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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7회
제7장 두 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세 번째 결혼
예수는 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본다. 잠시 후 그는 피곤한 듯 눈을 감는다. 아내 마리온이 스푼에 물을 떠서 그의 입으로 가져갔으나, 그는 고개를 돌려 거절한다.
그의 회상은 계속된다. 이제 이어지는 기억은 그와 더불어 어려운 고비들을 함께 한 그의 동지이며 사랑하는 아내였던 막달라 마리아 Mary Magdalene에 대한 것이다. 로마를 떠나 동쪽으로 온 후 수백 번 수천 번 반추해 온 아름답고 슬픈 추억이다.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 즉 막달라 마리아는 수려하고 또 지혜로웠다. 그녀는 디베리오 사람으로 단 교단의 일원이었다. 이 교단의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는 종규宗規 덕에 그녀는 예수와 재혼을 할 수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씨루스 Cyrus라는 사제의 딸이다. 씨루스는 가버나움 Capernaum의 한 회당에서 집전하는 사제로 단 종단의 일원이었다. 복음서에서는 그녀를 '일곱 마귀가 나간 여인'이라든가 창녀, 간통한 여인등으로 등장시켜 매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후세에 악의적으로 재편집된 것이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미리암 Miriam의 다른 형태인데, 미리암은 여자가 성직자와 같은 공적 임무를 맡았을 때 부르는 이름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같은 이유로 미리암이라고 불리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서기 삼 년에 출생하였고 서기 삼십 년 스물 일곱 살 때 예수와 결혼한다. 이때 예수는 삼십 칠 세였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여성의 결혼연령은 보통 14~15세였다. 그녀의 예수와의 결혼이 늦어 보이는 것은 그 결혼이 재혼이었기 때문이다. 헤로데 왕 때에는 유대인에게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는 혼인율이 존재하였다. 예수는 일생 분주하고 어려운 하루 하루를 보낸 사람이다. 그래도 줄곧 그를 따라다니는 여자들이 여럿 있어서 크게 위로가 되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는 예수를 극진히 대하였다. 그녀는 키가 자그마하고 광대뼈가 좀 나왔으나 오똑한 코, 윤이 나는 가무스럼한 피부와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유대인의 일반적 특징보다는 중동지방의 여자에 더 가까웠다.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예수는 마리아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관능적 몸매는 아니지만 건강하고 역동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녀의 눈은 지적이고 강렬하였다. 그녀는 사회적 습속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여러 집회에서 항상 예수가 화제의 중심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그에게 당돌한 질문을 하고 또 자기 소견을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주의를 끌었다.
지난 1992년 프랑스 샤트르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봉헌된 노틀담 성당 지하묘지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특히 법의학자들은 편두지수와 안면계수, 하악골의 형태등 유대인의 전형적 특징에 놀라고 있다. 오른쪽은 발굴된 유골을 토대로 법의학자들에 의해 복원된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
막달라 마리아로 추정되는 유골(좌) / 그 유골을 토대로 복원된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우)
유순하고 피동적인 여성을 선호하는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남자들은 개성이 뚜렷한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베드로는 마리아를 노골적으로 싫어하였다. 마리아는 그런 베드로를 두려워하였다. 베드로는 훗날 교회의 지배권을 두고 막달라 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사제들과 일대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여기서 결국 패권을 차지한 베드로는 훗날 교회의 철저한 남존여비 체제의 전형이 된다.
빌립보서에서는 "주와 함께 걷는 사람들은 항상 셋이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 그의 누이, 그리고 막달라 여인이었는데 막달라 여인은 그의 반려자이다." 조금 뒤에는 그녀와 관련하여 "구세주의 반려자는 막달라 여인 마리아였다. 그는 제자들보다도 그녀를 더욱 사랑하였으며, 그리고 종종 그녀의 입에 키스하곤 하였다." 나머지 제자들은 속이 상해서 그에게 말하였다."어째서 우리들보다 그 여인을 더 사랑하십니까?"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째서 너희들을 그 여인처럼 사랑하지 않겠느냐? 장님과 보통 사람 하나가 어두움 속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은 서로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볼 줄 아는 사람은 빛을 볼 것이고, 장님은 여전히 어두움 속에 머물 것이다." 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와 마리아는 진실로 사랑하였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사이의 결합이었다. 예수에게 사랑이라면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원수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만이 위대한 사랑으로 여겨졌었다. 그는 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남녀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마리아로부터 예수는 그런 사랑을 배운다. 육체적 사랑도 그녀로부터 배우게 된다. 예수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에게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낳아 주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을 당시 임신 3개월이었다. 서기 33년 9월 예루살렘에서 타마르 Tamar; Damaris; Phoebe라고 하는 딸이 태어난다. 37년 6월 마리아는 예수 유스도 Jesus Justus라고 하는 장남이자 두 번째 아이를 낳는다. 유스도는 정통성있는 상속자이며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다윗의 정손이다. '유스도"는 다윗 계승자의 타이틀이었다.
예수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이 타이틀을 사용하고 있었다. 예수의 장남 예수 유스도는 24세가 되었을 때 선교활동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골로새 Colossae에 있는 바울에게 편지를 보냈다. 바울은 예수의 장남 예수 유스도에게서 온 편지를 받고 무척 감격하며 감사해마지 않았는데, 이 서간문에서 24세의 청년 유스도는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과 다윗 계승자의 타이틀, 즉 예수 유스도를 사용하고 있다.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골로새서4:11)
결사항쟁을 다짐하는 「열심당원」 (zealot)(좌) / 예루살렘 최후의 보루 「마사다 요새」(우)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고원에 헤롯왕이 지은 요새화된 궁전이나 로마 10군단에 의해 점령당함으로 유대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마리아는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에게 헌신하였다. 그녀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을 때 골고다 언덕에 같이 있었고 예수가 동굴무덤으로 옮겨졌을 때도 같이 있었다. 가사상태에 있는 예수를 소생시키는 일은 주로 시몬이 했지만 그때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수를 시종일관 간호하고 돌보았다. 예수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여 거동할 수 있게 되자 두 마리아와 에세네 신도들은 예수를 나귀에 싣고 갈릴리로 가게된다. 그때부터 예수의 은둔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14년만에 끝나고 만다. 그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기라기보다는 외부적, 종교상의 그리고 일부다처제의 유대적인 이유에서 였다. 예수는 그 이혼을 거부하지 못하였다. 셋째 아이 요셉을 임신하고 있었을 때 마리아는 예수를 떠날 결심을 한다. 문제제기는 평소 마리아와 사이가 몹시 안 좋았던 베드로가 하였다. 그는 마리아가 열심당원이었고 전에 결혼했던 사실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래 로마에 대항하여 무력투쟁을 하는 열심당원 Zealot이었다. 예수를 만난 후 예수의 설득으로 비폭력 노선으로 전향했었다.
그러나 칼리굴라 황제 Caligula, 37~41 AD의 학정이 심해지자 로마에 영웅적으로 맞서는 무력투쟁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마리아는 그녀의 동료 헬레나 Helena, 그리고 시몬 마기 Simon Magus와 더불어 무력투쟁노선으로 복귀하였다. 이 때문에 예수의 교단과 시몬 마기가 이끄는 열심당 사이에는 분열이 일어났다. 바울도 이 논의에 합세하여 열심당의 생각과 행동노선은 예수가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공박하였다. 종교적 이유, 정치적 이유, 유대인적 이유로 마리아와 예수는 결국 이혼하였으나 우호적으로 헤어졌다. 바울도 마리아와 예수의 이혼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였다.
마리아는 결국 예수를 떠난다. 그녀는 꽤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 마르세이유 Marseilles를 향해 딸 타마르와 함께 배에 오른다. 일행 중에는 그녀의 언니 마사 Martha와 시녀인 마르셀라 Marcella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상륙지점은 프로방스 Provence의 라띠 Ratis로서 후세에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바다의 성(聖) 마리 Les Saints Maries de la Mer'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기 44년 3월 마리아는 마르세이유에서 예수의 세 번째 아이이자 두 번째 아들을 낳는다. 그의 이름은 요셉 Joseph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팔레스티나에 있을 때, 예수가 먼 여행을 할 때을 제외하고는 예수곁을 떠난 일이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았을 때에도 옆에 있었고 예수가 무덤에서 소생한 것을 처음 목격한 사람도 마리아였다. 그녀는 예수와 결혼하여 십 사 년을 함께 살며 예수의 고뇌와 좌절과 성공을 다 지켜보았고 또 그것들을 그와 공유하였다.
예수의 철학과 사상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의 가르침과 교리도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충고나 고언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그녀에게 "사도중의 사도 Apostle of Apostles"또는 "사도의 으뜸 The First Apostle"이라는 칭호를 준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마르세이유 근방에 교회를 세우고 예수의 종교 그리스도교를 충실히 전도하는데 헌신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신도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봉헌된 「베즐레 성당」(좌)(여기에 막달라 마리아 유품 소장) / 「베즐레 수도원」 전경(우)
예수가 구상하고 설계하였던 그리스도교의 원형은 바울의 교리왜독과 베드로 파가 득세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리아에 의해 충실하게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서기 육십 삼 년, 그녀의 고향 팔레스티나와 남편 예수를 멀리 한 채 마르사이유 근교 생 봄 Saint Baume에서 일생을 마친다. 그때 그녀의 나이 육십 세였다.
후세에 예수의 첫 부인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높은 숭앙(崇仰: 공경하여 우러러 보다)은 랑독 Languedoc 지방에 그녀에게 봉헌된 유명한 '렌느 르 샤또 Rennes-le-Chateau'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프랑스 여러 곳에 聖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워 놓은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聖 막시무스 St.Maximus 성묘인데, 여기에는 그녀의 비화 秘話를 석고로 나타내는 무덤이 있다. 이 성소는 4세기 때 부터 지금까지 수도승들이 지키고 있다. 보통 노틀담 Notre Dame; Our Lady은 파리의 노틀담 성당에서 처럼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지만, 여기서의 노틀담은 예수의 부인 막달라 마리아를 지칭하고 있다.
12세기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봉헌되는 8개의 노틀담 성당들이 처녀좌 Virgo의 별자리를 따라 프랑스 전역에 걸쳐 세워졌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이 샤뜨르 Chartres의 노틀담 성당이고 나머지는 루앙 Rouen, 아미앙 Amiens, 라옹 Laon, 렘 Reims, 에땅쁘 Etampes, 베이에 Bayeux, 그리고 에베레 Evereux에 있다. 이 장엄한 대형 건축물들을 보노라면 프랑스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크나큰 존경과 숭앙을 받고 있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이런 유산이외에도 마리아는 많은 역사기록과 사적, 그리고 비화를 통해서도 후세에 기억되고 있다.
예수가 남긴 자녀로는 그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 타마르 Tamar와 두 아들 유스도 Justus와 요세푸스 Josephus의 3명이 있다. 또한 그리스 필립피의 리디아 Lydia와 결혼해서 태어난 딸이 한 명 있으며, 그 후 카슈미르에 와서 예수의 세 번째 부인 마리온 Marjon이 낳아 준 아들이 있다.
이와 같이 예수의 혈통을 잇는 후손들을 데스포시니 (Desposyni; the heirs of the Lord; 주(主)의 계승자)라고 한다. 이들은 각기 후손을 산출하고 또 후손이 후손을 낳아 2,000년 동안 대를 이어 오늘날에 이른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의 동생 야고보의 후손도 데스포시니로 보고 계보를 따져본다. 예수와 그의 첫 번째 부인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 중 장남 유스도는 그의 아들 대에서 손이 끊어지고 차남 요세푸스는 그의 아들 요슈 Josue를 통해 예수의 증손자 아미나답 왕 King Aminadab으로 이어 간다.
한편 야고보는 브리튼 왕 King of Britons의 고손녀 에니게우스 Enygeus와 결혼하여 안나 Anna라는 딸을 낳았는데, 이 안나는 브리튼 왕의 증손자 브란 Bran the Blessed과 결혼하여 딸 페나르던 Penardun을 낳는다. 그녀는 브리튼 왕의 고손자의 아들 마리우스 왕 King Marius와 결혼하여 코엘 왕 King Coell을 낳는다. 그런데 코엘 왕의 3자매중 에우르겐 Eurgen은 위에서 말한 예수의 증손자 아미나답 왕과 결혼하여 자손을 두는데, 이들이 옛 프랑스의 골 Gaul 왕국의 휘셔왕들 Fisher Kings이다. 위의 유르겐의 오빠 아틸데 왕 King Athilde에서 몇 세대가 지나면 프랑스의 메로빙 왕조 (Merovingian Dyansty, 486~751년)에 도달한다. 또한 유르겐의 둘째 오빠 루시우스 Lucius에서 4세대 후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Constantine the Great,280~337)로 연결된다. 예수와 야고보는 아틸데 - 루시우스 - 에우르겐 대代에 와서 혈통이 합쳐진다. 즉 아미나답은 예수의 계보에 속하고 에우르겐은 야고보의 계보에 속하는데, 둘이 결혼함으로써 이중 데시포시니 dual Desposyni가 형성된다. 이들의 후손이 위에서 말한 골 왕국의 휘셔왕들이다. 이상이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아우 야고보의 계보이다.
생각해 보면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소식을 카슈미르에서 접한 것은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다. 그녀가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 Aix - en - Provence 동네에서 타계하였고 서쪽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들 유스도는 예수의 정식 계승자로서 이제 완성 단계에 들어간 신흥 종교, 즉 그리스도교를 설파하고 전도하며 로마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들은 바 있다.
' 내 자식들을 다시 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라라.' 예수는 깊은 한숨을 쉰다. 그는 이제 이 세상에서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자기 몸으로 느끼고 있다.
십자가 밑에서 울고있는 예수의 첫번째 부인 「막달라 마리아」(좌) / 두번째 부인 「리디아」와 그딸 그리고 예수(우)
예수는 계속해서 상기한다. 바울의 야심 찬 전도여행은 안디옥으로부터 소아시아의 에베소로, 거기서부터 다시 그리스 땅 빌립비로 그의 일행을 이끈다. 당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을 배후에서 정신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계속 지도해 왔으나, 외부적으로는 마치 수도승처럼 은둔생활을 해 온지가 벌써 10여 년이 되었었다. 서기 49년 예수는 바울의 요청으로 그리스 선교 여행에 동행하게 된다. 그는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필립비에서 꽤 머물렀다.
서기 50년 예수는 그곳 교단에 속해있는 리디아 Lydia라는 처녀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어 마침내 결혼한다. 이것은 예수의 두 번째 결혼이다. 사도행전에는 예수가 마케도니아의 두아디라 Thyatira에서 리디아라 하는 '자줏빛 염료를 파는 여자 a seller of purple'와 "흉금을 터놓았다(opened the heart; '남녀간에 깊은 관계를 맺다'라는 뜻으로 쓰였음)" 또한 "리디아의 집에 머물러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줏빛 염료는 뿔고둥 murex에서 추출한 액에서 얻는 것으로 당시 매우 귀하고 값이 비싸 왕족, 귀족이나 부자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리디아는 상당히 부유한 여자인 셈이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리디아라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사도행전 16:14~15)
예수와 리디아의 결합은 또 한번 종규상의 문제가 되었고, 여러 교파들과 신도들의 심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으나, 전신 바리새파였던 바울의 법률적 논리와 설득으로 곧 무마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수와 리디아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3년도 채 안되어 예수는 그녀를 잃는다. 사별하였다. 짧은 기간이긴 하였지만 예수가 그리스 밖으로 외유하여 그녀를 떠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의사 Beloved Physician' 누가 Luke한테 그녀를 돌보게 하였고 예수는 그녀에게 여러 통의 서한을 보내 사랑을 표현하곤 하였다. 예수는 그의 두 번째 아내 리디아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을 뿐 그 후의 자손은 없었다. 예수는 지금 이렇게 카슈미르에 누어서 자기 아내였던 리디아와 그의 딸을 생각하며 못내 눈물을 삼킨다. 무엇보다도 일찍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동방으로 떠나, 혼자 남겨진 딸의 처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예수의 카슈미르 쪽 계보는 서기 60년 예수가 그의 세 번째 부인 하드럇 아이에샤 마리온 Hadrat Ayesha Marjon과 결혼하여 아들 아호이아 - 킴 Ahoia - Kim을 얻은 이후, 카슈미르 지방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현재 생존해 있는 예수의 후손 사히브자다 임티아스 샤힌 Sahibzada Imtiaz Shaheen은 예수의 73대 손이다. 예수의 카슈미르 쪽 계보는 카슈미르에 대규모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고 정착생활에 적합한 안온한 지리적 여건으로 예수의 혈통을 잘 유지해 올 수 있었다. 한편,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동생 야고보로 출발한 유럽 쪽 데스포시니는 그 가계도가 수 없이 가치를 치고 곁가지를 치다보니 하나의 복잡한 관목 灌木처럼 되었다. 따라서 혈통이 심히 희석되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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