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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11)
예배란 무엇인가?② : 개혁교회의 언약적 예배(Covenantal Worship)38)
교회는 예배의식을 통해서 세상에 그 얼굴을 드러낸다. 그래서 예배의식은 그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는 예전이란 얼굴로 어느 교회인지를 인정받게 된다. 1618년 도르트(Dordrecht) 총회는 예배의식 순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이런 결정을 했다. “예배의식을 교회 공문서에 첨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예배의식으로 교회가 개혁된(re-formed) 교회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배의식은 교회 생활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교회 예배순서는 각 당회나 목사의 자유와 재량에 맡겨 둘 것이 아니다. 교회적 연대를 가지고 하나의 신앙고백과 교회질서를 가진 교회들은 공통적인 예배의식을 가져야 한다. 물론 세미한 부분까지 일치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예배의식의 근간은 공통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형편을 보면 같은 노회 공동체 아래 있으면서 각 교회가 서로 전혀 다른 예배순서를 도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사시대와 같이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참고. 삿 21:25).
개혁교회의 예배의식은 감독교회, 하나님의 성회, 침례교회 등으로부터 달라야 한다. 예배의식에도 신학과 역사가 그 배경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A. 개혁교회의 예배의식(Reformed Liturgy)
예배의식(Liturgy)이란 말은 원래 구약에서 주를 섬긴다(serving)는 동사에서 왔다. 성막과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섬긴 일을 가리켰다. 신약시대에 예배를 영어로는 ‘Service’ 혹은 ‘Worship Service’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제사장들인 신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공적으로 섬기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개혁교회 예배는 곧 신약적 예배이다.
신약적 예배라는 말은 구약적인 수평적(horizontal) 방법으로 하나님을 접근하는 예배가 아니고, 하늘의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수직적(vertical) 예배란 것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수평적인 차원의 예배였다. 회중이 접근하여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금촛대와 향단이 있는 성소가 있어 제사장만이 드나들었으며, 거기서 휘장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가는 지성소가 있어 거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었다. 이 성전제도는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었다. 일반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제사장을 통한 간접적인 것이었고 먼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상징적인 것이 성취되고 현실화되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수평적(horizontal)과정을 거치는 먼 길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성전의 상징적 제도를 이루시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길이 열렸다.
뿐만 아니라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들의 대제사장으로 계실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성령을 보내어 우리들의 보혜사로 임재 하시게 되었다. 그래서 개혁주의 예배에서는 하늘이 열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심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신약적 예배에서는 단순히 구원을 경험하고 즐기는 것 외에 여호와의 임재를 실감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28-29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고 했다. 영어 번역에는 ‘섬길지니’란 말을 예배로 번역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받음직한 예배를 드리자’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구원의 즐거움과 체험을 강조하는 나머지, 예배에 경건함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많은 교회들의 예배가 하나의 즐김(entertainment)의 시간이 되어 감을 보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현상이라고 생각 된다. 예배에는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경건함과 두려움이 있어야 하며, 다음으로 죄 사함 받은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에서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감사의 예배인 것이다.
2. 개혁교회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이 다 회집하여 드리는 것이다.
개혁교회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의 가족이 언약의 하나님 앞에 함께 모이는 아름다운 기회이다. 구약시대에도 흩어져 살던 언약의 백성들이 함께 큰 기쁨으로 성전에 올라 온 사실을 보게 된다. 시편 122:1절에 보면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고 했고, 시편 84:1-2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게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고 했다. 그림자와 상징 속에서 언약의 주를 만나던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집에서 드리는 예배가 이렇게 아름다웠다면 모든 것이 성취된 신약시대의 예배는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히브리서 12:22-24절은 신약시대 예배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했다. 신약 교회의 예배는 하늘의 예루살렘이 거기 내려오고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노래하며, 한 지붕 아래 내려와 함께하는 것이다.
3. 개혁교회 주일 예배에는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함께 봉사에 나선다.
개혁교회 예배에서는 모든 직분자들인 목사, 장로, 집사들이 각기 자기가 받은 소명을 따라 능동적으로 봉사에 임한다. 말씀의 사역자인 목사는 말씀을 선포함으로, 장로들은 교회 예배를 살피고 감독함으로, 집사는 감사헌금을 거둠으로 직분적 봉사에 임함으로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4. 개혁교회의 예배는 직분자들과 회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두 극단적인 예배 형태를 배제한다. 로마교회는 회중이 없어도 사제만으로 예배가 성립된다. 로마교회는 사제가 있는 곳에는 교회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중이 없어도 사제는 혼자 미사를 집례 한다. 이런 체제 아래서는 회중이 전적으로 수동적일 뿐이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회중이 없이는 교회가 없다. 결과 회중 없이 직분자만의 예배는 상상할 수 없다. 교회는 회중과 직분자들로 구성되고 예배는 직분자의 인도로 집행이 된다. 로마교회와는 다른 극단을 걷는 집단이 있다. 이것은 직분을 부정하고 회중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보는 회중교회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직분자들이 없어도 예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부름 받은 ‘말씀의 사역자’나 ‘장로’가 없이 회중의 대표자들이 예배를 인도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배순서에 많은 ‘성도’들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순서 등에 참여하게 함으로 회중교회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5. 개혁교회 예배는 언약적 예배(Covenental Liturgy)이다.
언약에는 두 상대( two parties)가 있다. 이 두 상대는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지 않다. 한편은 주 하나님이고, 다른 편은 그의 백성이다. 한편은 창조주이시고, 다른 한편은 피조물이다. 한편은 구주이고, 다른 한편은 구원받은 백성이다. 예배의식에는 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부분과 그의 백성이 화답하는 부분이 있다. 언약은 양 방간에 이루어지나 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심으로 시작된다. 원래 언약은 주권자 여호와께서 무자격한 백성을 상대로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결국 언약은 여호와 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졌고, 그의 언약의 상대인 백성에게는 순종이 요구되었다.
여호와와 그의 백성과의 언약의 성립은 일방적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단지 받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때에도 단지 그가 주신 것을 드릴 뿐이다. 이런 양편의 교통이 개혁교회 예배에서 드러난다. 이 언약적 예배는 양편의 교통으로, 그 요소가 양편으로 나누어진다.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 있다. 이것은 언약의 계명, 성경봉독, 말씀의 선포, 축도 등이다. 회중 편에서 오는 것이 있다. 이것은 예배로의 부름, 신앙고백, 기도, 찬송, 감사헌금 등이다.
이 예배에서 목사는 중재역을 맡는다. 물론 목사는 구약적 제사장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과의 사이에서 예배의 중재자로, 하나님 편에 서서 그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기도를 드릴 때는 회중의 대표로 그들의 입이 된다. 하늘의 예루살렘이 이 땅에 영원히 내려올 때까지 지상교회에는 중재가 아직 필요하다. 결과 개혁교회 예배 순서는 양편에서 오는 요소들로 이루어지며, 목사가 중재로 봉사하게 된다.
B. 언약적 예배의 표준 순서
언약적 예배 순서는 예배의 원리와 그 근간을 말할 뿐 세밀한 순서까지 정해진 철칙이 아니다. 예를 들면, 성례, 포괄적 기도, 헌금 순서를 말씀의 사역 후에 두느냐 혹은 앞에 두느냐는 문제에 대하여는 당회와 목사의 재량에 맡겨지고 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그 순서가 변경될 수도 있다. 그래서 캐나다 개혁교회의 ‘찬양책’(The Book of Praise)에 보면 두 가지 예배 순서 지침이 나와 있다.
오전 예배 순서
I. 예배의 시작
1. (C) Votum(예배로의 부름)
시편 124: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아멘”
2. (L) Salutation(여호와의 축복 응답)
고전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혹은 요한계시록 1:4,5a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3. (C) 첫 번째의 찬송
II. 죄의 고백
4. (L) 언약의 십계명, 출 20:2-17 혹은 신 5:6-21
5. (C) 죄의 고백기도
6. (L) 죄 사하심의 은혜의 선언
7. (C) 감사 찬송
III. 말씀의 봉사
8. (L) 성경봉독
9. (C) 축복을 위한 기도 찬송
10. (L) 말씀의 봉사
11. (C) 화답송(아멘 송)
IV. 12 (L.C.) 성례(세례, 성찬) 주께서 주시고 그의 언약백성은 화답함
V. 13 (C) 주의 온 교회를 위한 포괄적 기도
V1. 14 (C) 자비 사역을 위한 감사헌금
VII. 마침
15 (C) 마침 찬송
16 (L) 축도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혹은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위 순서에서 IV, V, Vl은 III 앞에 진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교회도 있고 성례는 일반적으로 2-3개월마다 있고, 세례(유아세례)는 매주 오전 오후 예배시마다 기회가 주어진다. 유아와 산모의 사정을 보아 설교 전에 세례를 베푸는 예가 많다.
이제 예배 순서 각 항목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I. 예배의 시작39)
예배 시작 약 10분전부터 회중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 시간에 반주자는 오르겐 혹은 피아노로 고요히 전주를 한다. 그 동안 모인 성도들은 그의 언약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 앞에 드릴 예배를 마음으로 준비한다.
예배를 시작하기 약 1분전 반주를 그치고 회중은 예배에 임할 준비를 한다. (찬양대가 있다면 적어도 예배시간 5분전에 들어와 착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개혁교회의 전통은 찬양대를 두지 않는다. 예배 시에 모든 백성이 함께 찬양함이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배 시간이 되면 당회실로부터 당회의 담당 장로가 앞서고 그 뒤에 목사와 다른 장로 집사들이 뒤따라 예배 실에 들어온다. 담당 장로는 강단 밑까지 가서 목사에게 악수를 하고 장로 좌석으로 돌아간다. 이런 교회의 관습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해 시에 예배에 방해를 받는 일이 있어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데서 생겼다고도 하며, 종교개혁 후 목사들이 귀하고 여행 중의 낯선 목사가 설교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당회는 그 목사를 면담하고 난 후 설교단에 인도함으로 교회에 당회가 신임하고 설교를 하도록 의뢰한다는 뜻을 보였다고도 한다. 그 기원이야 어떠했던 이것은 아름다운 교회 전통으로 개혁교회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회가 말씀의 사역자인 목사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단에서 내려 올 때에도 그 담당 장로는 강단 아래로 나아가 악수를 하고 목사 앞서 인도하여 퇴장함으로 당회와 교회를 대표하여 감사를 표하는 상징적 행동으로도 보이게 된다.
1) (C) Votum(예배로의 부름)
목사가 장로와 악수를 나누고 단위 강대 앞에 서면 모든 회중이 일어선다. 이 때 바로 목사는 회중을 대표하여 엄위하시고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다음의 성경 말씀으로 기원한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아멘”(시 124:8). 이것을 ‘예배로의 부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호와”는 신실하시고 변하지 않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의 성호다. 이제 언약의 백성(우리)이 함께 모여 언약의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여호와는 천지를 지으시고 지금도 유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되신다(시 103).
2) (L) 여호와의 축복응답
이어 목사는 손을 들고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서서 여호와 하나님의 종의 자격으로 그를 대신하여 그의 말씀으로 여호와의 응답적 축복을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언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혹은 요한계시록 1:4-5a). 이 때 목사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양 편을 봉사하는 종이 된다. 이것은 예배 시작의 축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로써 전 예배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은혜와 평강을 확신하게 된다.
축도는 예배 시작 때의 것이나 마칠 때의 것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해야 한다. 목사는 자기 생각을 따라 여러 경건하고 좋은 말을 붙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다른 말을 첨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리고 회중은 예배에로의 부름이나 여호와의 응답적 축복 시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라고 했다(눅 24:50-51). 제자들은 예수님이 손을 들어 축복하시는 것을 보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한다.
물론 예배는 다른 방법으로 시작할 수 있다. 시편 100:1-2, 113:1-2 들을 사용하여 회중을 하나님의 경배에로 초청할 수 있다. 그런데 위 예배의 시작은 개혁교회에서 어느 곳에 가든지 정착되어 있는 시작의 순서다.
3) (C) 첫 번째의 찬송
예배 시작 찬송은 삼위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찬송하는 내용을 갖춘 것을 택할 것이다. 시편찬송 92-100, 111-113. 캐나다 찬송 책 2-6. 성약 찬송 1-13, 한국 찬송가 8-48 등.
II. 죄의 고백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로움을 얻게 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인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죄가 제거되어야 한다. 지난날 다윗이나 바울과 같은 모든 종들도 하나님 앞에는 경외심을 가졌고 자격 없음을 의식하였다. 언약의 십계명은 언약백성에게 있어서 감사생활의 규칙인 동시에, 죄를 생각나게 하고 고백하도록 이끄는 말씀이다. 그래서 먼저 십계명을 선포한다.
4) (L) 언약의 십계명
십계명은 언약의 하나님이 그의 언약백성에게 주신 감사생활의 규칙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봉사할 종이 그를 대신하여 읽는 것(선언)이 자연스럽다. 근래에 많은 교회의 예배순서에 십계명이 빠져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는 시류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하게 된다.
이 십계명을 선언할 때에 세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 첫째로, 예배에서 십계명을 선언하는 것은 옛날의 문서를 읽는 것이 아니고 현재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언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계명을 들읍시다” 하고,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라는 서론 없이 바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부터 시작함이 좋다.
둘째로, 십계명을 선언한 후에 주께서 마태복음 22:37-40절에서 이 계명을 요약해 주신 말씀(민 6:5과 레 19:18)을 첨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언약의 십계명과 요약한 것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반복일 따름이다.
셋째로,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있는 언약의 계명을 교차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다. 두 곳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 출애굽기에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고 신명기에는 그 목적을 더하고 있다.
5) (C) 죄의 고백기도
개혁교회의 예식서에는 죄에 대한 공 고백 기도문이 있다. 다른 교회에도 이런 기도문을 사용하는 일이 있다. 공 고백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은 좋으나 늘 사용하게 되면 신선미가 떨어질 수 있다. 한국교회들 중에서 공 고백 기도시간을 2,3 분 회중에게 주어 각기 죄를 고백하는 기도시간을 갖게 하는 것을 보는데 이를 좋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 때 소리 내어 통성기도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혼란스럽고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다. 이 때 기도는 침묵 가운데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6) (L) 죄사하시는 은혜의 선언
하나님의 언약의 법에 비추어 통회하는 심정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렸을 때 죄를 사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게 된다. 이 때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하게 된다. 이 때 인간 목사의 말이 아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언할 수 있다.
시편 130:7-8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시편 103:3-5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다(마 16:19, 18:18). 이 매고 푸는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회중이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하나님과의 화해가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감사 찬송이 따르게 된다.
7) (C) 감사 찬송
목사는 주의 깊게 감사 찬송을 택해야 한다. 죄 사함 받은 감사와 순종의 생활을 원하는 내용의 것이어야 한다. 시편 30, 32, 33, 103 등(시 3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리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03: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이제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된다.
III. 말씀의 봉사
개혁주의 교회는 설교를 예배순서의 가장 종요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예배의 모든 다른 요소들은 이 여호와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듣는데 연관이 되고 집중되어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36주에서 제4계명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8) (L) 성경 봉독
어떤 교회는 설교의 본문과 관계없이 전통을 따라 구약, 신약으로부터 일부분을 읽는다. 이것은 성경을 갖기 어려웠던 옛날에 성경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교회의 예배 때뿐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전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개혁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설교와 관련 있는 본문을 읽게 된다. 가능하면 구속사적 관련이 있는 본문을 신구약으로부터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설교 본문이 구약일 때는 신약을 먼저 읽은 후에 구약의 본문을 읽는 것이 좋다. 이 본문은 곧 하게 될 설교와 직접 연관되기 때문이다.
봉독할 성경 본문은 택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일 뿐 아니라, 봉독을 위한 준비도 잘 해야 한다. 물론 설교 준비할 때에 여러 번 읽은 본문이지만 회중 앞에서 잘 읽을 수 있게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9) (C) 말씀의 축복을 위한 기원 찬송
어떤 분은 성경 봉독 후에는 바로 설교를 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러나 말씀을 듣기 전에 말씀을 흠모하는 내용의 찬송을 하는 것은 바람직스럽다고 본다.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찬양대가 합창을 한다. 그런데 이보다는 온 회중이 찬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10) (L) 말씀의 봉사
설교에는 봉독한 전 본문이 설교의 본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봉독한 본문 중에 설교의 본문(핵심본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설교 본문은 전체 성경을 결집하는 한 중심적 단위가 된다. 청중은 이 본문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그러니 설교 전에 그 “본문”을 한 번 더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럼 설교는 무엇인가? 고전적 정의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과 적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설교를 이렇게 단순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설교는 설교자 한 사람이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방적 활동이 아니다. 설교에는 듣는 대상이 있다. 그래서 설교자는 듣는 대상과 눈과 마음의 접촉이 있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설교 원고를 준비할 뿐 아니라, 원고 없이 할 수 있을 만큼 미리 기도하고 원고를 외울 만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자의 활동 이상을 의미한다. 말씀은 성령의 증거다. 성령은 말씀의 증거를 통해 신앙을 일으키신다. 그러니 교회당은 성령의 작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시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주시기까지 하신다. 그러니 말씀의 봉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설교자는 교회에서 벽을 향해 설교하지 않고, 반응을 하는 마음을 가진 회중을 상대로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런고로 설교는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고 교회의 회중이란 대상이 관련된 일이다. 그래서 설교를 하는 동안 언약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매우 밀접한 언약의 교제를 누리는 것이다.
목사는 말씀의 사역자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6:4절에 사도들이 구제를 위한 일곱 사람을 택하는 일과 연관하여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하였다. 여기 “말씀 전하는 것”은 “말씀의 봉사”로 읽을 수 있다. 설교는 말씀의 봉사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봉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여러 가지 예화를 드는 일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예화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회중의 기억에 남게 해야 한다.
11) (C) 화답송(아멘 송)
이것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멘으로 화답하는 찬송이다. 이것은 설교자가 선언할 필요 없이 설교자의 설교가 “아멘”으로 마치자 회중이 바로 화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설교 시작 전에 아멘 송을 미리 선언하는 것도 좋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과 조화되는 찬송을 미리 정선해야 한다. 설교를 주의 깊게 듣고 즐겼을 때, 회중은 감사와 기쁨으로 화답하며 찬송하게 될 것이다.
4 12) (L.C.) 세례와 성찬
세례와 성찬은 언약의 하나님 편에서 주시고, 회중 곧 언약의 백성 편에서 감사로 반응함으로 양편이 밀접하게 연관된다.
세례 : 세례는 설교 후에 집행하는 것이 원리적인 관점에서 바른 일이다. 성례는 말씀의 약속을 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의 설교 후 집행은 장년의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유아 세례의 경우에는 어려움이 있다. 유아세례는 출생한 후 빠른 시일 안에 언약의 표를 받게 되어 있다(교회법질서 57). 일반적으로 유아가 출생한 그 다음 주일에 세례를 받게 된다. 이런 경우에 설교가 마칠 때까지 유아가 조용히 있기가 어렵고 산모의 건강이 문제가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 전에 유아세례를 베푸는 경우가 많다. 개혁교회에서는 세례 전에 의식 문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설교를 대신하게 될 수 있다고 본다. 세례가 끝나면 바로 언약의 하나님의 신실함을 온 회중이 찬양하게 된다(시 105:2-3 등) 일반적으로 부모와 목사가 세례 단 옆에 그대로 서 있고 온 교회 회중이 일어서서 찬송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인치는 성례일 뿐 아니라, 언약의 자녀가 주의 몸된 교회에 공식적으로 접붙임을 받는 기회도 되기 때문에 유아의 부모뿐 아니라, 온 교회가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다.
성찬 : 개혁교회에서는 각 지역교회의 재량에 따라 1년에 4번 혹은 여섯 번 성찬예식을 거행한다. 개혁교회 성찬예식 집행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목사가 떡을 떼고 잔에 포도주를 붓는 것을 회중에게 보게 집례를 한다. 이것은 보이는 설교라 할 수 있다. 이때 목사는 떡을 떼면서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입니다. 이것을 받아 드시고 우리 죄를 완전히 사유하시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찢겨진 것을 기억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한다. 떡을 나눈 후 포도주를 잔에 부으면서 “우리가 감사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의 교제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고, 우리 죄를 완전히 사유하기 위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쏟으신 것을 기억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한다. 일반적인 전통은 교회당 전면에 긴 테이블을 마련하고 한번에 3,40명씩 나와서 성찬에 참석하고 성찬을 마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방법을 사용한다. 잔은 개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적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큰 컵 넷을 사용하여 돌리게 된다. 이런 전통적 성찬예식 방법은 작은 교회에서는 쉽지만 큰 교회에서는 쉽지 않다.
5. 13) (C) 주의 온 교회를 위한 긴 기도
개혁교회에서는 이 기도를 ‘기독교의 모든 필요를 위한 기도(A Prayer for all the needs of Christendom)’이라 부른다. 어떤 교회는 이를 목회적 기도라도 부르기도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했다(딤전 2:1-3). 이 기도는 세계를 포괄하는 광범위 한 기도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만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이 공적인 포괄적 기도는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 기도할 항목을 잘 준비할 것이다. 기도를 세심하게 준비하고 기록하여 하는 것도 좋다. 이것이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고 바람직한 일이다. 회중의 입이 되어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는 책임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감사와 입술의 제물이다.
6. 14) (C) 자비사역을 위한 헌금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H.C. LD.) 제38주에 제4계명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런 내용의 답이 있다. “주의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를 사용하며, 공적으로 주께 간구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예물을 드리며...”(to give Christian offerings to the poor)라고 한다.
개혁교회에서 교회운영(목사의 사례 등)을 위한 재원의 확보는 자원하는 정액 헌금이다. 이것은 각인이 교회 운영위 앞으로 바로 보낸다. 주일 헌금은 언제나 목적이 있는 대내 대외 구제를 위한 것이다. 곧 집사들의 자비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을 바울은 ‘봉사의 직무’(administration of service, diaconia)라고 했다. 이 헌금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요구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6:1-2절에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개혁교회에서는 이 헌금을 ‘the ministry of mercy’라고 한다.
헌금 수집 방법에 대해서는 연보 주머니를 사용하는 곳도 있고, 연보 쟁반을 사용하는 곳도 있다. 어떤 방법이 더 났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드려야 할 만큼 드리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남이 보이지 않게 주머니를 좋아할 수 있다. 자기의 드리는 것을 나타내기 좋아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쟁반을 좋아할 수 있다. 어느 방법을 사용하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감사하면서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개혁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연보 주머니를 사용한다. 근년에 이르러 예배순서에 헌금시간이 있어 헌금을 수집하지 않고 예배당 입구에 연보 궤를 두어 들어 올 때 넣게 하는 경우가 많다. 감사헌금 순서는 예배 시에 하나님 앞에 물질적 축복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개혁교회에서도 교회 입구에 여러 헌금함은 있다(학교, 선교, 신학생 등을 위한). 그것은 교인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내는 것들로 주일에 드리는 헌금과 구별된다.
7. 마침(예배의 절정)
15) (C) 마침 찬송
예배의 마침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나게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할 것이 아니라 선포된 말씀이 활성화되고 강조되어 절정을 이루게 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나아가 이제 예배를 마치면 다시 세상에서 일상생활을 당면하게 된다. 그러니 마침 찬송은 그리스도의 원수를 정복하고 나아가는 개선(凱旋)적 삶의 의미를 함축한 것도 좋게 생각된다. 이 마침 찬송은 회중이 일어서서 하고 일어선 그대로 있으면서 축도를 받는다.
16) (L) 축도
예배가 전체 예배를 포괄하는 축복으로 시작되었다. 마치는 축도는 다음 주일까지의 전 생활을 포괄하게 된다. 이 축복은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교제가 우리들의 전 삶에 동반을 위한 것이다. 이 축복은 예배가 잘 끝났다는 마침표가 아니다. 이 때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이 축도의 말 한 마디 한마디에 열려 있어야 한다. 삼위 하나님은 복을 부어 주시면서 우리를 내어 보내신 것이다.
축도는 고린도후서 13: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와 민수기 6:24-26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를 사용한다.
축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해야 한다. 경건한 인간의 소원을 첨부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축도 후 목사가 강단에서 내려 올 때 담당 장로는 전에 등단할 때 악수한 자리로 나아가 목사가 내려오면 악수를 하고 목사 앞서 인도하여 나가고 뒤에 당 회원들이 뒤 따라 나간다. 회중은 당회원들이 다 나가기까지 서 있고, 당회원들이 다 나간 후에 반주자가 예배 시작에서 전주를 했던 것 같이 후주를 하는 중에 회중은 나가게 된다. 회중이 모두 교회당 밖에 나가기까지 반주자는 예배 시작에서 전주를 했던 것 같이 후주를 계속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배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
1) 사도신경 고백
개혁교회에서는 두 번째 예배인 오후예배 시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를 하게 되어 있다. 이 예배 시에는 십계명을 선언하지 않고 대신에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2) 광고문제
광고는 가능한 한 주보에 싣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문맹이 별로 없는 오늘 날에는 더욱 주보의 광고로 만족해야 한다. 교회에 공적으로 꼭 필요한 광고는 자비사역을 위한 헌금 바로 앞에 하는 것이 좋다.
3) 개혁교회의 교리문답 설교
개혁교회의 두 번째 예배에서의 교리문답 설교는 그 역사가 개혁교회만큼 오래 되었다. 교리문답은 네 기본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사도신경, 성례, 언약의 10계명,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다. 마르틴 루터가 1533년에 윗텐베르그에서 그가 초안한 교리문답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칼빈의 뜻을 같이 했던 Bullinger(블링거)가 이미 1532년에 교리문답설교를 시작했다. 런던에서 A. Lasco가 1550년에 제네바 교리문답설교를 시작했고, 1563년에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을 수용하여 제네바 교리문답을 대치하게 되었다. 화란에서는 Peter Gabriel 목사가 1566년에 오후예배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설교를 시작하게 되어, 곧 많은 목사들이 뒤 따르게 되었다. 1618-19년 도르트(Dordrcht)총회는 교회법질서의 예배 항목에 “당회는 규칙으로 매주일(오후예배시에) 한번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에 요약된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가 선포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넣음으로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다(당시는 68조에 있었음). 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52주로 나뉘어 있어 가능한 한 매주 이를 설교하게 되어 있다.
교리문답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서 ‘완전한 구원의 교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신자들이 신앙, 칭의, 예정, 선택, 섭리, 교회에 대한 교리에 대하여 설명을 못하는 것을 본다. 교리를 알게 될 때 이단의 오류를 발견하고 물리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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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이 글은 허순길 박사의 글을 조금 수정하였다.
39) (L)은 여호와 편, (C)는 회중 편을 가리킨다.
*강의자 : 손재호 교수
*본글은 2024년 8월 16-17일에 부천개혁성경신학교 2024년 봄학기 집중강의 겸 부천개혁교회 제직교육을 '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란 주제로 실시한 것입니다.