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그치매
창 8:1-12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2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4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5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창 8:1-12 /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배 안에 타고 있는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을 잊지 않고 생각하셔서 땅위에 바람이 일게 하셨다. 그러자 물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2) 땅 아래에 있는 깊은 샘물과 하늘에 나 있는 수문이 닫혔다. 그렇게 억수같이 내리던 비가 그친 것이다. 3) 그러자 땅에서 물이 빠지기 시작한지 150일째 되던 4) 7월 17일에 노아 일행이 타고 있던 배가 아라랏산 봉우리에 걸리게 되었다. 5) 물은 계속해서 빠져나갔고 10월 초하룻날에는 높은 산의 산봉우리들이 듬성듬성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6) 40일이 지난 뒤 노아는 배 윗부분에 만들어 놓았던 창문을 열어 7) 까마귀를 밖으로 내 보냈다. 까마귀는 땅위에 물이 다 마를 때까지 배와 마른 땅 사이를 왔다 갔다 하였다. 8) 노아는 또 비둘기를 날려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내려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배로 되돌아왔다. 아직도 땅위에 물이 다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배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10) 노아는 다시 이레를 기다렸다가 또다시 비둘기를 밖으로 날려 보냈다. 11) 그러자 저녁쯤 되어 비둘기가 배로 되돌아왔는데, 입에는 새로 움이 튼 파릇파릇한 올리브나무 잎사귀를 물고 있었다. 노아는 그것을 보고 땅위에 물이 빠진 것을 알았다. 12) 노아는 또 다시 이레를 기다렸다가 세 번째로 비둘기를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둘기가 되돌아오지 않았다.
본문은 40일간 쉬지 않고 이어진 홍수로 온 땅의 숨 쉬는 것들이 모두 멸절시킨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고 온 땅을 뒤덮고 있던 물을 말리셔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키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기억하신 하나님(1-5) 하나님은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 하나님은 그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체로 다시 당신의 백성들을 만들어갈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와 가족들은 하나님이 잊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멸절시킨 뒤로 150일간 침묵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침묵하고 계시는 동안 안전하게 지키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고통이 길어질수록 ‘하나님은 왜 나를 잊고 계신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고난의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고 ‘하나님마저 날 잊으셨나?’라는 생각에 극심한 좌절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기억하고 계십니다.
까마귀 같은 성도가 아니라 비둘기 같은 성도(6-12) 본 단락을 보면 방주가 산에 머문 때로부터 40일이 지난 후에 물이 빠진지 확인하기 위해 노아는 먼저 까마귀를 보내고, 나중에는 비둘기를 놓아 보냈습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내어 놓자마자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까마귀는 죽은 시체를 먹으며 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먹을 것이 있으니 다시 방주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 비둘기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합니다. 노아는 비둘기를 세 번 놓아 보냈는데 그때마다 노아에게 적절한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성도는 두 종류로 나뉩니다. 까마귀와 같은 성도와 비둘기와 같은 성도입니다. 까마귀와 같은 성도는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면 더 이상 사명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썩은 시체를 먹는 것임에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둘기와 같은 성도는 자신의 필요보다는 사명의 자리의 중요성을 알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옵니다.
적용: 당신은 까마귀와 같은 인생인가, 아니면 비둘기와 같은 인생인가요?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아마도 할 일이 없어서 노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본래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할 일이 있고, 목적과 목표가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생계를 위해 먹고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요즈음 어떻게 지내?”하고 물으면 종종 “잘 먹고 잘 지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백성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 설 교 >
40일을 지난 후
창 8장 6~12절 / 이동원목사
오늘의 본문은 “40일을 지나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준비의 시간 혹은 고통과 방황의 시간을 의미하는 숫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방황의 시간이 40년이었고, 엘리야는 밤낮으로 40일 길을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했습니다. 모세도 40일 간 시내산에서 금식하며 율법을 전달 받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한 두 명의 정탐꾼도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했습니다. 예수님도 40일간 유대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사단과 의 영적인 전쟁을 치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노아 시대 40일간 밤낮으로 호우가 내려 홍수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이 비가 시작된 때를 창세기의 기자는 2월 17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7:12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 졌더라.” 그러나 홍수 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고통과 불편은 계속되었습니다. 먼저 150일간 그러니까 약 5개월간 홍수 직후의 물이 빠지는 시간이 지나갑니다. 창8:3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 오십일 후에 줄어들고” 그때가 10월 1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40일이 지나간 것입니다. 11월 10일 드디어 40일 지난 후 희망의 새날이 밝아 오기 시작합니다.
진실로 2007년 여름은 무덥고도 고통스런 시간이었습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 초래한 아열대의 밤으로 우리는 잠 못 이루는 고통의 여름을 보냈습니다. 유달리 비가 많이 내린 여름이기도 했습니다. 이 큰 비로 허리 짤린 조국의 절반인 북한 땅에서는 역사상 유례없는 큰 홍수 피해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여름 단기 선교중인 이웃 교회 샘물 교회 23명의 아프간 피납 사건으로 우리는 어느 해 여름 보다 무덥고도 고통스런 여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샘물 교회 박 은조 목사님과 함께 미국 콜로라도 목회자 수련회장에서 아프간 소식을 함께 접하고 함께 기도를 시작했기에 거의 이 사건의 당사자가 된 심정으로 고통의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40일이 지나 드디어 우리는 복음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두 명의 희생자를 내기는 했지만 드디어 21명의 소중한 이웃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지난주일 설교를 통해 이미 드린 말씀처럼 저는 이번에 아프간에서 희생당한 두 분이 사도행전의 순교자 스테반과 야고보처럼 한국 교회 부흥의 불씨가 될 것을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사건의 막을 내리면서 그러나 저는 지난 40일의 의미를 노아와 그의 가족이 겪은 40일의 의미에 비추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고통의 40일에서 배우는 레슨은 무엇입니까?
1. 어떤 고통에도 끝남의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시간관을 일컬어 종말론적 시간관이라고 일컫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고 동시에 끝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허무한 종말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완성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인생을 살면서 고통과 시련의 밤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저는 한 사람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고통과 시련을 견디는 일에 있어서 좀 더 강인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고통에는 끝이 있고 그 끝은 희망이고 완성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 뚜껑열린 하늘에서 쏟아 붓던 장마 비도 끝났습니다. 홍수도 물러갔습니다. 틀림없이 노아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그 장마는 끝날 것 같지 않은 장마였습니다. 온 지면을 덮던 창일한 홍수의 기세도 결코 꺽일 것 같지 않은 홍수였습니다. 그러나 8:2을 보십시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하지 않았습니까? 드디어 비는 그쳤습니다. 8:3을 보십시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하지 않았습니까? 드디어 그 넘쳐나던 홍수의 물도 물러갔습니다.
오늘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인생의 40일을 지나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비는 곧 그칠 것입니다. 홍수도 물러갑니다. 이 모든 상황의 반전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비밀은 8: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이 읽으실까요?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여기 비밀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의 한 밤중을 지날 때 우리는 아무도 내 고통을 내 마음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아무도 내 고통 내 인생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없고 내 마음을 알아 줄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욥의 친구들처럼 내 상처를 더 깊게 하는 자객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단 한분 당신의 밤을 함께 아파하며 기억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그리고 그 분이 기억하고 계시기에 이 고난은 끝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더 견디십시오. 그리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종 종 이런 고통의 시간을 보낼 때 우리가 기다리는 것 빼놓고는 아무 것도 할일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도 그랬습니다. 본문의 10절을 보십시오. 어떤 말씀으로 시작됩니까?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12절을 보십시오. “또 칠일을 기다려--” 그렇습니다. 그들이 한 일, 우리가 할 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왕에 기다릴 바엔 잘 기다리십시오.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곧 이 고통이, 고난이 끝날 것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2. 고통이후 축복의 새 날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가 7일을 방주에서 기다리다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홍수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나 또 땅이 다 말랐나 나가서 살만한가를 테스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 합니까? 땅의 물이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이제 식물들이 활동을 제대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 밖으로 나가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만큼 여건이 충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7일을 더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12절에 보면 비둘기는 다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둘기와 인생이 활동 할 새로운 세상이 준비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올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8:17에서 말씀하시는 주의 약속을 주목하십시오.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9:1의 말씀을 계속해서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제 새로운 시대, 번영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비온 후에 맑은 날이 기다리듯, 환난 후에 축복의 새 날이 예비 되었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비바람, 길고 지루한 홍수와 같은 역경의 시절이 지나가면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축복의 날을 준비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주님은 그 시대를 사는 당신의 백성들이 또다시 그렇게 홍수로는 고통 받지 않을 것을 언약하고자 9장 8절 이하에 보면 하늘에 무지개를 걸어놓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누군가가 무지개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지개는 하늘 위에서 보면 완전한 둥근 원(circle)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땅에서 보면 반원입니다. 그래서 무지개는 하나님과 인간이 반반씩 나누어 낀 사랑의 반지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하니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위에 계신 그분과 우리사이에 말입니다. 자, 노아 식구가 보낸 고통의 40일에서 배우는 레슨은 무엇입니까?
3. 예배함으로 축복의 새 날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일이 무엇입니까? 8:20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드렸더니” 그렇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일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새 날을 열기 위해서는 정결한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이번 아프간 봉사에서 희생된 두 분은 한국 교회의 새 시대 선교의 장을 열기 위한 순교의 제물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간 역사 속에 있었던 모든 순교 사건들이 당시에는 비극이었습니다. 대동강변에 셔먼호를 타고 입국하다가 생명을 버린 토마스 선교사의 사건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희생으로 오늘의 한국, 그리고 한국 교회가 있었다면 그의 희생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열기 위한 거룩한 제물이 아니었던가요?
그러나 이제 더 중요한 것은 아프간 선교단도 아니고, 토마스 선교사도 아닌 여러분과 저 자신입니다. 우리가 바칠 정결한 제물은 무엇입니까? 이번 아프간 사건을 둘러싸고 교회밖 사람들의 교회를 향한 문자 그대로 홍수처럼 넘쳐나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제가 QT시간에 “주님, 이 엄청난 비난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물었더니 주님의 단순하고도 고요한 응답이 되돌아 왔습니다. 제가 들은 그분의 세미한 음성은 이랬습니다. “네 마음은 알겠는데 억울한 것은 내게 맡기고 잘못한 것은 고치면 되지 않겠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고 한국 교회가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워지는 계기를 삼을 수 있다면 이런 회개 운동이야 말로 우리가 그렇게 사모하는 ‘어게인 1907년 부흥운동’의 새 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기심을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교만을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탐욕을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시기심과 질시를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허영심을 회개하십니다. 우리의 이중성을 회개하십시다. 가정에서의 직장에서의 우리의 불성실을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거짓말을 회개하십시다. 정결한 제물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주께 드리십시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예배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우리가 다시 거룩한 예배로 우리의 인생을 드리기 시작한다면 노아시대 새로운 축복의 날을 여시던 주께서 다시 한번 이 땅에 그리고 한국 교회의 미래에 축복의 새 날을 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연탄길의 저자인 이 철환 님이 최근에 ‘반성문’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저자는 친절하게 자신의 책 첫 페이지에 들국화 꽃을 접착하여 자신의 싸인과 함께 그의 책을 선물로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공감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저도 많이 반성했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그의 책은 이런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내가 받은 상처보다 내가 준 상처가 더 많았습니다. 나는 뒤늦게야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마음은 아팠지만 뉘우침은 나를 밀고 갔습니다. 올바른 것도 진실이지만 뉘우침도 진실이었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고는 한 움큼의 진실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부정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고백의 절정에서 이렇게 기도를 토해냅니다. “하나님, 저는 나비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촛불 속으로 몸을 던지는 나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내와 딸아이에게 혈기를 부리고 막말을 하고 죽이고 싶도록 제가 싫어 당신의 이름조차 모른다고 했을 때 당신은 끝끝내 제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저를 믿을 수 없어서 당신을 믿었습니다.” 그의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런 고백의 시어로 끝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둠이다./ 어둠은 빛이다. /어두워야만 빛나는 것들이 있다./고통은 대문처럼 입구이면서 동시에 출구이다./ 아픔도 길이 된다. 슬픔도 길이 된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달팽이가 되어 그 길을 달려가리라. 불빛처럼/ 불빛처럼/” 그렇습니다, 40일은 지났습니다, 우리가 만일 노아처럼 이 철환님처럼 절절한 반성으로 회개의 무릎을 꿇고 주님을 경배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오늘 저녁 해가 지기 전 무지개를 볼 것입니다. 그분과 우리의 새로운 사랑의 정표로 빛나는 언약의 무지개를 말입니다.
비둘기와 까마귀
창 8장 6~12절 / 이성희목사
오늘은 해방기념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36년의 일제 강압에서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과 자유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36년의 일제 강점 기간보다 더 긴 해방 62주년을 맞이했지만 아직도 일제 강점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사는 국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맛보며, 완전 통일을 맞아 참 해방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영육의 해방을 누리는 지혜로운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둘기는 체육대회나 평화대회 시에 곧잘 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를 날려 자유, 해방, 평화를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려 보내도 다시 돌아옵니다. 비둘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자유와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비둘기의 이미지는 늘 좋은 편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는 온갖 종류의 짐승들과 새들이 다 탔을 것입니다. 노아는 비가 멈추자 많은 새들 가운데 까마귀와 비둘기를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먼저 까마귀를 내 보냈는데 물이 채 마르지 않았는데 까마귀는 밖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물이 아직도 땅에 있으므로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7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냅니다. 비둘기는 입에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왔습니다. 노아는 땅에 물이 줄어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비둘기를 내놓았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땅이 마르자 비둘기는 자기의 갈 길을 간 것입니다.
비둘기는 비둘기과에 속하는 새의 총칭입니다. 지구상에는 약 300종의 비둘기과 조류가 있다고 합니다. 비둘기는 평지와 산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텃새입니다. ‘구구’하는 소리를 내며 웁니다. 비둘기가 우는 소리는 비올 때에 그 소리가 유난히 구슬프게 들립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건 저의 생각입니다만 노아의 방주에 비가 아직 개이지 않음을 알려주는 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이 찬 땅을 보고 비둘기도 슬퍼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비둘기가 요즘은 흔해서 천덕꾸러기입니다. 어떤 인터넷 글에는 비둘기가 너무 많고 귀찮아 아예 죽이려고 독약을 놓았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천대받게 된 것입니다.
까마귀는 우리말로 ‘가막이’라고도 씁니다. 까마귀 ‘오’(烏)자는 새 ‘조’(鳥)자와 가장 비슷한 한자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옛 중국에서도 노아홍수를 알았다고 합니다. 배 ‘선’(船)자는 배(舟)에 여덟(八) 입(口) 즉 사람이 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 홍수에 비해 볼 때 까마귀는 새 중에서 가장 모자란 새라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방주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 어리석은 새입니다. 까마귀는 전 세계에 약 100종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밭이나 마을 부근에서 곡식낟알, 곤충류, 거미류, 작은 동물 그리고 동물의 사체 등을 먹으며, 식물성 먹이도 많이 먹는 편입니다.
우리 옛 말에 보면 까마귀에 대한 속설이 있습니다. 까마귀는 신령스러운 새로 앞일을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식하였습니다. 반면에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불길한 조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까마귀는 신령스러운 능력과 죽음이나 질병을 암시하는 불길함의 상징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비둘기를 돌아갈 줄 아는 새, 주인을 아는 새로 묘사합니다. 주인이나 자기 자리로 돌아갈 줄 아는 것은 평화이며 자유입니다. 아기가 엄마 품을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새가 공기를 떠나서 자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자유이며 평안입니다.
까마귀는 자기 맘대로 돌아다니는 새입니다. 이런 마음이 자유 같지만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가출한 청소년이 자유롭습니까? 밤새 경찰차를 피해 대학로를 누비는 폭주족이 자유롭습니까? 부대를 벗어나 탈영한 군인이 자유롭습니까? 돌아올 줄 모르는 자는 자유도 모릅니다. 돌아갈 곳을 아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합니다.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이 찬송에는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것에 대한 비유는 하나같이 파티로 끝납니다. 잔치가 벌어집니다. 세 비유는 똑같이 “즐거워하다”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그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돌아오면 잔치를 베풉니다. 돌아오면 아버지가 기뻐하실 일입니다. 이 여름에 동물들을 비교하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까마귀가 아니라 비둘기 같은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까마귀는 물이 찬 세상을 방황하는 새입니다.
7절에 말씀합니다. “까마귀를 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아직도 땅에 물이 있었지만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고 물 위에서 방황하였습니다. 까마귀는 분명히 방주로 돌아오지 않아 죽었을 것입니다. 물이 찬 땅에 먹을 것이 있습니까? 발붙일 땅이 있습니까? 까마귀는 그런데도 안 돌아왔습니다.
캐나다 맥길 대학의 팀이 연구 발표한 바에 의하면 가장 머리 좋은 새가 까마귀와 어치라고 합니다. 앵무새는 예상외에 가장 멍청한 새라고 합니다. 가장 머리 좋은 새와 가장 머리 나쁜 새의 차이는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다는 까마귀가 방주에서 나가서 방주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기 머리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구원의 방주로 돌아오지 않고 방황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아주 잘 사는 것 같지만 죽은 것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 건강한 사람, 얼굴이 예쁜 사람, 지나치게 배경이 좋은 사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애굽은 세상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애굽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멸망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요한일서 2:15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 향락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턴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마음은 까마귀와도 같습니다. 까마귀는 쇠붙이가 둥지에 얼마나 불편하든 관계없이 번쩍거리기만 하면 무엇이나 다 주워옵니다”. 눈에 보기 좋은 것을 가집니다. 귀에 듣기 좋은 것만을 듣습니다. 피부에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취합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빠져 사는 까마귀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탕자란 말의 어원은 ‘제멋대로’(wayward)란 뜻입니다. 원래는 과도하거나 넘쳐흐른다는 의미의 어근에서 유래했습니다. 탕자란 돈의 씀씀이가 헤픈 사람을 가리키며, 재능이 남아도는 작가를 뜻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도 세상으로 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0-11 상반절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섬기고 바울과 함께 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날아가 버린 까마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사가 과부의 기름병을 채워주는 기적을 베풉니다. 엘리사는 먼저 그릇을 다 빌려오게 한 다음 방의 문을 닫은 후에 그릇에 기름을 채우라고 합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닫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열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까마귀와 같은 마음은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6:6에는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모든 의존하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존하면 얻습니다. 빈 그릇들이 은혜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런데 왜 채우지 못합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존하고 바라보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닫으세요. 그리고 하늘을 향하는 문만 열어놓으세요. 그러면 성령의 기름으로 찹니다. 까마귀의 습성을 버리면 은혜는 쏟아지는 것입니다.
둘째, 비둘기는 물이 찬 세상에서 방주로 돌아오는 새입니다.
9절에 말씀합니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아직도 방주 밖에는 물이 있습니다.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방주 밖이 불안정하면 얼른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올 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아닌 곳을 가다가 돌아올 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바른 곳이야 돌아서지 말아야지만 세상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휴가는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돌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선교나 봉사도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되어 있는 우리 청년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 인질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돌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이지만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아픔입니다. 돌아오는 자체가 희망입니다.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저도 휴가기간에 성지를 탐사하러 갔습니다. 갈 때도 가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기쁨은 더 큽니다.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떠난 사람 모두가 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실제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돌아오는 것을 감사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요즘에는 속담도 요즘 세상살이로 패러디합니다. “가는 말이 좋아야 오는 말이 좋다”는 속담은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곱다”고 패러디합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가지 많은 나무가 더 비싸다”로 패러디합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를 “꼬리가 길면 목도리에 좋다”로 패러디합니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는 “아는 길도 물어 가면 시간 낭비다”로 패러디합니다.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간만 못하니라”는 “가다가 중지 곧 하면 간 만큼 유익이다”로 패러디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특징은 돌아가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돌아설 줄 알고, 돌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본래의 곳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실향민은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고향을 잃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적 실향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돌아갈 고향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윈’은 아랍 전역에 두루 퍼져 사는 유목민의 한 부족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목민을 베드윈이라고 보편적으로 부릅니다. 이들은 유목민으로 들에서 천막생활을 합니다. 이번에도 성지에 가서 유대광야의 한 베드윈의 천막에 들어가 차도 마시고 한참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두 명의 부인을 데리고 있었고 슬하에 여덟 아들과 여섯 딸을 두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베드윈의 가장은 가정에서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의 천막에는 부인은 오지도 못합니다. 아들들만 옵니다. 이들은 양을 치고, 털을 깎아 팔고, 우유나 치즈를 만들어 팔아 돈을 법니다. 요즘에는 베드윈들도 이리저리 이주를 못하게 하여 한 곳에서 거의 살고 있었습니다. 원래 그들의 천막은 염소 털로 자는데 염소 털은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채 무겁고 비싸서 요즘은 커피자루와 같은 천으로 만든 천막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노마드’란 유목민이란 뜻입니다. 현대에 이리저리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는 사람들을 ‘네오 노마드’라고 합니다. 새로운 유목민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다 유목민 같아서 필요하면 세상에 살다가 얼른 천막을 걷고 돌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14에는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란 말씀이 있습니다. 16절에는 “저희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귀소성(Backing Home Instinct)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귀소본능은 동물이 자기의 서식처나 둥지로 돌아오는 성질과 능력을 말합니다. 자신의 집이나 산란장소로 돌아가려는 본능을 말합니다. 철새나 꿀벌이나 연어나 비둘기 등이 귀소본능이 가장 발달한 동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사람들도 본향으로 돌아가려는 귀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귀소성이 유난히 발달한 민족합니다.
이집트에는 비둘기를 먹습니다. 길을 지나가 보면 하얗게 생긴 뿔 모양의 비둘기 양식장이 있습니다. 이 속에서 비둘기를 키워서 자라게 되면 판다고 합니다. 비둘기는 밖에 나가서 먹이를 먹고 돌아다니지만 다시 돌아옵니다. 비둘기의 귀소성을 이용한 양식법입니다.
시편 90:3에는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이번에도 여러 호텔에 들었습니다. 나그네가 호텔 방에 들게 되면 숙박계에 여럿을 씁니다. 첫째는 어디서 왔습니까? 출신지를 씁니다. 둘째는 지금 무엇 하러 여기에 왔습니까? 용무를 씁니다. 셋째는 내일은 어디로 갈 것입니까? 행선지를 씁니다. 여러분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자신의 행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도착지(destination)를 알아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는 멀리 갔던 아들이 돌아옵니다. 돌아온 아들의 돌아오는 목적이 별로 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그 자체를 아버지는 기뻐하십니다. 돌아옴은 그 자체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잘못을 범했어도 돌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아예 포기하고 안 돌아온다면 그것은 그 나쁜 것입니다.
빌레몬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라는 종을 자신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편지입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로 돌아오는 사건에서 주의를 끄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는 스스로 안락함을 뒤로 하였습니다. 둘째는 그를 격려해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오네시모는 섬기기 위해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오네시모는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16에는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합니다. 비둘기가 돌아온 것은 순결하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땅이나 더러운 물 위에 앉을 수 없습니다. 순결한 마음이 돌아오게 합니다. 순결한 마음이 방주를 찾습니다. 마음이 순결한 자는 구원의 집에, 하나님의 집에 늘 마음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새입니다. 왜 평화가 있습니까? 본래의 자리, 가야할 자리로 돌아오면 평화가 있습니다. 돌아오면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결론
다윗의 위대성은 죄에 머물지 않고 돌아온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성은 율법을 고집하지 않고 은혜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성은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한스 큉은 “목사가 교회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 받은 성직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파송 받은 사람이지, 세상에 젖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파송 받아 일하지만 항상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우리 가운데 까마귀처럼 세상을 향한 머리는 좋지만 돌아올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비둘기처럼 세상에서 돌아올 줄 알아 순결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사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 오십시오
창 8장 6~12절 / 이일기목사
목적이 있는 삶이란 말이지요. 즉 이 땅 위의 삶만이 아니라 영원한 삶, 내세의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을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꿈이 없으면 망한다고 하죠?
꿈이 있는 사람은 겸손해지며 문제가 생겨도 계속 전진을 할 것이나 꿈이 없는 사람은 그 인생의 방향 자체를 수시로 바꾸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 면에서 인생의 꿈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 전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요 그 꿈이 뚜렷할수록 더 강한 추진력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꿈을 가지십시오. 강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신앙의 꿈을 보십니다. 꿈은 곧 상상력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김해삼일교회 설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좁은 공간을 해소하고 넓은 지경을 확보하기 위하여 뛰어야 할 때를 만났습니다.
하나님께 좋은 소식을 가져와야 할 때를 만났습니다. 예,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믿음의 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꿈이 좋은 소식을 창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꿈을 꾸면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십시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함께 은혜 받는 귀한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노아는 먼저 까마귀를 내어놓았습니다.
7 /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往來)하였더라.
노아의 방주가 산에 닿은 지 73일 째 되는 날 10월 1일 산봉우리들이 나타났으며 그로부터 40일이 지나서 노아는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어놓았습니다.
지면에 물이 얼마나 감하여졌느냐?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가느냐를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7절은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往來)하였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앞으로 날아갔다가 되돌아 왔다(going forth and returning)는 반복의 표현입니다. 방주 안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아니라 방주 주변을 배회하면서 앉을 곳을 찾아 날아다녔다는 뜻입니다.
만일 까마귀가 노아의 방주 안으로 돌아왔더라면 노아는 이 까마귀에게 재차 사명을 맡겨서 방주 밖으로 내놓았을 것입니다(8절).
그러나 까마귀는 노아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방주 주위를 계속 배회하면서 노아의 뜻을 저버리다가 마침내 제 갈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까마귀, 왜 그렇습니까?
땅의 물이 다 줄어들어 거할 곳이 많아서 입니까? 앞뒤의 문맥(文脈)을 보니 그건 아닙니다. 방주 밖으로 나가 자유롭게 날면서 보니 죽은 사람들과 동물들의 시체가 많이 떠다님으로서 먹을 것과 거할 곳이 충분하였기 때문에 방주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은혜를 저버린 까마귀를 통하여 상징적인 의미에서 은혜를 저버린 신앙인의 모습, 사명을 저버린 신앙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까마귀와 같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에요. 방주 안에서 보호와 양육을 받았음에도 밖에서의 죽은 시체 물들을 먹고 지내다 보니 자기를 보낸 노아에게 돌아오지 않은 까마귀처럼 세상적인 것들의 미련 때문에 교회 밖에서 머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교회의 영광과 발전을 위하여 아무런 희망이나 기쁨이나 유익이나 덕을 끼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바로 까마귀와 같은 신자들이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의 특성은,
① 교회를 삶의 한 수단이나 치장(액세서리)으로 여깁니다(직업상, 상업 목적으로 출석).
② 교회를 문화인의 친교 수단이나 교양 내지 정신 수양의 단체로 생각합니다.
③ 교회를 자기 입신 처세 아니면 자기 이익 추구의 한 방편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죄송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교회와 세상 사이를 부지런히 왕래합니다. 구속의 은총에 감격한 예배는 드리지 못한 채 말입니다.
구령 선교의 목적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목적이 없이 그저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이 또한 무의미한 삶이요 어쩌면 불행한 삶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제 1차 비둘기 작전(08절).
8 /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노아는 앞서 까마귀나 여기 비둘기를 내어놓은 목적이 지면에서의 물이 감한 여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평화의 상징인 이 비둘기는 귀소성(歸巢性)이 강하여 옛날부터 통신 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노아가 까마귀 다음으로 이 새를 택한 것은 이러한 성질에 의거, 물이 감한 증거물 즉 좋은 소식을 가지고 방주 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11절).
9 /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接足)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 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발바닥만이라도 착지시킬 수 있는 마땅한 휴식처를 발견치 못했다는 강한 의미가 함축된 문장입니다.
그러면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함은 눈이 없어서, 다리가 없어서, 날개가 없어서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비둘기는 까마귀와는 다른 차원의 특성 즉 자신의 본능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건조하고 깨끗한 곳에만 앉는 동물로서 먹이도 정결해야 하는데 땅이 여전히 습기가 있고 진흙투성이인 상태에서는 비둘기가 앉을 곳도 먹을 것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 지라. 비둘기가 까마귀와 같은 여건에서 물위를 날았지만 발 내릴 곳을 찾지 못하자 방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고 즉각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공중을 자유롭게 날면서 활동해 보았지만 그 자유보다 홍수 가운데서 자신을 구원한 방주와 노아의 품이 제일인 줄로 알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어느 한 곳에도 발 딛지 못하고 종일토록 나느라 지친 비둘기에게 노아가 내민 손바닥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포근한 안식처가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영원을 사모하는 우리 성도들도 썩어져 가는 세상 열락(悅樂)에서는 안식과 기쁨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정결한 말씀과 그의 온전하신 뜻 가운데서 참된 기쁨과 안식을 찾을 수 있음을 다시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앉고 서는 자리가 분명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신앙인은 이 세상 어느 곳을 가 보아도 만족할 수 없고 삶의 의미가 없기에 결국은 주님 품으로 돌아옵니다.
시 l: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3. 제 2차 비둘기 작전(10절).
10 /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노아가 칠 일을 주기로 하여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내 보내고 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12절).
① 그가 방주 안에서도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안식일(02:01~03)을 엄숙히 지켰음을 시사하며,
② 또 당시에도 한 주간은 오늘날과 같이 칠 일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거해 주며,
③ 한 주간을 무의미하게 지내지 아니하고 믿음과 기도와 인내로서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 /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저녁때쯤 되어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는데 여기서 비둘기는 노아에게 기쁨을 안겨주기 위해 하루 종일 좋은 소식을 찾아 이리 저리 쉬지 않고 날아 다녔다는 뜻입니다.
그 입에 감람 새(*타랍) 잎사귀가 있는지라. 새(new)로 번역된 말은 뜯어내다, 찢어 내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감람나무는 낮은 지대에서 사시사철 푸름을 자랑하며 자생하는 나무로서 특히 물속에서도 일 년 이상씩 견디는 생명력이 강한 나무입니다.
그렇다면 비둘기는 지금 물이 대단히 많이 감하여진 것과 생명운동이 이제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로서 감람나무 잎을 입으로 찢어서 물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홍수 심판 후 제일 먼저 나타난 감람나무의 새 잎은 창조적인 사역에서 볼 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 구원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제 사망의 물은 물러가고 다시 심음과 거둠의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는 구원의 소식을 알려준 것입니다.
② 노아에게 번영의 상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열매는 기름을 만들고 기름은 불을 켜서 성전의 어두움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③ 영원한 소망의 상징입니다. 성전의 불은 감람유로서 사용하되(출 27:20) 영원히 꺼지지 않고 밝혀야 하며 꺼지지 않음은 우리의 소망의 빛이 됨을 말해 줍니다.
4. 제3차 비둘기 작전(12절).
12 /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귀소본능이 강한 새임에도 불구하고(08절) 비둘기가 이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더 이상의 은혜를 갚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제 지면에는 물이 줄어들어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니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새 생활을 일구어도 좋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
본문에서 강한 체질의 까마귀가 감당 못한 일을 연약하고 온유한 비둘기가 완수한 것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상기시켜 줍니다.
고전 01:27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따라서 성도들은 연약한 자신을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충성의 열매를 맺어가야지 않겠습니까?
여기 비둘기는 방주에서의 구원받은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자기에게 사명을 세 차례나 맡겨 줄 그때마다 그 사명을 신실히 잘 감당하였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가 그 은혜를 어찌 저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은혜 받은 성도들은 교회의 생활이 때로는 부자유하게 느껴지고 내 뜻대로 잘 안 된다고 해서 박차고 나가거나 공동체를 깨뜨리는 말들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이 부자유하다 해서 그 품을 떠나면 그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되돌아온 비둘기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 아이와 같은 것이고 교회를 향한 성도들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살다가 교회로 올 때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와야 합니다. 목회자에게 근심 걱정 염려거리 보다는 밝은 소식을 가져오십시오.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김해삼일교회 성도들에게 제 3차에 이르기 까지 매회 2개월 단위로 비둘기 작전을 내리려 합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내년 1월까지 제 1차 비둘기 작전을 내립니다. 먼저 안 된다는 부정적인 시각과 생각을 떨쳐버리십시오.
막 9:23 /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우리 모두가 제 1차 비둘기 작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께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비둘기처럼 좋은 소식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가져오는 믿음의 행적들 기쁜 소식들을 창출하는 일에 전력투구합시다.
한결같이 우울하고 슬픈 소식들 근심 걱정 염려의 일들을 멀리 멀리 떨쳐버리고 지금부터 복음의 새로운 소식을 찾아 나섭시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가지고 오십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일마다 때마다 세상살이에 열중하다가도 주일이면 언제나 세상의 모든 자유를 접어 두고 좋은 소식을 교회로 가지고 오는 신앙적인 삶을 사는 것 얼마나 복 된 일입니까?
왕상 19:9 /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사 6:8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의 감람 새 잎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의 감람 새 잎을 물고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이 세상에 내어 보내셨는데 까마귀처럼 이 세상의 썩어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것들에 자신의 마음을 잃고 하나님의 보내신 뜻을 저버린 채 살려고 하십니까? 인간이 위대한 순간은 사명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심판의 나팔소리가 가까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습니다. 심판 날에 썩어지고 타 버릴 허탄한 일에 정신을 잃지 말고 주님의 선한 일에 더욱 힘씁시다.
죽어가는 영혼, 길 잃은 영혼을 찾아서 이번 제1차 비둘기 작전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 중매(仲媒)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까마귀와 비둘기
창 8장 6~12절 / 지용수목사
저는 시간이 아까워 러닝머신에서 걷는 동안에도 성경을 읽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성경을 읽는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이사야 48:17)라는 말씀이 눈에 띄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려 상처내고 이혼하게도 해서 우리가 망하는 것을 즐기는 악한 영입니다. 마귀의 말은 아무리 달콤해도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잘 되고 귀하게 되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가 그렇게 될 때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위한 것이니 달콤한 말씀이든 쓴 말씀이든 “아멘”하며 받아야 합니다. 또 어려운 말씀이든 쉬운 말씀이든 다 받아야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한 병약한 사람이 통나무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늘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하루는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너희 집 앞에 있는 큰 바위를 날마다 밀어라.”
그의 집 앞에 있는 큰 바위를 볼 때마다 늘 답답해했는데 마침 하나님께서 그것을 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저 바위를 옮겨 주시려나 보다.’라고 생각한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날마다 그 바위를 밀었습니다. 큰 바위라 혼자서는 도저히 옮길 수 없지만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날마다 힘차게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차게 밀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털썩 주저앉아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게 바위를 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밀어도 바위가 꼼짝도 않습니다. 헛수고만 했습니다.”
“아들아, 내가 언제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했느냐? 밀라고 했지. 자, 이제 거울 앞에서 네 모습을 보아라.”
그래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더니 어느새 자신이 건강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8개월간 바위와 씨름하다 보니 바위처럼 건강한 사람이 되어 기침도 하지 않고 잠도 잘 자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위를 밀다보니 이미 건강을 선물로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도 별수 없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도 내 집이 이 모양이네.”라고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벌써 하나님의 사람, 천국이 보장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벌써 건강하고, 벌써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마약꾼, 도박꾼, 동성연애자, 술꾼이 되지 않고 벌써 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이미 다 받았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벌써 다 주신 것입니다. 놀라우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며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40일간 하늘의 창을 열어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시고 땅의 샘을 터쳐 땅에서 물이 뿜어오르게 하시니 온 세상이 물 천지입니다. 온 세상이 물로 가득합니다. 그러니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를 타고 둥둥 떠다닙니다. 그 방주를 그냥 두어 방주가 태평양이나 지중해로 흘러들면 그들은 다 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생각하시사 150일간 바람으로 물을 말리시고 방주가 아라랏 산에 정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말씀으로 “지구촌의 물들아, 다 물러가라!”라고 하셔도 순식간에 물이 다 물러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자연 법칙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지으신 자연 법칙에 따라 바람을 일으키셔서 물을 말리셨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예배드릴 때까지 비 한 방울 오지 않게 하늘의 창과 땅의 샘을 닫으시고 바람으로 물을 말리셨습니다. 그래서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무르고, 두 달 14일이 지난 10월 1일에 산봉우리가 보입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난 다음에 노아가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시면서 기본 법칙을 활용하셨습니다.
여기에 큰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기적으로 행하시면 자녀 된 우리도 일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일도 하지 않고 직장생활도 하지 않고 사업도 하지 않고 “하나님, 만나로 먹여 주세요. 메추라기로 먹여 주세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본을 잘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심히 일함으로 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늘 2등만 하는 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1등을 따라잡지 못하니 1등 하는 아이에 대한 적대감과 열등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하루는 지혜롭게 보이는 한 노파가 그 여학생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얘야, 네가 1등 하기를 원하느냐?”
“예, 할머니.”
“그래, 내가 명하는 대로 네가 순종하면 1등 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겠다.”
“네, 뭐라도 하겠습니다. 비결을 알려주세요.”
“먼저 네가 사귀는 남학생과 교제를 당장 끊어라.”
여학생은 1등 하고 싶은 마음에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가 사귀고 있는 남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야, 이제 우리 그만 만나자.”
그리고 할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 시키는 대로 했으니 1등 할 비결을 알려주세요.”
할머니가 “그래, 알려주지. 날마다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도록 해라.”라고 하더니 사라졌답니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날마다 복습과 예습을 철저히 하면 성적이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이 실력을 쌓으면 성적은 저절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쌓아 좋은 성적을 얻어야지, 공부도 하지 않고 놀다가 학기말 고사 때 “하나님, 무슨 문제가 나옵니까? 환상으로 보여 주세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급한 경우에는 환상으로 보여 주실 때도 있지만 학생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을 올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돈, 돈”하면 오히려 돈이 도망가고, 열심히 일하고 연구하면 돈은 절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일상생활에서 기본을 잘 함으로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열심히 일하기를 바랍니다.
노아가 이제 창을 열고 까마귀 한 마리를 날려 보냅니다.
물이 어느 정도 말랐으면 까마귀가 나뭇잎 하나라도 입에 물고 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날아다니며 시체나 파먹고 질퍽질퍽한 땅에 있으면서도 노아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까마귀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노아의 마음이 얼마나 공허했겠습니까?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깨끗한 새인 비둘기는 먹을 것도 없고 앉을 곳도 없으니 지쳐서 돌아옵니다. 노아가 비둘기를 보고 “아이구! 돌아왔구나.”하며 반가워합니다. 일주일 후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더니 새로 돋은 감람 잎사귀 하나를 물고 옵니다. 일주일 후 또 비둘기를 보냅니다. 이제는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깨끗한 곳이 있어 거기에 깃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이 참 많지만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까마귀는 방주에 들어와 구원은 받았지만 방주를 위해서나 노아를 위해서나 아무 유익이 없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까마귀 같은 죄인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새까만 죄인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열일곱 사람을 도끼로 찍어 죽인 김 모씨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악해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으면 그 은혜를 알아야 됩니다. 까마귀는 노아가 그토록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까마귀는 생리적으로 썩은 것을 좋아하고 질퍽질퍽한 땅에서도 잘 살기 때문에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겠지만, 여기에서는 영적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학자들이 까마귀는 은혜를 모르는 존재로 해석합니다.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고 있으나마나 한 교인을 가리켜 까마귀라고 보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노아에게 돌아오지 않는 까마귀, 1년 가까이 보살펴 준 노아의 은혜를 저버린 채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까마귀 같은 교인이 우리 중에는 없기를 바랍니다.
시편 103편 2절에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사람의 매력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주님의 생명으로 생명을 얻었으면 나도 생명을 걸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고 주님께 감사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와 복만 받고 교회를 위해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유익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까마귀 같은 사람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사야 1장 3절에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아도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까마귀 같은 교인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다윗의 매력은 은혜를 기억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아침 저녁으로 예배하고, 성전을 짓기 위해 자기 전 재산을 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피난길에서 자기를 도와 준 바르실래를 기억하여 그의 아들 김함을 자기 상에서 먹게 하고, 세상을 떠날 때도 아들 솔로몬에게 “솔로몬아, 바르실래의 자자손손에게 잘 해라. 그리고 그를 네 상에서 먹게 해라. 왕자처럼 사랑해라.”라고 했습니다. 또 자기에게 잘 대해 준 요나단을 기억하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랑을 베풀고 자기 상에서 먹게 하며 끝까지 은혜를 갚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혜를 아는 다윗을 얼마나 축복해 주셨는지, 역대상 29장 28절에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은혜를 아는 자가 잘 됩니다. 은혜를 배신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자는 나중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주와 김천 사이에 대마촌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이 대마촌이라 불리게 된 유래가 있습니다.
성주 고을의 원님이 김천의 관찰사에게 그날 밤중으로 급한 전갈을 보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성주 고을의 원님은 그 마을에서 말을 가장 잘 타는 청년을 불렀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급한 전갈이네. 오늘 밤 안으로 김천의 관찰사에게 전해야 하네. 꼭 좀 전해 주게.”
청년은 급하게 말을 몰았습니다. 깊은 산골을 지나가는데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 말도 놀라고, 청년도 놀라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새벽에 찬이슬을 맞고 청년이 깨어났습니다.
‘내가 살았구나.’
안도의 숨을 쉬면서 보니 바로 옆에 호랑이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습니다.
‘이상하다.’
주위를 살펴보니 건너편에 말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습니다. 말이 주인을 살리려고 목숨을 걸고 호랑이와 싸워 호랑이도 죽고 말도 죽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주인의 생명을 건져준 위대한 말’이라며 그 말을 ‘대마(大馬)’라 부르고 비석을 세워 주었습니다. 그 후 그 마을이 ‘대마촌’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짐승인 말도 은혜를 아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하물며 교인이겠습니까? 소리가 나지 않으면 종(鍾)이 아니고 감사가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구원 받은 것에 늘 감사하고, 구원의 방주인 교회 때문에 늘 감사하고, 교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는 까마귀 같은 교인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까마귀는 악하고 새카만 죄인의 이미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을 받았으나 슬쩍슬쩍 죄를 짓는 사람은 까마귀 같은 교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까마귀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자주 죄를 짓는 교인, ‘에이, 저 사람…….’이라는 이미지의 까마귀 같은 교인이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까마귀와는 달리 노아가 날려 보낸 비둘기는 다시 돌아옵니다.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니 노아가 반겨 맞이합니다. 노아의 궁금증이 비둘기가 돌아옴으로써 풀렸습니다.
“아이고! 비둘기야, 왔구나. 아직도 물이 마르지 않았나 보구나.”
일주일 후 노아가 비둘기를 다시 날려 보냈더니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일 년 가까이 물이 천지를 덮었으니 산천초목이 다 죽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까?’하고 걱정하던 노아는 그 잎사귀를 보는 순간 “야! 살 수 있구나.” 하고 기뻐했습니다. 나무가 살아 있으니, 감람나무가 살아 있으니 올리브를 따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소식입니다.
감람나무는 보통 산중턱에 있지 않고 낮은 곳이나 동산에 있습니다. 지금도 아라랏 산 부근에 가 보면 낮은 곳에 호두나무, 살구나무, 감람나무들이 있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따 온 것은 물이 바닥까지 다 말랐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리고 노아는 비둘기가 물고 온 푸른 잎사귀를 보고 힘을 얻습니다.
“산천초목이 살아 있구나!”
얼마나 희망찹니까?
다시 내보낸 비둘기가 이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확 열어 제치고 햇살을 받으며 “할렐루야!”하고 하나님을 찬양한 줄로 믿습니다. 노아가 새 힘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비둘기는 이렇게 감사할 줄 알고 주인의 기대에 맞추는 일, 좋은 소식을 알려 주는 놀라운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비둘기처럼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고,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과 기쁨과 희망을 주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아버지는 아들딸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남편은 아내에게 희망을 주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아내는 남편에게 희망을 주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원은 경영주의 걱정거리가 되면 안 됩니다. 그 회사의 밀알이 되고, 경영주에게 ‘저 크리스천은 우리 회사의 희망이야.’라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경영주는 사원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됩니다.
미술 시간만 되면 아예 수업을 포기한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림에 대한 심한 열등감으로 삼 년간 크레파스를 손에 들지도 않고 백지를 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들이 그 아이에게 “너는 그림에는 가망이 전혀 없는 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4학년이 되었는데 새로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 미술 시간에 백지를 앞에 놓고 앉아 있는 그 아이에게 “와! 네 그림 멋있다. 흰 눈이 가득하구나. 그런데 이 흰 눈 속에 무언가 하나만 드러나게 그리면 더 멋있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부터 아이가 그림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희망을 주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국의 모든 교단 대표자들 모인 곳에서 우리 교단의 사무총장님이 “양곡교회는 한국 교회의 희망”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희망의 집이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이웃에게 희망을 주어야 됩니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됩니다.
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 사는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 새 힘을 얻을 수 있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
모든 교회가 교회를 빛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가정이 화목한 가정이 되어 가정을 빛내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희망을 주고 교회를 빛내는 자랑스러운 교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둘기의 이미지는 사랑스러움입니다.
아가서 5장 2절에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에게는 천 명의 미인이 있었지만 그의 사랑은 오직 하나, 비둘기 같은 술람미 여인뿐이었습니다. 아가서 6장 9절에도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천 명의 미인이 다 자기의 잘난 것을 으스댔지만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 여인이 가장 귀해 보여서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라고 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왜 술람미 여인을 그렇게 사랑하고 귀히 여겼을까요? 비둘기 같았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온유와 순결, 화목, 평화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0장 16절에 우리에게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이미지가 비둘기 같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이미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한 사람은 야한 옷을 입고 고상한 사람은 고상한 옷을 입습니다. 옷은 자기 인격의 표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옷으로 자기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미지를 까마귀로 만들면 안 됩니다. 욕심스럽게 본능대로 살고, 은혜를 배신하면 까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순결하고 겸손하고 화목하게 살면 비둘기 같은 사람이 되어 사랑을 받게 됩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 감사하고 기뻐서 ‘나의 면류관’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걱정을 끼치는 교회, 짐이 되는 교회였지만 빌립보 교회는 그의 면류관, 그의 자랑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면류관, 남편의 기쁨, 남편의 자랑이 되는 명예로운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가 “내 아들, 내 딸!”하며 자랑스러워하는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교인은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자랑하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걱정의 대상이 아닌 자랑의 대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결해야 됩니다.
우선 가정에서부터 우리는 비둘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아빠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야.”
“내 남편은 거룩한 기도의 사람이야.”
“내 아내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야. 맑고 깨끗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이야.”
“내 아들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야.”
남편보다 사회적인 능력과 지위가 더 높은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뭘 아우?”하며 은근히 남편을 깔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교통사고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여자가 병원으로 달려가니 의사선생님이 흰 천으로 남편을 덮고 있었습니다.
“부인, 남편께서 조금 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여자는 하늘이 캄캄해져 통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꿈틀꿈틀하더니 흰 천을 확 제치고 일어나면서 “나 살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당신이 뭘 아우? 의사선생님이 죽었다면 죽은 거예요. 빨리 누워요.”라고 했답니다.
누가 지어낸 우스갯소리지만, 남편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이런 아내는 얼마나 불쌍한 여자입니까?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에게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여보,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만나서 고생이 많소.”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결해야 비둘기 같은 교인이 됩니다.
비둘기는 노아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냥 돌아왔을 때는 노아의 궁금증이 풀렸고,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을 때는 노아의 기쁨이었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것조차 노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 일이 되었습니다.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지 않자 노아는 ‘이제 됐다. 땅의 물이 다 말랐구나.’하며 안심했습니다.
까마귀는 자신만을 위해 행동했지만 비둘기는 노아를 위해 행동했습니다.
독일 학생, 영국 학생, 프랑스 학생, 일본 학생, 한국 학생이 고공 점프를 하기로 했답니다. 높은 곳에서 가물가물한 밑을 내려다보니 무서워 덜덜 떨며 아무도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독일 교관이 독일 학생에게 "명령이다. 뛰어내려!”라고 하니 독일 학생이 뛰어내렸습니다. 영국 학생은 영국 교관이 “너는 신사가 아니냐? 뛰어내려!”라고 하니 뛰어내렸습니다. 프랑스 학생은 프랑스 교관이 “야, 저 아래를 봐라. 얼마나 아름답냐?”라고 하니 뛰어내렸습니다. 일본 학생은 일본 교관이 “야, 천황을 위해 뛰어내려!”라고 하니 뛰어내렸습니다. 한국 학생은 한국 교관이 “내신 성적에 반영된다.”라고 하니 뛰어내렸답니다.
사람은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위해서는 목숨을 건다 해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니 까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 타임지 기사를 보고 참 기뻤습니다. 타임지에서 세계에 영향을 끼친, 세계를 움직이는 100인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한국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골프 선수 미셀 위와 김용 교수가 바로 그 두 사람입니다. 미셸 위는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딸이 그런 자랑스러운 인물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이번에 우리나라에 와 있는 며칠 동안에 35억을 벌어서 불우 이웃을 위해 5억을 내놓고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셸 위를 더욱더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용 교수는 네 살 때 미국에 건너갔는데, 하버드 의과대학을 탁월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그 대학의 교수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늘 “아들아, 사회를 위해 봉사해라. 사회를 위해 봉사해라.”라고 하셨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사회를 위해 눈을 뜨고 보니 이 지구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에이즈라고 생각되었답니다. 작년 한 해에 에이즈로 죽은 사람이 삼백만 명이나 된답니다. 서울 인구의 삼분의 일이 에이즈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오십만 명이 아이들이랍니다. 아프리카 부츠가나라는 곳의 평균 수명이 1990년도에 63세였는데 지금은 에이즈로 죽는 젊은 청년들이 많아서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됩니다. 그리고 네소토 지역의 평균 수명은 1990년도에 60세였는데 지금은 35세가 채 안 됩니다. 지금 통계에 올라와 있는 전 세계의 에이즈 환자가 4,030만 명, 숨어 있는 에이즈 환자까지 합하면 대한민국 인구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타까워한 김용 박사가 세계 보건기구의 에이즈 국장이 되어서 에이즈 퇴치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미개한 지역에서 에이즈가 무언지도 모르고 장난하다 에이즈로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에이즈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리며 퇴치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한국인, 얼마나 감사한 한국인입니까?
우리 모두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사람, 자랑스러운 교인, 자랑스러운 남편과 아내와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둘기 같은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노력도 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됩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외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신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요,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분은 능력이 많으셔서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분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지,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떠는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 세례를 베풀라.”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지, 어떻게 주님께서 제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나이까?”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
세례 요한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덜덜 떨며 예수님께 세례를 베풉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들어가셨다가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둘기 같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결하고 거룩했습니다. 까마귀 같은 본능이 있는 우리이지만 성령께서 충만히, 비둘기 같이 임하시면 우리도 주님처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시면 우리도 주님 비슷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도 주님처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비둘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작은 예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시간에 “하나님! 주님께 내려주신 비둘기 같은 성령을 지금 제게도 내려 주소서.”하고 손들고 기도합시다.
오직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창 8장 1~5, 15-22절 / 조남신목사
> 10월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완연한 가을입니다. 한자의 가을 "추"자를 보면, 벼 "화"자에 불 "화"자예요. 들의 벼에 황금빛의 불이 붙어가고 있을때가 가을이라는 말이겠지요. 들과 산이 모두 붉게 물들고 있습니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하지요. 가을은 또한 영적으로, 육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계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가 있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릴케의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중략)
> 또 가을이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어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이야기..... 두 형제가 살았는데, 가을이 되어 논의 벼를 베고 볏단을 나누었어요. 형의 것, 동생의 것...... 그리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는데, 형이 동생을 생각합니다. '내 동생이 결혼하고 살림난지도 얼마 안되었는데, 곡식을 반으로 나눈 것이 너무 했던 것은 아닐까? 앞으로 집도 사고, 땅도 사고 해야할텐데, 아무래도 힘들겠지?' ... 내용이 맞아요? 조금 틀릴 수도 있어요. ... 그래서 형은 밤에 보이지 않게 논에 나가 지게에 볏단을 실어 동생네 볏단으로 옮기지요. ... 다른 한편, 동생도 누워서 생각합니다. '형은 부모님도 모시고 식구도 많은데, 내가 너무 많이 가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동생도 나가서 볏단을 형님네 것으로 옮겨요. 그런데 그 다음날 나가보니, 이 볏단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이상하다!' ..... 그래서 밤에 가서 또 옮기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두 형제가 볏단을 옮기다가 만나지요. .... 그래서 그 사정을 알고는 둘이 얼싸안고 감격하지요. 그래서 둘이 사이좋게 복받고, 오래오래 잘 살았데요. .....
> 동화 같은 이야기지요. 옛날 이야기 ... 듣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져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래야 되는 거 아닙니까? .... 그런데 요즈음은 어떻습니까? ... 지난주에 수재민헌금(197만원)을 가지고 장로님, 권사님들과 함께 구성교회에 다녀왔어요. 볏단을 갖다 드리는 심정으로..... "마음이 앞서면, 발도 가볍다"는 속담이 있지요. 기쁘게 잘 다녀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과 교인들이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선교위원회에서 또 금천교회를 방문할 예정인데.....
> 지난주에 이어 오늘은 창세기 8장을 가지고 말씀을 드립니다. 6장에서 8장까지는 노아시대의 대홍수사건을 기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노아시대의 대홍수사건의 핵심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죄악에 찌든 모든 인간을 향한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인간들의 구원이 주목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이후에 당연히 뒤따라야 할 것은,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는 일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그 무엇보다도 바로 노아에게서 그 모습을 보고 배우고자 합니다.
> 그 이전에 우리는 이 노아의 대홍수사건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를테면,
(1) 홍수이전의 세상은 어떠했을까? ... 홍수이전에는 분명히 오늘날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합니다. 기후는 아마 보편적으로 따뜻하고 온화하고 상쾌했을 거고, 사막이나 빙산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 육지가 지금보다 훨씬 넓고, 바다는 훨씬 좁았을 거라고, 그리고 지세는 오늘날과 같이 기후에 많은 영향을 주는 험준한 산이나 깊은 협곡들이 없이 매우 평탄했을 것이고,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랐을 것이라고....말해주고 있습니다.
> (2) 그 다음, 노아는 이때 어떤 방법으로 지구 도처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모았을까? 거기에 공룡도 있었을까? 캉가루는 오스트레일리아에만 있는데, 거기에 왔을까? 그 많은 홍수물은 그 후 어디로 갔을까?... 그런데 창 7:9절에 보면, 노아가 짐승들을 모아 넣었다고 하질 않고, 하나님이 다 이끌어 모아 주셔서, 노아는 그저 방주에 넣기만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홍해를 가르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때 모든 짐승들을 암수 둘씩 방주로 나아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 (3) 그 다음, 홍수가 지구를 덮쳤다면, 아라랏산은 그 당시 가장 높은 산이었단 말인가? 아라랏산은 지금의 터키에 있는 산이지요. 높이가 5165M 라고 그래요. 아라랏산은 터키어로 "아아러(고통)"다아(산)=고통의 산이라고 부른다고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우리가 알기로 네팔의 에베레스트산인데, 그 산이 8848M 이잖아요....그러나 지질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하는 안데스 산맥이나 히말라야산맥 같은 것은 대 홍수가 있던 이후에 지구상의 지각변동이나 여러 환경요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아라랏산보다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 이런 궁금증은 많이 있겠지만 그만 진도 나가지요.... 이런 대홍수가 있고 나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죄와 악을 다 쓸어버리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셨을까? ... 홍수가 끝난 다음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나서 하나님은 8:21절에서 말씀하시지요.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결코 시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원래 사람의 마음이 악해서 그런 것인데, ... 그래서 다시는 이전처럼 땅도 저주하지 않고, 생물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죄와 악을 묵인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 노아의 홍수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입니다. 죄가 세상에 가득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 그러므로 인간이 죄를 짓지 않도록, 이런 심판의 원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그래서 노아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 노아의 홍수심판은 그 목적이 결코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구원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노아가 방주를 지어서 생명들을 구원하였듯이, 오늘날 이 시대 속에서도 우리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런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널리널리 알려서 모두가 구원을 얻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4:6).
> 그러면 이제 8장에 있는 말씀들 중 몇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을 짚어보고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① 먼저 1절에 보면, 하나님이 "권념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뜻이지요. 혹시나 노아가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간 이후 한 5개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말씀도 들을 수 없어서 답답하고 불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밖에선 하늘에 구명이 뚫렸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는데,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신 것 같아서 내심 불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노아도 기억하시고 그의 가족들도 기억하시고, 방주에 있는 모든 짐승들도 잊지 않고 기억하시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고 돌보시고 계셨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 권념하시는 하나님!! ... 그 은총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② 그 다음, 하나님은 비를 그치게 하시고, 땅위에 바람을 불게 하시고 그래서 물이 점점 줄어들게 하셨습니다.(1절) 그래서 대홍수의 물이 걷히고, 때가 되어 노아가 육지로 나와보니, 땅의 모습은 정말 말이 아니었습니다. 수마가 할퀴고 간 지구는 그야말로 페허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거기서 살아남은들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에게 모든 짐승들도 방주에서 이끌어 내게 하시지요. 그리고 다시 축복의 말씀을 하십니다. 17절에서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17절) ... 이 말씀은 원래 창1:28에서 모든 생물을 창조하고 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었지요. .... 그런데 여기서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홍수가 끝나고 나서 다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창 1:28에서 하셨던 말씀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빠져있습니다. 9:1 에도 똑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정복하라"는 말씀은 하지 않고 계십니다. 마치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을 오해해서 결국 홍수를 초래했다는 것을 뼈아프게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 ③ 이 설교의 마지막을 우리는 20절 말씀으로 끝내고 싶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답답하고 불안했던 방주의 생활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지요. 땅을 밟았습니다. 오랫만에 밟아 보는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 땅에서 노아는 맨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요. 제단을 쌓습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20절)....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감격과 회한의 눈물이었겠지요. 그리고 가슴은 벅찬 감격과 기쁨으로, 감사로 차 올랐을 것입니다. "오 ! 하나님 ! 참으로 감사합니다 !"... 하나님은 이 노아의 제사를 기뻐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약속과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렇게 해서 홍수이후 새로운 역사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 대홍수 이후 부디 새로 시작되는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온 인류에게 임하는 것을 노아는 감사했을 것이며, 그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 ① 이미 말씀 드린 대로 21절에서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다시는 모든 생물들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지금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은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17절)
> ②그 다음 22절에서 "땅에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축복이 이 땅에 임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구는 새로운 질서를 되찾아 나가게 되었습니다.
> ③ 그 다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상징으로 무지개 약속의 축복을 주셨습니다(창9:13). 이런 약속과 축복을 받으며 우리는 지금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 대홍수 이후 노아는 새로운 각오로 단을 쌓았습니다. 그 단은 "여호와를 위하여"(20절) 쌓는 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21절) 축복하셨습니다. 이로 볼때, 예배의 순수성은 오직 여호와를 위해 쌓는 단인가, 아닌가로 판가름이 납니다. 노아는 대홍수 이후 정말 온전히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 이러한 노아의 예배모범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예배드립니까? "여호와를 위하여" 예배드립니까? "나를 위하여" 예배드립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기도도, 찬양도, 설교도 모두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온전히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수22:16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날 여호와 좇는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느냐?!" 내가 은혜받으려고, 나의 삶의 재충전을 위해 예배드리지 마시고,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림으로 그 다음 베푸시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창 8장 1~5절 / 지용수목사
오늘 낮 말씀을 통해 자녀들의 흥망성쇠가 부모에게 달렸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부모가 빛나는 사람이 되면 자녀도 빛나고, 부모가 부끄러운 사람이 되면 자녀도 부끄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의 죄는 삼사 대까지 갚으십니다. 북한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회를 가장 싫어하고 핍박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복을 받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불쌍하게 삽니다.
하나님 말씀은 정말 그대로 됩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세운 나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운 나라입니다. 미국의 모든 돈에는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하고 목사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니 미국의 곳곳에 죄가 많아도 미국은 망하지 않습니다.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미국이 차지하고 있고 지금도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사람들과 사귀어야 합니다. 대단히 송구스런 말씀입니다만, 제가 만나는 목사님들은 모두 훌륭하게 목회를 하시는 분들입니다. 그 목사님들은 언제나 긍정적인 이야기만 하십니다. 국가도 잘 되는 국가와 사귀어야 합니다. 안 되는 나라, 세계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나라와 친하면 그 나라도 망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깡패를 사귀면 나도 깡패 대접을 받습니다. 국제 깡패 같은 나라와 사귀면 우리나라도 천대를 받고 왕따를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나라를 잘 되는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 안에 들어감으로 구원은 받았지만 그 안의 삶이 항상 기쁘고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사자는 으르렁거리고, 거위는 꽥꽥거리고, 돼지는 꿀꿀거리고, 개는 도둑도 없는데 짖어대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습니까? 또 동물들의 배설물로 냄새는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래도 그런 것들이 싫다고 창밖으로 뛰어내리면 죽습니다.
오늘의 방주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도 죄 지을 수 있고 구원 받은 사람들끼리도 다툴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괜찮은데, 육신의 본능을 따르면 그 순간 실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버림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구원해 준 사람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시 깨끗케 해 주십니다.
교회 안의 생활이 기쁘고 좋지만, 좋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방주 안의 삶을 잘 견디니 결국 그들이 아라랏 산에 정착한 것처럼, 교회 생활에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잘 견뎌야 천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방주를 짓는 일, 교회를 짓는 일에 동참하는 부모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귀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새벽 기도하는 집은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잘 됩니다. 기도하는 집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십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지 않는 집은 잘 되다가도 바벨탑이 됩니다. ‘끽’ 하고 꺾입니다. 무너집니다. 기도 없이 성공하면 자기가 잘 나서, 자기가 똑똑해서 그런 줄 압니다. 그러다 자기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고 다 망합니다.
우리의 에너지와 우리의 시간을 기도에 쏟아야 됩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저는 아무리 바빠도 오전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영원히 승리하는 길입니다.
이제 방주 밖은 사방이 물뿐입니다. 높은 산꼭대기보다 7m 높게 물이 차니 바다와 강과 냇물의 경계가 없습니다. 사방이 물뿐입니다. 바닷물이 산을 덮어 오늘날 그 산꼭대기에서 물고기의 화석이 나옵니다. 세계 도처에 노아의 홍수가 있었다는 증거가 270가지나 됩니다.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생물이 방주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려면 걱정할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방주 안에는 나침반도, 삿대도, 키도, 엔진도 없으니 그냥 이렇게 둥둥 떠다니다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만일 양식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걱정하려면 걱정이 수없이 많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육지가 보이면 안심이 되는데, 사방이 물뿐이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방주를 내버려 두시면 그대로 망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고도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셨습니다. 권념이 히브리 말로는 ‘자카르’입니다. 이것은 ‘기억한다. 돌아본다. 보호한다. 잊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않으시면 노아와 방주는 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돌아보셨습니다. 권념하셨습니다. 그래서 양식이 떨어지기 전에 노아와 모든 생물이 땅에 내리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일정에 맞추어 바람이 불게 하시어 땅의 물을 말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람도 쓰시고, 물도 쓰시고, 우박도 쓰시고, 모든 것을 다 쓰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적들에게는 심판이 되고, 하나님 백성에게는 복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으로 홍해를 갈라 길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바로 구원의 길이었지만 애굽의 군대에게는 멸망의 길이었습니다. 우박이 내릴 때 적은 맞아 죽었지만, 하나님의 군대는 우박으로 인해 승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박이나 바람이나 물이 하나님 백성에게는 방패가 되게 하시지만 하나님의 적들에게는 그들을 죽이는 무기가 되게 하십니다. 메뚜기가 세례 요한에게는 음식이 되게 하시지만, 애굽에는 농사를 망하게 하는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 편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으로 물을 말리시니 150일이 되자 물이 빠져 나갑니다. 그래서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10월 1일에 물이 말라 산봉우리가 보입니다. 아라랏 산은 터키의 동북 편 변방의 유브라데스, 티그리스 계곡 위에 있는 산입니다. 370일 만에 보는 땅이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야! 산이 보인다.”하고 외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오늘의 방주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를 붙잡고 계셨던 것처럼 교회를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모든 생물을 ‘자카르’ 하시듯이 여러분과 저를 ‘자카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살피시며 돌보시고 보호하십니다.
한상동 목사님이라는 아주 귀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보면 기적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도둑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시는 목사님을 보고 돈 많은 부자인 줄 알았습니다. 양복을 입은 신사가 가방을 들고 걸어가니 돈을 많이 가지고 가는 줄 알고 목사님을 따라가다가 으슥한 길이 나오자 앞질러 가서 숨었습니다. 목사님이 그곳에 도착하면 목사님의 가방을 빼앗으려 했던 것입니다. 도둑이 목사님을 덮치려 하는데, 신비로운 빛이 나는 어떤 사람이 목사님 뒤에서 목사님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걸어가시지만 도둑은 그것을 보고 놀라서 목사님을 덮치지도 못하고 목사님 뒤만 따라갔습니다. 으슥한 길이 끝나니 신비로운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희한한 광경에 놀란 도둑은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 하는 사람인가?’하고 끝까지 목사님을 따라갔습니다. 목사님이 교회로 들어가니 도둑도 교회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도둑이 그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도둑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기가 본 광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회개를 했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그렇소? 당신이 보았던 그분은 예수님 아니면 천사였을 것입니다. 당신은 복 받은 분입니다.”라고 하셨답니다.
다니엘 2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다 죽인다고 합니다. 왕이 꾼 꿈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 나라의 모든 박사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타국에 와서 왕의 특수학교까지 졸업했는데, 왕의 꿈을 알지 못해 이렇게 죽게 되었나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니엘에게 환상을 통해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다 보여 주시고 그 해석도 보여 주십니다. 다니엘이 그것을 왕에게 말하니 왕이 다니엘에게 엎드려 절하고 다니엘을 총리로 세웁니다. 그러니 그 나라의 똑똑한 사람들이 다니엘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다니엘 때문에 살았으니, 다니엘이 생명의 은인이니 타국에서 온 청년이 총리가 되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그렇게 보호하시고 세워 주셨습니다.
따라 합시다.
“다니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노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여호수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그 때보다 오히려 지금 더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됩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님이 첫 목회를 할 때 후두염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 되어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걱정이 많으시군요.”
“예, 걱정이 많습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십니까?”
“설교 걱정이지요. 주일 설교, 주중 설교, 이런 설교, 저런 설교, 설교, 설교, 설교……, 그 많은 설교를 어떻게 감당할지 자나 깨나 걱정입니다.”
“목사님, 설교 준비하는 일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때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설교, 주일 설교, 수요일 설교, 설교를 생각하면 ‘한평생 설교를 어찌하나?’ 하고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니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걱정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노만 빈센트 필 박사님은 강한 사람, 긍정적인 사람, 세계 만민에게 긍정적인 힘을 주는 목사님이 되신 것입니다.
허브터 목사님은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 출신의 수재입니다. 그 목사님이 12년간 목회가 안 되어 쩔쩔매다가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목회를 그만두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중 어느 날 모교 프린스턴 대학에서 목회자 교육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참석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승이었던 로버트 윌리엄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교수님, 저는 목회를 그만두어야겠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목회가 안 됩니다.”
“허브터, 자네는 작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군.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분인데 작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군. 크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목회를 하게.”
그 때부터 그는 강하고 큰 목회를 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잘 달려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1)
저도 걱정하려들면 얼마나 걱정거리가 많은지 모릅니다. 집안 걱정, 아이들 걱정, 교회 걱정, 걱정이 끝이 없습니다. 제가 ‘혹, 팽 장로님이 변해서 나에게 돌을 던지면 어떻게 하나? 노 장로님이 내가 말할 때마다 no, no 하면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을 한다면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니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이사야 43:1-4)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을 태운 특급 열차가 어둠 속을 질주해 갑니다. 큰 다리로 진입하기 직전 갑자기 한 크고 검은 사람이 나타나서 기차를 가로 막습니다. 놀라 기차를 세우고 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예감이 이상해서 주위를 돌아보니 기차 앞쪽의 레일이 끊겨 있습니다. 홍수로 인해 다리가 끊겼던 것입니다. 만일 기차가 그냥 달렸으면 빅토리아 여왕과 그 기차에 탄 모든 사람이 강물에 떨어져 죽었을 텐데, 그 이상한 그림자 때문에 살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기차 라이트에 나방 한 마리가 죽어서 붙어 있습니다. 나방이 날개를 퍼덕인 것이 마치 사람이 기차를 세우기 위해 팔을 벌린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 보고를 받은 빅토리아 여왕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나방이다. 하나님께서 나, 그리고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을 살려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섬세하십니다. 살릴 사람은 반드시 살리십니다. 미래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믿음으로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야, 네 평생에 너를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한 것처럼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지극히 담대히 하라.”
여러분 평생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에는 삿대도, 돛도, 키도, 나침반도 없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방주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이 방주를 태평양 한가운데로, 대서양 한가운데로, 지중해 한가운데로 몰아붙이면 뭍이 드러나도 노아와 그 가족과 방주 안에 있는 모든 생물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방주를 아라랏 산에 딱 정착시켜 주십니다. 배에는 삿대도 없고 돛대도 없는데, 키도 없고 나침반도 없는데, 노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바람으로 배를 인도해 주셔서 아라랏 산에 세워 주신 것입니다. 높은 산의 정상에 넓은 평야 같은 땅이 있어서 거기에 배가 정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세우시기 위해 이미 예정해 놓으신 곳이 아라랏 산이었던 것입니다. 그곳으로 배가 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의 방주인 교회를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양곡교회를 지용수가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바람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인도하십니까? 천국의 아라랏 산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말씀대로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나도 교회다. 나도 방주다.”
여러분과 저도 다 방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10장 23절에도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 인생 길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길을 인도하십니다.
「주께서 내 길 인도하시네 주께서 내 길 인도하시네」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길을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양곡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창원이라는 도시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마산은 알았어도 창원은 몰랐습니다. 제가 서울에 천석(天席, Heaven seat)교회를 개척할 계획을 다 세워놓았는데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이 창원에 잠깐 다녀가라고 해서 창원에 왔다가 양곡교회로 오게 된 것입니다. 제가 처음 철거 지역의 거름터에 있는 옛 우리 교회를 둘러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20세기에도 이런 교회가 다 있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택을 보니 얼마나 위태위태 하던지 그곳에 들어가면 금방 순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장로님들이 제게 “목사님, 우리는 마음을 정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목회해 주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설교도 한 번 해보지 않았는데 저를 소개해 주신 분이 귀하니 그 목사님의 말씀만 듣고 저를 초청한 것입니다. 그때 제가 속으로는 ‘내가 이런 교회에 왜 와.’라고 생각했지만 장로님들께는 “기도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3시에 아내가 저를 깨우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서울에는 조용기 목사님도 계시고, 박조준 목사님도 계시고,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이 계시니 당신이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제가 잘 모르긴 해도 경남에는 당신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에 오게 하신 것 같아요.”
“아니, 정신 나갔어? 여기에 와서 어떻게 하려고? 이 모퉁이에 와서 어떻게 하려고?”
“여보, 창원에서 보면 모퉁이지만 마산, 진해, 창원을 묶어서 보면 여기가 센터에요. 지금은 초라하지만 미래가 있는 교회에요.”
“미래는 무슨 미래? 그리고 사택도 못 보았어? 사택에 들어갔다가는 금방 죽을지 몰라.”
아내도 그 사택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방은 우리가 얻어서 옵시다. 선교사님들은 목숨을 걸고 그 열악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잖아요. 여기가 선교지라 생각하면 목회가 쉽지 않겠어요?”
그때 아내의 그 말이 마치 하나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양곡교회로 오게 된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큰 교회들이 저를 스물 몇 번이나 불렀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릎을 꿇으면 제가 목회할 곳은 여기였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미국에서도 저를 불렀지만 그때도 무릎을 꿇으니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인사권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 인생이 끝날 때까지, 아라랏 산에 갈 때까지 교회도, 우리 개인과 가정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미래 때문에 걱정하면 안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우리는 언제 죽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는 동안 살다가 죽을 날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연한이 있습니다. 그 때까지는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성까지 잘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저 감사하고 평안을 누리며 살면 됩니다.
베드로가 내일이면 감옥에서 끌려 나가 죽게 되어도 오늘 편안하게 자듯이, 우리도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하며 편안하게 살면 됩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고 ‘살든지 죽든지 주 뜻대로 하소서’하고 편안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살리신 데는 목적이 있으십니다. 노아에게는 모든 피조물을 번성시켜야 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양곡교회를 세우신 것도, 여러분과 저를 이렇게 세우신 것도 목적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인도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나를 구원하시고 이렇게 살게 하셨을까?’
그 목적에 따라 행하면 하나님께서 길이길이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고 흥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인도대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보호하시는 하나님
창 8장 1~22절 / 이명식목사
사람들은 자기를 알아줄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기억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 외국 관광지에서도 한국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곳을 보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를 알고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기억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세밀하게 알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고 머리카락까지 다 세신 바가 되었다(마10:30)고 성경은 말합니다. 또 이사야 49:15에서는 “여인이 그 젖먹는 자식을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기억하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을 주님은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보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시 105:42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가 바로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참 놀라운 말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실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기억하고 조카 롯을 멸망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의 기도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보내어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노아를 권념하사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노아를 권념하셨다고 말합니다. 창8:1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여기서 권념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자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보살피어 생각하다’. ‘기억하다’ 또 ‘마음에 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노아를 생각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노아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40일 동안 온 땅에 홍수가 쏟아질 때도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50동안 물이 창일할 때도, 또 물이 빠지길 방주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권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온 땅에 임할 때에 세밀하게 노아를 보호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간 때가 600세 되던 2월 17일입니다. 방주에서 나왔을 때는 그 이듬해 2월 27일입니다. 일년하고 열흘을 노아는 방주에서 보낸 것입니다. 그 일년 동안 방주밖에는 엄청난 재난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창이 열려 폭우가 쏟아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땅이 뒤집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순간에 하나님은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함께 있는 짐승들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큰 환난을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은 노아를 완벽하게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수많은 위험한 일들이 우리를 향해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위기의 순간들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밀하게 보호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43:1에서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에 대해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이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할렐루야!
그리스도인들이라도 환난을 당할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와 똑같은 어려움과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병들 수도 있고, 부도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헛된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삶의 위기를 당할 때 위기 속에 그냥 두지는 않습니다. 환난에서 반드시 건지시고 구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권념하사 환난 속에서 보호하셨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동안에 한 사람도, 한 마리의 짐승도 병들거나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방주 안에서의 하나님의 보호는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그렇게 보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하시는 하나님
계속해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제 심판이 끝나고 물이 다 빠지고 난 후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물이 빠지자마자 바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창8:13에 의하면 그 이듬해 정월 일일에 지면에 물이 다 걷혔다고 말합니다. 노아는 방주를 뚜껑을 걷었습니다. 물이 빠진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물이 다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두 달 가까이를 방주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월 이십 칠일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노아와 그 가족과 짐승들에게 두 달에 지나고 난 이후에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에서 나오게 하시기 전에 노아가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드는 일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준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노아를 권념하시는 하나님은 노아가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시고 노아를 방주에서 나오게 한 것입니다. 권념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방주에 있는 동안 노아가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드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선 물을 다 마르게 하셨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셨습니다. 물이 점점 감해지고, 깊은 샘과 하늘의 창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물이 땅에서 물러가게 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22절을 보면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심음과 거둠이 쉬지 않게 하셨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 때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신 것 같습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몰랐습니다. 노아가 모르는 동안 하나님은 노아를 지키시는 것만이 아니라 완벽한 환경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난 이후에 노아를 방주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지금 힘드십니까? 빨리 문제를 해결 받고 싶습니까?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문제가 해결 안되고 있는 그 시간은 하나님이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방 하나님이 답을 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눈에는 늦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롬8:2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준비에 있어서 최대의 준비가 바로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구원하겠다고 말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완전한 길, 충분하고 유일한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롬5:8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보십시오. 우리가 알지 못할 때 이미 하나님은 이 땅에 아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아들을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준비해 두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은 구원의 완전한 근거입니다. 어느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구원받습니다.(행10:13) 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1:12)
권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여기서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몇 가지 믿음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노아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미리 생각해서 자신의 짐작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는 그렇게 방주에서 나오고 싶어서 까마귀를 내 보내서 물이 빠졌는지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보내면서 확인합니다. 물이 빠졌음을 확인하고 아예 방주의 뚜껑을 제쳐두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방주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노아의 모습은 너무 보기 좋습니다. 왜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삶을 삽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도 하지 않고 사업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않고 어떤 일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실패합니다. 적어도 어떤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세 가지 조건 중에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돈이 무지무지하게 많으면 일단 성공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돈이 없으면 머리라도 좋아야 됩니다. 아이큐 200정도가 되면 아마 사업에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돈도 없고 머리도 나쁘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들은 돈도 없으면서 머리도 나쁘면서 기도도 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지독하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대부분 성도들이 믿음의 삶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윤리적으로 나빠서가 아닙니다. 나쁜 동기가 있다든지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대부분은 하나님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나 내 감정으로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절대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조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우리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주에서 나옴으로 생육과 번성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방주에서 나옴으로 드디어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지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은 창세기1:28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주신 축복을 노아의 홍수가 끝난 후 다시 주셨습니다. 아담 때에 사람들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노아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신분을 회복하고, 세상에 충만하고 세상을 다스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권념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우리는 노아의 예배하는 모습에서 중요한 믿음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생존을 위해서 먹을 것을 찾거나 집을 짓거나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먼저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그 곳에서 제일 처음 행한 일은 제사였습니다. 제사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셨습니다. 이제 노아가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제사(예배)입니다. 제사는 홍수 이후에 노아가 믿음으로 행했던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예배로부터 노아의 삶은 새롭게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의 비밀을 잘 모릅니다. 제가 심방하려고 하면 지금 너무 복잡하니까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예배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합니다. 왜냐하면 예배하면 하나님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비밀을 아십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 그 곳에 하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놀라운 것입니다. 축복중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예배는 너무 귀중한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상황을 축복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정에서, 일터에서 예배드리기를 시작한다면 놀라운 일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내어버려 두심’과 ‘기억하심’
오늘 저는 정말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권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적군이 와도, 고통이 닥쳐오고,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하나님이 그냥 내 버려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억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마7:23에 보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네게서 떠나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렘15:15)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를 저를 권고해 주십시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방주사건이 주는 세가지 질문
창 8장 1~12절 / 변한규목사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묻습니다. 방주사건을 믿습니까? 그런데 성도님들 중엔 방주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믿기 어렵다고 말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홍수사건을 부
인하려는 신학자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홍수심판을 부인하는 일은 성경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부인하는 일은 참 기독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성경을 못
믿겠다는 얘기는 지옥과 천국도 못 믿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방주사건과 홍
수심판 사건은 과학적으로도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지금도 방주가 머무른 아라랏산에는 그
흔적이 많다고 합니다. 여행자를 태운 비행기는 대체로 세계의 절경 그랜드 케년을 지날
때는 저공으로 비행을 합니다. 저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큰물이 흘러간 흔적들이 그곳에
많고, 물고기 화석들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아라랏산 높은 곳에는 염분이 섞인 돌들이
많다고 합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세계의 많은 지층에서는 큰물이 지나간 흔적이 많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성경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성경의 홍수심판을 꼭 믿으시길 바
랍니다. 그리고 성경의 방주사건을 꼭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시간 방주사건이 주는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누가 방주를 지었는가?
물론 노아가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노아가 방주를 지었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를 생각코자 합니다. 하나는 노아의 믿음입니다.
히 11:7절을 읽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
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
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노아는 홍수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창 6:14 "방주를 지으라." 하셨을 때에 방주를 지었으며, 창 7:1 "방주로 들어가라." 하
셨을 때에 방주로 들어갔고, 창 8:16 "방주에서 나오라." 하셨을 때에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또 방주를 지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잣나무로 지으라." 하셨을 때에 잣나무로 지었습니다.
만일 백향목으로 지었더라면 물이 세어 그 방주가 가라앉았을지도 모릅니다. "역청으로 칠
해라" 하셨을 때에 역청으로 칠했습니다. 만일 노아가 고집을 부리며 다른 페인트를 사용했
더라면 방주 안에는 많은 짐승들이 있었는데 그 냄새를 중화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규빗으로 하라."고 하셨을 때에 노아는 하나
님의 치수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만일 노아가 자기 멋대로 기술을 자랑하면서 방주를 지
었더라면 그 방주는 아라랏산에 머무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창 6:22을 보면 "하나님이 자
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고, 창 7:5에도 보면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
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방주는 하나님의 설계에 의해 모든 것이 계
획되어진 것이고 성취되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주는 과연 노아가 지었을까요? 하나님께
서 지었을까요? 노아는 방주를 지을 때 톱질한 것 뿐이요, 못질한 것뿐입니다. 노아는 믿음
으로 방주 안에서 1년 20일 동안 창문한번 열지 않고 인내했습니다. 노아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보통 사람 같으면 수영 꾀나 한답시고 방주의 문을 열고 헤엄쳐 나오려고 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노아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방주 안에서 그는 답
답하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답답함과 괴로움을 아마 찬송으로 이겨냈을
것 같습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마음이 편하다." 본문 1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
님이 권념하셨다."고 하셨죠. 여기 권념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돌보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시고 돌보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께서 항상 권념 하셨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노아를 향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노아를 권념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노아가 지닌
아름다운 마음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있는 성도들을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그를 권념하십니다. 구약시대에서도 그러했고, 신약시대에서도 그러하셨습니다. 다니엘을 보십
시오. 사자 굴에 있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권념하심으로 털끝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물고기 뱃속에 있었으나 하나님이 권념하심으로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
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기억하시고 권념하시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체험이 아닙니까 "두려울 것 없겠네."
이것이 성도들의 삶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 방주의 의미입니다. 본문
4절을 읽습니다. "칠월 곧 그 달 십 칠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방주에는 기관
실이 없고, 선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방주 여행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장 되신 예수님께서 방주를 운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방주에
는 비행기처럼 프로펠러가 없었습니다. 탱크처럼 바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만 6천 톤 급
가량의 어마어마한 방주가 해발 5천 미터 높이의 아라랏산에 머무를 수가 있었습니다. 이름
난 조선소에서도 이런 방주는 지을 수 없을겁니다. 또한 노아는 공과대학 출신도 아닙니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룩하신 것입니다. 방주는
요 3:16을 연상케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으리라." 또한 방주는 시1:6을 묵상케합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방주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방주는 교회를 상징하기
도 합니다. 많은 지성인들이 무교회 주의를 주장합니다. 그리면서 회당을 찾기도 하고, 불당
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교회 안에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만 방주의 복음이 전
달되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방주의 문은 하나뿐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분도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특별히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
십니다. "인생들아 방주로 들어 가라."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방주 안에 있음을 감사하
고, 또 찬송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나는 까마귀 성도인가?
본문 7절을 읽습니다.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
하였더라." 노아는 바깥 세상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까마귀를 바깥으로 날려보냈습니다. 까
마귀는 성경에서 배은망덕한 새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노아의 사랑을 받고 그가 방주 안에
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노아를 버려 둔 체 혼자만의 욕심을 채우
기 위하여 다시는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은혜를 모르는 새인 것 같습니다.
만일 까마귀가 방주로 들어가지 아니했더라면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은
혜를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문둥병자 열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로 다 고
침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그 은혜를 갚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며 은혜 갚을 줄 모르는 우리를 향해서 묻곤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성
도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까마귀 성도임이 틀림없습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
하겠네." 그렇지 못한 성도님들이 있습니까? 까마귀 성도입니다. 왜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았
습니까? 주경 신학자 메튜 엘리가 말합니다. 까마귀는 물위에 떠다니는 죽은 송장을 뜯어먹
느라고 돌아오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일본 흐끼 주석은 말합니다. 죽은 시체를 뜯어먹느라
고 돌아오지 않은 까마귀는 오늘의 세속주의 성도들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
회 주변만 맴도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까마귀 성도지요. 자기 욕심만 챙기는 성도도 있
어요. 까마귀 성도입니다. 아직도 눅 15장의 이 탕자 처럼 세상의 냄새를 풍기면서 주여! 주
여!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까마귀 성도이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주님은 말씀하
십니다. "돌아와! 돌아와!" 까마귀는 어떤 새입니까? 건망증이 많은 새입니다. 로마인 들은
건망증 인생을 까마귀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경우도 건망증 많은 사람을 핀잔 줄 때
에 "너 까마귀 고기 삶아 먹지 않았니?"하지 않습니까? 생각하면 교회 안에 까마귀 성도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까맣게 잊고
사는 성도들 말입니다.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서도 그것을 까맣게 잊어먹고 사는 성도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신 하나
님이십니다. 눅 15장에서 돌아온 탕자의 입에서 나온 찬송이 무엇이었을까요? "나 주를 멀
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그런데 왜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썩은 나무토막 위에 주
저 앉거나 시체 위에 주저앉은 체 자기 욕심에 빠져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주경
신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성도들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친구의 은혜도 모르는 성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까마귀 성도라는 말입니다. 본문 말씀은 눅 15장 탕자 비유의 둘째 아
들을 연상케 합니다. 둘째 아들은 거지가 됐지요, 부랑아가 됐지요. 돼지우리 속에서 뒹구는
탕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일어서고 다시 살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께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이 시간 빈 손들고 나 같은 것을 권념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성도님들이 많아 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나는 비둘기 성도인가?
본문 11절을 읽습니다. "저녁때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라고 했지요. 노아는 이제 비둘기를 날
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비둘기가 처음에 방주에 돌아왔을 땐, 본문 9절에 "비둘기가 접족
할 곳을 찾지 못하고"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요? 비둘기가 발붙일 곳이 없었다는 말입니
다. 다시 말해서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나가기는 아직 이르다는 정보입니다. 비둘기는 성결된 성
도들의 모형입니다. 성도가 어떤 사람인가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시 1
편에서 보면은 성도의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악인의 꾀를 좇지 아
니하고, 둘째,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셋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
니다. 왜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 왔을까요? 아무리 둘러봐도 발붙일 곳이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일 주일이 지났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보냈습니다. 비둘기가
다시 방주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새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시 55:6을 보면 "내가 비
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라," 시인이 날아가서 편히 쉬기를 원했던 곳
은 주님의 품입니다. 까마귀는 편히 쉬기를 위해 썩은 송장을 찾았고, 비둘기는 세상 물결
속에서는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하여 돌아왔습니다. 말로는 평화라고 하지만 평화로운 곳이
어디 있습니까? 평화로운 곳이 오직 한 곳 있습니다. 방주뿐입니다. 교회뿐입니다. 그래서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 온 것입니다. 비둘기는 성경을 보면 평화를 상징하지요. 시 52:8을 보
면 감람나무도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88올림픽 개막식 때 수 백 마리의 비둘기
를 날려보냈습니다. 온 세상에 평화가 임하소서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온
세상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UN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둘기와 감람나무 잎
사귀입니다. 그것도 역시 평화를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줄 압니다. 그런데
참 평화는 어디에서 옵니까?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왜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왔을까요? 비둘기는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깨끗한 새이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깨끗한
것을 골라먹고, 깨끗한 곳을 거처로 하는 새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심령이 깨끗해야 하
고, 양심이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도 깨끗하고, 언어도 깨끗하고, 행실도 깨끗해야 합니다.
왜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왔습니까? 온 세상이 온통 흙탕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흙탕물
이 무엇입니까? 죄악을 상징합니다. 네가 범하고 내가 범한 죄 때문에 식당에서 음식하나
마음놓고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국산인지 중국산인지 구분이 없어요. 고춧가루가 진짜
인지 가짜 인지 잘 몰라요. 콩나물, 두부, 생선 하나 먹을 때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
다. 세상은 무서워 졌습니다. 누구하나 의지하고 믿을 사람이 없어요. 태반이 부정을 저지릅
니다. 경찰도 부정을 저지르고, 국회의원도 부정을 저지릅니다. 온 세상이 너무도 추해서 발
붙일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생각하면 흙탕물 세상입니다. 왜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왔을까
요? "이 세상에 죄악 된 일이 많고" 이 땅은 결코 인생의 본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흙탕물로
더러워 진 것을 무엇으로 깨끗케 할 수 있을까요? 예수의 피밖에 없어요. " 나의 죄를 씻기
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랑하는 성도여! 썩은 것 좋아하지 마십시다. 썩은 것은 더럽습니
다. 냄새납니다. 성도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성도입니다. 성도들은 깨끗하
게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썩은 것을 탐식하고 아무데나 주저 앉는 까마귀 성도가 되지 마
십시다. 주님 품으로 돌아오는 비둘기 성도가 되고 그 입에 평화의 잎새를 물고 오는 비둘
기 성도가 되십시다. 우리모두 비둘기 성도가 되어 평화로운 교회를 만들고, 평화로운 가정
을 만드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방주로 돌아온 비둘기
창 8장 1~12절 / 박조준목사
지난 시간에는 대홍수로 세상이 멸하게 되고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가정만 구원받게 된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은 홍수가 끝나는 장면입니다. 한때는 그렇게도 검 고 어두운 것으로 나타났던 구름이 이제는 보다 밝은 면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40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고 6- 7절에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8-9절에 보면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했습니다. 10절 이하에 또 7일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 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다 고 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까마귀의 임무는 어둡고 무서운 율법을 내어 놓은 것의 그림자이고 그가 사람에 게 다시 돌아오지 아니했다는 사실은 어떤 위로의 표적이나 소망의 징조로 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보내신 것은 비둘기로 미리 알리셨는데 그가 죄인에게 오시는 것은 감람 잎사 귀로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율법을 대표하는 까마귀는 맹렬하고도 거칠게 침울한 울음소리만 내기 때문에 율법에는 조금도 평안이 없고, 복음을 대표하는 비둘기는 입에 감람 잎사귀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복음의 기초에는 평안이 있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을 소위 은유적인 해석이라고 하는데 성경의 내용을 모두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퍽 위험 한 일입니다. 오늘 저녁 생각하게 되는 이 사건은 그 자체가 아주 자연스럽게 제시하고 있는 의미 가 있습니다. 비둘기는 신자의 영혼은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때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모든 것을 관찰해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고는 어디서나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만족과 평안이 없습니다. 먼저, 방주를 떠난 비둘기를 생각해 봅니다. 비둘기가 방주 안에 있을 때는 늘 안전했습니다. 다른 모든 가축과 짐승들이 홍수로 인해 죽었지만 이 비둘기는 은총을 받아 구출 받은 것입니다. 비둘기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비둘기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방주 안의 의인 노아가 언제나 이 비둘기에게 그날의 모이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날개를 펴고 이 안전한 방주를 떠났 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 원을 받았습니다. 죄악의 홍수가 많은 사람을 뒤덮을 때도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제공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날기 위해서 날개를 펴며 눈을 떠서 다른 곳을 바라보려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다른 곳을 기웃거립니까? 디나가 아버지 집을 떠나 세겜의 장막을 찾아갈 때 스스로 범한 과오를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그녀는 강간을 당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 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세상을 찾아 나아갈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비둘기가 왜 날아 갔습니까? 비둘기는 날개가 있어서 입니다. 날개를 가진 짐승은 본능적으로 날려고 합니다. 우리 에게도 생각의 날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생각의 날개를 펴서 여기 저기 날아다닙니다. 우리에 게 이 공상의 날개가 없다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증거하고 있는 소수의 명백한 진리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공상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확고하고 진실하게 보이는 일들 까지도 참으로 그런가 하여 흔들거리기가 쉽습니다. 믿음이란 이론으로 따져서 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론을 따지지 말고 순전하고 단순한 믿음에 머물게 되면 우리를 괴 롭히는 불안이 노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캐고, 이론으로 결론을 얻으려 하는 동안 번거로움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복잡하게 믿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만 그 능력은 우 리를 평안하게 만들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이렇 게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우리의 영은 탐구 여행을 떠나며 발견의 항해를 떠나자는 시험을 받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더욱 더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이외 에 또 어떤 굉장한 사랑의 대상물이 있는 줄 알아서 애써 찾아나서는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 실 하나님 외에 다른 사랑의 대상이 어디 있습니까? 비둘기는 전에 살던 곳을 찾아가는 본능이 있습니다. 요즘는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그런 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만 통신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비둘기를 이용해서 편지를 전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비둘기 다리에 작은 종이로 편지를 써서 묶어 날려보내면 비둘기는 자기가 살던 집을 찾아 날아갑니다. 사람의 기술 가지고는 비둘기를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게 만들 수 없고 단지 비 둘기 자신이 살던 집을 향해서 날아가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비둘기는 공 중으로 높이높이 날아오릅니다. 높이 떠서는 열심히 무엇을 찾는 눈초리로 여러 번 빙빙 돕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가 안식을 취하던 그곳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큰 행사를 할 때 수천 마리의 비둘기를 가두었다가 한꺼번에 풀어놓으면 함께 나와서 공중을 빙빙 돕니다. 아주 장 관입니다. 그러다가 여러 곳에서 모아졌던 이 비둘기는 결국 자기 집을 찾아갑니다.
노아가 내놓 은 이 비둘기는 오랜 시간 방주 안에 있었지만 방주에 들어오기 이전의 과거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방주 밖으로 날아가는 자유를 얻자 자기가 살던 과거의 집을 향해 날아가려고 시도했습 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주님을 알기 전에 안식은 그런 대로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 랑을 체험하기 전에 우리는 죄악 가운데서 쾌락을 누렸습니다. 이 세상의 허무한 것 가지고 유행 을 따라 그런 대로 만족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가졌고, 기쁨도 가졌고, 쾌락도 가졌고 환희도 있었습니다. 우리 속에 그 옛적 성품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 옛 성품이 자유를 가지게 되면 그 옛 날 소굴을 찾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지금 찬양하고 있으면서도 과거에 부르던 음탕한 노래가락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지금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과거에 행하던 그 어두운 죄악의 그림자 가 회상되지 아니합니까? 지금은 새 성품을 가지고서 과거의 그 어두운 죄를 증오하고 있지만 그 래도 옛 성품이 그것을 향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 육체가 땅에 묻혀 썩기 전에는 옛 성품이 자꾸만 되살아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고기 가마가 자꾸만 생각나지 않았습니까? 그 속박의 집, 노예 생활에서 그토록 맛있던 애굽의 마늘과 부추와 파를 먹으러 가보지 않겠냐고 속삭이지 아니합니까? 그렇습니다. 비둘기 집은 아직도 매력 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죄의 씨앗이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 억하셔야 합니다. 뱀이란 놈은 아직도 기회를 노려 우리에게 살금살금 기어 들어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데 뱀은 여기를 기어다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버 리라, 육의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고 권면합니다. 옛 생각이 우리 영에 우세하므로 우리가 사 랑하는 주님을 잊어버리고 죄를 찾아 헤매게 되는 사실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 비둘기는 노아에 의해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둘기를 내보낸 노아의 동기는 그 차원이 높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시험을 참고 견디도록 허용하 는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 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는 기도를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시험 당하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때때로 하나님 은 자기의 사람들을 시험을 당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시험은 우리에게 훌륭한 결과를 안겨줍니 다. 그러한 시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처리되어서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들의 유익이 됩니다. 비둘기는 물로 황폐한 땅 위를 날아본 후에야 그 이전보다 더 한충 방주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 입니다.
비둘기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자기가 안식할 곳이 없음을 똑똑히 눈으로 보고 안 후에 비로소 노아의 손에 있는 것 이상으로 평화로운 보금자리를 꾸밀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 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 생각 나름대로 배회하고 그들 마음 내키는 대로 날아가도록 내어놓으십니다. 그것은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돌아다 녀 본 연후에 취하는 휴식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 이 공허하다는 것을 배우면서 허무한 데서 허무한 곳으로 괜히 날아다녀 보는 것입니다. 그후에야 그들은 그들 자신의 참된 복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겠다고 할 때 아버지는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몫에 돌아가는 유 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아버지를 멀리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즐기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았습니다. 얼마 동안은 자유로웠고 사람 사는 맛이 있는 것 같았고,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는데 아버지 밑에서 멋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돼지우리 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나보다 낫게 지내는 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돌아 갈 곳은 하나님 품밖에는 없습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 심이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을 아무리 돌아다 녀 보아도 거기에 참된 평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이 아니하니라 너희 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이 참된 평안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바랍 니다. 비둘기는 자기의 날개를 펴서 새로운 집을 찾아 날아갑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산봉우리 뿐이 었습니다. 날아다니다가 맥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디 좀 쉬어 보려 해도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 다. 그런데 까마귀는 평안히 있습니다. 어떻게요? 까마귀는 물에 떠 있는 큰 짐승의 시체 위에 올 라앉아서 죽은 짐승의 고기를 실컷 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거기에 안식할 수가 없었 습니다. 비둘기는 그 천성이 부패한 것이라면 딱 질색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큰 태풍에 부러 져 물 위에 떠 있는 나무가 하나 눈에 뛰었습니다. 거기에 앉으니까 그 나무는 온통 진흙과 오물 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기도 비둘기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 날개를 펴고 날아 갔습니다. 저기 또 어떤 물체가 눈을 끌기에 죽을 힘을 다해서 날아가 보았더니 거기도 자기가 쉴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사방을 날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가든 자기가 발붙이고 안식할 곳은 찾을 수가 없고 점점 날개가 피곤해 지기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마음의 안식할 만한 곳을 찾아 헤매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 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 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어떤 것입니까? 지식인들도 안식을 구합니다. 그런데 예 수 그리스도를 떠난 안식을 구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교육을 많이 받은 것이 잘못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많이 받은 교 육이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지성인이라고 할지 라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만 예수님은 그를 만족케 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는 중생한 사람의 마음도 안식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만족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런데 만족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세계의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말씀하 셨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 으리라. 까마귀는 죽은 짐승의 썩은 고기를 먹어도 만족하지만 비둘기는 죽은 짐승의 썩은 고기를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날아다녀 보아도 안식할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만족은 하 나님께 있습니다. 이 만족을 얻기 위해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나아오면 됩니다. 하나님 에게만 안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맡기십시다. 그리하면 주님은 결코 우리 를 실망시키지는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좋아하던 모든 것, 사랑하던 모든 것 가지고 주님께 온전 히 나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십시다.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베 푸시는 사랑은 측량할 수가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참된 안식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솔로몬의 말은 사실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에 게는 그렇게 많은 재산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그에게는 엄청난 통치권이 있었는데 이것도 소용없단 말입니까? 그의 번영했던 영광의 왕위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자 기를 평안히 안식하도록 만드는 그 감미로운 소리들, 그리고 자기를 즐겁게 만들던 춤과 노래 등 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그의 대답은 여전합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심 판의 피곤만 더할 뿐이다 고 합니다. 솔로몬이 모든 것을 시험하고 난 뒤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애 이상으로 더 좋은 생이 있을까 알아보기 위하여 어떤 다른 형 태의 인생살이를 시도해 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고 해도 안식이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마음 속에 영접한 사람은 토굴 속에 살아도 부족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명랑하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만족해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특출할 사 람은 아닐지라도 언제나 밝은 면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은 괴롭다고 하는 곳에서도 그들 은 만족해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비둘기는 발 붙일 안식처를 찾았으나 허사였습니다. 그 이유는 비둘기가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비둘기는 꽤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에서 주님밖에는 아무런 기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기쁨을 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적인 것을 좋아하며 즐길 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단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처럼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미각이 있습니 다. 그리스도인도 재산이나 소위 세상이 말하는 쾌락이 있으면 그것을 다 볼 줄 압니다. 그리스도 인이라고해서 그런 것을 못 보는 장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거기에 집착하지도, 거기에 서 만족을 얻지도 못합니다. 비둘기는 날개가 없어서 안식처를 찾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비둘기의 날개는 강했고 빨랐습니 다. 까마귀 이상으로 날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원하면 세상의 쾌락 속으로 뛰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는 것은 거기에 참 만족이 없는 것 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둘기가 안식처를 찾지 못한 이유는 비둘기 자신의 성품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에서 올라가라, 올라가라, 올라가라. 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디서도 만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끝으로 비둘기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어느 곳에서도 만족을 찾지 못한 비둘기가 그 다 음에 한 일은 방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요세프스는 비둘기는 온통 물에 젖고 진흙이 묻은 날 개와 발을 가지고 노아에게로 돌아왔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안식처를 얻으 려 하면 결과적으로 얻는 것은 세상의 물과 진흙으로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 니까? 비둘기는 방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진흙 속에 빠졌어도, 물에 흠뻑 젖었어도, 맥이 하나 없게 되었어도, 주님께로 나오면 됩니다. 내 모습 그대로 나오면 됩니다. 노아는 온종일 자기의 비둘기가 돌아오는가 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저기 비둘기가 옵니다. 그 비둘기는 얼마나 지 쳤든지 떨어질 것만 같아 보였습니다. 그때 노아는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잡아 주었습니다. 비둘 기는 이제 더이상 자기 힘으로 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두 손들고 돌아오는 아들을 맞 아 드리는 아버지와도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귀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돌아오라 는 말씀입니다.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내게 오는 사람을 내가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피곤하고 지친 심령 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 주시는 참된 평안과 쉼을 얻기를 바랍니다.
방주에서 세상으로
창 8:1~9:17 / 곽창대목사(한밭교회)
오늘 본문도 노아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노아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고 평가했습니다(6:9). 어떤 점에서 그런 평가를 받았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방주를 지어라
방주에 들어가라
방주에서 나오라
이 세 가지 말씀에 노아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방주를 지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노아에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간 방주를 지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동네 사람들이 조롱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주 짓는 일이 항상 즐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방주를 완성했습니다. 인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대홍수 심판을 예고하셨지만 노아에게는 전혀 상상이 안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방주로 들어가는 날까지 폭우나 홍수의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방주로 나아온 모든 동물들을 탑승시켰습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엄청난 식량도 적재했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다음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신 후에도 일주일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과정을 간략히 묘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아의 믿음과 순종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 안에 있었던 기간은 1년하고도 17일이었습니다.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그 기간 동안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 안에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정말 만만찮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저 먹고 노는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나 배설물을 치우는 일만해도 상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소망은 방주에서 나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노아 가족들이 정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가라고 하실 그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방주에서 나오너라!” 그때가 노아가 601살 되었던 때 2월 27일이었습니다(8:13-14). 대홍수가 나기 시작했던 때가 600년 2월 17일이었고 그 일주일 전에 방주에 들어갔으므로 방주에 있었던 기간은 총 1년 17일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8:16-17)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 말씀에 노아는 다시 순종했습니다(8:18-19). 물론 ‘방주에서 나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정말 노아가 듣기를 고대했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고대했던 말씀을 들은 노아의 가족들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1년 넘도록 자기 식구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었던 방주를 떠나는 것이 조금은 서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동물들과 헤어지는 것도 섭섭했을 것 같습니다. 그랬어도 그들은 방주를 떠났습니다. 방주 안에서 마냥 사는 것이 사람이 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방주는 임시 처소였습니다. 사람이 영구히 거할 집은 아니었습니다. 방주 안에서 사는 동안 노아의 가족들은 부지런히 일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들에게 방주에서 나가라고 하셨던 것은 단순히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어 마시며 세상을 자유롭게 활보하도록 함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노아의 가족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오면서 그리고 황폐한 땅을 밟으면서 한 편으로는 크게 비통했을 것입니다. 1년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을 보고는 한동안 넋이 나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황폐한 세상이나 그 세상을 바라보며 느낀 노아 가족들의 감정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노아가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것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8:20-21)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노아는 방주에 태웠던 정결한 짐승과 새 가운데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올린 예배행위가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에 행했던 일들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기에 창세기 기자는 모든 것을 침묵하고 이 일만을 부각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이 가장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예배야말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의미 있게 합니다. 황폐한 땅이라 해도 그곳이 예배의 장소가 될 때 그 장소는 살아납니다. 시간과 장소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예배이기에 성경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노아가 하나님께 예배드렸으며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노아가 드린 예배가 어떤 예배였기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습니까? 세 가지 정도로 간추릴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예배였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보세요. 1년 전만 해도 친척들 친구들 동네사람들과 함께 살던 바로 그 세상에 자기 가족들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이 일구었던 각종 문명들이 다 쓸려가 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땅에 그들이 서있었습니다.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노아가 그때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배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지난 1년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아니 방주 짓기를 시작했던 때 이후로 지금까지 수십 년간의 세월들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노아는 자기와 자기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감사를 예배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배할 때 노아는 아직 많은 것이 남아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마른 땅과 그 땅으로 흩어진 동물들 그리고 8명의 자기 기족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노아는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낭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부터 해야 할 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까? 그때야말로 예배할 때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 안에서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구원 받은 자녀임을 생각할 때 무슨 일을 당해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헤아려 보세요.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랍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황폐한 땅에서 가장 먼저 감사의 예배를 하나님께 올린 노아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믿고 기대하는 믿음과 소망의 예배였습니다.
노아는 황폐한 세상을 보며 하나님께서 행하실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고 미래에 성취될 것을 미리 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것은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죄로 뒤범벅이 된 세상을 엎어버리신 것은 새로운 세상을 다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은 노아에게는 황무지가 낙원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황폐한 땅이 낙원으로 변하기까지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 지 그리고 얼마나 힘들지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세상 이루실 것을 믿기에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보는 비전입니다.
노아는 황폐한 땅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오늘보다 황폐한 날은 없을 것이야! 내일은 오늘보다는 분명 나을 거야! 이제부터 나에게는 신나는 일이 펼쳐질 거야! 황폐한 세상이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것을 보는 즐거움으로 살게 될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방주에서 세상으로 다시 내보신 것은 아름다운 세상 보도록 그렇게 하신 거야! 그렇다면 그날 보기를 소망하는 자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예배이지! 그 꿈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께 예배해야지!”
여러분, 예배의 장소야말로 회복의 발원지입니다. 예배하는 곳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거기에 은혜의 샘이 터지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낙원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가 황폐하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앞이 캄캄합니까? 예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붙잡고 예배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 자녀다! 그러니 결국 너는 지금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될 거야! 결국 하나님 나라의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될 거야!” 이 약속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절망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 희망을 실현하실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노아가 바로 그런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아름다운 일을 믿고 기대함으로써 믿음과 소망의 예배를 하나님께 올린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예배 즉 헌신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올린 제사는 번제였습니다. 번제는 정결한 짐승이나 새를 완전히 불태워 올리는 제사입니다. 이 번제는 제사를 올리는 자의 온전한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입니다.
노아는 황폐한 땅을 보면서 실망이나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족들을 살리신 것은 이 황폐한 땅을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꾸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할 일 많은 이 땅에서 최선을 대해 일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겠습니다. 힘주십시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죄 많은 이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전의에 불타고 있습니까?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위해 학교에서 일터에서 땀을 흘리고 있습니까? 건강한 교회 만들기 위해 열심을 품고 봉사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사명을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열정이 어디에서 솟아납니까? 예배입니다. 예배할 때 자신의 사명에 대해 눈뜨게 됩니다. 그 사명에 헌신하는 강한 열정이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아주 위험천만합니다. 예배자로 하여금 가만있질 못하게 합니다. 예배자로 하여금 사명자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군사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합니다. 좋은 부모로 헌신하게 합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게 합니다. 좋은 직장인이 되게 합니다. 예배자로 하여금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합니다. 바르게 예배할 때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예배자로 하여금 황폐한 세상, 죄 많은 세상을 볼 때 뛰어 들어가고 싶은 거룩한 열망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보다 세상에서 더 크게 활동하고 계신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의 최종 관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도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최종 관심은 이 세상이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엡 1:10에서는 ‘만유의 통일’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계십니다.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교회에 임재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성도들에게 은혜와 새 힘을 공급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예배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까? 세상에 나가 일 잘하라고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회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만유의 통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교회에 계시는 것 못지않게 세상에 계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는 교회와 세상 모두입니다. 교회에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보다 세상에서 더 크게 활동하고 계신다.’는 말은 이단의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생생하게 경험하려면 세상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황폐한 세상 속으로,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담대히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고통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생하게 느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예배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 머물지 않고 바깥세상으로 나와 하나님께 예배했던 참 의미입니다.
지난 주일에 노아의 방주는 예수님을 예표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만 구원 받습니다. 또 한 가지 방주는 교회를 상징한다고도 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합니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입니다. 아마도 노아 가족들이 방주에서 1년을 사는 동안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물론 번제 같은 제사는 드리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방주 안에서 노아의 가족들이 드렸던 예배는 지금 우리들이 가정에서 드리는 가정예배와 교회에서 드리는 공예배의 모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방주 밖에서의 예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방주 안에서 올린 예배는 침묵하면서 대조적으로 방주에서 나와 황폐한 땅에서 올린 예배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방주 안에서 올렸던 예배가 무가치했다는 뜻이 아니라 방주 밖에서 올리는 예배, 삶의 현장에서 올리는 예배, 황폐한 땅에서 올리는 예배로까지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완성된 예배가 바로 그것입니다. 장소를 초월해서 예배하게 된 것이 신약의 예배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화가 한참 진행된 후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는데 유대인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누가 옳습니까?”
예수님의 답변:
(요 4:21, 23)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이제부터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내가 왔노라!’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몸이 머무는 모든 곳에서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장소가 교회 안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본격적으로 예배해야 할 곳은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황폐한 땅, 죄 많은 세상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 학교, 일터가 예배의 장소입니다.
물론 주일에 지정된 장소에서 공식적으로 모이는 공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과 교회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증언해주는 대단히 중요하고 가장 기초적인 교회생활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와 일터에서도 예배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예배드린다면 좋겠지만 혼자서라도 예배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그곳을 새롭게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노아가 황폐한 땅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 믿음과 소망의 예배, 헌신의 예배를 올렸습니다. 그 예배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창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약속과 동일합니다.
9:2-6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조금 갱신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동물을 식용으로 잡아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홍수 이전에는 사람의 양식이 곡식과 채소로 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에는 동물들도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창조과학자들은 주장합니다. 홍수 이후에 기후가 크게 변했고 자외선이 다량으로 유입되는 환경에서 사람의 육체적인 건강을 위해 동물성 단백질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동물을 식용으로 먹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동물을 식용으로 먹을 때 피째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9:3). 이 금지명령은 생명의 귀중함을 인식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들의 잔인함을 억제하기 위해서 주신 규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또 한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9:11-17). 다시는 물로써 온 세상을 멸하지는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징표로 무지개가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이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의 본심이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래 참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오늘은 12월의 첫 주일입니다. 12월은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달입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대로 노아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됩시다!
이 연말연시에 해야 할 일들이 많을지라도 무엇보다도 먼저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감사하는 예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예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위해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에 우선순위를 둡시다. 교회에 모여서도 예배해야 하지만 가정과 학교와 일터에서도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십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권념하시는 사람
창 8장 1~5절 / 피영민목사
서론
창세기 6장부터 9장까지의 내용은 외우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6, 7장과 8, 9장이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6, 7장은 홍수사건이고 8, 9장은 회복사건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6, 7장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파괴하는 사건이고 8, 9장은 재건하는 사건입니다. 얼마나 외우기가 쉽습니까? 창세기 6, 7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노아와 세 아들이 먼저 소개되고 그들이 방주에 들어간 7일 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40일 동안 비가 내려와 150일 동안 땅에 창일합니다. 그러면 창세기 8, 9장의 내용은 어떻게 됩니까?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완전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150일 동안 물이 감하고 40일이 지나서 방주의 창을 열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해 돌아왔고, 7일 후에 다시 내어보내니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어 왔고 또 7일 후에 내어보내니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들과 짐승들이 방주에서 나오고 노아의 세 아들이 다시 소개되며 인류가 다시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6, 7장은 망해가는 이야기이고 8, 9장은 흥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중요한 질문은 6, 7장의 망해가던 세상이 8, 9장에서 어떻게 다시 흥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Ⅰ. 하나님이 권념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창세기 8장 1절은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창 8:1). ‘권념하셨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영어로 보는 것이 더 쉽습니다. ‘God remembered Noah’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망하던 세상이 다시 흥하게 된 핵심요인이 바로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한다고 할 때 이것은 ‘지적인 회상’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40년 전 중학교 동창생을 길에서 만났는데 이름을 몰라 한참 고민하다가 생각났을 때 이것을 ‘기억했다’고 합니다. 제가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가다가 익산을 지났는데 익산의 옛날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두 시간 동안 계속 생각하다가 광주에 가서야 익산의 옛 이름이 이리였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기억은 지적인 회상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를 기억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회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는 것은 노아를 잊어버리고 계시다가 1년 만에 생각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기억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동사는 ‘자카르’입니다. ‘자카르’는 ‘기억하다’ 혹은 ‘생각하다’로 번역되는데, 이 말은 가장 적합한 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도움을 주시는 자비로운 행동을 의미합니다. 쓸데없는 도움을 주거나 괴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가 근거가 되어 가장 적합한 때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창 30:22). 야곱에게는 부인이 두 명 있었고 첩이 두 명 있었습니다. 첫째 부인인 레아는 자식을 잘 낳았지만 야곱이 사랑하는 둘째 부인 라헬은 하나님이 태의 문을 닫으셔서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레아가 라헬을 업신여겼고, 그녀가 자식이 없어 부끄러워할 때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시니 그 태가 열려 야곱의 아들 중 가장 훌륭한 아들인 요셉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자녀가 없던 사람도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는 분은 기도하실 때 “하나님, 나를 기억해주소서. 라헬을 기억하셨듯이 나를 기억해주소서. 창세기 30장 22절에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심으로 요셉이 잉태된 것처럼 나를 기억하시고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창 19:29). 소돔이라는 곳은 동성연애가 심한 곳입니다. 소돔(Sodom)에 ‘y’를 붙이면 ‘동성연애’라는 뜻이고 ‘ite’를 붙이면 ‘동성연애자’라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성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소돔에 하나님은 유황과 불을 비 같이 내려 심판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그의 조카 롯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이 기억하사 애굽 왕 바로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시고 해방시키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출 2:24).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건져내신 사건들을 다 찾아내면 두 시간을 설교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북한 주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을 기억하사 바로 왕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신 것처럼 북한 주민을 기억해주시고 공산 치하에서 건져내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밥을 먹지 못해 굶어죽고 예배도 못 드리게 하는 나라지만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최적의 때에 개입하셔서 우리 동포들을 해방시키시고 한민족이 다 함께 일어나 신앙의 부흥을 이루고 세계 선교를 감당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셔서 바람을 보내셨습니다. 바람이 불고 땅 속에 있는 물이 막히고 하늘의 창도 닫히자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산꼭대기도 나타나고 육지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애 가운데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은혜가 날마다 있으시기 바랍니다. 아주 망한 사람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그 다음부터 계속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Ⅱ. 노아를 기억하신 자비는 얼마나 큰 것인가?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신 사실은 당연하게 여길 사건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인구가 약 10억 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건입니까?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셔서 지구표면에 가득한 물을 말려주신 것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피영민 목사님에게 감사한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제 이름을 알고 기억해서 명절에 사과 한 상자를 보냈다면 아마 제가 자랑하고 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을 수천 명 합한 것보다 더 위대하시고, 기업 회장 수천 명 합한 것보다 더 높으신 권능의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사랑해주신다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이것은 엄청나게 큰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시편 113편은 높으신 하나님이 낮은 인간을 기억하시고 돌아보시는 사랑을 찬송한 노래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시 113:5~8).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는 것은 굉장히 낮아지시는 것(condescension)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는 거름 구덩이에 빠져있습니다. 죄악의 거름 구덩이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이 스스로 거름 구덩이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씻어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심으로 지옥에 갈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카락 개수까지도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마 10:30). 만약 우리가 머리카락을 센다면 평생 세어도 다 세지 못할 것입니다. 머리카락을 세다가 헷갈리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세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아침에 샤워하다가 머리카락이 몇 개나 빠졌는지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외면뿐만이 아니라 내면도 아십니다. 우리가 내면으로 두려워하고 외로워하며 슬퍼하고 좌절하는 생각들을 다 아시고 돌보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홍수경험’은 신앙의 시험이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시기 전 노아는 방주에 여러 날 있었습니다. 방주에 있었던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비오기 전 7일, 비가 내린 40일, 비가 땅에 창일한 150일을 합하면 197일입니다. 비가 내린 40일을 150일에 포함해도 최소한 157일 동안 노아는 방주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기간을 계산해보면 복잡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1년과 옛날 유대인들의 1년 계산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노아가 방주 안에서 150일 이상 있는 동안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에게 얼마나 어려운 시험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혹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혹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노아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홍수경험’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노아가 방주 안에 있었던 시간은 하나님이 노아를 가장 많이 사랑하시고 보호해주신 시간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죽을 때 노아와 그의 가족만 보호해주셨습니다. 1년이 넘는 세월을 홍수의 위험에서 지켜주셨고 방주 안는 있는 맹수들로부터도 지켜주셨습니다. 질병의 위험에서도 지켜주셨고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을 위험에서도 지켜주셨습니다. 갖가지 위험에서 다 지켜주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때로는 홍수경험을 통과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것 같고 나를 잊어버리시고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는 유혹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홍수경험은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홍수경험을 겪은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욥은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자식 열 명이 모두 죽고, 그 많았던 재산도 다 날아갔습니다. 건강도 잃고 아내까지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기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욥 14:13). 욥의 기도는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들으시고 욥을 기억하사 두 배로 복을 주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어려운 홍수경험을 겪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5~46).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낮 열두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습니다.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시간 동안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은 가장 불 붙었을 것이고 가장 뜨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외면하신 이유는 그를 잊어버리셨기 때문도 아니고 미워하셨기 때문도 아니며 괴롭게 하려하심도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죗값을 속량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온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죗값을 인간에게 묻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독생자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비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변덕스럽고 독재적이며 무자비하셨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당신의 택한 백성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숨어계신 것 같아 보이는 순간에도 가장 강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결 론
창세기 6, 7장의 멸망이 8, 9장의 회복으로 돌아가는 돌쩌귀(Hinge)에는 오직 한마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더라.” 인간의 삶이 절망과 슬픔과 저주에서 소망과 기쁨과 축복으로 바뀌는 돌쩌귀에는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은혜로운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믿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사랑이시며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주권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하나님의 주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모르고 하는 설교는 엉터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 택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구원을 위해 부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죄를 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9~30).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하나님의 주권교리를 이렇게 간단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습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생각으로 믿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기억해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70억 인구 중에 하나님이 특별히 기억하신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설교를 하되 하나님의 주권을 설교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백, 수천 편을 설교해도 그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저는 은사운동이니 성령운동이니 그런 것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모르고 방언이나 예언을 하는 것은 불교도 하고 힌두교도 합니다. 오늘날 신학계의 문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변두리로 몰아내고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시대 10억 명의 인구가 학문과 능력을 다 합친다고 해도 그 홍수를 막아냈겠습니까? 지금 70억 명의 인구가 모여서 힘을 합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불심판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운석 하나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鳥足之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예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려울 때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회복되는 것입니다. 병이 걸려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했다고 “이제 나는 죽었구나!” 이런 소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실 것이니 문제없다.” 이렇게 말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놓고 격려하십시오. “너는 지금 가난하지만 문제없다. 네 아버지가 부자 아니냐? 네가 지금 몸이 아프지만 문제없다. 네 아버지가 만병을 고치시는 대의원이시지 않느냐?” 이렇게 격려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할 때 우리는 다윗처럼 해야 됩니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시 25:7).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해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인생살이에 어려움이 있을 때 항상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따라 나를 기억하소서.” 이런 기도를 올림으로 날마다 하나님이 기억해주시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