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한일주교교류모임 워크숍 자료(교류 25주년 기념)
2023. 11. 14.
‘우리는 하느님 나라 시민입니다!’
1995년 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6차 정기총회와 세계청년대회가 개최되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아시아 지역 첫 사목방문이 이루어졌습니다. 각국의 주교회의 대표들이 참석한 FABC 총회에는 일본의 故하마오 주교님과 한국의 故이문희 대주교님이 참석하여 한일 주교단 교류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두 분 주교님은 가장 가까운 두 지역교회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오랜 인연이 있는 두 나라 사이에 드리운 정치적, 민족적 응어리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인으로 더 가깝게 만날 필요성과 의향을 공유하였습니다.
두 주교님은 각자 본국으로 돌아가서 다른 주교님들에게 그 뜻을 전하고 한번 만나 대화를 시작해 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문희 대주교님은 당시 안동 교구장이었던 박석희 주교님과 서울교구 보좌주교였던 저에게 하마오 주교님과의 만남을 전하고 우선 대화의 물꼬를 트면 어떻겠냐고 문의하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필요성에 공감하며 적극 찬성의 뜻을 밝혔습니다. 한일 주교들의 교류는 이렇게 소수 주교만의 사적인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만남은 1996년에 동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이문희, 박석희, 강우일 세 주교가 참석하였고, 일본 교회에서는 하마오, 오카다 두 주교가 참석하였습니다. 그 후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만남이 불가능해지기 전 2018년까지 매년 11월 둘째 주간에 정례적인 만남을 이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양국 간의 역사적 인식의 간극을 좁히려는 의도로 출발하였으나 햇수를 거듭하고 양측 참석 주교들 간의 인간적인 친분과 이해가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주교들만의 교류가 아니라 양국 교회의 더 폭넓은 교류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양국 주교단의 교류 모임이 거쳐온 여정과 관련해서는 25주년 기념 자료집에 여러 내용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기에 오늘 이 자료에서는 제가 양국 교회의 관계 증진에 관련된 한 가지 개인적이나 역사적 사실을 증언함으로써 양국 주교단의 교류가 심화하고 발전해 온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저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고 존경하던 한 분의 주교님 이야기를 해드리고자 합니다. 1984년부터 2005년까지 대전 교구장으로 21년 봉직하셨던 故경갑룡 주교님의 이야기입니다. 경 주교님은 서울 보좌주교로 10년 일하신 동안 서울교구청에서 함께 일하였기에 서로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경 주교님은 한일주교교류모임이 이미 여러 해 진행된 후 한국 주교단 측 연락 창구로 일하던 저에게 개인적으로 긴히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경 주교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본 교회가 사제 성소 부족으로 어려운 상황인 것 같은데, 대전교구의 경우 성소가 비교적 풍부하니, 대전교구의 성소를 일본 교회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오. 그런데 사제로 서품된 사람을 보내면, 한국 교회의 풍토에 이미 젖어있어, 분위기가 전혀 다른 일본 교회에서 일하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신학교 고학년 학생을 선발해서 일본의 신학교에서 2-3년 양성을 받고 일본 교회의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한 다음 일본 교회가 원하고 본인이 그곳에서 일하기를 수락한다면, 일본 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파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경 주교님은 일본 교회의 사정을 이미 상당히 숙지하고 계셨고, 정확히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오오이타 교구를 거명하시며, 당시 교구장이셨던 미야하라 주교님에게 당신 뜻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즉시 미야하라 주교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드렸습니다. 미야하라 주교님이 원하신다면, 오오이타 교구에 학부 과정을 마친 대전교구 신학생을 두 명 정도 파견하여 일본 신학교에서 남은 양성 과정을 밟게 한 다음, 미야하라 주교님이 지켜보시고 괜찮겠다고 판단하시면 오오이타 교구에서 장기간 선교 사제로 활동하도록 파견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드렸습니다.
미야하라 주교님은 너무 감사한 제안이라고 흔쾌히 받아들이셨습니다. 다만, 오오이타 교구는 후쿠오카 신학교에 신학생을 보내게 되어 있는데, 대전교구 신학생을 후쿠오카 신학교에 입학시키려면, 후쿠오카 신학교 이사진인 큐슈 지역 다른 교구 주교님들의 양해를 구해야 하기에 돌아가서 상의하고 답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후 저는 이 일을 잊고 있었는데, 몇 달 후 경 주교님이 제게 다시 연락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오랜 생각 끝에 진심으로 일본과의 화해를 결심하고 과감한 제안을 했는데, 왜 일본 측에서는 묵묵부답인지 물으셨습니다.
그때 경 주교님은 저에게 당신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교님의 엄지는 약간 변형되어 있었고, 손톱 대부분이 까맣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다친 상처 같았습니다. 그 상처는 당신이 중학생 시절 생겼다고 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말엽 일본 정부는 일본만이 아니라 조선에도 징용령을 내려 학생들도 수업을 제쳐놓고 공장에 동원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경 주교님도 15세 소년이었지만 공장에 동원되어 금속을 깎는 선반공 일을 했습니다. 어린 학생의 몸으로 숙련되지 않은 기계를 다루다가 어느 날 실수로 엄지손가락이 기계에 끼였습니다. 손가락이 잘리지는 않았지만, 엄지가 크게 다치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상처는 아물었으나, 손가락이 변형되고 남아 있는 손톱은 피멍으로 까맣게 변색하여 평생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경 주교님은 그 새까만 엄지손가락을 제게 보여 주시면서 말했습니다. “손가락 상처는 옛날에 아물었지만, 이 손가락을 볼 때마다 나는 일본에 대한 안 좋은 감정, 원한 같은 것이 올라와, 일본에 대한 내 감정은 평생 아주 부정적이었소. 하지만 명색이 주교로서 언제까지나 이런 미움을 안고 살아가는 게 아니다 싶어 큰 결심을 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화해의 손을 내밀었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으니 어찌 된 일인지 좀 알아봐 주면 좋겠네요.”
저는 그다음 한일주교교류모임에서 미야하라 주교님과 만나 지난번 경 주교님의 제안에 대한 가부 간의 답변이 왜 없으셨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경 주교님이 어떤 경위로 그런 제안을 하셨는지 주교님의 개인적인 체험과 신학생 파견 제안에 담긴 주교님의 마음과 내적인 의향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러자 미야하라 주교님은 대단히 송구해 하며 왜 답변이 지연되었는지 사정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미야하라 주교님은 경 주교님의 신학생 파견 제안을 들으신 다음 즉시 큐슈의 다른 주교님들과의 회의에서 대전교구 신학생의 후쿠오카 신학교 전학에 대한 의견을 물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큐슈의 지역 주교님들 사이에서 후쿠오카 신학교가 지금까지 외국인 학생을 입학시킨 적이 없으니 조금 신중하게 숙고한 후에 결정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잠시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경 주교님 제안의 배경 설명을 듣고 보니 너무 송구한 마음이 들고 즉시 돌아가서 다시 큐슈 주교님들과 논의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미야하라 주교님은 큐슈 다른 주교님들과 이 사안을 재론했고, 경 주교님의 의도를 전하자 전원이 만장일치로 대전교구 신학생의 후쿠오카 신학교 전학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 후 경 주교님은 대전 신학교 학장에게 오오이타 교구 파견을 위해 신학부 4년을 마치고 2년의 대학원 과정을 앞둔 두 신학생을 선발하도록 당부하셨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두 신학생은 후쿠오카 신학교에서 2년의 남은 과정을 마친 다음 사제로 서품되고 오오이타 교구에서 사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양국의 다른 교구에서도 성소의 나눔이 차츰 증가하고 지금은 일본의 여러 교구에서 한국인 사제들이 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한일주교교류모임 25년 역사가 맺은 하나의 작은 열매 이야기입니다.
한일 양국의 주교들은 이 25년의 만남과 교류를 통하여 역사 문제만이 아니라, 양국 교회가 국경을 넘어 오늘의 세계 속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도전과 과제를 함께 고민하고 공동의 이해와 연대를 모색해 왔습니다. 양국의 주교들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핵발전소의 중대한 위험성과 한계를 공유하고 가톨릭교회의 대응 방안을 함께 추구하였습니다. 또한 갈수록 우경화되는 오늘의 정치적 풍향과 국가주의적 추이 속에서 양국 교회 주교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적 정의를 추구하며 오늘날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 왔습니다. 저는 최근 평범한 가톨릭 지성인에게서 일본의 주교단이 ‘후쿠시마 원전의 ALPS처리수 해양 방출에 관한 엄중한 항의 성명’과 ‘관동대지진조선인학살에 관한 성명’을 발표해 주신 데 대하여 대단히 감사하는 마음을 느꼈다는 소감을 들었습니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은 각자가 살고 있는 시대와 현장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 바오로 6세 교종께서는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단순히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들을 베푸는 일에’(현대의 복음 선교 17항)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거룩한 힘을 통하여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의 활동, 그들의 삶과 구체적인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현대의 복음 선교 18항)이며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기준, 가치관, 관심 사항, 사고방식, 영감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을 변화시키고 바로잡는 것’(현대의 복음 선교 19항)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은 한편으로는 교통수단의 발전, 사회 홍보 수단의 발전, 교역의 증대,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협력 체계와 결속을 통하여 갈수록 가까워지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국가 지도자들은 자국의 근시안적 이익에 사로잡혀 국경과 무역의 장벽을 높이 쌓으며 타국을 배제하고 비난하고 적대시하며 군비 증강을 통한 긴장과 대결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 미, 일 3국 정부가 군사적 동맹 체제를 강화하는데 병행하여 중국, 러시아, 북한도 이에 대응하는 동맹 관계를 추구하고 있으니 새로운 냉전 시대가 도래하고 세계 평화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긴급하고 중대한 위기는 하나밖에 없는 우리 공동의 집 지구가 온난화로 인해 차츰 기후재앙의 임계점에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속하는 지구 온도의 상승을 초국가적인 공동의 노력과 협조로 멈추지 않는 한 지구 생태계 전체가 공멸할 수밖에 없는 인류사상 초유의 위기 상황을 우리는 직면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인류에게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국가들의 긴밀한 협력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할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는 인류와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재앙이니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최우선적 관심과 연대로 이에 대응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제국과 국가가 등장했다가 사라졌습니다. 국가는 사라져도 개인과 민족과 인류 공동체는 지속되어 왔습니다. 국가가 인간을 우선하는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계승하고 살아온 지역문화와 역사는 오늘의 우리 정체성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 일본인이기 전에 그보다 먼저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들이고 지구촌의 시민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한 국가의 국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의 국적을 지닌 하느님 나라 시민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임을 자랑하는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받은 이도, 할례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콜로새 3,9-11)
제주에서 강우일
* 한국 주교회의와 일본 주교회의는 제25회 한일주교교류모임 기간 중 11월 14일(화)에 강우일 주교와 마쓰우라 고로 주교가 발표한 자료를 각각 양국 주교회의 홈페이지에 게재하기로 하였습니다.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30590?gb=K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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