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남대문시장을 지나 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은솥에 눈길을 뺏겼다.
힘없이 끓고 있는 팥죽이 보글대며 내는 냄새가 코끝을 유혹했다.
침이 꿀떡 넘어갔지만 장바닥에 앉을 자신이 없어 발길을 돌렸다.
팥죽은 달콤하고, 구수해 모두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우리가 어릴 적엔 동지에 맞춰 이 팥죽을 쒀먹었다.
팥을 맷돌에 갈아 죽을 쑤는데 설탕이 귀했던 시절이다 보니 달착지근한 그 맛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특히 동지 팥죽의 진미는 바로 새알심이다.
찹쌀을 갈아 새알 만한 새알심을 만들어 팥죽에 넣어 먹었다.
이 새알심은 죽 그릇에 먹는 사람의 나이 수 만큼씩 넣어서 먹는 게 풍습이었다.
사기대접에 고봉으로 한 대접을 먹어도 양이 차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서질 못한 기억이 내 가슴에 간직돼있다.
이 팥죽의 실과 바늘과 같은 존재가 바로 동치미국물이다.
구수함을 더해주고, 감미로움을 배가시켜 청량하기 그지없는 게 동치미다.
얼마나 추운지 국물이 얼어 어름이 둥둥 떠 있었지만 동치미는 감칠맛을 더해주기에 제격이었다.
지금처럼 파를 잘게 자르지 않고, 통째로 넣어 담근 동치미는 팥죽만 아니라 모든 음식과 잘 어울렸다.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서 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라고 한다.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이다.
그 긴긴밤 마땅히 주전부리할게 없었던 시절에 먹던 동지 팥죽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추수를 모두 마치고, 한해를 마감하며 신에게 성물로 바쳐지기도 했다.
때문에 반드시 사람이 먹기 전에 신에게 바쳐졌다.
무쇠 솥에 팥죽을 한 솥 가득 끓여 놓고 어머니는 정성스레 손을 모아 신주 님께 빌었다.
그러고 나면 집모탱이, 헛간, 장꽝등 집안곳곳에 한 그릇씩을 떠놓기도 했었다.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도 신들에게 바치고 나서야 먹을 수 있었다.
죽 한 그릇을 먹는 데서도 여유와 감사를 배우게 해준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팥죽이 귀신을 쫓는 축귀(逐鬼) 음식으로 믿어온 우리선인들의 풍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지팥죽이 절식이고, 팥은 붉은 색깔을 띠고 있어서 사악함을 쫓는 힘이 있는 것으로 믿은 데서 비롯된 거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팥죽은 집안의 모든 잡귀를 물리치는데 이용되어 왔다.
이러한 점은 음양사상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즉 팥은 붉은 색으로 '양(陽)'을 상징함으로서 '음(陰)'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팥죽을 쑤어 삼신·성주께 모든 병을 막아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동지는 일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 음(陰)이 극에 이르지만, 이 날을 계기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다.
양(陽)의 기운이 싹트는 사실상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다.
사람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경사스럽게 여겨 왔다.
이것은 동지를 신년으로 생각하는 고대의 유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흔히 동지를 '작은 설'이라 하여 설 다음 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옛말에 '동지를 지나야 한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살 더 먹는다' 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