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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205_화요공부방_일원상의수행2
지난주에 어려웠죠? 네. 모르면 어렵고 알면 쉽죠. 맞습니까?
일원상의 수행을 하는데, 일원상의 수행은 진공묘유의 수행이다. 삼학의 수행이다. 일원상의 수행이다. 삼학 병진의 수행이다. 공원정의 수행이다 등등 여러 가지 표현을 합니다. 결국 일원상의 수행은 어떤 수행이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한다는 것은 진리의 위력을 신앙하고, 인과의 이치를 신앙하고 그런 것입니다.
본인이 진리가 따로 있고 그 수행을 내가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원상의 진리 자체가 본래의 내 모습이기 때문에 그 본래의 내 모습을 알고, 본래 내 모습을 기르고, 수양해서 바르게 쓰자 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만들어서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육근을 쓰자. 나라는 존재는 원만구족 지공무사라 이겁니다. 지공무사를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공변되어서 사가 없는 모습으로 살자 그럽니다.
보통 진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법문에 속습니다. 알고 하는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무아봉공을 해야하나요? 유아로 살면 다른 사람이 싫어하니까?? 본래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공이기 때문입니다. 삿됨이 없는 오롯한 모습이 원래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변되게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따로 있는데 무아를 향해서 달려가자 이것이 아닙니다. 내 자체가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영육쌍전을 하자고 하는 것입니까? 영과육이 원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동정일여. 동과 정도 구분해서 봐야 따로 있는 것이지 원래는 하나인 것입니다. 불법과 생활도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되 그 자체인 공부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방편이 필요한 것입니다. ‘너 순사 온다’. ‘나무 밑에서 데려왔다’. 그럽니다. 위협을 주는 것입니다. 말 잘들으라고.. 그것은 방편인 것이고 사실은 아니잖아요. 따라서 우리가 방편에 속지말고 그 본질 자체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시대가 밝아졌기 때문에 진리자체를 신앙하고 진리 자체를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 이런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입니다. 빙공영사憑公營私. 공을 빙자해가지고 개인적인 이익을 취한다. 사실 알고보면 공과 사가 본래 없습니다. 오직 공인것입니다. 사라는 것도 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입니다. 그 나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과 사가 하나이고, 너와 내가 하나인, 자타불이自他不二인 독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공무사, 무아봉공은 나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닫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근원적 원리에 바탕해서 우리가 어떻게 수행하는 것이 제대로 수행을 하고 삼학공부를 하는 것인가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공부한거 녹음해서 들으세요. 어디가서 설교 들어보세요. 어디 한 끄트머리 잡고 강연을 합니다. 원불교나 되니까 대종사님께서 원리자체를 가지고 설명을 해줍니다.
나눠드린 자료를 보세요
일원상은 안과 밖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원상의 안에 있는 속성은 공원정空圓正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위력이 있습니다.
위력은 신앙하는 것이고 그 속성은 내가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그 자리를 깨쳐서 그대로 지키고 써먹자는 것입니다. 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체중생의 본래 성품이 일원상인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이 원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불교의 출발지입니다.
일원상의 속성이 공원정인데 크게 말해서 空자리를 회복하는 것이 수양이라고 하고 圓자리를 잘 아는 것은 연구라고 하고 正자리를 갖다 쓰는 것을 취사라고 합니다. 오늘 하는 내용은 대학원 석사 수준입니다.
1-1) 養性-空
거기 보시면, 좌측을 보시면. 양성. 견성. 솔성이라고 했죠. 성품을 기르고 보고 거느린다는 말입니다. 양성을 정신수양. 견성을 사리연구. 솔성을 작업취사라 이야기 합니다. 양성에 있어서도 공원정이 있고, 견성에 있어서도 솔성에 있어서도 공원정이 있는 것입니다. 공이라는 말은, ‘빌공’자 라는 뜻이죠. 원이라는 것이 훤하다 두렷하다 밝다. 정이라는 것은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쓰는 것이다.
여러분들 저를 보십시요. 지금 어떤 것이 나입니까? 네? 어떤 사람이 그래요. 어떤 영감님이 길을 가다가 스님하고 만났어. 하루밤을 같이 자는데. 스님이 중간에 깨서 보니까 영감 자는데 상투가 까닥까닥합니다. 스님이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 상투끝을 자르고 갔습니다. 영감이 일어나서 스님을 찾다가 자기 머리가 그렇게 된줄 알고 깜짝놀랐습니다. 아이고 내가 어디갔냐. 그럽니다. 상투가 있는 내가 어디갔냐 라는 말입니다.
맑은 물이 담긴 찻잔을 가지고 달빛 비치는 데를 가보십시요. 그러면 달빛이 보입니다. 그러면 어느놈이 진짜입니까? 손으로 잔을 덮으면 달이 없어지죠. 그러면 이것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사람이 태어나가지고 살다가 죽습니다. 여러분들 몇 년남았어? 사람들은 말이에요. 잔에 비친 달빛을 참 달이라고 알고 삽니다. 그림자일 뿐이죠. 일천강에 비친 그 달이 참 달입니까? 달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이 참 달입니까? 우리가 나라고 알고있는 그것이. 이것이 나라고 알고 살고 있습니다. 아프면 확 치료해주고 닦아주고 몇십만원주고 꾸며주고. 이것이 이쁘다고 하면 히~~그러고 안이쁘다고 하면 또, 니가 그럴 수있어.. 그럽니다.
이것(몸)은 나의 물건일 뿐입니다. 이름하여 나의 손, 나의 머리라고 하지 나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나라고 착각할 뿐이지. 나의 몸뚱이일 뿐입니다. 나의 소유입니다. 나와 함께있는 무엇일 뿐입니다. 나의 무엇이 아닌. 나 자체는 무엇일까요? 어찌하면 소크라테스가 지금까지 여러분들한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참 나인가? 어떻게 생긴것이 참 나냐 이겁니다. 이 자리를 우리가 제대로 알고, 지켜나가고, 제대로 써 나가자 하는 것이 일원상의 수행입니다. 지금 우리가 달나라 이야기 하고 있는 거 아니죠? 영어 못해도, 학벌 안 좋아도, 남자나 여자여도 상관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는 이것을 마음이라고 하는 데 이 참마음을 성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참나’라고 하는 존재는 어떤 존재 입니까? 어디 있습니까. 이 ‘참나’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뇌에 있습니까? 심장에 있습니까? 그것은 물질입니다. 이 ‘참나’라고 하는것은 분명히.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것이 있습니다. 대답 빨리빨리 하세요. 초등학교생들도 다 대답합니다.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있죠?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언제부터 생겼습니까? 무슨 색깔입니까?
이 자리를 일러서 유무를 초월한 자리라고 합니다. ‘한 생각 이전 자리’(一念未生前) 라고 합니다. 이 자리를 지켜가고 이 자리에 합일해가는 것. 이것을 정신수양의 空자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나요. 이것은 듣는 내가 있고 말하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듣고 말하는 것이 없는 가운데 있다 이겁니다. 주체와 객체가 끊어진 것입니다.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합니다. 원적무별이라 이겁니다. 이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입정입니다. 현실속에서는 분별속에서 삽니다.
있고 없고를 초원한 자리가 공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를 우리는 여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할때도, 법회를 할때도, 무엇을 할때도 입정을 합니다. 본래 텅비어서 생각와 분별이 끊어진 그 자리로 가자 이겁니다.
그 자리에서 생각을 내고 분별을 내고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고,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자리를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못들어가고 성질나서 못 들어가고 바쁘다고 못들어가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기초적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염불과 헌배가 있습니다. 염불은 주체와 객체가 있습니다. 말하는 내가 있고 말을 듣는 내가 있죠? 염불의 진경에는 소리만 있습니다. 더 진행하면 좌선이 있습니다. 내가 주한 바가 없이 일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참마음자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사냐.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이 자리를 관념으로 이해합니다. 또는 분별로써 넘겨짚고 그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자리는 수행을 통해서 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절대로 이해로써 사량으로써 알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합일하는 자리이고 끊어지는 자리이고 돈공의 자리입니다. 면벽을 몇 년하고 참선을 얼마나 하고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좌선이 유무를 초원하고 원적무별한 자리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것입니다.
누워버리자니 잠와버리고, 서있자니 다리 아프고 그러니까 앉힌 것입니다. 허리 숙이면 허리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허리를 펴라고 하고 목도 바로 세우라고 하고 그럽니다. 가장 쉬우면서도 적적성성한 그 자리에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 좌선인 것입니다. 에라 이놈들 잠 못자게 해보쟈 하고 새벽에 시키는 게 아닙니다. 새벽에 해야 번뇌망상이 적은 것입니다. 자고나니까 원기가 회복했잖아요. 우주도 음양의 이치에 따라서 기운이 좋거든요. 새벽에 운전하고 밖에 나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새벽 기도하고 나갈때도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 줄 아십니까? 우리가 욕심이 끼어있고 그럴 때 그게 좋은 것 같습니다만 멍하지 않습니까?
나는 본래 내가 공인데, 번뇌에 끌려서, 관념의 세계에 빼앗겨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원불교에 오래 다녔다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젊었을 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들. 나중에 나중에, 다음에 다음에.. 아닙니다. 대종사님은 얼마나 전생에 기도를 많이 했으면 어렸을때부터 기도를 했겠습니까? 정산종사님도 그랬잖아요. 언제 다 발심해서 언제 다 수행했는가 보세요.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주산종산님 대산종사님 등등. 다 젊었을때 하셨습니다. 소시에 참 일원상 자리를 깨쳐야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 보다 급선무입니다. 이 자리를 알았을 때 관념의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고, 분별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어떤것도 다 녹아버립니다. 다 녹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온갖 놈의 핑계를 대서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1-2)養性-圓
자. 그다음에 양성의 원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텅 빈가운데 밝은 것을 말합니다. 밝은 가운데 거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에 이것이 하나 들어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온바가 있을 것이고 간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거래去來가 없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지켜내고 그 자리를 함께하는것. 이것이 양성의 圓자리 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왔다갔다 안 합니다. 그리고 쓰잘데기 없는 곳에 마음을 뺏기지도 않습니다. 생사에도 초월합니다. 본래 생사가 없습니다. 거래가 없다는 것은 생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 미워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미웠습니까?
옛날에 중국에서. 마음에 대해서 묻습니다. ‘제가 너무 마음이 힘듭니다’. ‘애쓴다 그러면 그렇게 힘든 마음을 나한테 줘라.’ 그래서 그 사람이 찾아봤어. 찾아보니까 어디있어? 없거든. ‘어? 없네요.’ ‘그럼 됐다. 너의 괴로움 끝났지?’
언제부터 지가 그렇게 괴로웠다고. 좋은 마음도 괴로운 마음도 요란함도 본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은 일정심입니다. 서원이라는 마음으로 탁 묶어버리는 것도 좋습니다. 서원이라는 것도 본래는 없지만, 외적으로 서원이라는 것으로 묶어버리면 위력이 대단합니다.
이번에 원불교에서 교무님들 인사를 70% 한다고 합니다. 교당마다 거의 교무님들 바뀐다고 보시면 됩니다. 종법사님도 바뀌고 교정원장님도 바꾸고 그럽니다.인사이동. 그런데 종법사님께서 이번에 법문을 해주셨는데. 空去來 公去來 하자.
空거래 공거래! 오고가고 하면서 빈마음으로 해라 이겁니다. 왜그럽니까? 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미 왕궁가에 계시며 모태중에서 중생 제도하기를 마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도솔천이 따로 있고 모태중이 따로 있죠? 말도 안 되는 소리이죠? 분명히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것이 있는데 실체가 없다 이겁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공거래다 이겁니다. 사실 우리가 죽었다고 해보세요. 육신 갖다가 태워버립니다. 아무리 주위사람이 죽었다고 울고불고 해도 나중에는 웃고 잘 삽니다.
전체를 보면서 내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 전체입장에서 해라 이겁니다. 좋은자리 안 좋은자리. 가고 싶네 가기 싫으네. 우리가 거래를 하되 空心 公心으로 해야지 참으로 거래를 하는 것이지. 왕궁가에 모태중에 본래 왔다갔다 하는 것도 없는데,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온갖 번뇌가 왔다갔다 합니다. 주체가 없이 왔다갔다 합니다. 무엇이 들어서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죽네사네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거래가 없는 가운데, 두렷합니다. 적적성성 합니다. 텅 빈가운데 훤합니다.
1-3)養性-正
그다음 양성의 정을 설명합니다. 심불편의心不偏倚. 기울어질 의. 치울칠 편. 이것은 마음이 텅 비어가지고, 어디에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사사에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염정에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무선무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다 이겁니다. 이것이 바로 양성의 정입니다. 양성의 정이 아닌 마음은 조금 칭찬을 하면. 오매 니가 최고여. 조금만 비난하면. 너 가만 안 둬. 두고보자 이놈. 그럽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칭찬에도 섭섭한 말에도 기울어질 것이 없습니다. 사사로운 것이 내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웃다가 울었다가 좋다가 싫었다가 그런 것입니다.
상을 받아도, 어떻게 받아야 하겠습니까? 상을 받는데 당연히 기뻐야지. 부처님께서 49년간 법을 설해놓고는 나는 법을 설한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상을 받은 바가 없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을 받아도 도가 있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인사이동을 할때도 그럽니다. 거래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 일을 할 뿐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양성의 정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를 길러낸다고 하는 것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조금만 이것이 챙기지 않고 그러면. 육근이 속아버린지도 모르고 속아버립니다. 텅빈 그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를 깨쳐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몇 번은 그 자리에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마음이 텅 비어서, 세상과 내가 하나입니다. 우주만유가 내 집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닙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자만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학하고 그럽니다. 진공에 체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내몸은 진공이라라는 말입니다. 텅 비었다. 참으로 비었다. 여기에 체를 잡고 사는 사람은 원불교의 기반을 다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진공의 자리에 들었다 나오고 아침에 일어나면 진공의 자리에 들었다 나오고 생활하다가 심난한 경우가 오면 동할 때 그 자리에 들어갔다 나와서. 그 실체를 확실히 알아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신심이 있는 사람은 신심으로라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리자성不離自性. 자성의 여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잘 수행하는 사람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하니 어떠한 것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인가?’ 의두요목입니다.
2-1)見性-空
견성입니다. 견성의 空은. 텅빈 자리를 보았다 이겁니다.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뭐 空자리가 따로 있겠습니까?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그것은, 그 근본은 일념미생전이고, 텅비어서 한 생각도 없다. 언어도단의 자리인 것입니다. 사이즈도 없고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툭 터져가지고 온통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쳐 아는 것. 이것이 공자리인 것입니다. 이 자리가 참 내자리다. 이 자리를 아는 사람은 일단 속지 않습니다. 상대심에 속지 않습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이 그 무슨 자리인가? 다 짝합니다. 나는 너를. 흑인 백인. 선은 악을. 법과 비법. 잘살고 못살고. 높고 낮고. 모든 것이 다 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음양을 초월한 자리이고 유무를 초월한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진공이고 대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모르는 사람은 상대심에 삽니다. 또, 이 자리를 참으로 모르는 사람은 공자리에 빠져 있습니다. 텅 빈 가운데 훤하거든요. 아는 게 광대해서 막힘이 없습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오직 그대로일 뿐입니다. 이 자리를 다 분석해봤더니. 우주와 우리의 마음이 대소유무로 이루어져있고 시비이해로 운영되는 구나 그럽니다. 이 자리를 연구하는 것을 사리연구다 이겁니다. 이 자리를 아는 것은 사은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견성한다는 것은 인과를 아는 것이고 사은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대학생들 도서관 이용해보세요. 여러분들 등록금 냈으니까 도서관 마음껏 써도 된다고 생각하죠? 도서관 하나 지을라면 얼마나 드는 줄 아세요? 도로 1미터 까는데 요새 일억 이억 합니다. 내가 그 돈을 다 냈어요? 나는 엄청난 은혜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은혜를 모르니까 지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견성을 한다는 것은 인과의 이치를 알고 사은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이무애사무애理無碍事無碍 입니다 .
2-2)見性-圓
세상 사람들이 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욕심 가득하게. 그 행복은 좋은 차. 내가 배부른것. 등등입니다. 이득을 위해서 삽니다. 나한테 손해될것은 다 멀리해버립니다. 왜 술을 먹어? 기분 좋잖아요. 이득인 것 같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이득이 되는 것을 찾습니다. 왜 계문에서 술을 먹지 마라고 했습니다. 일단 이해인 것 같지만 결국 손해인 것입니다. 제생의세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를 살리고 도움을 주자는 것입니다. 술담배 하면서 자기몸을 죽이면서 무슨 제생의세를 한다고 합니까?
사회생활 하려면 술담배 해야한다고 그럽니다. 그렇게 못났습니까? 술담배로 내가 사회생활을 연명해야 합니까? 是非利害-옳은 것은 이득이 되고, 그른 것은 손해가 됩니다.
是非→ 원인
利害→ 결과 가 되는 것입니다.
나만 행복하고 나만 이득보는 것만 바라봅니다. 오직 돈이되면 막 달라듭니다. 견리사의見利思義 라고 했습니다. 이득을 볼 것 같으면, 옳냐 그르냐를 생각하라 이겁니다. 공자님이. 이것이 연구입니다. 옳으냐 그르냐를 보라 이겁니다. 옳지 않으면 나중에 손해가 된다 이겁니다.
요새 장사하는 데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정당하지 않고 옳지 않다면 나중에 걸려서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만 보고 사는 사람을 보통사람이라고 합니다. 오직 나한테 도움이 되냐 안되냐를 봅니다. 조금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시비를 봅니다. 시는 이가 되고 비는 해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설령 얼른은 이익은 안 올지라고 나중에는 다 알아지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인과의 이치입니다. 정당한 고락을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그럽니다. 처음에 박수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니지만, 점점 갈수록 박수를 많이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약삭빠르게 눈에 보이는 일만 잘 하고, 살살 거짓말도 하고 그럽니다. 나중에 봤더니 못쓰겠는 것입니다. 나중에 利에서 害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원불교 사람은 여기까지만 알면 안 됩니다. 대소유무를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보고 이치를 봅니다. 티비에서 토론을 합니다. 기부입학제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냐 마냐 그럽니다. 체벌을 해야 안해야하냐 그럽니다. 부인한테 가계부 장부를 보여달라고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지금 손한번 들어보세요. 선생님이 체벌을 해야하냐 말아야 하냐. 진짜는 마음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로 대소유무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치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 믿는 마음이 있으면 그 놈이 다 수용을 합니다. 그리고 안 패도 압니다. 하지만 불신하면, 사랑하지 않으면, 때려도 불만이고 안 때려도 불만입니다. 마누라한테 가계부를 보여달라고 하니 성질낼것 같고 안 보자니 궁금하고 그럽니다. 그러면 봐야하는 건가요 안 봐야 하는 건가요? 믿음에 따라 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나한테 믿음이 있냐 없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받아들이는게 다릅니다. 비로소 이사람이 수행인, 공부인, 지혜인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소유무를 볼 줄 아는 사람)
2-3)見性-正
견성의 정입니다. 정견사물正見事物이라고 합니다. 기업이 잘 되고 못되고. 가계가 잘 되고 못 되냐. 이것이 다 이것입니다. 정견을 해야 합니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앞으로 시대가 어떻게 될 것인지. 다 알아야 하는 겁니다. 내 몸과 마음 중에서 무엇이 主이고, 교당에 다니는 것중 무엇이 주이냐. 등을 정확히 판단을 해야지. 우리가 어느 것을 모르고서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라도 합니다. 4전도라고 합니다. 옛날에 반야심경 강의할 때 했습니다.
常樂我淨상낙아정입니다.
常 : 자기의 몸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만 에너지를 씁니다. 이 몸은 불과 한계가 몇 년이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의 동반자는 마음이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樂 : 육신의 낙. 참 마음의 낙. 어느것이 참 낙인가?
我 : 이것(몸)이 정말 나인가 아니면 텅빈 무아가 바로 참 나인가
淨 : 무엇이 깨끗한 것인가? 진짜 이 몸이 깨끗한 것인가? 우리 몸도 썩으면 냄새 팔팔 납니다.
형상있는 것은 다 변하는 것인데 이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잘 못된 것이다.
회사 운영하는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가 넓게 사용되니까 얼른 이것에 적응해야 합니다. 교무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시대가 어떻게 되겠다. 앞으로 청소년 교화에 투자를 해야하는가 아닌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사도 3년만 새것 안 만들어내면 망한다고 합니다. 인터벌이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동대문에 가면 옷만드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중국에서 만듭니다. 그게 더 쌉니다. 그런데도 시대상황도 모르고선 옷만든다고 합니다. 시대에 따라서 빨리빨리 적응해나가야 합니다. 원불교는 이치를 봐다가 일을 잘 하자고 했습니다. 지금 나갈 자린가 물러날 자린가 이것을 바르게 알라 이겁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가서나 성공하게 되어있습니다. 주종선말을 잘 알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회상에서 청소년교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안목이 없는 것입니다. 금방 청소년들이 자라서 일반이 된다는 것을 왜 모릅니까? 생각해보세요. 집안에 자식에게 투자를 팍팍 해놔야 나중에 편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노년이 되어서도 자식이 손벌리고 그러는 것입니다.
(쉬는시간)
보리상자 공연
영상이랑 음악 들으시니까 좋으시죠? 공사에 정신, 육신, 물질적으로 협력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공사비가 2000만원 정도 들었습니다. 따뜻하시죠? 이제 전기세도 내고 그러세요?(하하) 아직도 기회를 못찾으신 분은 열려 있습니다.
사은을 안다는 것은 지은하고 보은하자는 것이다. 은혜를 알고 보은을 해서 복 짓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견성이라는 것은 사은의 은혜를 알고, 그 과정이 인과의 이치로 이루어 진다는 것을 알자는 것이다.
3-1)率性-空
1) 빈마음으로 써야 한다.
육근을 쓰되, 빈마음으로 사용해야 한다.
교당에 가면, 오래된 교도들이 계신다. 견성의 정,원을 아는 것은 시대의 변화를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래된 교도들은 새로운 교무님이 와서 변화를 취하면 솔성의 공을 알지 못하고, 집착하신다.
솔성의 공이라는 것은 무념행이다. 무아의 행이요, 무념행이다.
그래서 참으로 공을 길러서 공을 알아서 실행해서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爲法忘軀(위법망구):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 버린다.
교법 실행을 위해서 몸을 잊어 버린다. 마음이 몸을 이겨버린다.
그래서 뭐를 하는가? 위공망사
爲公忘私(위공망사): 위공망사를 한다. 공을 위해서 나를 잊어 버리는 것이다.
부처님도 49년간 설법해도 설한바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몇 년 했다고 아상이 꽉차면 안된다. 응용 무념의 도를 해야 한다.
마치 천지의 도와 같다. 응용 무념의 도. 나와 천지가 둘이 아니라면, 나도 천지와 같이 응용 무념의 도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빈마음으로 해야 한다.
봉사를 해도 공으로 해야 한다. 누구 안왔네. 하면서 싸우면 안된다고...
단장이 시키면 시킨대로 하지.. 나는 못해요! 이러는 것은 공에 바탕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질 것이 없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은 이것이라고 할 것이 없어서 무너지지도 않는다.
3-2)率性-圓
無着.
불매不昧: 매하지 않고, 훤하다.
매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의 의견이나 사상을 고집하지 않는다.
법과 비법, 선, 청정 집착을 마저 다 놓아 버려라.
법이라고 할 것도 없다. 훤하게 툭 트였을 뿐이다.
그래서 무유정법無有定法: 정하진 법이 없다. 이치와 마음과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정해진 법이 없는 것이다. 답을 답이라고 고착하고 집착하면 이는 법에 집착한 것이다.
觀圓, 養圓, 行圓이 된다.
이는 원근친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보통사람은 돈이 되나? 원근 친소 등에 따라서 판단을 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이는 제대로 원자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3-3)率性-正
불염不染: 물들지 않다. 원만해서 중도를 한다. 원만행이요 時中行이다.
대종사님은 영산에서 기도를 하시고 변산에 가셔서.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뛰쳐나가서 교화한다고 했을건데. 대종사님은 변산에 칩거하면 인연을 만나고 교제를 만들고, 동하되 분별이 절도에 맞았다. 다 때를 봐서 하셨다. 그래서 일 없으면 준비하고, 일 있으면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일 없으면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고, 텅빈 자리에 합일해야 한다.
일 있으면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최선을 할 자리에서 양보하고 그런다.
그래서 과불급이 없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 할 자리하고 안할 자리를 안하고...
때에 따라서 맞게 해야 한다.
옛날에 총부에서 불이 났는데, 수양한다고, 진공에 체를 삼는다면서 “지..금.. 불..이... 났..다” 이러면 안된다.
때에 따라서 맞게해야 한다. ‘교무님 왜 이렇게 서두르십니까?’ 서두를때니까 서두르지. 서두르면 도가 아니여? 목석도인을 도인으로 알면 안 돼.
응무소주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 이다.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제생의세가 될 것인가.
맑게 하는 것이 공, 밝게 하는 것이 원, 훈훈하게 하는 것이 정.
덕풍을 하는 것은, 제대로 실행을 해서 상황에 따라서 맞게 해서 하는 것이 덕이다.
그렇게 하면 이 사람은 어디서나 원만하다.
항상 적당히 하는 것이 도인 줄 아나, 그것은 아니다.
돈을 낼 자리에서도 적당히 하는 것이 좋은 건 줄 안다.
좌선을 한번도 안빠지고 하면, “ 야! 적당히 해라” 이라는 사람이 있다.
해는 적당히 뜨고 지고 하지 않는다. 해는 날씨 춥다고 적당히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공부길을 잡았느냐 안 잡았느냐 하는 것은 성품의 원리를 알아서 그 자리를 텅비게 지켜내고 밝게 알아서 잘 쓰는 것이죠. 이것을 교리로 말하자면, 취사하는 바로 사은보은이다. 삼학을 병진할줄 안다.
대종사님은 삼학을 편취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수양, 연구, 취사가 골라 맞아서 동시(정시 뿐만아니라)에 주로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화가 나면 탁 멈춰서, 내가 내 마음을 보고, 화를 낼 자리 인지 생각 해보고, 하는 것이다.
삼학을 한다는 것은 주인이 되어서 내것은 내가 처리하고, 어디서든 도움이 되자는 것이다.
누구에게 피아노 연주를 맡겼는데 전화가 왔어 “ 나 이번에 일이 있어서 못가요”라고 했다.
그러면 안된다. 내가 못하게 되면 누구하게 부탁하고 일처리를 다 마쳐야 한다.
이렇게 해야 도움이 되는 것이다. 늘 한생각을 더 나아가야 한다.
독경을 할 때 염불을 써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누가 할 것인가?
주인이라면, 자기가 알아서 할 것이다. 스크린 비출때 불이 켜있으면 자기가 나가서 불을 끌 것이고, 누가 발표를 하면 마이크를 집어다가 갖다줄 것이다.
간사님께 다 맡겨 버리는 것은 주인된 생각이 아닌 것이다.
견성이라는 것이 일과 이치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을 못하는 사람은 앞뒤가 복잡하다.
일을 하는 사람은 앞에는 충분한 연마, 뒤에는 깔끔히 정리한다.
일이라는 것은 앞에 정리하고, 뒤정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전체, 일과 이치를 알아서 밝고, 빠르게 판단해서 어디서나 환영받는 것이다.
일을 모르는 사람은 편하다. 알아서 될 거라고만 생각한다.
삼학의 병진이라는 것은 동정간에 병진하는 것이다.
동정간의 병진, 영육쌍전, 불법이 생활에 적용되는 삼학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사은에 대한 보은이 되어야 하는 하는 삼학인 것이다.
일원상의 수행은 신앙과 엮어지고, 연구, 취사도 다 엮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성중, 견성중, 솔성중에도 삼학이 있는 것이다.
공-양성- 정신수양- 영통
원- 견성- 사리연구- 도통
정- 솔성- 작업취사- 법통- 대원정각(삼대력)
삼대력을 얻는 사람이 기쁜 사람, 어디서든 인정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새로오신 분
유양 교우님 : 오정원 교우 연원으로(고원회)
이예실 교우님 : 최성양 교우의 연원으로 오셨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이네요.
이승재 교우님 : 서덕안 교우님 친구분이라고 합니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첫댓글 일주일이 지나서 다음번 화요공부방이 열리는 날. 후기를 올리게 됩니다. 그동안 후기를 올리셨던 박순명 김호겸 김초마 문혜은 등등 의 교우님들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알것 같습니다.
그대도 잘 할거라 믿소! ^^
고생 많으십니다. 원음방송은 제가 조금 도와드릴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