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고향
"어떤 대화였습니까?"
"그것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네. 내가 그랬지.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애야, 밥 먹어라' 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웃겨주려고 한 이야기였는데, 농담 속에 진실을 말해버렸어. 죽음이라는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이제 그만 놀고 생명으로 오라는 부름이야....... 그렇게 보면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지.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니까."
어머니 곁으로........ "
"그래, 인간이 태어나서 사는 과정이 그래. 아기 때는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떨어지면 죽는 줄 알지. 그러다 대문 밖으로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들하고 정신 빼놓고 놀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지. 그러다 부르면 화들짝 놀라서 원위치로 가는 거야.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거라네.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자리로. 가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일관되게 애기하는 것은 죽음은 세계의 골짜기가 아니라는 거야. 까마귀 소리나 깜깜한 어둠이나 세계의 끝, 어스름 황혼이 아니지."
"눈부시게 환한 대낮이지요."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 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세계의 한복판에. 생의 가장 화려한 한가운데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야. 고향이지."
"그 말이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요."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서. 밤이 아니라 대낮이라 그렇지."
"그 모든 이치를 관심, 관찰, 관계의 맥락으로 깨달으셨다는 거죠?'
"젊었을 때는 관심이 최우선이었어. 사오십대 되니 관찰을 알겠더군. 늙어지니 관계가 남아. 관계가 생기려면 여러 대상에 한꺼번에 기웃거리면 안 돼. 데이트하는 곳에 가봐. 열 명 있어도 한 명만 보이잖아. 그 한 명만 관찰하는 거잖아. 사진 찍을 때 전체 풍경이 잡혀도 내 눈이 가는 한 곳에 초점 맞추듯이. 어차피 우리는 전체를 찍을 수 없어."
"죽기 직전, 눈앞에는 인생이 파노라마 필름처럼 펼쳐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아닐세.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관찰이 이뤄지고,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다시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인생이 파노라마가 아니라 한 커트의 연결이라는 말이 새로웠다. 3D 영화가 아니라 마치 흑백 무성영화처럼,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기억의 극장에 저장되고 있겠지. 그리고 어느 날, 가장 환한 대낮에, 가장 눈부신 순간에 편집되어 펼쳐질 테지.
"대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다. 안다는 것과 깨닫고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거였어. 천지 차이야. 지금은 몸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있다네. 특히 나처럼 환자가 되면 그 느낌이 더 강렬해. 건강했을 때는 혼자 걸어다녔는데, 요즘엔 가끔 부축을 받거든.
평생 혼자 걸을 줄 알았는데 지팡이의 도움을 받고, 부축해주는 이가 나타나더라고 그렇다고 몰락하고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이 됐을까? 아냐. 반만 의존하잖아. 업혀가는 게 아니니까. 마지막 업혀가는 건 죽음이지. 완전한 의존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 거야. 그렇게 나라는 사람이 없어지는 과정에서 '상호성'을 느끼고 있다네. 지팡이에 무게를 실으면서 중얼거리는 거야.
'완전히 독자적인 힘이라는 게 없구나!' "
선생의 고백처럼 이미 다 알던 것이 몸으로 느껴지는 순간, 우리의 지각은 저 아래서부터 꿈틀댄다. 젊어서도 알았지만, 늙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육체의 명료성과 지각의 명료성은 그렇게 가뭄에 비 내리듯 서로의 상호성으로 몸을 적셔 늦지 않게 우리를 지혜의 바다로 이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中에서
출판사:열림워 지은이: 김지수
첫댓글
주님께서 하십니다!!
주님께 영광!!
완전히 독자적인 힘이라는 게 없구나!' "
아멘 주님께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