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음식의 청정 경(M151)[piṇḍapātapārisuddhisuttaṃ]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는 해거름에 홀로 앉음에서 일어나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2. "사리뿟따여, 그대의 감관은 맑구나. 피부색은 깨끗하고 빛나는구나. 사리뿟따여, 그대는 요즈음 어떤 머묾으로 많이 머무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요즈음 자주 공(空)에 들어 머묾니다."
suññatāvihārena kho ahaṃ, bhante, etarahi bahulaṃ viharāmī
suññatā: emptiness. (f.)
(*) 이 표현은 <공(空)에 대한 작은 경(M121)>에서도 주제로 나타나는데, 공에 들어 머묾의 의미를 정의해 줍니다. ☞ http://cafe.naver.com/happybupdang/2245
"장하구나, 사리뿟따여. 장하구나, 사리뿟따여. 그대는 요즈음 자주 대인(大人)의 머묾으로 머무는구나. 사리뿟따여, 이것이 대인의 머묾이니 그것은 바로 공이다."
mahāpurisavihāro eso, sāriputta, yadidaṃ — suññatā.
mahāpurisa: a great man. (m.)
3. "사리뿟따여, 그러므로 여기 비구가 만일 '내가 요즈음 자주 공에 들어 머물리라.'라고 원한다면 그 비구는 다음과 같이 숙고해야 한다.
'내가 마을로 탁발을 들어가는 길이거나 그 지역에서 탁발을 하거나 탁발을 마치고 돌아올 때, 거기서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에 대해 욕구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나 적의가 내 마음에 있는가?'
chando vā rāgo vā doso vā moho vā paṭighaṃ vāpi cetaso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내가 마을로 탁발을 들어가는 길이거나 그 지역에서 탁발을 하거나 탁발을 마치고 돌아올 때, 거기서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에 대해 욕구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나 적의가 내 마음에 있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그런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버리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내가 마을로 탁발을 들어가는 길이거나 그 지역에서 탁발을 하거나 탁발을 마치고 돌아올 때, 거기서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에 대해 욕구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나 적의가 내 마음에 없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희열과 환희심으로 유익한 법들을 밤낮으로 공부지으면서 머물 수 있다."
4.~8. "사리뿟따여, 다시 비구는 다음과 같이 숙고해야 한다. '내가 마을로 탁발을 들어가는 길이거나 그 지역에서 탁발을 하거나 탁발을 마치고 돌아올 때, 거기서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에 대해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에 대해 … 혀로 인식되는 맛들에 대해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에 대해 … 마노로 인식되는 법들에 대해 욕구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나 적의가 내 마음에 있는가?'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내가 마을로 탁발을 들어가는 길이거나 그 지역에서 탁발을 하거나 탁발을 마치고 돌아올 때, 거기서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에 대해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에 대해 … 혀로 인식되는 맛들에 대해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에 대해 … 마노로 인식되는 법들에 대해 욕구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나 적의가 내 마음에 있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그런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버리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내가 마을로 탁발을 들어가는 길이거나 그 지역에서 탁발을 하거나 탁발을 마치고 돌아올 때, 거기서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에 대해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에 대해 … 혀로 인식되는 맛들에 대해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에 대해 … 마노로 인식되는 법들에 대해 욕구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나 적의가 내 마음에 없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희열과 환희심으로 유익한 법들을 밤낮으로 공부지으면서 머물 수 있다."
9. "사리뿟따여, 다시 비구는 다음과 같이 숙고해야 한다.
'나에게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은 제거되었는가?'
pahīnā nu kho me pañca kāmaguṇā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에게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은 제거되지 않았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에게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은 제거되었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희열과 환희심으로 유익한 법들을 밤낮으로 공부지으면서 머물 수 있다."
10. "사리뿟따여, 다시 비구는 다음과 같이 숙고해야 한다.
'나에게 다섯 가지 장애[五蓋]들은 제거되었는가?'
pahīnā nu kho me pañca nīvaraṇā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에게 다섯 가지 장애들은 제거되지 않았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에게 다섯 가지 장애들은 제거되었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희열과 환희심으로 유익한 법들을 밤낮으로 공부지으면서 머물 수 있다."
11. "사리뿟따여, 다시 비구는 다음과 같이 숙고해야 한다.
'나는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들[五取蘊]을 철저하게 알았는가?'
pariññātā nu kho me pañcupādānakkhandhā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는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들[五取蘊]을 철저하게 알지 못했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들[五取蘊]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는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들[五取蘊]을 철저하게 알았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희열과 환희심으로 유익한 법들을 밤낮으로 공부지으면서 머물 수 있다."
12. "사리뿟따여, 다시 비구는 다음과 같이 숙고해야 한다.
'나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았는가?'
bhāvitā nu kho me cattāro satipaṭṭhānā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지 못했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았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희열과 환희심으로 유익한 법들을 밤낮으로 공부지으면서 머물 수 있다."
13.~19. "사리뿟따여, 다시 비구는 다음과 같이 숙고해야 한다.
'나는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을 …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을 … 다섯 가지 기능[五根]을 … 다섯 가지 힘[五力]을 …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를 …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를 …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닦았는가?'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닦지 않았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닦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닦았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희열과 환희심으로 유익한 법들을 밤낮으로 공부지으면서 머물 수 있다."
20. "사리뿟따여, 다시 비구는 다음과 같이 숙고해야 한다.
'나는 명지와 해탈을 실현했는가?'
sacchikatā nu kho me vijjā ca vimutti cā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는 명지와 해탈을 실현하지 못했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명지와 해탈을 실현하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여 '나는 명지와 해탈을 실현했다.'라고 안다면 그 비구는 희열과 환희심으로 유익한 법들을 밤낮으로 공부지으면서 머물 수 있다."
21. "사리뿟따여, 누구든지 과거세의 사문-바라문들이 탁발음식을 청정히 했다면, 그들은 모두 이와 같이 거듭거듭 반조해서 탁발음식을 청정하게 했다. 사리뿟따여, 누구든지 미래세의 사문-바라문들이 탁발음식을 청정하게 할 것이라면, 그들은 모두 이와 같이 거듭거듭 반조해서 탁발음식을 청정하게 할 것이다. 사리뿟따여, 누구든지 지금의 사문-바라문들이 탁발음식을 청정하게 한다면, 그들은 모두 이와 같이 거듭거듭 반조해서 탁발음식을 청정하게 한다.
사리뿟따여, 그러므로 그대는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거듭거듭 반조해서 탁발음식을 청정하게 하리라.'라고. 사리뿟따여, 그대는 참으로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사리뿟따 존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첫댓글 우선은 해피스님께서 소개한 공에 대한 경을 하나 올립니다.
사리붓다가 공에 든다는 말에 부처님이 긍정하는 내용이지요.
실론섬님께서는 용수가 공에 대해 완성했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각자의 오래 된 경험이니 굳이 토론으로 끌어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용수의 중관쪽에 기울어 있으므로 님께서 더 대승불교적이란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긴 글이시니 앞에서 꿰뚫어 안다고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보시는 것처럼 꿰뚫어본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5장애가 제거 되지 않았으면 제거 되지 않았다고 아는 수준입니다.
그러면 안다면 없애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걸 수행이라고 하죠.
그냥 앉아서 꿰뚫고 알면 저절로 해탈되는 것이 아니라요.
4성제에서 멸은 공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글을 읽어보면 꿰뚫어만 보면 무상고무아는 자동으로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주장도 보입니다.
하지만 노력하고 없애고 방비하면서 자신을 청정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리붓다는 공에 든다는 말로 자신의 성취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정진을 말하면서 더욱 청정하게 할 것을 말합니다.
실론섬님께서 초기경전에 공이란 말이 없다하시니 있다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공이란 비어있다 또는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데도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님께서 용수가 공을 총정리했다는 의견 가지고 뭐라할말은 없지만 그러면 님께서 대승적인걸 가지고 오히려 남한테 뒤집어 씌우신다는 겁니다.
만약 실론섬님 말씀대로 무상고무아만 사용한다면요.
어떤 비구가 숲에서 해탈수행을 하다가 마을에 대해 말할때 부처님은 고작 그것은 무상하니 괴로움이고 무아라고밖에 말하지 못할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러면 해탈은 유아인가?란 질문은 할 수 있겠죠.
그러면 용수 형태의 묻지마 무아론이시니 둘 다 무아라고 하실 건데요.
둘 다 무아라서 해탈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집니다.
누가 물으면 같은 동영상 재생 계속 돌아갑니다.
그러나 공에 대한 작은 경에서 부처님은 진실한 청정한 공이 현현된다고 합니다.
공의 실재를 말하고 있구요.
공은 초기경전에 엄연히 있는 말입니다.
수행과 청정함을 실질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방편입니다.
일단 정리좀 합니다.
저는 초기경전의 공을 말하면서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공이야기 하나도 안했습니다.
제가 대승불교라고 하기에 용수가 완전히 정리했다고 하시는 님께서 대승불교적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무상고무아 등이 다 공이라고 말한적 없습니다.
텅빈세상의 경과 공에대한 작은공 등에 나와 있는 대로 텅 비어 없다는 것을 공이라고 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공(空)’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변하고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실체가 아니다.‘라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디가니까야의 뽓따빠다의 경과 연관해서 말해보면.(다른 경의 표현도 혼합되었음)
초선을 증득하면 초선의 미묘하고 참된 산냐(相, 인식)가 생겨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초선을 증득하면 초선에 맞는 반야의 무더기가 생겨난다.(궁극의 반야가 아니므로 반야의 무더기, 일부로 표현했습니다.)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초선의 산냐도 무상한 것으로 실체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초선에 머물러 탐착하고 즐기지 말고 종기요, 고름이요 질병으로 생각하여
더욱더 수행 정진하여 2선을 증득하라 하셨습니다.
2선을 증득하면 초선의 미묘하고 참된 산냐는 사라지고 2선의 더 미묘하고 참된 산냐(相, 인식)가 생겨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초선이 실체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차려서 계속 수행한 결과 초선의 산냐(相, 인식)를 버리고, 없애고, 소멸시켜서 텅비게 만든 것입니다.
실체가 아니기에 버리고, 없애고 소멸시켜서 텅비게 만든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 ‘공(空)’이라 생각합니다.
2선에서 ‘공(空)’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깊게 사유해보면
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초선의 산냐((相, 인식)는 소멸시켜 ‘공(空)’이 되었지만
초선에 비해서는 더 참되고 미묘한 산냐는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상수멸의 완전한 청청한 공의 현현과 비교해서는
아직 덜 청정한 공, 작은 공(궁극의 반야가 생긴 것이 아니고 반야의 일부가 생겼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뽓따빠따의 경에서 다시 또 2선을 증득하더라도 그것이 실체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차려
다시 3선을.. 4선을... 공무변처를....~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상비비상처마저 실체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차려
버리고 없애고 소멸시켜라, 즉 텅비게 하라. ‘공(空)’하게 하라.
비상비비상처에서 생겨난 높은 반야마저도 궁극이 아니므로
마지막 미세한 의도마저 소멸시켜 상수멸을 성취하여(궁극의 반야를 성취하여) 해탈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욕계에서 초선을 거쳐 2선~비상비비상처까지 무상하고 변하고 괴로운 것이며 실체가 아니므로
이에 집착하지 말고 버리고 소멸시켜 없애라고 한 다른 표현이 ‘공(空)’하게 하라. ‘공(空)’에 들었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수멸의 완전한 청정한 공에 있어서도 이 ‘공(空)’은 욕계~비상비비상처까지의 산냐(인식, 相)를 버려 텅비게 만든 것이지만 다른 측면으로 생각하면 ‘공(空)’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궁극의 반야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아무것도 없는 ‘공(空)’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다시 작은 의미로 나타난 경의 내용이
숲의 인식에서 마을로 다시 도시로 다시 국가로 확대하여 ‘공(空)’으로 설명한 것도
위와 마찬가지 측면에서 이해합니다.
또한 더 작게는 오온이나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도 또 이들이 접촉하여 생기는 식도
실체가 아니다.라는 표현을 달리 한 것이 ‘공(空)’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공(空)’이란 단어에 무슨 특별한 의미나 다른 것이 있는가? 라는 생각보다
저는 공함 = 실체가 아님으로 이해해서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쌈빠자나 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며
각 단계에서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고
또 그것을 없애는 방법이 선정이며
선정을 더욱 확대하면 위빠사나, 사마타, 또 싸띠라고 생각하여 경전을 읽고 실천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승의 ‘공(空)’에 관해서는 잘 모릅니다.
배운 적도 없고 아는 것이라곤 실론님이 틈틈이 설명하시는 것 참조하여 조금 아는 수준이지만
생소하고 모르는 용어들- 세속제, 승의제, 삼승 기타 -로 머리만 아프고 해서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니까야를 니까야 자체 그대로 이해할려고 노력하며
정 힘들 때 아비담마나나 기타 논서나 다른 분들의 견해를 참고하며 또 질문하고 배웁니다
물론 이러한 대화나 댓글에서도 많이 배웁니다.
기왕 초기불교를 공부하시는 분이면 대승의 교리를 알려고 하거나 알아서 접목하려고 하거나
또는 비판할려고 하는 것보다 순수히 초기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훨씬 수승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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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참괴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욕계에서 초선을 거쳐 2선~비상비비상처까지 무상하고 변하고 괴로운 것이며 실체가 아니므로
이에 집착하지 말고 버리고 소멸시켜 없애라고 한 다른 표현이 ‘공(空)’하게 하라. ‘공(空)’에 들었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위의 글에서처럼 소멸된 상태가 공이란 겁니다.
그런데 실론섬님께서 자꾸 무상을 갖고 와서 내용을 늘리면서 공하고 같다고 한다는 겁니다.
무상은 '고정불변하지 않음 또는 영원하지 않음'의 의미밖에는 안됩니다.
따라서 '멸'의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공이 무상이면 4성제 고집멸도에서 '멸'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론섬님께서 자꾸 대승불교를 언급하시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실론섬님 스스로 용수의 반야중관이 공을 완성했다는 말씀이나 내용들이 대승불교적인데도 말입니다.
저는 초기경전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말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