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은 마지막 발악으로 SNS와 자필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아마, 검사시절 써봤던, 기소문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다.
정조 때 진사 강이천이 해적에 관한 소문을 퍼뜨려 부자들의 재물을 갈취한다는 고발이 있었다.
이 사기사건은 신속하게 처리되었지만 사건의 진실은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다. 알고 보면 그것은 문화투쟁이었다.
국왕 정조는 강이천으로 상징되는 진보 인사들을 상대로 이념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격렬한 문화투쟁을 벌였다.
강이천은 12살 때 정조를 알현하고 시를 바쳐 칭찬을 받은 전도유망한 선비였다.
하지만 그는 조부 강세황의 영향으로 명말청초의 패사소품(稗史小品)을 즐겨 읽다가 성리학을 팽개쳤다.
그는 자기 고백적이고 감성적인 소품을 빌려 소외의 문제에 접근하였고, 마침내는 주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천주교와 <정감록>, 그리고 조선의 해안을 출몰하는 서양 선박에 관한 소식이 그의 이단적 사고에 돛을 달아주었다.
문화적 안티테제에는 늘 시대의 무게가 작용하는 법이다.
정조는 강이천의 도전을 하찮게 여기는 듯 꾸며댔지만 속내는 달랐다.
왕은 자기 시대의 진보 지식인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못하게 억압했다.
사상 검열과 세뇌 작업에 착수했던 것인데, 과거시험이라는 통제수단에 많이 매달렸다.
권력의 핵심으로 직결되는 그 통로를 철저히 장악함으로써 왕은, 불량선비들을 걸러낼 생각이었다.
그가 문화투쟁에서 압승을 거두자 지배층의 체질은 더욱 보수화되어, 혁신의 꿈은 최제우 같은 ‘평민’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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