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0일(목)
* 시작 기도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주님...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예수로 인하여 거룩한 불구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한 의로운 일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흔적인 불구자로서의 모습을 자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행해야 할 불구자 선포입니다.
하여 오늘도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의 의를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로 인하여 불구자 된 그 흔적을 자랑하게 하소서.
오늘 이 하루도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기 원하오니 나를 붙잡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민 3:1-13
제목 :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1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는 이러하니라.
2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장자는 나답이요 다음은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니
3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받은 제사장들이라.
4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5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레위 지파는 나아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그에게 시종하게 하라.
7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
8 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할지니
9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
10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나의 묵상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실 당시 아론과 모세의 족보이다.
아론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자는 나답, 둘째는 아비후, 셋째는 엘르아살, 막내는 이다말이다.
이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명한 불이 아니라 다른 불을 드려 자식이 없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의 동생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다.
다른 불을 드리다가 그들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불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레위기 10장은 오늘 본문과 병행 본문이다.
거기에는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렸다고 한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들이 향로를 가져다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레 10:1-2)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그렇다면 향로에 담아야 하는 불은 어떤 불인가?
그 불은 다름 아닌 번제단의 불이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제사장들이 분향단에 올릴 향을 사르는데 사용할 불이 언급되어 있다.
(레 16:12-13)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이처럼 나답과 아비후가 향로에 담아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불은 곧 번제단의 불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번제단의 불이 아니라 다른 불을 사용하여 향로의 향을 사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며, 그 불은 거룩하지 않은 불이다.
불의 속성이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 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불을 드릴 때 그 불이 곧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불이요 제사가 되는 것이다.
분향단에서 피어오르는 향연은 곧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향기로운 연기이다.
(계 8:3-5)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번제단의 불이나 그 불을 담아 향을 태워 올리는 향연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예배는 내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본문 4절에 보면 ‘여호와 앞에’와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이어서 나온다.
이는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드려야 함이 옳다.
여호와 앞에서의 ‘앞에서’는 히브리어 ‘파님’으로써 이는 얼굴을 뜻한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면서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들의 뜻대로 제사함으로 인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 것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얼굴 앞에서 드려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그들이 편리한 대로 드린 것이다.
이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4장에는 이들의 제사가 나온다.
가인은 농부였으므로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목자였으므로 양 새끼로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이로 인하여 가인은 화가 나서 결국 나중에 그의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일 정도로 화가 났을까?
그것은 그의 제사를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나?
그것은 아벨과 달리, 다른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다른 제사라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답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온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이 드린 제사는 믿음으로 드린 제사이다.
반면 가인이 드린 제사는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라 자기 의로 드린 제사였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으로’는 어떤 믿음인가?
그것은 곧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리 화려하고 그 제물이 최고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여 거의 몽환적인 예배를 드려서 감정의 최고조를 누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를 위한 예배일 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가인은 바로 이런 자기의 義로 제사를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
자기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제사였는데 그 제사를 받지 않자 그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사랑하는 동생은 죽어야 할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린 것이나, 가인이 최선의 제사를 드린 것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외형적인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껍데기만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명한 불은 번제단의 불이어야 한다.
그 불은 모든 제물을 태우는 역할을 한다.
제물을 태우는 것은 곧 사람의 모든 죄를 그 제물에 전가하여 그 죄를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죄를 태우는 불이 아니라 자기가 편리한 대로 아무 불이나 사용하였던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다 같은 불이기에 사람은 분별할 수 없을지라도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은 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번제단의 불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한다.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예배는 그래서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의 궁극적인 차이점도 몰랐다.
그래서 그 차이를 엉뚱한 데서 찾으려고만 하였다.
그 원인을 삶에서 찾아 헤매었으며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것에 착안하여 ‘가인과’를 ‘가인의 삶’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예배는 단순하다.
그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면 된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 예수가 없는 나의 의와 열심, 온갖 3A로 치장한 무화과 옷을 입고 드리는 예배는 사실 예배가 아니다.
아무리 초라하고 빈약하며 볼품없을 지라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서 드리는 예배만이 참된 예배이다.
나는 그동안 어마어마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나의 예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저 감정을 자극하는 감동적인 예배, 잘 디자인 된 화려한 예배, 주님과의 교제가 아닌 나의 일방적인 예배에 지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수가성 여인이 찾던 야곱의 우물이었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생수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인 복음을 주셨다.
나는 그렇게 복음을 통하여 영생을 얻었다.
그것이 내게는 일생일대의 최대의 사건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답과 아비후가 드린 다른 불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나아가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의 차이도 몰랐습니다.
이런 나는 마땅히 심판 받아 죽어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나를 진멸하지 않으시고 징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 앞에서 감격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를 주님의 보혈과 은혜로 다시 살리셨으니 그저 감사뿐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역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앙꼬 없는 찐빵이 의미가 없듯, 예수 그리스도 없는 예배 역시 의미 없음을 확인하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