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서의 역사, 이영석, 아카넷, 2017
1. 다작과 치열한 연구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이영석 선생의 ≪삶으로서의 역사≫를 통독했다. 민두기, 김준엽, 강만길, 김용섭, 임지현 교수 등의 전작들이 그랬듯이 생애사에 더해 스스로의 학문적 여정을 정리하고 있다.
2. “근대역사학이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내걸었던 진보, 과학, 민족이라는 요소는 이미 그 절대성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 이에 따라 문ㆍ사ㆍ철이라는 인문학의 근대적 황금분할 역시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하고 있다. 그렇다면 근대역사학의 존재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근대역사학은 황혼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윤해동이 던진 물음이다.
선생 역시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책의 한 챕터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공습’ 일까. 선생은 리처드 에번스의 ≪역사학을 위한 변론≫을 번역하면서 이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에번스의 경우 객관성에 대한 회의는 철저히 배척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실험이 기존의 역사서술과 다른 새로운 서술형식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역사학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선생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역사연구에서 인과관계와 합리적 정합성에 대한 회의감이 점차 더 짙어졌고, 오히려 역사서술의 문학성, 또는 역사논문이나 역사서술 자체에서 엄정성에 바탕을 둔 구성 및 서사의 미학이나 완결성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이를 ‘탐구 및 서술의 미학성’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3. 1970년대에 공부를 시작한 선생은 당시 한국의 가장 중요한 사회변동이 산업화라고 생각하고, 바람직한 산업화의 경로 또는 산업화 이후의 올바른 방향을 탐구하고자 영국의 사례에 관심을 가지며 학문적 여정을 시작하여 사회사를 중심으로 실증적인 연구를 지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과정은 각 챕터에서 엿볼 수 있다.
4. 앞부분 '근면혁명'을 얘기하는 부분을 읽다가 기시감(dejavu)에 많이 시달렸다. 진작에 읽은 선생의 <‘대분기’와 근면혁명론>에서 시작 되었는가 했더니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도 아닌 주경철 교수의 ≪대항해시대≫와 동아시아사를 읽다가 만난 강진아 교수의 포머란츠와 캘리포니아 학파를 소개하는 몇몇 글들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김용섭 선생의 ‘경영형 부농’과 그를 비판한 이영훈 교수의 논지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대문자 역사 혹은 거대담론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언급된 내용과 관련된 십 여 편의 논문을 새로 찾아 공부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지만, 인상적이었던 두 부분을 얘기하고 싶다.
하나는 선생이 19세기 영국 노동사를 정리하면서 ‘언어적 전환’과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조야하고 거친 노동자의 이미지 대신 끊임없이 노력하고 스스로를 함양하는 전통을 찾아나서는 대목이다.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을 번역하면서, 그가 농촌 풍경에 남아 있는 ‘역사적 지층’의 의미와 비밀을 해독하려는 시도에서 ‘사회적 풍경’이라는 개념을 끄집어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사, 곧 삶의 세계를 묘사하고 드러내 재현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개념 없이 인식에 이를 수는 없지 않는가. 연구과정의 속살을 보여주고 있어 자못 흥미로웠다.
또 하나는 영국 근대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해석해온 무수한 정통론을 불신하며 수정론을 인정하는 부분이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친 영국 사회사, 특히 산업혁명은 기계와 공장제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지 않았고 경제 전반에 걸쳐 전통적 부문과 근대적 부문이 공존하는 불균등발전의 모습을 나타내는 ‘조용한 혁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정리된다. 요컨대 이전의 근대사 연구에서 정립된 거대서사는 산업자본주의, 합리화와 같은 근대성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근대적 기획이 남긴 것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의 증대뿐이다. 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보다도 근대화가 남긴 불안정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독자로서 일면 비감한 느낌까지 들었다.
5. 선생은 새로이 19세기 말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영제국의 변화과정을 다루는 저작을 준비하고 있다. 19세기 영제국의 전통을 살펴보고 1차대전기 및 전간기 영국 제국 경영의 여러 문제점을 전쟁, 자치령과 관계, 국제경제 등의 축면에서 검토함과 동시에 당대 제국에 관한 지식인의 담론을 분석하고자 하는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이 그것이다. 빠른 출간을 기대한다.
첫댓글 독서를 즐겨하시는군요. 특히 역사쪽으로~
본 많이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극을 드린 것 같아 오히려 반갑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읽음으로써 촉발되어 집중하게 되고 그로부터 길을 찾아나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공부하던 모임이 사드배치 때문에 중단되어서 오래 못했습니다
1월부터 다시 공부모임 시작했는데
요번에는 낭독회 형식으로 해 보았습니다
누구나 참여 할 수 있도록
처음해보는 방식이지만 재미 있을 것 같네요
스투파님도 독서랴이 많다는것을 언제나 느낌니다
그러한 공부모임 늘 부럽습니다.
계속 이어나가시길.
이 소감문을 블로그에도 올렸더니 저자 이영석 선생이 보시고 댓글을 달아주셨구만요. ^^*
"독후감을 읽고 제가 깜짝 놀랐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블로거님이 밝힌 두 가지 인상적인 점이 실제로 제 저술의도의 핵심 주제 중에 해당되었기 때문이죠. 저보고 한 두 마디로 요약해달라는 청탁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간략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이런 경우를 뭐라고 해야 하나? 저자와 독자의 시선이 거의 일치한 셈이니까, 적어도 저자의 죽음은 아직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