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월 손녀딸과 33개월 손주와 함께 제주도에 간다. 손주들을 위한 여행이 분명하지만 무조건 신이 난다. 손주들과 함께라는 것,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두 아이를 기르느라 고군분투하는 딸아이를 도와줄 기회이기도 하다. 물론 여행 계획과 운전은 딸과 사위가 도맡아 한다.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고 가끔 손주들과 놀아주면 되니, 놀고먹는 놀이 수준이다. 딸과 사위는 앞자리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기도 하고 속닥거리며 무엇을 먹을지 어디쯤에서 쉴지 세세히 의논하고 결정한다. 남과 여를 만들어내신 조물주의 뜻이 훤히 보인다.
손녀가 어리니 두 좌석은 비즈니스석으로 예약해 놓았다. 나와 딸아이와 손녀가 앞자리를 차지했다. 손녀가 처음 타 보는 비행기인지라 염려가 되기는 했다. 놀라서 울어버리거나 칭얼거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될 것이다. 딸아이와 내가 손녀를 교대로 안아주고 놀아 주었지만 낮잠을 잘 시간이 되니 칭얼거린다. 딸아이는 손녀가 잠들 때까지 일어서서 손녀를 안고 흔들어주고 토닥여준다. 그 시간이 20여 분을 넘는다. 거들고 싶지만 대신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을 향한 어미의 사랑을 딸에게서 보는 일, 짠하면서 기특하다.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것을 싫어하는 딸아이다. 새벽에 일어나 오늘을 시작했으니 제주 공항에서 숙소로 직행해서 쉬면 좋으련만은. 오늘 하루가 아깝단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에코랜드로 일정을 잡아놓았단다. 빽빽하고 울창하게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숲길 사이를 꼬마 기차를 타고 달려간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비자림이나 사려니숲길은 걸어보았지만 이곳은 처음이다. 중간 중간에 역이 있어서 산책을 하거나 주변을 구경할 수 있다. 역이 네 개인데 각각 특색이 있다. 에코브리지역에서 내렸다. 숲길을 산책하다가 커다란 호수를 만났다.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숲속 호수다. 다른 곳을 구경하러 다닐 필요가 있을까 생각될 만큼 아름답다. 힐링이라는 낱말과 잘 어울리는 장소다. 손자와 나란히 서서 호수를 구경하는 뒷모습 사진은 그곳의 편안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손자의 등에 올려진 내 손에서 느껴지는 사랑을 딸아이는 포착했던 모양이다.
세 번째 역은 포레스트파크역. 네 번째는 라벤더팜역. 라벤더팜 역에서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환호성을 지른다. 라벤더와 메밀꽃과 각종 알록달록한 꽃들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동화 속 들판이다. 너른 메밀꽃 밭에서는 소들을 만나고 푸른 들판에서는 말과 양과 염소를 만난다. 동물을 좋아하여 먹이를 주는 일을 좋아하는 손자인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말이 무섭다고 가까이 가지 않는다. 즐거워해야 할 손자가 완전 저기압이다. 새벽부터 움직였으니 피곤한 것이다. 푹 자고 나면 아침 해처럼 찬란해질텐데. 안타깝다. 밥먹이기 간식 먹이기 낮잠 재우기 등 시간을 맞추려고 딸아이는 애를 쓴다. 돌아다니다 보면 다 맞춰지지 않을 때가 있다.
숙소로 갔다. 뜨레시옷이라는 이름표가 보인다. 뜨레는 제주도 방언으로 함께 또는 같이 라는 뜻이란다. 아름드리 팽나무 두 그루가 노부부처럼 정원 입구에서 손을 흔들어 맞이해준다. 비스듬하면서 드넓은 언덕은 깔끔하게 다듬어진 잔디밭이다. 인조 토끼들이 무리 지어 놀고 있다. 잔디밭을 중심으로 흰 빛깔의 풀빌라 세 채가 자리 잡고 있다. 스위스를 연상시킨다. 제주 구좌읍 송당리에 위치한 키즈 풀빌라다. 새소리와 바람소리 외에는 소리가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천장이 높고 삼면이 유리창이고 흰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울타리는 화산석 돌을 쌓아 만들었고 대문은 긴 장대 세 개를 걸어놓았다. 구석구석 쓰임새 있고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다. 넓어도 너무 넓은 거실과 주방과 수영장과 아이들 놀이터와 넓은 방 두 개와 넓은 욕실 두 개. 60평이란다. 비수기라서 싼 가격으로 빌렸단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빌라를 빌리지는 못할 것이다. 안 할 것이다. 아무튼 넓고 깨끗하고 멋지고 조용하다.
다음날은 점보랜드와 뽀로로랜드로 갔다. 어른들은, 나이 먹은 사람들은 가지 않는 장소다. 점보랜드는 코끼리 쇼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당연히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선 젊은 부부들이 대부분이다. 거대한 코끼리가 박수를 치고 축구를 하고 농구를 하고 그림을 그린다. 박수가 절로 나온다. 코끼리의 지능은 특정 수치보다 사회적 판단, 협력, 자기 인식, 기억력 등 실제 행동을 통해 분석한다는데 지능이 60-70정도로 추정된단다. 어른들은 신기하다고 박수를 치는데 어린 아이들은 코끼리가 가까이 오면 울고불고 난리다. 거구이기도 하고 냄새도 심하다. 내 손자와 손녀도 그랬다. 코끼리 앞에서 손녀딸이 목 놓아 우는 사진이 있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코끼리 체험을 시키고 싶어하는 내 딸 부부를 비롯한 젊은이들의 열성에 박수를 보낸다.
뽀로로랜드는 뽀로로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를 이용한 놀이기구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뽀로로와 사진을 찍는 무대도 있다. 손자가 바이킹을 비롯하여 무엇이든 무서워하지 않고 신나게 탄다. 손녀는 고래를 타고 물위를 달리는 후룸라이드를 재미있어 한다. 손녀가 재미있어하니 나도 용기를 내어 올라타 본다. 경사진 면이 있기는 해도 아이들이 좋아할 수준이다. 10여년전 유니버셜스튜디오에서 후룸라이드를 탔던 일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정글 속 시냇물 위를 달리는 고요한 배였는데 어느 순간 100여미터 절벽과 폭포수가 나타나더니 그곳으로 우리가 탄 배가 곤두박질 쳤다. 모두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무서우면서 스릴 만점이었다. 온 몸이 푹 젖어 한참을 웃어댔다. 손자와 손녀와 딸이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정원을 꼬마기차를 타고 달린다. 손자와 손녀와 딸은 동화 속 주인공이다. 그 풍경처럼 살아가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레일바이크. 용눈이 오름을 중심으로 5키로를 달리는 레일바이크다. 예전에는 패달을 밟아야 움직였지만 이제는 그냥 앉아서 풍경을 구경만 하면 되니, 푸른 창공을 향해 날개를 부드럽게 펼쳐드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평화로운 시간 속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기도 하다. 드넓은 언덕길에는 수국이 천지인데 꽃피는 시기가 지나서 아쉽다. 손녀가 무서워하지 않고 함께 웃어주니 기쁨이 배가 된다. 들풀이 자라나고 들꽃이 피어나는 봄에 다시 오고 싶다.
숙소에서 김녕 해수욕장이 십 분 거리다. 놀랍게도 모래사장이 흰빛이다. 조개껍데기등 해양생물의 석회질 골격이 잘게 부서진 탄산칼슠 성분 때문이란다. 잠깐 들렀다 가려고 했으나 바닷물을 보자 손자는 물속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물을 좋아하는 손자다. 자식이 하고 싶어하고 즐거워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딸네 부부다. 처음에는 운동화와 양말을 벗기고 얕은 웅덩이에 손자를 들여보낸다. 발만 적시는거다 주저앉으면 안돼. 물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그 말이 무슨 소용인가. 결국은 사위가 운동화를 벗고 손자 손을 잡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노을이 지고 있다. 바다와 노을은 언제 봐도 가슴을 뛰게하고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저만치 손자를 안은 사위와 딸이 걸어오고 있다. 찰칵!
섭지 아쿠아리움. 성산 일출봉이 한눈에 보인다. 돌고래쇼를 보고 배를 타고 바다 밑을 구경한다. 물고기들에게 밥을 던져주는 체험이다. 수족관을 돌며 각종 물고기들을 구경하는데 그 중 으뜸은 대형 수족관이다. 대형 물고기들과 작은 물고기들이 뒤섞이거나 다투지 않고 각각에 맞는 높이에서 평화롭게 유영하는 모습은 경이롭다. 그 앞에서 손주와 손녀와 딸과 사위와 함께 앉아 여유롭게 수족관을 들여다보는 일은 수족관 속만큼이나 평화롭고 편안하다. 수족관 앞에서 할아버지 무릎에 다정하게 기대고 앉아있는 손자가 있고 손녀가 넘어질세라 손녀의 몸을 잡고 있는 할아버지가 있고 카메라를 들이댄 딸아이를 향해 헤픈 웃음을 짓는 나와 수족관을 물고기처럼 유영하는 스쿠버가 찍힌 사진은 자꾸 들여다보게 한다. 일부러 자세를 잡거나 꾸미지 않은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 안에 사랑과 행복이 있다. 진실한 것은 꾸밈이 필요 없다 했다.
빌라로 돌아오면 매번 딸네 가족은 풀에 들어가 아이들과 텀벙거리며 논다. 나는 사실 함께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딸네 네 식구의 오븟한 시간을 방해하는 기분이 들어 우리 방으로 돌아선다. 누워 있는데 아이들과 딸과 사위의 웃음소리와 이야기소리가 너무도 재미있게 들려온다. 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 밖에. 그 행복한 모습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사위의 우렁찬 웃음소리와 딸아이의 환한 얼굴과 손자가 공을 던지며 내지르는 즐거운 소리와 입술을 내밀고 내는 손녀의 노랫소리 오오 가 합창처럼 들린다. 기쁨이 보인다. 슬픔만 지나가지 않는다. 기쁨도 구름처럼 지나간다. 기쁨을 기쁨으로 온전히 느끼려고 노력해 볼 뿐이다.
감사한 여행이었다. 그동안 제주도를 여러 번 왔었고 매번 같은 지역을 구경하였다. 이번에는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였다. 아이들을 위한 세상이지만, 이 나이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장소였다. 장난감이 없어 돌이나 흙놀이를 했고 경험이라고는 장날 어머니 따라 장구경을 가거나 명절이면 모여드는 친척들로부터 듣는 이야기 정도였다. 요즈음 아이들이 괜히 똑똑하겠는가.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 나도 신기해서 자꾸만 만져보게 되는 장난감들 뿐만 아니라 각종 경험을 통해 아이들의 뇌신경 회로가 충분히 발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여행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나도 똑똑해진 기분이다. 풀빌라는 넓고 아름다웠다. 산책길에 새벽공기는 상쾌하였다. 음식들은 맛있었다. 사위와 딸은 예의 바르고 배려심 많은 가이드였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일어난 모습부터 손자와 손녀는 매 순간 기쁨이었다. 손주 손녀하고 놀더니 막내는 예뻐지고 있어 많이 웃어서 그렇지. 언니들 말씀처럼 여행 내내 실컷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