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발췌" 정유년(丁酉年) 선조(宣祖)30년, 1597년 (이순신 장군 53세 때)
15日 (癸卯) 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을 우수영 (右水營):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 (鳴梁)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하되,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 망정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히 약속 하였다. 이날 밤 신인 (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하였다.
16日 (甲辰) 맑음.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 부대가 보고하기를 『적선이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이 명량 (鳴梁)으로 해서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들어온다.』고 하였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백 30여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는 것이라 스스로 낙심하고 모두 회피할 꾀만 내는데 우수사 김 억두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져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地字), 현자 (玄字)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은 폭풍우 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려갔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도라다보며 얼굴빛이 질렸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화고 여러 장수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 해도 적들이 더 대어들 것이라 나가도 돌아서도 못 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中軍에게 군령을 내리는 기 (旗)를 세우라고 하고, 또 초요기 (招搖旗)를 세웠더니 중군장 (中軍將) 미조항첨사 (彌助項僉事) 김 응함 (金應諴)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히 왔으며, 거제현령 (巨濟縣令) 안 위 (安衛)를 불러 『안 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안 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 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 (中軍)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령하여 일시에 안 위의 배에 개미 붙듯하여 서로 먼저 올라 가려 하니 안 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창으로, 또 혹 수마석 (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치고 막다가 배 위의 사람이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 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진 다 엎어지고 자빠졌을 때 녹도 만호 (宋汝悰)와 평산포대장 (平山浦代將) 정 응두 (丁 應斗)의 배가 뒤좇아 와서 합력해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투항한 왜인 준사 (俊沙)는안골 (安骨) 있는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 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이 있던 적장 마다시 (馬多時: 來島通總)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 (無上: 물 긷는 군사) 김 돌손 (金乭孫)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린즉 준사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그래 마다시다』하고 말하므로 곧 명령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였다.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가 지자 (地字), 현자 (玄字)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이 퇴각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싸움하던 바다에서 그대로 정박하고 싶었으나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이라 형세 또한 위태롭고 외로와 당사도 (唐笥島:무안군 安泰面)로 옮겨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참으로 천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