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는 선교사
글라렛 선교수도회 원통선교공동체
김 병 진 가브리엘 신부
폐교 빌려 꾸민 선교공동체 ․ 재가복지센터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월학리 1849-6 폐교된 인제초등학교 효자분교 건물을 임대해 꾸민 글라렛 선교수도회 원통선교공동체 겸 글라렛재가복지센터를 찾은 때는 지난 3월 3일 오전. 동서울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새로 난 서울-춘천간 고속도로를 달려 1시간 50분 만에 다다른 원통버스터미널에는 이미 김병진 가브리엘 신부가 나와 있었다. 터미널에서 공동체까지 운행하는 일반 버스 편이 없어 직접 기자들을 맞아 주었던 것이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는 말이 전해 질 정도로 첩첩산중이요 최전방, 군인 도시다. 그 며칠 전, 이 지역에 1m가 넘게 내린 폭설로 공동체 마당이 된 폐교 운동장은 봉사자들의 자동차가 드나들 정도만 눈이 치워져 있었다. 잔설이 남아 봄을 기다리던 앞산, 뒷산은 온통 눈으로 덮여 아름다운 설경(雪景)을 이루고 있다.
산골 폐교여서 교실 두 동이 전부였는데도 그나마 아이들이 없어 문을 닫은 쓸쓸한 자리에 김 신부가 2000년 원통선교공동체와 재가복지센터를 세운 것이다. 처음 빌릴 때는 1년에 임대료가 800만 원이었으나 복지센터를 등록한 뒤부터는 100만 원씩 낸다. 이곳에 김 신부와 최근 합류한 인도인 사제 선교사 ·1명과 사회복지사 1명, 상주봉사자 2명이 결손가정 아이들 3명, 사회적응을 위해 재활을 필요로 하는 지적장애 내지 알코올 의존증 생활인 3명 등과 함께 산다. 그리고 이 식구들과 함께 재가복지 활동을 통해 인제군 전역에서 가장 힘들게 살고 있는 차상위계층 어르신 70여 명과 저소득 소외계층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한다. 주민 수 3만여 명의 인제군은 육군 2개 사단의 군인이 민간인보다 많은 최전방 지역이다. 우리나라의 여타 농어촌지역처럼 독거노인들과 저소득 빈곤가정들이 많은 지역이다. 선교공동체가 있는 월학리 또한 전형적인 가난하고 소외된 농촌마을이었으나 현재는 전국 최우수 농촌체험 마을로 발전하였다. 신자 할머니 한 분이 사셨으나 5년 전 선종한 뒤 신자는 한 명도 없다.
지역민 모두가 잘 사는 복지화가 최우선
김 신부는 신자와 비신자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지역 주민 모두가 잘 사는 복지화를 이루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 다음이 복음화다.
“복음화는 은총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성사생활을 실제로 누릴 수 있을 때 하려고 합니다. 입문성사인 세례성사를 받고 본당공동체에서 성사생활을 하면서 강론 등을 통해 기쁨과 희망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 세례 받기를 원하는 분들은 많습니다. 제가 천주교 사제이니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하는 그 자체가 선교이긴 합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너무 열악해 세례 받은 후 본당공동체와 이어지기가 힘들어 섣불리 세례를 권하지 않습니다. 그에 앞서 이 분들에게 매일 말벗 방문봉사와 주3회 온천효도관광 봉사 등 재가복지 서비스를 통해 필요한 것들을 부족하나마 채워 드림으로써 영육간의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드립니다.”
선교공동체가 사목하는 공소는 월학리가 아니라 서화면 천도리와 해안면에 있다. 11년 전 김 신부가 왔을 때 신자수는 천도리 공소에 5명, 해안리 공소에 20명 정도 있었으나 지금 각각 40명, 60명 정도로 늘었다. 기간에 비해 그리 큰 증가율은 아니다. 대신 가장 어렵고 힘들며 외로운 이들을 매일 찾아가 필요한 김치와 간장, 된장, 고추장을 갖다 드리고 말벗이 되며, 건강한 삶을 사시도록 도와드린다. 매주 월, 수, 금요일에는 가까운 척산 온천에 모시고 가 온천을 하며 등도 밀어드린다. 온천을 마친 다음에는 가까운 곳에 정해진 식당 3곳을 돌아가며 점심을 대접해 드리고 동해바다 구경도 시켜 드린다.
“우리의 뜻을 알게 된 온천과 식당 주인들이 요금을 받지 않아 우리는 차량봉사와 때밀이봉사만 하면 됩니다. 돈 안 드는 복지를 하는 셈이지요. 현 사단장 부인도 우리 때밀이 봉사자입니다. 온천효도관광 승합차도 지인이 사준 것입니다. 지금 제가 어르신들 방문을 위해 타고 다니는 엘피지 자동차는 4년 전 설악본당 주임으로 사목하시다가 지난 1월 은퇴하신 허동선 마태오 신부님이 어느 교우가 새 차 사기 위해 300만 원에 내놓은 것을 유지비가 적게 든다며 사 주신 것입니다. 오래된 가스차라 겨울철에는 시동 걸기가 힘들고, 눈길 운행도 힘들지만 저에게는 언제나 기쁨을 주는 고마운 ‘애마(愛馬)’입니다.”
2000년 재가복지센터를 열고 처음에는 인제군의 지원(월 600만 원)을 받아 기초생활보호대상자들을 돌봤으나 2년 후부터는 지원금을 받지 않고 정부 주도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차상위계층, 저소득 소외계층을 돌본다. 군 예산이기에 까다로운 회계보고를 해야 하고 간섭이 많기도 했지만 정말 어렵고 외로우며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수급자들을 돌보는 다른 종교 단체나 기관이 많이 생긴 것도 한 이유다. 봉사자들과 함께 이들에게 베푸는 김 신부의 서비스는 다양하다. 집안청소와 세탁, 이 ․ 미용, 주거환경개선의 가사지원 / 주거환경 개선 서비스, 간병, 호스피스, 건강 체크, 병원동행, 말벗, 목욕의 가정간호 / 말벗 서비스, 밑반찬 배달, 도시락배달, 간식배달의 사랑의 도시락 / 밑반찬 서비스, 생신축하, 경로잔치, 효도관광, 생계비지원, 난방유 지원, 행정업무 대행의 기타 서비스 등 안 하는 일이 없다.
“이 분들에게 드리기 위해 매년 배추 1,000포기로 김장을 담고, 콩 다섯 가마니로 메주를 담아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습니다. 필요한 배추와 무, 콩 등 농작물은 고마운 이웃들이 베푼 것들과 700여 평 되는 밭에서 우리 가족들이 직접 유기농법으로 농사지은 것으로 충당합니다. 군부대의 도움도 있고요. 그 외 필요한 운영비는 지인들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늘 부족함 없이 채워집니다. 특히 친구들과 신부님들이 많이 도와줍니다. 개원 축복식 미사를 집전해 주신 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님이 매 2년마다 이 지역 사목방문 오실 때 꼭 우리 공동체를 방문해 격려해 주시며 개인적으로 모아 두셨던 사비 1,200만~1,500만 원 정도 주고 가곤 하셨습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부족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꼭 채워 주시니까요. 하느님 들어오실 틈을 남겨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장되지 않은 가난한 삶에서 체험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큰 기쁨입니다.”
서울공대-가톨릭대-로마 성서대학 출신의 엘리트 사제
김 신부는 1976년 경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산업공학과를 나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전임 연구원 생활을 한 뒤 1986년 글라렛 선교수도회에 입회하면서 대신학교인 가톨릭대학 2학년에 편입학했다. 1991년 부제품을 받으면서 종신 서원을 했으며, 1992년 7월 3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서울대교구 사제 등 43명이 함께 고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신품을 받았다. 그 해 9월 로마 그레고리안대학으로 유학 가 성서선교신학을 공부하다, 다시 그 어렵다는 성서대학 2학년으로 편입해 3년 만에 성서학 석사학위를 받고 1996년 12월 귀국했다. 귀국하기에 앞서 스페인으로 가서 스페인어를 더 익히고 귀국하려고 했으나 당시 73세이던 어머니 김봉순 세실리아님의 위독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으나 끝내 임종을 보지 못하고 눈물의 장례미사를 집전했다. 그 몇 달 전 어머니는 여동생과 함께 로마에서 10일 정도 기쁘게 순례하고 갔기에 김 신부의 마음은 더 아팠다.
어머니는 김 신부에게 사제의 길을 택하게 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1957년 1월 8일 경북 영천에서 3남 4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난 김 신부가 어렸을 때, 엄격했던 아버지 김만조 요셉 님(2000년 81세로 선종)은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집안 출신의 어머니가 보여준 신앙생활과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사랑의 실천은 그대로 김 신부의 마음 속 깊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당시 아버님께서는 교사와 경찰관, 사업을 한 뒤 과수원 농사를 지었습니다. 일하는 사람과 친척 등 매끼 밥 먹는 식구가 20명이 넘었지요. 그 때만 해도 아침, 점심, 저녁 먹을 때면 꼭 깡통을 들고 먹을 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우리 가족 먹고 사는 일도 벅찼으나 그런 사람들을 위해 밥과 반찬을 따로 담아 두었다가 기꺼이 웃는 얼굴로 주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제가 되는데 다음으로 영향을 미친 계기는 서울공대 재학 중 기숙사 책상에 언제나 성서를 두고 읽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매일 성서를 읽으며 중요한 대목은 메모를 하고 묵상했습니다. 그 때 이미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성서학을 전공하게 된 씨앗도 그 때 뿌려진 것이라고 봐요. 그 다음은 대학 재학 중 봉사활동을 했던 서울 응암동 소재 나환자 자녀들의 시설인 ‘은총의 집’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20여 명 되는 미감아들과 친구가 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의 집에는 당시 글라렛 수도회 소속의 스페인 사제 산토스 신부가 함께 봉사활동을 하셨습니다. 산토스 신부는 사제가 되겠다는 저에게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글라렛 수도회 한국지부에서도 혜화동 가톨릭대학에 얼마든지 다닐 수 있다.’며 글라렛 수도회 입회를 권하셨습니다. 저는 글라렛 수도회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사제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무조건 입회했지요.”
신자가 아니던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세속적인 출세가 보장된 똑똑한 아들이 신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1991년 김 신부가 종신 서원을 할 때 세례를 받고 1999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강릉 호스피스병원인 갈바리병원에 3개월 정도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왕자님!”이라며 아들 신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힘든 이들 위해 한방대학 졸업하고 사회복지사 1급 등 자격 취득
“우리 글라렛 선교수도회는 도시 빈민들과 농어촌 지역민 등 도움의 손길이 가장 절실한 곳을 찾아갑니다. 소외되고 열악한 공소를 기점으로 우선 지역민들의 복지화를 위해 힘쓰고 그 다음으로 복음화 활동을 펼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물질로는 한계가 있기에 결국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지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고 판단되면 그 지역 교구로 공소를 넘기고 또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같은 과정을 거치지요.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초부터 수도회 계획에 따라 동해안 접경지역인 고성군으로 선교활동이 확장됩니다. 접경지역인 고성군을 선택한 것은 남북이 하나가 되는 때를 준비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미 활동은 시작됐고 현재 이 지역 어르신들과 소외된 가정들을 방문하면서 실제로 이분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식별하고 있습니다. 기준은 역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건강하고 인간다운 삶입니다. 고성군에서는 재가복지 활동과 더불어 폐가들을 이용하여 생태-복지마을을 만들 계획입니다. 도시에서 정년퇴직한 분들 가운데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친환경적으로 농사도 짓고 각자 전문성에 따라 수입 사업도 하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자립형 복지마을을 만들고자 합니다.”
글라렛 수도회 한국지부는 필리핀에서 활동하던 스페인 출신 마누엘 타르디오와 호세 마르퀘스 선교사가 인천교구 초청으로 한국에 입국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인천교구 석남동본당 서곶 공소와 금곡 공소, 오류리 공소를 맡으면서 첫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김 신부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97년부터 금곡리와 오류리 공소 지역을 선교본당으로 신설해 첫 주임사제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인천가톨릭대학에도 출강했다. 이어 1999년 글라렛 수도회 한국지부장 겸 동아시아 관구 참사직을 맡아 상경했다.
“지부장을 맡고 그 다음해인 2001년 글라렛 미션센터를 만들어 선교연구소와 선교교육관, 선교자료실, 선교후원회를 두고 선교를 제대로 연구하고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그해 원통선교공동체를 만들어 자리를 옮기면서 2004년까지 미션센터도 함께 맡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이 곳 일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지부장 시절, 유학시절부터 누적되어 온 건강 악화로 소장을 4m나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으며, 로마 본부에까지 “김 신부가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갈 정도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얻은 관절염이 골수염으로 악화돼 1년을 휴학할 정도였으며, 대학 1학년 때까지 고생한 적이 있다. 김 신부는 당시 대학 1학년에 이어 2학년 때도 교련 면제 받기 위해 서울대병원에 진료 받으러 갔더니 그토록 심하던 골수염이 깨끗이 나아져 있었다고 한다. 6m 정도 되는 소장을 4m나 잘라냈고, 그에 앞서 그토록 심하던 골수염도 완치된 것은 분명 주님께서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주신 ‘치유의 은사’라고 김 신부는 믿고 있다. 건강을 되찾아 주신 주님의 뜻에 따라 김 신부의 헌신적인 삶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김 신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돕기 위해 2006년부터 4년 동안 원광대학교 한방대학의 사이버강의를 들어 한방건강학과 약물재활복지학을 복수 전공해 사회복지사 1급, 자연 치료사, 약선사 자격을 취득했고, 침술도 배워 필요한 사람들에게 침도 놓는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고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김 신부의 확고한 생각이며 철학이다.
글 / 최홍운 alsemffp34@naver.com
사진 / 최주성 ritts2000@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