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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열전 216〛
결핍으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의 역사
극작가
김문홍
한국연극협회 부산지부장(역임)
부산극작가협회 회장 역임
『안개주의보』 등 창작희곡집(6권)
연극평론집(4권) 등 50여 권
부산연극제희곡상 5회 수상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상 수상
부산시문화상, 부산예술대상
이주홍문학상, 한국동화문학상
자랑스런 연극인상 등 수상
최우석 원장의 후원으로
김문홍희곡상 제장(2014〜현재)
뿌리가 흔들린 유년의 시간
선생은 1945년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면 동천리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음력 2월생이니 그 시간은 긴 겨울 끝, 봄의 훈풍을 기대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음력 2월이라 여전히 춥지만, 그래도 봄이 오는 길목에서 선생은 첫째로 태어났다. 귀한 장남이었다. 허나 어떤 복잡한 사정으로 부모님은 선생을 큰집에 맡겨두고 고향을 떠나 부산 등 대처에서 떠도는 바람에 선생의 유년에는 부모가 부재했다.
부모의 결핍을 큰집 식구들이 채웠다. 선생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그리고 사촌 누이와 형들에 싸여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바다를 낀 완도의 넉넉한 자연은 선생을 유순한 성격을 가진 존재로 만들었다. 부모가 사라진 자리, 대가족과 자연은 선생의 울타리였다. 특히 젖을 빨던 백모의 가슴과 열 살 나이 차이가 나는 누이의 등은 부러울 게 없는 그대로 완벽하고 안전한 세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어느 날 낯선 여인이 선생을 데리러 왔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놀랍게도 여인은 선생의 어머니였다. 8살이 된 아들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선생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낯선 공간, 부산으로 오게 된다. 선생이 처음 발을 디뎠을 당시 부산은 전후의 공간. 모든 곳이 황폐하고 낯선 곳이었지만, 가장 낯선 것은 바로 어머니라는 존재였다.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부산이라는 낯선 공간과 엄마라는 더 낯선 존재. 그것이 8살 소년에게 놓인 이루 말할 수 없는 분열과 혼돈의 세계였다. 어머니로 알고 젖을 빨던 백모 그리고 어머니였지만 낯선 친모, 그 간극은 어린 소년에게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거리였다.
부모 곁으로 왔지만 아버지는 사업으로 바람처럼 사셨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장사 일로 집을 비우는 바람에 주변은 늘 적막했다. 외로웠다. 부모님 곁이라고는 하지만 선생은 완도가 그리워 향수병에 걸릴 정도였다. 부산에서 6학년을 다니던 때, 불현듯 집을 뛰쳐나와 완도로 가는 배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그러고도 먼 길을 걸어서 도착한 큰집의 앞마당에 기진맥진 쓰러져 있기도 했다. 그런 동생을 다시 부산으로 돌려보내야 했던 사촌 형과 형의 손에 이끌려 다시 부산으로 오는 선생의 유년을 상상하면, 참 마음이 먹먹해진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아버지 사업이 기울 대로 기울어서 다시 완도 큰집에 맡겨진다. 그리고 일 년 지나 다시 부산행. 완도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완도로, 다시 부산으로 거듭하는 공간이동과 큰집과 부모 사이를 오가면서 흔들린 뿌리가 선생에게 놓인 삶의 조건이었다. 허나 그럴수록 고향의 자연과 큰집에서 경험한 공동체는 영원한 현재의 기억으로 깊이 남게 된다. 훗날 큰어머니의 죽음과 사촌누이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서럽게 울었던 것은 죽음이 주는 슬픔은 물론 자신이 굳건하게 뿌리를 뻗을 수 있었던 존재의 사라짐에 대한 비통함이었을 것이다. 마치 유년을 가꾸어 준 사랑으로서의 원체험이 증발하는 것 같은 느낌에서 오는 두려움과 혼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세계에 빠진 청소년 시절
부산에 처음 와서 수정동과 부전동에서 살았다. 부모님의 부재도 힘들었지만 잦은 이사로 주위에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수성초등학교, 수정초등학교, 성지초등학교를 거치면서 쉽게 뿌리내리지 못한 생활을 이어갔다. 수업 중에도 밖으로 뛰쳐나가야 할 정도로 적응하기 힘들었다. 엄청난 방황의 시간이었다.
이 점에서 영도라는 공간은 선생에게 특별한 공간이다. 중학생이 되면서 영도로 이사를 하는데, 지금 한진중공업 자리인 대한조선공사 앞에서 살다가 봉래동 산복도로 단칸방에서 보금자리를 튼다. 중학생에서 대학생까지 그리고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을 때까지 무려 12년을 살았던 공간이 영도이니, 영도는 선생에게 정체성을 만들어 준 공간이다. 이때부터 선생의 방황도 진정되는 듯했다. 완도를 향해서 무작정 달려가는 일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허전했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 어찌할 수 없는 결핍은 선생을 이야기 세계에 빠져들게 했다. 그것은 바로 라디오드라마와 영화의 세계였다. 특히 영화는 선생에게 어머니로부터 채울 수 없는 애정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검은 화면에 펼쳐지는 신세계는 잠시 현실의 답답함을 해소해주고 선생을 미지의 세계, 환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특히 선생이 중학생이었던 1960년도는 대한민국 영화의 르네상스기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제작비 규모가 늘어나고 영화 관객이 폭증한 시기였다. <성춘향>, <마부>, <현해탄은 알고 있다> 등 여러 작품이 개봉되었고 TV가 보급되기 전 최고의 볼거리는 단연 영화였다.
선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누구보다도 이야기의 세계에 탐닉했다. 지금 부산일보 자리에 있던 동아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선생은 학교보다 극장을 순례하는 일로 하루를 채웠다. 초량 수정극장, 서면 북성극장을 바람처럼 쏘다녔다. 하루 종일 극장에서 똑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곤 했다. 선생에게 극장은 학교였고 마음의 정부였다.
1963 부산고등학교 입학에 실패하고 영도 집과 가까운 해동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선생은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시를 쓴다. 감정의 직접적 토로라는 점에서 선생에게 시는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어린 시절 보고 느꼈던 완도라는 자연이 주는 청신함이 그를 문학의 품으로 끌고 갔는지도 모른다. 생활에서는 수줍고 내성적이었지만 시 쓰기를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청소년들에게 유명한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학원』은 1952년에 창간해서 1969년까지 발행한 중고등학생 대상 교양 잡지이다. 특히 학원에서 주관, 시상한 ‘학원문학상’은 당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수상자는 문학을 하는 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선생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그만 ‘학원문학상’을 받게 된다. 시를 쓰던 선생은 이 상을 받으면서 스스로 산문에 재능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남이 만드는 이야기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영화와 다른 글쓰기의 행위가 주는 기쁨을 알게 되면서 선생은 바람처럼 정처 없는 마음을 글의 세계에서 붙잡을 수도 있을 거라는 예감을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소통의 무대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
1972년 대학을 입학했을 때 선생은 또래보다 7년 늦은 나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과 6학년 두 번의 재수강,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입대와 제대 후 재수 등으로 늦어진 것이다. 늦은 나이였지만 대학에서는 활동적으로 대학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중에서도 연극을 만난 것은 돌아서 생각해 보면 운명이었다.
삶에서 누구를 만나는 것인가는 참으로 중요하다. 대학 시절 만난 이충섭 교수(1934-2022)는 국어교육과 교수이자 극예술연구회 지도교수였는데, 선생에게 연극의 세계를 알도록 했다. 바로 한새벌 극단과의 인연이었다. 한새벌 극단은 이충섭 교수와 교대극예술연구회 출신 교사들이 만든 극단으로 전국 최초 교사극단이다. 선생은 졸업 전이었지만 자연스럽게 극단에서 연극활동을 했다. 나이가 이미 졸업한 이들과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유대감이 형성되었으리라.
1975년 선생은 선생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해이다. 교사로서 첫 발령을 받았고 그해 7월 보길도 출신 아내와 결혼을 한 해이다. 또한 『한국문학』에 소설 <갯바람, 쓰러지다>로 소설가로 등단하더니, 그해 동화, 동시 작가로 한꺼번에 등단하게 된다. 그때 받은 상금은 몇 년 뒤 신혼살림을 위한 집을 구매하는 종잣돈이 된다. 소년 시절부터 뿌리 뽑힌 채 방황하던 그에게 글이 ‘집’이 되는 순간이었다. 문단에 ‘닻’을 내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1980년 선생은 <수직환상>이란 작품으로 극작가로 등단한다. 이로써 소설, 동화, 동시에 이어 희곡 작가로서 글쓰기가 시작된다. <수직환상>은 이수평이란 주인공이 수직적 상상력과 제도에 순치되는 글쓰기를 강요받는 작품이다. 또한 1980년대 엄혹한 정치적 상황과 억압적인 분위기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희곡이다. 이후 펼쳐질 김문홍의 저항적 글쓰기의 시초가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선생은 희곡집 6권을 출판하면서 부산의 대표적인 극작가가 된다. 공연된 희곡은 33편에 이른다.
선생은 여러 자리에서 희곡 쓰기의 매력을 ‘현장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희곡 쓰기는 작가가 쓰는 희곡의 공과를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희곡은 소통적 글쓰기이다. 작가에서 연출가로, 배우로, 그리고 관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상호소통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희곡적 글쓰기는 무엇보다 어렵고 또한 매력적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들어내는 집단적 예술인 연극의 뜨거운 소통은 선생이 유년 시절부터 품은 외로움을 상쇄하려는 무의식적인 이끌림일 수도 있으리라.
죽음을 연습하는 삶
연극 <예술가의 자서전>(2017)에서 선생이 직접 배우로 등장하는데, 이때 선생은 자신의 독특한 버릇을 말한 바 있다. 지하철을 내려 계단을 오를 때 층계 수를 헤아려 현재의 나이에다 그 숫자를 합해, 합한 그 숫자가 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면 하는 나이를 추정하는 버릇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수록 죽었으면 하는 나이가 더 늘어날 것이니 이는 당연히 현실성이 없는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에 기대어 자기 수명을 예측해 보는 이 버릇을 두고 인간이 그만큼 유약한 존재라고만 말할 수 없다. 그 속에는 삶 속에서 죽음을 예비하는 자세 혹은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삶이 끝나는 순간 죽음이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을 예비하면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마치 그것은 갠지즈강의 상징적 풍경을 연상케 한다. 산자의 생활과 죽은 자의 초월이 동시에 하나의 강으로 흐르는 갠지즈강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일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풍경이 아닐까.
요즘 선생은 좋아하는 명언을 입버릇처럼 외운다고 한다.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금 당장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지 안되는 것처럼, 남겨진 시간을 뜻밖의 선물로 생각하고 살라”라는 구절이다. 하루하루를 선물처럼 귀하게 받고 하루의 시간으로 죽음을 긍정적으로 예비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열심히 사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년에 여든을 맞는 선생은 평생 썼던 문학 장르를 하나씩 정리하고 있다. 지난해 여섯 번째 희곡집 『섬섬옥수』를 내고 고별 콘서트를 열었고, 내년에도 역시 여섯 번째 소설집으로 『설야 행』이라는 중단편집을 내고 고별 콘서트를 열 계획에 있다. 그동안 나온 책을 장르별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화집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과 희곡, 동화, 창작 활동의 연보도 정리하고 있다. 이건 일종의 자기최면으로 하나씩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일종의 죽음 예행연습. 눈이 침침하고 귀가 어두워가는 삶의 뒤안길에서 자기 삶에 대한 인식은 더 또렷해져서 하루하루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노인의 삶에 켜켜이 쌓인 지식과 지혜와 경험이 마치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는 말이다. 특히 그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만 보내고 나이를 먹은 이가 아니라면 더 그러하다. 선생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문학과 연극 이야기는 물론이고 비평, 연구, 교육, 연극 기록 등등 그 지평이 넓고 무궁무진하여 도서관 하나를 탐색하는 듯하다. 그 점에서 김문홍은 부산 문학과 연극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김영희(경성대 미래인재교양학부,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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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문홍 선생님의 일대기를 봤네요.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에 큰박수 보냅니다.
선생님 올해도 더 건강 잘 챙기시고 좋은 작품 기대할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문홍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소상히 나옵니다.
완도와 부산을 오고가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부모인 줄 알았는데 큰집이고
낯선 부산에서 만난 엄마는 어색하기만 하고.
영화에 빠진 소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작가가 되려고 그런 시련이 있었나 봅니다.
연극인이 되라고 하늘은 선생님 인생에 상처를 줬어요.
언제나 젊은 청년 김문홍 선생님!
올 한해도 재미난 이야기 많이 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