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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백중 지장기도 예수재 법회
無比스님 법문
-2017년8월28일-
예수재(豫修齋)
‘내가 죽고 난 뒤에 혹시 내 자녀들이 제대로 49재를 지내줄까’ 하는 것이 염려가 되어서 ‘그래도 내가 뭔가를 알 때 나의 49재는 스스로 미리 지내고 죽으련다’고 지내는 것이 예수재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철이 든 사람들은 평소에 공덕을 많이 닦고, 선행을 많이 하면서 잘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예수재라는 명목을 가지고 재를 지내고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가 불법을 알고 이 정도라도 이치를 알 때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공덕을 닦고 선행을 많이 쌓자’고 하는 중간점검이기도 하고 경고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도 한 번씩 숙제도 내주고 검사도 하고 경고도 하고 경책도 하고 물어 보기도 하듯이 예수재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동안 지장기도라든지 예수재라든지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늘 새롭게 경각심을 일으켜서 잘 해나가야 됩니다.
죽음을 전제로 하는 불교의식
천도재(薦度齋)는 선망부모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그분들이 지금 어디에 어떻게 태어나서 사시든지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고 해도 좋은 데서 잘 지내시고 일이 잘 풀리시도록 기도드리는 의식입니다.
예수재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나의 죽음을 의식하고 자신을 위해 미리 지내는 천도의식입니다. 예수재를 지내든지, 돌아가신 망자를 위해서 기도를 하든지 그 모두가 죽음이 전제가 된 불교의식입니다.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철든 사람이다
불교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는 것 못지않게 죽음이 큰 문제지요.
불교의 출발이 죽음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린 나이에 사문유관(四門遊觀)라고 해서 사대문을 나서서 세상을 굽어보고 세상 사람들의 삶을 살피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병든 사람도 보고, 늙은 사람도 보고, 죽은 사람도 보았어요.
늙어도 건강하고 병 없이 오래 살기만 한다면 괜찮겠고, 또 설사 병이 들었다 해도 그 병을 치료해서 좀 앓다가 낫고 건강하게 되고 한다면 병든 것도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아요.
누구나 다 감기에 걸리고 다치고 사고가 나도 회복이 되어서 살만하잖아요.
늙는 것도 건강만 하다면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늙은 사람은 늙은 사람대로 쏠쏠한 재미가 있어요. 손자 보는 재미, 늙은 사람들끼리 모이면 여러 가지 재밋거리가 많잖아요.
늙는 것하고 병든 것은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그런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누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부처님이 싯달태자 시절에 늙는 것도 보고 병든 것도 보았지만 마지막에 죽는 것을 보고는 ‘이 문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니까요.
인생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다 올 수 있는 죽음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알고는 싯달태자가 비로소 철이 들었어요. 그게 불과 십대 때입니다. 이십 전후에 인생의 죽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는 그 때 벌써 철이 든 것이지요.
그래서 그만 왕자의 자리도 다 버리고, 그 호화로운 모든 향락을 다 버리고 출가하려고 했는데, 부왕께서 ‘후손 하나라도 남겨놓고 출가를 해야지 그냥 출가하면 우리 대(代)가 끊어지지 않느냐?’ 하고 싯달태자를 설득합니다. 외동아들 하나인데 설득할만한 거리가 되잖아요.
‘가비라국을 누가 맡으란 말이냐?’
그래서 할 수 없이 태자는 장가를 가게 되고, 부인을 맞이하게 되고, 자식을 두게 된 것입니다. 여러 해 지나서 자식이 하나 생겼어요. 자식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습니다. 출가하려고 기다리다가 생긴 자식이니까 ‘저것 장애꾼 저것 때문에 내가 여태 출가를 못했다’ 해서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장애했다’ 첫마디 나온 말이 ‘라훌라’라는 말이고 그것이 아이 이름이 되어 버렸어요. 라훌라라는 인도말을 우리말로 하면 ‘장애’입니다.
여러분도 장애 두 셋씩 가지고 있지요? 처음에는 좋았지만 그 장애 때문에 얼마나 많이 고생했습니까? 얼마나 많이 긴긴 밤을 지새우고, 눈물도 많이 흘리고 가슴 아픈 일도 많았습니까? 자식이 왜 석가모니에게만 장애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역시 장애예요.
또 여러분도 누군가에겐 장애노릇을 했고, 여러분의 자녀들도 또한 장애고요.
제가 ‘사람들이 세상에 사는 것이 한 칠 팔십 프로는 자식을 위해서 소 노릇하고 말 노릇하고자식 때문에 그렇게 끄달려 산다’고 하니까 어느 분이 그래요.
“스님, 모르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은 백프로 자식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고 삽니다.” 거의 백퍼센트 자식 때문에 사는 거예요.
아마 이 자리에도 자식 잘 되라고 기도하러 오신 분이 적지 않을 겁니다.
자식은 장애예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름 참 잘 지었어요.
아무튼 이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가 불교의 출발이지요. 부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를 했고, 불교는 출발이 죽음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요즘에 ‘잘 죽기’ 이야기도 많지요?
이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자나 깨나 생각해야 돼요. ‘죽음은 언젠가 맞이할 일이고, 어느 순간에 올지 모르는 일이다’ 라는 사실을 좀 깊이 아는 사람 늘 생각하는 사람은 철든 사람이예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십전후에 벌써 철이 들었어요. 이십전후에 죽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철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철이 들었습니까?
아직도 저 뜬구름 같은 명예를 좇아서 얼마나 허우적댑니까?
날아가는 연기와 같은 재산을 위해서 얼마나 허우적댑니까?
생각하기도 싫은 인간의 감정을 좇아서 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합니까?
철이 안들어서 그래요. 우리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래요. 죽음이 눈 앞에 당도했다면 자식이 뭐며 명예가 뭐며 돈이 뭡니까? 아무것도 소용없잖아요.
아무것도 소용없다는 사실이 바로 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고 경고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철든 사람입니다.
선방에 가면요?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 붙이고 정진하라’ 그래요.
항상 어느 순간에 닥쳐올지 모르는 이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공부합니다.
그래서 공부가 잘 되는 거예요.
칼을 시퍼렇게 갈아서 옆에다 놓고, 만약에 졸음이 오면 칼로 무릎을 베서 피를 흘린다든지 하면서 잠을 쫓고 경책하고, 그것이 전부 죽음이 두려워서입니다.
죽음을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하나의 방법이예요.
어떤 사람들은 팔에다 죽을 사(死)자를 문신으로 새기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마에다 문신으로 새기기도 해요. 몸에 죽을 사(死)자를 문신으로 새기는 수좌들, 공부하는 사람들은 흔히 있습니다. 많이 봤어요.
항상 죽을 사(死)자를 보는 거예요.
‘아 죽음, 죽음. 우리가 이렇게 놀 수 있나? 편안하게 잠잘 수 없다. 호의호식 그것 찾아다닐 겨를이 어디 있느냐?’
죽을 사(死)자 같이 좋은 교훈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재 지내는 것이 뭡니까? 죽음이 두려워서 지금 예수재 지내는 것 아니예요? 뜻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사태평하게, 편안하게 ‘으레 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참석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다는 급한 마음으로 참석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 정도 급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 안 옵니다. 집에 앉아서 그대로 염불을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경을 읽든지 하지, 여기까지 올 시간이 어디 있어요?
차타고 오고가고 하는 시간에 염불 한 마디 더하지 죽음이 코앞에 닥쳤는데 어디 가고 말고 할 것이 있어요? 범어사 부처님이 무슨 영험 있어요? 내 죽음을 대신해 줘요? 어림도 없지요. 그거는 나하고 전혀 관계없는 거예요.
진짜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렇게 철들게 삽니다. 그런데 무슨 세속적인 오욕락(五欲樂)을 좇아서 그렇게 허우적거리겠습니까? 절대 그렇게 안 살지요.
선행을 더 무겁게 해야 한다
예수재의 교훈은 ‘내가 내일 죽을지 모르고 모레 죽을지 모르는데, 죽기 전에 다음 생을 위해서 지어야 할 선행과, 다음 생을 위해서 쌓아야 할 공덕을 이 순간 내가 살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내가 지어놓고 가자’ 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 동안 악행, 거짓말, 남 모함, 알게 모르게 부정하게 재산을 취한다든지 등등, 좋지 아니한 일 많이 하셨지요? 기억나지요? 선한 행도 많이 하셨습니다. 얼마나 하셨어요?
선한 행과 악한 행을 양쪽에 놓고 어느 쪽이 무거운가, 그것 한 번 계산해 봅시다.
옆 사람은 계산 못해도 자신은 환하게 자기 잘 잘못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 계산을 해볼 때 ‘아 이것 좋지 아니한 생각을 하고, 좋지 아니한 말을 하고, 좋지 아니한 행동을 한 것이 훨씬 무겁다’ 라고 생각이 들면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데 얼른 선행을 해서 공덕을 닦아 좋은 쪽이 더 무겁도록 해놓고 가야지요.
불자는 이러한 이치를 안 이상 조금이라도 선행이 더 무겁도록 해놓고 가야합니다.
선행이 가볍고 악행이 무거우면 어떻게 되겠어요? 갈 곳이 뻔하지 않습니까?
부처님 앞에 와서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참회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선행을 많이 하십시오.
부처님 앞에 참회하는 것보다 선행을 많이 하는 것이 훨씬 덕이 됩니다. 혼자 와서 참회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남을 위해서 선행을 닦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행을 해야 그쪽으로 중처편추(重處偏墜)라, 무거운 곳에 치우쳐서 떨어집니다.
나무토막을 잘라서 하늘에다 던지면 제일 먼저 떨어지는 것이 뿌리 쪽입니다.
똑 같은 굵기, 똑 같은 크기로 해서도 뿌리 쪽으로 떨어지는 것은 그 쪽이 더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죽어서 태어나는 것도 중처편추입니다. 무거운 곳에 치우쳐서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뭘 무겁게 해야 되겠어요? 선행을 무겁게 해야지요. 공덕을 무겁게 해야지요. 그래서 예수재를 지내는 것입니다. 공덕을 무겁게 하기 위해서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나쁜 짓 많이 한 것이 더 무거운데 큰일 났어, 큰일 난 줄 알아야 됩니다. 큰일 난 줄 알고 조금이라도 공덕이 무겁게 하고, 선행을 무겁게 해야 됩니다.
가장 좋은 예수재
토요일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다가 ‘오늘 법회 때 소개를 해야 되겠다’하고 제가 오려왔습니다.
60대 말기암 환자가 30년 식당일을 해서 모은 1억 재산을 장학금에 기부했어요.
이 사람은 예수재 잘 지낸 사람이지요. 이 사람이 불교를 아는지 기독교를 아는지 알 바 없어요.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예수재를 잘 지낸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식당일하면서 알게 모르게 안 좋은 일도 많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30년 식당일해서 모은 1억을 자기가 암에 걸려서 치료비가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어차피 죽을 이 몸 목숨 떨어지기 전에 그래도 선행을 좀 하고 가자’ 하고 기부했어요. 그야말로 일념돈탕제(一念頓蕩除)입니다. 한 순간에 악한 업 지은 것이 싹 사라져 버렸습니다. 물론 10억 가지고도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수준은 1억이면 평생 모은 전재산이니까 싹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재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인연 닿는 데마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 따라서 전부 인연 되는 대로 공덕을 닦아야 합니다. 진짜 예수재는 이렇게 지내는 것입니다.
회향의 공덕
흔히 우리가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천도재도 지내고, 칠칠재(七七齋)도 지내면서 별별 공덕을 짓습니다. 경전에 보면 공덕을 지은 것의 7분의 6은 지은 사람에게 돌아간대요.
아무리 부모의 이름으로 100억을 보시했다 하더라도 부모에게는 7분의 1만 돌아가고 7분의 6은 재를 지내는 자식에게 돌아가 버리는 거라고요.
천도재를 지내도 그 공덕은 거의 다 재 지내는 자식의 공덕이 되어 버린다면 뭡니까? 내가 해야 될 것 아니예요? 결국은 내가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돌아가신 뒤에 예를 들어서 100억을 내서 재를 지냈다, 복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그 공덕이 여러분에게 안 돌아가요. 자식이 했으니까 여러분 자식에게로 돌아갑니다.
결국은 내 공덕은 내가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 밑에 팔송에 사는 금년에 100세 된 노인이 있어요. 내가 아는 집인데 100세인데도 아주 건강해서 여행도 다녀요. 그런데 이 분은 어째서 그렇게 건강한가? 제가 여러 가지로 연구해봤더니 평소에 방생(放生)을 그렇게 많이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자식을 위해서하고, 손자를 위해서하고, 자식 생일, 손자 생일 무슨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방생을 하는 거예요. 자식을 위해서 손자를 위해서 방생을 그렇게 했는데 그 공덕이 자식에게 돌아가고, 손자에게 돌아갔는지 어쩐지는 아직 모르지요. 모두 젊으니까요.
그런데 본인이 이미 받았습니다. 100세가 될 때까지 지금도 건강하게 사신다니까요.
제가 누구네 집이라고 말하면 여러분 다 알 사람들입니다. 범어사 신도님인데 이 노보살님도 자식을 위해서 방생을 했는데 그 공덕이 벌써 살아서 자기에게로 돌아와 버렸어요.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는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내가 살아 있을 때 안하고 어떡합니까? 내가 직접 해야 됩니다. 그것이 예수재입니다. 그런 이치를 깨닫고 내 공덕을 내가 닦는 것이 진짜 예수재입니다. 그 보살님도 예수재를 평소에 잘 지낸 것입니다. 수십 년간 방생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렇게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거예요.
그런 것이 회향입니다. 회향(廻向)은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마음은 남을 위해서 했어요. 그런데 그 복이 누구에게 간다고요? 자기에게 갑니다.
그것을 화엄경에서는 선용기심(善用其心) 그 마음을 잘 쓰는 도리라고 했어요.
저도 오늘 이 예수재 지낸다고 보현행원품을 2천 권 찍어서 여러분께 나눠드렸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오늘 공부할 거예요.
여러분이 박수를 치니까 10분의 1은 공을 까먹었네 그냥 계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나도 이런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런 기회에 이 불교의 최고의 경전, 화엄경의 결론이며, 불교 팔만대장경의 결론인 이 알맹이와 같은 보현행원품을 여러분들에게 인연지어 드려야 되겠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오늘의 예수재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기회가 또 있겠어요? 범어사에서 그렇게 법문 함부로 청하지도 않습니다. 겨우 1년에 한 번 아니면 두 번 청해야 많이 청하는 거예요. 그럴 때 마다 저는 제 나름대로 공덕을 닦습니다.
일기일회(一期一會)
불교에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 있지요. 그런 제목의 책도 있는데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단 한 번 뿐인 기회, 단 한 번 뿐인 만남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만났잖아요. 그것이 일기일회입니다. 단 한 번뿐인 기회요. 단 한 번뿐인 만남입니다.
오늘이 칠월칠석(七月七夕)이잖습니까? 내년에 칠월칠석 날 우리가 만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내년의 몫입니다. 금년 이 순간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일기일회입니다.
단 한 번뿐인 기회이고 단 한 번뿐인 만남이라고요. 그것을 누가 부정하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을 때, 또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알 때, 부처님을 통해서 불법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우리가 들어서 잘 알고 있을 때 복을 지어야지요.
우리 인생도 단 한 번 뿐입니다. 다음 생에 태어나지만 어디 가서 어떻게 태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확인된 것은 일기일회, 한 번 뿐인 인생이라고요. 이 소중한 인생을 우리가 헛되이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죽음은 째깍 째깍 1초1초 다가오고 있는데, 그 누구도 째깍 째깍하고 내 뒤를 쫓아오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누가 피하겠어요? 석가모니도 못 피해서 산으로 도망갔는데, 산으로 도망갔다고 피했나요? 80 돼서 열반에 드셨지요. 결국은 80 돼서 열반에 드셨어요. 그런데 하물며 범인이야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런 이치를 알 때 복을 지어야지요.
우리 불자들은 참 복 많은 사람들이예요.
불자들은 가나오나 복 지으라하고, 가나오나 재 지내라하고, 예수재 지내라하고 ‘우리인생은 생로병사(生老病死)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더라도 이런 기회에 복 짓고 공덕 닦아라’ 그러지 않습니까?
옛날 신라 때, 경주에 양지스님이 장육사라고 하는 큰 절을 지었어요. 신도들이 와서 울력을 하고, 흙을 나르고 기왓장을 나르고 돌을 나르면서 절을 지었어요. 그러면서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이 스님이 신라향가를 하나 지어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노래에 맞춰서 흙을 나르고 돌을 나르고 일하도록 한 것이 있는데요.
그 향가가 신라 향가 가운데 아주 유명한 향가입니다.
공덕을 닦읍시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오다 오다 오다
과거에도 왔고, 지금도 왔고, 미래에도 또 온다.
오다. 서럽더라.
와 보니까 우리 인생은 서럽더라. 고해(苦海)더라. 이런 저런 일로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고통이 많습니까? 궁극에 가서는 또 죽어야한다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밥맛이 떨어지고 즐거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좋은 남편도 보기 싫고 좋은 아내도 보기 싫고 자식도 귀찮고, 명예, 돈 다 귀찮은 거예요.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 뭐 그렇게 좋게 생각될 것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좋게 생각이 든다면 아직 죽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죽음을 조금이라도 깊이 느끼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재미없고 밥맛도 없어요.
그래야 철든 사람입니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고 하는 것은 고해(苦海)다 화택(火宅)이다 하는 말입니다.
서럽더라 우리네여
그 인생이 고해고 화택인 것은 우리 모두가 똑같다는 말입니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 다 똑같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하도 하수상해서 벼슬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고통이 먼저 옵니다. 우리나라는 워낙 불행한 국민들이 살아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는 모두 자살 안하면 감옥에 가고 아니면 자식이 감옥에 가고 형제자매가 감옥에 가고 전부 그러고 있습니다. 얼마나 철이 안 들었으면 그렇게 살겠어요? 있고 없고, 높고 낮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서럽더라 우리네여, 우리 모두가 다 서러운 존재입니다. 고해와 화택에 허덕이는 중생들이라는 말입니다.
공덕 닦으러 오다.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아무 것도 없다 그저 공덕 닦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첫 절이 오다 오다 오다 인생은 끊임없이 온다는 말입니다.
오다 서럽더라. 와 보니 서럽습니다.
서럽더라 우리네여,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이 고해요 화택 속에 허덕이는 중생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된다? 공덕을 닦는 길 밖에 없다. 죽음이 곧 코앞에 닥쳤으니까 이런 이치를 알 때, 불법 만났을 때 그래도 우리가 공덕을 조금이라도 닦고 가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불법 만났을 때 공덕 못 닦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공덕 닦을 길이 없어요.
불교에서는 가나오나 ‘복 지어라 공덕 닦아라 수행해라’ 그 말 밖에 더 있습니까?
그것이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 같지만, 궁극에는 전부 자기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자기를 위하는 일입니다.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신라 시대에, 불교가 한참 성할 때 모든 국민들이 다 부르던 노래입니다.
일기일회인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보현행원품 48페이지를 펴세요.
이것을 점안하고 내려가야지요.
48페이지 한글로 된 보현행원품. 제일 서분, 그 한 단락을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소리가 크면 클수록 공덕이 더 됩니다.
제일. 서분
그때에 보현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거룩한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여러 보살과 선재동자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가령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들이 불가설 불가설 불찰 미진수 겁 동안 계속하여 설명할지라도 끝까지 다하지는 못할 것이니라. 만일 그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려면 마땅히 열 가지 크나큰 행원을 닦아야 하느니라.”
범어사에서 요즘 화엄대산림법회 하는 것 잘 아시지요?
참석 잘 하십니까? 참석 잘 하셔야 돼요.
좋은 인연입니다. 범어사는 본래 화엄경 가르치려고 의상스님이 지은 절인 것 아시지요? 범어사에 다니시면서 화엄경 모르면 범어사 불자가 아니예요.
그만치 부담이 있습니다. 그만치 우리에게는 숙제가 있습니다. 처리해야할 숙제가 있어요.
화엄경 끄트머리에 이렇게 보현행원품이 마지막 품으로 있는데요.
‘여래의 공덕은 가령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이 불가설 불가설 불찰 미진수 겁 동안 계속하여 설명할지라도’ 다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려면 ‘열 가지 크나큰 행원을 닦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제이 정종분 일 한 단락을 또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고성염불십종공덕(高聲念佛十種功德) 아시지요?
염불을 할 때 큰소리로 읽을수록 높은 소리로 하면 그 공덕이 더 많다는 것을 아셔야 돼요.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제이. 정종분
1.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
“그 열 가지 서원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함이요, 둘째는 부처님을 우러러 찬탄함이요, 셋째는 널리 공양함이요, 넷째는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함이요, 다섯째는 남의 공덕을 따라 기뻐함이요, 여섯째는 설법하여 주기를 청함이요, 일곱째는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머무르시기를 청함이요,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움이요, 아홉째는 항상 중생들을 수순함이요, 열째는 모두 다 회향함이니라.”
선재동자가 아뢰었다.
“큰 성인이시여, 어떻게 예배하고 공경하오며, 내지 어떻게 회향하오리까?”
여기서 보현보살이 제목만 열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열 가지 제목 하나하나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하고 선재동자가 보현보살에게 물었습니다.
그 밑에는 전부 각각의 제목마다 자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 설명도 법회에서 자세히 하나하나 설명해주면 더 명확하게 알 수가 있는데 그럴 인연이 부족하니까 모두 숙제로써 천 번 정도 읽기를 권합니다. 천 번 정도 읽으면 저절로 그 뜻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열 가지 서원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함이요. ‘모든 부처님께’ 라고 했어요.
대승불교, 바람직한 불교, 가장 우수한 불교에서는 특히 화엄경에서는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가 차별이 없다’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원형이예요. 불교의 큰 원칙입니다.
그래서 ‘여러 부처님께’ 라고 하는 말은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배하고 공경한다는 말입니다.
예배하고 공경한다. 첫째 나하고 가까운 인연들께 먼저 예배하고 공경해야 됩니다.
그것이 차츰차츰 이웃으로 번져나가고 도반에게 번져나가고 많은 사람에게 번져나가는 것이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예의지국이라고 하지만 말세가 되어서 그 예의도 땅에 떨어져서 없어요.
사람을 예배하고 공경해야 됩니다.
둘째는 부처님을 우러러 찬탄함이요. 그랬습니다.
높이 우러러서 찬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2600년 전에 열반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우러러 찬탄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에 살아있는 바로 옆에 있는 부처님을 우러러 찬탄하는 것, 내 가족 부처님을 우러러 찬탄하는 것, 내 이웃 부처님을 우러러 찬탄하는 것이 급한 일이예요. 그래야 복을 받지요. 그것이 공덕이 되는 것이지요.
‘석굴암 부처님, 범어사 법당에 있는 부처님, 아 훌륭하다, 훌륭하다’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아무리 석굴암 부처님을 우러러 찬탄하고 잘 생겼다 어쨌다 해도 절을 천 만 배해도 커피 한잔 안 사줍니다. 찬물 한 그릇 안 떠줘요.
그런데 바로 옆의 사람보고 정말 마음을 담아서 ‘오늘은 아주 얼굴이 좋으시네요. 오늘 범어사에 가서 좋은 법문 들으셨나봐’ 진정으로 이렇게 찬탄해 봐요.
당장에 커피 한잔이 돌아옵니다. 또 잘 하면 점심까지 얻어먹어요.
그리고 절이 서툰 사람에게는 안내해서 식당에 가서 공양도 같이 먹도록 한다고요.
우러러 찬탄하는 일, 이것이 보통 좋은 공덕이 아닙니다.
셋째는 널리 공양함이요.
바로 공양이 나오네요. 공양(供養)이 뭐예요?
남을 배려하는 일입니다.
자리를 배려하고, 앞에 가기를 배려하고, 운전할 때 먼저 가기를 배려하고, 자기는 조금 뒤에 물러서고 양보해주고, 이것이 공양입니다. 무슨 먹을 것만 가지고 공양이 아니고요.
이바지할 공(供)자, 모든 부분에 있어서 남을 향해서 이바지해 주는 것이 전부 공양입니다.
넷째는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함이요.
서두에 ‘선행한 무게가 얼마며 악행한 무게가 얼마냐’고 물었지요.
제가 근래에 와서 몸도 아프고 나이도 먹고 하면서 그 무게를 가만히 계산해 보니까 그 선행의 무게를 더 무겁게 하려면 아직 턱도 없어요. 더 많이 해야 될 것 같더라고요.
여러분도 죽음은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는데 제대로 닦아놓지 못하고 악행의 무게가 더 무거운 상태로 간다손 쳐봐요. 겁나지 않습니까? 겁나지요.
그러니까 이런 이치 알았을 때 부지런히 닦아야 됩니다.
부지런히 공덕 지어야 하고 자기 업장을 참회해야 합니다.
다섯째는 남의 공덕을 따라 기뻐함이요.
한국 사람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병이 있지요? 저도 이 병이 있는데 한국 사람은 다 있어요. 그런데 그 병이 도질 때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화엄성중 화엄성중’ 하면서 자신을 누릅니다.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인간의 본능이 물론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배 아파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못된 본능이고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 하고 막 짓누릅니다.
남의 공덕을 따라서 기뻐하는 일이 그와 같이 어렵습니다.
남 시기질투하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하더라도 뿌리 뽑아야 돼요. 시기 질투는 뿌리 뽑고 남의 공덕을 따라서 기뻐해줘야 됩니다.
크게 뭔가를 안하고 그것만 해도 아주 훌륭한 공덕이 됩니다.
여섯째는 설법하여주기를 청함이요.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자꾸 물어서 들으려고 하고 알려고 하고 깨우치려고 해야 합니다.
설법하여 주기를 청하는 일이지요.
일곱째는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머무시기를 청함이요.
모든 생명 모든 사람이 세상에 오래 살기를 청하는 거예요.
좋은 비방(秘方)이 있으면 그것도 가르쳐주고, 약도 가르쳐주고 병원도 가르쳐주고 아주 훌륭한 의사가 소문났으면 ‘무슨 병에는 어떤 의사가 제일이다’ 하는 것도 알려주고 좋은 약이 있으면 그것도 소개해주는 일이 구체적으로 오래 살기를 청하는 일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모든 생명이 오래 살기를 청하는데, 살생을 왜 하겠습니까? 우리 불자들 살생 안하지요? 대답 소리가 약한데? 살생 좀 하는모양이네? (바퀴벌레는) 그것도 하면 안돼요.
어떻게 하더라도 밖에다 던지지 제 자리에서 싹 죽이고 그렇게 하지 마세요.
만약에 사람보다 좀 더 훌륭한 지능을 가진 외계인이 와서 ‘뭐 이런 게 있어?’ 하고 여러분을 탁 죽이면 어떻게 하겠어요? 지금 외계인들이 많이 거쳐 갔어요.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른 위성에서 우리 지구인들을 환히 꿰뚫고 있어요. UFO가 수없이 왔다 갔습니다. 그 흔적이 많습니다.
바퀴벌레고 파리고 절대 죽이지 마세요.
우리 불자들은 그런 것 하는 게 아니예요.
모든 생명이 세상에 오래 살도록 해 줘야 합니다.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움이요.
훌륭한 사람을 따라 배우는 거예요. 요즘은 배우려고 생각만 하면 얼마나 조건이 좋습니까?
범어사에 화엄경 하는 초하룻날 오고, 또 열흘마다 지장기도 오고하면 듣고 배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보현행원품이라는 숙제를 내줬기 때문에, 이것을 여러분이 한 1만 번 읽으세요. 한글로 된 것만 1만 번 읽고, 한문도 읽기 좋도록 음을 달아놨기 때문에 이것도 읽고 싶으면 한문을 읽어도 좋아요.
아홉째는 항상 중생들을 수순(隨順)함이요. 중생을 수순해 줘요. 중생을 수순하는 것이 부처님을 수순하는 일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수순하는 일이고 지장보살을 수순하는 일입니다.
뭘 한다고 하면 무조건 반기 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뭘 한다하면 무조건 반기 드는 거예요. 무조건 반대부터 하지 말고 수순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수순해야 공덕이 되고 복이 됩니다.
열째는 모두 다 회향함이니라.
내가 닦은 이 모든 이런 공덕을 전부 내가 다 받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마음이 선용기심(善用其心)입니다. 그 마음을 잘 쓰는 일이예요.
그러니까 부모를 위해서 예를 들어서 ‘천만원짜리 재를 지냈다’ 하면 육백만 원은 자기가 지은 공덕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에게로 회향이 되어 버린다고요. 선망부모에게는 미안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부모 이름으로 내가 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로 회향이 돼요.
모든 것이 그렇게 회향이 되게끔 되어 있어요. 내가 한 모든 좋은 일은 전부 다른 사람이 받도록 말도 그렇게 하고 마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7분의 6은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기가 막힌 이치 아닙니까?
이와 같이 보현행원품이 훌륭한 내용이고, 나머지는 큰 글자로 이렇게 번역을 잘 해놨으니까 여러분들 한 만 번쯤 읽을 생각하십시오.
불교에서 독송하는 책이 몇 가지 있지요. 법화경 보문품, 금강경, 반야심경, 보안장 등등이 있는데 옛날 우리 스님들은 전통적으로 보현행원품을 독송했습니다.
진짜 알짜배기는 보현행원품이라는 뜻이예요.
오늘부터 보현행원품을 독송하도록 하십시다.
오늘 법문 여기까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