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5.18 북한 망명광수(狂秀) 이한영 정체
[사이좋은 사람들] 글쓴이 : 고정윤 등록일시 : 2012.03.18 19:20
1997년 2월 성남시 분당
밤 10시, 경기도 분당의 한 아파트. 표적은 이한영, 그는 김정일의 친인척이었다.
고 이한영(김정일의 처조카) “지금은 저쪽에서 심상치 않다. 너를 맹렬하게 찾고 있다. 여러가지 너에 대한 테러라든가 그런게 예상이 된다”.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의 로열패밀리에 대해 최초로 입을 연 이한영.
스위스 제네바
그는 1982년 제네바에서 유학 중이었다. 9월 28일 아침, 학교에 간다며 집을 나선 이한영은 가방에 여권을 챙겨나왔다. 그는 학교로 가는 대신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건다. 그의 목적은 미국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고 이한영 말 “학교를 가려고 책가방을 들고 가다가 학원가는 중간에서 내렸어요. 그래서 제네바역에서 전화기를 들어서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건거죠. ‘한국대사관이죠?’ 그랬어요. ‘아, 예 그런데요.’ 나 북한외교관 여권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만나자고 했죠. 어디냐고 그래서 제네바 대학 앞이라고 했어요. 잠시 후, 이한영은 한국외교관들과 만났다. 그리고 한국대사관에서 만들어준 여권을 가지고 망명길에 오른다. 고 이한영은 여러명이 동행을 해서 같이 나왔어요. 차타고 갔으니까”.
그는 다급하게 스위스를 빠져나간뒤 파리와 마닐라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 서울로 가자는 설득에 미국대신 한국을 선택한다. 이한영이 서울에 도착해 쏟아낸 정보는 믿기 힘든 것이었다.
지도자를 보좌하기 위해서 수업을 받고 있는 청년으로 얘기했었죠. 그러다가 조사하는데 계속 그렇게 버틸 수 없잖아요. 바른대로 얘기가 됐죠.
이한영은 북한에서 김정일과 함께 살았다. 당시 김정일에게는 아들 정남이 있었다. 이한영은 정남의 이종사촌형이었다. 김정일은 정남을 위해 이한영을 관저에 머물도록 했다.
고 이한영 말 “정남이 밥 먹을때 계속 옆에서 같이 먹어야 하거든요. 걔가 누구랑 식사를 합니까? 아버지랑 하죠? 그러니까 자연히 저는 지도자 동지하고 같이 식사를 하게 된거죠”.
김정일은 영화배우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첫아들을 얻었다. 그가 바로 정남이다.
고 이한영 말 “정남이가 귀엽게 생겼어요. 이뻐서 그러고 오줌싸는 것도 쉬쉬해서 받아주고 그런 부정, 애틋한 면들이 있었는데... 김정일은 정남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손에 쥐어주었다. 정남이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생일에 입는 군복계급장에 별도 늘었다. 8살때는 대원수로 올랐다. 김정일이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최은희 말(영화배우) “원탁에서 식사를 하는데 부인이 시중을 하는데 그때 참 놀란게 이북에서는 거의 다 한복을 입거든요. 한복을 입는걸로 알고 있었고. 그런데 홈드레스를 입었더라구요. 집사람입니다 하고 소개해서 인사를 하는데 ‘우리 집사람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여자는 집에서 아이나 키우고 그러면 제일이죠’ 그런식으로 소탈하게 소개를 해요.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은 한때 북한 최고 영화배우로 김정일의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은 애초부터 순탄할 수 없었다. 당시 유부녀였던 성혜림을 아버지 김일성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1974년 김정일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김영숙과 또다른 결혼을 한다. 성혜림은 이때부터 우울증 치료를 위해 평양과 모스크바를 오가기 시작한다“.
고 이한영 말 “정남이 낳고나서 74년도에 김영숙 사이에서 애를 낳죠. 김설성이라고. 그거로 인해서 이모가 정신적 쇼크를 받으셨고 마음의 병을 얻으신거지. 그때부터 치료를 다니신거지. 74년도부터. 성혜림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모스크바에 머무는 시간도 점점 더 길어졌다. 정남도 엄마를 따라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적응은 쉽지 않았다.
정남은 모스크바 유학을 포기하고 스위스 제네바 국제학교로 옮겨갔다. 제네바 국제학교는 인도의 간디등이 다녔던 스위스에서도 가장 명망있는 사립이었다. 김정남의 유학은 18살이 될때까지 계속된다. 김정일의 첫 여자였던 성혜림. 그녀와의 사이에서 나이 29살에 얻은 첫 아이 김정남. 그러나 철저하게 감춰졌던 사생활.
이 모든 것이 이한영의 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폭로된 북한 로열패밀리의 사생활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얼마 뒤, 이한영은 피살당한다.
주 : 고 이한영은 제210광수로 명명됨
자료정리(2016-01-05)
대한해외참전전우회 창원시지회 사무국장
겸, 보훈지킴이 창원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