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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리마,쿠스코,우루밤바,마추피츄
4일차
쿠스코와 잉카문명 관광
- 산토도밍고 대성당(코리칸차), 태양의 신전, 12각돌(칸코)
- 삭사이와만 잉카요새, 탐보마차이 등
5일차
마츄피츄행 기차 탑승 (올란타이 탐보역)
- 아슬아슬한 계곡을 지나 지구상에서 600년 동안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츄피츄로 이동
마츄피츄 관광
- 태양의 신전, 왕녀궁전, 신선한 광장, 해시계 태양의 불, 콘도르의 신전과 감옥 등
기차역으로 이동 후 쿠스코(올란타이)행 기차 탑승
6일차
리마 관광
- 리마대성당, 대통령궁, 아르마스광장 등
페루(Peru)
정식 국가명은 페루 공화국(Republica del Peru)이다. 면적은 약 128만㎢로 한반도의 6배이다. 인구는 약 3000만명, 수도는 리마(Lima)이며 주요 도시로는 남부 고산도시 아레키파(Arequipa), 북부 해안도시 투루히요(Trujillo),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Cusco)등이 있다.
남아메리카 중부 태평양 연안에 있는 나라로, 15세기 케추아족(族)의 잉카 제국(帝國)이 탄생한 곳이다. 1532년 에스파냐의 F.피사로에게 정복된 후 300년 동안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았으며, 1821년 독립 선언 후 1824년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였다.
정식명칭은 페루공화국(Republica del Peru)이다. 북쪽으로 에콰도르·콜롬비아, 동쪽으로 브라질, 남동쪽으로 볼리비아, 남쪽으로 칠레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 태평양에 면한다. 아마존 유역에 대한 연고권을 둘러싸고,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페루 부왕령(副王領)에 같이 속했던 에콰도르와 독립 이후부터 영토 분쟁을 계속하고 있다. 남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고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이다. 다인종국가로, 고대 잉카 문명의 꽃을 피웠던 인디오가 전체 인구의 반 가까이 되지만 정치·경제의 실권은 전체 인구의 12%에 불과한 백인이 장악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25개주(region)와 1개 지역(provincia)으로 되어 있다.
페루의 국기
빨강·하양·빨강이 세로로 배치되어 있고, 관공서용에는 하양 띠에 문장이 들어 있으며 민간용 국기에는 문장이 들어 있지 않은데 모두 공식 국기이다. 최초의 국기인 1820년대의 것은 파랑 바탕에 노랑 태양이 들어 있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나 이후 몇 년간 빨강과 하양을 기본으로 하여 수차례 형태가 바뀌었다. 그러다가 1825년 독립하여 국민의회가 시작될 때 현재의 새로운 국기를 제정하였다.
페루 독립의 영웅인 아르헨티나 장군 호세 산 마르틴의 군대가 스페인에 맞서기 위해 피스코에 상륙했을 때, 붉은 날개와 흰 가슴을 가진 아름다운 새가 갑자기 날아올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빨강과 하양은 이 새에서 유래한다. 문장은 특산인 라마·기나나무, 국부(國富)의 상징인 풍요각(豊饒角) 등으로 되어 있다.1825년제정
1540년, 페루를 정복한 스페인 용병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남부의 거점 도시 아레키파에 발을 딛는다.
그리고 백색 화산암으로 성당과 교회, 광장을 세웠다.
21세기 아레키파의 풍경은 피사로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과 다르지 않다.
정식 국가 명칭은 페루 공화국(República del Perú)이다. 면적은 1,285,216㎢로 한반도의 약 6배이다. 인구는 2011년 기준으로 2924만 명이다. 수도는 리마(Lima)이며, 리마 인구는 약 850만 명이다. 페루의 주요 도시는 남부 고산도시 아레키파(Arequipa, 87만), 북부 해안도시 투루히요(Trujillo, 63만), 정글 지역의 이키토스(Iquitos, 49만), 잉카제국 수도였던 쿠스코(Cusco, 35만) 등이다
쿠스코(Cuzco)
안데스 산맥에 자리 잡은 옛 잉카의 수도, 쿠스코 전경
쿠스코
페루 남부의 고원도시로 잉카제국(15세기 초~1532)의 수도였다. 해발 3400m에 위치해 있으며, 알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세워진 많은 신전, 궁전지의 석벽이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쿠스코 북쪽에 있는 우루밤바 계곡에는 피사크, 올란타이탐보, 위냐이와이나, 마추픽추 등의 유적군이 있다.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 있는 쿠스코(City of Cuzco)는 잉카 제국의 지배자 파차쿠텍(Pachacútec, 1438∼1471) 시대의 도시로 종교적·행정적 기능을 갖춘 독특하고 복합적인 중심 도시였다. 농업과 수공업, 공업 구역은 중심부와 확실하게 구분되어, 산업 구역이 도시를 둘러싼 형태였다. 스페인은 16세기에 이곳을 정복한 후, 도시의 기본 구조를 보존하면서 잉카 도시의 폐허 위에 바로크 양식 교회와 궁전을 건설하였다.
페루 안데스 산맥 중앙에는 잉카 제국의 마지막 수도인 쿠스코가 있습니다. 쿠스코는 잉카인들이 썼던 케추아 어로 ‘배꼽’이란 뜻을 갖고 있지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3360m에 건설된 쿠스코는 잉카 제국의 수도로서 정치, 행정,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쿠스코에 건설된 광장과 궁전, 황금으로 장식된 정원 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침략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고 엄청난 보물이 사라진 지금의 쿠스코는 잉카인들이 살았던 당시와는 많이 다르답니다.
황금의 도시 쿠스코를 점령한 에스파냐군은 엄청난 보물을 빼앗고 잉카인들이 지은 건물을 파괴한 뒤, 그 위에 자신들의 건물을 세웠습니다.
오늘날 쿠스코에서 볼 수 있는 광장, 교회, 수도원 등은 에스파냐 사람들이 새롭게 건설한 유적지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주춧돌을 비롯한 잉카 유적지 일부가 보존되어 있고, 잉카 문화와 에스파냐 문화가 만나 새로운 유적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잉카 제국은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을 지배한 고대 제국이에요. 어느 나라건 건국에 관련된 흥미로운 신화가 있지요? 잉카 제국에도 다음과 같은 건국 신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요.
잉카인들이 믿는 태양신 인티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문명을 전해 주기 위해 아들 만코 카팍과 딸 마마 오클로를 세상에 보냈어요. 둘은 쿠스코 동남쪽에 있는 지구 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인 티티카카에서 태어났어요. 만코 카팍과 마마 오클로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여러 곳을 찾아다니던 중 쿠스코가 내려다보이는 우아나카우 언덕에 도착했습니다.
언덕에 도착한 남매는 태양신에게서 받은 황금 지팡이를 던졌어요. 하늘을 향하여 날아가던 황금 지팡이는 지금의 쿠스코 중심에 떨어졌는데 그만 땅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요. 지팡이가 들어간 그 자리가 쿠스코의 중심인 아르마스 광장입니다.
만코 카팍과 마마 오클로는 1200년경 이곳에 도시를 건설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실제로 쿠스코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잉카 제국이 건설되기 훨씬 전인 8세기경이라고 합니다.
파차쿠티 왕
오랜 세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평범한 도시 쿠스코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9대 왕 파차쿠티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입니다. 파차쿠티 왕과 10대 왕 토파 유판키가 다스리면서 쿠스코는 주변 국가들을 하나씩 정복해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잉카 제국이 다스렸던 면적은 한반도의 4배가 넘을 정도였지요. 물론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나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중남미 지역에서는 제법 넓은 영토였답니다.
쿠스코의 원래 의미는 우리 몸의 중심인 ‘배꼽’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중심’이란 뜻도 갖고 있어요. 쿠스코가 본격적으로 건설된 시기는 파차쿠티 왕과 토파 유판키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15세기였어요.
쿠스코를 제국의 수도로 발전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도로 건설이었습니다. 주변 나라들을 점령한 파차쿠티 왕과 토파 유판키 왕은 나라를 쉽게 다스리기 위하여 로마 제국처럼 주요 도로를 쿠스코로 향하도록 만들었어요.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왕의 명령을 전하고 물건을 거래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도로였기 때문이지요.
쿠스코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연결된 도로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중심이 어느 곳인지 알게 해 주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쿠스코는 몸의 중심인 배꼽에서 세상의 중심이 되었답니다.
우아나카우 언덕에서 내려다본 쿠스코의 모습은 커다란 모자이크 작품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습니다. 잉카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파차쿠티와 토파 유판키 왕은 쿠스코를 수도로 만들기 위하여 재능이 뛰어난 건축가와 장인들을 불러 모았어요. 오늘날의 쿠스코는 당시에 건설된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지만, 도시의 전체적인 틀은 이 시기에 갖춰졌답니다.
쿠스코는 단순히 몇 곳의 유적지만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돌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어요. 신에게 의식을 올렸던 장소는 물론, 왕족과 귀족들이 살았던 궁전과 저택,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하고 물건을 교환했던 광장과 시장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길과 골목, 그리고 사람들의 집까지 돌을 사용하지 않은 곳이 없답니다.
길이와 높이가 1~3m에 이르는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지은 건물과 벽은 바늘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지어졌어요.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케추아 어는 말만 있었을 뿐 문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쿠스코를 건설하는 데 동원된 인원과 공사 기간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기호와 여러 자료를 근거로 5만여 명이 20년 동안 공사를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답니다.
지금 보아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건축 기술로 지어진 쿠스코는 우아리, 티아우나코, 찬찬 등 먼저 세워진 도시를 참고하여 지었다고 해요. 도시의 전체적인 형태는 잉카인들이 땅을 지배하는 동물로 믿었던 퓨마 형상을 띠고 있지요.
쿠스코의 중심은 아우카이파타입니다. 신성 광장이라고도 불렸던 아우카이파타는 지금은 아르마스 광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여전히 쿠스코의 중심입니다. 쿠스코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며 잉카인들이 모임을 하고 의식을 올렸던 신성한 장소이지요.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는 소중한 유적들이 흩어져 있어요. 그중 한 곳이 비라코차 신전입니다. 에스파냐 침략자들은 잉카인들이 의식을 올렸던 비라코차 신전을 파괴한 뒤 그 위에 대성당을 건설했지요.
아우카이파타 남쪽에는 또 다른 유적지인 코리칸차 터가 있습니다. ‘태양의 신전’으로 알려진 코리칸차는 케추아 어로 황금을 뜻하는 ‘코리’와 울타리를 의미하는 ‘칸차’를 합한 말이에요. 이름의 뜻대로 코리칸차의 벽은 황금으로 덮여 있었고 광장은 황금으로 만든 나무와 식물, 동물 조각들로 꾸며져 있었다고 해요.
광장을 꾸민 나무와 조각들을 모두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 힘들지요? 하지만 에스파냐의 박물관과 자료관에는 당시 에스파냐 군대를 따라 쿠스코에 왔던 역사학자와 연대기 작가들이 기록해 놓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답니다.
아마도 이렇게 화려한 정원은 잉카인의 정신적인 고향이었던 코리칸차를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쿠스코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유적지는 대부분 잉카 유적지 위에 새롭게 지어진 것입니다. 쿠스코에서 가장 큰 광장인 아르마스 광장은 잉카 제국 시대에 건설한 대광장 아우카이파타이고, 아르마스 광장을 바라보고 있는 대성당은 비라코차 신전 자리에 세워졌어요.
대성당과 마주 보고 있는 라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도 11대 왕 우아이나 카팍이 살았던 궁전이랍니다. 산타 카타리나 수도원과 박물관도 잉카 제국의 10대 왕인 토파 유판키가 살았던 태양 처녀 궁전 터에 세워졌습니다.
황금으로 덮여 있던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에스파냐 군대는 코리칸차를 점령하여 엄청난 황금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태양의 신전을 파괴하고 그 위에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건축물을 지었습니다. 현재 태양의 신전 자리에 세워져 있는 산토도밍고 교회와 부속 건물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초기에 지은 교회와 부속 건물들은 지진으로 모두 무너졌어요. 잉카인들이 지은 태양의 신전 주춧돌과 벽만이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해요.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산토도밍고 교회와 코리칸차 고고학 박물관은 지진 이후에 다시 건설한 유적지입니다.
산토도밍고 교회 안에 있는 코리칸차 고고학 박물관에는 잉카 제국 당시 건설된 유적지와 유물이 남아 있어요. 오늘날 볼 수 있는 유적지는 코리칸차의 안뜰에 해당하는 곳으로 실제로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장소가 남아있지요.
중앙에 제단으로 사용했던 바위가 있고 사방이 또 바위로 둘러싸여 있는데, 바위들 사이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에스파냐 침략자들은 남의 땅을 침략하여 황금과 보석을 약탈하고 궁전과 신전만 파괴한 것이 아니었어요. 인간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끔찍한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가장 잔혹했던 것은 잉카 원주민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천연두라는 전염병을 일부러 퍼뜨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나게 한 것입니다.
전염병으로 희생된 원주민은 에스파냐 군대에 저항하다 사망한 사람보다 수십 배나 많았습니다. 또한 에스파냐의 종교인 가톨릭교를 강요하였고 이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원주민도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답니다.
잉카 문명의 흔적을 제대로 보려면 쿠스코가 한눈에 들어오는 ‘사크사우아만’ 유적지를 가 보아야 해요. 거대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사크사우아만 유적지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돌들이 완벽하게 짜 맞추어져 있어요.
사크사우아만 유적지는 ‘무유크 마르카’란 성채를 중심으로 높이가 다른 곳에 쌓아 올린 3중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거대한 돌로 쌓은 벽은 지그재그 형태를 이루고 있지요.
성벽의 높이는 18m이고, 한쪽 면의 길이가 300m에 달하며 전체 둘레는 1100m나 되는 거대한 유적지이지요.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유적지 건설에 사용된 거대한 바위입니다. 커다란 돌은 1개의 무게가 128t이나 되고 높이도 5m가 넘습니다.
사크사우아만 유적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태양신에게 의식을 올렸던 신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신에게 제물을 바쳤던 장소이거나 옥좌, 그리고 천문 관측소라는 주장까지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요.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곳이 요새였다는 학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사크사우아만 유적지를 건설하는 데 동원된 인원은 3만 명이나 되었고, 공사 기간도 자그마치 83년이 걸렸다고 해요. 하지만 불가사의한 건축물로, 아직까지 풀지 못한 의문으로 가득합니다. 현재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유적지를 건설하는 데 사용한 거석들은 근처의 석회암 광산에서 밧줄을 이용하여 가져왔다는 것뿐이랍니다.
쿠스코와 사크사우아만 유적지는 인간의 한계에는 끝이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문화유산입니다. 쿠스코의 문화유산이 우리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철기와 바퀴 문명을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무게가 100t이 넘는 바위를 광산에서 가져와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은 거대한 바위 건축물에 틈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쿠스코와 안데스 산맥 지역에는 아직도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풍습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긴 댕기 머리 차림에 괴나리봇짐을 메고 바쁘게 종종걸음을 치는 아주머니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쿠스코와 안데스 지역은 궁금증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사크사우아만 유적지에서 걸어서 30~40분 거리에 ‘탐보 마차이’라는 유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커다란 돌로 정교하게 지은 3단의 계단식 벽에 끊임없이 물이 흘러내리는 곳입니다.
탐보 마차이 유적지는 잉카인들의 관개 시설에 관한 뛰어난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계단식 벽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어디에서 끌어온 것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샘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만 하고 있지요.
탐보 마차이 유적지에 관한 용도도 미궁으로 남아 있습니다. 잉카인들이 물을 숭배하는 의식을 거행했던 장소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목욕탕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어떤 주장이 맞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잉카인들이 중요한 의식을 치르기 전에 몸을 청결하게 닦았던 장소이거나 귀족들의 목욕탕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얀타이탐보
쿠스코와 마추픽추 중간에는 ‘오얀타이탐보’라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잉카 연대기를 작성했던 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성스러운 계곡’에 자리한 오얀타이탐보는 쿠스코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쿠스코에서 오얀타이탐보까지는 곧장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으며 잉카 지배층들이 많이 살았던 곳입니다. 오얀타이탐보의 중심지에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물이 풍부한 평지 위에 가파른 산비탈을 이용하여 건설한 17개의 계단식 경작지와 거대한 돌로 만든 태양의 신전, 그리고 바위로 만든 관개 시설은 마치 마추픽추와 쿠스코 유적지를 섞어 놓은 듯이 보입니다.
오얀타이탐보에는 태양의 신전과 공주의 목욕탕, 물건을 저장했던 창고, 방어용 요새, 계단식 경작지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오얀타이탐보 유적지는 잉카 군대가 에스파냐 군대와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한 곳이기도 합니다. 1536년 망코 잉카가 이끄는 잉카 군대가 쿠스코를 공격한 후 이곳으로 이동하여 피사로가 이끄는 에스파냐 군대와 벌인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던 곳입니다.
이곳을 찾았던 에스파냐 연대기 작가들은 17개의 계단식 경작지를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꽃과 거대한 돌로 만든 성벽과 계단이 어떤 곳보다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잉카인들은 어떤 민족이나 부족보다 흥미로운 의식을 많이 거행했습니다. 잉카 제국에서 열린 다양한 축제 가운데 대표적인 축제는 6월에 열리는 ‘인티 라이미’ 축제입니다.
인티 라이미는 원래 사크사우아만 유적지 근처인 우아카에서 열렸습니다. 그해 농사지어 얻은 옥수수로 만든 술을 황금 병에 담아 태양신에게 바치는 행사에서 시작되었지요.
잉카 사람들은 한 해 동안 농사지어 얻은 결실은 곧 절대 권력자인 위대한 잉카의 정치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풍요로운 수확은 위대한 잉카가 정치를 잘한 결과이고, 수확이 좋지 않으면 잉카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티 라이미 축제는 절대 권력자인 왕이 주관했습니다. 왕은 7일 동안 단식하여 몸을 청결하게 만든 후 축제에 참가했습니다. 잉카 제국 시대에는 축제가 한 달 동안 계속되었으며 매일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축제를 즐겼답니다.
오늘날에도 매년 6월 셋째 주에 인티 라이미 축제가 열립니다. 페루는 물론이고 과테말라, 콜롬비아에 살고 있는 잉카의 후손들도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들지요. 축제가 열리는 곳은 옛날 행사가 열렸던 우아카 근처의 사크사우아만입니다.
시민들이 뽑은 위대한 잉카의 엄숙한 개회식으로 축제가 시작되지요. 여러 도시에서 참가한 팀들이 펼치는 다양한 춤과 노래가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그리고 위대한 잉카가 신성한 동물인 라마의 심장을 신에게 바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쿠스코에서 잉카인의 신앙심과 뛰어난 건축술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은 옛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가 있었던 산토도밍고 교회입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과거에는 벽의 일부와 정원을 장식한 조각까지도 황금으로 꾸며졌던 곳입니다.
산토도밍고 교회 안에 있는 코리칸차 고고학 박물관에는 당시 잉카인들이 건설한 유적 일부와 유물들이 남아 있어 당시 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코리칸차 박물관에는 여러 개의 방이 남아 있습니다. 과거 태양신에게 의식을 올렸던 장소와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방, 왕의 미라가 발견된 방, 천체 관측소로 추정되는 방 등이 있지요. 용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조금씩 다르지만 하나같이 완벽한 건축술을 자랑합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돌 사이에는 바늘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사각형의 평평한 돌이 놓여 있는 방입니다. 태양신에게 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전체적인 형태는 사다리꼴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벽에는 4개의 사다리꼴 모양의 창이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보아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답니다.
쿠스코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수도로 한때 1백만 명이 거주했다고 합니다. 안데스 산맥 해발 3,399m 지점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 모양을 띄고 있습니다.
◈ 쿠스코
시내관광 ◈
☞ 스페인 식민 시대의 건축물인 산토도밍고 성당
☞ 쿠스코 여행의 출발점인 아르마스 광장 등
우루밤바로 이동 중에 잉카 유적지 관광 (차량 약 3시간 소요)
◈ 잉카 유적지 관광관광 ◈
☞ 잉카의 목용탕이라 불리는 탐보마차이
☞ 붉은 요새 푸카푸카라
☞ 잉카의 석벽의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삭사이와만 잉카 요새
☞ 지그재그 혹은 미로 라고 불리우는 12각돌 '켄코' 등
하늘과 가까운 땅 쿠스코는 유난히 하늘빛이 맑다.
한때 세계의 배꼽이자 우주의 중심
고도 3,399미터의 살짝 희박해진 공기. 푸른 물감을 휙 뿌려 놓은 듯 거칠 것 없이 새파란 하늘. 손을 뻗으면 잡힐 듯 선명한 뭉게구름 너머 안데스 산맥의 능선들. 갈색의 돌을 쌓아 만든 건물이 만들어내는 도시의 선과 색. 여기는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그 이름처럼 한때 ‘세계의 배꼽’이자 우주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이어진 광대한 영토에 800만의 인구를 거느렸던 대제국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는 그 중 100만의 주민이 거주했던 대도시로 잉카인들이 신성시 여긴 퓨마의 형상으로 세워졌다.
잉카의 문명은 스러졌지만 그들이 쌓은 석벽은 여전히 굳건히 서있다.
12세기 말,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의 티티카카 호수에서 기원한 잉카 문명. 이 문명은 수세기 동안 페루 땅에 살아온 다른 부족을 차례로 정복해가며 태양신을 섬기고, 케추아어를 쓰는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해갔다. 문자와 종이가 없었던 그들의 문명은 구전을 통해서 겨우 전해졌다. 쿠스코가 제국의 수도가 된 것은 13세기 경 망코 카팍이 부족을 이끌고 이곳에 태양의 신전 쿠리카차를 축조하면서였다. 잉카제국이 최고의 영화를 누린 것은 15세기 말로 이 무렵 콜롬비아에서 칠레로 이어지는 남북 길이 4,000킬로미터에 걸친 대제국이 형성되었다.
1553년, 스페인 용병 출신의 상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침략했을 때 잉카인들은 그를 전설의 창조주 비라코차로 믿었다. 흰 피부를 가진 창조주가 돌아온다는 그들의 오랜 믿음 덕분에 고작 180명의 병사뿐이었던 피사로는 7만의 병사를 지닌 잉카 제국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황제 아타우알파를 볼모로 잡은 피사로는 그의 몸값으로 큰 방을 가득 채우는 황금을 요구했다. 가로 6.7m, 세로 5.2m, 높이 2.6m의 방을 황금 6087킬로그램, 은 11793킬로그램으로 채웠음에도 결국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는 처형당했다.
이후 잉카인들은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르의 지휘 아래 40년에 걸쳐 스페인들에게 대항하지만, 결국 400년에 걸친 잉카 문명은 막을 내리고 만다. 24,000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와 안데스 산맥 곳곳에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로를 건설했던 문명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산토도밍고 대성당(코리칸차)
페루 쿠스코에 있는 신전으로, 잉카시대에 태양신전으로 사용되었다. 사진은 태양의 신전 광장이다. 잉카시대의 이 광장에는 원래 금으로 된 샘에서 물이 흘렀다고 핚다. 다른 건축물의 문과 지붕 등이 모두 금으로 덮여 있었다고 핚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코리칸차의 일부를 허물고 산토도밍고 성당을 세워 유서 깊은 성당으로 남아 있다. 1950년, 1650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산토도밍고 성당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코리칸차 초석은 지진을 견뎌내 잉카 건축술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산토도밍고 교회는 태양의 신전 쿠리칸차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면 쿠스코에서 가장 번화한 엘솔 거리. 이곳에 있는 산토 도밍고 교회도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를 파괴한 자리에 세워졌다. ‘코리’는 케추아어로 ‘황금’, ‘칸차’는 ‘있는 곳’을 뜻한다고 한다.
황금에 눈이 먼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 신전을 보고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본다. 신전을 둘러싼 석벽의 거대한 규모보다는 폭 20센티 이상의 금띠가 둘려진 벽에 더 놀랐으리라. 이 궁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황금 장식은 모두 녹여져 막대 형태로 스페인에 실려 갔다. 이 황금의 양이 얼마나 많았던지 이로 인해 유럽에 인플레가 찾아왔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다.
이 신전을 부수고 남은 토대 위에 세워진 산토 도밍고 교회는 1650년에 일어난 쿠스코 대지진 때 다 무너졌다. 하지만 토대가 된 석벽만은 뒤틀림 하나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토록 뛰어난 잉카인의 석조 건축술은 지렛대의 원리와 추를 사용했을 거라는 추측 외에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어째서 그들은 문자를 만들지 않았을까.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의 신전을 부수고 그들의 교회를 쌓았다.
태양의 신전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잉카인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한 태양의 신전을 소개한다. 일 년에 단 한 차례만 태양 빛이 신전을 가득 채우고, 천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곳이다.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를 학습할 때 참고자료로 사용한다.
잉카시대에는 태양신앙이 국가종교가 되어서 각지에 태양신전이 건립되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쿠스코의 태양신전 코리칸차(Coricancha)이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황금판으로 장식되고, 신상을 비롯해 수많은 황금제품이 들어있었는데, 정복자 스페인인에게 빼앗겨서 건물도 거의 파괴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유적에 세워진 세인트 도밍고 수도원의 토대의 일부에 태양신전의 원형의 벽이 다시 이용되어 그 명성을 남기고 있다.
12각돌(칸코)
돌을 다루는 데 있어 세계최고
아르마스 광장에서 트리운포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아툰 루미요크 거리가 나온다. 석벽으로 둘러싸인 이 거리에는 종이 한 장 끼울 수 없이 정교하다는 잉카의 석조 건축의 백미가 남아있다. 바로 12각의 돌이다. 골목에 들어서면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다. 하나하나 각을 세어보니 정말로 12각이다. 그냥 사각으로 돌을 잘라 넣으면 될 것을 일부러 12각의 복잡함에 도전하는 미의식이라니. 돌을 다루는 데 있어 세계최고라는 칭송을 받을 만하다.
잉카의 놀라운 석조 기술을 보여주는 12각의 돌
코스코가 품고 있는 잉카의 유적은 끝이 없다. 아르마스 광장의 북쪽 언덕으로 올라가보자. 쿠스코의 야경을 즐기기 좋은 산 크리스토발 교회를 지나 더 북쪽으로 걸어가면 삭사이우아만과 켄코, 푸카푸카라, 탐보 마차이와 같은 잉카의 유적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삭사이우아만은 쿠스코의 동쪽을 지키는 요새 유적으로 퓨마 형태의 쿠스코에서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 남미의 3대 축제라는 태양의 축제가 매년 6월 24일에 이곳에서 열린다.
건축물만이 아니다. 이 도시에는 잉카 이전 시대와 잉카 시대에 걸친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박물관들이 있다. 잉카시대의 도예, 의상, 농경,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전시를 해놓은 잉카 박물관과 잉카 이전 시대의 도예작품들을 모아놓은 프레콜롬비아노 박물관은 가장 흥미로운 곳이다. 남미의 어느 곳에서도 사라진 문명의 이야기를 이토록 생생하게 들려주는 도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쿠스코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잉카의 흔적에 점점 사로잡혀갔다.
삭사이와만 잉카요새
잉카 제국의 최대 유적지 사크사우아만
사크사우아만 유적지
사크사우아만 유적지
거대한 돌로 만든 정교한 유적
페루 쿠스코 지역의 방어 요새였던 삭사이와만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돌로 만든 정교한 요새인 삭사이와만의 전경과 건축 양식을 살펴본다. 세계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참고자료로 사용한다.
잉카 문명은 찬란한 문명 유산을 많이 남겨놓았다.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추픽추(Machu Picchu)를 비롯해 쿠스코의 태양신전 코리칸차(Coricancha)와 방어요새 삭사이와망(Saksaywaman), 모라이(Moray) 다랑이밭, 찬란한 황금문화, 각종 토기와 미라, 결승(結繩)문자 등은 그 대표적인 문명 유산들이다.
잉카의 마지막 도피처인 밀림속의 비밀도시 빌카밤바,황금신전인 코리칸차,태양신전이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삭사이우아망 등이 있다.
잉카 문명의 흔적을 제대로 보려면 쿠스코가 한눈에 들어오는 ‘사크사우아만’ 유적지를 가 보아야 해요. 거대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사크사우아만 유적지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돌들이 완벽하게 짜 맞추어져 있어요.
사크사우아만 유적지는 ‘무유크 마르카’란 성채를 중심으로 높이가 다른 곳에 쌓아 올린 3중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거대한 돌로 쌓은 벽은 지그재그 형태를 이루고 있지요.
성벽의 높이는 18m이고, 한쪽 면의 길이가 300m에 달하며 전체 둘레는 1100m나 되는 거대한 유적지이지요.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유적지 건설에 사용된 거대한 바위입니다. 커다란 돌은 1개의 무게가 128t이나 되고 높이도 5m가 넘습니다.
사크사우아만 유적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태양신에게 의식을 올렸던 신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신에게 제물을 바쳤던 장소이거나 옥좌, 그리고 천문 관측소라는 주장까지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요.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곳이 요새였다는 학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사크사우아만 유적지를 건설하는 데 동원된 인원은 3만 명이나 되었고, 공사 기간도 자그마치 83년이 걸렸다고 해요. 하지만 불가사의한 건축물로, 아직까지 풀지 못한 의문으로 가득합니다. 현재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유적지를 건설하는 데 사용한 거석들은 근처의 석회암 광산에서 밧줄을 이용하여 가져왔다는 것뿐이랍니다.
탐보 마차이
페루 탐보 마차이
사크사우아만 유적지에서 걸어서 30~40분 거리에 ‘탐보 마차이’라는 유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커다란 돌로 정교하게 지은 3단의 계단식 벽에 끊임없이 물이 흘러내리는 곳입니다.
탐보 마차이 유적지는 잉카인들의 관개 시설에 관한 뛰어난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계단식 벽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어디에서 끌어온 것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샘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만 하고 있지요.
탐보 마차이 유적지에 관한 용도도 미궁으로 남아 있습니다. 잉카인들이 물을 숭배하는 의식을 거행했던 장소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목욕탕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어떤 주장이 맞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잉카인들이 중요한 의식을 치르기 전에 몸을 청결하게 닦았던 장소이거나 귀족들의 목욕탕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르밤바
페루 쿠스코에서 북동쪽으로 약 20㎞ 떨어진 우르밤바 강 상류의 유카이 계곡에 있는 잉카의 유적 피사크에서 시장 구경을 하고 있었다. 현지 안내인에게 우르밤바의 어원을 물었다. 안내인의 말에 따르면 '우르'는 물이고, '밤바'는 지역이라고 한다. 즉, 우르밤바는 '물이 있는 곳'이다.
옛날에 한강을 '아리수'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리'와 '우르'는 혹시 같은 무리의 말이 아닐까. 압록강의 '압록'은 아리를 한자음으로 표시한 것이다. 만주의 아무르 강은 '암+우르'로, 원래 '감+우르'에서 'ㄱ'이 탈락해 이뤄진 이름이다. 이로 볼 때, 압록강은 '으뜸가는 강', 또는 '검은 강'의 뜻을 가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우르는 강 또는 물이라는 의미를 띠는 것은 아닐까. 우르밤바를 거쳐 산정에 도시가 있는 마추픽추에 오른다. 마추픽추를 방문하려면 쿠스코에서 우르밤바를 거쳐 오얀타이탐보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안데스 산맥, 하늘을 향해 솟은 봉우리로 둘러싸인 우르밤바 계곡 정상에 위치한 '마추픽추'다.
마츄피츄행 기차 탑승 (올란타이 탐보역)
마추픽추로 가려면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쿠스코에서 88킬로미터 떨어진 ‘성스러운 계곡’의 중심에 자리 잡은 오얀타이탐보는 잉카제국 시대의 숙소나 요새였다고 한다. 잉카 시대의 관개용 수로와 석벽이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잉카인들이 마추픽추로 향하던 길을 따라 가는 ‘잉카의 길’ 트레킹을 하게 되면 이 마을을 거쳐 간다.
하루 50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는 잉카 트레킹은 인기가 너무 높아 성수기에는 최소 6개월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나 역시 3박 4일에 걸쳐 잉카의 길을 걸어 마추픽추에 다다르고 싶었지만 예약도 불가능한데다, 한국에서 여름휴가를 맞아 날아온 친구의 일정에 맞춰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마추픽추 행 기차는 세 개의 클래스로 나눠져 있다. 가장 고급 열차는 하이럼 빙엄 열차. 보통 쿠스코에서 당일로 왕복하는 이들을 위한 기차로 티켓에 런치와 칵테일 디너, 영어 가이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등급은 가벼운 다과가 포함된 비스타돔, 마지막은 저예산 여행자들을 위한 백패커. 우리가 타고 갈 열차 비스타돔에 오르니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 파노라마로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울창한 녹음과 푸른 하늘이 따라오는 풍경에 취해 열차에서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아구아스칼리엔테스 역에 내린다.
아슬아슬한 계곡을 지나 지구상에서 600년 동안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츄피츄로 이동
기차에서 내리니 호객꾼들이 좁은 기차역을 가득 메운 채 기다리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을 따라간다. 숙소는 특별한 것도 없지만 깔끔하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 5시에 버스 정거장으로 향한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는 이유는 마추픽추를 조망할 수 있는 와이나픽추(2690미터)는 하루 500명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5시를 갓 넘긴 이른 시간인데도 이미 줄이 길다. 버스는 어둠이 가시지 않은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간다. 제일 좋은 열차에 하이럼 빙엄의 이름을 붙였더니 이 도로의 이름도 하이럼 빙엄 도로. 조금씩 어둠이 걷혀 간다. 만년설이 녹아 내린 짙은 옥색의 물이 점점 멀어진다. 마침내 공중 도시가 있는 산 꼭대기에 버스가 선다.
마츄피츄 관광
마츄피츄
아무리 사진으로, TV 화면으로 몇 번을 본 풍경이라 해도 막상 그 앞에 서면 심장이 빠르게 뛰는 곳이 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자꾸 한숨을 내쉬게 되는 곳.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에서 우루밤바 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달려간 정글의 산꼭대기에 남아있는 도시. 날카로운 산들과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여 아래에서는 이 도시의 존재를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공중도시라는 이름이 붙은 곳.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픽추 앞에 서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픽추(Machu Picchu)다. 황금을 찾는 이들에게 쫓기고 쫓겨 도망친 잉카인들이 비밀도시를 건설하고 복수를 꿈꾸었다는 곳. 어느날 갑자기 만 명이 넘던 도시의 주민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185구의 미라만을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곳. 여성과 아이들을 땅에 묻고 사라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더 깊은 아마존의 밀림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그렇다면 아마존 어딘가에는 어째서 그토록 깊은 정글에서 살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잉카의 후예들이 남아있을까.
1911년에 하이럼 빙엄 (Hiram Bingham)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도시. 덕분에 그토록 오랫동안 남미 대륙을 휩쓴 탐욕스런 발길에도 훼손당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었다. 해발고도 2430미터의 산 정상에 자리 잡은 계단식 성곽 도시는 잉카 제국에서 유일하게 정복자의 손이 닿지 않은 도시다. 그래서 페루 원주민들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사랑 받는 곳이기도 하다.
마추픽추로 향하는 날,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쿠스코에서 88킬로미터 떨어진 ‘성스러운 계곡’의 중심에 자리 잡은 오얀타이탐보는 잉카제국 시대의 숙소나 요새였다고 한다. 잉카 시대의 관개용 수로와 석벽이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잉카인들이 마추픽추로 향하던 길을 따라 가는 ‘잉카의 길’ 트레킹을 하게 되면 이 마을을 거쳐 간다.
잉카의 유적으로 향하는 길 야마들이 먼저 맞아준다
하루 50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는 잉카 트레킹은 인기가 너무 높아 성수기에는 최소 6개월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나 역시 3박 4일에 걸쳐 잉카의 길을 걸어 마추픽추에 다다르고 싶었지만 예약도 불가능한데다, 한국에서 여름휴가를 맞아 날아온 친구의 일정에 맞춰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마추픽추 행 기차는 세 개의 클래스로 나눠져 있다. 가장 고급 열차는 하이럼 빙엄 열차. 보통 쿠스코에서 당일로 왕복하는 이들을 위한 기차로 티켓에 런치와 칵테일 디너, 영어 가이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등급은 가벼운 다과가 포함된 비스타돔, 마지막은 저예산 여행자들을 위한 백패커. 우리가 타고 갈 열차 비스타돔에 오르니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 파노라마로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울창한 녹음과 푸른 하늘이 따라오는 풍경에 취해 열차에서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아구아스칼리엔테스 역에 내린다.
마추픽추 유적의 주변은 계단식 논과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기차에서 내리니 호객꾼들이 좁은 기차역을 가득 메운 채 기다리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을 따라간다. 숙소는 특별한 것도 없지만 깔끔하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 5시에 버스 정거장으로 향한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는 이유는 마추픽추를 조망할 수 있는 와이나픽추(2690미터)는 하루 500명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5시를 갓 넘긴 이른 시간인데도 이미 줄이 길다. 버스는 어둠이 가시지 않은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간다. 제일 좋은 열차에 하이럼 빙엄의 이름을 붙였더니 이 도로의 이름도 하이럼 빙엄 도로. 조금씩 어둠이 걷혀 간다. 만년설이 녹아 내린 짙은 옥색의 물이 점점 멀어진다. 마침내 공중 도시가 있는 산 꼭대기에 버스가 선다.
마추픽추 주변은 날카로운 봉우리들로 둘러싸였다
마추픽추의 입구에는 하이럼 빙엄을 기리는 동판이 새겨져 있다. 기분이 묘해진다. 그가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이렇게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걸까. 그가 이곳을 찾아내기 전에 이미 원주민들은 폐허로 남은 도시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 않은가.
예일대의 역사학자였던 빙엄은 잉카 최후의 황제가 우르밤바 강을 따라 빌카밤바로 이동했다는 전설을 토대로 밀림을 탐험하고 있었다. 어느날 아구아스칼레엔테스에 사는 11살 소년에게서 마추픽추 꼭대기에 폐허의 도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루 일당을 지불하고 소년을 길잡이로 삼아 절벽을 기어 올라 이곳에 다다른 빙엄. 다음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으로부터 유적 발굴 자금을 받아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세 차례에 걸쳐 그는 토기, 보석, 유골 등 무려 5000여점에 달하는 유물을 노새에 실어 날랐다. 페루 대통령에게 연구 목적으로 단기 반출 허가를 받았지만, 빙엄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빌려간 유물은 여전히 예일대 피바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페루 정부는 예일대를 상대로 유물 반환을 강력히 요구해 결국 미국은 반환을 합의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페루로 돌아온 유물은 없다고 한다. 핑계는 늘 같다. 페루가 귀중한 유물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보존할 여력이 없다는 것. 힘 없는 나라들은 이런 식의 횡포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
말 없는 돌을 일깨워 사라진 잉카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표를 끊고 바로 와이나픽추로 향한다. 입구에서 장부에 이름을 적어야 한다. 이 산을 오르다 떨어져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가파른 고갯길 사이로 좁은 돌계단이 놓여있다. 미끄러운 계단을 40분 남짓 오르니 정상이다. 마추픽추의 유적들이 구름에 가린 산 사이로 아스라이 드러난다. 함께 간 벗이 소리를 지르듯 말한다. “이런 미친 놈들. 이런 곳에 도시를 짓다니.” “이게 15세기 유적일 리가 없어. 20세기 초에 굴삭기로 파서 만든 거 아니야?” ‘젊은 봉우리’ 와이나픽추에서 내려와 ‘늙은 봉우리’ 마추픽추로 향하기 전에 잉카의 다리를 찾아간다. 까마득한 절벽 사이에 놓인 외길과 나무 다리. 전설의 도시 빌카밤바로 가는 길이었다는 소문이 남아있는 길이다.
깎아지른 절벽에 위태롭게 만들어진 잉카의 길과 다리
유적지 주변을 둘러싼 계단식 밭에 시선이 간다. 이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질서정연함이라니. 산의 경사면을 깎아 일군 밭에 감자와 옥수수, 코카잎 등을 길렀다고 한다. 15세기 초반에서 중반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추픽추는 도시 대부분이 산의 가파른 경사면에 건설되어 있다. 유적의 주위는 높이 5미터, 너비 1.8미터의 견고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잉카 제국에는 문자와 철기, 화약, 수레바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 엄청난 양의 돌을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옮겨와 도시를 건설했을까. 어떻게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정교하게 돌들을 짜 맞출 수 있었던 걸까. 무게가 수십 톤에 달하는 돌을 옮길 때 추와 지레를 이용했을 거라는 추측 정도만이 가능할 뿐, 아무 것도 알려진 사실이 없다.
빙엄은 이곳이 잉카 최후의 황제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만든 전설의 도시 빌카밤바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곳이 어떤 목적으로 세워진 도시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185구의 시체 중 109구가 여성이었기에 수도원이었거나 종교적 성소였다는 주장, 잉카 황제의 여름 별장이었을 거라는 이야기,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는 설 등등.
잉카의 빼어난 수로시설
가이드 북을 펴가며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무슨 건물인지를 확인하는 건 뒤로 미루고 그저 하염없이 이 돌들 사이를 걷고 싶다. 돌들이 쏟아내는 먼 옛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돌에 서린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파블로 네루다와 빅토르 하라 , 체 게바라에 이르기까지 ‘아메리카인’으로서의 자각을 일구어낸 이들은 모두 이곳에서 삶의 전환을 맞았다고 했던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중앙광장으로 들어선다. 잉카 문명이 대제국으로 발전한 데는 관개용 수로의 확대와 철저한 물관리가 큰 역할을 했다더니, 이곳에서도 돌을 깎아 만든 수로가 보인다. 이곳에서 유일한 곡선 건물인 태양의 신전으로 향한다. 자연석 위에 석축 건물을 세웠다.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던 두 개의 동쪽 창은 텅 빈 채 남아있다. 동짓날 햇살이 이 창을 향해 들어오기 때문에 태양의 신전이라 불린다. 그 옆의 왕녀의 궁전은 이곳의 유일한 복층 건물이다. 왕릉과 곡식 창고, 3개의 창이 있는 신전, 독수리 머리 조각이 남아있는 콘도르 신전을 둘러보고 유적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인티우아타나로 향한다. 높이 1.8미터의 해시계는 거석을 깎아 기둥처럼 만들었다. 춘분과 추분에는 태양이 이곳에 도달하면 바위 위에 세워진 작은 기둥의 그림자가 사라진다는 사실에서 해시계나 천체관측소로 추측한다. 그 이름이 ‘태양을 잇는 기둥’을 뜻하는데 태양을 숭배했던 잉카인들이 태양을 붙잡아 묶어두는 의식을 치뤘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정면에 와이나픽추, 눈 아래로는 우루밤바 강과 절벽, 왼쪽에는 계단식 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잉카의 수로와 돌담이 남아있는 오얀타이탐보
마추픽추는 유네스코의 세계 복합 문화 유산이다. 잉카의 유적과 더불어 다양한 동식물이 거주하는 주변의 자연환경이 빼어나 복합 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선주민들이 만든 잉카 문명에 대한 서구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페루 원주민들의 자부심이자 마음의 고향이라는 마추픽추. 나를 비롯한 관광객들이 미어터지게 들어찬 지금의 모습에 어쩐지 미안함이 생겨난다.
우루밤바 강이 흘러가는 마추픽추 주변 계곡의 풍경
아쉬움과 미안함을 끌어안고 마추픽추를 떠나는 버스에 오른다. 버스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달려 내려와 관광객들을 놀라게 했다는 빠른 발의 소년들은 사라지고 없다. 달리기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와 버는 돈 때문에 학교에도 가지 않는 소년들이 생겨 페루 정부에서 금지시켰다고 한다. 잉카 시대의 발 빠른 파발꾼들이었던 차스키. 쿠스코에서 에콰도르 키토까지의 2,000킬로미터를 닷새 만에 달려갔다는 그들. 잉카 제국 구석구석을 잇던 길을 릴레이 형식으로 달렸던 그들의 빠른 발은 잉카 제국의 밑거름이었다. 그들을 통해 신속하게 명령과 물자, 정보가 오갔다고 하니.
와이나픽추에서 바라보는 마추픽추 유적
산을 내려오는 길, 나는 네루다의 시를 떠올린다. “나와 함께 태어나기 위해 오르자, 형제여 / 네 고통이 뿌려진 그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다오//.....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나의 피로 말하라.” 사라진 잉카인들이 쌓은 석벽 위에 태양만 뜨겁게 내리쬐고 있다. 돌은 여전히 말이 없다.
마추피추
페루 남부 쿠스코의 북서쪽 우르밤바 계곡에 있는 잉카 제국의 창조물로, 해발 2300m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마추픽추는 ‘나이든 봉우리’라는 뜻인데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비밀의 공중도시’라고도 분린다. 잉카인들이 스페인의 공격을 피해 산속 깊숙이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군사훈련을 하여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해 건설한 비밀도시라고도 핚다. 16세기 후반, 잉카인들은 이곳을 버리고 더 깊숙한 오지로 떠났고, 이후 400년동앆 발견되지 않다가 1911년 미국 학자에 의해 발견 되었다.
해발 2,430m에 자리한 마추픽추(Machu Picchu)는 열대 산악림 가운데에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잉카 제국의 절정기에 건설되었으며 가장 놀라운 도시 창조물로 평가될 만한 이 유적의 거대한 벽, 테라스, 경사로는 마치 자연적으로 깎여서 형성된 절벽처럼 보인다. 안데스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 있는 이곳의 자연 환경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아마존 강 상류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우르밤바 계곡지대의 해발 2,280m 정상에 있는 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인데,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도시'라고도 불립니다.
해발 2,430m에 자리한 마추픽추(Machu Picchu)는 열대 산악림 가운데에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잉카 제국의 절정기에 건설되었으며 가장 놀라운 도시 창조물로 평가될 만한 이 유적의 거대한 벽, 테라스, 경사로는 마치 자연적으로 깎여서 형성된 절벽처럼 보인다. 안데스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 있는 이곳의 자연 환경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아마존 강 상류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더 이상 기차가 달릴 수 없는 종착역 마추픽추. 아담한 마추픽추 역을 빠져나와 사방을 둘러보아도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베일에 싸여 있는 유적지답게 마추픽추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웅장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해발 2400m에 있는 마추픽추 유적지는 여러 신전과 궁전을 중심으로 잉카인들이 살았던 주택, 곡식과 작물을 재배했던 계단식 경작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데스 산맥에 자리한 마추픽추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유적지입니다. 정확히 누가 왜 건설했고, 어떤 사람들이 살았으며, 이토록 신비롭고 아름다운 도시가 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는지가 모두 밝혀지지 않은 곳입니다. 잉카인들이 세웠고, 그들이 살았다는 것을 빼고는 모두 추측만 하고 있지요. 베일에 싸인 ‘시간을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픽추를 찾아 떠나 볼까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로운 유적지
오랜 세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있던 마추픽추는 1911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가르치던 고고학자 히람 빙엄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어요. 히람 빙엄은 기록과 자료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안데스 산맥을 탐험하여, 숨어 있는 고대 유적지 마추픽추를 발견했다고 해요.
마추픽추를 발견한 지 1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정확히 어떤 용도로 사용한 곳인지, 건설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다만 유적지와 유물, 자료를 토대로 학자들이 추측한 결과, 15세기 중반에 잉카인의 여름 궁전이나 왕의 은신처로 건설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케추아 어로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에요. 마추픽추 유적지는 젊은 봉우리를 의미하는 우아이나픽추와 늙은 봉우리인 마추픽추 봉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 유적지가 마추픽추로 불리게 된 것은 대부분의 유적지가 늙은 봉우리 아래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추픽추는 쿠스코(Cuzco) 및 우루밤바(Urubamba) 우루밤바(Urubamba) 강 계곡에 있는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 Ollantautaybo), 룽쿠라카이(Runcuracay), 사야크마르카(Sayacmarca), 푸유파타마르카(Phuyupatamarca), 우이냐이 우아이나(Huiñay Huayna, Wiñay Wayna), 인티푸쿠( Intipucu) 등의 고고학 유적들과 함께 대표적인 잉카 문명 유적이다. 쿠스코와 옛 마을들에는 잉카 제국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들은 도시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져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관심을 기울여 보존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마추픽추는 인간과 자연 환경의 상호작용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해발 2,430m에 자리한 마추픽추는 열대 산악림 가운데에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잉카 제국의 절정기에 건설되었으며 가장 놀라운 도시 창조물로 평가될 만한 이 유적의 거대한 벽, 테라스, 경사로는 마치 자연적으로 깎여서 형성된 절벽처럼 보인다. 안데스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 있는 이곳의 자연 환경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아마존 강 상류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페루(Peru)의 안데스 산맥에서 가장 매력적인 경치를 자랑하는 마추픽추는 면적이 32,500㏊에 이른다. 잉카 제국의 마지막 근거지이자 탁월한 건축적, 고고학적 중요성을 지닌 마추픽추는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천연 재료를 이용하여 주변 환경과 완벽하게 어울리도록 창조된 이 유산의 석조 건축물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 사례 중 하나이다.
1,000년 이상 계속해서 훌륭히 경작되어 온 주변 계곡은 인간이 땅과 맺은 생산적 관계를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사례이다. 마추픽추의 주민들은 지금도 감자, 옥수수, 라마(llama)를 기반으로 하는 잉카 제국 시대 선조들의 생활 방식과 매우 유사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마추픽추는 또한 몇몇 위기에 처한 종들, 특히 이 지역에서 가장 흥미로운 종인 안경곰(spectacled bear, Tremarctos ornatus)에게 안전한 서식지를 제공한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다른 동물로는 난쟁이 사슴(dwarf brocket), 수달(otter), 긴꼬리족제비(long-tailed weasel, Mustela frenata), 팜파스고양이(pampas cat, Leopardus pajeros), 멸종 위기에 처한 오셀롯(ocelot)과 보아뱀(boa), 안데스바위새(Andean cock of the rock, Rupicola peruvianus), 안데스콘도르(Andean condor, Vultur gryphus) 등이 있다.
천연 식생은 주로 키아데아(Cyathea) 등의 양치식물(fern)과 야자나무로 구성된, 아열대 지방의 습도가 높은 저지대 삼림으로 되어 있다. 침식에 의해 깎여 나간 화강암 산꼭대기에 자리하여 뱀처럼 굽이쳐 흐르는 우루밤바 강을 굽어보고 있는 마추픽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이다. 치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이 놀라운 도시는 잉카 제국이 만들어 낸 가장 찬란한 창조물 중 하나이다.
이 도시가 만들어진 시기는 파차쿠텍 잉카 유팡키(Pachacutec Inca Yupanqui, 1438~1471)와 투팍 잉카 유팡키(Tupac Inca Yupanqui, 1472~1493)라는 위대한 두 잉카 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인 쿠스코에서 적어도 100㎞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이 도시의 기능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검증된 기록이나 눈에 보이는 충분한 물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정확히 알 수 없다.
목적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마추픽추 유적에는 경사면을 일구어 공중 정원처럼 만든 거대한 테라스 부근에 ‘농부(Farmer)’ 구역, ‘산업(industrial)’ 구역, ‘왕실(royal)’ 구역 및 ‘종교(religious)’ 구역 등 주목할 만한 몇몇 구역들이 있다. 계단식 기단 제작, 바위 돌출부 평탄화 작업, 경사로와 계단 조성, 자연의 연장(延長)처럼 보이는, 말 그대로 산을 조각한 것처럼 만든 거대한 건축물 축조 등 엄청난 토목 공사를 통해 완성된 잉카 제국의 모습에서 그들이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추피추 태양의 신전
마추픽추의 심장 다른 표기 언어 Machu Picchu El Templo del Sol
거대한 자연석 위에 탑의 형태로 우뚝 세워져 있어 여느 건축물과도 한눈에 구별이 되는 태양의 신전은 마추픽추의 심장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석벽과 탑 특유의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모습은 쿠스코의 산토 도밍고 교회에 일부 남아 있는 태양의 신전을 떠올리게 한다. 잉카 제국의 새해는 1월 1일이 아닌 6월 21일로 남아메리카 3대 축제로 손꼽히는 태양의 축제도 이 시기에 맞추어 열리는데, 그날이 되면 태양의 빛이 신전 중앙의 창문으로 딱 맞추어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러 몰려든 여행자들과 사진 작가들로 더욱 붐비는 때가 그날이다. 신전을 건축하는 데 있어 그런 부분까지 고려한 잉카인들의 세심함이 더욱 돋보이는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잉카시대에는 태양신앙이 국가종교가 되어서 각지에 태양신전이 건립되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쿠스코의 태양신전 코리칸차(Coricancha)이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황금판으로 장식되고, 신상을 비롯해 수많은 황금제품이 들어있었는데, 정복자 스페인인에게 빼앗겨서 건물도 거의 파괴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유적에 세워진 세인트 도밍고 수도원의 토대의 일부에 태양신전의 원형의 벽이 다시 이용되어 그 명성을 남기고 있다.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잉카인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한 태양의 신전을 소개한다. 일 년에 단 한 차례만 태양 빛이 신전을 가득 채우고, 천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곳이다.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를 학습할 때 참고자료로 사용한다.
인티우아타나 아래쪽에는 중앙 광장이 있습니다. 중앙 광장은 마추픽추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으로 주변에는 여러 신전과 궁전이 있고, 잉카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수로가 있습니다. 중앙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말굽 모양으로 생긴 태양의 신전입니다.
태양의 신전은 마추픽추 유적지에 있는 200여 개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독특한 모양을 자랑하지요. 커다란 바위 위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돌을 쌓은 탑 모습으로, 태양의 신전에는 2개의 창문이 있어요.
그 가운데 동남쪽 창문은 동짓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창문을 통과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요. 태양의 신전은 태양의 후예라는 사실을 커다란 자랑으로 여겼던 잉카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태양의 신전 주변에는 왕녀의 궁전을 비롯하여 왕릉과 곡식 창고, 향기의 방,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작은 광장 등이 있어요. 태양의 신전 남쪽에 붙어 있는 왕녀의 궁전은 마추픽추 유적지에서는 드물게 2층으로 지은 건물이에요.
잉카 건축 양식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두꺼운 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추픽추에서 유일하게 1층과 2층이 안에서 연결되지 않고 바깥 계단을 이용하도록 설계된 특이한 건물입니다. 발굴 당시 이곳에서는 나무로 만든 기둥과 지붕을 받치고 있던 돌쐐기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태양의 신전 아래에는 커다란 바위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굴이 있어요. 일명 왕릉으로 불리는데, 이 동굴이 어떤 곳이었는지에 관한 유물이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아요. 자연 동굴과 달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모습을 보고 왕이나 절대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태양의 신전 북쪽에는 잉카인들의 뛰어난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는 수로가 남아 있어요. 잉카인들은 물과 돌을 이용하여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 준 민족이에요.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기 어렵지만 바위뿐인 유적 사이로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것도 자연적으로 흐르는 물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도록 돌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지요. 이 관개 수로는 과학이 발달한 지금 보아도 감탄할 정도랍니다.
태양의 신전 북서쪽에는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이라는 조금은 특이한 이름으로 불리는 장소가 있습니다. 해가 뜨는 동쪽 벽에 3개의 창문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이 신전은 그리스나 로마에서 볼 수 있는 보통의 신전 건물처럼 4개의 벽면이 있는 것이 아니라 3개의 벽면을 갖고 있어요. 잉카인들은 신전을 지을 때 이처럼 3개의 벽면만 짓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이런 건물은 다른 잉카 유적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마추피추 왕녀궁전
마추픽추 유일의 2층 건물, 마추픽추 왕녀의 궁 다른 표기 언어 Machu Picchu Aposento de la Ñusta
마추픽추에서 유일하게 2층으로 설계된 왕녀의 궁전은 왕녀가 사용한 곳이 맞는지, 왕녀가 존재하기는 했는지 등 여러 의문점이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용도의 건물에서만 보여지는 2층의 설계 형태를 통해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했으리라는 추측이 성립한다. 또한 태양의 신전 바로 옆에 위치한 점이 왕실이나 신성한 곳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 궁전 안쪽에는 물건을 놓을 수 있는 장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삼각 형태로 축조된 벽면을 통해 지붕의 모양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마추피추 신선한 광장
세 개의 신전이 모여 있는 곳 다른 표기 언어 Machu Picchu Plaza Sagrada y Templo de las Tres Ventanas
해시계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기 전 길목에 위치한 신성한 광장은 세 개의 신전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세 창문의 신전은 잉카의 초대 황제인 만코 카팍이 태어났다고 전해져 가장 유명해진 곳이다. 그 외 남쪽에 위치한 제사장의 집은 문이 있었을 법한 공간이 비워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온전한 집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북쪽에 있는 주신전은 삼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에 폭이 4m가 넘는 제단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들어 벽면 한쪽이 살짝 무너져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선이 쳐져 있다.
마추피추 해시계 태양의 불
마추피추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해시계. 높이 1.8m의 돌기둥이다.
마추피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천문관측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시설이다. 성 중앙의 ‘신성광장’에 거대한 해시계가 있는데 잉카인들은 그것을 이용해 매일 시간을 쟀던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하나의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는 해시계와 유사한데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그곳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마추피추 콘도르의 신전과 마추피추의 감옥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유적 다른 표기 언어 Machu Picchu Templo del Cóndor
기술자 거주지 옆에는 콘돌 신전과 그 지하에 설계된 감옥이 있다. 천연석으로 이루어진 콘돌 신전을 마추픽추 유적 중에 가장 압도적인 모습을 자랑하는 유적으로 손꼽는다. 바닥에는 콘돌의 부리와 머리 모양을 빼닮은 돌이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이를 중심으로 커다란 양 날개를 활짝 편 형상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특히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웅장한 날개는 마치 일부러 그려 넣은 듯한 다채로운 색상이 줄무늬처럼 들어가 있어 더욱 생동감을 더한다. 콘돌 신전 밑 지하에는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가 나 있는데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돌의자와 작은 공간이 존재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 안에 죄수를 가둬놓고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왕릉 앞에는 또 다른 신전인 콘도르 신전이 있습니다. 콘도르 신전은 마추픽추 유적지에 남아 있는 신전 가운데 가장 작은 신전이에요. 이곳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콘도르 조각이 바닥에 묻혀 있어요. 잉카인들은 오랫동안 콘도르를 신성한 동물로 생각했고, 살아 있는 상태로 신에게 바쳤다고 해요.
마추픽추를 이야기할 때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경작지입니다. 가파른 산을 깎아 만든 계단식 경작지는 마추픽추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요. 건축물이 세워진 지역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만들어 놓은 경작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문화유산입니다.
이 계단식 경작지에서는 옥수수, 감자, 마약의 일종인 코카를 재배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일부 학자들은 왕실에서 사용했던 코카만을 재배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전체적인 의견은 아니랍니다.
콘도르 신전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가득한 시간을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픽추는 잉카인이 건설한 도시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는 유적지입니다. 인티우아타나를 비롯하여 태양의 신전,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관개 수로 시설에 관한 자료는 물론이고 언제, 누가 건설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
마추픽추 전체가 콘도르는 아니구요.
콘도르 신전과 지하감옥 일부가 콘도르를 모양삼아 만들었다고 합니다. 콘도로는 남미 및 북미에 사는 거대한 맹금류입니다.
아메리카대륙 특산종으로 5속 7종이 알려져 있다. 머리의 피부가 드러나 있으며 종류에 따라 붉은색·검정색·오렌지색·파란색 등 다양하다. 그 가운데 콘도르(Vulture gryphus)는 맹금류 가운데 가장 큰 종으로서 몸길이 1.3m 이상, 몸무게 10kg에 이른다. 머리는 분홍빛이고, 수컷은 머리와 턱에 살 조각이 달려 있다. 목에는 흰색 솜털이 나 있으며 깃털은 검정색 또는 검은빛이 도는 갈색이고 날개의 일부가 흰색이다. 안데스산맥의 바위산에 살며 둥지는 바위 절벽에 틀고 흰알을 2개 낳아 암수 함께 55∼60일 동안 품는다. 먹이는 주로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거나 병든 양을 습격하여 잡아먹는다. 캘리포니아콘도르(Gymnogyps californianus)는 북아메리카에 널리 분포하였으나 차츰 줄어들어 서부 산악지대의 보호구역에서 약 40마리가 살아 있는 국제보호조이다. 주로 중남아메리카에 분포한다.
페루 마추피추
마추피추는 잉카인들의 이중성(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이라는 믿음을 토대로 하는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 우선 마추피추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의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가지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마치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며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마치 새(예 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성한 산으로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 신성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잉카인들이 신성한 도시의 모든 시설들을 어떤 형상을 표현하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날개를 활짝 펴서 날고 있는 새의 모습으로 와이나픽추에서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인간들은 무질서와 방탕에 빠지기 쉬우므로 태양이 다양한 색을 갖는 깃털의 새를 보내 영혼들을 위무해준다고 한다.
마추피추는 스페인에 정복된 이후 5세기 동안이나 정글 안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그것은 울창한 수림과 뾰족한 봉우리들이 마추피추를 외부 세계와 격리시키고 있는 데다 신성한 계곡으로 불리며 우기에는 통과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지형이 험한 퐁고 보에니케의 골짜기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마추피추를 건설한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영국의 클레멘 마크햄(Clements Markham) 등 일부 학자들은 빠차우떽(Pachautec) 시대에 열대 밀림지대 야만인들의 꾸스코 공략을 저지하기 위해 마추피추라는 보루(堡壘)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빙험도 초기에는 마추피추를 아마존 상류에 살고 있던 부족과 대치하는 전략적인 요새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마존 강 상류지역 야만인의 무기가 별것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그와 같은 보루를 건설하였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수정했다. 반면에 태양신의 처녀들 즉 ‘아크야’를 위해 건설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높은 건축지식으로 건설
기원이 어떠하든 마추피추를 건설하는 데 사용된 돌들은 600미터 아래에 있는 깊은 골짜기로부터 채취한 것으로 운반도구도 제대로 없었던 잉카인들은 그야말로 악전고투하며 건설했음에 틀림없었다.
마추피추가 빙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래 차츰 비밀이 알려지고 있다. 우선 마추피추는 제례 의식의 중심지로 약 1천2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며 테라스 형태의 농업 구역과 도시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와 감자뿐만 아니라 ‘안데스의 초록빛 황금’인 코카 잎도 재배했고 가축을 따로 길렀다.
20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유적지의 대부분은 가옥이나 저장고로 지형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화강암으로 건설했다.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천500미터 이상의 고산지에서만 자라는 이추(Ichu) 짚으로 만들어 덮었다(현재 복원된 건축물의 지붕도 이추로 덮었음). 정방형의 공동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열 채씩 무리지어 지어진 2층집들은 좁은 도로나 다소 돋운 골목으로 연결되었다.
마추피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솜씨가 상당히 정교하다. 각 변의 길이가 몇 미터나 되고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다. 특히 중요한 건물의 경우 돌의 표면을 젖은 모래에 비벼서 매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종이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연결되어 있다.
마추피추는 고지에 위치하므로 물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잉카인들은 식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으로부터 돌을 이용하여 고랑을 만들었다.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유적 중의 하나이다.
공동 마당에는 커다란 맷돌, 부피가 큰 농기구, 연료로 사용하는 라마의 배설물 저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추뇨(잉카인들의 주식으로 감자 말린 것)’를 만들기 위해 태양과 서리에 번갈아 노출되도록 감자를 널어놓았다. 말린 고기 등은 줄에 매어 집 바깥에 매달았다.
종교 건축물은 주 광장 둘레에 축조했다.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으며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 신전,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일명 제1신전, 그리고 ‘왕의 묘’가 그것이다. 왕의 묘는 잉카 최고의 신에게 헌정된 숭배의 장소로 추정하며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잉카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세 계단이 있는데 이는 지하(죽음), 지상(현생), 하늘(신)을 의미한다. 신전 주위로 왕의 궁전에는 식당은 물론 거실 등이 있으며 마추피추에서 유일하게 화장실이 있다.
마추피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천문관측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시설이다. 성 중앙의 ‘신성광장’에 거대한 해시계가 있는데 잉카인들은 그것을 이용해 매일 시간을 쟀던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하나의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는 해시계와 유사한데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그곳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북쪽의 주의자와 남쪽의 보조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달의 신전은 유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 중턱에 위치한다. 천연 동굴을 이용해 다섯 군데의 벽감을 만들고 부조를 장식했으며 신전 안에는 거대한 바위의 가운데를 파서 만든 옥좌가 있지만 전설적인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
빙험은 제단 구역에서 많은 인골이 발견하였는데 그들 대다수는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선택된 여자들이었다. 발견된 175구의 미라 중 80퍼센트가 여자였으며, 그 중 나머지 20퍼센트는 사제와 아이들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잉카 제국을 상징하는 도자기, 금속, 섬유 등을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추피추가 어떤 정책적인 결단(군사 전략적 측면, 실용성 미비)에 의해 포기되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하부에서 수많은 도자기 파편을 발견했는데 이는 희생 또는 제사의 의식 중에 도자기를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했다.
공중도시에서 철수
학자들은 대체로 태양신의 후예로 숭배 받은 잉카제국의 아홉 번째 통치자로 ‘세상의 개혁자’로 불리는 파차쿠텍(재위 1438∼1471년)이 마추픽추를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을 근거로 망코 카팍이 세운 잉카 최초의 수도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망코 카팍이 “내가 태어난 곳에 새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또한 빙험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잉카 이전의 유물도 상당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잉카인인 네 명의 남자와 네 명의 여자는 ’파타리탐보‘라는 동굴에서 나타났으며 네 명의 남자 가운데 한 명이 망코 카팍이다.
학자들을 가장 혼동스럽게 만드는 것은 잉카인들이 갑자기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또한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페인 정복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보면 당시 침략자들은 마추피추에 도착하지 못했다. 즉 마추피추인들은 1553년 스페인인들이 잉카 제국을 정복하기 전에 이미 아름다운 공중 도시를 떠났다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마추피추의 운명에 대해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잉카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가 패자들을 모두 몰살시키곤 했다. 잉카의 황제 와이나 카파크가 카란케 족을 물리쳤을 때 생존자 전원을 처형했다. 마추피추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사제가 신성한 아크랴(태양의 처녀) 한 사람을 범했을지 모른다는 추정이다. 제니퍼 웨스티우드는 스페인인과 잉카 여왕 사이에 난 가르시라소 데 라 베거의 기록에 아크랴를 범한 자의 비극이 상세하게 적혀있다고 말했다.
“아크랴를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해짐은 물론 그의 신하, 친척, 이웃에서부터 그가 사는 마을의 주민과 가축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마을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 장소를 찾아낼 수 없었다.”
세 번째 가능성은 하늘의 뜻이다. 현대인들은 하늘의 뜻으로 공중 도시를 철수했다는 것에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대의 잉카인들의 생각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그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마지막 가능성은 전염병이다. 1940년대에 말라리아가 이 지역을 덮치자 인구가 급감했다. 빙험이 발견한 여자의 두개골에서 매독의 징후가 있었는데 전염병이 이 여자에게만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을에 무서운 전염병이 번지자 통치자가 과감히 파기명령을 내렸을 가능성도 있다. 마추피추는 손상이 없이 방치되었기 때문에 더욱 소문이 무성했으나 여하튼 빌카밤바가 아니므로 빌카밤바에 대한 학자들의 탐사는 계속되었다.
아직도 마추피추가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이지만 도굴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종교의식과 천문관측을 위해 사용된 종교 중심지, 나아가 아마존과 잉카를 연결한 물류와 교역 중심지 또는 당시 잉카 왕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마추피추가 아마존 상류에 살고 있던 부족과 대치하는 전략적인 요새의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신성한 계곡의 입구
마추피추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잉카의 수도였던 꾸스코(해발 3360미터)에서 우르밤바를 거쳐 오란다이탐보(Ollantaytambo)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 오란다이는 파차 쿠텍 왕 시대의 장군으로 왕의 딸과 사랑에 빠져 오란다이탐보로 피신한다. 화가 난 파차 쿠텍이 수 차례에 걸쳐 오란다이 장군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고 결국 사랑을 승인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은 마추피추로 들어가는 길목인 신성한 계곡의 입구이기도 하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므로 군대가 주둔했다. 그러므로 오란다이탐보에는 군인들이 주둔했던 숙소, 종교시설은 물론 창고와 편의 시설이 있는데 외형적으로는 마추피추와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다
기찻길 옆으로 우루밤바 강이 흐르는데 이 강이 아마존 강의 원류이다. 기차에서 내리면 마추피추까지 수시로 버스가 운행하며 마추피추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당초 기대한 황금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탐험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빙험의 표지석이 있다.
1911년 빙엄이 왕궁과 신전 따위를 발견한 후 1956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발굴과 복원이 1974년에 끝나 마추피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고대 유적 관광지가 되었고 2007년 ‘신세계 7대 걸작품’ 중에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마추피추는 매일 밀려드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자연붕괴’가 아니라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자 유네스코는 페루 당국에 마추피추는 물론이고, 쿠스코를 출발해 걸어서 아프리막 계곡을 거쳐 마추피추에 이르는 이른바 ‘잉카 트레일’ 관광코스의 관광객 수를 대폭 통제하는 등 세계적인 유적지의 관리에 신중을 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더구나 재난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1970년대 유적지 내 헬기 착륙 허용으로 일부 손상을 입었으며 1997년 마추피추 유적지 인근 숲속에서 발생한 화재로 파손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인근 지역에서 생겨난 불길이 거세지면서 마추피추를 위협했는데 다행히 구조대원 수백 명이 출동해 불길을 잡았다.
2000년에는 맥주 광고 선전을 촬영하던 중 마추피추 최고점에 있는 돌로 만든 해시계 즉 천문대 역할을 한 인티와타나(Intihuatana)가 일부 깨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2001년 일본 교토(京都)대학 방재연구소도 마추피추 유적지의 뒤쪽 경사면이 한 달에 1센티미터씩 아래 계곡으로 흘러내리고 있어 언제 붕괴할지 모를 정도로 지반이 취약한 상태라고 경고한 바 있다. 마추피추는 두 개의 산 능선 사이, 더 높은 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퇴적토양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물을 얻기 쉽고 곡식을 경작할 수 있지만 지반은 취약하다.
물론 페루 정부는 현재의 관광객 정도는 마추피추 유적지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면서도 유네스코의 우려에 대한 답변으로 관련 기관들을 통해 실태 조사를 실시하고 근간 산사태 예방 위성통제 시스템 등을 갖추고 하루 입장 관광객 숫자도 통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보존대책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마추피추 인근 주민들은 관광객 숫자를 제한할 경우 수입 감소로 생계에 큰 타격을 받는다며 정부의 보존 대책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문화재 보존이 먼저냐 생존이 먼저냐는 문제는 마추피추에서도 일어나고 있지만 사태가 악화되면 인간의 접촉이 거부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빌카밤바를 찾아서
마추피추는 손상이 없이 방치되었기 때문에 더욱 소문이 무성했으나 여하튼 빌카밤바가 아니므로 빌카밤바에 대한 학자들의 탐사는 계속되었다. 마추피추가 빌카밤바가 아니라면 망코 2세의 보물은 어딘가에 아직도 있다는 설명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도 페루 각지에서 빌카밤바를 찾으려는 탐험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이다.
1964년 미국인 진 새보이가 계속했다. 새보이는 빙험이 에스피리투팜파에서 발견한 폐허를 빌카밤바로 추정했다. 새보이가 이 지역을 빌카밤바로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잉카의 양식대로 석재들이 배열되었고 쿠스코에서 발견된 것과 흡사한 목욕장이 있다.
둘째 대형 건축물의 벽이 ‘빨간 도자기와 같은 치장 회반죽 또는 테라코타’로 덮여 있었고 유럽식으로 만들어진 기와용 타일이 상당히 발굴되었다. 이는 당시까지 아메리카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양식으로 약탈에 참가한 스페인인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하면서 건설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정복자 콩키스타도레스들이 쓰던 것과 똑같은 말 편자도 발견되었다. 그의 발견은 스페인의 수사(修士) 마르틴 데 모루아의 보고와 맞아떨어진다.
“망코는 지붕을 타일로 덮은 2층 건물을 빌카밤바에 짓도록 했다. 이 저택은 향기 높은 향나무로 문을 만들었으며 갖가지 그림으로 장식했다.”
새보이는 오두막에서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옥수수를 발견했고 금으로 독수리를 수놓은 망토, 청동연장, 도자기 등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새보이의 주장에 의문을 표시하고 또 다른 유적에 주목했다.
아툰 빌카밤바라고 불리는 유적은 3제곱킬로미터가 조금 넘는데 도시의 입구에 커다란 하나의 돌이 세워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이 돌이 잉카의 전통인 사다리꼴이 아니라 반달형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이 유적이 스페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며 특히 유적의 이름이 아툰 빌카밤바인 것을 볼 때 진정한 빌카밤바일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란파하텐이라는 유적지도 빌카밤바의 대상지이다. 이 도시는 해발 3천 미터쯤 되는 초생달 모양의 벼랑 위에 있는데 건축물들이 모두 원형이었다. 항공 탐사에 의해 그란파하텐에는 수많은 유적들이 있고 도로의 너비가 24미터나 되었다. 이곳은 망코가 차차포야 족과 연맹을 맺으려고 한 길목에 있으므로 빌키밤바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2001년 내셔널지오그래픽 팀은 잉카인들의 정착지인 코리와이라치나를 발견했다. 케추아어로 ‘바람으로 금을 제련하는 곳’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마을은 빌카밤바 산맥 남부에 있다. 이곳에서 원형주거지, 농작물 창고, 도로, 장례탑, 묘지, 의례용 제단 등 200개가 넘는 건축물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이들 규모로 볼 때 잉카의 왕족들이 1537년 스페인을 상대로 완강한 투쟁을 벌리기 위해 빌카밤바 지역으로 후퇴했는데 이곳이 망코와 그 아들들의 추종자들이 피신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추정이다. 그것은 이곳이 초케퀴라오에서 2일 밖에 걸리지 않는 데다가 잉카족이 건설한 것이 틀림없는 광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4년에 이곳을 발굴하자 수많은 잉카 장식 토기들이 발굴되었지만 수십 채의 원형 건물터는 전형적인 잉카 건축물이 아니었다. 또한 지하 석관묘들도 잉카의 것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이들 유적이 잉카족에게 정복 당한 코야족의 양식으로 추정한다.
학자들에 따라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초케퀴라오, 마추피추, 아툰 빌카밤바, 그란파하텐, 코리와이라치나 중에서 어느 것이 빌카밤바일 가능성은 아직도 가능하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신중하다. 아직도 조사하지 않은 유적이 수없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들이 발견되면 신비의 잉카 제국에 대한 진상은 더욱 진실로 나타날 것이다.
참고적으로 유럽의 발전이 얼마나 신대륙의 황금으로 이루어졌는가는 컬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인 1492년도의 유럽이 갖고 있는 총 금 보유량은 90톤이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약탈한 지 100년 후 유럽의 금 보유량은 무려 8배가 되었다.
마추피추
마추픽추 안내 ♣
깎아지른 절벽과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우루밤바 계곡. 마추픽추는 이 우루밤바 계곡지대의 해발 2,280m 정상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 라는 뜻인데,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도시' 라고도 불리웁니다. 16세기 후반, 잉카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곳
마추픽추를 버리고 더 깊숙한 오지로 떠났습니다. 그 뒤 약 400년 동안 사람 눈에 띄지 않다가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 빙엄에 의해
발견되어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 마추픽추
관광 ◈
☞ 태양의 신전, 왕녀궁전, 신선한 광장, 해시계 태양의 불, 정의선, 콘도르의 신전과 감옥 등
관광
리마
페루 중앙부 카야오항(港)에서 약 10km, 태평양 연안(沿岸)에 면한 산크리스토발 대지(臺地)의 기슭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고도(古都)이다. 적도 부근, 연안 사막지대에 위치하나, 페루해류의 영향을 받아 기온은 그다지 높지 않고, 월평균기온은 2월이 22.5℃로 가장 높고, 8월이 15℃ 정도로 가장 낮다. 1535년 에스파냐인(人)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제왕(諸王)의 도읍’으로 건설해 19세기 초 남아메리카 각국이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남아메리카에 있는 에스파냐 영토 전체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상업중심지이기도 하며, 외항 카야오를 안고 있는데, 세로데파스코의 광업지역과는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면방적·제분·양조·유리 등의 공장이 주변에 입지한다. 시내에는 1551년에 설립된 남아메리카 최고(最古)의 산마르코스대학, 1563년에 건설된, 역시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 있다. 현재도 옛 식민지시대의 장려한 건물이 근대적 고층건물 속에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식민 초기에 건설된 대통령 관저를 비롯한 많은 옛 교회·궁전·박물관·미술관·공원 등이 있다. 특히 인류고고학박물관에는 잉카를 비롯해 치무·나스카·파차카막 등의 선(先) 잉카문화를 나타내는 많은 직물·도기·미라 등이 진열되어 있어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로 알려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리마대성당Catedral de Lima
아르마스 광장에서 동쪽으로 도보 3분
리마에서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로 손꼽히는 대성당은 페루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스페인 침략 군대를 이끈 피사로가 직접 주춧돌을 놓았다고 해서 더욱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스페인의 주류 양식이었던 바로크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지어진 대성당은 몇 차례의 대지진으로 손상을 입은 후 1755년 최종적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아르마스 광장의 동쪽 면적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대성당은 당시 스페인 사람들의 가톨릭 신앙심을 그대로 반영한 듯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는 대통령 궁과 비교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고풍스러우면서도 대담한 조각과 장식들로 위풍당당함을 자랑한다. 대성당 앞의 넓은 계단에는 광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한가로움을 즐긴다. 성당 내부 또한 화려하게 장식된 여러 제단들과 각종 그림들로 꾸며져 있으며 피사로의 초상화와 유해가 성당 한쪽에 안치되어 있다.
페루 대통령궁Palacio de Gobierno
아르마스 광장에서 맞은편, 도보 3분
피사로가 설계한 페루의 정부 청사 건물, 피사로 궁, Casa de Pizarro
최초의 대통령 궁은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피사로가 직접 설계를 담당했으며 그 때문에 피사로 궁(Casa de Pizarro)이라는 별칭을 갖기도 했다. 이후 현재의 건물은 1937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페루의 정부 청사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엄 있게 펄럭이는 페루 국기와 건물 꼭대기의 정면에 달린 붉은 휘장이 대통령 궁임을 알리는 가운데 날카로운 검은 철창이 건물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맞은편 아르마스 광장의 평화로운 휴식 광경과는 대조적으로 총칼을 차고 경호를 서는 군인들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건물 옆쪽에 대기하고 있는 기관총 달린 장갑차를 통해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일 정오에 이루어지는 근위병 교대식은 대통령 궁의 또 하나의 볼거리로 장난감 병정처럼 기계적인 동작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운이 좋으면 궁을 드나드는 고위 간부와 대통령의 모습도 직접 목격할 수 있다.
아르마스 광장Lima Plaza de Armas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아름다운 장소
아르마스 광장에서 가장 압도적인 건물은 대성당이다. 잉카 시대의 비라코차 신전 자리에 세워진 교회다. 100년에 걸쳐 지었다는 이 성당의 은 300톤을 부어 만든 제단은 카톨릭 교단과 정복자들의 탐욕을 드러낸다. 대성당을 등지고 서서 왼쪽 편에 서 있는 교회는 라콤파니아데헤수스 교회. 잉카 11대 황제 우아이나 카팍의 궁전을 부수고 세웠다.
예사롭지 않은 위용을 자랑하는 식민지 시대의 유럽풍 건축물들로 둘러싸인 아르마스 광장과 그 주변부는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건축물로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열대 나무들이 인상적인 푸른 광장 안은 언제나 휴식을 즐기는 시민들로 가득하며, 그 주변으로 관광용 마차를 끄는 흰 말과 마부를 볼 수 있다. 광장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각각 대통령 궁과 대성당이 위치하며, 나머지 양쪽과 산 마르틴 광장으로 이어지는 우니온 거리(Jr. de la Unión)를 따라 번화한 거리가 형성되었다. 이는 센트로 지구의 메인 거리로 옷가게, 카페, 음식점 등 온갖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이곳에 간다면 특히 저렴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아이스크림과 즉석에서 요리를 해 판매하는 피자를 꼭 먹어 보도록 하자. 그 밖에도 각종 먹을거리들을 판매하는 크고 작은 가게들을 지나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 리마
안내 ♣
리마는 페루 중앙부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고도(古都)입니다. 적도 부근, 연안 사막지대에 위치하나 페루 해류의
영향을 받아 기온은 그다지 높지 않아 평온한 기후를 보입니다. 1535년 에스파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제왕의 도읍'으로 건설하여 19세기 초
남아메리카 각국이 에스파냐부터 독립할 때까지 남아메리카에 있는 에스파냐 영토 전체의 주도가 되었습니다.
리마
◈ 리마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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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마 구 시가지 [대성당, 대통령궁, 아르마스 광장 등]
☞ 리마 신 시가지 [센트럴 공원, 라 르꼬마르, 사랑의 공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