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조국사를 찬양하며 짱깨지방국 국사를
바른 국사라고 가르치고 배우는 서울대 사학과....쓰레기지 머야 ?
“축적하려면 곡식을 생산해야 하고 곡식을 생산하려면 물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수차(<U>水車</U>)로 물을 푸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물을 두고도 관개(灌漑)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개 수차로 물을 푸는 방법은 <U>길고(桔槹)<SUP>5800) </SUP></U>에서 시작되었는데, 동한(東漢) 때에 이르러 비로소 번차(翻車) 제도가 생겨났고 조송(趙宋) 이후로 그 법이 성행했다는 것을 《관개도보(灌漑圖譜)》 등의 책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옛날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이 기구를 만들도록 명하여 토질이 메마른 곳에서 시험해 보도록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문종 대왕(文宗大王)께서는 양서(兩西)에 습지가 많기 때문에 수전(水田)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이에 하교하시어 제도를 상고해서 수차를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또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일찍이 연경(燕京)과 심양(瀋陽)에서 수차를 이용하여 논에 물을 대는 법을 보시고는 수차 열 개를 만들게 하여 팔로(八路)에 반포하려 하셨는데 지금 그 기계가 호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종(英宗) <U>경신년<SUP>5801) </SUP></U>에는 고 상신 유척기(兪拓基)와 고 판서 김시형(金始炯)의 말을 채택하여 장차 우리 동방에 만세토록 이익을 끼쳐주려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은 탓으로 그 일이 마침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정조 42권, 19년(1795 을묘 / 청 건륭(乾隆) 60년) 2월 18일(경오) 2번째기사
“호조, 선혜청, 양향청의 당상들이 진달한 여러 가지 조목에 대해서는, 계하(啓下)한 다음 수상(首相)이 즉시 품재(稟裁)하여 재정을 담당한 신하에게 전적으로 위임해서 성과를 거두도록 하면 아주 좋겠습니다. 그리고 흉년을 대비하는 대책으로는 사전에 조치를 취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금년에는 제도(諸道)에서 재실(災實)에 대한 보고가 올라온 다음에 한꺼번에 계산하여 획급해 주되, 두 번 세 번에 이르도록 추가로 청하면서 시일을 낭비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아울러 곧 결세(結稅)의 수량을 각 도에 배당하여 내려보냄으로써 금년 안으로 마무리 지을 방도로 삼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의견이 매우 좋으니 이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방도로는 농사에 힘쓰는 것이 제일이다. 만일 관개법(灌漑法)을 시행하면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의 우려가 없을 것이다. 듣건대 미국은 순전히 농사를 장려했기 때문에 가장 부유하며 각 국에서 다 그 곡식을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수차(<U>水車</U>)로 밭에 물을 대는 제도가 없으니 어떻게 수재와 한재를 막겠는가?”
하였다.
고종 25권, 25년(1888 무자 / 청 광서(光緖) 14년)
일본에선 13세기~14세기에 보편화된 수차를 이용한 관개법이
이씨조선엔 '1888년'에도 없었음.
외국에서 공장기계돌릴 때
이씨조선엔 나무수차도 없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개념없고 가난 빈곤을 덕으로 생각하던 이조시대는 결국, 일본에 팔려버릴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내면이고 실체이다.
이조말기에 선비(유생)라는 작자들이 단발령에 반대하여 전국의 유관을 근거로 전국적으로 데모를 벌였는데
머리카락을 자르려면 내 목을 잘라라....하고... 당시 왜놈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모함 3대를 만들어
미국을 이기기 위해 공격하던 때 였다...
첫댓글 고려시대때 말과 마차가 다니던길은 이조시대 500년동안 폐쇄되고 모든 백성이 오직 개나리 봇짐에 짚신신고 걸어서 걸어서 팔도를 다니든 시대....이조시대~
기가 막히고코가 막힙니다...그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