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4:6-13 본(本) 2005. 4. 24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6절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을 보인 이유는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고 한 내용은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성도들이 서로 대적하여 파당이 생기고 교만하게 된 것은 기록한 말씀을 벗어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적하고 교만하게 되는 것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무언가 잘난 것이 있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는 것은 이미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대적하고 교만하게 되면 기록한 말씀을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까? 7절에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모든 것을 받았기에 자기가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놓고서 자기가 무슨 특별한 행위를 한 것처럼 자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의 정체성이 나옵니다. 성도란 모든 것을 받아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이 말씀 앞에서 자기 점검을 해보셔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과연 은혜로 된 것이냐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당에 나오기면 하면 일단 예수 믿는 자로 간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지 자신을 확정하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예수님이 우리 안에 종으로 계십니까? 주인으로 계십니까?
고린도전서 6:19-20절입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도란 자기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닌 줄로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에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무슨 은사를 받았든지 큰일을 행하게 되든지 간에 전혀 자기를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서 한 것이기에 대적하여 교만하여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자기 자랑거리가 나오면 이것은 기록한 말씀을 벗어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은사들이 나오게 되니 그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의 밑바탕에는 이런 생각들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니 무언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것들이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8-10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되고자 하는 모습들을 찾아봅시다. 배부르며, 왕 노릇하며,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부요하고 왕처럼 살고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래야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면 이렇게 된다고 전도하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한국교회의 주류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서 사회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정치계도, 법조계도, 학자도, 의사도 많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이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본을 삼을만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으라면 어떤 사람을 찾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자녀들에게 어떤 사람을 본 받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신학교 때에 신학생들이 본을 삼는 교회와 목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시골이나 도시의 개척교회를 하면서 교인 몇 사람 되지도 않지만 그래도 복음이 좋아서 복음을 증거 하는 그런 사람들을 본을 삼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가족 중에 그런 목회자가 있다면 비전을 크게 가지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사도인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하셨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9-13절을 봅니다.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구경거리이겠습니까? 글레디에이터라는 영화를 보면 노예 검투사들의 싸움이 잘 나옵니다. 검투사들이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면을 관중들이 환호하고 즐기며 구경하였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당하는 고통과 죽음을 마치 이런 구경거리가 되듯이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며, 친히 손으로 일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사도의 길입니다. 이러한 자를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이 본을 삼으려고 하시겠습니까?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이런 모양입니다. 여러분도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고 믿음이 좋아지시기를 바란다고 하면 여러분은 아멘하시겠습니까? 도망가시겠습니까? 분명히 성경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의 모습이 이러하였습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미 우리가 주로 믿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이런 대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이 주인이 받은 대접을 넘어설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인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받은 대접을 보시기 바라니다. 바울사도보다 더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 없으신 하나님이 이 땅에 당하신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음이 왜곡되어 있습니까? 기독교라는 역사가 이미 복음을 왜곡시켜온 증거물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그 복음이 어디로 가버리고 세상에서 힘과 능력과 세상의 영광을 주는 복음으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보암직한 것들이 교회에 많아야 세상 사람들이 많이 교회로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그러한 마귀의 요구들을 다 물리치시고 십자가로 멸시와 천대와 사람들의 조롱거리인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는 다는 사람들이 무엇을 자랑하려고 합니까? 고린도 교회나 오늘 우리의 현실이나 별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보암직한 것들을 교회에서 제공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 와서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도 받고, 세상에서 복도 받는 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거짓말을 사람들이 좋아하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라는 곳을 찾아 나오지 않습니까?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고,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더러운 것과 찌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우리를 향하여 욕하는 자들을 향하여 축복하십니까?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하고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쫄딱 망해버리라고 속으로 저주를 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그런 사람들과 똑같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한 가지 더 나는 복음을 안다는 교만까지 보태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지혜로는 십자가의 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하신 자들에게만 알려주시기 위하여 감추어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비유를 작은 겨자씨, 가루 속에 썩인 누룩, 밭에 감춰진 보화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비유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라고 찾아 나설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찾아도 찾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세상의 구경거리와 만물의 찌끼 같은 대접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 복음을 감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러한 사도와 비교하면 저는 황금마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인하여 받는 핍박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런 상황이 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그러한 것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되지 못하기에 감당할 정도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는 이렇게 수고하고 헌신하였기에 자랑할 것이 많고 상을 많이 받겠습니까? 디모데전서 1:12-17절을 봅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바울사도가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이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일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주의 긍휼을 입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받은 그러한 은혜가 닥칠까봐서 두렵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런 은혜는 주지 마시라고 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그렇게 수고하고 고생한 것은 자기의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바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된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 용서 하셨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바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별것 아닌 은사 몇 개 받은 것을 가지고 세상의 왕 노릇하고 지혜롭고 존귀한 대접을 받으려고 하였으니 얼마나 거꾸로 가는가 하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하여 얼마나 성경의 말씀과 거꾸로 가는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다른 것으로 유혹하지 않습니다. 네가 예수를 믿으니, 세상에서 영광스러워야 한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고 유혹한 그 유혹을 이기는 길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나를 살리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은혜가 더욱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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