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11~16 / 청년아, 일어나라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부활절이 일주 안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되고 다음 주일은 부활절입니다. 누가 부활을 믿는 사람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청년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평생 청년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전에 청년은 20대라고 생각했습니다. UN에서는 청년을 18-65세라고 새로 청년의 나이를 정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말하는 청년은 UN의 기준과 전혀 다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20대라도 늙은입니다. 그들은 피곤하고 지치고 꿈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비록 90살이라도 청년입니다. 그는 평생을 청년같이 활기차고, 꿈꾸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절을 통해서 평생을 청년같이 살다가 천국에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1~12절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나인은 ‘아름다운’이라는 뜻으로 나인성은 매우 아름다운 성입니다. 예수님이 그 아름다운 성으로 가시니 제자들과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나인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한 슬픈 장례 행렬을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슬피 울며 나오고 뒤에는 아들의 상여가 오고 그 뒤에는 많이 성의 사람들이 그 상여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과부인데 참으로 슬픈 여자입니다. 당시에 여자는 경제 능력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여자에게 남편은 사랑의 대상이요 실제적인 의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이 죽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남편을 잃으면 과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생계를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죄가 아니고 매우 합법적인 것입니다.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결혼하지 않고 과부로 살았습니다. 왜 과부는 결혼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상처받지 않고 곱게 키우고자 결혼하지 않고 평생 과부로 살았을 것입니다. 아들을 키우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여자에게 아들은 아들이면서 남편이요,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 청년이 되면서 남편이 죽은 슬픔도 많이 위로받았습니다.
남편 없이 살아온 고생도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마저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가는 것은 순서가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늙은이만 죽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도 죽습니다. 과부는 아들이 죽어서 하늘이 두 번째로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생의 모든 소망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들이 죽으면 아들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내가 잘못해서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과부는 장례 행렬 앞에서 간신히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13절 예수님은 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슬픔에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슬픔을 깊이 공감하며 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외아들입니다. 30세의 청년입니다. 예수님도 얼마 후에 청년으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상을 당하고 우는 사람에게 부활이 있는데 왜 우느냐고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우는 사람은 울게 두어야 합니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슬픔이 없어집니다. 더 나아가 함께 울어주어야 합니다.
함께 울어주어야 참된 위로를 얻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내가 죽었을 때 슬피 울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도 성도들은 크게 울었습니다.
예수도 나사로의 집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아들을 위해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울어야 하지만 너무 오래 울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썩지 않고 아름답고 강한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나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죽을 때 스데반이 자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후에 아름다운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를 진정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슬퍼할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입니다. 이들도 부활합니다. 이들은 부활하여 영원한 고통을 당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 슬퍼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죽은 사람은 암도, 코로나도, 심근경색도 없는 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곳은 슬픔도 고통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잠시 이별하지만,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죽은 사람을 위해 너무 많이 울지 말고, 예수 믿지 않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울며 기도해야 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14~15절 예수님은 과부를 위로하시고 가까이 가셔서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유대인의 관 뚜껑은 열려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어 장례 행렬을 멈추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때는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도 “사울아 사울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의 이름을 아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청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청년아, 부르셨습니다.
모든 청년은 누워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청년은 청년답게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청년을 청년답게 하십니다. 청년 아닌 사람들도 청년답게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청년처럼 활기차게 하십니다. 청년의 특징은 피곤치 않고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청년은 새로운 일에 도전합니다.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청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피곤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청년이라도 피곤해합니다.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그러나 청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달려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힘을 얻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피곤을 쉽게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마음만큼은 피곤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주시는 힘이 솟아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십니다.
또한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청년의 특징은 꿈을 갖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가능성이 있고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부활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어린이는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꾼다고 하였습니다. 어린이와 젊은이뿐만 아니라 늙은이도 꿈을 꿉니다.
늙은이도 영원한 하나님의 꿈을 꾸고, 하나님 나라를 가정과 교회에 건설하는 꿈을 꿉니다. 젊은이는 미래에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하실 환상을 보고 그 환상을 자신의 생애에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의 ‘일어나라’고 하시는 명령에 죽었던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아들을 주어 어머니를 위로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