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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2년 6월 30일 토요정례법회
□ 원불교를 만나서 - 정용상 교우님 강연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외갓집에 가신 어머니.
나의 사춘기 시절은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어머니와의 헤어짐으로
창피함을 가지게 되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심이 있었다.
더우기 아버지의 처지를 설명하다가 어머니의 미움까지 받게 되어
관계가 더욱 어려워졌다.
어렸을 때 나는 굉장히 활발했는데 이후로 아주 조용해졌다.
천막으로 된 개척교회의 초등부 교사인 김대열선생님을 만났다.
신앙, 학업공부를 모두 돌보아주시는 분이셨고, 너무 좋은나머지,
고등학교 때는 매주 토요일 저녁에면 김대열 선생님 집에서 잠을 잤다.
당시 대학생인 선생님은 자취를 하셨는데, 선생님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좋았다. 그리고 그분들을 볼 때마다 그분들처럼 되고싶어,
한국 대학생 선교회 즉 CCC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제대 후까지 활동하였다.
집과의 관계가 안좋아진 후 헤어져 있던 8년이란 기간 동안
누나와 동생만을 만나고 지내왔다.
대학교에 오면서 진대성 단장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법회 출석과 화요공부방 출석을 권하였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던 신앙을 접고 원불교에에 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사은이 없었다면, 사은을 알지 못했다면 부모님을 끝끝내 저버렸을지 모른다.
누가 잘못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였는지를 떠나서, 어머니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라는 것이었다.
오환칠 교도님이 아버지가 잘못을 많이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는 말.
원불교 화요공부방을 나오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낯설었다.
그중에서 특히, 교회의 십자가와 달리 일원상은 우상숭배와 같았으며
화요공부방 때 외우는 염불은 마술을 부르는 주문같았다.
아직도 원불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헤매는 부분이 있다.
요즘은 화요공부방에서 신분의성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다.
내가 진대성 단장님께 고민을 이야기 많이 하였는데 잘 들어주면서도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 감사드린다.
□ 질문과 답변
Q. 박만오 : 강연 잘 들었습니다. 원불교와 기독교에 대해서 갈등을 겪으면서도
둘 사이에 비교된 어떤 정립된 면이 있을 것 같은데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A. 정용상 : 나는 기독교가 흑백적인 사고로 인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받았던 것이 많았기 때문에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원상에 대해서 우상이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나쁘다라고 이야기하지 않겠다.
늘 나에게 성숙시켜 주고 보듬어준 것은 기독교이다.
그런 면에 대해서 하나하나 비교하여 반박하는 것보다는 원불교의 좋은 것을 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사고가 다르다. 여기에서는 은혜사상을 두었는데, 기독교에서는 은혜사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 내가 가진 정신은 전생에 있어서도 가져왔고, 내가 가진 습관도 어딘가에서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는 있다.
즉, 기독교는 인정하되 원불교 교법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바라보고 있는 심정이다.
아직도 나는 기독교 다니는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은 못하였다.
만약 내가 친구들에게 그것을 밝히면 아마도 소모적인 논쟁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 보다는, 내가 자연스럽게 그들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Q. 진대성 : 강연을 준비하면서 얻은 소득이 있었을 것인데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A. 정용상 : 사실 강연 요청을 받았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나는 항상 앞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강의를 하기 때문에, 처음에 늘 사람들에게 쑥스러워 하는 면이 있다.
나는 솔직하게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하다 보니 좀 원망심도 들긴 하더라.
그러나 내 뒷부분에서 강연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잘 하셨으면한다.
Q. 문혜은 : 강연 잘 들었습니다. 배신을 한 건 아닌지라는 괴로움을 느낀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A. 정용상 : 사실은 인적사항을 쓸 때, 종교란이 있다.
그러면 기독교와 원불교 중 하나로 체크해야 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원불교로 개종을 한 것이고,
그런 면에서 고민이 있었다.
간단하게 “나는 원불교 믿어야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문으로서 선을 넘느냐 안 넘느냐 하는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부분들이 굉장히 약하다.
내가 나이가 들어 죽을 때까지도 원불교에 다니고 싶다.
그러나 걸리는 부분이 많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이 기독교였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쉽게 많은 부분들을 변화시킬 수 없어서 고민했던 것이다.
법회나 단회 출석에 있어서 그런 부분들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 김제원 교무님 설법
강연 잘 들으셨죠? 용상 교우님 강연에 공감을 많이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공감이 다른 분들도 많이 되었죠? 전주에서 올라와서 서울에서 성공했네요
아버지께서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을 해서 결국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한 가족이 해체되고
가족의 마음이 아파가는 과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소성대라는 법문이 생각이 납니다. 대종사님께서 작은 것으로서 크게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대부분 기업들이 과도한 욕심을 부려서 잘 운영을 못하고 결국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말씀 드린 끝없는 욕심과 갈등도 이와 비슷한 사항이라 생각합니다.
본인의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사고가 있을 수 있으나, 용상교우님 아버지께서는
이소성대를 잘 실행을 못하신 것이다.
변(變)-불변의 이치를 알아야 원만한 인생이다. 변-불변의 이치를 보아다가 실행으로 나투어내는 것을 정의라 한다.
보통은 변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불변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없다.
변의 이치를 파고들면 불변의 이치를 알 수 있으나 변의 이치를 파고들려 하지 않는다.
불변의 이치는 놓고 흥하면 좋아하고 쇠하면 기죽어 하고 마음이 요란하다. 인간도 생로병사한다.
생로병사를 따라 희노애락에 끌리기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원불교에서 변의 이치에서 불변의 마음의 이치를 공부한다.
변에 관해서 오늘은 경제를 연결시켜 현대사회에 경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원불교 신앙을 하면서 대(大)자리에 묶여서 소(小)자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자리에 치우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경제를 무시하고 허망하게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경제에 너무 빠져서도 안되지만 너무 무시해서도 안된다.
수행만을 주장하고 경제적인 면을 소홀히 하면 그것도 또 문제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이 양쪽에 치우쳐있는 사람들이 많다.
20대 30대인데도 훈련을 못간다고 핑계를 대는 사람은 원불교 신앙에서 벗어날 확률이 90프로이다.
앞으로 현대사회는 외적인 부분이 강력한 파워를 갖는 다는 것을 뉴욕에 가서 느꼈다.
그렇다고 열심히 수행하는라 경제에 무관하지 말자. 여러분들도 경제 공부좀 열심히 하자.
한쪽에 치우치치말고 돈만 바라보지도 말고 변,불변을 모두 채우며 바쁘게 살아가자 이 말이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경제사회이다.
주식이나 채권이나 제2 제3 금융권에 대해서 아는가?
연금 기금 어떻게 투자하고 부동산을 알며, 세금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도학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용상교우님 집안도 이 두가지가 같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오랜 시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교전에 '경전 법규연습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라고 하셨다.
여기서 대종사님께서 법규연습하기를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잘 생각해야 한다.
현대사회는 정치도 알아야 하고 경제도 알아야 하고 많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바쁘게 살아야 한다.
부산에 계신 향타원님이 멋을 내신다고 하면서 처음에는 많이 혼나셨다.
그러나 저는 멋내는 것이 나쁘냐? 하고 생각한다. 그 멋을 어디다 쓰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향타원님은 부산 베네골에 가장 멋있는 훈련원을 지어내셨다.
그곳에 가면 어린 진섭이가 하늘을 보고 의문을 품고 있는 조각이 있다.
얼마나 멋있는가? 그 분만이 생각할 수 있는 미적 감각이었다.
사람들이 변의 세계에서만 살다 보니까 우리 종교도 불변을 강조하는 면이 없잖아 있지만
대종사님 법은 생활 속에서 법을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용상교우님께서 배신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더라.
우리 교전에도 그런 예화가 있다.
한 장로와 대종사님께서 내기를 하셨는데 얼마되지않아 장로가 KO패를 당하였다.
그 장로가 대종사님께 어찌 그리 넓으십니까 하며 귀교에 들고 싶으나,
그래도 마음에 걸림이 있다고 할때 대종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법을 잘 공부하면 하나님의 심통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여야 한다. ”
성자의 본의가 어떻게 자기만 바라보고 남의 것을 무시하라고 했겠느냐?
성자의 마음은 보통사람이 감히 측량할 수 없다. 넓어서 측량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은혜를 입은 것은 갚으면 된다.
김대열 선생님이라는 은혜를 입은 분께 감사를 표하면 된다.
기독교인들과도 원불교의 삼동윤리의 정신으로 같이 더불어서 돕고 지내면 된다.
지난번 구리교당 봉불식때도 여러 종교관계자들이 함께 해 주었다.
우리 원불교에서 UR(United Religion)을 건의하고 있다.
지난번 종법사님께서도 노무현 대통령께 말씀을 드렸고 아마 대전청사에 그것과 관련된 계획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진대성교우님의 은근한 교화방법에 칭찬을 보내주고 싶다.
대성교우님의 교화방법에 지혜가 있었다.
10번만 같이 가자라고 했을 때는 그 사람의 근기에 대한 연마가 있었고 정성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정성에 박수를 한번 보내어주자.
교회를 다니다가 오신 분들이 오히려 교법을 처음에는 비교하지만
나중에는 잘 체(體)를 잡고 열심히 잘 하는 것 같고 교법에 대한 이해도 빠른것 같다. 금
강산 앞에 사는 사람이 다른 산도 가보아야 자기가 본 산이 동네 뒷산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강산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것 같다.
나도 교회를 다니다가 온 사람이다.
교회는 장구한 역사가 있어서 성가만 해도 수가 많고 좋다.
나는 처음에는 원불교 성가를 보고 너무 화가나서 가서 따지기도 했다.
사실 교회에서는 성가를 만드는 단계가 탄탄하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 짧아서 작곡을 하는 분들에게 법문을 맡기어서 나온 성가들이 많아서
신앙의 마음이 녹아있는 것이 많지가 않았다.
이것이 역사가 아직 짧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요즘보면 성가가 새로나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이것이 다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가 발전하는 모습의 하나라고 하겠다.
용상교우의 강연을 들으며, 열린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느꼈다.
교당에서 지내다 보면 처음 오신 분들 중에 열린 마음으로 듣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설사 잘 몰라도 열린 마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에는 많은 노예가 있는데 저급노예와 고급노예가 있다. 고급노예가 관념의 노예다.
우리 청년들은 영화 밀양을 좀 보았으면 좋겠다.
그 영화에는 관념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들의 관념에 묶여서 잘못 판단하는 누를 범하게 된다.
우리도 우리 신앙 가운데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내가 사은에 대해서설명을 할때 천치요 하우자라도 이해할 수 있는게 사은이다 라고 했었다.
용상교우님도 온지 얼마 안되서 사은에 대해서 들었고 교회를 다니던 중에 들었지만
그 사은을 이해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절대자, 사은이 바로 없어서는 안되는
절대적 은혜이자 절대자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조물주라는 것이 막연한 조물주인가? 결국 조물주와 사은의 은혜는 같은 것이다.
용상교우님께서 자신이 고집이 있다고했었다. 저는 그 고집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고집을 수행하고 의두연마하고 대의를 향해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고집이 있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 고집을 정말 큰 대의에 쓰고 있다.
이러다 보면 의두가 깨쳐지고 수행이 있어진다.
용상교우님께서는 마음을 잡는 공부가 원불교에서 얻은 소득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집심(執心)공부이다.
집심공부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관심(觀心)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를 할때 집심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일에 독경에 수행에 일상에서 집심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일어나는 그대로 보는 공부가 관심공부이다.
이 관심공부는 대소유무의 원리를 알고 해야 한다.
그 다음 공부가 무심(無心)공부다. 무심은 비우고 털어버리는 공부이다.
그 다음 공부는 능심(能心)이다. 상황속에 맞는 공부를 하는것이 능심이다.
무심만이 또 전부가 아니다.
경계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무심이 아니다.
결국 마음공부는 때로는 집심이 필요하고 관심이 필요하고 무심이 필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하나만 갖다가 쓰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능심을 부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 네가지 마음 공부는 섞어져서 맞돌아가야 한다.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우리 용상교우님의 마음의 원리와 단계를 알아 깊이있게 공부하면
어느순간 대종사님의 법에 눈물을 펑펑흘릴 정도가 될 것이다.
용상교우가 인간적인 미래를 꿈꾸다가 이제 사은에 보은하는 삶을 살겠다고 해서 나는 정말 감동했다.
이런 마음이 바로 특별한 신심이 나는 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꿈, 행복한 삶이 욕심이라고 깨닫는 그 순간이 바로 진급의 순간이다.
엄청난 은혜를 입어놓고는 오직 나하나 잘 살겠다고 하는 우리 삶을 보면 얼마나 허망한가?
좋은 배우자 만나 내 몸 우리가족 하나 잘 이끌어 살아보겠다는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꿈이다.
사실 이것도 어렵겠지만 이것은 더 크게 공심을 가지고 살면 자연히 따라 나오는 것들이다.
무아봉공을 왜 말씀하셨을까?
다만 이것이 종교가에서 흔히 있는 봉사정신을 강조한 것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한 영혼이 인생을 살면서 성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마음과 감정을 조절하고 방향을 잡아 나가고 하는 것,
이면에서 마음의 힘을 넣어주고 하는 종교가의 일이 정말 얼마나 가치로운 일인가를 느낀다.
법으로 모든 경계를 해결해 나가려고 하다보면 조금 늦은것 같고 조금 부족한 것 같아도
이것이 결국 가장 빠른 길이고 바른 길이다.
우리 용상교우도 이렇게 진급해 가기를 기대해본다.
첫댓글 명선교우님 감사합니다.
와! 정말 감사합니다.
부지런한 명선 교우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