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3: 6 가증하고 더러운 것 - 나 3: 7 니느웨가 황폐하였다.
나 3: 6 가증하고 더러운 것 -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
1]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앗수르 왕과 니느웨가 멸망하여 능욕당하며 구경거리가 되는 이유
(1) 앗수르는 이기적인 나라였다.
앗수르는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였다.
피정복 국가의 문화, 행복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배려가 없었다.
일단 나라를 침략하면 그 백성을 다 죽이고 일부는 살려줘서 온 세계에 앗수르가 자기 나라 백성을 다 죽였다고 소문을 내게 하였다.
피정복 국가에도 인권이 있고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 지켜달라고 항변하면 그 눈을 뽑아버리고 목을 잘라 버렸다.
앗수르 왕 이외에 권리를 가진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이처럼 이기적인 나라나 사람이 멸망하면 아무도 위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사람은 아무에게도 덕을 끼치지 않고 아무에게도 선을 베풀지 않으며 아무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아무도 위로하지 않는다.
이기심은 결국 고독을 초래하고 고독은 멸망을 낳는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이 행복하고 위로받는 길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자타에 해롭다. 성도들은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아야 한다.
(2) 앗수르는 잔인한 나라였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 도다.” (3: 1).
앗수르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했다.
그들은 속임수를 쓰고 폭력을 행사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앗수르 왕 산헤립과 군대장관 랍사게는 열왕기하 18, 19장에서 히스기야 왕을 공격할 때도 백성을 거짓말로 속였다.
항복만 하면 곡식과 포도주가 있고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으로 옮겨주겠다고 하였다.
예루살렘에도 곡식과 포도주가 있지만 앗수르 군대가 포위하고 괴롭히니까 못 먹는 것이지 없어서 못 먹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앗수르 왕 산헤립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대변을 먹으려 하며 너희 소변을 마시려 하느냐?”며 항복하면 좋은 땅으로 옮겨주겠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만약 이때 예루살렘 백성이 이 말에 속아서 항복했다면 앗수르 왕은 줄을 세워 칼로 그들의 목을 쳤을 것이다.
앗수르는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는 잔인한 나라였다.
앗수르 왕이 죽고 귀족이 죽었는데도 사람들이 손뼉 치고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3: 19).
악행이라는 말은 잔인함을 의미한다.
앗수르 왕은 어쩌다 한번 잔인한 것이 아니고 항상 잔인했다.
이렇게 잔인한 사람은 죽어도 위로받을 수 없다.
* 잠 12: 10 -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악인들은 잔인하여 육축의 생명도 멸시하고 사람의 생명도 멸시한다.
이런 자들은 죽어도 조문객이 없다.
오늘날 짐승을 학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인적이 드문 도로에 갔다 버린다.
또 동물들을 학대하는 것을 영상으로 찍으면서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잔인한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다.
(3) 앗수르는 교만한 나라였다.
인간을 향한 교만한 것까지는 참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교만했다.
* 왕하 18: 35 -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 왕하 19: 28 -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교만한 마음으로 손을 들어 하나님을 치는 자, 입을 열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상대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있다.
그것은 ‘갈고리’였다.
갈고리로 코를 꿰어 아프다고 소리 지르니까 재갈을 먹여 끌고 가는 것이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그렇게 자기 나라로 끌어가서 자기 아들들이 죽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었다.
앗수르는 교만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지 않으셨다.
(4) 앗수르는 음행과 마술로 열국을 미혹하는 나라였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주위에 위치한 매우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였다.
앗수르는 미의 여신 비너스를 섬기는 도시로 니느웨 성에는 법이 있었는데 모든 앗수르의 여인들은 비너스 신전에서 평생 한 번 이상 모르는 낯선 남자와 음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앗수르의 여인들은 모르는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악령의 힘을 빌리는 마술이나 마법을 이용하고 갖가지 몸에 향수를 뿌렸다.
이렇게 길거리를 다니면서 남자들을 유혹해 비너스 신전에서 음행하였다.
앗수르는 이렇게 영적으로 악령을 숭배하고 육신적으로는 음행을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앗수르가 열국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미혹하는 수단이었다.
나 3: 7 니느웨가 황폐하였다 -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 )
앞에서 그러했던 것처럼(1절), 본 절에서도 여호와의 판결에 대한 애곡으로 일단락을 마친다.
여기서 언급된 애곡은 비통함이 아닌, 멸절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타내는 놀라움이다.
1절에서는 니느웨 성이 멸망하게 될 가능성(2: 13) 때문에 애곡하였으나, 여기서는 멸망의 모습을 확인하고 놀라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1]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사람이 일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사람의 장례식을 가보면 알 수 있다.
자녀를 많이 낳아 기르는 일에 수고하고 덕을 세우며 살았던 사람은 장례식에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상주도 여러 명이고 조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일생을 이웃에 덕을 쌓지 못하고, 사람과 교제하는 것도 싫어하고, 자녀도 낳지 않으며 외롭게 산 사람의 장례식은 상주도 없고 조문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또 일생에 악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며 살았던 사람은 장례식에 위문을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죽었다고 손뼉 치는 경우도 있다.
나훔 3장은 앗수르 왕과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의 장례식에서 부르는 장송곡이다.
일반적으로 장송곡은 고인의 덕을 치하하고 죽음을 슬퍼하며 유가족을 위로하는 노래이지만 앗수르의 멸망을 노래하는 장송곡은 일반적인 장송곡과는 차이가 있다.
2]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야누드 라'는 단수형으로 애곡할 사람이 단 한 사람조차 없다는 의미로 남은 자가 하나도 없이 완전히 진멸되리라는 것이다.
이 예언대로 니느웨는 완전히 사라졌고, 결코 재건되지 못했다.
'케임브리지 고대사'에서 언급된 대로, '역사상 앗수르 만큼 완벽하게 약탈과 노략을 당했던 나라는 없을 것이다'.
3]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슬픔이 너무 커서 사람들이 와서 위로해도 위로받는 것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
* 마 2: 18 -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하지만 니느웨의 경우는 위로할 자, 애곡할 자를 아무리 찾아봐도 올 사람이 없다.
상주도 없고 조문하는 사람도 없는 황무한 장례식이다.
앗수르 왕과 니느웨의 멸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박수치며 좋아한다는 것이다.(3: 19)
* 잠 11: 10 -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하나님께서도 앗수르의 죽음을 위로하지 않고 조롱하신다. 이것을 거룩한 야유(Holy sarcasm)라고 한다.
* 시 2: 4 -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 잠 3: 34 -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2장 후반부터 3장까지 일곱 가지 조롱이 기록되어 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로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멸망을 철저하게 조롱하신다는 의미이다.
(1) 2장 후반에 나오는 사자 조롱
니느웨 군사들은 사자 같고 니느웨는 사자의 굴과 같아서 먹을 것이 가득하더니 이제 그 사자들은 모두 칼에 죽었고 사자의 굴에는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
사자들과 사자의 굴에 있던 먹이는 모두 어디 갔냐고 조롱하였다.
(2) 3장 1~3절의 잔인성의 조롱
니느웨가 지나치게 잔인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바벨론에게 니느웨가 그 잔인함을 당하게 되었다.
(3) 3장 4~7절의 기생 조롱
니느웨가 기생처럼 열국을 미혹하더니 이제는 능욕 거리가 되었고 구경 거리가 되었다고 조롱하였다.
(4) 3장 8~11절의 노아몬 조롱
니느웨가 애굽의 수도인 노아몬(테베)을 멸망시키더니 이제는 너희도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
(5) 3장 12~14절 방비 조롱
니느웨가 바벨론을 향해 온갖 방비를 다 하더니 그 방비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산성을 세웠지만 그 산성이 무너지는 것이 잘 익어 떨어지는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떨어지고 힘을 자랑하던 장정들은 연약한 여인처럼 되었다.
(6) 3장 15~17절의 메뚜기 조롱
니느웨에 장군들이 많다고 자랑하더니 모두 메뚜기 같이 날아가 버렸다.
(7) 3장 18절~19절의 장례식 조롱
너희 목자들이 잠들었는 줄 알았더니 죽었고 귀족들이 누워서 쉬고 있는 줄 알았더니 죽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손뼉 치고 기뻐하는 이상한 장례식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조롱이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