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솔 / 김재진
발레리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라고 노래했지만
바람이 불면 나는
마당에 펴놓은 파라솔을 접어야 한다.
태풍이 온다는데 접지 않고 내버려둔 파라솔을
길 가던 누군가 문 따고 들어와 접어놨다.
문 열어놓고 다니는 나를 알고 있는 누구인지
지나가던 우체부나 검침원인지
내 집을 제 맘대로 들고나는 사람들께
경외심을 느낀다.
생명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무단침입에 대한 경외이니 이건
그들과 나 사이에 금 긋지 않은
경계 없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다.
봐라.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지 않느냐.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파라솔까지 접어주니.
접히는 것들은 다 아름답다. 너와 나 사이에
금 그어놓은 뭔가를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한 수 접어준다는 말이다.
한 수 접고 모르는 척 네 편이 된다는 말이다.
태풍에 파라솔 챙기듯 접어주며
내 편, 네 편 없다는 걸 보여준다는 말이다.
-『헤어지기 좋은 시간』, 고흐의별, 2023.
감상 – 시집 발문을 쓴 윤일현 시인은 김재진 시인을 소속 집단의 규칙이나 질서에서 스스로 벗어난 자발적, 적극적 아웃사이더로 꼽는다. 시인이 좋아하는 고흐도 대표적 아웃사이더라 할 만하다. 고흐 자의에 의한 선택도 있겠지만 타의에 의해 배척되고 소외된 면도 함께 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1890년 초 브뤼셀 전시에 <붉은 포도밭>(1888)을 포함해서 작품 여섯 점이 출품되었을 때 고흐 그림과 나란히 전시할 수 없다며 적대적 반응을 보인 동료 화가도 있었다. 이에 로트레크가 고흐 편을 들어 결투를 신청하고서야 전시가 이뤄질 수 있었다. 그해 고흐가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 전 생전에 팔린 그림이 <붉은 포도밭> 한 점이었으니 고흐가 얼마만 한 냉대 속에 살았는지 짐작이 된다.
김재진 시인은 「파라솔」에서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한 구절인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인용하며 말문을 연다. 바람이 불든 안 불든 살려고 얘를 써야 하지는 않느냐 식의 무수한 패러디를 낳고 있는 유명 시구다. 시인 역시 우스갯말인 양, 바람이 불면 마당의 파라솔을 접어야 한다고 했다. 사실 바람 불 때 파라솔을 접는 일은 당장 필요하고 서둘러 행해야 할 일이긴 하다.
하지만 시인이 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따든지 담을 넘어와서 파라솔을 접어주었다는 것이다. 장독이나 화분이 깨진다든지 비싼 파라솔이 찢어진다든지 하는 피해를 막아준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허락받지 않은 무단침입이 꺼림칙할 법한데 거꾸로 시인은 금 긋지 않고, 경계를 두지 않는 아름다운 행위로 받아들인다. 이웃 처지에 대한 안쓰러움에다 부주의한 주인이 딱하기도 해서, 오해나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애써 나섰을 그 마음을 정(情)으로 읽은 것이다.
접힌 파라솔을 두고,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 한 수 접어준다는 말이다”는 삶의 경구를 떠올린 것은 시인의 특별한 언어감각이다. 또한 지나친 오지랖이나 간섭일 수도 있는 것을 탓하지 않고 남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마음 자세에서 비롯한 표현이기도 하다.
한 수 접어준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더 잘할 수 있고 앞서갈 수도 있는데 남이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줌으로써 균형을 맞추고 그래서 더 재미나게 어울릴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숨어 있다는 걸 깨치게 된다. 앞서 브뤼셀 전시에서 고흐 그림을 깎아내린 사람은 화가인 앙리 드 그루다. 아버지 뒤를 이어 화가 집안이며 그림 실력도 인정받고 있지만 고흐에 관한 일은 그의 명성에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누구든 자신의 시각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한 수 접어준다는 마음으로 고흐 그림을 봐주었다면 뒷날의 부메랑은 면했을지 모른다. 물론 두 수, 세 수 접어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들을 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의 그런 고집도 필요하다고 또 한 번, 한 수를 접어주는 사람 모습이 그립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