하자 영국군은 함대와 군대를 파견해 74일 만에 탈환하였다. 이 전쟁으로 아르헨티나군 7백여 명과 영국군 250여 명이 전사했고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이 전쟁의 패배로 이듬해 몰락하였다. 이후 영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지만,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양국 간의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한편, 한국 정부는 2011년 9월 19일, 포클랜드제도 인근의 포클랜드해를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영유권 분쟁이 마무리되지 않고 가속화되는 점을 감안해 아르헨티나에서 부르는 말비나스해(Malvinas Sea)와 병기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이 방침은 포클랜드가 분쟁지역이라는 측면 외에도 국제수로기구(IHO)의 <해양과 바다의 경계> 책자에서 동해(East Sea) 표기 문제와 관련한 영국의 반대 입장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남미경제공동체인 메르코수르(MERCOSUR)는 2011년 12월 19~20일 우루과이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포클랜드 깃발을 단 선박에 대해서는 자국 내 항구 이용을 금지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는 메르코수르가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아르헨티나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메르코수르는 아르헨티나를 브라질ㆍ파라과이ㆍ우루과이 등 남미 주요 4개국이 정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로써 포클랜드제도를 둘러싼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갈등은 더욱 복잡하고 가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남대서양에 위치한 영국의 해외 영토로, 수도는 스탠리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영토 분쟁 지역이며,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로 부른다.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대서양에 위치하며, 공식 명칭은 포클랜드 제도이다. 2개의 주요 섬인 동포클랜드와 서포클랜드를 비롯한 78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구는 2,840명(2012년 기준)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영국계 백인이며, 영어가 공용어이다. 공식 화폐는 포클랜드 제도 파운드로, 영국 파운드와 화폐 가치가 동일하다. 전통적으로 목양업이 활발했으나, 1987년부터는 어업전관수역에 대한 어업 면허 수수료가 정부 수입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충분한 재정 수입으로 인해 1인당 평균 소득이 5만 달러를 상회하며, 영국으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해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유럽 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한 이후 영국-에스파냐, 영국-아르헨티나 간 영토 분쟁이 계속되고 있으나, 1833년부터 영국의 실효적 점유가 이어지고 있다.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영국이 승리하면서 지금까지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포클랜드 제도 대신 말비나스 제도라고 부른다. 수도는 동포클랜드 섬의 동부 해안에 위치한 스탠리이다.
면적 1만 2000㎢이고, 인구 약 2,840명(2012)이다. 주도(主都)는 동(東)포클랜드섬의 스탠리. 동서 2개의 주도(主島)와 여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이 많으며 최고점은 약 770m인데 황량한 풍경이 전개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날씨가 잦으며, 여름은 꽤 기온이 높아지지만 그밖의 계절에는 스코틀랜드 연해지역의 기후와 비슷하다. 주산업은 목양업(牧羊業)으로 사육두수는 60만 마리가 넘는다. 수목이 자라지 않으며 거의 불모지이거나 초원이어서 농산물은 재배되지 않는다. 이 제도는 1592년에 영국의 항해가 데이비스가 발견했을 때는 무인도였다.
그뒤 프랑스가 식민지화하려다가 실패하고, 1832년 영국이 포경기지(捕鯨基地)로서 영유권(領有權)을 선언한 뒤 영국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남대서양의 중요한 영국 해군기지였고 부근의 해상에서 영국·독일 함대의 전투가 벌어졌다.
근래 칠레 ·아르헨티나가 이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해 왔으며, 1982년 4월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동포클랜드섬을 점령함으로써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75일간에 걸친 전쟁에서 두 나라 모두 큰 피해를 입었으며, 아르헨티나 대통령 갈티에리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 포클랜드 제도(스탠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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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에서 동쪽으로 480km 떨어진 남대서양 상에서 동서로 나뉘어진 2개의 큰 섬과
770여 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입니다. 영국령에 속해 있는 영토로 수도는 동 포클랜드 섬의 동부 해안에 위치한
스탠리입니다.
1) 포클랜드 제도(스탠리) 기항지 선택 관광 안내 (선사 프로그램)
포클랜드 씨티 드라이브 & 박물관 관광 (City Drive and
Museum)
약 2천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스탠리를 전용 차량을 타고 약 2시간 가량
이동하며 가장 화려하고 역사적인 관광지와 박물관을 방문합니다. 1845년에 지어진 정부 하우스, 그리스도 교회
대성당과 2마리의 블루 고래 턱뼈로 만들어진 고래뼈 아치를 볼 수 있습니다.
비글 해협Canal Beagle
남아메리카 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 있는 해협. 펭귄과 바다사자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
동서로 뻗어 있으며 길이는 약 240㎞, 너비는 4.8~12.8m이다. 북쪽에 있는 제도의 주요섬들과 남쪽에 자리잡은 나바리노·오스테를 비롯한 여러 작은 섬들 사이의 경계를 이룬다. 서쪽 끝부분에서는 고르돈 섬을 둘러싸면서 2갈래로 갈라진다. 해협의 동부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이루며 서부는 칠레 영토에 속한다. 동쪽 끝에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사이의 영토분쟁의 씨앗이 되었던 픽톤·누에바·렌노스 섬이 있다.
1840년대에 시작된 분쟁은 1978년 전쟁 발발 직전의 상태로까지 악화되었다가 1985년 5월 2일 양국간에 이 섬들을 칠레의 영토로 인정하는 협약이 체결되면서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해협의 이름은 1833~34년 찰스 다윈이 이 지역을 탐사할 때 탔던 영국 배의 이름 '비글'에서 딴 것이다.
진화론을 주장했던 찰스 다윈이 이곳을 지날 때 탑승하고 있었던 배의 이름이 비글호였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해협의 동쪽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이 지나가며 서쪽은 전부 칠레에 속한다. 이 좁은 해협에는 종종 바위섬들이 있는데 한대 지방의 해양 생태를 대표하는 많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크루즈를 타고 이 해협을 돌아보는 투어는 우수아이아에서 반드시 해 보아야 할 것 중에 하나다.
비글 해협(Beagle Channel, 스페인어: Canal Beagle)은 티에라델푸에고 제도를 가로지르는 해협이다. 티에라델푸에고 섬 남쪽으로 지나간다. 해협의 동쪽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이 지나가며, 서쪽은 전부 칠레에 속한다. 비록 큰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해협이지만, 남쪽(드레이크 해협)과 북쪽(마젤란 해협)에 더 안전한 수로가 존재한다. 해협의 이름은 비글 호에서 따왔다. 비글 호의 두 번째 항해에는 찰스 다윈이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너비 약 5~13km. 길이 약 240km. 해협의 북동부는 아르헨티나령이고, 서부와 해협 남쪽의 나바리노 ·오스테를 비롯한 작은 섬들은 칠레에 속한다. 해협의 명칭은 영국의 C.다윈의 탐사선 ‘비글호’에서 딴 것이다.
비글 해협의 이름은 찰스 다윈의 탐사선인 비글 호에서 딴 것이다. 하지만 이곳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로버트 피츠로이이다. 그는 1830년대 탐사항해를 하던 중 이곳을 발견했다. 피에라 델 푸에코에 있는 이 해협은 좁지만 안전한 수로이다. 티에라 델 푸에고의 최고봉은 다윈 산으로, 높이는 1,830미터에 달하면 눈이 90미터 이상 쌓여 있다. 비글 해협의 섬들은 종종 영토 분쟁에 휘말리곤 했는데 현재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가 양분하고 있다. 양국은 이곳의 풍부한 광물과 크릴새우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일찍이 비글 해협은 수많은 선박을 난파시키며 악명을 떨친 케이프 혼의 험한 바다를 피해 우회할 수 있는 곳으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아름다운 수역을 둘러싸고 종종 벌어지는 정치적 분쟁을 제외한다면 비글 해협은 온갖 바다 동물이 서식하는 조용한 안식처이다. 마치 천연의 원형극장처럼 둥글게 늘어선 험준한 산, 빙하와 폭포들을 배경으로 자연의 장관이 펼쳐져 있다. 다윈이 이곳을 방문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 이후로 이곳의 풍경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이곳의 녹주석처럼 푸른 이곳 빙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곳에 가면 다윈이 본 바로 그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빙하가 바다로 풍덩 빠지는 모습을 비롯해 해안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에서 한가로이 헤엄을 치는 향유고래도 구경할 수 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다는 대서양과 태평양이 만나는 곳으로, 해협 곳곳에 있는 수많은 섬에 사는 다양한 동물의 먹이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곳에 다양한 조류가 서식한다는 것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갈매기, 바다제비, 짧은꼬리앨버트로스, 도둑갈매기, 증기선오리와 가마우지가 마젤란펭귄이나 젠투펭귄과 함께 서로 좋은 곳을 차지하려고 경합을 벌인다.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너도밤나무 숲을 탐험하면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희귀한 마젤란딱따구리도 구경할 수 있다. 안데스콘도르, 블랙크레스티드쇠콘도르, 오스트랄쇠앵무새 등과 마주치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비글해협은 세계 최남단에 있는 도시인 우수아이아에서 가까운 입지 조건 덕분에 생태관광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떠나는 투어는 비교적 쉽게 참여할 수 있으며 가이드 도움으로 아남극(亞南極)을 맘껏 체험할 수 있다.
▷ 포클랜드 제도 펭귄 서식지 투어 (Bluff Cove Penguin Rookery)
- 짚차를 타고 1,000여 쌍의 젠투펭귄 서식지 방문, 하얀모래 해변과 박물관 투어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영토 분쟁 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포클랜드 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펭귄 서식지다. 이곳에는 총 5종의 펭귄 50만 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중 젠투 펭귄은 12만 마리 정도다.황제펭귄과 킹펭귄에 이어 현존하는 펭귄 중 세 번째로 몸집이 크다는 젠투펭귄(Gentoo Penguin).
포클랜드 제도는 비에케스에서 수천 킬로미터 남쪽에 있다. 이곳 시골에는 지뢰가 널려 있는 가운데 펭귄들이 번성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거의 2만 개에 가까운 지뢰가 묻혔다. 지뢰 때문에 사람들은 접근하지 못했지만,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는 펭귄들은 몸무게가 가벼워서 지뢰를 밟아도 터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뢰밭 바로 위에 펭귄 서식지가 생겼다는 것이 핸슨의 설명이다.
1980년대에는 어업 때문에 포클랜드 제도의 펭귄들이 위협 받았으나, 지뢰밭 때문에 사실상 야생 동물 보호구역이 된 지금은 펭귄의 확고한 서식지가 됐다.
포클랜드 제도의 킹 펭귄 서식지
전쟁의 압력은 다른 놀라운 방식으로 자연을 보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미 국방부는 군인들이 개발되지 않은 곳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미국 전역의 군부대 주위 26만 에이커의 땅을 비워두고 있다. 자연 보호 생물학자들은 관타나모 만의 미군 기지를 과학 연구를 위한 보호구역으로 전환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버몬트주립대학교 건드생태경제학연구소의 조 로먼 선임 연구원은 연구자들은 기지 폐쇄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약 115평방킬로미터 넓이인 기지 대부분은 개발이 되지 않았다고 로먼은 말한다. 전혀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처럼 개발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전쟁은 환경에 큰 손상을 주며, 자연 공간을 파괴하는 것은 폭탄과 총알만은 아니라고 동의한다. 전시의 과도한 에너지 사용, 자원 소비, 폐기물 생산은 지구를 파괴한다.
전쟁이 환경을 보호하기보다는 파괴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전쟁이 자연 보호를 이루어 낸 경우를 과학자들이 잘 관찰하면 전쟁 중과 전쟁 후에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핸슨은 말한다.
“물론 전쟁은 나쁘다. 하지만 생물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면 분쟁 지역에서 일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로먼은 전쟁의 비극이 자연 보호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일부 사례의 경우, 평화와 자연 보호를 위해 전쟁을 이용할 수 있다.”
푸에르토 마드린, 발데스 반도(Puerto Mydrin)
푸에르토 마드린은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의 추부트(Chubut)주에 있는 해안 도시이다.
발데스 반도는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지방에 있는 자연보호 구역으로, 바다 포유류의 서식지이다. 매년 여름 바다사자와 바다코끼리, 바다 표범 등이 번식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펭귄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는 이곳은 유네스코 지정 보호구역이며, 발데스 반도 내에는 포장도로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인 발데스 반도와, 푼타 닌파스(Punta Ninfas)에 의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누에보만(Nuevo Gulf)에 면해 있는 해안 도시이다. 도시명은 19세기 당시 파타고니아 정착에 공헌한 이민자 웨일스 러브 존스 패리 경(Sir Love Jones-Parry)이 영국에 소유했던 대지의 이름 ‘마드린’에서 유래된 것으로 ‘푸에르토 마드린’은 마드린 항구라는 뜻이다.
19세기에 시작된 아르헨티나의 유럽 이민 진흥 정책에 따라, 1865년 150명의 영국 웨일스(Wales) 이민자들이 당시 대서양 횡단용 대형 수송기였던 미모사 쾌속범선(Mimosa clipper)를 타고 파타고니아 지방에 도착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영국 웨일스 북부 지방의 린 반도(Llŷn Peninsula)에 있는 마을 네핀(Nefyn)과 자매 도시로 결연되어 있는 등 지금도 웨일스와 교류하면서 문화를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21세기에는 볼리비아 이민자들이 정착하여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현재 전체 인구의 약 8%를 차지하게 되었다.
주요 경제 활동으로 1970년대 건설된 알루미늄 공업단지가 지역 고용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어업과 관광업에 종사자가 늘고 있다. 도시 주변의 자연 생태계를 경험하기 위해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베이스 캠프가 되는 곳으로 고래, 펭귄, 코끼리바다물범 등의 해상 동물을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 남부, 추부트 주 북동부의 항구도시. 라우손 북쪽, 누에보만에 면함. 인구 2만 1000명. 천연의 양항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파타고니아를 잇는 항로로 중요함.
♣ 푸에르토 마드린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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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 마드린은 아르헨티나 추부트(Chubut) 주의 한 도시이며 약 58,0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1865년 마드린(Madryn)이란 이름으로 웨일스 이민자에 의해 세워졌으며, 웨일스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등에 의해 세워진
추부트 철도 건설로 도시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곳은 페닌슐라 발데스와 해안가가 관광지로
유명합니다.
1) 푸에르토 마드린 기항지 선택 관광 안내 (선사 프로그램)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 관광 (Penguin at Punta Tombo Reserve)
세계에서 가장 큰 마젤란 펭귄의 서식지를 관광할 수 있습니다. 약 40만 마리의 마젤란 펭귄들이 새끼를 품고, 부화시키는 생태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 페닌슐라 발데스 관광 (Peninsula Valdes)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지역 발데즈 반도
- 파타고니아 탐방, 펭귄과 바다표범 관광
발데스 반도(스페인어:Península Valdés)는 아르헨티나 동부 대서양만에 접해있는 반도이다. 크기는 약 3,625㎢이며, 매우 중요한 자연보호구역중 하나이다. 다양한 해양동물들이 서식하며, 그 중 바다표범과 물개, 여러 종류의 고래와 마젤란 펭귄등으로 유명하다. 반도 내륙지방에는 구아나코, 레아등이 있다. 이러한 다양하고 중요한 생태계 보전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99년 유네스코 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추부트 라다틸리 해변(Rada Tilly Beach)
동쪽으로 대서양, 서쪽으로 칠레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파타고니아 지방의 일부이다. 서쪽에 숲이 우거지고 비옥한 안데스 산 기슭 언덕에 호수들이 곳곳에 있다. 로스알레르세스 국립공원(18만 7,500㏊)에는 빙하로 뒤덮인 산들, 고산호수, 강, 숲 들이 있다.
동쪽에는 고립된 산맥, 솔트 플랫(호수나 연못 물이 증발하여 생긴 염분이 침적된 평지)과 염호가 있다. 추부트 강이 주를 동서방향으로 가로지르며 흐른다. 추부트 주 북동부의 대서양 쪽으로 돌출한 발데스 반도는 북쪽의 산호세 만과 남쪽의 누에보 만을 구분해준다. 산호세 만은 참고래·범고래·바다코끼리의 서식지 보호를 위해 1974년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선포되었다.
대부분 웨일스인 이주자들이 식민지화했던 이 지역은 1884년 추부트 준주로 조직되었으며, 1955년 주가 되었다. 푸에르토마드린, 트렐레우와 주도인 라우손은 초기의 웨일스인 정착지였다. 웨일스인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면서부터 양 사육과 모 생산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석유가 주요수입원이며, 주 남부, 코모도로리바다비아 근처에 아르헨티나 최대의 유전이 있다. 아르헨티나 원유의 1/5 가량을 생산한다. 면적 224,686㎢, 인구 356,445(1991).
발데스 반도Peninsula Valdes
파타고니아(Patagonia)의 발데스(Valdés) 반도는 해양 포유류의 보전을 위한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남방코끼리물범(southern elephant seal)과 남아메리카바다사자(southern sea lion)의 중요한 번식지일 뿐만 아니라 멸종 위기에 처한 남방긴수염고래(southern right whale)의 중요한 번식지이자 서식지이다. 이 지역에 사는 범고래(orca)는 해안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독특한 사냥 기술을 개발했다.
아르헨티나의 추부트(Chubut) 주에 있는 발데스 반도는 면적 4,000㎢의 곶(串)이며, 남대서양을 향해 100㎞가량 동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400㎞의 해안선에는 일련의 만, 암벽, 얕고 작은 만, 엄청난 개펄이 있는 늪지, 모래사장과 자갈 해안, 해안가의 모래언덕, 작은 섬들이 널려 있다.
반도 주위의 해안과 근해는 해양 포유류에게 특별한 장소이다. 남방긴수염고래는 보호구역인 이곳에서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는다. 이곳은 남방코끼리물범들의 가장 북쪽에 있는 서식지이다. 개체 수가 가장 많은 때에는 1,000마리에 이르며, 증가 중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 세계 유일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남아메리카바다사자도 이곳에서 대규모로 번식한다.
이 지역의 범고래들은 발데스토(Valdésto) 해안을 이용해 독특하고도 극적인 사냥 기술을 개발했다. 범고래는 얕은 파도 속을 질주해 바다사자나 어린 코끼리물범(elephant seal)을 낚아채는데, 때로는 이 과정에서 해안으로 돌진하기도 한다. 이 유적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새들이 서식한다. 만조와 간조 사이에 생기는 개펄과 해안 석호는 바닷가 철새들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이다.
마젤란펭귄(Magellanic penguin)들이 활동 중인 둥지만 40,000여 개에 달할 정도로 마젤란펭귄의 개체 수가 가장 많다. 이 둥지들은 5개의 다른 집단들로 나뉘어 분포한다. 육상에 사는 포유류 또한 많다. 발데스 반도 전역에서 크게 무리지어 다니는 과나코(guanaco)들을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 고유의 동물인 마라(mara)는 아르헨티나의 다른 지역에서 멸종 위기에 처해 있으며, 현재 발데스 반도에서는 마라가 발견된다.
발데스 반도는 아르헨티나의 추부트와 파타고니아 지방에 있는 자연보호구역. 바다 포유류의 서식지로 고래와 바다코끼리, 바다 사자의 서식지이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가치가 있으나 멸종위기에 처한 생물종들이 살고 있는 중요한 자연서식지들이 있다. 특히 해양 포유동물들의 보호구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참고래·해마·강치 등이 이곳에서 개체번식을 한다.
영리한 범고래는 이 지역의 해안조건에 맞는 독특한 사냥기술을 개발하여 먹이를 얻는다. 1999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발데스 반도에 매년 여름이면 7,000여 마리의 남방바다사자, 5만 마리의 남방코끼리바다표범, 호주의 긴수염고래 1,500마리가 새끼를 낳으려고 발데스 반도로 몰려든다. 고래는 반도에 형성된 두 곳의 말발굽 모양의 만에 도착해서 4~12월경인 남반구의 겨울을 보낸다. 이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는 9~10월 사이로 20마리 이상의 거대한 긴수염고래들이 암컷에게 구애를 하려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벌인다. 수컷들의 구애는 폭력적일 때도 있어서 박치기와 싸움의 흉터가 남아 있는 고래가 많다. 하지만 격렬한 구애 활동은 범고래의 위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범고래는 반도의 북동쪽 끝단에 있는 푼타노르테에서 나타난다. 이 해변은 일반에 공개되어 있지는 않지만 2~3월 사이에 특별히 전망대가 설치되어 범고래가 바다에서 튀어나와 해변의 물개를 잡아먹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반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쪽으로 1,5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근처인 트렐레우에는 공항이 있고 마드린 항에 자리 잡은 누에보 만의 해변에는 다이빙센터가 있으며 동쪽 해안의 푸에르토피라미데에서 호주긴수염고래를 구경하는 보트 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푼타노르테에 가는 길에는 관목림을 돌아다니는 야생기니피그를 조심해야 한다.
파타고니아Patagonia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위 38°선 이남 지역으로, 서부는 칠레의 영토, 동부는 아르헨티나의 영토이다. 안데스 산지와 파타고니아 고원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인구는 희박하나 빙하 지형이 많아 관광업이 발달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건조지대로 덤불로 덮여 있다. 북쪽은 콜로라도 강, 동쪽은 대서양, 남쪽은 코이그 강, 서쪽은 안데스 산맥과 경계를 이룬다.
파타고니아 탁상지는 광대한 스텝형 초원지역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호와 푸에이레돈 호 동쪽의 탁상지는 현무암질 암상으로 덮여 있다. 동서로 탁상지에 형성된 높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깊고 넓은 골짜기에 안데스 산맥에서 대서양 쪽으로 흐르는 콜로라도·네그로·추부트 강 등이 흐른다.
북부지역은 반건조성기후이고 남부지역의은 차고 건조하다. 서양자두·아몬드·알팔파 등의 관개작물이 계곡에서 재배된다. 구아나코·라마·여우·스컹크·살쾡이·퓨마·독수리 등의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서식한다. 주요 천연자원으로는 석유·철광석·구리·우라늄·망간 등이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건조지대로서 덤불로 뒤덮여 있다. 대체로 북쪽으로 콜로라도 강, 동쪽으로 대서양, 남쪽으로 코이그 강, 서쪽으로 안데스 산맥과 경계를 이룬다. 파타고니아 탁상지는 광대한 스텝형 초원지역(사실상 나무가 없음)이다.
네그로 강을 따라 대서양 연안의 약 90m 지점에서 안데스 산기슭의 약 900m 지점까지 서쪽으로 매우 평평한 평야 형태로 융기해 있다. 네그로 강 남쪽의 평야들은 더 울퉁불퉁하다. 대서양 연안쪽 대부분은 깎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이 좁은 해안평야를 사이에 두고 대서양에 맞닿아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호와 푸에이레돈 호 동쪽의 탁상지는 현무암질 암상으로 덮여 있다. 구릉지대는 풍화작용에 강한 결정질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로 탁상지에 형성된 높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깊고 넓은 골짜기에 안데스 산맥에서 대서양 쪽으로 흐르는 콜로라도·네그로·추부트·치코·산타크루스 강이 흐른다.
파타고니아 북부지역의 연평균기온은 12~20℃이며, 강우량은 101~432㎜의 반건조성기후이다. 남부지역의 기후는 차고 건조하며, 내륙에서보다 연안 쪽에서 기온이 더 높으며, 서풍이 세차게 분다. 북부지역은 주로 탁 트인 관목림지로 되어 있다. 풀은 모래질 토양에서 왕성하게 자라고, 복숭아·서양자두·아몬드·포도·채소·알팔파 등의 관개작물들이 계곡에서 재배된다. 구아나코·라마·여우·스컹크·살쾡이·퓨마·독수리·새매 등의 조수와 여러 종류의 뱀과 도아뱀 등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서식한다.
중요한 천연자원으로는 코모도로리바다비아·프라사인쿨·카르트리엘 주변에서 나는 석유와 리오네그로 주 시에라그란데의 철광석, 네우켄 주의 구리와 추부트 주의 우라늄과 망간 등이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파타고니아(Patagonia) 지방은 칠레의 푸에르토몬트(Puerto Montt)와 아르헨티나의 콜로라도(Colorado) 강을 잇는 선의 이남 지역을 말하며, 전체 면적이 100만 ㎢를 넘어 한반도 면적의 5배 정도 되는 크기이다.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1520년 마젤란의 원정 당시 원주민들이 거인(patagón)일 것이라고 짐작한 데서 유래한다. 파타고니아에는 안데스 산맥이 서쪽으로 치우쳐 남북으로 달리고 있으며, 산맥의 동쪽 대부분은 파타고니아 고원이 차지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을 기준으로 서부의 칠레 파타고니아(Patagonia chilena)와 동부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Patagonia argentina)로 구분된다. 칠레 파타고니아는 강수량이 많고, 안데스 산지에 빙하의 침식 작용이 더해져 복잡한 해안선과 산악 지형이 특징이다. 반면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는 건조한 기후에다 넓은 고원이라는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서늘한 기후에다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영토 모두 핵심 지역과 거리가 멀어 전반적으로 인구가 희박하며 큰 도시도 드물다. 밀 재배와 목축업, 석유와 천연가스의 채굴 등이 주요 산업이며, 최근에는 관광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부는 폭이 점점 좁아지면서 긴 삼각형 모양을 띠는데, 파타고니아는 바로 이 삼각형 지역을 가리킨다. 명확한 지역 구분선은 없지만, 대체로 남위 38°선 이남 또는 아르헨티나의 콜로라도 강 이남을 파타고니아 지방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파타고니아 지방의 남쪽 끝에는 마젤란 해협을 사이에 두고 티에라델푸에고(Tierra del Fuego)와 이 군도의 남단에 혼 곶(Cabo de Hornos)이 위치하고 있으며,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통로인 드레이크 수로(Drake Passage)가 있다.
파타고니아는 안데스 산맥의 분수계를 기준으로 서부 태평양 방면의 칠레 파타고니아와 동부 대서양 방면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로 구분된다. 칠레 파타고니아는 아이센(Aysén) 주를 포함한 북부 파타고니아와 마가야네스(Magallanes) 주를 포함한 남부 파타고니아로 다시 나뉘며,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는 산악 지역인 안데스 파타고니아, 고원으로 이루어진 중앙 파타고니아, 해안 평야인 대서양 파타고니아로 세분할 수 있다.
서부의 칠레 파타고니아의 산악 지역에는 다수의 산악 빙하가 존재한다. 해안 지대에는 산악 빙하에서 기원한 융빙수가 흐르는 하천과 빙하기에 이루어진 피오르 해안이 형성되어 있다. 칠레 파타고니아의 산악 지역은 강수량이 많아서 남반구에서 남극을 제외하면 얼음과 빙하로 덮인 빙원이 넓게 발달한 유일한 곳으로 약 50여 개의 크고 작은 빙하들이 있다. 칠레 북부의 아이센 주에는 라구나산라파엘 국립공원(Parque Nacional Laguna San Rafael)이 있고, 남부 마가야네스 주에는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Parque Nacional Torres del Paine)이 있다.
동쪽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지방은 크게 남아메리카의 팜파스 평원과 남부 안데스 산맥을 따라 형성된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해발 고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팜파스 지역에서는 네우켄(Neuquén) 주와 멘도사(Mendoza) 주, 라팜파(La Pampa) 주와 리오네그루(Río Negro) 주의 자연 경계 역할을 하는 콜로라도 강과 50~100㎞ 정도 거리를 두고 콜로라도 강의 이남 지역을 네그로(Negro) 강이 흐르고 있다.
콜로라도 강과 네그로 강 사이에는 평원이 발달한 데 반해 네그로 강 이남으로는 고원이 펼쳐져 있다.
파타고니아 중부의 고원 지대는 신생대에 여러 번의 화산 폭발로 형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현무암 용암층이 지표면을 광범위하게 덮고 있다. 안데스 산맥에 인접한 서부 지역은 용암층 위로 빙하에 의해 운반된 퇴적물이 덮고 있다. 신생대에 관입한 화강암에 의해 밀려 올라와 생성된 백악기 습곡층에 지각 변동을 동반한 갑작스러운 대륙 빙하의 융빙(融氷)과 후퇴로 침식 작용이 발생하여 곳곳에 와지가 형성되었다. 안데스 산맥 기슭에 위치한 와지들은 중부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이다. 또한 빙하가 녹은 물이 갇힌 아르헨티노(Argentino) 호, 비에드마(Viedma) 호 등의 빙하호가 분포해 있다.
파타고니아의 기후는 일반적으로 서늘하고 바람이 강하게 분다. 안데스 산맥 서쪽 칠레 해안 지역에서는 한랭한 해양성 기후, 안데스 산맥 동쪽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에서는 한랭한 스텝 기후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칠레 파타고니아의 태평양 연안을 따라 여름철 기온은 남부에서 14℃, 북부에서는 19℃를 나타내고, 강수량도 곳에 따라 2,000~7,000㎜의 범위로 편차가 크다. 북부 해안 지역에서는 강설이 매우 드물지만 남부 지역에서는 자주 발생한다. 해안 가까이 안데스 산맥이 있는데 북부의 수목 한계선은 해발 고도 약 2,000m이고,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티에라델푸에고(Tierra del Fuego)에서는 600~800m까지 낮아진다. 남부의 해발 고도가 높은 산지에서는 빙하로 덮인 빙설 기후(EF)가 나타난다.
동일 위도상의 여름철 기온은 태평양 연안보다는 대서양 연안에서 더 높다. 따뜻한 남적도 해류의 일부가 남아메리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해안은 찬 훔볼트 해류가 북상하는 칠레 파타고니아에 비하여 기온이 더 높다.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겨울철 기온은 내륙 고원 지대로 갈수록, 그리고 남극 가까이 갈수록 낮아진다. 동북쪽 대서양 연안의 바이아블랑카(Bahía Blanca)의 최한월 평균 기온은 7.3℃, 최난월 평균 기온은 23.3℃, 연평균 기온이 15.1℃를 나타내는 반면, 파타고니아 최남단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의 최한월 평균 기온은 1.3℃, 최난월 평균 기온은 10.5℃, 연평균 기온은 약 6.1℃으로 훨씬 냉량하다.
안데스 산악 지역에서는 지형 효과로 지역에 따라 강수량이 매우 상이하게 나타난다, 서쪽의 칠레 파타고니아는 탁월한 편서풍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많은 반면, 안데스 산맥 동사면의 경우에는 비 그늘 효과로 건조하며 일부에서는 사막도 나타난다. 안데스 산맥 서쪽의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 인근 섬들의 연 강수량은 4,000~7,000㎜에 달하지만, 안데스 산맥 동사면의 고원 지역에서는 800㎜ 내외, 해발 고도가 낮은 평원에서는 200~500㎜ 정도로 훨씬 더 적다. 파타고니아 북부의 비야라앙고스투라(Villa La Angostura, 아르헨티나)는 연 강수량이 2,000㎜ 정도이지만, 안데스 산맥을 넘어 조금만 서쪽으로 가면 4,000㎜ 이상으로 증가한다. 최남단 푼타아레나스의 연평균 강수량은 395㎜로 감소한다.
파타고니아 지역에서는 주로 목축업(특히 양), 농업(밀, 과일), 어업(고래잡이) 등을 포함한 농수산업과 석유 등을 기반으로 한 에너지 산업, 그리고 광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안데스 산맥의 장대한 계곡과 남부 지역은 습도가 낮아 양을 사육하는 데 유리하다. 현재 남아메리카에서 사육되는 양은 1500만 마리로 추산되는데, 그중 절반을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사육하고 있다. 양은 이 지역에 처음 들여온 19세기 후반 이후 주요 수입원의 하나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 가격이 정점에 도달하였다가 세계적으로 양모 가격이 하락하면서 파타고니아 북쪽의 팜파스에서는 사육하는 양의 수가 줄어든 반면, 파타고니아 중부 지역의 평원에서는 그 수가 증가하였다. 아르헨티나 중부 지방의 추벗(Chubut) 주는 산타크루스(Santa Cruz) 주와 함께 양모 생산의 주요 지역이다. 이외에도 양에 비하면 작은 규모이지만 소, 돼지, 말 등도 사육하고 있다.
파타고니아 서부 산지와 티에라델푸에고를 덮고 있는 산림을 통해 임업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파타고니아 지역의 강한 바람은 풍력 발전에 유리한 자원이 되고 있다. 이 외에도 광물, 천연가스, 석유, 수력 등 에너지 생산은 지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채굴한 광물과 석유 등을 수송하기 위해 북부 안데스 산록에 위치한 산카를로스데바릴로체(San Carlos de Bariloche)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를 연결하는 노선 등 여러 개의 철도 노선이 건설되었다. 또한 칠레에서 가장 수량이 풍부한 바케르(Baker) 강과 파스쿠아(Pascua) 강,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산타크루스 강 등에 대규모의 전력 생산과 농업을 위한 댐이 건설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파타고니아 지역은 목축업 및 에너지 산업 이외에 관광업이 지역 경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혼 곶을 둘러보는 유람선 관광과 남극 대륙 관광은 이 지역의 유명한 관광 상품이며, 마젤란 해협 해운의 기지였던 마가야네스(Magallanes), 칠레의 양모 중심지였던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대서양 연안의 발데스(Valdés) 반도, 안데스 산록의 페리토모레노(Perito Moreno) 빙하,아르헨티노(Argentino) 호, 남부의 우수아이아(Ushuaia), 티에라델푸에고(Tierra del Fuego)와 같은 관광 명소가 있다.
아르헨티나·칠레 두 나라의 남쪽, 콜로라도강 이남을 가리키며 안데스에서 대서양까지 펼쳐진다. 자연적으로는 파타고니아 안데스와 파타고니아 대지(臺地)로 나눈다.
〈파타고니아 안데스〉 해발고도 3,500∼3,600m의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 끝 지역에서는 2,000m 안팎으로 낮아진다. 최고봉은 남쪽에 있는 산발렌틴산(4,058m)이다. 그러나 중앙 지역은 별로 높지 않다. 이 부분은 빙하의 침식으로 생긴 많은 골짜기들에 의하여 안데스 산맥이 잘려나간 곳에 해당하며 빙하호(氷河湖)가 많다. 태평양 쪽의 비탈면에서는 비가 많이 오고 삼림지대(너도밤나무가 많다)가 발달해 있으며 남부에서는 설선(雪線)이 1,000m까지 내려온다. 해안에는 협만(峽灣)이 발달하여 굴곡이 심하고 섬이 매우 많다.
〈파타고니아 대지〉 안데스 산맥의 많은 지맥이 대서양 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낮아진 대지이며 해안에 낭떠러지가 솟아 있는 곳이 많아 해안선은 단조롭다. 천연적 양항(良港)은 없으며 연안에는 항행에 부적당한 부분이 많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깊은 협곡을 이루는 것이 많고 항행과 관개에 별로 이용되지 못한다. 대지면(臺地面)은 역질(礫質)인데 사막지대도 넓다.
기후는 한랭한 사막기후가 탁월하여 겨울에는 몹시 추우며 남단부(南端部)에서는 연 평균기온이 5℃까지 내려간다.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빈약한 스텝(초원)으로 덮여 있으며 가시가 있는 관목림(灌木林) 지역도 넓다. 경작에 적합하지 못한 지역이 광범위하여 목축, 특히 양과 소의 방목지대가 압도적이다. 최근 코모도로리바다비아에서 석유개발이 시작되면서 파타고니아지역 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알루미나·석탄·철광석 등 미개발 광물자원이 많고 수력자원·어업자원 또한 풍부하다. 이 밖에 안데스 산록의 많은 호수를 중심으로 관광 산업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남미의 파리’라는 별명에 걸맞게 매우 아름다운 아르헨티나의 수도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536년 창건되었으나, 인디오의 공격을 받아 1541년까지 방치되다, 1580년 재건되었다. 18세기 식민지 수도가 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하여, 1810년 이후 독립 전쟁때에는 요새가 되어 독립쟁취에 중요핚 역할을 하였다. 주민은 주로 이탈리아계와 에스파냐계 이민의 자손이다.
탱고의 발상지 보카지구에서는 거리 곳곳에서 탱고를 추는 남녀를 볼 수 있으며, 원색으로 페인트칠 되어있는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스페인 식민지 시절 ‘리오 델 라 플라타 부왕령(Virreinato de Río de la Plata)’의 수도였던 곳으로,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수도이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관통하는 라플라타 강의 하구에 위치하며, 광활한 평원인 팜파스에 자리하여 해발고도는 25m로 낮다. 인구는 2010년 기준 2,890,151명이고, 수도권을 포함한 '그란(Gran)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2,901,365명으로 방대하다. 고온 다습한 아열대 기후로 여름 평균 기온은 23~25°C, 겨울 평균은 10°C 정도로 영하권은 아니지만 강풍을 동반하여 체감 온도는 낮다. 연강수량은 1,189 mm 정도이다. 이 도시 사람들을 ‘항구인’이라는 뜻의 ‘포르테뇨(porteño)’라고 부른다.
기원과 역사
1536년 스페인 귀족 출신인 페드로 데 멘도사(Pedro de Mendoza)가 최초로 정착하여 도시 건설을 시도했으나, 식량 부족과 선주민 차루아(Charrúa)족의 침입으로 거주민이 흩어졌다가, 1580년 후안 데 가라이(Juan de Garay)에 의해 재건되었다. 식민지 시대 라플라타 강 하구의 주요 무역항으로 성장했으며, 특히 1776년 스페인 왕실의 식민 정부인 리오델라플라타 부왕령의수도가 되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와 칠레 영토 일부를 다스렸다. 1816년 독립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주도였다가, 1880년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 귀속된 도시가 아니며, 독립된 연방 특별구라는 별도 지위를 가진다.
주민의 구성
백인이 90%의 다수를 차지하고, 6%는 백인과 인디오의혼혈인 메스티소이며, 아시아인과 흑인이 2%, 선주민 비율은 다른 라틴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은 2%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이탈리아,스페인을 선두로 독일,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국가들에서 유입된 이민자들의 후손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엽까지 급성장을 이룬 시기와 두 차례의세계 대전은 유대인을 포함한 많은 유럽인을 이주시켰다.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로 자국어를 ‘카스테야노(castellano)’라고 표현한다. 국교는 카톨릭이지만,상대적으로 실행 비율은 높지 않으며,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도 18%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경제와 산업
라플라타 강을 끼고 있어 식민지 시대에 무역항으로 개발되었으며, 라틴아메리카 동북부 물류의 허브 지역이다. 아르헨티나 총 생산량(GDP)의 4분의1 규모의경제력을 가진다. 1880~1914년까지 농축산업의 발전과 수송 및 냉동 기술의 발전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이루었는데, 노동력 부족으로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도시는 농축산물의 수출항이자 이민자들의 관문이었다. 20세기 중반부터 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권익 신장을외친 페론정권과 1980년대까지 계속된 군부 독재로 성장세가 둔화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주요 산업은 거의 수도에 몰려 있으며, 육류, 어류, 곡류 등 식품 가공업과 금속세공업, 자동차 조립업, 원유정제업, 인쇄업, 석유, 종이화학제품을 생산하는 대도시이다.
문화와 관광
‘라틴 아메리카의 파리’라는 별명처럼 풍부한 문화유산을 자랑하며, 노벨문학상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출신지로 유명하다. 시내 중심부인센트로 지역이 관광의 기점이다. 오페라 극장인 '콜론 극장' 및 ‘분홍색 집’이라는 뜻의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와 그 앞의 ‘5월의 광장’은 시민의 휴식처이자공원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과 콜로니얼 시대의 건축물 및 금융 기관들이 몰려있다. ‘7월 9일 대로’는 세계에서 가장 폭이 넓으며, 분기점에 높이 67.5m의 오벨리스크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에바 페론을 포함한 정치인, 예술가, 대통령 등이 안장되어 있는 '레콜라타 묘지'와 벼룩시장이 열리는 '산텔모' 지역도 관광객들이 붐빈다.
탱고의 고장
19세기 후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인 라보카 지구의 선술집에서 이민자들이 추던 춤에서 탱고가 비롯되었다.20세기 음악가, 문학가, 무용가들에 의해 재현되어 예술로 성장했다. ‘탱고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를로스 가르델에의해 음악 장르로 발전하였으며,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춤을 보조하는 수단에서 음악 자체로 감상하는 수준으로격상시켰다. '바 수르', '엘 비에호 알마센', '세뇨르 탱고' 등의 장소에서 감상할 수 있다. 원색의 주택들과, 미술관, 기념품 상점, 화랑들이늘어서 있는 라보카의 '카미니토' 거리는 반드시 돌아보는 명소이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 안내 ♣
‘남미의 파리’ 라는 별명에 걸맞게 매우 아름다운 아르헨티나의 수도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536년에 창건되었으나 인디오의 공격을 받아 1541년에 방치되었다가, 1580년에 재건되었습니다. 18세기에 식민지 수도가 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하여, 1810년 이후 독립전쟁 때에는 요새가 되어 독립 쟁취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주민은 주로 이탈리아계와 에스파냐계 이민의
자손입니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 관광 ◈
☞ 에비타가 10만 군중을 마주했던 대통령궁
☞ 남미 해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산마르틴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대성당
☞ 7월 9일의 대로, 5월의 광장, 시청, 국립은행,
국회의사당 (차창 관광)
☞ 탱고를 잉태한 항구였던 보카 지구 등
1982년, 국내의 정치적·경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민중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는데, 이때 3만여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렇게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하얀 두건을 쓰고 매주 목요일 3시에서 4시 사이에 ‘실종된 자신들의 자식과 손자를 찾아 달라고’ 집회를 열어 오고 있다. 그 집회 장소로 유명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심장부에 위치한 ‘5월의 광장’에 도착하였다. “저기 보이죠? 저곳이 바로 5월의 광장 어머니회가 모여서 집회를 여는 곳입니다. 저곳 바닥에는 흰 수건 그림이 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5월의 광장이라고 불리게 된 연유와는 관계없이 광장에는 광장 특유의 소란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이 넘쳐나고 있었다.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아이들,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부모들,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에 받으려고 윗옷을 벗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 잔디밭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5월의 광장에는 바쁨보다는 여유를 즐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로 북적거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면 꼭 가 보고자 했던 곳 중의 하나가 카사 로사다(Casa Rosada)였다. 영화 ‘에비타’의 끝 부분에서 에바 페론으로 열연한 마돈나가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열창하던 카사 로사다(대통령궁)의 테라스 때문이었다. 5월의 광장에 도착하였을 때 한눈에 들어왔던 건물이 바로 장밋빛 건물을 의미하는 카사 로사다였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하여 보니, 장밋빛의 대통령궁은 그곳에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영화로 그려진 카사 로사다는 아니었다. 대통령궁의 한쪽은 흉물스런 색을 띠고 있었다. 재정이 부족하여 페인트칠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니,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경제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생활을 엿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5월의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그 주변에는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와 대성당 그리고 옛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를 위한 총독부·입법부·경제부로 사용되었던 건물들이 있다. 대성당은 약 450년 전에 건설되었으며, 내부에는 남미의 독립 영웅인 산마르틴 장군의 유해 일부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대성당 벽에는 산마르틴 장군을 기리기 위해 횃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 현재는 지멘스 등 외국계 회사와 은행들이 광장 주변으로 들어서면서 5월의 광장은 아르헨티나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뿐만 아니라 페루의 리마와 쿠스코, 칠레의 칼라마와 산티아고 등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남미의 모든 도시에는 중앙에 넓은 광장이 있다. 그리고 이 광장을 중심으로 구시가지 지역은 대부분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다. 도로가 격자형으로 발달해 있는 것이다. 도시의 중심에 광장이 있고 도로가 격자형으로 발달해 있다는 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도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바로 유럽 인들, 특히 에스파냐 인들이다.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은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는 모두 그 유산으로 이러한 도시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 도시들은 에스파냐의 도시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에스파냐 인들은 성문화된 법령에 따라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러한 에스파냐와 유럽의 도시 계획 전통은 중세까지, 멀리는 그리스·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중앙의 대광장이 초점이 되는 격자형 가로를 계획하고 거기에 맞춰 도시를 건설하였다. 대광장 주변에는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물을 세웠다. 즉, 대성당과 시청 등의 관공서들이 들어서게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도 예외는 아니다. 에스파냐로부터 온 ‘환 데 가라이’라는 정복자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시 계획을 처음 확정하였다. 가라이는 광장을 중심으로 도로를 구축한 후 그 도로를 따라 건물을 완성해 나갔으므로, 전체적으로 도시의 형태는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다. 현재 대통령궁인 카사로사다의 위치, 그 앞에 있는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중심 광장인 5월의 광장, 이 광장에 면해 있는 대성당의 배치 구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이 정복자가 그려 놓은 도시 배치 그대로이다. 옛날 도면의 0번은 정복자가 살던 숙소로 지금의 카사 로사다이고, 1번은 대광장인 5월의 광장, 2번은 대성당이다. 옛날에 총독부였던 51번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의회인 카빌도가 있고, 36번에는 성 마르틴 병원이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통령 궁-카사 로사다 , Casa Rosada
대통령이 사는 분홍빛 집
카사 로사다(Casa Rosada)는 스페인 어로 ‘분홍빛 집’이라는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대통령 궁은 장미빛 분홍색을 띠며 도심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은 스페인 로코코 양식으로 19세기 말에 건축되었다. 정면에서는 2층 건물이지만, 뒤편으로 돌아가 보면 4층 건물이다. 항구 근처의 비스듬한 언덕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대통령 관저가 아닌 영해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현재에도 카사 로사다 박물관 지하에는 라 플라타 강을 향한 포와 포문이 존재한다. 카사 로사다 박물관은 건물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 카사 로사다 박물관(Museo de la Casa Rosada)
대통령 궁의 남쪽에 카사 로사다 박물관 혹은 정부 박물관으로 불리는 건물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므로 한번 들러 보자.
카사로사다(Casa Rosada)는 위치상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의 중심부에 해당하며, 대통령궁이라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함은 물론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 마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 ‘에비타’의 주요 무대일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로코코 건축 양식을 간직한 분홍색 건물이다. ‘Casa Rosada’는 ‘분홍빛 저택’이라는 뜻이다. 궁 앞의 깃대에는 아르헨티나 국기가 게양되어 있으며, 대통령궁 근위대에 의해 하루 2회 이루어지는 국기 게양식과 강하식도 볼거리이다. 국기 옆에는 아르헨티나 독립 영웅인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스페인 로코코양식으로 지어진 대통령궁인 카사로사다는 원래 영토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했던 곳이다. 1873년 건설을 시작한 후 94년 동안 지어졌는데 착공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사르미엔토 때부터 건물을 분홍색으로 칠했기 때문에 '분홍빛 저택'이라는 뜻의 카사로사다라는 명칭으로 불려왔다. 이곳은 무기는 장착되어 있지 않지만 곳곳에 레이더 센서가 달려 있고 옥상에는 헬리포트가 있어 지금도 요새로서 손색이 없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청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립은행
부에노스 아이레스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de Buenos Aires
아르헨티나 종교의 중심지
5월 광장에서 대통령 궁을 바라볼 때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약 70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27년에 완성된 네오 클래식 양식의 성당이다. 정면에 보이는 12개의 기둥은 12사도를 의미한다. 대성당의 내부에는 남아메리카 해방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General Jos de San Martin)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독립군의 제복을 입고 있는 호위병들이 산 마르틴 장군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방을 지키고 있다.
5월 광장 북쪽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de Buenos Aires)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건물이다. 1827년 완공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당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신전을 연상하게 하는 외관을 지니고 있으며, 그 내부에는 남아메리카 독립을 주도한 영웅인 산 마르틴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 대성당은 2013년 3월 프란치스코가 제266대 교황으로 취임하기 전 미사를 집전했던 곳이며, 그 영향 때문인지 교황 취임 이후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을 찾는 관광객의 수가 증가하였다.
내부 정면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빨간 불꽃이 인상적인 부에노스아이레스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은,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1700년대 중반부터 1827년까지 건축되었으며 빨간 불꽃은 완공 이후 지금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5월 광장 쪽에서 대성당을 바라보면 12인의 사도를 상징하고 있는 12개의 기둥과 모티브가 보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5월의 광장Plaza de Mayo
수만 명의 시민이 모이는 장소
대통령 궁 앞에 위치한 드넓은 광장이 바로 5월 광장이다. 1810년 5월 25일 이 광장에서는 자치 정부 설치와 독립 선언이 있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독립의 기쁨에 환호했던 5월 혁명이 있었다. 요새 광장(Plaza de Fuerte), 총리 광장(Plaza de Victoria) 등의 옛 이름을 거쳐 이 혁명 이후로 5월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이 혁명의 1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5월의 탑(Piramide de Mayo)이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다. 이 광장은 우리나라의 서울 시청과 같은 역할을 한다. 국가의 큰 행사, 정치 집회 등이 있을 때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이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 5월 광장의 어머니들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는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둘러맨 어머니들을 광장에서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의 인권 탄압을 수십 년간의 침묵 시위로 세계에 고발한 ‘5월 광장의 어머니들(Madres de Plaza Mayo)’이다. 그들은 1977년 4월 13일, 국가에 의해 강제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아기 기저귀 천으로 만든 흰 수건을 쓰고 원을 그리며 광장을 돌았다. 어머니회의 일원이 납치, 실종되는 와중에도 30년간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바닥을 살펴보면 이들을 의미하는 흰 수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카사로사다 대통령궁 앞에 펼쳐진 5월 광장(Plaza De Mayo)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이자 휴식처이다. 이 광장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를 좌우한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다. 1810년 5월에 이루어진 독립 선언은 바로 이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현재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5월 광장은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집회 장소로 활용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광장 곳곳에는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 등이 걸려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스페인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르헨티나 독립의 첫걸음이 된 18세기초의 5월혁명을 비롯하여 파란만장한 정치적 사건의 무대가 되어 왔다. 현재도 이곳에서는 대통령 취임식 등 다양한 정치적 주요 행사가 열린다. 광장 중앙에는 5월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5월의 탑이 있는데 탑 속에는 아르헨티나 각지에서 수집한 상징적인 흙이 탑 속에 보관되어 있다. 아르헨티나 독립운동 당시의 영웅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의 기마상이 있으며 옆에는 대통령궁의 근위병 교대식이 매일 열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까빌도(시의회 박물관)
5월혁명 박물관, 까빌도 (Cabildo)-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담고 있는 박물관
현재 대통령궁인 카사로사다의 위치, 그 앞에 있는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중심 광장인 5월의 광장, 이 광장에 면해 있는 대성당의 배치 구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이 정복자가 그려 놓은 도시 배치 그대로이다. 옛날 도면의 0번은 정복자가 살던 숙소로 지금의 카사 로사다이고, 1번은 대광장인 5월의 광장, 2번은 대성당이다. 옛날에 총독부였던 51번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의회인 카빌도가 있고, 36번에는 성 마르틴 병원이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회의사당Parliament House
그레코로만 양식의 석조 건물로써, 1863년에 지어졌다. 화려한 외관과 함께 원통 기둥위에 세워진 웅장한 녹색의 돔이 특징이다. 정면에는 국회의사당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그레코로만양식의 석조 건물인 부에노스아이레스 국회의사당은 1863년에 지어졌다. 5월 광장에서 시작되는 5월 대도로(Av. de Mayo)의 서쪽 가장 끝에 자리하고 있으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원통 기둥 위에 세워진 웅장한 녹색의 돔은 높이가 무려 96m나 된다. 국회의사당 정면으로는 국회의사당 광장(Plaza del Congreso)이 자리하고 있다. 이 광장에는 노예 폐지를 찬양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밖에도 분수, 테라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7월9일의 대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도로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이다. 도로의 이름은 아르헨티나의 독립 기념일인 1816년 7월 9일을 의미한다. 도로 폭이 110m에 이른다. 주변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방첨탑이 있다.
1911년에 건설된 ‘7월 9일 대로(9 de Julio Avenue, 도로 폭 140m)’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상징하는 도로로, 세계에서 가장 폭이 넓은 도로로 알려져 있다. 이 대로에 솟아 있는 높이 67.5m의 오벨리스크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콜론 극장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공연 예술을 대표하는 명소이다. 2,490석(최대 4,000석) 규모로, 라스칼라(밀라노), 메트로폴리탄(뉴욕)과 함께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에 속하며, 남아메리카 예술을 대표하는 극장이다. 1889년에 착공하여 1905년에 완공된 바로크 양식의 극장으로, 오페라는 물론 오케스트라, 발레, 탱고 등의 공연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단이나 오페라단이 한여름의 무더위나 한겨울의 추위를 피해 공연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의 발상지 보카지구Boca District
산 텔모 지구의 도레고 광장 주변은 일요일만 되면 온갖 진귀한 물건을 파는 길거리 노점들과 각종 거리 공연을 펼치는 예술가들, 그리고 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탱고의 발상지인 보카 지구의 항구로 가면 원조 거리 공연과 형형색색의 원색 페인트로 칠해진 카미니토의 독특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유럽에서 이민 온 이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탱고(tango)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유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흘러든 항구로서 일찍부터 보헤미안이나 예술가들이 모이는 이국적 정서가 넘치는 곳이었다.
필리베르토의 탱고 작품 〈카미니토(Carminito)〉의 모델이 된 100m가 못되는 골목이 보카 한쪽에 공원으로 꾸며져 남아 있다. 산뜻한 파스텔풍의 색깔이 칠해진 아담한 집들이 늘어선 이 골목은 필리베르토의 작품을 기념하여 조성된 것으로 일요일이면 그림과 모자이크 등이 전시되는 야회 갤러리가 된다.
카미니토의 바로 동쪽에 보카미술관이 있어 보카 지역의 선명한 색조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다. 보카 지구 사람들의 일상과 풍경을 힘차게 그린 마르틴(Benito Quinquela Martin)이 창설했다.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회화와 조각 범선의 선수상 등이 전시되고 있다.
보카-탱고의 발상지로서 유명하다. 리아추엘로강(江)과 라플라타강의 합류점 부근에 있는 오랜 항구지구이며 부두와 공업지구에 접하고, 이탈리아계 주민이 독특한 생활을 한다. 갖가지 색으로 화려하게 칠한 목조가옥들이 늘어서 있고, 카바레 ·바 ·레스토랑 ·카페에는 보헤미안풍의 노동자와 뱃사람들이 드나들며 특이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탈리아 요리가 유명하며, 카미니토 거리가 널리 알려졌다.
'아르헨티나의 발상지'라는 별칭을 지닌 보카 지구는 탱고의 발상지로도 잘 알려진 활기찬 항구 거리이다. 16세기에 '멘도사'라는 스페인 사람이 처음으로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지금도 그 당시 이민으로 매우 번화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카미니토'라는 곡으로도 유명한 카미니토 거리에는 칸티나라는 민속 술집이 있다. 이 술집의 벽에는 탱고 기념비가 있으며 거리 여기저기에서 탱고 클럽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화가 킹게라 마르틴은 이곳을 매우 사랑하여 공화국이라 정하고 스스로를 대통령이라 칭했을 정도라고 한다. 생선 요리로도 유명한 이곳은 부에노스아이레시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고, 운하를 지나는 배가 있다.
‘보카 지구’라고도 불리는 라보카 바리오는 과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표적인 항구였지만, 오늘날에는 항구의 기능을 상실한 대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대표하는 개성 넘치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라보카는 16세기 식민지 건설 당시 페드로 데 멘도사가 집을 지은 곳이라 하여 ‘아르헨티나의 발상지’라고도 불리는데, 원색으로 칠해진 형형색색의 집들이 그려내는 독특한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오늘날 라보카 지구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표적인 관광 자원이 되는 데 크게 기여한 이 집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이 모두 이곳이 19세기 유럽 출신, 그중에서도 이탈리아계나 에스파냐계 이민자들이 몰려들던 항구였고, 이로 인해 빈민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첫 번째 설에 따르면, 이민자들이 라보카 일대에 자신들의 집으로 활용할 목조 건물을 짓고 항구의 조선소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로 외벽을 칠한 것이 오늘날과 같은 라보카의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두 번째 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화가 베니토 킨케라 마르틴(Benito Quinquela Martin, 1890~1977)과 관련이 있다. 마르틴은 항구를 묘사한 그림으로 미국, 유럽 등지에서 명성을 얻었고, 만년에는 고향인 라보카로 귀향하여 이 지역 발전을 위해 미술품을 기부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한 인물이다. 이 설에 따르면 치안과 생활환경이 열악했던 라보카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마르틴이 건물을 원색으로 칠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 덕분에 오늘날의 경관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라보카의 고유하고 독특한 경관은 카미니토(Caminito) 거리에 잘 보존되어 있다. 에스파냐 어로 ‘오솔길’이라는 뜻을 가진 카미니토의 길이는 약 150m이며, 유럽의 고도(古都)를 연상하게 하는 포석(鋪石)을 깐 도로 위에 원색의 집들, 마르틴이 세운 미술관, 기념품 상점 등이 늘어서 있다. 이러한 모습 덕분에 카미니토는 ‘거리 미술관’이라고 불린다. 거리에는 지역 미술가들의 작품을 구경하거나 구입할 수 있는 화랑들도 있다.
카미니토는 탱고의 거리이기도 하다. ‘카미니토’는 탱고 작곡가인 환 데 디오스 필리베르토(Juan de Dios Filiberto, 1865~1964)의 대표작 ‘카니미토’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것이다. 카미니토 거리에는 탱고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탱고를 즐길 수 있는 클럽과 바뿐만 아니라 탱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라보카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명문인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보카 주니어스의 홈구장인 알베르토아르만도 경기장(Estadio Alberto J. Armando)이 이곳에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초콜릿 상자’라는 뜻의 ‘라봄보네라(La Bombonera)’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이렇듯 라보카는 오늘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하면 꼭 찾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관광지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치안이 열악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신변 안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르헨티나 보카 항 입구에 2층으로 된 기념품점이 있었다. 그 2층 발코니에 인형이 세 개 있었다. “저 인형은 마라도나네!” “가운데 인형은 마돈나!” 우리 일행은 너나없이 자신 있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가 누구인지 쉽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땅고와 관계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되었지만, 정확하게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카를로스 가르델입니다. 아주 유명한 전설적인 땅고(Tango의 에스파냐 어 발음) 가수입니다. 땅고의 아버지라고도 하지요.”
그 세 개의 인형은 보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지난날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머나먼 낯선 땅 아르헨티나로 왔다. 그들은 타국에서의 애환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친한 친구들과 모여 그들이 고향에서 즐겼던 운동인 축구를 했다. 그리고 항구에 있는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19세기 후반 유럽은 인구 과잉 상태에 있었지만, 아르헨티나는 냉동 열차와 냉동선의 발명과 더불어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러한 유럽과 아르헨티나의 상황이 맞아떨어져 유럽 각국으로부터, 특히 에스파냐와 이탈리아로부터 이민자들이 대거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대개 대목장인 에스탄시아에서 계약 노동자로 일했다. 19세기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유럽 이민자를 받아들였던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이러한 이민자들로 북적거렸던 곳 중의 하나가 보카다. 보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쪽에 위치한 항구이다. 옛날에는 조선소가 있었고 외국의 대형선박들이 정박하는 항구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요한 경제권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그래서 보카는 많은 이민자들의 일자리가 있는 곳이자 그들의 생활 터전이기도 했다. 보카를 소개하는 책에는 어김없이 노랑, 빨강, 파랑 등 원색으로 벽을 칠한 집들이 나온다. 보카 항구에 있던 조선소에서 배에 칠하다 남은 페인트로 칠한 집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항구로서의 기능은 모두 다른 외항에 빼앗긴 채, 악취를 풍기는 바닷물과 그 위에 떠 있는 유람선만이 남아 있어 과거의 항구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벽화만이 과거의 보카를 상상하게 해 주었다.
이제 보카는 과거와는 달리 땅고와 축구의 명소를 관광하러 온 여행객들로 북적거린다. 보카가 아르헨티나의 춤과 음악에서 이제는 세계인의 춤과 음악이 된 땅고의 발생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헨티나 제1의 축구 클럽인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의 연고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 지리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유럽의 명문 축구 클럽에서 뛰고 있는 외국 선수들의 출신 국가들을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보자고 한 적이 있다. 크레스포, 사비올라, 사무엘, 사네티, 곤살레스 등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들은 유럽의 어느 국가에서 활약하고 있을까? 영국이나 독일 축구 리그, 심지어는 러시아 축구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도 있지만, 많은 선수들이 에스파냐나 이탈리아 축구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대부분이 에스파냐와 이탈리아계 백인이고, 언어 그리고 문화적으로 남부 유럽과 친숙하다는 점을 학생들이 상기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공부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약 100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5명의 젊은 친구들이 모여 창단한 축구 클럽이 보카 주니어스이다. 보카 주니어스 축구 선수들의 유니폼은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당시 보카 항구에 정박해 있던 스웨덴 국적의 선박에 걸려 있던 스웨덴 국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어 아르헨티나와 축구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아쉬웠지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에 예약되어 있는 땅고 쇼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큰 세뇨르 땅고(Señor Tango) 극장에서 땅고 쇼를 관람하였다. 우리가 책 속에서 읽은 땅고 내용 그대로 쇼가 펼쳐졌다. 땅고 춤을 추고 있는 춤꾼들의 동작과 얼굴 표정에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서로의 다리를 가볍게 스치거나 상대방의 다리 사이로 날렵하게 다리를 집어넣었다 뺐다 하는 동작들, 다리로 상대방의 허리를 휘감아 도는 동작,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는 타오르는 시선 등을, 그 극장에 앉아 있던 관광객들 모두 성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항구에서 낮 시간 동안 힘든 육체노동에 시달렸던 이민자들이나 가족을 두고 홀로 머나먼 나라에 와 있는 남성들에게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춤이 바로 땅고이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결혼 적령기의 남자 수에 비해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남자가 월등히 많은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큰 돈벌이가 되는 상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땅고가 매음굴에서 발생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 아르헨티나 중상류층은 땅고를 철저히 외면하였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는 여자 수가 적은 상태에서 각종 성범죄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여성을 연상시키는 남자들의 화려한 원색의 옷 차림새, 그리고 몸을 좌우로 흔드는 걸음걸이……. 남자들끼리의 땅고 경쟁은 동성애 상대를 찾기 위한 비밀스러운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19세기 아르헨티나 이주민들의 설움과 애환을 씻어 냈던 애절한 리듬. 이민의 역사가 곧 아르헨티나의 역사이기도 한 아르헨티나를 이해하는 데 땅고는 매우 중요한 연결 고리이다.
이과수 폭포(아르헨티나) 관광
- 최대 낙차 100M가 넘는 세계 최대의 아름답고 장엄한 폭포로 영화 미션의
촬영지이자, 일명 “악마의 목구멍”이라 불리우는 폭포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
이구아수 폭포의 백미
이곳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정말 이름 그대로 악마의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총 4km의 폭을 가진 이구아수 폭포 중에서 가장 많은 유량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악마의 목구멍이다. 지구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이 끝도 없는 물줄기가 하나의 구멍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 악마의 목구멍 앞에서는 감탄사도 필요 없고 어떠한 잡념도 필요 없다.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자연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감동을 느껴 보자.
아르헨티나 쪽의 ‘악마의 목구멍’(La garganta del diablo). 앙증맞은 꼬마 열차를 타고 울창한 밀림 속을 달려간다. 아르헨티나 쪽이 브라질보다 폭포 주변의 자연환경을 지키는 데 열심인 걸까. 꼬마열차를 만든 이유도, 헬리콥터 관광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도 주변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열차는 폭포 아래쪽을 도는 하류 순환코스(Circuito Inferior)와 폭포 위쪽을 도는 상류 순환코스(Circuito Superior)로 나눠져 있다. 상류 순환코스를 타고 국립공원 전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악마의 목구멍으로 가는 입구에 내린다. 이곳에서 1km에 이르는 나무다리를 걸어 전망대로 향한다. 어느새 안개가 물러가고 파란 하늘이 수평선 너머 걸려있다. 발밑으로는 짙푸른 강물이 흐르고 어디선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마침내, 입을 벌린 악마의 앞에 선다.
말발굽 모양의 150미터 폭에 700미터의 길이, 82미터 높이(20층 고층 아파트 높이)의 폭포로 초당 6만 톤의 물이 쏟아지는 곳. 그 어떤 말이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고, 그 어떤 카메라로도 웅장함을 담을 수 없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 어둠 속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처럼 끝없이 피어 오르는 포말. 바람에 흩날리는 물보라에 온 몸이 금세 젖어버린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포말 너머 무지개가 걸려있다.
이제야 폭포 앞에 적혀있던 “Do not try to describe it in your voice.(당신의 언어로 묘사하려 애쓰지 마시오)”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아무리 훌륭한 언어의 연금술사인들 이 폭포의 장대함을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 삼켜버릴 듯 위압적인 기운으로 거친 숨을 토해내는 악마. 이토록 격정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폭포가 또 있을까. 한 방울의 물도 남김없이 쏟아낼 듯 덤벼드는 이 물의 에너지는 이 땅의 사람들을 닮은 것 같다. 내일은 없다고, 오늘을 살 뿐이라고 몸으로 보여주는 열정의 사람들을. 그나저나 입구에서 일회용 비옷을 사기를 잘했다. 비닐 우비마저 없었다면 1분도 되지 않아 온 몸이 흠뻑 젖고 말았을 테니.
악마가 내 영혼을 앗아가기 전에 발길을 돌린다. 다시 나무 다리를 걸어 이번에는 하류 순환 코스를 찾아간다. 악마의 목구멍에서 본 풍경과는 또 다른 장관이 기다리고 있다. 믿을 수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펼쳐지는 물의 향연. 내 평생에 이 폭포를 두 번 볼 수 있을까. 폭포 관광의 하이라이트라는 보트 투어와 헬기 투어를 다 하기로 욕심을 낸다.
아르헨티나에서 이구아스 폭포의 관문이 되는 마을은 푸에르토 이구아수이다. 거리의 버스 터미널에서 노선버스를 타고, 국립공원 내의 방문객 센터 앞에서 내린 후 경 철도로 갈아 타고 종점의 산책길 입구까지 가면, 거기서부터 걸어서 폭포를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경로이다.
아르헨티나 쪽의 경관은 크고 작은 수 많은 폭포를 볼 수 있는 것이 큰 특징이며, 산책길을 걸으면서 그 경관을 즐길 수 있다(산책길은 폭포를 위로부터 바라보는 경로와 아래에서 바라보는 두가지 경로가 있다).
아르헨티나 쪽의 산책로에서는 《악마의 목구멍》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
강의 중류에 있는 산마르틴 섬으로 가는 선착장에서 폭포 지역을 여행하는 보트 투어도 있다.
♣ 이과주 폭포 (아르헨티나 쪽) ♣
세계 3대 폭포 중
최고로 손꼽히며 최대 낙차가 100M가 넘는 세계 최대의 아름답고 장엄한 폭포로, 영화 미션(THE MISSON) 촬영지이자 일명 ‘악마의
목구멍’ 이라 불리는 아르헨티나쪽 이과주 폭포 관광
브라질 이과수
♣ 이과수 폭포 (브라질 쪽) ♣
정글과 폭포들이 마치 거대한 병풍처럼
드리워져 자연 경관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브라질 쪽 이과수 폭포입니다. 너비 4.5Km, 평균 낙차 70m로 모두 나이아가라 폭포 보다 큽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양국이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탐험되어 산타 마리아 폭포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지도에는
1982년부터 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 마꾸꼬
사파리 관광 ◈
☞ 오픈카로 정글 탐험과 이과수 폭포 주위를 도는 관광 코스로, 생활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즐거운 시간
파라과이 이과수
폭포의 관문이 되는 도시는 시우다드델에스테이다. 그러나 직접 폭포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포스두이구아수로 가서 브라질 쪽에서 관광을 하거나, 직행 또는 포스두이구아수를 통해 푸에르토 이구아수로 나와 아르헨티나 쪽에서 관광을 할 수 있다.
이과수 폭포Iguazú Falls
이과수 폭포의 높이 : 85m, 협곡의 폭 : 4㎞, 물보라의 최대 높이 : 90m
이과수 강이 파라나 고원의 남쪽 가장자리를 흘러 말발굽 모양의 협곡에 초당 5만 8,000톤의 물을 쏟아 붓는 이곳이 바로 이과수 폭포이다. 협곡으로 떨어지는 물은 여기저기 있는 섬과 튀어나온 바위 때문에 다시 275개의 작은 폭포들로 나뉘어져 수직으로 떨어지거나 가파른 협곡 벽을 흘러내린다. 고막을 찢을 것 같은 폭포의 굉음은 멀리서도 들릴 정도이며 물보라가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가장 높은 폭포는 유니언 폭포로 '악마의 목구멍'이라고 불리는 깊은 틈으로 떨어진다. 관광객들은 작은 고무보트를 타고 폭포에 접근할 수 있다.
브라질 쪽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다보는 폭포와 협곡의 모습은 장관 중의 장관이다. 아르헨티나 쪽에는 오솔길과 인도교가 설치되어 있어서 협곡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는 대나무, 야자수, 리아네와 야생 난초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이끼, 양치류와 브로멜리아드로 장식한 나무들 사이로 맹금류의 둥지가 걸려 있다. 칼새 무리가 주변을 선회하다가 물의 벽 뒤에 만든 둥지를 향해 다이빙하듯 폭포를 뚫고 들어가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고 멀리서 울음원숭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주요 관광명소이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국경지역, 파라나 강과의 합류점에서 상류 쪽으로 23㎞ 지점에 있다.
편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82m이고 너비는 나이애가라 폭포의 4배인 4㎞이다. 낙차지점에 있는 절벽 가장자리의 숲으로 뒤덮인 바위섬들로 인해 높이 60~82m 정도의 크고 작은 폭포 275개로 형성되어 있다.
폭포를 방문한 최초의 스페인 탐험가는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였다. 1541년 그는 폭포 이름을 '살토데산타마리아'라고 지었으나 곧 이과수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18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폭포 탐사를 시작했지만, 이 탐사는 1767년 남아메리카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들의 제지로 중단되었다. 폭포의 지형도는 1892년에 최초로 만들어졌다.
개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국경지역, 파라나 강과의 합류점에서 상류 쪽으로 23㎞ 지점에 있다.
편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82m이고, 너비는 북아메리카에 있는 나이애가라 폭포의 4배인 4㎞이다. 낙차지점에 있는 절벽 가장자리의 숲으로 뒤덮인 많은 바위섬들로 인해 높이 60~82m 정도 되는 275개의 크고 작은 폭포들로 형성되어 있다.
강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폭포의 이름도 '거대한 물'을 의미하는 과라니어에서 유래했다.
유출량은 11~3월에 해당하는 우기 동안 최대 1만 2,750㎥/s까지 증가한다. 가장 적을 때는 8~10월의 건기 동안이며, 연평균유출량은 약 1,756㎥/s이다.
폭포를 방문한 최초의 스페인의 탐험가는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이다. 1541년 그는 폭포를 '살토데산타마리아'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곧 이과수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18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폭포를 탐사하기 시작했지만 이 탐험은 1767년 남아메리카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들의 제지로 중단되었다. 폭포의 지형도는 1892년에야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주요 관광명소일 뿐 아니라 폭포를 동력화해서 수력전기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합동개발계획을 추진할 때 생기게 되는 두 나라 사이의 문제를 비롯해 계절에 따른 유출량의 변화, 생산된 전력을 사용할 만한 수요의 부족 등의 문제점들이 있어 계획을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브라질 파라나 주(20%)와 아르헨티나 미시오네스 주(80%)의 국경의 이구아수 강에 있는 폭포이다. 이구아수 강을 따라 2.7km에 걸쳐 270여개의 폭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폭포 중에는 최대 낙폭 82m인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64m이다.
이구아수 강의 하류에 위치한 폭포는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과 브라질 이구아수 국립공원로 나뉜다. 두 공원은 1984년과 1986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최대 낙차 80m 이상이며,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이 유명한 관광 명소이다. 걸어서 볼 수도 있고, 배나 헬리콥터로도 관광할 수 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부부가 방문했을 때, 이구아수 폭포를 본 부인이 "불쌍하다. 나의 나이아가라야"라고 한 일화가 있다.
원래 이구아수 폭포는 모든 지역이 파라과이의 영토였으나 삼국동맹전쟁에서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3국 연합군에게 대패하여 이로 인해 영토를 잃었을 때 이구아수 폭포도 상당부분 잃었다.
브라질 쪽에서는 폭포의 전경을 한눈에 보기 좋다. 그러나 그 웅장함을 즐기기에는 폭포 상부까지 보행자 다리가 연결돼 있는 아르헨티나 쪽이 낫다
* 핌파스Pampas
남아메리카의 중위도 대서양 연안에서 안데스 산지 사이에 펼쳐진 대규모 온대 초원이며, 현재 남아메리카 최대의 농목업 지대를 이루고 있다.
남아메리카 대서양 연안과 안데스 산지 사이(남위 30~34°, 서경 57~63°)의 넓은 저지대에 펼쳐져 있는 광대한 초원이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를 중심으로 반지름 600~700㎞ 범위에 펼쳐져 있으며, 전체 면적은 777,000㎢로 한반도 면적의 약 3.5배에 달한다. 아르헨티나 국토 면적의 5분의 1이 팜파스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라팜파(La Pampa) 주, 산타페(Santa Fe) 주, 코르도바(Córdoba) 주, 엔트레리오스(Entre Ríos) 주가 여기에 포함된다. 우루과이의 대부분과 브라질 남단 히우그란지두술(Rio Grande do Sul) 주의 일부도 팜파스에 포함된다. 팜파스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해발 고도 150m 이하의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서양 연안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경우 해발 20m 정도에 불과하다. 북쪽으로는 열대 초원인 그란차코(Gran Chaco)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파타고니아(Patagonia) 대지에 연결된다.
팜파스는 원주민 말로 초원을 뜻하는 ‘밤바(bamba)’에서 유래하는데, 식생은 주로 산불에 강한 초본류로 구성되어 있다. 약 3m까지 자라는 벼목의 팜파스그래스(pampas grass)가 초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장초는 19세기 초 남아메리카를 답사한 독일의 지리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에 의해 처음 ‘Cortaderia selloana’라는 학명으로 명명되었다. 목본류로는 옴부(ombú, 학명 phytolacca dioica)라는 상록 활엽수가 자생하며, 광활한 초원 팜파스에서 이정표 구실을 한다.
팜파스의 연 강수량은 약 500~1,200㎜ 정도로 전체적으로 반건조 기후의 특성을 보이지만, 강수의 계절적 분포가 고르기 때문에 농업에 적합하다. 토양 또한 뢰스(loess: 바람이나 빙하에 의해 운반된 퇴적물) 기원의 비옥한 충적토로 이루어져 있다. 팜파스는 강수량 700㎜를 기준으로 서쪽의 건조 팜파스와 동쪽의 습윤 팜파스로 구분된다. 습윤 팜파스는 혼합 농업과 목우 지대로 육류 생산이 많고, 건조 팜파스는 기업적 곡물 농업 지대로 밀 재배가 성하며 변두리에서는 양을 방목한다.
1870년대 유럽 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팜파스 평원에는 소와 양을 방목하는 대규모 목장들이 들어섰다. 1940년대 이후로는 목축과 함께 밀, 해바라기, 귀리, 알파파 등의 집약적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 곡류 생산의 90%, 소와 돼지 사육의 70% 이상이 이루어지며, 인구의 약 70%가
팜파스는 인디오 말로 평원(平原)을 뜻한다. 브라질 최남부 리오그란데두술주에서 아르헨티나의 중심부와 우루과이에 걸쳐 있는 넓은 지역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반지름 600∼700km 범위에 전개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그란차코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파타고니아 대지에 연결된다.팜파스는 아르헨티나 총면적의 1/5 가량에 불과하나, 전 인구의 약 3/4이 밀집해 있다. 이 평원은 대부분 해발고도 150m 이하의 구릉으로 된 대초원인데 토양은 대부분이 비옥한 롬층으로 되어 있다.
팜파스는 주로 강수량에 의하여 중심지역을 지나가는 서경 62°선을 기준으로 동서로 2등분된다. 대서양 연안에 가까운 동부는 연강수량 500mm 이상으로 습윤(濕潤) 팜파스, 서부는 건조 팜파스라고 한다. 여름은 상당히 덥고, 초여름에는 강수량이 많으며 세계적인 대농목지대를 이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습윤 팜파스에서는 옥수수, 아마인유(亞麻仁油)를 짜기 위한 아마 ·해바라기 ·유채(油菜) 등의 채유식물(菜油植物)이 재배되고, 건조 팜파스에서는 밀을 재배한다.
팜파스의 개척은 1870년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목양(牧羊)이 성하였으나, 그 후 냉동업의 발달과 목초 앨팰퍼(alfalfa)의 보급으로 육우(肉牛)의 사육이 발달하였다. 근년에 밀 재배지가 확장되면서 목양은 건조 팜파스 지역으로 밀려났고, 목우(牧牛)는 습윤 팜파스 지역으로 집중되었다. 또한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방사상의 철도망(鐵道網)이 발달하여 팜파스 개발에 큰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