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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 제일병원 중환자실. 빼곡히 들어찬 침대마다 괴로운 신음을 흘리거나 미동조차 없는 중환자들이 즐비했다. 그 중 익한의 침대 앞에,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챠트를 뒤적이며 말했다.
“CT상 뇌출혈이 세 곳에서 나타났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3일 안에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뇌사상태가 될 가능성이 커요.”
구 산의 교복은 군데 군데 익한의 피로 얼룩져 있는 상태였다. 구 산은 애써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
“수술은 불가능한 겁니까?”
“지금 상태에서 수술을 진행해봤자 뇌에 손상만 더해줄 뿐입니다. 일단 항생제 투여하고 수혈도 마쳤으니 상태가 호전되기만을 바랄 수밖에요. 1주 뒤에 재검사해보도록 하죠.”
“네…….”
눈썹을 덮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구 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익한은 산소마스크에 의지해 제법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머리를 감은 붕대엔 검붉은 피가 흥건히 묻어나 있었다. 챠트를 덮은 의사가 마지막으로 익한의 상태를 점검하고 자리를 뜨려할 즈음, 멀리서 익한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한아!”
익한의 부친 유 중호 총리와 계모 고 결희 여사였다. 허겁지겁 달려온 유 중호는 아연실색하며 뒷목을 잡았다. 구 산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아저씨?”
뒤늦게 구 산을 발견한 유 중호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너, 너는 산이 아니냐?”
“네… 안녕하셨어요.”
유 중호가 잔뜩 예민해진 상태로 구 산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국무총리로 언론에 명성이 자자했지만, 하나 뿐인 아들에게만큼은 누구보다 관대한 그였다. 익한을 낳자마자 세상을 뜬, 그의 생모가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너야? 네가 우리 익한이를 이 지경으로!!”
“진정하세요. 가해자들은 지금 경찰서에 있습니다….”
“가해자들? 그럼 한 놈이 아니란 말이냐? 내 이놈들을 그냥!!”
잡힌 멱살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구 산이 똑바로 그를 마주봤다. 이번만큼은 김 한수가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해야 했다. 구 산은 여전히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아니요. 익한이를 저렇게 만든 건 김 한수란 놈 한명입니다. 제 말 꼭 명심해주세요. 김 한수…, 그 녀석만 확실히 처벌해주십쇼. 부탁드립니다.”
***
서초경찰서. 오른팔에 깁스를 감은 박 은솔과 김 한수가 나란히 앉아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담당형사는 아직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몰랐기에, 평범한 패싸움으로 치부한 채 두 사람을 훈계했다. 박 은솔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이어진 김 한수의 발언은 그들에게 적잖은 혼란을 가져오기 충분했다.
“아저씨, 저는 잘못 없어요. 은솔이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박 은솔이 벙찐 얼굴로 김 한수를 바라봤다.
“너 무슨 헛소리야?”
“맞잖아! 은솔이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뒤에서 유 익한을 치라고!!”
“이 자식이 진짜!”
참다못한 박 은솔이 왼손으로 김 한수의 멱살을 잡자 지켜보던 담당형사가 중재에 나섰다.
“야야야! 너네 여기까지 와서 쌈박질이냐?”
김 한수는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저씨 이것 좀 보세요! 은솔이가 이렇게 절 협박했다니까요?”
그에 한탄섞인 한숨을 내쉰 형사가 둘 사이를 억지로 갈라놓으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진술서나 똑바로 써.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그 무렵 경찰서 중앙에 위치한 서장자리에 전화가 걸려왔다.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경찰서장이 마른 입을 축이며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다 이내 벌떡 일어나더니 잔뜩 기합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예, 총장님! 예? 예예… 김 한수요? 예… 익한이를요? 아, 예. 알겠습니다. 예.”
경찰서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진술서를 작성 중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대뜸 물었다.
“김 한수가 누구야?”
김 한수가 움찔하며 전데요, 하고 말하자, 별안간 혀를 내두른 경찰서장이 담당형사에게 일침을 가했다.
“김형사 저 자식 바로 구속영장 발부해. 조사 필요없으니까 그냥 쳐넣으라고.”
***
유 익한이 없는 대헌고는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교사들의 얼굴엔 간만에 화색이 돌았고, 학생들의 돌방행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방과 후 옥상에서 벌어지는 도박판도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 무료한 분위기에 지루해진 준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만 할란다.”
준영이 나가자 나머지 사내들도 줄줄이 옥상을 빠져나갔다. 정예멤버들에게 유 익한의 빈 자리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컸다. 게다가 그들 역시 가양공고와의 싸움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빨 빠진 사자무리처럼 교정을 지나는 정예무리를 보며 지나가던 사내들이 쑥덕거렸다.
“유 익한이 없으니까 쟤네도 별 거 아니구나.”
“그러게. 근데 익한이는 좀 어떻대? 너 걔랑 같은 반이잖아.”
“글쎄? 담임도 쉬쉬하는 것 같고, 며칠째 얼굴 한 번 안 비추는 거 보면 뭐 혼수상태나 그런 거 아냐?”
대헌고에서는 유 익한의 부상을 공공연히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와전되어 과장된 소문이 퍼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걔 머리에서 피가 철철 났다더라.”
“진짜? 의외네. 유 익한은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나는 후폭풍이 무섭다. 왜, 예전에 지문고도 구 원 졸업하고나서 바람잘 날 없었잖아. 안티로 따지면 유 익한이 구 원보다 한 수 위지.”
사내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 무렵 대헌고가 속한 서초구 소속의 고교 일진회에서 대헌고를 겨냥한 보복을 논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소는 역삼동의 한 룸카페. 유 익한이 나타나기 전까지 서초구의 정점이었던 화랑상고 천 지우가 그 주동자였다. 주축멤버로는 문경고의 한 을, 명일고의 조 상수 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3학년으로 하급생인 유 익한에게 당한 기억이 한 번 이상 있는 사내들이었다.
“김 한수 그 자식 사고칠 줄 알았어. 옛날부터 이중인격에 싸이코패스라고 소문이 자자했잖아.”
“우리야 뭐 감사할 따름 아니야? 눈엣가시 같던 유 익한을 제거해줬으니.”
“그 새끼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냐? 서초구에만 아마 열 명은 넘을 거다.”
사내들이 앞다퉈 그의 뒷담화를 늘어놓자, 잠자코 듣고 있던 천 지우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가 머리를 쓸어올리자, 이마에 선명히 남은 흉터가 눈에 띄었다.
***
늦은 밤. 무리와 떨어져 집으로 향하던 준영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그는 누구보다 유 익한을 동경하는 사내였다. 익한을 따라 중학교 때부터 피우던 말보루 라이트를 하루아침에 맨솔로 바꿀 정도로 말이다. 2학년 때 익한과 같은 반이 되며 누구보다 기뻐했던 그였다.
준영이 대로변을 지나 골목 어귀에 들어섰다. 다 피운 담배를 하수구 아래 버리고 터덜터덜 걷던 그의 뒤에 매서운 속도로 누군가 따라 붙었다.
“악! 씨발, 누구야!!”
그 날 밤, 대헌고 정예멤버들 모두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팔이 부러지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게다가 대헌고 학생들만을 노린 일명 ‘삥뜯기’도 성행을 부리기 시작했다. 유 익한을 시기한 타학교 학생들의 소심한 복수였다.
***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난 구 슬이 방에서 나와 신발장에 서있는 구 산을 발견했다. 그는 편안한 운동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구 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 어디가?”
구 산은 도둑질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어? 으응, 잠깐 친구 좀 만나러… 오빠가 김치찌개 끓여놨으니까 반찬 몇가지 해서 먹어.”
“…혼자 먹기 싫은데. 안 가면 안 돼?”
구 슬이 뾰루퉁한 얼굴로 보채자 구 산은 난감함 표정을 지었다. 요 며칠 익한의 병문안 때문에 귀가가 늦었던 터라 구 슬 혼자 집을 지키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 슬에게 익한의 상태를 알릴 순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익한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구 산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올게. 미안….”
***
고요한 병실. 익한은 1인실로 옮겨진 뒤에도 벌써 일주일째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의 담당의사는 3일 안에 깨어나지 않으면 뇌사상태가 될 거라 말했지만, 다행이도 아직 뇌의 신경은 살아있는 상태였다. 의사는 그것이 오로지 익한의 의지로만 가능한 일이라 했다. 재검사를 마치고 검사실에서 나온 의사가 전보다 평온해진 얼굴로 운을 뗐다.
“신기할 정도로 회복이 빠릅니다. 뇌출혈이 일어났던 곳 모두 피가 거의 빠진 상태에요. 이 상태라면 굳이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언제쯤 깨어나는 겁니까?”
“아마 곧 의식이 돌아올 겁니다. 하지만 뇌에 충격이 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언어장애나 기억장애가 나타날 수도 있어요.”
구 산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다 이내 허리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익한의 담당의사도 가볍게 목례한 후 자리를 떴다. 나랏일로 바쁜 유 중호 총리는 한때 익한의 단짝친구였던 구 산에게 그의 옆을 지켜달라 부탁했었다. 구 산은 유 중호에게 검사결과를 알리기 위해 아이폰을 꺼냈다.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는지 신호음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예, 아저씨. 저 산입니다. 익한이 검사결과가 나와서요.”
한편, 익한의 병실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두꺼운 후드에 캡모자를 눌러쓴 노 아진이었다.
“병신… 잘난척은 혼자 다 하더니.”
아진은 누워있는 익한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익한의 부상이 고소할 만도 하건만, 왠일인지 아진은 못견디게 분한 표정이었다.
“너 이렇게 누워 있는 동안 나는 더 강해질 거야. 그러니까 너무 늦기 전에 일어나라고. 내 앞에서 이러고 있으면 쪽팔리지 않냐?”
마치 대답을 기다리듯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아진이 이내 돌아섰다.
“잘 있어라.”
그 무렵 구 산은 유 중호와 통화하며 익한의 병실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그럼 들어가십쇼. 정중히 인사한 구 산이 병실문에 손을 뻗은 순간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양쪽 다 조금은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얼떨떨한 표정인 구 산에 반해, 노 아진은 담담하게 그를 주시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가 말로만 듣던 구 원의 친동생, 지문고의 새로운 짱 구 산이란 걸 말이다. 짧지만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먼저 시선을 피한 아진이 병실을 빠져나가자, 구 산은 거리낌없이 병실에 들어왔다.
“어?”
그 때 거짓말처럼, 익한이 눈을 떳다.
***
혼자 식탁에 앉은 구 슬이 낮은 한숨을 뱉었다. 구 산이 한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하는 구 슬이었지만, 역시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다. 어서 먹어, 슬아. 빈 자리에 앉아 있는 구 산을 상상한 구 슬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슬아, 오빠랑 고기먹으러 가자! 그런데 불쑥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자신의 손을 잡는 유 익한이 떠오르자, 구 슬은 쥐었던 젓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2년 전까진 흔한 일상이었던 일들이 왜 상상으로만 가능한 일이 된 걸까.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구 슬은 오늘도 혼자 이렇게 되뇌었다.
***
“왜 그랬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구 산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주시하던 익한은 한동안 대답 대신 눈만 깜빡거렸다. 구 산은 보채지 않고 기다렸다. 오랜 침묵 끝에 익한이 입을 연 것은, 구 산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을 쯤이었다.
“너랑 슬이를, 전처럼 대할 자신이 없었어.”
“…….”
“미안하다.”
유 익한의 목소리엔 진심이 묻어났다. 나약해진 몸을 따라 마음 또한 약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구 산은 그런 익한의 태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때 내가 너한테 느낀 배신감. 이제와서 다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없어질 것 같냐? 그렇게 도망가서 편했어? 지난 2년간 나는 증오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어. 깨끗이 씻어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너 하나 편하자는 이기심으로 넌, 슬이랑 나를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야.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어.”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하지마! 너답게 행동하라고! 난 잘못한 거 없다고, 뻔뻔하게 굴어! 그 때처럼!!”
구 산은 거의 울부짖듯 기염을 토해냈다. 2년 전 그 날을 떠올린 탓이다. 또 한 번 병실에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충혈된 눈으로 익한을 내려다 본 구 산이 이내 휙 돌아섰다. 익한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곧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구 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퇴원해라. 그러고 있는 것도 너답지 않아.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이던 구 산이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병실을 나갔다.
“…슬이 잘 부탁한다.”
줄곧 천장만 향하던 익한의 시선이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구 산의 뒤를 쫓았다.
***
하섬고등학교. 황 규봉이 전학온 이후로 일주일이 넘게 지났다. 그는 비교적 평범하고 온순하게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처음엔 그를 경계했던 같은 반 학생들과도 금방 친해질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의 큰 키와 범상치 않은 분위기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오죽하면 하섬고 일진회에서 그를 영입하자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규봉아, 누가 밖에서 부르는데?”
책상에 앉아 창밖을 주시하던 규봉에게 한 사내가 다가와 말했다. 왠지 겁에 질린 듯한 말투였다. 규봉은 사내가 가르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량해보이는 사내들이 무리지어 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리지구나 에스퍼가 그랬듯 앙팡테리블도 엄청난 속도로 전개되어 20화 안에 뚝딱 완결을 지을 예정입니다.
개인적으로 드라마보다 영화를 좋아하고 장편소설보다 단편소설을 좋아하거든요.
그렇다고 허무한 건 저도 싫구요...적당히 아쉬운 정도? 헤헤
제가 직장인인 관계로, 출퇴근 시 버스에서랑 짬날 때마다 아이폰으로 소설을 쓰고 있어요.
그리고 집에 와서 졸린 눈 부릅뜨고 새벽까지 열심히 정리한 소설을 이렇게 올리는 거랍니다ㅠㅠ
그러니까 눈팅 미워요! ㅋㅋ
전편에 댓글 남겨주신 요술사님, 라 둠님, 도팔이님, 꽃피는봄날님 모두 감사드리구요!
완결까지 으쌰으쌰 함께 해요 우리♡
업쪽=앙팡
첫댓글 앙팡
앙팡하니까 앙증맞아보여요ㅋㅋㅋ읭?오해 다 풀려서 다행이다ㅠ^ㅠ..이번편 재미있게 잘보고 가요!
앙팡 잘보고갑니다!
앙팡! 재밌게 잘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