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초등학교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이제 총동창회가 출범하고 다음일요일에 창립총회도 있다 하니 우리도 모두 동참하자. 모두 새 홈페이지에 가입도 하고 축하의 글도 올려보자.
초등학교의 추억 – 우리는 가족
작은 아버지부터, 지금은 회갑을 훨씬 넘긴 큰형님, 둘째 형님, 누님, 셋째 형님이 다녔고, 사촌동생, 육촌동생, 마을의 동생들, 조카들, 그리고, 친구의 아들과 딸들이 다녔고, 지금도 다니고 있는 병천 초등학교. 지금은 여든 셋을 넘기신 어머니가 꼭 지금의 내 아내 나이일 적에 칭얼대는 막내 손을 이끌고 입학식을 하던 때가 1966년 봄이니 벌써 39년 전의 일입니다. 나보다 두 살 적은 아내의 모습이 여전히 화사하고 아름답듯이, 그때의 어머니는 최고의 미인이셨고, 가장 젊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왜 그리 누런 콧물을 훌쩍이는 애들이 많았는지, 가슴에 광목 손수건을 달고 다니며 수시로 닦아주어도, 얼굴엔 땟물이 얼룩지고, 검정 고무신에 맨발이 대부분이었지요. 몸이 허약하고 골 부리기를 잘했던 나는 툭하면 아프다고 어머니 등에 엎혀서 학교에 가곤 했었지요. 이제는 갸날픈 모습으로 가뿐히 엎어드릴 수 있는 어머니께서 그 시절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전봉준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글을 깨우치던 기억이 가물 합니다.
중학교 입시준비로 새벽같이 학교 가던 셋째 형님을 따라 논당 고개 넘어 꾸불꾸불 밭 길을 따라 뛰듯이 쫓아 갔던 2학년 때부터, 학교는 의례 일등으로 가는 버릇이 생겼었습니다. 제법 공부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공부 못하는 사촌녀석보다 책 읽는 게 형편없다고 유헌종 선생님께 종아리 맞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맨 뒤쪽 산아래 있던, 일제시대 때 지었다던 목조 건물, 그 뒷산 언덕에 책상하나 놓고 선생님 앞에 줄 서서 책 읽는 검사를 했었지요. 자만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사랑의 매였다며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우리집도 가난하여 늘 먹을게 부족하여 배고파 했었는데, 우리보다 더 가난한 애들에게 바께쓰에다가 노란 옥수수죽을 점심때마다 나누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고소하고 걸쭉한 죽 한 숟가락 얻어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근엄하고 안경을 쓰셨던 김준기 선생님이 담임을 하셨던 3학년 때는 부잣집 애들이 서울로 전학을 가기 시작하던 때 였습니다.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높이든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경제개발이 한창 이루어지면서, 수 십년 된 낡은 목조건물의 한 켠을 뜯어내어 시멘트 블록으로 새 교사를 신축하느라 학교가 난리였었지요. 강당으로 봄 소풍 가고, 논정으로 가을 소풍 가던 생각이 납니다. 은석사도 빼 놓을 수 없는 단골 코스였지요. 작년가을에 그 시절 그 코스로 여러 친구들과 소풍을 갔는데, 30년이 넘은 기억을 되살리며 겨우겨우 길을 만들어가며 섬말 뒷산으로 해서 넘어갔는데, 그 추억의 길이 그렇게 아름다웠지요. 은석사가 그렇게 작고 초라한지 또한 놀랐었습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진 맨 앞쪽에 신축된 교사로 처음 이사하여 공부했던 4학년시절, 송정 국민학교에서 전근오신 손원철 선생님의 가르침은 일생을 두고 은사로 생각하며 그 말씀들을 가슴깊이 새겼던 시절입니다. 대전에서 새로 오신 아주 키도 작은 교감선생님께서, 청소 마치고 교무실에 보고하러 가면, 같이 갔던 여자 부반장의 손을 잡아보라고 하여 무척이나 부끄러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회지의 애들은 그런다면서, 집에 갈 때 손을 잡고 가라고 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그 여자 동창이 지금은 청주에서 잘 살고 있다더군요. 가을 운동회 때면 집집마다 어머니, 아버지까지 학교에 먹을 것을 그득 싸 가지고 와서 함께 응원하고 둥그렇게 앉아 점심 먹었던 추억, 이제와 생각하면 그 시절의 축제였습니다. 하얀 런닝에 파란색으로 병천 이라고 쓴 글자에서 석유 냄새가 났고, 까맣고 뻣뻣한 광목팬티만 입고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모두가 하나가 되었던 가을 운동회의 그 알싸 했던 정취가 시리도록 그립습니다.
5학년 때는 반장을 했었지요. 육익수 선생님의 걸걸한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아직도 만나면 그 시절을 얘기하는 친구들은 아마도 5학년 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인 것 같습니다. 때마침 중학교 입시가 없어지고 아우내 중학교와 병천 중학교를 추첨으로 입학하게 되었으니 공부의 부담이 없어진 거지요. 덕분에 학교 가꾸기 사역도 참 많이 했던 시절입니다. 지금은 체육관(충효관?)이 있는 그 자리에 커다란 밭이 있어서, 무슨 실습을 그렇게 많이 했는지, 집에서도 막내라고 밭일한번 안 시켰는데, 학교가면 밭에서 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은 40회 동창회장인 재승이가 빵장이 되어 매일 오후에 빵을 배급해주던 시절, 엽서 크기의 빵 6개가 한 덩어리로 된 사각형 빵을 매일 점심지나서 트럭으로 그득 싣고 오면 풍겨오던 그 구수한 냄새에 빵 배급시간만 손꼽아 기다렸었지요. 몇 학년 때부터인지 몰라도, 가을이면 보자기 하나씩 들고 뒷산에 올라 솔방울 따는 게 오후 일과였지요. 겨우내, 조개탄을 때기 전에 불 쏘시개로 솔방울을 한 양동이 가져 다가 불 피울 지라면, 자욱한 연기로 교실이 어둑할 지경이었습니다. 겨울엔 물청소대신 참기름 먹인 걸레로 반들반들 윤이 나게 교실 바닥을 닦던 생각이 납니다. 발은 왜 그리 시려웠던지….
6학년 때는 2차로 신축된 빨간 벽돌의 2층 건물에 처음으로 입주하여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그 교실이 지금도 남아 있는 체육관에서 가장 가까운 교실인데, 아마도 현재 있는 건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목조건물뿐 아니라, 신축 건물인 4학년 때의 교실도 지금은 헐리고 없으니까요. 4학년 때 담임이셨던 손원철 선생님이 다시 담임이 되셔서, 비로서 인간으로서 세상으로 나가는 나에게 삶의 지표와 지혜를 가득 담아 주셨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고 한참 뒤까지도, 새삼 스승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되새겼던 기억들이 많이 있습니다.
초등학교시절은 꿈이었고, 추억이었습니다. 글을 깨우치고, 학문의 기초를 배우고,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해준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들어가고,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세상에 나와 비로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동안,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우리의 초등학교를 잊고 살았습니다. 세상에 뿌리 내리고, 나만의 영역을 만든다는 것이 그렇게 녹록치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 동안, 초등학교의 기억들은 꿈으로만 추억을 찾으며, 다시 깨어나면 현실에 파묻혀 부지런히 달려 왔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시절을 그리워 하며 친구들이 모인 것이 한 오륙 년 된 것 같습니다. 우리 동기들만의 동창회가 만들어지고, 몇몇 친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매년 초등학교 동창회를 할 때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아득한 그 시절의 꿈을 노래하곤 합니다. 이제는 사십대 후반의 희끗희끗한 머리에 조금은 주름진 얼굴들이 모여 동심으로 돌아가 천진스럽게 웃으며 추억을 얘기할 때면, 세상의 근심들은 저절로 녹아 나고 따뜻한 우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가득 담아오곤 합니다.
타산적이지도 않고 배타적이지도 않으며, 세상 풍파도 모르는 단절된 작은 울타리에서는 오직 동심과 배움의 시작이 있었을 뿐이기에, 그 시절의 친구들은 고향의 친구이며 죽마 고우이며 형제들입니다. 그 울타리를 아버지도, 형님도, 누님도, 동생도, 조카도, 그리고, 우리의 아들 딸들도 공유하였고, 그 안에서 살았으며, 꿈을 키웠으니, 우리는 모두 가족입니다. 우리 동창도, 선배도 그리고 후배도 그렇기에 가족이며 형제인 셈입니다.
뿔뿔이 흩어져 제 각각의 삶을 살아오던 우리의 가족이 이제야 모이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모이는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분야별 담당을 정하고 약속을 세우고 하는 일들은 누군가가 나서서 헌신적으로 해야 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오로지 봉사하는 마음으로만 가능하기에 사는 게 버겁고 힘들어서 모두들 미루기만 했던 일을 흔쾌히 나서서 추진을 해주는 신임 동창회장님과 임원님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아무도 못했던 일, 오로지 희생과 헌신으로만 가능한일이기에, 우리는 모두 감사하며 적극 동참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일요일에 총 동창회 창립총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우리 대가족회의가 처음 열리는 셈입니다. 각 회수별로 대표자의 참석도 중요하지만, 가족의 일원으로서 우리 모두의 참석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멀리 있어 못 가는 이들은 마음으로라도 성원하며, 총 동창회를 추진하는 분들에게 힘을 실어 주시고, 우리 총 동창회의 발전을 통하여 우리 가족 모두에게 기쁨이 되도록 협조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총 동창회를 발판으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각 회수별 동창회도 결성되고, 새롭게 만들어진 홈 페이지를 통해서 우정과 사랑을 교류하는 따뜻한 가족이 되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홈페이지에 가입하며, 축하와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장광설을 늘어 놓았습니다. 추억이 많은 만큼 하고싶은 얘기도 끝이 없으나, 차차 익숙해지며 조금씩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새로운 홈페이지가 화합하며 교류하는 아름다운 마당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4학년 때 같은 분단였잖우. 초우 남자 중 2등이구, 질주 여자중 4등이라 내 바로 뒤에 앉고(미안혀 내가 좀 큰데 너 앞 가렸었지??) 남여 1등 부터 꼴찌 짝 하고 앞에는 여자 4번까지 않고 뒤에 남자들 네 줄 8명 앉았고... 중요한 건 청소시간에 그대들 남자, 청소 하나도 안하고 우리 여자들만 시켰다는 거...
첫댓글 이 아침에 초등학교 다니던 내 모습을 떠올려 보는 글... 그러고 보면 4학년 까지 같은 반였네? 나도 4학년 때 같은 반였다는 건 알겠지만 3학년 까진 잘 모르겠고... 담임 선생님이셨던 분들 생각을 오랜만에 해보는 아침...
어쩜 그리도 초딩시절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지....덕분에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보며 웃어본다네.초우도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쭉 1반만 했던거네?
호수가 4학년때까지 같은반이었다구....그런것 같기도 하네...질주는 6년내내 같은반이었나? 꿈같은 시절이었지...좋은 주말 보내시길
4학년 때 같은 분단였잖우. 초우 남자 중 2등이구, 질주 여자중 4등이라 내 바로 뒤에 앉고(미안혀 내가 좀 큰데 너 앞 가렸었지??) 남여 1등 부터 꼴찌 짝 하고 앞에는 여자 4번까지 않고 뒤에 남자들 네 줄 8명 앉았고... 중요한 건 청소시간에 그대들 남자, 청소 하나도 안하고 우리 여자들만 시켰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